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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less Stuf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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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mitted By liqr88
Words 122296
Pages 490
#1

굵지 않은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밤 길, 두 남자가 큰 나무 아래에 비를 피해 서있었다.

하지만 잎이 반쯤 저버린 가을나무였기에 비를 피하는 데는 별 효력은 없었다. 이미 마을에서

상당히 떨어져 돌아가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나무 아래에 있던 두 남자 중 한명은 사대부가의

양반인 듯 연청색 도포에 커다란 갓을 쓰고 있었고 다른 한 남자는 양반을 호위하는 무사인 듯

상투를 틀지 않은 긴 머리를 허리까지 드리우고, 등과 허리에 두개의 긴 환도(還刀)를 차고

있었다. 양반이 하늘을 보며 조용하게 말했다.

“운아. 쉬이 그칠 비가 아닌 듯 싶구나. 보슬비라 가벼이 여겼더니, 아무래도 내 고집으로

또 너를 곤혹케 만들었나 보구나.”

무사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주위의 모든 움직임을 읽고 있었다.

먼 곳을 보던 양반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반갑게 말했다.

“아! 저기 산자락에 집이 한 채 보인다. 잠시 비를 피해 가자꾸나.”

양반은 말을 끝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언가에 홀린 듯 빠른 걸음으로 산자락을 오르기

시작했다. 무사는 미처 만류하지 못하고 주위를 경계하며 뒤따랐다. 가까이 다가가 선 집은

허리 높이의 돌담이 둘러진 작고 깔끔한 초가집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대문만큼은 높고

대문처마까지 있었다. 양반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운아. 주인을 청하거라.”

하지만 무사는 말 대신 눈을 들어 대문처마 위로 솟은 솟대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무사의 눈길을 따라 양반도 눈길을 두었다.

“저것이 무엇이냐.”

“솟대이옵니다. 여긴 무당이 사는 집입니다. 드시면 아니 되옵니다.”

무사의 차분하지만 강경한 목소리에 양반은 더 이상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사는 피곤하고 추운 기색이 만연한 양반의 모습을 어찌 할 수 없어 더욱 고개만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안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져 무사의 오른 손은 재빨리 왼쪽 허리에

찬 환도의 칼자루를 잡았다. 대문 안쪽에서 터덜거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바로

대문 앞에서 멈췄다. 무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대문 안쪽에 멈춰 선 자에게서 검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무사의 목소리가 대문을 가르고 들어갔다.

“누구냐!”

“어이가 없습니다. 객이 누구냐고 묻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 물음은 이쪽의 것이

아닙니까?”

퉁명스러운 여인의 목소리였다. 무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인이 어찌 검을 지녔는가?”

“놀랍습니다. 어찌 보지도 않고 제가 검을 가진 것을 아십니까? 역시······. 앗! 이런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흠! 우리 아가씨가 안으로 드시라는 말씀을 올리라고 하였습니다.”

“어찌 검을 지녔는가!”

다시 다잡아 묻는 무사에게 여인이 투박한 답을 던졌다.

“이런 외진 곳에 여인 둘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검이라도 지니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별 시덥잖은 질문을 하십니다. 그나저나 안 들어오실 겁니까?”

양반이 무사를 힐끔 보고 말했다.

“잠시 이러고 있다가 갈 것이니 개념치 마라.”

들어가고 싶었지만 버티고 선 무사 때문에 우기지 못하는 마음이 목소리에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마치 당연히 나올 말이었다는 듯이 안에서 준비되어 있던 말을 던졌다.

“우리 아가씨가 객께서 천한 집이라 드시지 않을 것이니 이렇게 여쭈라고 하였습니다.

천한 집 방안의 따뜻한 아랫목과 천한 집 대문처마 아래가 무에 그리 다른지.”

양반의 얼굴에 호기심 어린 미소가 일었다. 이미 머리 위에 대문처마를 이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아가씨란 여인이 여쭈라고 한 말은 더 이상 집 안으로 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양반이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처마 아래보다야 아랫목이 더 상석임이 분명하니 그럼 실례를 하겠노라.”

양반이 대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성큼 들어서자 무사도 어쩔 수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말하던 여종은 이미 앞서서 뒷모습을 보이며 좁은 마당을 지나고 있었다. 여종은 열린

방문을 가리키며 안으로 들어가란 몸짓을 한 뒤 어디론가 가버렸다. 두 나그네는 여종이

들어가라고 한 방 안에 들어갔다. 그 방 안에는 은은한 난향이 가득 차 있었고 아랫목에는

소박한 소반 위에 간단한 술과 안주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직 겨울철도 아닌데

화로가 따뜻하게 나그네를 맞이하고 있었다. 양반이 아랫목을 차지하고 앉고 그 사선으로

무사가 무릎 꿇고 앉았다. 양반이 화로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마치 우리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구나. 그런데 보통 무당의 방이 이러한가?”

무사도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흔한 방울하나 없는 것이 일반 밧집(민가)과 다른 점이 없사옵니다.

무당의 방이 아닌 듯하옵니다.”

“음······, 여긴 여인의 방이라기 보다는 청렴한 선비의 방인 듯하구나. 방안 가득 차 있는 난향이

그러하거니와 책들 또한 그러하다.”

양반은 손을 뻗어 책장에 빼곡하게 꽂힌 책들 중에 한 권을 꺼내 보았다. <오경천경록>이란

책이었다. 또 그 아래에는 <대학혹문>이 보였다. 양반이 의아해 하며 말했다.

“분명 여인 둘만 사는 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 이런 책들이 있단 말인가.

바깥양반이 쓰던 방인가?”

양반은 인기척이 들리자 책을 얼른 제자리에 놓았다. 네 폭 방문이 가로막힌 건넛방으로

아가씨란 여인이 들어 온 듯 했다. 이윽고 가운데 두 폭의 문이 양쪽으로 소리도 없이 조용히

갈라졌다. 조심스럽게 사이방문이 열리긴 했지만 방과 방 사이엔 발 하나가 가로 막혀 여전히

건넛방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양쪽 방에 등잔불이 켜져 있었지만 어둠이 등잔불빛을 삼키고

있었기에 별 효력은 없었다. 보이는 거라고는 우아하고 기품 있는 여인의 자태뿐이었다.

“소녀, 인사 여쭙습니다.”

짧은 말을 흘리는 목소리는 천상의 것인 양 마음속을 울리며 방안 가득 난향과 더불어 퍼졌다가

사라졌다. 언뜻 보이는 머리 모양새가 길게 댕기를 드린 것으로 보아 처녀임이 분명했다.

조금 전의 여종도 댕기머리였기에 양반은 방안의 광경이 더욱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발 너머의 여인이 두 손으로 이마를 받히고 큰절을 올렸다. 천천히 절을 하는 여인의 자태가

범상치 않아 두 나그네는 넋을 잃고 마치 춤사위를 보듯 절을 받았다. 하지만 여인은 일배로

그치지 않고 두 번째 절을 올렸다. 이배는 자고로 죽은 자에게 올리는 절이기에 두 나그네의

인상이 찌푸려 질 수밖에 없었다. 양반이 무례하다고 외치려 하자 여인의 삼배가 이어졌다.

삼배란 부처에게 올리는 절이라 어리둥절해지려던 순간 여인이 네 번째의 절을 올렸다.

양반이 깜짝 놀람과 동시에 무사의 오른손은 재빨리 왼쪽 허리에 찬 환도의 손잡이를 잡아

반쯤 빼내었다. 사배란 천자, 즉 국왕에게 올리는 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객으로 찾아든

양반은 실제 현재 조선의 23살 젊은 국왕, 이 훤이었다. 절을 끝낸 여인은 고개를 바닥에 붙이고

몸을 최대한 낮추었다. 훤이 놀란 감정을 숨기고 미소로 말했다.

“얼굴을 들어라.”

여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운 왼쪽 무릎 위에 두 손을 다소곳하게 포개 얹고는 그림처럼

앉았다. 성긴 발이었지만 여전히 여인의 얼굴은 육안으로 느낄 수가 없었다. 훤이 다시 물었다.

“어이하여 사배를 하였느냐. 수를 셀 줄 모르는 것이냐?”

“태양에 대한 예를 갖추었을 뿐이옵니다.”

사람의 마음을 요동치게 할 만큼 아름다운 음성이었다. 훤이 그 음성에 말을 이었다.

“태양이라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아녀자에게 태양은 지아비를 일컫는 것이 아니더냐?”

“아녀자도 조선의 백성이옵니다.”

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여인은 자신이 왕이란 것을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번에는 여인이 말했다.

“가진 것이 없는 세간이라 초라하디 초라한 소반이옵니다. 하지만 소녀의 정성으로 준비한

것이니 한 모금이라도 음하여 주시옵소서.”

훤은 여인의 얼굴이 궁금했다. 음성과 자태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그 궁금함이 더해졌다.

“얼굴을 보여 예를 올려라. 얼굴도 모르는 자가 올린 술을 어찌 마시겠느냐.”

“엷게 내리는 비라 할지라도 성체(聖體, 왕의 몸)의 온기를 앗아 가나이다.

온주(溫酒)이오니 부디······.”

“운아. 발을 치워라.”

운의 칼날이 눈 깜짝 할 사이에 방안을 크게 횡회하고 허리의 칼집으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방과 방을 가로막고 있던 발이 싹둑 잘려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운의 칼날에 베어진 것은

비단 발 하나만은 아니었다. 하늘의 먹구름도 칼날에 두 동강이 났는지 순간 비를 흩뿌리던

먹구름이 물러가고 달빛을 방안 가득 불러들였다. 훤은 눈앞으로 칼날이 지나갔음에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 앉아있는 여인에게도 놀랐지만 더욱더 놀란 것은 여인의 아름다운

용모였다. 훤은 놀라움을 역정으로 대신했다.

“아무리 미천한 객이라고 하더라도 집 안으로 들였으면 안면을 보여 인사하는 것이 주인의

도리이거늘, 어째서 명을 받잡지 아니한 것이냐.”

“소녀 비록 세상이 정한 신분이란 굴레에 얽매인 비천하디 비천한 몸이오나, 또한 하늘이

정해준 여인네이옵니다. 하여 주인 된 도리는 생각치 아니 하고 여인 된 도리만

생각하였사옵니다. 내외법을 따른 소녀의 어리석음을 탓하시옵소서.”

“사대부가가 아님에도 내외법을 따르느냐?”

“비천한 자는 내외법을 따르면 안 된다는 법 또한 여지껏 들어본 적이 없었사옵니다.”

훤은 빙그레 웃으며 술병을 잡았다. 이제까지 왕 앞에서 이렇게 공손한 듯 당당하게 의사를

밝히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손에 잡힌 술병이 따뜻했다. 훤은 소반 위에 놓여 진 두 개의 잔에

각각 술을 부었다. 한 잔을 운에게 밀었으나 운은 술잔에 눈을 두지 않고 방바닥만 보고 있었다.

현재 왕을 호위 중이니 입에 술을 댈 수 없다는 뜻이었다. 비에 젖은 것은 운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훤은 걱정되어 한 번 더 잔을 밀어보았다. 하지만 운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여인이 말했다.

“참으로 불충한 분이십니다. 소녀가 어떤 자인지도 모르는데 그 술에 뭐가 들었는지 알고

기미(氣味)를 마다하시옵니까? 검으로만 운검하실(운검하다:왕을 경호하다) 것이옵니까?”

여인의 말은 또 다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는 수없이 운은 훤에게서 몸을 돌려

술 한 잔을 마셨다. 돌린 고개로 인해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향긋한 난향이 따뜻함과 더불어

온몸에 퍼졌다. 그리고 훤의 호탕한 웃음소리도 방안에 퍼졌다. 훤은 술잔을 입에 기울이자

코로 향긋하게 먼저 들어와 혀끝을 자극하는 향기에 놀랐다. 눈을 감고 그 향을 몇 번이나

음미하며 말했다.

“난향이 나는 술이라······.”

“난향이 아니옵고 울금초로 향을 낸 온주이옵니다. 울금향이 난향과 비슷하지요.”

“이 술은 울금향인지 모르겠으나 방안 가득 차 있는 것은 분명 선비의 향이다.(난향을 곧

선비의 향이라고 함) 그나저나 무슨 연유로 나에게 국왕의 사배를 올렸느냐.”

“어리석은 소녀가 먼저 여쭙겠습니다. 태양이 밤하늘에 걸린다면 그것은 태양이옵니까,

달이옵니까?”

훤은 답하지 않고 술을 마신 뒤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여인이 다소곳하게 말했다.

“태양은 그 어디에 있어도 태양이듯이 상감마마께옵서도 그러하옵니다. 그 광채에 어찌 눈이

부시지 않겠사옵니까.”

“마을 사람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던 것을 그대는 어찌 알아보느냐.”

여인의 대답이 없자 훤은 술잔을 손에 들고 그 따뜻함을 느끼며 혼자 중얼거렸다.

“준비되어 있는 술상과 준비되어 있는 화로······.귀신에 홀리고 있는 것인가······.”

여인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아름다운 음색으로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 아뢰면 되올련지요. 운검(雲劒, 조선시대 왕의 보검을 말하기도 하고, 동시에

조선시대에 있었던 왕의 최측근호위무사의 관직명이기도 함)과 별운검(別雲劒, 최측근호위무사

였던 운검의 환도)을 보고 알았노라고······.”

훤이 운을 쳐다보았다. 운은 훤이 아닌 여인을 보았다. 훤은 다시 여인을 보며 물었다.

“이리 외진 곳에 사는 여인이 어찌 운검과 별운검을 아느냐?”

“조금 전 환도를 지니고 있던 여인이 검을 조금 알고 있사온데, 칼집은 어피(魚皮)로써 싸고,

색은 주홍색(朱紅色)이며, 백은(白銀) 장식이 있으며, 홍도수아(紅?穗兒, 붉은 끈과 술)로써

드리우고, 띠는 가죽을 사용하고, 칼자루에 구름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일반 환도 길이보다

한 자(30cm)는 더 긴 것은 세상에 단하나 있는 운검이라 하였나이다.”

훤과 운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운검의 존재를 한양 내에서도 아닌 이런 지방의 여인이

알고 있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훤은 시치미를 한번 떼어보기로 했다.

“그런 것 정도면 얼마든지 가짜로 만들어 가지고 다닐 수가 있는 것 아니더냐.”

흔들림 없는 단아한 모습 그대로 여인이 답을 올렸다.

“백은 장식과 환도의 길이는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들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운검 길이의

환도는 패용할 수 없는 것 아니옵니까?”

“법을 어기는 자도 있지 않느냐.”

“하오나 절대 가짜로 흉내 내지 못하는 것이 있사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그 운검(검)을 등에 짊어진 자, 운검(관직명)나으리십니다.”

“그렇지. 나의 운 만큼은 어느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지. 하하하.”

훤은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술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호위하는

23살의 젊은 무사, 운검(雲劒). 김 제운(金題雲)! 조선팔도에서 헛으로 라도 검을 쥐어 본 자들

중에 운검 김 제운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따를 자가 없는 검술도 유명했지만 그 수려한 외양은

검술만큼이나 유명했다. 왕을 호위하는 운검의 자격 요건 중에 뛰어난 무예실력과 문과급제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적 수양, 병법의 지략, 6척(180cm)이 넘는 키, 단려(端麗, 단정하고

아름다움)한 외모. 이 모든 자격 요건을 갖춘 사내는 김 제운만이 유일했다. 단하나 서얼 출신

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그런 운검 김 제운 못지않게 잘생긴 훤이 다시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참으로 대단한 눈을 가졌구나. 이 거리와 이 어둠 속에 그리도 자세히 운검의 칼자루 구름문양

까지 볼 수 있다니. 아니, 보기도 전에 알다니. 역시 귀신에 홀리고 있는 것인가······.”

한참동안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들여다보고 있던 훤은 눈동자만 들어 여인을 차근차근

쳐다보았다. 왕의 시선이 느껴짐에도 여인은 아무 미동이 없었다.

“이리 가까이 다가와 앉으라. 건넛방에 앉아 있으니 치마 아래로 꼬리 아홉 개를 숨기고 있는 지

알 수 없지 않느냐.”

잠시 망설이던 여인은 살며시 일어나 문지방 너머로 발을 들였다. 치마 아래로 살짝 모습을

보이고 금새 숨어버린 하얀 버선발이 여인의 젖가슴마냥 봉긋하여 훤은 애써 술잔을 비우는

것으로 눈길을 접었다. 여인은 문지방만을 넘어온 거리에 다시금 다소곳하게 자리 잡고 앉았다.

다가온 거리만큼 난향도 짙어졌고, 달빛도 짙어졌으며, 또한 여인의 미색도 짙어졌다.

달빛으로 길쌈을 한 소복을 입었는지 옷에서 조차 하얀 달빛을 품어내고 있었다. 좁은 방이라

가까이에 마주하고 앉은 셈이지만 훤의 마음엔 그 거리조차 지척으로 느껴졌다. 훤의 마음을

대신해 등잔불빛이 파르르 떨렸다.

“참으로 요기스러운 미색이구나. 이것은 어둠의 조화냐, 달빛의 조화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 생각하는 어리석은 눈의 조화이옵니다.”

여인의 말에서 알 수없는 원망이 느껴졌다. 훤이 다시 사람 같지 않은 그 미색에 의문을 던졌다.

“귀신이냐······, 사람이냐······?”

“뭇사람들은 소녀를 일컬어 사람이 아니라 하더이다.”

여인의 말은 바람 한 점 섞임이 없이 단정했다. 그래서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말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하면 정녕 귀신이란 말이더냐.”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한 맺힌 넋이 바로 소녀이옵니다.”

“나를 농락함이더냐. 세상천지에 그림자가 있는 귀신도 있다더냐.”

“거짓을 아뢰지는 않나이다. 노비보다 비천한 무녀(巫女)를 어느 누가 사람이라 한다더이까.

하여 감히 사람이라 답 올리지 못하옵니다.”

자신을 스스로 사람이 아니라 말하는 그 말에도 감정의 느낌은 실리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가슴 한구석이 무너질 것 같은 야릇한 감정을 목소리에 실은 건 훤이었다.

“무녀······. 무녀였구나. 그래서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나보구나.”

“아니옵니다. 소녀는 비록 무녀이나 예지하는 신력도, 사람을 읽는 신력도 없사옵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무녀이옵니다.”

“그런 무녀도 있느냐?”

“송구스럽게도 그러하옵니다. 단지 이곳에 이리 사는 것만이 소녀가 할 수 있는 신력의

전부이옵니다.”

“도통 알 수 없는 말만 하는구나. 운아, 너는 들은 적 있느냐?”

운은 여인을 힐끔 본 후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도 들은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훤이 의아해 하며 말했다.

“정녕 무녀가 맞단 말이냐?”

“끊을 수없는 질긴 목숨으로 이렇게 무녀로 살고 있사옵니다. 무녀로 아니 살 수 없기에,·

·····이리 사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여인에게서 훤이 오히려 알 수없는 서글픔을 느꼈다. 그녀에게 다가가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대 이름이 무엇이냐.”

“아무개라 하옵니다.”

“이름이 무어냐고 물었느니.”

“지엄한 법도가 있사옵니다. 상감마마의 안전에 어느 것인들 미물이 아니오니까.

아무개라고만 아뢰올 수 있게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왕 앞에서는 신분이 낮은 자는 이름을 말하면 안 된다는 법도를 빌려 답하지 않는 여인에게

훤은 답답하여 음성을 높였다.

“어허! 고약한 여인이로고. 어찌하여 여러 번 묻게 하는 것이냐. 다시 한 번 묻겠다. 이름이

무엇이냐. 사람이면 성과 이름이 있을 것이다. 그대가 정녕 귀신이 아니라면 이름을 고하라.”

여인은 달빛에 눈이 시린 듯, 슬픔에 눈이 시린 듯 고운 눈동자에 짙푸른 설움을 담더니

목소리만은 더 없이 평온하게 말했다.

“본디 성이라 하오면 아비가 있는 자가 받는 것이옵고, 이름이라 하오면 어미가 있는 자가

받는 것이옵니다. 소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사와 그 어느 것도 받지 못하였나이다.”

“이름이 없더란 말이냐?”

“소녀······, 이름 없이 살았나이다.”

“어허! 답답하다. 나를 또 농락하는 것이냐?”

“소녀, 거짓을 아뢰지는 않는다고 분명 하였사옵니다.”

훤이 갑갑한 심정을 술 한 잔으로 마시고 다시 물었다.

“무녀에겐 반드시 신모(神母)가 있다 들었다. 그대의 신모는 그대를 무어라고 이름하였느냐?”

“소녀의 신모는 소녀를 단 한 번도 이름하지 않았나이다.”

“어찌 이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이름하여 묶이는 인연이 무섭다하여 소녀에게 이름하지 아니 하였나이다.”

“그대의 나이는 그럼 어찌되었느냐?”

“햇수를 헤아려 본적이 없었으매, 그 또한 알지 못하옵니다.”

“이곳에서 산지는 오래되었느냐?”

“기나긴 세월, 이곳에 갇혀 살았사옵니다. 참으로 오랫동안······.”

“하지만 그대의 말은 이 고을에서 들은 방언이 아니다. 한양의 말이니 필시 이곳 사람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는 어디의 누구였느냐?”

여인은 왕에게 아뢸 수 없는 슬픔을 달님에게 아뢰듯 긴 눈길을 들어 창밖의 둥그런 달을

보았다. 여전히 목소리는 담담히 답했다.

“그것은 이미 전생이 되어버렸을 만큼의 먼 이야기 인지라 소녀, 기억치 못하옵니다.”

훤이 화를 담아 술잔을 소반 위에 사정도 없이 쾅하고 내려놓았다.

“그리도 많은 질문을 하였는데 어찌 내가 들은 답은 하나도 없는 것이냐!”

“많은 답을 하였사온데, 상감마마께옵선 아무 것도 수렴치 아니하였사옵니다.”

“대체 무엇을 답하였느냐! 이름을 답하였느냐, 나이를 답하였느냐? 어떤 무녀인지도 답하지

않았는데! 무녀이기는 한 것이냐?”

“답을 답이 아니라 하오시면 소녀가 거짓을 아뢰어 드리리까? 거짓을 아뢰면 답을 들었다

화락(和樂)해 주시겠사옵니까?”

훤은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술잔만 입에 기울였다. 한동안 세 사람 사이에는 어둠만이 켜켜이

자리했다. 훤은 그 어둠의 틈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입을 열어 명령했다.

“그 자리도 멀다. 가까이 다가와 앉으라.”

여인이 한 두어 걸음 당겨 앉자 훤이 다시 말했다.

“그 자리도 멀다. 더 가까이 다가와 앉으라.”

결국 여인은 훤이 손을 뻗히면 닿을 거리까지 와서야 자리 잡고 앉을 수 있게 되었다.

훤의 마음에는 그 거리도 지척이었지만 더 이상 당겨 앉을 공간이 없었기에 더 가까이 오란

명령을 하지 못했다. 훤의 눈앞에 백옥보다 하얀 여인의 얼굴이 있었다. 짙고 긴 속눈썹이

있었고 그 아래 깊이 있는 새까만 눈동자가 있었다. 그리고 운의 눈앞에는 여인의 그늘 진

슬픈 옆얼굴이 있었다. 사람의 앞모습은 거짓을 말해도 옆모습은 마음의 표정을 담는다고

했기에, 운에게 보이는 슬픈 모습은 분명 마음의 표정이었다. 운은 여인의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훤이 긴 숨을 삼키며 말했다.

“그대에게로 흐르는 내 마음이 보이느냐?”

“달여울에 어른거려 보이지 않사옵니다.”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아니 보겠단 말이냐? ·······그대를 안으면 아니 되는 것이냐?”

“남겨두고 가시는 걸음이 무거우실까 저어되어 옷고름을 여미겠나이다.”

“남겨두고 가지 않을 것이다. 너를 데려 갈 것이다. 그럼 안게 해줄 것이냐?”

“소녀는 이곳을 떠나면 아니 되는 몸입니다. 정박령(碇泊靈, 한 곳에만 머무르며 그 곳을

떠날 수 없는 귀신)의 처지이옵니다.”

“주상인 내가 널 데려간다고 했다. 떠날 수 없어도 나를 따르라.”

“하늘 아래엔 섞일 수 있는 것이 있고, 섞일 수 없는 것이 있고, 섞이면 안 되는 것이 있사옵니다.

주상과 무녀는 너무나 멀리 있기에 섞이면 안 되는 것이옵니다.”

훤이 거부하는 여인을 질책하듯 소리를 높였다.

“섞일 수 없는 이유를 말하라! 내가 되게 하겠다!”

“하늘은 존엄하고 땅은 가까우니 건과 곤이 생기고, 가깝고 존엄한 것이 위아래로 배열되니

귀하고 천함이 생긴다고 하였사옵니다. 그 귀함은 귀함으로 어우러지고 천함은 천함으로

어우러져야 천지가 평온하다 하였사옵니다.”(<주역-계사전>中)

“나도 <주역>을 읽었지만 그리 배우지 않았느니라. 하늘이 곧 건이라 존엄하여 귀한 것과,

땅이 곧 곤이라 단지 가깝다고 하여 천한 것이 아니라 친근히 여겨야 하는 것이니 땅이 어찌

천한 것이리라 배웠다. 귀하고 친근함이 서로 변화를 주고받음으로 자연의 질서가 돌아간다고

배웠느니라. 그러니 백성도 친근하고 존엄하다 배웠느니라.”

“하늘이 존귀하고 땅이 비천한 것은 영특한 자연의 계급이라 하였사옵니다. 봄과 여름이 먼저

오고 가을과 겨울이 뒤에 오는 것이 사계절의 순서인 것처럼, 대저 하늘과 땅 모두 가장 신령한

것임에도 존귀하고 비천함, 앞서고 뒤짐의 서열이 있는데, 하물며 인간이야 말해 무엇 하리라

하였사옵니다.”(<장자-외편>中)

“나의 스승은 내게 <장자>를 그리 가르치지 않았다. 앞서는 것이 군주고 뒤서는 것이 백성이나

앞서는 군주가 본보기로 모범을 보여야 뒤따른 백성이 더불어 어질어진다 배웠느니라.

내가 어질어지면 백성도 어질어지고 내가 존귀해지면 백성도 존귀해지니 그것이 서열이라

배웠느니라. 내가 그대를 안는다 하여 내가 비천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도 나와 더불어

존귀해질 것이니라. 그것이 도의 질서라 알고 있느니라.”

“참된 도를 말하면서 그 질서를 말하지 않으면 도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저를 품지 않으시는

것이 신분의 질서이며 백성의 모범이시옵니다. 그것이 참된 도이십니다. 소녀는 비천한

몸이옵니다. 상감마마와 교합해선 안 되는 신기를 담은 그릇이옵니다. 이름조차 없는

천것이옵니다.”

여인이 담담히 또박또박 아뢰는 말에 훤은 더 애가 타서 말했다.

“나 또한 이름 없기는 마찬가지다. 태어나자마자 원자로 책봉 되어 이름을 가져선 안 되었고,

세자가 됨과 동시에 훤(暄)이란 휘(諱, 왕의 이름)가 내려지자 그 순간부터 어느 누구도

그 이름을 입에 담아선 안 되는 것이 되었다. 나에겐 훤이라 불러주는 이도, 일성(日成)대군이라

불러주는 이도 없이 단지 세자로만 불리었다. 왕이 된 지금은 훤이란 내 이름은 글로도 써서는

안 되는 이름이 되었다. 이러하니 그대와 나의 처지가 이름이 없기는 매한가지가 아니더냐.”

“같지 않사옵니다. 천지가 다른 것 보다 더 다르옵니다.”

흔들림 없는 돌 같은 느낌이었다. 더 이상 이을 말이 없었던 훤은 한참을 조용히 생각하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그렇다! 그대의 신모가 그대와 묶이는 인연이 무섭다하여 이름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대에게

이름을 명하면 그대와의 인연이 묶인단 말이렷다. 그러하면 내가 그대에게 이름을 명하겠노라.”

이번만큼은 여인도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세상 인연이 어찌 좋은 인연만 있다 하더이까. 찰나에 불과한 인연에 이름을 명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심중을 거두어 주시오소서.”

훤은 여인의 말은 안 듣고 혼자만의 생각에 골몰했다.

“무어라 이름하는 것이 좋을까·······.”

“이어져선 아니 되는 인연이옵니다. 찰나의 인연이어야 하옵니다.”

훤은 간곡한 여인의 말을 외면하며 창밖의 달을 보았다. 이번엔 훤이 돌이 되기로 한 모양인지

흔들림 없이 여인의 이름을 명했다.

“그대가 달을 닮았느냐, 달이 그대를 닮았느냐······. 내 그대를 월(月)이라 이르겠노라.”

훤이 이름을 명한 순간 여인은 월이 되었다. 월이 되어버린 여인의 깊이 있는 눈동자를 떨리는

눈꺼풀이 덮었다. 감정을 담은 눈동자가 가려졌기에 그 눈동자에 기쁨을 담았는지 슬픔을

담았는지, 아니면 두려움을 담았는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은 훤은

그것만으로도 월과의 인연이 이어진듯하여 안심이 되었다. 훤은 손을 뻗어 월의 얼굴을

쓰다듬고자 했다. 하지만 그녀의 복사꽃 같은 볼을 차마 쓰다듬지 못하고 손을 거두었다.

왠지 손을 대면 그 즉시 그녀의 몸이 재로 변해 폭삭 내려앉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단정한 손목 한번 취하지 못하고 술잔만 잡았다.

“오늘만 날이겠느냐. 내 그대의 이름을 알고,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그대의 신세를 아는데

다음도 있지 않겠느냐. 세상의 만물은 온 곳이 있고 갈 곳이 있는데 그대와 같은 사람이

어디서 어떻게 온 것인지······.”

훤은 술잔을 비우고 월의 앞으로 그 술잔을 내밀어 술을 채우며 다시 말했다.

“존재하는 만물은 오고 또 와도 다 오지 못하니, 다 왔는가 하고 보면 또다시 오네, 오고 또

오는 것은 시작 없는 데로부터 오는 것, 묻노니 그대는 처음에 어디로부터 왔는가.”

(화담 서경덕의 <유물> 1연)

훤이 읊조린 시는 월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묻는 듯 하지만 이것은 월에게만 묻는 것이

아니었다. 훤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알 수없는 감정에 대한 근원을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오늘밤의 이 만남을 시작으로 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했다.

월은 훤이 채워준 술잔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훤의 마음을 보지 않겠다는 의지인지 눈을 감은

그 상태로 조용히 답하듯 말했다.

“존재하는 만물은 돌아가고 또 돌아가도 다 돌아가지 못하니, 다 돌아갔는가 하고 보면 아직

다 돌아가지 않았네,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 끝까지 가도 돌아감은 끝나지 않는 것,

묻노니 그대는 어디로 돌아갈 건가.”(화담 서경덕의 <유물> 2연)

훤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시가 의미하는 바는 알겠는데 월이 의미하는 바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훤은 월이 건드리지도 않은 술잔을 들어 자기 입속에 넣고는 물었다.

“나에게 무엇을 말하였느냐.”

“뒷부분을 채워드리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밤이 인연의 마지막이니

다음을 기약하지 마시라는 청이었습니다.”

“화담의 시를 아는 무녀가 있다니······.”

“화담의 시를 아옵시는 임금도 계시더이까.”

훤은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화담의 글은 어렵다 하여 쉽게 읽을 수 없는 글이긴 하지만 정학이

아니라 사학이라 하여 왕이 배워선 안 되는 학문이기도 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여인이

신기했던 것이다. 월이 다시 말했다.

“이곳은 여(廬, 나그네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곳)일 뿐이옵니다. 그러니 이제 가시오소서.

비는 그치었고, 온기가 채워지매 술병은 비워졌으니 이제 행궁(行宮, 왕의 별장)으로

돌아가셔야 하옵니다.”

훤은 갑자기 밀어내는 월이 서운했다. 월에게 서운했다기보다는 헤어지기 싫은 마음에 이리

마주한 시간이 서운했다.

“같이 가자. 날이 밝거든 나와 같이 가자.”

“지금 가지 않으시오면 운검나으리께 어떤 화가 미칠 것인지 여쭈고 싶사옵니다.”

월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몰래 행궁을 빠져나와 마을에 미행을 간 것이었기에 이일이

잘못되면 훤에게 책임이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책임이 운에게 날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공격은 언제나처럼 운의 신분인 서출에 맞춰져 곤혹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비와 달이 함께 있는 밤이옵니다. 채워진 온기를 빼앗기지 않게 조심하여 가시오소서.”

“월아! 내 너를 반드시 다시 찾을 것이다. 기다려다오.”

“오늘밤이 인연의 마지막이라 아뢰었사옵니다.”

“난 분명 우리 인연의 시작이라 하였다. 그러니 내 그냥 갈 순 없다. 그대에게 정표를 받아가고

싶느니.”

월은 정표라는 말에 감고 있던 눈을 떠, 알 수 없는 서글픈 미소를 보였다. 훤은 처음으로 미소를

보인 월이 반가워 몸을 바짝 다가가 앉았다. 월이 변함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소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상감마마께옵서 이름으로 하사하신 저 달이

전부이옵니다.”

훤은 고개를 들어 휘영청 밝아진 달을 보며 미소로 말했다.

“그러면 정표로 그대의 전부인 저 하늘의 달을 받아가겠노라.”

월이 힘들게 끊어내는 인연을 훤은 끊임없이 이어대었다. 월이 간곡하게 말했다.

“아니 되옵니다. 부디······, 거두어주시옵소서.”

“나에겐 아니 될 것이 없다! 내 그대에게 받아간 저 달에, 그대에 대한 나의 마음을

묶어두겠노라.”

“······하오면 소녀도 정표를 청해도 되올련지요.”

훤은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조급하게 말했다.

“무엇이든 말하라. 다 들어주겠노라.”

“원컨대 오늘밤의 짧은 기억을 베어서 주시옵소서.”

“베어서 두고 가면······, 그대는 나의 기억까지 품겠다는 말이더냐.”

훤은 오늘밤 일을 잊으라 말하는 월이 원망스러웠다. 아주 잠시 마주하고 앉았을 뿐인데 감정의

길이는 길어져 감이 더 원망스러웠다. 재빨리 자리를 옮겨 다니는 달도 원망스러웠다.

“알 수가 없구나. 정말 알 수가 없구나. 어찌 내 마음이 이리도······.”

“가시오소서.”

“야속한 여인이구나. 무정한 여인이야. 들어오라 하여 들어왔거늘 이젠 가지 않겠다 하는 데

밀어내는 심보는 무엇이냐. 내 오늘은 이리 가나 이 인연을 이어갈 것이다.”

“아무것도 없었던 인연이었사옵니다.”

“몸을 섞은 인연만이 인연이던가, 마음을 섞은 우리의 인연도 인연이니라. 그대 입으로 내게

거짓을 아뢰진 않는다 말하였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 간에 아무것도 섞이지 않았다 하진 못할

것이다. 그대를 지금 취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그대를 귀이 여기기 때문이니 앞으로 비천하다

입에 담지 말라. 글을 아는 이는 신분이 천해도 그 인품까지 천하지 않다 하였다.

그러니 이대로 달만 품고 가겠노라.”

아무 말도 답하지 않는 월을 두고 훤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침묵하며 고개 숙이고 있던

운이 훤보다 한발 늦게 일어섰다. 월은 돌로 빚은 돌부처 마냥 아무 미동도 없이 그대로

앉아만 있었다. 훤과 운이 대문을 나서자 헐레벌떡 뛰어 나온 것은 부엌에 있던 여종이었다.

떠나가는 그들을 지켜보던 여종은 황망한 표정으로 발만 동동 굴렀다. 산자락을 무거운

걸음으로 내려온 훤이 달만 보고 걸음하며 운에게 말했다.

“운아. 마음이 아려 차마 돌아보지 못하겠구나. 대신 봐다오. 혹여 월이 나를 보고 있느냐?”

운은 왕의 명령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마음에 의해서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돌아보았다.

멀리 낮은 담 안으로 여종이 이쪽을 원망스럽게 보고 있었다.

“보고 있지 않사옵니다.”

훤은 조용히 탄식하듯 말했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내 마음이 덜 아리지. 운아, 달빛이 이리도 눈부신 줄 예전엔 미처

몰랐구나.”

방 안에 여전히 돌부처마냥 앉아 있던 월이 여종에게 물었다.

“설아. 가시는 것이 보이느냐?”

여종인 설이 울분 섞인 말을 했다.

“네! 가셨습니다. 가시고야 말았습니다!”

“혹여 이쪽을 한번쯤은 돌아봐 주시더냐?”

“아뇨! 단 한 번도 돌아봐 주시지 않고 그대로 가버리셨습니다!”

월은 조용히 탄식하듯 말했다.

“그래, 그러셔야지. 그래야 내 마음이 덜 서글프지. 설아, 달빛이 이리도 눈부신 줄 예전엔 미처

몰랐구나.”

“왜 배웅하시지 조차 않으십니까! 왜 그렇게 앉아만 있으시는 겁니까!”

월은 은은한 미소로 조용히 말했다.

“그분을 이쪽으로 인도한 촉촉한 보슬비가 풀 위에 쉬다가, 땅 위에 쉬다가, 바람결에 묻혀

쉬다가 그분의 도포자락이 스칠 때마다 어복(왕의 옷)에 스며들고, 어혜(왕의 신발)에 스며들고,

어립(왕의 갓)에 스며들어 행궁까지 내 마음을 실어 배웅할 것이니······.”

같은 시간, 한양 경복궁 내의 소격서(昭格署, 조선시대 제천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

예조에 속해 있었음.) 뜰에 혜각도사(도사:소격서의 정 4품의 관리. 국가자격증이 있는 도인)가

하늘을 보고 있었다. 비의 내음을 품은 바람이 눈물 섞인 바람인양 하늘에 떠있는 달로 솟구쳐

오르자 참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맺힌 한이 드디어 울음 하였구나.”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본 도류(아직 도사에 이르지 못한 공부하는 생도. 소격서의 종 8품의 잡직)

가 머리를 숙여 물었다.

“도사님. 어이하여 슬픔을 담으십니까?”

“하늘도 보인 슬픔이다. 내가 어찌 하늘을 닮지 않을 수 있겠느냐.”

“소인은 아직 수도가 부족하여 하늘을 읽을 줄 모릅니다. 하지만 불길한 것은 느낄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옵니까?”

혜각도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달만 쳐다보았다. 도류가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금 오던 길에 관상감청(觀象監, 조선시대 천문·측우, 지리·풍수, 역학·점복·음양술 등의 일을

관장하던 관청. 소격서와 같이 예조에 속해 있었음.)을 지나쳤사온데, 그곳의 발걸음도 바빠

보였습니다. 미천한 소인의 눈으로는 온양행궁에 행차해 계옵신 상감마마께 혹여 무슨······.”

혜각도사는 여전히 달만 쳐다보다가 고개를 떨구고는 슬프게 말했다.

“발걸음이 바쁜 곳이 비단 관상감뿐이겠느냐······.”

#2

보슬비가 내렸던 그 밤의 둥글었던 달이 차츰 부피를 줄여 그 모습을 감춘 밤, 운은 구군복을

갖춰 입고 입궐했다. 일반 구군복이 황색의 옷에 소매는 붉은 색 천을 붙인 협수(소매 폭이 좁은

두루마기 형태의 군복)위에 검은 색 전복을 입은 것 이라면, 운검의 구군복은 이와는 달랐다.

검은색 전복은 같지만 그 아래에 소매까지 검은 협수를 입고, 검을 휘두를 때 펄럭이지 않게

팔뚝부분을 붉은 색 끈으로 칭칭 둘러 묶고, 날렵한 허리엔 붉은색 대자띠를 묶어 늘어뜨렸다.

그리고 관례를 치렀음에도 검에 상투가 다치지 않게 상투를 틀지 않고 길게 허리까지

내려뜨리고는 이마에 붉은 천으로 두건을 묶어 뒤로 머리 길이까지 드리웠다.

전립(사또 모자)을 쓰지 않고 궐내에 들어오는 것은 법도가 아니었지만 운검에게만은 그것이

용인되었다. 그리고 등엔 붉은 색 긴 환도인 운검을 지고 왼손에는 검은색 긴 환도인 별운검을

들고 걸어가면, 그 등에는 용을 감싼 구름문양이 둥근 흉배 안에 붉은 색으로 수놓아져 있는

것이 날리는 윤기 있는 긴 머리카락 사이로 보였다. 이것이 운검의 표식이었다.

왕의 침전 영역으로 가는 길목인 향오문(嚮五門)에 이르자 선전관청(宣傳官廳, 침전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던 관청으로 왕의 경호, 긴급한 군사소집, 왕명 전달 등의 업무를 맡았던 곳)에서

나온 당상관이 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은 운검임과 동시에 선전관청 소속인 무겸선전관을

겸직하고 있었다. 보초를 서고 있던 갑사들이 운에게 인사를 하자 운은 당상관에게 인사를

올렸다. 당상관은 품속에서 밀지(密旨, 왕의 비밀 명령)를 꺼내 운에게 건넸다. 왕이 신시(申時,

오후 3시부터 5시) 경에 반드시 해야 되는 의례적인 일 중의 하나가 궁궐에서 야간경비를 서는

군사들과 장교에게 암호를 정해주는 일이었다. 그 암호는 매일 달랐다. 그리고 암호를 정하던

자리에 운검이 없었다면 운검에게 이렇게 밀지를 적어두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운은 밀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밀지에는 왕과 운만이 읽을 수 있는 선과 점으로만 된 암부호로 적혀있었다.

밀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오늘 밤의 군사 암호와 왕이 잠자게 될 곳이 적혀있었다. 운이 밀지를

로의 불속으로 넣어 태우자 당상관이 속삭이며 말을 걸어왔다.

“오랜 만에 입궐하였소. 안 보여도 분명 어명으로 자리를 비운 거겠지만 말이요.”

“쉬었습니다.”

“원, 사람도. 어찌 그리도 빡빡하시오. 나에게 까지 그리 입을 다물 필요는 없소이다. 그리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하하하. 요즘 군사 암호가 다 그런 식이오. 상감마마께옵서 뭔가가

심란하신가 보오.”

오늘의 군사 암호는 일고일(一孤日, 외로운 태양 하나)이었다. 운은 이 암호가 훤이 자신에게

호소하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운은 그동안 근 보름을 월을 찾아 백방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오늘도 못 찾았다는 보고를 하러 입궐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암호로 마음

무거운 운을 독촉하고 있었다. 당상관이 침묵하는 운을 두고 다시 말했다.

“그간 상감마마께옵서 자네를 보호하시느라 성후 미령하시었소. 그러게 왜 온양행궁까지

요양하러 가셔서는 미행을 빠져나가신 게요. 보좌를 잘못한 자네를 파직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폐하시느라 더 미령하시었단 말이오. 앞으론 안위를 위해서라도 조심 좀 하시오. 그대 안위를

돌보는 것이 곧 상감마마를 윗잡는 일임을 아시오.”

운이 간단히 고개만 숙여 인사 한 뒤 침전 쪽으로 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당상관이

중얼거렸다.

“아까우이. 서출만 아니면 사위 삼으면 딱 좋겠구먼. 반가의 여식과 서출은 혼인하면 안 된다는

법도가 엄연히 있으니.....쩝. 저렇게 잘났으니 궁녀들이 사흘이 멀다하고 상사병으로

죽어나간다는 말이 나돌지. 그럼 뭐하누, 빙운(氷雲, 얼음구름. 운의 별명)인 것을.

빙운을 가슴에 품은 여인들만 가엾지.....”

운은 밀지에 적어둔 곳으로 갔다. 왕이 잠자는 곳은 경호와 풍수, 역학의 목적으로 인해 매일

밤 달라졌다. 왕의 대침전인 강녕전, 동소침전인 연생전, 서소침전인 경성전 안에는 모두

합하면 수십 칸에 달하는 방들이 있었는데, 이 많은 방들 중에 왕이 그날 밤 잠들게 되는 곳을

아는 사람은 방을 정해주는 관상감의 교수 세 명과 당직을 서는 내시 몇 명, 궁녀 몇 명 그리고

운검뿐이었다. 나머지 궁녀들과 내시들은 왕이 어디에 잠든 지도 모르고 빈 방들을 지켰다.

그리고 궐내의 선전관들과 무예별감 군사들은 세 침전 전체를 경호했다. 운은 훤을 발견했다.

밀지에 적힌 곳이 아닌 엉뚱한 곳에 있었던 것이다. 훤은 창을 전부 활짝 열고 술을 마시고

있다가 운을 발견하자 미소를 던졌다. 운은 훤이 앉아 있는 창 쪽으로 갔다.

“어찌하여 이곳에 계시옵니까.”

“나의 달을 보고 싶어 이리 자리하였느니. 아무리 내 것이라 우겨도 하늘도 자기 것이라 우기니

내가 어찌 하늘을 이길 수 있겠느냐. 하늘이 심통 맞게도 나와 달을 나누기조차 싫었는지 저리

감추어 버리고 말았구나. 그나마 자네가 나에게 달을 가져다 줄 걸로만 믿었는데.....”

이 말은 월을 찾아내지 못함을 질책하는 것이었기에 운은 머리를 조아리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상선내시관은 훤이 월이 아니라 하늘의 달을 말하는 것인 줄로만 알고 운의 편을

들어준답시고 말했다.

“그 아무리 운검이라 하여도 그믐달을 보름달로 바꿀 수는 없사옵니다. 상감마마, 침수에

드셔야 하옵니다. 잠시 후에 인경(궐내의 밤 10시를 알리는 종소리. 28번을 침. 종소리를

기점으로 통행금지에 들어감)의 타종이 있사옵니다.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훤은 안 들은 척 술잔을 들어 입에 기울였다.

“내 울금초로 향을 낸 술을 들이라 일렀건만 우상(羽觴, 깃털처럼 가벼운 술잔)에 담겨진 건

그저 울금향뿐이다. 그때 마신 건 울금향도 아니고 난향도 아닌 달향이었던 겐가....”

다른 맛, 다른 향기에 의해 술을 마실 때 마다 그리움은 더 깊어졌다. 알 수 없는 병으로 건강이

나빠져 오래 앉아 있으면 숨이 가빠왔지만 울금향을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가뜩이나 가쁜 숨이

월을 생각하면 더 가빠졌다.

“운아, 안으로 들어오너라.”

운은 경성전 안으로 들어갔다. 훤은 새하얀 야장의(왕의 잠옷) 차림으로 어깨엔 고비(호랑이

가죽)를 덮고 있었다. 운이 멀리서 절 네 번을 한 뒤 가까이로 다가가 앉자 훤이 주위를 향해

말했다.

“모두들 잠시 물러가라.”

내시들과 궁녀들이 창문과 3면의 방문들을 일제히 닫고 순식간에 물러났다. 훤은 술 한 잔으로

잠시 뜸을 들인 뒤 조용히 말했다.

“월이 하늘로 솟았느냐, 땅으로 꺼졌느냐. 어찌 찾지 못한단 말이냐.”

“송구하옵니다.”

“됐다. 거짓을 아뢰진 않는다 하여 놓고는 죄다 거짓말만 하다니, 당돌한 것! 정박령의

신세라더니 금새 집을 비워버리다니.”

울컥하는 숨이 차 올라왔는지 손으로 가슴을 쥐고 한동안 숨고르기를 하더니 애타는 마음으로

재차 확인했다.

“정말 없더냐?”

“그러하옵니다.”

“세간도 아예 없더냐? 책도?”

“그러하옵니다.”

“집은 있더냐?”

“집만 덩그러니 있었사옵니다. 그 근방의 관령들에 속해져 있는 무적(巫籍, 무당의 호적)을 모두

조사해보았사온데, 월과 같은 여인은 어디에도 없었사옵니다.”

훤은 화가 났지만 소리를 높일 수는 없었기에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역정을 내었다.

“대체 관령들은 어찌 무적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단 말이냐? 무적에 오르지 못한 무당은

무당짓을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 법이거늘!”

“이상한 점이 있었사옵니다. 월이란 여인은 무속 행위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사옵니다.”

훤은 눈에 의문을 가득 담아 운의 뒷말을 재촉했다. 운이 다시 말했다.

“그 근방의 마을과 백성들 중에 월이란 여인이 있던 그 집과 무녀를 아는 자가 아무도

없었사옵니다. 그런 곳에 집이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사옵니다.”

훤은 기가 막히고 믿을 수가 없어 실소만 했다.

“허허. 내가 본 것은 그럼 무어란 말이냐. 정녕 귀신을 보았더란 말이냐. 밤에 한번 가보지

그랬느냐.”

“그곳에서 며칠 밤새웠사온데 나타나지 않았사옵니다.”

운은 뒷말을 삼켰다. 은은한 난향만이 남아있더란 말을 차마 할 수 없었기에..... 밤을 새며

기다리면서 귀신으로라도 나타나주길 바랬던 마음이 누구를 위한 마음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살 속을 파고들던 난향과 달빛으로 인해 마음 한구석이 아프면서도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더란 말도 차마 할 수 없었다. 반면에 남아있던 난향을 맡지 못한 훤의 마음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로구나. 하룻밤 스쳐지나가는 짧은 만남에 어찌 이리도 마음 깊이 생체기가

난 겐지.....베어서 두고 온 것은 내 기억이 아니라 마음이었구나....귀신에 홀려 빼앗겨

버렸어.....월아, 귀신이라면 한이 맺혀 모습을 보인 것일 터인데 어찌 나에게 억울한 사연 하나

들려주지 않은 것이냐.”

훤의 애달픈 마음을 위로하듯 멀리 궐내 보루각(조선시대 표준시간을 알려주던 기관, 자동알림

장치가 되어 있었음)에서 시작한 인경의 종소리가 도성의 4대문에서 울리는 종소리와 더불어

한양 전체에 퍼졌다가 하늘로 올라갔다.

온양근처의 어라산 기슭에 자리한 작은 초가집 마당에, 낡은 옷을 입은 나이 든 여인이 눈이

부신 듯 손으로 눈 차양을 만들어 하늘을 보다가 소리쳤다.

“야, 잔실이 이년아! 마당에 깔아두라는 멍석은 왜 안 내오고 지랄이야?!”

열대여섯 먹은 여아 하나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오늘따라 무녀님 심술이 하늘을 찌르것시유. 월케 이년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어유?”

“이년이?!!”

장씨는 말대꾸하는 잔실이를 팰 몽둥이를 찾기 위해 마당구석을 부리나케 헤맸다. 하지만

몽둥이를 찾는 것보다 멍석을 까는 잔실이의 행동이 더 재빨랐다. 멍석을 까는 내내 잔실의

입은 계속 쫑알거려대었다.

“대체 멍석은 왜 깔라고 그러시는 거유? 망령이 난 게쥬?”

“주둥이 꿰매고 술상이나 차려와, 이년아!”

“술상이라뉴? 또 술드실라구유? 작작 좀 드시지, 작작 좀!”

“저년 저 입은 어째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나불거릴까 몰러. 나만 마시려는 게 아니라 손님상을

보라는 게야! 네년 혓바닥 뽑아버리기 전에 어여 술잔 세 개 준비해 와.”

잔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손님이 오시는 건 어찌 아시는 게유. 신력이 다 했다믄서 그런 건 또 어찌 아시구....

괜히 술 드시고 싶으신께 거짓부렁하시는 게지유?”

장씨는 기어이 마당 구석에서 몽둥이 하나를 찾아 들고 잔실이에게로 달려들었다.

“내 오늘 손님 치르기 전에 네년 장례부터 치러야 되것다. 일루와 이년아!”

장씨가 잔실이를 붙잡아 몽둥이를 내리치려는 순간 점잖은 어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허~! 장씨도무녀, 성질 여전하시구려.”

하얀 머리카락과 수염을 길에 늘어뜨리고 긴 지팡이를 짚고 있는 혜각도사였다. 그리고 그 옆엔

관상감의 관리인 첨정영감이 서 있었다. 잔실이 놀라서 중얼거렸다.

“워매, 참말이었구만유. 언능 술상 봐올게유.”

잔실이 부엌으로 달려가자 장씨는 몽둥이를 마당 멀리 던지고는 옷을 털털 털며 말했다.

“왔으니 거기 멍석에 앉으시오. 그닥 보고 싶지 않은 낯짝들이지만 왔으니 봐드려야지.”

장씨가 눈빛 사납게 노려보자 첨정영감은 겁을 먹고 혜각도사 뒤에 주춤거리며 몸을 숨겼다.

장씨도무녀라고 하면 최고의 신력을 가진 조선의 머리무당이었다. 그중에 으뜸 실력은 바로

주술이었기 때문에 알만한 사람들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것도 두려워했다. 게다가 오늘

이렇게 찾아온 목적을 이미 꿰뚫고 있는 것 같아 첨정영감은 오금이 저릴 수밖에 없었다.

혜각도사가 먼저 자리 하자 첨정영감도 그 옆에 엉거주춤 앉았다. 장씨는 술상이 멍석에

놓아져서야 자리를 잡고 앉아 입을 열었다.

“이 관리 양반은 뭐 하러 달고 왔소? 이보슈, 관리 양반. 뭐 아는 거라도 있소이까? 교수들이

와도 대화가 될까 말까구먼.”

“관상감의 교수들은 궐 밖 출입이 엄금되어 있는 거 모르시오? 대화를 나누자고 온 것이 아니라

명령을 전달하러 온 것이니 그리 아시오. 그리고 교수들보다 내가 품계가 더 위임에도 이리 온

것은 그만큼 도무녀님을 대우하는 차원에서...”

“흥!! 이 잡것 앞에서 품계를 입에 담으시오?! 난 꼭두각시 앵무새완 나누고픈 말이 없수다!

교수들 보고 여기로 와서 직접 사정하라 이르시오!”

관상감의 교수들은 모두 천수(천문학교수), 풍수(지리학교수), 역학(명과학교수)에 있어서 각각

일인자들을 말했다. 첨정보다 품계가 아래이긴 하지만 실질적인 실무를 알고 있는 사람은

품계가 위인 관리들이 아니라 바로 교수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궐밖에 함부로 나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와 함부로 만나서도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왕의 생년월일 난시, 사주까지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이들뿐이기 때문이었다. 왕족들의 사주를 알고 있기에 만에 하나

새어나갈 것을 우려해 국가차원에서 이들을 철저히 감시했다. 이런 국법을 뻔히 알면서도

억지를 부리는 장씨에게 혜각도사가 조용히 말했다.

“장씨도무녀, 그간 너무 오래 성숙청(조선시대 경복궁 내에 있었던 국가와 왕족의 무속(巫俗)을

행하던 관청)을 비워두었소이다. 교수들이 궐 밖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도무녀(성숙청에

속한 국무(國巫), 머리무당, 조선의 최고 무당)가 입궐해야 하는 것이오.”

“누가 도무녀랍디까? 난 때려치운지 오래되었소. 신력도 이미 다 되었고 이 무지랭이 같은

목숨 하나 건사하기도 버거운 몸이오.”

“다 되었다는 신력조차 조선 제일이니 최고 신력의 도무녀를 두고 그 아래 신력을 국무로 삼는

예는 없소이다. 임시로 둔 도무녀는 현재 자리를 감당하기 힘드오. 다시 성숙청으로

들어오시오.”

장씨는 여전히 비아냥거리며 말꼬리를 엉뚱한 곳으로 돌렸다.

“성숙청과 소격서를 몰아내고자 매일같이 상소해대는 유생들의 청을 들어주는 것이오.

거기엔 우리가 발붙일 곳이 없수다. 혜각도사님도 소격서를 철폐하고 어디 산수 좋은 곳으로

들어가시오.”

“내 아무리 궐내가 싫으나 소격서를 버릴 수는 없소이다.”

혜각도사는 지금 비록 조선이 명나라에 비해 땅덩어리가 작아 힘이 미약해 사대를 하는

형편이긴 하나, 하늘의 아들은 명나라가 아니라 바로 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아비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마땅히 아들 된 도리이며, 소격서를 철폐하고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원구단을 없애는 것은 아비이신 환웅을 버리는 것이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명나라 황제뿐이며, 그 아래 제후국에서는 행해선 안 되는 행사였지만 이렇게 되면 바로

하느님의 아들 나라라는 조선이란 국호를 버려야 하는 것이 되었기에 힘들어도 소격서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마음이 급한 첨정영감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흠, 어흠! 그런 얘길 하자고 이리 먼 곳까지 온 것이 아니잖소.”

“그렇겠지, 내가 목적이 아니라 내 신딸이 목적이겠지.”

장씨의 서슬 퍼런 눈빛이 첨정영감에게로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장씨의 입에서 독설 또한

쏟아졌다.

“그동안 휴(풍수학에서 살(殺)과 액(厄)을 대신 받아 상대를 살리는 지형) 지역에 내 신딸을

정박령마냥 박아두었던 것만으로 모자라 이젠 아예 내 놓으란 말이오? 그대들은 자식도 없소?!

내가 죽으면 제삿밥을 올려 줄 신딸에게 만에 하나 뭔 일이 생긴다면 난 누구에게 제삿밥을

얻어먹으란 말이오? 그대들 같으면 쉬이 내 놓으시것소?”

“잠시 빌려달라는 말이오. 한 달이면 되오. 큰일은 없을 것이니....”

“휴 지역에 가둬둔 것도 잠시란 것이 3년이란 세월이었소. 그나마도 20여일 전에 그 결계가

부서졌기에 벗어난 것 아니오? 또 다른 휴 지역을 알아볼 동안 잠시 쉬고 있는 아이를 궁궐

안으로 끌고 들어가야 쓰것소?”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뛰는 장씨를 달래듯 혜각도사가 차분하게 말했다.

“휴 결계가 부서지고 난 뒤에 상감마마의 성체가 급격히 나빠지시었소. 알 수 없는 병으로

내의원에서 조차 힘겨워 하고 있다오. 지금 현재로선 이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은 장씨도무녀가

더 잘 아실 것이오.”

“비록 한 달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때라면 모를까 하늘늑대별(천랑성, 서양에선 시리우스별

이라고 함)에 어둠이 덮인 이 시점에 내 신딸을 보내라니......”

천랑성이 어둠에 덮였다는 건 국운이 나빠진다는 것이었다. 국운과 왕의 운명은 불가분의

관계이기에 장씨는 두려웠다. 국운이 나빠져서 신딸이 궁궐로 들어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딸이 궁궐로 들어가기 때문에 국운이 바빠질 거라는 것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혜각도사가 술 한 잔을 비우고 말했다.

“어째서 휴 결계가 부서졌는지는 아시오?”

“내가 그걸 어찌 아오? 지리학교수는 아무 말 없었소?”

“그도 원인을 모르겠다고 하였소. 아마도 만날 인연은 만나야 하기 때문이겠지....”

장씨의 눈이 날카롭게 혜각도사의 얼굴에 꽂혔다. 혜각도사는 그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술잔에 술을 따르며 다시 말했다.

“달을 잡아당겨 계곡에 가둔다 한들 그 달빛마저 가둘 수 있겠소?”

첨정영감은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혜각도사를 보았지만 장씨의 손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장씨는 태연한척 술잔을 잡아 술을 마셨다. 첨정영감이 쇄기를 박듯 힘주어 말했다.

“아무리 장씨도무녀의 신딸이라고는 하나 그 신딸 또한 성숙청의 수종무녀로 무적에 올라 있소.

그러니 나라의 부름에 응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인 것이오.”

“삼일간의 생각할 말미를 주시오.”

“생각해봤자 승낙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그대의 신딸만큼 주상과 합이 맞는 무녀는 없다 하니.

딱 한 달인데 뭐가 걱정이오. 그동안 무슨 일이 있겠소? 한 달만 지나면 예전처럼 새로 지정되는

휴 지역에서 조용히 지낼 수 있을 것이오. 한 달 동안만 휴 지역이 아닌 주상전하의 옆에 있다는

차이뿐이오.”

“알겠소, 알겠으니 이만 가보시오.”

혜각도사와 첨정영감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인사한 뒤 돌아갔다. 장씨는 두 사람이 가고 난

뒤에도 멍석에 앉아 술을 마시고 안주삼아 한숨을 마셨다. 잔실이 뛰어와 술병을 빼앗아 허리

뒤로 숨기자 장씨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리 내, 이년아!! 나 오늘 술 먹고 죽을 뿔란다.”

“죽는 방법도 여러 가진데 우째 술 먹고 죽는 방법을 택하시남유? 가장 죽기 힘든 방법이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시유.”

“무노비 주제에 주인 알기를 우습게 알지.”

“저도 신딸이구만유. 근데 어찌 매번 무노비라고 하신대유?”

“무녀로 사는 것 보다 노비로 사는 게 훨씬 나은 거야, 이년아! 지년 생각해서 해주는 말을

가지고, 쯧쯧...”

장씨는 허적허적 일어나더니 마루에 가서 털썩 앉았다. 한참을 하늘만 보고 앉아 있다가 긴

한숨 끝에 어두운 방안을 보고 말했다.

“아가씨. 들으시었소? 아무래도 아가씨가 궁으로 들어가야만 할 것 같소.”

어두운 방안에서 기품 있는 월의 목소리가 들렸다.

“단지 한달 동안만 휴 지역이 아닌 상감마마의 옆에 있는 것뿐이라지 않사옵니까?”

“상감마마의 옆이 아니라 정확히는 상감마마의 침수 드신 옆이오. 한 달 동안 상감마마께옵선

아가씨가 옆에 다녀간 줄도 모르실 것이오. 아니, 모르셔야만 되오.”

#3

“상감마마의 옆이 아니라 정확히는 상감마마의 침수 드신 옆이오. 한 달 동안 상감마마께옵선

아가씨가 옆에 다녀간 줄도 모르실 것이오. 아니, 모르셔야만 되오.”

한참을 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장씨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번 쓱 훑고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하이고, 날씨 하나는 징그럽게 좋소. 울긋불긋 단풍도 청승시리 곱구. 지 아무리 곱디고운

단풍이라고 하나 상감마마의 안정(왕의 눈동자)에 들어 있는 아가씨만큼 곱것수?”

어두운 방안에 있던 월도 눈으로만 단풍을 보았다. 하지만 눈에 들어온 단풍은 눈에만 비춰질

뿐 마음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장씨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숨을 밖으로

토해내도 속 갑갑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가씨. 궁궐로 들어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아시오?”

“네, 알고 있사옵니다.”

“지금까지 온양행궁 옆에 있던 휴 지역에 있는 것과는 틀리오. 그곳엔 그저 아가씨가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상감마마의 옥체를 해하는 살(殺)과 액(厄)을 밟아 누를 수 있지만, 상감마마의

옆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모든 살과 액을 아가씨가 온몸으로 받아야 한다는 말이오.”

“소녀 건강하기에 아무 탈 없을 것이옵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오. 흐트러져 있던 상감마마의 옥체의 기가 제자리를 잡으면······.

그렇게 되면······.”

“그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중전마마와의 합방을 위해 아가씨가 들어가는 거란 말이오. 기를 제자리에 찾게 하여

중전마마와 합방토록 하기 위해, 그래서 어서 원자아기씨를 보게 하기 위해 아가씨가

필요한 거란 말이오.”

“어서 원자아기씨를 보셔야지요. 그래야 종묘사직이 튼튼해지지 않사옵니까?”

월이 방긋 웃으며 말하자 장씨는 기가 막힌지 허허 거리며 웃었다.

“좋기도 하것수. 자신이 옆에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고 한 달을 보낸 뒤, 다른 여인과

합방하는 꼴을 보고 퇴궐을 해야 하는데······. 퍽이나 웃음도 나오것수. 내 가슴이 다 쓰린데.”

“소녀, 비오는 날 밤의 만남에 마지막을 두었습니다. 그러니 쓰릴 가슴이 없사옵니다.”

여전히 미소로 말하는 월의 얼굴이 보기 싫었던지 장씨는 원망어린 눈길을 하늘로 뿌렸다.

“완전히 끊어내지 못한 마지막은 마지막이 되지 못하오. 그리고 아무리 아가씨 입으로 마지막이

라고 하여도 상감마마께옵선 처음이라 하시었으니······. 왜 하고 많은 것들 중에 하필 달이라

이름하셨는지. 이 염병할 놈의 사명지신(운명을 관장하는 신) 같으니!”

월은 마치 남의 일인 듯 방긋이 웃으며 말했다.

“신께 욕을 하는 이는 신모님뿐일 것입니다.”

웃는 월 대신 그 몫만큼 한탄을 담은 목소리로 장씨가 말했다.

“힘들 것이오. 울어서도 안 되고, 말해서도 안 되고······. 그리움과 서글픔에 지쳐죽어도 죽어서도

안 되고. 차라리 죽느니 만도 못한 일일 것이오. 그래도 가보시겠소?”

한동안 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장씨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어떤 슬픔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월이었다. 왕이 잠든 모습을 그저 눈으로만 보고 있어야 하는 슬픔, 자신의 존재를 알려선

안 되는 슬픔, 다른 여인을 안게 하기 위해 왕의 기를 다스려야 하는 슬픔, 그저 무녀여야만

하는 슬픔. 월은 이러한 슬픔은 땅 아래로 낮추고 서글픈 미소만 하늘 위로 높이며 말했다.

“이젠 아니 갈 수 없습니다.”

“그래, 보고 오슈. 원껏 용안을 뵙고 오슈. 눈에, 가슴에 가득가득 품고 또 품어 그대로 죽어도

한없을 만큼 품고 오슈.”

“신모님, 죄송합니다. 소녀의 욕심이 과하여 이리 된 듯 하옵니다.”

오히려 따뜻하게 위로하는 월 때문에 장씨의 가슴은 더 아팠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어번 치며 말했다.

“이 잡것의 가슴이 메여 미치것소. 인연으로 묶이는 게 무서워 이름하지 않았더니 그 아가씨란

말이 이름이 되어 버렸는 갑소. 별별 사내놈이 내 밑구녕에 거시기를 쑤셔 박아도 애새끼 하나

내 몸에서 뽑아내지 못하였는데, 밑구녕으로 뽑아내지 못한 신딸에게도 모성애란 것이

이어지는가 보오. 아가씨의 가슴앓이가 이 잡것에게 고스란히 전해오는 것을 보면······.

다 내 죄야.”

“한 달만 있다가 올 것입니다.”

장씨는 몸을 돌려 방안에 앉아 있는 월의 손을 잡아 쥐며 단단히 당부했다.

“딱 한 달만 이어야 하오, 딱 한 달! 그 이상 지체하면 큰일 나오.”

월의 손을 쥔 장씨가 느끼는 두려움이 무엇인지 월로서는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매일을 술과

더불어 고통 속에 지내고 있는 장씨를 다 헤아릴 수도 없었다. 월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장씨는 급하게 분위기를 바꿔 최대한 털털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설이 년은 또 어딜 싸돌아다니는 게요?”

“잠시 여행 다니러 갔습니다.”

“쯧쯧. 또 숨어 보러 간 게로군. 팔자에도 없는 역마살이 낀 겐지, 원.”

이렇게 거칠게 말해도 설을 걱정하는 장씨의 마음이 느껴져 월은 조용히 미소로 말했다

“자유로운 품성을 지닌 여인입니다.”

“흥! 한곳에 매인 마음을 지녔는데 무슨 자유로운 품성이란 말이오? 그 집착하는 마음이 그년의

숨통을 조일게요. 가엾은 년 같으니! 계집주제에 뭐 하러 검을 쥐어서는. 하긴, 여자란 자고로

바늘을 쥐어야 하는데 검을 쥔 설이 년이나 책을 쥔 아가씨나 팔자 더럽기는 매한가지지.”

월에게서 정표로 빼앗듯이 받아 온 둥그런 보름달이 다시 훤을 찾아왔다. 건강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아 제대로 나라일은 돌보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것은 두고라도 오래 앉아 있으면

숨이 가쁜 것만 해결되어도 천추전(사정전, 만춘전과 함께 왕의 집무실. 온돌이 깔려 있어서

주로 가을, 겨울에 업무를 보던 곳.)에라도 나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나고, 그 화가 또 다시 숨 가쁨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나라일을 돌보지 못하면 현재

국구(國舅, 왕의 장인)인 파평부원군 일파가 조정을 마음대로 유린하기 때문에 훤의 마음은

조급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근 한 달 동안 훤이 하루에 처리한 문서는 고작 한두 개에 불과했다.

하루 쏟아지는 공문서와 상소문, 탄원서들을 다 합하면 수백 개에 달하는 분량이기에 하루에

한두 개 정도라면 거의 일을 하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나머지 문서들은 분명 파평부원군과

그 일파가 다 처리했다는 뜻이고 이는 곧 조정이 파평부원군의 조정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훤이 한 달 전 온양행궁으로 온천욕을 가기 전에는 이렇게까지 건강이 나쁘지 않았다. 온천욕을

가게 된 것은 순전히 훤의 핑계였다. 경복궁에만 갇혀 있다 보니 궐 밖 백성들의 형편을 알 수가

없었다. 행궁은 그나마 빠져 나가기 쉬웠으므로 온천욕을 고집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건강이

좋아지라고 갔던 결과가 경복궁에 돌아오고 난 뒤부터 급격히 나빠지고 만 것이다.

병의 원인조차 내의원에서 알아내지 못하자 주위에서는 귀신이 쓰인 것이라 수군거리는

사람들까지 있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밤만 되면 하늘의 달을 보며 우울해

하는 왕이 정상으로 보일 리는 만무했다.

보름달과의 재회가 반가워 훤은 오늘도 경성전 안의 달이 잘 보이는 방에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술도 마시고 싶었지만 내시관들 전원이 오늘따라 무릎 꿇고 앉아 강력하게 만류하는

바람에 포기해야만 했다. 창 밖에 운이 버티고 서자 왕은 더욱더 애처롭게 달을 보았다.

그리고 일부러 운이 들으라는 듯 한숨과 같이 원망하는 말도 내쉬었다.

“달은 이지러졌다가 사라진 후 다시 저리 나에게 돌아왔는데, 정작 와야 할 달은 오지

아니하는구나.”

주위의 누구도 월에 대해 아는 사람 없이 오직 운만이 알고 있는데, 운은 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인지 아니면 귀찮아하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게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창 밖에 서있기만 했다.

운마저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월은 정말로 귀신이 아니었을까 의심이 들었기에 맞장구를

쳐줬으면 하는데도 워낙에 말수가 없는 운이라 거의가 혼잣말로 끝나버렸다. 또 다시 숨이

가빠왔다. 훤은 갑갑함에 창밖으로 팔을 뻗어 뒷모습을 보이며 서있는 운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나를 좀 봐다오. 그리 등을 보이며 서 있지 마라. 너도 달을 보았지 않느냐. 나와 같이······.

너도 보았잖느냐?”

운은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 훤을 보았다. 하지만 답은 간단했다.

“네. 보았사옵니다.”

“어땠느냐? 네가 본 달은 어떻게 생겼더냐? 헛것은 아니었더냐?”

꿀을 머금었는지 입을 봉합한 운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무엄한 놈. 세조대왕 때, 종부시 첨정 최호원이 임금 앞에서 말하지 않았다 하여 옥에 갇힌

것도 모르느냐? 내가 성군이었기 망정이지 다른 임금이었다면 넌 옥에만 살아야 할 것이다.”

훤의 협박을 받고도 운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달빛을 반사하는 왕의 하얀 야장의가 눈이

부셨다. 그때 보았던 월의 소복이 생각나 운은 다시 몸을 돌려 섰다. 왕에게 등을 보여도 되는

인간도 세상에 유일하게 운검뿐이었다. 돌아선 하늘엔 정표로 받지 못한, 감히 청해보지도 못한

달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달을 정표로 가진 건 왕이었다. 운의 뒷모습에라도 말을 걸어 월의

흔적을 느끼고 싶어 하는 훤에게 상선내시관이 차를 가져왔다.

방안 가득 강렬한 국화향이 메워졌다.

“무엇이냐?”

“내의원과 관상감에서 올리는 차이옵니다.”

“다방(茶房, 조선시대 궐내 차를 관리하던 곳)에서 올리는 차가 아니라면 맛없겠군. 고작 그것

때문에 그리도 술을 못 마시게 하였구나.”

내의원이란 말만 들어도 왕은 차 맛이 쓰게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약이라면 질릴 만큼 먹고

있었다.

“그것 안 마셔도 오늘부터 관상감에서 부적을 쓸 거라고 하지 않았느냐? 먹기 싫은 탕제도

꼬박꼬박 불평하지 않고 잘 마시는데 그것조차 내가 꼭 마셔야 하느냐?”

상선내시관이 거의 사정하듯이 왕에게 말했다.

“꼭 드셔야 하옵니다. 그래야 부적이 효과가 있다 하였사옵니다. 차향은 쓰지 않고 오히려

향기로우니 탕제와는 다르옵니다.”

향기롭다는 말에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훤은 찻잔을 받아 들었다. 생각과는 달리 달콤한

국화향이 났다. 맛도 좋았다. 훤은 차향 덕분인지 편안한 마음이 되어 달구경을 할 수 있었다.

“운아, 참으로 바쁜 달이지 않느냐? 어찌 꿈길로도 한번 찾지 아니하는지······.”

여전히 운은 미동도 없이 서있었다. 간혹 바람이 머리카락을 날리는 것으로 그 움직임이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피식거리며 훤이 웃기 시작했다.

“나도 이상한 인간일세. 잠깐 어두움 속에 보았던 얼굴에 이리도 속상해 하다니······. 정녕 정상은

아닌 게야. 생각해보면 이해도 되느니. 잠시 비만 피할 수 있도록 지붕만 빌려줬던 나그네가

무에 그리 보고 싶겠느냐. 임금이라 내치지 못하는 마음이 더 힘들었을 것이야. 그 정도 되면

마음 정해 둔 정인이 분명 있었을 것인데 임금이 같이 가자 하니 감히 싫다 못했겠지. 그래서

그 다음날 바로 정인과 같이 나를 피해 달아났을 것이야. 운아, 내 생각이 맞지 않겠느냐?”

“모르겠사옵니다.”

뒷모습 그대로 감정 없는 목소리만 들렸다. 훤은 자신의 말에 속이 상해 괜히 운에게 서운함이

뻗혔다. 그리고 정말 자신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기해야 되겠지. 운아, 포기하기 전에 딱 한번만 더 온양에 다녀오너라. 마지막이다.”

“알겠사옵니다.”

“아, 아니다. 관둬라. 더 이상 너를 멀리 보내는 것도 대신들 눈 때문에 안 되겠다.”

“알겠사옵니다.”

딱 부러진 운의 대답에 다시 번복하기도 멋쩍었다. 말과는 달리 마음에선 완전히 포기가

되어지지 않는 것도 우스웠다. 하지만 더 이상 달에 취해 있을 수만은 없었다. 힘들지만 이제는

애써 잊도록 노력해야 했다.

“운아, 걱정마라. 오늘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달타령은 없을 터이니. ······오늘따라 달이

이상스러울 정도로 커 보이는구나.”

차를 다 마시고 잠시 앉아 있으려니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차 때문이었지만 훤은 그 원인을

알지는 못하고 잠자리에 들어갔다. 다행히 오늘밤은 이 방에서 잠들어도 되었기에 그대로

다반만 밀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지밀상궁이 조심스럽게 다반을 거둬갈 때 쯤 이미 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평소 잠자리에 들어도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던 것과는 달랐다.

그 이상함을 느낀 건 운이었다. 지밀상궁이 물러나오는 다반을 낚아채듯이 잡은 운은 찻잔의

향기를 맡아보았다. 경성전 밖에 서서 다반이 물러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내의관이 놀라서 말했다.

“뭐하시는 겁니까? 단지 차일 뿐입니다.”

“차란 것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살맹이씨와 측백씨등을 넣어 귀잠(깊은 잠)을 드리는 차입니다. 그래서 불면증에 쓰는

약이기도 합니다. 감히 이상한 것을 올리겠습니까?”

“분명 향기롭다 하시었습니다.”

“황금빛국화가 들어갔으니 당연합니다. 요즈음의 탕제 때문에 자칫 비위가 상할 수도 있는

약제들이라 국화향으로 그것을 다스리면서 동시에 약효를 높였습니다.”

“약제를 쓰면서까지 귀잠에 드시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건 관상감의 일이라 전 잘 모릅니다. 부적쓰기 위해서 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관상감 교수들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올곧은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왕의 운명과 직결된

분야를 다루는 관서이기도 하기에 경계해서 나쁠 건 없었다. 내의관이 물러가자 음의 기운을

불러들이는 인경의 종소리가 멀리서 퍼지기 시작해 동서남북에서 동시에 울렸다.

인경이 울리면 관상감에서 사람이 나온다는 보고를 받았기에 향오문 쪽으로 눈을 두고 있었다.

밤하늘을 지키는 28개의 별자리에 밤사이의 평화를 기원하는 28번의 종소리가 끝나자 관상감의

명과학교수와 하얀 쓰개치마를 쓴 여인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운은 칼집을 잡은 왼손을 앞으로

두고 오른손으로 바로 칼을 뽑을 수 있게 칼자루를 쥐었다. 여인이 가까워지면 질수록 운의

기분이 이상하게 변해갔다. 강녕전 가까이 다가오는 그들을 먼저 막아선 건 내금위장이었다.

“어느 누가 궐내에서 쓰개치마를 쓴단 말이냐!”

명과학교수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말했다.

“특별한 경우라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긴 사람이 아니라 부적일 뿐입니다.”

“부적이라니? 내 눈엔 분명 사람으로 보인다!”

“부적에는 종이 위에 붉은 글을 쓴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먹는 것도 있고, 입는 것도 있고,

단순한 금붙이 하나도 부적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중 정확한 원인을 모르는 지금 상황에선

가장 좋은 것이 바로 인간부적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액받이무녀라 불리는······.”

“네, 그러합니다.”

“어디 소속의 무녀냐? 동서활인원이냐?”

“아닙니다. 성숙청 소속의 수종무녀입니다.”

성숙청이란 말에 내금위장은 얼굴색이 바뀌면서 뒤로 주춤 물러났다. 대비전의 비호 아래에

있는 성숙청을 건드려서 좋을 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곳 무녀들은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운은 성숙청에 겁을 내는 사내가 아니었다. 그들에게로 다가가 재빨리 칼집 채로

쓰개치마를 힘껏 걷어내었다. 칼집 끝에 쓰개치마가 휘리릭 감기며 무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운의 몸이 차갑게 굳어졌다. 이상한 예감대로 월이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던

것이다. 눈이 멀 정도로 눈부신 달빛을 품어내던 월이 칼집에 감긴 쓰개치마를 걷어 팔에

걸치며 눈길은 달을 향해 말했다.

“구름이 달을 가리는 폼새가 참으로 어여쁘기도 하옵니다.”

여전히 마음에 진동을 일으키는 목소리였다. 칼을 잡은 운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것은

월이 운에게 하는 말이었다. 왕에게 비밀로 해달라는 간청이었던 것이다. 어지러운 마음을

어찌 할 수 없었던 운은 괜한 노여움을 땅으로 보냈다. 곁을 스쳐 지나는 난향이 어지러운

마음을 더욱 괴롭혔다.

월은 자그마한 짚신을 벗고 강녕전에 들어서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짚신을 월대(月臺) 아래의

마당으로 집어던졌다. 비천한 자의 신은 감히 월대 위에 올려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월은

궁녀 두 명과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가 한참 만에 나왔다. 몸에 혹시나 왕에게 해가 될 것을

지녔는지 검사한 것이었다. 상선내시관이 나와서 월을 훤에게로 인도했다. 강녕전에서

천랑(穿廊)을 거처 경성전으로 들어서자 어디가 어딘지도 모를 많은 문들을 지나쳐 몇 개의

방을 거쳐서야 왕의 침소에 다다랐다. 월에겐 왕에게 절을 올릴 수 있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침소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왕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게 고개를 숙여 방바닥만을 보면서

왕이 잠든 곳까지 다가갔다. 허락도 없이 왕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불경죄로 극형에 처해지는

것이기에 상궁 몇 명을 제외하고는 아주 가까이에서 모시는 궁녀라고 할지라도 왕의 얼굴을

모르는 것이 다반사였다. 훤의 이불에서 한 자 가량 떨어진 곳에 월은 다소곳하게 앉았다.

월이 자리하고 앉은 것을 보고 난 뒤에 상선내시관은 옆의 방으로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방과 방 사이에 두 칸의 문만을 열어둔 건너편에 내시들과 궁녀들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었고, 뒤따라 운이 방으로 들어와 멀리 앉았다. 모두가 자리를 잡고 앉고 나서야 월은

몰래 눈길을 왕에게로 돌릴 수 있었다. 눈길에는 제일 먼저 옆의 훤의 고운 손이 들어왔다.

그리고 숨 쉴 때 마다 들썩이는 금실로 수놓아진 붉은 비단 이불이 들어왔고, 새하얀 야장의가

들어왔고, 아침까지 깨어나지 않을 훤의 얼굴이 힘겹게 눈에 들어왔다. 감히 다 담을 수없는

보고픔에 잠시 눈길을 접었다가 다시 훤의 얼굴을 눈길로 쓰다듬었다. 입술을, 콧날을, 이마를,

그리고 뜨지 않을 두 눈 위를, 행여 눈빛에라도 얼굴이 상처 입을 새라 조심스럽게 머나먼

눈길로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멀리 앉은 운의 눈에는 월이 들어왔다. 달빛을 머금은 하얀 소복이 들어왔고, 세운 무릎 위에

다소곳하게 포개 얹은 고운 손이 들어왔고, 가느다란 긴 흰 목을 지나, 입술과 콧날을 지나,

왕만을 보고 있는 물기어린 눈길이 들어왔다. 운은 그동안의 수많은 물음들을 창에 어렵사리

비친 달그림자 아래에 묻어야 했다. 보이지 않는 창밖의 하늘엔 한 달 전에 보았던 둥그런 달이

떠있었고, 구름 한 점이 다시 본 보름달이 반가운지 입을 다문 채 달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지나고 있었다.

#4

새벽 4시를 알리는 파루의 북소리가 보루각을 시작으로 4대문에서 일시에 울리기 시작했다.

33天(중앙의 제석천과 사방에 각각 존재하는 8天을 합친 수. 즉, 온 세상을 의미함)을 깨우는

33번의 북소리가 천명을 받은 왕의 목소리를 대신해 둥둥둥 울려대면, 밤사이 조선팔도를

지배하고 있던 어둑시니(어둠의 신)는 양의 기운에 밀려 부리나케 달 너머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달도 별들만 몇 개 남겨두고 어둑시니와 같이 산 너머로 숨어들어야 했다. 월 또한 달과

어둑시니와 함께 해가 깨어나는 33번의 북소리가 끝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왕의 침소에서

물러났다. 몸을 최대한 낮추고 뒷걸음으로 운의 곁을 지날 때도 운은 그윽한 난향만을 느껴야

했을 뿐 눈길조차 돌리지 못했다. 월이 물러난 자리에는 밤사이 어두운 방 구석구석에 몸을

사리고 있던 국화향이 힘겹게 남아 있던 여린 난향조차 지워버렸다. 그대로 물러난 월은 나인

한 명이 던지듯 건네는 쓰개치마를 공손히 받아 강녕전 월대 아래에 버선발로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그리고 마당에 이슬 맞으며 홀로 뒹굴고 있던 짚신을 단정히 세워 신고는 차가운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33번의 파루가 끝나도 깊은 잠에 빠져 있던 훤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윽고 계인(鷄人, 궐내의

아침을 깨우는 사람)이 작은 북을 들고 강녕전 앞마당 한가운데서 33번을 연타하고 나서야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내시들이 가까이 다가가자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훤은 그 자리에서

길게 기지개를 켜고는 주위 안내를 받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밤사이 훤의 체온과, 그리고

월의 체온과 같아진 자리끼를 한 사발 들이키니 온전히 정신이 차려졌다. 훤은 다 마신 사발을

지밀상궁에게 주며 대뜸 입을 열었다.

“혹시 밤사이 누가 내 옆을 다녀갔느냐?”

운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일제히 깜짝 놀랐다. 그중 상선내시관이 제일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관상감의 명과학교수가 잠시 부적을 쓰러 다녀갔사옵니다. 어침(御寢, 왕의 잠자리)

평안하셨사옵니까?”

훤은 잠시 자신의 몸을 느끼는 듯 이리저리 작게 몸을 움직여보더니 놀란 눈으로 말했다.

“대체 무슨 부적을 쓴 것이냐? 훨씬 낫구나.”

밤새 비상대기 중이던 어의들과 관상감의 세 교수들이 같이 왕께 아침문안을 신청했다. 훤은

비록 야장의 차림이지만 그 옷의 매무새를 가다듬고 그들을 맞았다. 어의가 한참동안 맥을

짚어보더니 얼굴 한가득 기쁨의 미소를 지으며 엎드려 외쳤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주위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을 시작으로 기쁨의 인사를 올렸다. 모두 기뻐하는 그 와중에

관상감의 교수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이것으로 현재 왕의 건강은 병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자칫 관상감의 교수들 외에 혜각도사, 현 성숙청 대리 도무녀까지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는 중대 사안이었다. 더욱 두려운 것은 이 모든 원인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침소를 지키고 나온 월의 건강도 너무나 멀쩡했다. 액받이무녀조차 해가 없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왕이 건강해진 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만큼은 무녀가

나빠져야 하는데 이 둘이 같이 건강하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명과학교수가 바닥에 몸을 붙여 눈물로 호소했다.

“이 천신(賤臣, 신하가 왕 앞에서 자신을 최대한 낮춰 이르는 말.)을 죽여주시옵소서.

상감마마의 옥체를 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아직 모르고 있사옵니다. 무능한 이 천신을 부디!”

“아침부터 시끄럽다. 성군을 만드는 것도 신하의 덕이고, 폭군을 만드는 것도 신하의 탓이다.

나를 성군으로 만들고 싶다면 죽여 달라고 하기 전에 먼저 이일에 대해 조용히 밝혀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저 우연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

훤의 말에도 교수들의 손 떨림은 멈춰지지 않았다. 왕의 추궁을 떠나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일

자체가 두려웠다. 교수들은 훤의 물러가란 손짓에 두려운 마음을 몰아 쥐고 침전을 나섰다.

훤의 몸을 꼼꼼히 살피던 어의가 물었다.

“번갈(煩渴, 가슴이 답답하고 몹시 목이 마른 증상)은 어떠시옵니까?”

“어젯밤과는 달리 괜찮다. 이리 앉아 있어도 모현(冒眩, 머릿속이 흐리멍텅하면서 어지러움)도

없고.”

훤은 정좌를 하고 자세를 가다듬고는 내시관들을 향해 말했다.

“내 오늘은 천추전에 나가 만기친람(萬機親覽, 왕이 수많은 정치 일을 몸소 살핌)을 할 것이다.

준비하라.”

어의가 깜짝 놀라 만류했다.

“상감마마, 아직은 이르옵니다. 좀 더 나아진 연후에.”

“나갈 것이다! 또 언제 나빠질지도 모르지 않느냐. 조금이라도 괜찮을 때 나가지 않으면 나란

것이 왕인지도 모를 것이다. 오늘은 조강(朝講, 왕이 하는 아침 공부)과 조참(朝參, 아침 조회)은

아니 할 것이다. 대신 바로 천추전에 들어 몸져 누워있던 달장근(지나간 한 달)의 승정원일기

(공문서를 처리한 결과를 기록해둔 일지)를 훑어볼 것이니 당장 대령해 두도록 하라!”

공무에 관한 것에 있어서만큼은 훤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다는 것을 옆에서 모시고 있는 이들이

더 잘 알기에 상전내시관(왕의 말을 전달하는 내시)이 얼른 일어나 방을 빠져 나갔다. 왕이

친람을 할 것이라고 말했기에 궁궐 내의 모든 이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그중 제일 먼저

천추전의 아궁이가 바빠졌다. 그리고 승정원에 비상이 걸렸다. 하지만 가장 마음이 조급한 것은

다름 아닌 훤이었다. 그동안 비워두다시피 한 조정의 상태에 미리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초조반(새벽에 일어나서 먹는 죽수라)을 급하게 먹고 왕대비와 대비에게는 내시를 보내

문안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 부부임에도 서로 간에 애정 하나 없는, 있는지 없는지 조차

느끼지 못하는 중전에게도 문안 올 필요 없다는 전갈을 보냈다. 가끔씩 부인이 있다는 것을

느낄 때는 조정을 통째로 먹으려 드는 자신의 장인, 파평부원군을 볼 때뿐이었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귀양을 보내버리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그를 비호하고 있는 훤의

조모인 왕대비와 전쟁을 치러야 하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왕대비! 외척세력의 대지주였다.

뛰어난 군주였던 전왕조차도 효라는 유교교리 아래에 묶여 왕대비의 위세를 떨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훤도 파평부원군을 내치치 못하고 있었다. 왕에게는 충의 교리는 없어도

효의 교리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훤이 수시로 나빠지는 건강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실권을 어느 정도 장악하고 있는 것이 충신들에게는 고마운 것이었다.

몸을 정갈하게 하고 의복을 갖춰 입은 위에 곤룡포를 입었다. 오랜만에 입어보는 듯 했다.

그리고 머리에 익선관을 쓰고 침전을 나섰다. 왕의 바로 뒤에 검은 옷의 운검이 따르고 그 뒤를

내시관과 궁녀, 선전관, 무예별감들이 따랐다. 편전 영역으로 나가는 향오문을 넘어가는 동시에

왕의 머리 위엔 왕을 상징하는 충천각모(衝天角帽, 왕이 쓰는 큰 붉은 양산)가 받혀 씌어졌다.

훤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천추전으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 군사들이

천추전을 중심으로 경호 대열을 쌓았다.

훤은 어좌에 앉았다. 내내 아무 말 없이 훤을 따르던 운의 마음은 복잡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월에 대해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애타게 월을 찾던 왕의 마음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말할 수 없는 마음, 말을 해서는 안 되는 마음의 무게에 짓눌려 운의 입술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져 갔다. 승정원일기를 펼치던 훤이 운을 보며 말했다.

“운아, 혹시 피곤한 것이냐? 평소와 달라 보이는구나.”

“아니옵니다.”

훤은 한참동안 물끄러미 운을 보았다. 언제나 말이 없는 남자이긴 했지만 오늘은 어쩐지

그 말없음이 이상하게 다가왔다. 훤의 옆을 보좌하고 있던 내시관들도 운을 보았지만 그들은

전혀 달라진 점을 느낄 수가 없었다.

“내가 너를 힘들게 하는가 보구나. 난 주위에 사람 많은 것은 싫다. 게다가 보통 운검 다섯의

실력과 너 하나의 실력이 같지 않느냐. 그래서 내 곁의 운검은 딱 너 하나면 족하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은 두지 않는데 혹시 그것이 널 피곤하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내금위 군사들이

있으니 이제 들어가서 그만 쉬어라. 정오에 보자.”

운은 아무 말 없이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물러 나왔다. 천추전 바로 밖에는 어의들이 대기상태로

서 있었다. 왕이 승정원일기를 보게 되면 성격상 언제나처럼 불같은 화를 뿜어낼 것은 뻔한

일이었다. 아직 온전히 좋아진 건강도 아니고 또 언제 갑자기 나빠질지도 모르는 건강이기에

어의들은 긴장상태로 안의 추이를 살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화를 담은 훤의 목소리가

천추전 밖으로 뚫고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당장 승지들을 불러 들여라!”

그와 동시에 내시들이 전 속력으로 승정원으로 달려갔고, 어의들의 긴장은 더욱 심해진 반면,

대궐을 지키는 군사들의 마음은 가벼워졌다. 그들의 현명한 절대군주가 돌아왔기에 마음

깊숙이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훤의 목소리가 들리면 들릴수록 그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저절로 머금어졌다. 운이 천추전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군사들은 바짝 긴장했다.

운검이 왕의 옆을 비운다는 것은 그만큼 경호를 강화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날카로운 눈매에

차갑게 우뚝 선 콧날, 그 아래 얼음 같이 한일자로 꾹 다문 입술의 운이 군사들을 스쳐 지나가자

같은 사내이지만 괜시리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운이 월대를 내려서자 관상감의 명과학교수가 천추전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그에게 물었다.

“어디에 있습니까?”

운이 던진 말에 명과학교수는 순간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평소 목소리 한번 들어본 적 없는

운검이 자기에게 말을 걸었기에 무엇을 물어보는지 언뜻 이해를 못했지만 이내 무녀가

기거하는 곳이 어딘지를 묻는 것을 눈치 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숙청 주위의 도린곁(인적이 드문 외진 곳)에 한 달간만 묶을 것입니다.

절대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왕을 모시는 자로서 안심해야 하는 말이었지만 운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도린곁이라는 말에

아릿한 감정이 생기는 듯하였다.

“언제부터 성숙청의 무녀였습니까?”

“무적에 올려져 있은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그럼.”

명과학교수가 급한 걸음으로 천추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운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성숙청 무녀가 어째서 궁내가 아닌 온양에 있었는지, 지금 건강은 어떤지, 지금 이일이

그녀에게 어떤 영향이 있는지, 한 달 뒤는 그럼 어디로 가게 되는지 물을 수가 없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무적을 두고 먼 관령의 무적만 찾아 헤맨 셈이었다.

어느덧 동쪽 산에선 눈부신 아침 해가 돋아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운은 그 눈부심을 보았다.

‘같은 궁궐 안에 있는 이 거리가 그대를 찾아다니던 그 만 리 길보다 더 멀게만 느껴지오. 혹시

그대도 지금 저 눈부신 해를 보고 있는 것이오? 그렇다면 부디 보지 마시오. 차라리 눈을

감을지언정 해는 보지 마시오. 그대 눈부심을 가려주는 구름이 되어주지 못하는 마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모를 것이오. 달을 보고 또 해를 봐야하는 구름보다, 달을 보지 못한 해가 그나마

행복하지 않겠소?’

천추전 안에 들어간 명과학교수는 왕 앞에 붉은 비단으로 싼 문서를 올렸다.

“무엇이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합궁일과 입태시 이옵니다.”

훤은 엉망으로 처리 된 승정원일기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가 있는 상태에 이런 말을

들었기에 아예 붉은 비단 천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상감마마······.”

“아직 몸이 나쁘다!”

“당장이 아니옵니다. 지금부터 옥체를 안팎으로 닦으시어 부디 종묘사직을 이을 원자를

보시오소서. 그래야 조정도 흔들리지 않사옵니다.”

후사가 없는 왕의 건강이 나쁜 것만큼 국가 안위가 위험한 것은 없었다. 지금 왕이 버젓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도 다음 왕을 누구로 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나뉘어 지고 그것으로 인해

왕권이 서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칫 사화로 가는 길이 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훤은

가례를 올린 지 이미 7년이 가까워가고 있었지만 중전과의 합방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었다. 왕과 중전은 자신들이 합방하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합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음 왕이 될 원자가 자칫 폭군이 태어날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사주를 결정하는

난시만큼이나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입태시도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기에 이렇게 관상감에서

택일해주는 날에만 합방이 가능했다. 그런데 합방하면 안 되는 조건 중에 보름, 그믐, 초하루,

각종 절기, 큰 비가 오거나 심한 바람이 부는 날, 가물거나 홍수로 민심이 흉흉할 때, 상중,

천둥번개가 치는 날, 왕과 왕비 중 한명이라도 건강이 나쁘거나 기가 흐트러져 있을 때,

기타 등등. 이러한 날을 제하고 또 합이 맞는 날짜를 뽑으면 합방일이 한 달에 하루도 나오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이 날은 왕이 아무리 하기 싫어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마냥 힘쓰러

가야했다.

그런데 다른 왕들과는 달리 훤은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유도 없이 중전이 싫었다.

그리고 힘들게 합궁일만 받으면 그날은 어김없이 왕과 왕비 중에 어느 한쪽이 심하게 아프거나,

아니면 하늘이 날씨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대신들은 후궁을 들여야

한다는 상소를 끊임없이 올리고, 이에 맞서 아직 안된다며 버티는 외척간의 싸움이 수시로

일어났다. 자칫 후궁에게서 왕자를 보게 되는 날엔 외척세력의 중심인 파평부원군의 위치가

흔들릴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싫어도 중전과의 사이에서 원자를 보아야 하는 것.

이것은 왕이 된 자의 의무였다. 훤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왼손으로만 툴툴거리며 성의 없이

비단 천을 풀어 안의 문서를 읽었다. 그 많고 많은 글자들 중에 유독 ‘月’이란 글자들만

두드러지게 눈에 들어왔다.

‘보아라, 월아. 나란 것도 사람이 아니지 않느냐. 새끼를 낳기 위해 씨를 붙이는 소, 돼지와 내가

무에 그리 다르겠느냐. 그날 네가 싫다고 하여도 한 번 안아 볼 걸 그랬구나. 정말 안아보고

싶었다. 몸이 아닌 마음이 안고 싶었다.’

관상감에서 뽑은 세 날짜의 합궁일 중, 중전을 모시고 있는 상궁이 보경(寶經, 왕비의 달거리)

기간을 피해 한 날짜를 낙점한 것이 뒤늦게 보였다. 다가오는 보름의 바로 그 전날, 즉 월이

궁궐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밤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훤은 알았다며 상선내시관에게

그 문서를 건넸다. 이 이후부터 수라에 올려지는 음식들이 달라질 것이고, 마시는 차도 달라질

것이고, 목욕물도 달라질 것이고, 심지어 옆에서 연주하는 음악까지 달라질 것이 분명했다.

하루 종일 힘든 공무를 마치고 밤늦게 침전에 든 훤은 더 이상 달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리고

아예 달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음날의 공무를 위해 내의관에서 올리는 국화향이 가득한 차를

오히려 반가이 달게 마시며 깊은 잠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보고파 하는 달이 자신의 옆에

있는지도 모르고 깊고 깊은 잠을 잤다.

한양의 북촌(北村, 고관대작들이 주로 촌락을 이뤄 살던 곳), 의빈(議賓, 조선시대 왕의 사위를

일컫는 말)의 저택.

민화(旼花)는 열심히 흉배 수를 놓다말고 한숨을 쉬었다. 손끝 솜씨가 없어서 인지 아무리 봐도

엉성하고 보기 흉했다. 분명 공작을 수놓았는데 뚱뚱한 닭이 되어 있었다. 이런 것을 자신의

낭군인 염의 관복에 붙일 수는 없었다.

“하! 언제쯤 내 손으로 수놓아드린 관복을 입으실까. 내 손으로 옷은 고사하고라도 버선 한 짝도

못해드리니, 정녕 미운 손이로구나.”

민화는 옆에 놓아둔 염의 저고리를 끌어안았다.

“서방님, 보고 싶사와요. 여행 떠나시온지 어언······, 어언······, 아! 달포(한 달)에 불과하구나.

그래도, 그래도 소첩에겐 일 년보다 더 긴 시간이어요. 돌아오시면 제 손으로 만든 흉배를

자랑하고자 하였는데 완전히 망쳐버렸어요. 이제 자랑 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어여 오시어요.”

끌어안은 염의 저고리에선 이제 염의 향기는 간 곳 없고 민화의 향기만이 배어있었다.

한 달 내내 이 저고리만 부둥켜안고 있었다. 갑자기 그리움이 덮쳐와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래서 얼른 고개를 천장으로 들고 눈을 부릅떴다.

“눈물아 들어가라, 눈물아 들어가라. 안방 부인이 눈물 흘리면 먼 길 떠나신 바깥양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느니.”

힘들게 눈물을 다시 넣고자 애쓰고 있자니 바깥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렸다. 여종이 바깥에서

소리치는 것이 민화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공주자가, 공주자가!(자가:마마보다 한 단계 아래 칭호. 참고로 ‘마마’는 왕과 왕비, 대비,

세자 뒤에만 붙일 수 있는 칭호였음) 오셨습니다. 의빈자가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민화의 귀가 번쩍 떠졌다. 그 소리를 들은 민상궁이 놀라서 문을 활짝 열었다.

“정말이냐? 지금 오신 것이냐, 아니면 오실 거라는 말이냐?”

“지금 대문을 들어오십니다.”

민화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급한 마음에 그만 치마 앞자락을 밟고 앞으로 자칫

꼬꾸라질 뻔했다. 옷을 추슬러 올리며 바깥으로 나가려다 말고 분대함을 꺼내 얼굴에 대충 분을

말랐다. 그리고 다른 부녀자들과는 달리 특이하게 가체를 하지 않은 쪽진 머리를 정돈하고

상궁에게 물었다.

“어떻느냐? 미웁지 않느냐?”

“어여쁘시옵니다.”

민상궁의 칭찬에 민화는 치마를 위로 걷어붙이고 바깥으로 뛰기 시작했다. 민상궁이 당황하여

뒤를 따르면서 소리쳤다.

“공주자가! 부디 체통을, 체통······.”

하지만 민화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얼굴 화장은 살펴볼 시간은 있어도 혜를

신을 마음의 시간은 없었기에 버선발 차림으로 뛰어갔다. 체통을 부르짖으며 민상궁이 뒤를

따르고, 그 뒤를 여종이 놀라서 민화의 온혜(왕족이 신는 비단신)를 들고 따랐다. 염은 많은

하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안채로 들어오고 있었다. 허 염(許炎). 민화공주의 남편이자

훤의 매제인 의빈이었다. 한 달 전 떠날 때와 변함없는 모습으로 들어서는 자신의 낭군을

발견한 순간, 민화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버렸다. 그 뒤를 차례로 민상궁이

멈춰서고 여종도 온혜를 뒤춤에 감추면서 멈춰 섰다. 민화는 이렇게 급하게 뛰어 나오긴 했지만

막상 눈에 보이니 가까이 가진 못하고 부끄러움에 그만 몸을 돌려 섰다. 하인들의 인사를 받고

난 뒤엔 자기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주리라, 특유의 깊이 있는 다정한 목소리로 ‘공주.’라고

불러줄 것이리라 생각하면서 옷고름만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기다리는 그 순간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바로 뒤까지 염이 다가온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우추(羽?, 날짐승 깃털로

만든 비)로 갓과 도포를 털어내는 것도 느껴졌다. 이제는 말을 걸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야속하게도 염은 민화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대로 모친이 계시는 큰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민화는 그만 맥이 탁 풀려버렸다. 속상했지만 그는 효자이므로 돌아와서 당연히

어머니께 먼저 문안을 드리는 것이 예이니 아내인 자기는 참아야 한다며 스스로에게 위로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시어머니 방으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애써 꾹 참고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인들이 각자 자기 자리로 다 돌아가도 민화는 염이 나오기만을 마루 앞에 서서 기다렸다.

민상궁도 여종에게서 온혜를 받아 민화의 발에 신겨주고는 옆에서 같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염은 어머니인 신씨부인에게 절을 올린 뒤 자리에 무릎 꿇고 앉았다.

“소자가 불효하여 그간 문안도 못 드렸습니다. 곁을 떠나 잠자리 하나도 펴드리지 못하고

죄송합니다.”

“이리 무사히 온 것만으로도 고맙다. 네 심정을 어찌 모르겠느냐. 여행 다녀오니 마음은 조금

괜찮으냐?”

“네.”

염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신씨부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동안 의빈부(의빈을 관리하던 부서)에서 몇 번이나 다녀갔다. 왕족과 의빈은 한양 땅을

벗어나면 안 되는 것이거늘······.”

“허가를 받아 다녀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공주자가를 뵈올 낯이 없더구나. 너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신 줄이나 아느냐?

도착해서 인사는 드리고 이리 온 것이냐?”

“아닙니다. 어머니가 먼저입니다.”

“그러면 안 된다. 어서 나가서 다독여 드려라. 필시 바깥에서 목을 빼고 기다리고 계실게다.”

“씻고 난 뒤에 뵈올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쉬십시오.”

염은 빙그레 웃으며 물러나왔다. 염이 바깥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자 민화는 다시 몸을 돌려

옷고름을 만지작거렸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괜히 대청기둥에 붙어 서서 눈치만 살폈다.

하지만 염은 이번에도 곁을 지나쳐 사랑채로 걸어갔다. 민화는 염의 뒤를 주춤거리며 조금

따라갔지만 이윽고 사랑채 문을 닫고 모습을 감추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일하는 하인들이

주위에 있었기에 눈물을 애써 감추고 내당으로 몸을 돌렸다. 민상궁이 옆에서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는 체통을 지키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끅끅거리며 눈물을 참고 내당으로

다가가는데, 울음은 그 사이도 참기 버거웠던지 입술사이를 삐죽거리며 터져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겨우겨우 방으로 들어간 민화는 이불에 얼굴을 박고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기쁘고,

반갑고, 야속하고, 원망스러운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울음을 만들어 내었다. 민상궁은 행여나

울음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갈까 노심초사했다. 한참을 울고 난 민화는 그 사이 다시 염이 보고

싶어졌다. 이제 사랑채에만 달려가면 얼굴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론 안심이 되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정돈하며 바깥에 있는 여종에게 말했다.

“의빈께서 지금 뭐하시는지 살짝 알아보고 오너라.”

부리나케 달려갔다 온 여종이 방안에 들어와 조용히 속삭였다.

“지금 막 정방(대갓집의 집안에 설치해 둔 목욕소)에 드셨다 하옵니다.”

민화가 일어서려 하자 민상궁이 놀라서 팔을 잡았다.

“또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혹시······? 아니 되옵니다! 지금 공주자가께서 어쩌시려는지 저

눈치 챘습니다. 의빈자가께선 점잖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아니 될 일이옵니다.

제발 체통을······.”

“다른 사람들 앞에선 있는 힘껏 체통을 지킬 것이니 서방님 앞에서만큼은 그딴 것 필요 없다.

난 지금 당장 서방님을 뵙지 못하면 죽어버릴 것 같단 말이다. 민상궁은 따라오지 마라!”

끝끝내 민상궁을 뿌리치고 정방으로 달려갔다. 주위를 살펴 일하는 하인들이 눈에 띠지 않자

도둑 마냥 살그머니 정방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부부간이라도 목욕하는 모습을

서로 보인다는 것은 내외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목욕을 할 때도 보는 사람이 없더라도

벌거벗지 않고 목욕용 적삼을 완전히 갖춰 입어야 했다. 염은 누구보다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어김없이 적삼을 입은 채로 목욕통 안에 들어가 있었다. 머리를 갓 감고

통 안에 들어갔는지 물기를 머금은 긴 머리카락이 염의 목 줄기를 타고 어깨를 감아 아래로

떨어져 통 안에 잠겨있었다. 그리고 물 안에 있는 적삼은 환히 비쳐 하얀 살결이 드러나 보여

오히려 더 숨이 막혔다. 아름다운 콧날과 턱 선을 따라 떨어지는 물방울이 곱게만 느껴졌다.

짙은 눈썹과 긴 속눈썹 아래의 깊이 있는 검은 눈동자는 상념에 젖었는지 민화가 들어온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민화도 자신의 낭군을 감격에 겨워 넋을 잃고 바라보며 서있었다.

이윽고 염이 누군가가 들어온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쳐다보았다. 이내 곧 민화인 것을

알아채고는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놀란 표정은 민화가 우물쭈물 거리며 서있자 난감한

표정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염이 바깥에 목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조용히 말했다.

“놀랐습니다. 여긴 어떻게 온 것입니까?”

“이, 인사를 하고 싶어서······.”

“잠시 후에 그럼.”

“싫어요. 지금······. 소첩은 서방님이 보고파서 잠시 후까지는 기다릴 수가 없사와요. 지금 이렇게

보고 있어도 보고파서······. 보고파서······.”

기어이 민화가 눈물을 쏟아내자 염은 이런 차림으로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을

난감해 하다가 물이 툭툭 떨어지는 팔을 들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민화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앞으로 가서 염이 내민 손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따뜻한 염의 손이 민화의 손을

꼭 쥐었다.

“혹여 제가 서운하게 하였습니까?”

민화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세차게 옆으로 저으며 염의 목욕통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염이 다정하게 민화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몸을 닦고 난 뒤에 인사하러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들어오실 때 저에게 한번이라도 눈길만 주셔도 되었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했을 것이어요.”

“주위에 하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주, 아무리 바빠도 혜는 신고 다니셔야 합니다.”

민화는 놀란 눈으로 염을 보았다. 염이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보니 그동안의

서운한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혜를 신지 않은 것을 보았다는 것은 민화가 보지 못한

사이에 염의 눈길이 민화에게 다녀갔다는 말이었기에 그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또 다른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염의 입술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염의 표정은 이제

인사를 했으니 나가달라는 표정인데 민화는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 눈을 촉촉이 빛내며

바라보고 있었다. 염은 민화의 눈빛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염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민화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정방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염의 상식에서 많이

벗어난 것이었다. 평소 화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어쩌면 지금 이 표정이 화가

난 것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쯤에서 정방을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물기가

떨어지는 염의 입술이 눈길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시, 시, 심알잇기(키스) 하고 싶사와요!”

이번엔 염도 제대로 놀란 모양이었다. 목욕탕 물이 염의 놀란 몸짓에 크게 출렁거렸다.

이제 내뱉은 말이기에 염의 심판을 기다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염의

기척이 없었다. 대신 목소리가 들렸다.

“허허! 공주는 어떻게 하면 저를 놀래 킬 수 있을까 그 궁리만 하는가 봅니다.”

“구, 구흡(口吸, 프렌치 키스)을 원하는 것이 아니어요, 그냥 서방님답게 젊잖게 라도 좋으니······.”

이렇게 까지 일이 벌어지자 민화는 염이 혹시나 자신을 음란한 여자로 생각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마음이 너무 앞섰다는 생각에 서서히 괴로워지고 있었다. 염은 민망한지

젖은 머리를 손으로 한번 쓸어 넘기며 말했다.

“전 이리 벗은 채 물속에 있고, 해도 하늘에 떠있습니다. 이는 예가 아닙니다.”

민화의 숙여진 고개는 들어지지 않았다. 또 다시 창피함에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지만 그렇게

되면 염의 입장이 더욱 난처해질 것 같아 애써 눈물은 참았다. 다행히 숙이고 있는 민화의

이마에 염의 입술이 닿았다.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염이 움직일 때 마다 풍겨 나오는 그윽한

난향도 마음이 설레었다. 만족하고 일어서려 고개를 든 민화의 입술에 염의 입술이 겹쳐졌다.

비단 오늘만이 아니라 염의 입술은 언제나 촉촉했다. 그리고 그 어떤 것보다 향기로웠다.

염의 입술이 멀어지자 민화는 생끗이 웃으며 염의 목을 끌어안았다.

“공주, 옷이 물에 젖습니다. 어서 목욕을 마치고 나가야 됩니다.”

염이 아무리 당황해도 민화는 염의 목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끌어안고 있었던 저고리

따위는 염의 몸에서 나는 향기에 비하면 우습기 그지없었다. 난향을 풀어 놓은 목욕물에서 보다

염의 몸에서 나는 난향이 더 그윽했다. 오히려 염의 몸에서 향기가 씻겨 목욕물로 흘러들어

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방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정방의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남장으로

변복하고 있는 설(雪)이었다. 한참을 슬프게 문을 보고 있던 설은 하인이 오는 기척이 들리자

재빠른 몸짓으로 순식간에 담을 뛰어넘어갔다. 담을 넘어서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몇 번을 뒤돌아 염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설은 이쪽으로 누군가가 오는 것이 느껴져 얼른

고개를 숙이고 바쁜 걸음을 떼었다. 이쪽으로 오고 있던 사람은, 염이 한양에 돌아왔다는

소식에 왕의 심부름을 오고 있던 운이었다. 운과 설이 스쳐 지날 때는 괜찮았지만 몇 걸음

걸어가다가 순간 둘 다 걸음을 멈추었다. 설은 운의 손에 쥐고 있던 별운검을 보았던 것이다.

당황한 설은 태연한 척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운은 여인이 남장을 하고 있는 것이

수상해 본능적으로 돌아보았다. 봇짐 뒤에 있는 환도와 어디선가 본 듯한 뒷걸음걸이가 눈을

잡았다. 검을 지닌 여자는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온양에서 월과 같이 있던 여종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운은 염의 저택을 보았다. 분명 설은 이 집을 보고 있었다. 다시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설은 사라지고 없었다.

#5

운은 뒤뜰 누각에 앉아서 책을 읽으면서도 설이 이곳 염의 집을 바라보던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차림새 또한 여행을 다닌 듯 하여, 오늘 여행에서 돌아 온 염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참 만에 하얀 도포와 갓으로 의관을 갖춘 염이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나타났다. 운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서 흑목화를 신고 아래로 내려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염도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분명 염보다 운이 품계가 훨씬 낮음에도 불구하고

염은 언제나 운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했다.

“기다리게 하여 죄송합니다. 공무로 바쁘신 분을.”

“아니옵니다. 기다리는 동안 좋은 책을 읽었사옵니다.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네, 덕분에. 누각에 오르시지요.”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정좌하여 앉아 차를 마셨다. 염은 운보다 한 살 많은 24살이었다.

어려서부터 막역한 지우 사이기도 하지만 검술에 있어선 운이 염의 스승이었다. 보통 검술은

하찮은 것이라 하여 사대부들이 경시하는 풍조가 있었지만 염은 운의 검술을 존경했다. 그래서

검술 속에 녹아있는 운의 강직한 품성을 익히는 것을 감사해 하며 검술을 배웠다. 하지만

타고난 재능이라고는 학문적인 것이 전부였는지 검술 실력만큼은 늘지 않았다.

“상감마마께옵서 의빈자가를 뵈옵고 싶어 하십니다. 궁으로 한번 오시라는 전갈을 드리러

왔사옵니다.”

“가 뵈어야지요. 성후 미령하시다는 소문에 민심이 많이 흉흉하더이다.”

운은 설을 본 것이 마음에 걸려 잠시 망설이다가 질문했다.

“여행은 어느 분과 다녀오셨습니까?”

“저의 집 하인 두 명과 다녀왔습니다.”

여전히 부드러운 염의 표정은 거짓말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염은 조용히 찻잔을 입에

기울이다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다시 입에서 떼며 말했다.

“아! 그러잖아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혹여 요즘 의빈부에서 감시를 강화하였습니까?”

“네? 무슨 말씀이온지······.”

“여행 내내 누군가가 저를 미행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해코지를 하는 것도 아니어서

의빈부에서 감찰 보낸 건가 생각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상감마마의 윤허를 받아 여행 떠나신 의빈자가를 감히 감찰 할 순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운은 더욱 이상했다. 거짓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염이라는 것은 운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누군가가 미행하는 것 같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면 염도 모르는 사실이란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 여종은 어떻게 된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지나가는 길로 이해하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많았다. 생각에 빠진 운의 머릿속을 뒤흔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 풍천위(위:공주와 결혼한 의빈의 봉작 명. 봉작 앞에 본관을 붙여 부름. 염은 풍천 허씨)

께서 돌아오셨다고?”

큰 키에 풍채 좋은 모습으로 갓은 뒤로 넘겨 등에 걸치고, 도포자락을 휘날리면서 오고 있는

양명군(陽明君)이었다. 양명군은 훤보다 한 살 많은 배다른 형이었다. 염에게 반갑게 두 팔을

펼치고 오던 양명군은 이내 운을 발견하고 얼굴 한가득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게 누군가? 우리 운검 아니신가. 이런 횡제가 있다니. 정말 반가우이. 내 자네들이 보고 싶어

병을 하네, 그려.”

운과 염은 자리에서 일어나 양명군을 맞았다. 염이 공손히 말했다.

“기별도 없이 어인 일이십니까?”

“풍천위가 한양에 돌아오셨단 말에 미리 기별 않고 바로 달려왔네. 엉덩이가 들썩여 예를 갖출

경황이 있어야지. 풍천위, 자네가 없는 한양 땅은 내겐 향기 없는 난초와 다름없다네.”

양명군은 먼저 운을 껴안을 듯 팔을 펼치고 다가갔지만 운이 차갑게 허리를 숙여 인사 하자

슬그머니 팔을 거두었다.

“참으로 빡빡한 사내일세. 내 자네를 품에 한번 안아보면 소원이 없겠네. 지금 자네 손에

별운검만 없었어도 강제로 안아보긴 하겠구먼, 목숨이 하나뿐이라······. 같은 한양 아래에 살면서

구름을 보기가 이리 힘드니, 원.”

이번엔 염을 안을 듯 팔을 펼치다가 주위를 얼른 둘러보며 말했다.

“내 우리 풍천위도 안아보고 싶은데 어디선가 공주가 눈썹 휘날리며 달려와 나를 팰 것 같아

겁나서······.”

“농은 여전하십니다.”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염의 얼굴을 보며 양명군도 미소를 지었다. 양명군 또한 두 사람과

막역한 사이였다. 염과 운이 정좌를 하고 앉은 것과는 다르게 양명군은 갓을 벗어 던지고

편한 자세로 앉았다. 양명군은 언제나처럼 멀리 별당으로 슬픈 눈길을 한번 던졌다.

염이 양명군 앞으로 찻잔을 밀며 말했다.

“갓을 그렇게 뒤로 넘겨쓰시고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내가 갓을 안 쓰고 다닌다고 하여 왕족이 아니라고 할 자가 있겠는가?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왕족의 딱지는 떼어지지 못하는 것을. 하긴, 이 몸이 뭐가 그리 억울하겠는가. 풍천위 자네에

비하면 말일세. 아까운 사람 같으니.”

운은 표정 변화 없이 차를 마셨고 염은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왕족과 의빈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철저한 금고(禁錮)를 당했다. 풍족한 부를 제공받는 대신 그 어떤 정치적인 활동과

발언도 용납되지 않았다. 만약에 정치적인 발언을 했을 경우엔 바로 삼사에서 탄핵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대외적인 그 어떤 학문 활동도 할 수가 없었다. 일평생 몸을 사리며 조용히 살다

가는 것만이 이들에게 주어진 숙명이었다. 그래서 의빈을 간택할 때의 중요한 요건 중에 하나가

나라의 동량이 될 뛰어난 인재는 간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염은 의빈으로

간택되어선 안 될 만큼 지나칠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다. 양명군은 이런 염이 안타까워 한

말이었던 것이다. 운은 찻잔을 비우고 일어섰다. 양명군은 굉장히 서운해 하며 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왜 벌써 일어서는가? 이리 마주하기 얼마나 힘든데.”

“오래 자리를 비웠습니다.”

깍듯한 말이었다. 양명군은 쓸쓸히 웃으며 손을 놓았다.

“주상은 자네마저도 독차지를 하는군. 언제나 자네를 옆에 꿰차고 놓아주질 않으시니······.

이 마당에서 우리 셋이 검술을 익히던 때가 그리우이.”

“오랜만에 뵈어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운이 일어나 가는 뒷모습을 염과 양명군은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양명군이 조용히 말했다.

“제운······. 나날이 멋있어져 가는군. 검술 또한 일취월장 하였겠지.”

“학문의 깊이 또한 깊습니다. 아까운 사람이지요.”“그래. 염, 자네와 제운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난 복 받은 사람이야.”

“그런데 어찌하여 재혼을 하지 않으십니까?”

양명군은 2년 전 첫 부인이 죽고 홀로 된 몸이었다. 그런데 첩 하나 없이 재혼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삼년상도 끝나지 않았잖는가. 적어도 삼년상은 끝나고 재처를 들이는 것이 법도가

아니겠는가.”

“그런 사내가 드물지요.”

양명군은 슬픈 미소로 다시 한 번 별당으로 눈길을 돌렸다.

“양천위, 자네보다 아름다운 여인이 있으면 당장 재혼을 하지. 자네와 닮은 여인이 있다면······.

저 별당이 비어있는 줄 알고 있지만 아직도 저곳에 눈길이 가니 어이가 없네. 입에 담으면

안 되는 말인 줄 내 알고 있지만······.”

“네. 입에 담으시면 아니 됩니다. 눈길을 거두시옵소서.”

염은 오직 눈길을 아래 찻잔에만 두고 정갈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미안허이, 이런 말 해서. 술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취기가 올랐나 보이.”

양명군은 얼른 찻잔을 잡아 한 모금 마셨다. 염도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차를 마셨다.

훤은 천추전에서 저녁 늦게까지 열심히 승지들과 토의를 하고 있었다. 그 옆은 어김없이 운이

지키고 있었다. 다른 대신들은 하루 종일 훤에게 시달리다가 겨우 퇴궐을 했지만 승지들은

여전히 잡혀 꼼짝도 못하고 들볶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훤은 중간에 빠져나가 저녁을 먹고

왔지만 승지들은 쫄쫄 굶고서 훤의 성질을 다 받고 있었다. 그러니 기운 빠진 여섯 명의

승지들과 뱃속 든든한 훤이 싸움이 될 턱이 없었다.

훤은 4년 6개월 전, 19살의 어린 나이로 왕으로 등극했다. 원래 왕이 20살이 되기 전에는 대비나

왕대비가 수렴첨정을 하는 것이 관례화 되어 있었다. 그런데 훤은 나이가 수렴첨정을 맡기기엔

상당히 애매하긴 했지만, 세자시절 장난 심하기로 악명 높은 악동이었다. 외모 또한 나이에

비해 앳되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파평부원군 일파는 왕대비가 당연히 수렴첨정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고, 훤을 믿을 수가 없었던 다른 대신들까지 가세해서 거의 왕대비가

조정의 실권을 잡을 위기로까지 몰렸다. 훤은 외척의 의도를 파악하고 이를 갈며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왕의 시호(諡號)를 결정하는 문제로 기회포착을 했다. 봉상시(奉常寺,

죽은 왕의 시호를 결정하던 기관)에서 올린 시호에 살아생전 받았던 존호(尊號)가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무지한 왕대비가 모르고 넘어가려고 했다. 훤은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바로 공격에 들어갔다.

“경들은 감히 왕대비마마를 속이려드는가!”

갑자기 호통 치는 훤이 어리둥절했던 신하는 서로를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훤이 다시

호통을 내렸다.

“지난번에 안으로 일어난 난을 진압하고, 바깥으로는 정이(征夷, 오랑캐를 징벌함)한

은위(恩威)로 분명 4자의 존호가 바쳐진 바가 있었다. 그런데 어찌 이를 빼고 8자의 시호만

바치려 드는가! 이는 왕대비마마뿐만이 아니라 이 나라의 국왕인 이 나를 능멸한 것이다!

그리고 분명 내가 친히 봉상시에 글자 수에 구애되지 말라 일렀거늘 왜 8자로만 하였는가!

내가 어리다고 하여 그런 것인가?”

왕의 위엄을 갖춘 훤의 모습에 왕대비를 비롯하여 어느 누구도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훤은 대신들은 한번 훑어보고는 그중 왕대비의 사촌, 외척의 중심인물의 한명인 좌의정에게

물었다.

“좌의정! 너의 왕은 누구인가?”

좌의정은 놀라서 훤을 보았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물론 천신의 앞에 계옵신 상감마마시옵니다.”

훤은 물어 놓고는 침묵했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으니 좌의정을 비롯한 대신, 왕대비까지

긴장이 되었다.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던 훤이 화를 내며 호통 쳤다.

“누가 나를 보라 일렀는가!”

“네? 무슨·······.”

“누가 허락 없이 군주의 얼굴을 본다 하던가? 고래로부터 그러한 예를 나에게 말하라! 분명

이러한 예는 없을 것이다. 허락 없이 왕인 나의 얼굴을 본 것은 분명 왕을 능멸한 죄에 해당한다!

여봐라, 저 놈을 당장 하옥토록 하라!”

왕대비가 만류하기엔 이미 늦었다. 이 일을 빌미로 전왕조차 건드릴 수 없었던 왕대비의 측근을

옥에 가둔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귀양을 보내버리고, 왕대비가 수렴청정을 시작한지 한 달

만에 결국 훤이 정권을 잡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이후 절대군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듯

했지만 이 또한 얼마가지 않아 건강이 나빠지고 말았다.

승지들은 건강한 훤을 상대하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었다. 훤은 어떻게 말을 돌려서라도 자신이

의도하는 쪽으로 실마리를 풀어가는 왕이었다. 그리고 일 처리가 마음에 들기 전에는 끝내지

않는 집요함도 있었다. 그렇게 지쳐있던 승지들에게 바깥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상감마마, 성록대부 풍천위가 입궐하였사옵니다. 어찌 하옵니까?”

화를 내고 있던 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승지들이 지옥에서 헤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열심히 기록 중이던 사관 둘의 얼굴도 밝아졌다. 염은 성균관 시절 이들의 우상과 같은

인물이었다. 염의 얼굴을 직접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사관들은 기뻤던 것이다. 그런데 훤의

얄미운 답이 들렸다.

“내 정리하고 갈 터이니 풍천위를 침전으로 모시도록 하라.”

사관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침전은 사관이 넘어갈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상감마마, 어찌 침전에 드시려 하오십니까?”

“나의 매제로 만나는 것이니 당연히 침전에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은 이쯤하고 나머지는

내일 모든 신료들이 있는 경연(經筵, 왕의 공부를 위한 학문토론. 정치토론도 하였음)에

붙이도록 할 것이니 철저히 준비하고 오라.”

훤은 어린애 마냥 신난 표정으로 냉큼 일어나 침전으로 달려갔다. 방금까지 위엄 있던 왕의

모습은 간 곳 없었다. 그 뒤를 운과 내시관들이 따랐다. 침전 앞에 어두운 달빛을 받으며 서 있는

염을 발견하자 훤은 더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염은 훤을 발견하고 읍(揖, 두 손을 맞잡아

들고 허리를 공손히 구부렸다가 펴면서 두 손을 내리는 인사법)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훤의 손에 두 손이 덥석 잡히고 말았다.

“왜 이제야 왔소. 한양에 돌아왔단 기별은 며칠 전에 받았는데. 그리도 얼굴 보여주기 싫었소?”

“아니옵니다. 여행에서 몇 권 얻은 책을 보느라 그만.”

훤은 염을 강녕전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운도 같이 들어가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염은 운과 눈이 마주치자 특유의 부드러운 눈웃음으로 인사를 보냈다. 운은 아주 조금 고개를

움직여 인사를 했다. 염이 네 번의 절을 하자 훤도 세 번의 절을 했다. 염이 만류해도 훤은

고집으로 세 번의 절을 끝냈다. 염이 당황하여 말했다.

“어찌 이러시옵니까?”

“내 아무리 군주이나 스승의 예는 아는 사람이오. 그대는 나의 영원한 스승이 아니시오.”

“소신은 잠시 머물렀을 뿐이옵니다.”

“비록 잠시이나 더 오래 나를 가르친 그 어떤 스승보다 나는 그대에게 많이 배웠소. 현재 나의

생각 모두에 그대의 말이 깃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소이다.”

훤이 한참 말썽 부리던 세자 시절, 염은 전왕의 어명으로 세자시강원(세자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기관)의 문학(정 5품의 세자를 가르치던 직책중 하나)에 제수 받았다. 그렇게 둘의 인연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염은 훤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상감마마께오서 강녕하시니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훤도 염의 미소에 마음이 상쾌해 졌다.

“내가 정사를 처리하면서 가장 많이 떠올리는 이는 아바마마가 아니라 바로 그대요. 그대의

바로 이 미소. 그리고 가장 무서운 사람도 바로 그대요.”

염은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 훤은 그 모습이 안타까운지 조용히 말했다.

“무서워해야 하는 것은 그대가 아니라 백성이어야 한다는 말을 왜 아니하는 게요. 난 그대의

청량한 목소리가 듣고 싶소.”

“신, 의빈이옵니다. 어찌 입을 명하시옵니까?”

“난 아직도 아바마마를 이해할 수가 없소. 그대의 능력을 누구보다 귀히 여기던 분이 아니시오.

그런데 어찌 의빈으로 간택하셨는지······. 의빈이 되지 않았다면 그대는 지금 뛰어난 재상이 되어

나를 보필하고 있을 터인데. 나를 꾸짖어 가며 힘이 되어주고 있을 터인데. 아니면 학문의

발전을 이루었던가······. 생각만으로도 기가 막힐 노릇이오.”

염은 여전히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주안상이 들어와 둘은 잠시 말을 중단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훤이 물었다.

“여행은 즐거우셨소?”

“상감마마의 성택(聖澤, 왕의 덕택)으로 즐거웠사옵니다.”

“한 달 전이었나? 연우낭자의 기일이······.”

염은 들던 술잔은 다시 소반 위에 올려 두었다. 흔들리는 촛불 속에 염의 표정도 흔들렸다.

훤이 슬픈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그래서 그대가 여행을 떠난 것이리라 생각하였소. 아직 가슴에 있으니······.”

“상감마마께옵서 어찌 아직 그 이름을 기억하시옵니까? 구중(口中, 왕의 입)에 담아서는 아니

되는 이름이옵니다. 이제 세상에 없는, 차가운 땅 속에서 잠자고 있는 제 누이의 이름을 어찌

아직······.”

술을 한 모금 머금은 훤의 입술에 경련이 일 듯 미세하게 떨렸다.

“나에게 그 이름을 잊으라 하는 것만큼 잔인한 건 없소. 연우낭자는 나의 정비(正妃)였소.

나의 유일한 정비.”

하늘의 달은 손톱자국만 남겨놓고 몸을 숨기고 있었다. 훤은 술잔을 들어 그 안에 담긴 달을

마셨다. 하지만 눈을 들어 하늘의 달을 보진 않았다. 하늘에 떠있는 사라질 듯 가녀린 달을 보는

이는 유일하게 운뿐이었다. 염은 어느새 평정을 찾았는지 다시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훤의 표정은 그 옛날의 시간에 발목 잡혀 참담하게 굳어져 있었다.

#6

7년 6개월 전, 열여섯 살 세자 시절의 훤은 새로울 것이 없는 매일 반복되는 생활에 지쳐,

세자시강원의 스승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그 재미를 찾고 있었다. 머리가 좋은 세자는 스승이

가르치는 것은 한번 듣고도 다 외웠다. 그래서 일부러 틀리게 읽어 그것을 스승이 모르고

넘어가면 바로 꼬투리를 잡아 모욕을 준다거나, 가르치는 것을 안 듣고 딴 짓을 하다가 스승이

왕에게 이러한 사실을 고하면 왕 앞에서는 그 어떤 때 보다 또록또록하게 배운 것을 낭독하여

마치 스승이 거짓을 아뢴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세자시강원에서 세자를 가르치는 스승은

보통 열 명에서 스무 명까지 있었는데, 사·부와 이사처럼 한 번씩 학습 진도를 살피는 상징적인

스승을 제하고 직접 가르치는 보덕, 필선, 문학 등의 스승만 해도 열 명 가까이나 되었다.

이 많은 스승들이 세자의 장난에 안 당해본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자를 가르치는 일에 중압감을 느낀 보덕(輔德, 정3품)이 낙향을 하고 말았다.

훤의 장난이 아니어도 세자시강원의 관리들은 차기 왕을 가르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임무의

막중함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다반사였는데 거기에 훤의 장난으로 인해 그 정신적인 병이

가중된 것이었다. 그렇게 비워진 보덕 자리는 아래에 있던 필선(弼善, 정4품)과 문학(文學,

정5품)이 차례로 승직을 하고, 새로운 문학이 제수(除授, 왕이 신하의 추천을 받지 않고 직접

임명하는 것)되었다. 훤도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듣고 새로 오는 문학이 누구인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물론 골탕 먹일 것을 대비해서였다. 그래서 사령(使令, 세자시강원에서 심부름하는

하급관리들)에게 새로 오는 문학에 대해 알아오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정보를 듣고 온 사령이

훤에게 말하기를 꺼려했다.

“왜 말하지 않는 것이냐? 어떤 자가 오는지 못 알아 낸 것이냐?”

“그, 그것이 아니옵고······.”

“어서 말하라! 어디서 뭐하던 자냐?”

한참을 머뭇거리던 사령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과거에 장원급제한 허 염이란 자라 하옵니다.”

훤은 깜짝 놀랐다. 보통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정·종9품직에 임명받았다. 그중 장원급제한

사람은 아무리 높은 관직을 준다고 해도 정7품직 정도가 가장 좋은 대우였다. 그런데 정5품인

문학에 제수 받았다는 것은 엄청나게 파격적인 임명이었던 것이다. 특히 역대 왕 중에

인사행정에 있어서 가장 빡빡하다고 소문난 왕이라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세자시강원의 관리들은 다른 관직에 비해 선발 기준이 훨씬 엄격했기 때문에 선뜻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또 알아낸 것이 있느냐?”

“그게······, 나이가······.”

“나이라니? 허 염이란 자의 나이가 어떻게 되기에?”

“올해로 열일곱이라 하옵니다.”

훤이 놀라움과 분노로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열일곱이라면 나보다 기껏 한 살 많다는 것이 아니냐! 아바마마께옵서 나를 어찌 보시고

그런 새파란 애송이를 문학에 제수하셨단 말이냐!”

보통 스승들의 나이대가 서른에서 마흔 사이였는데 기껏 한 살 많은 놈에게 가르침을 받을 것을

생각하니 훤은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호기심도 생겼다. 과거에 급제하는

나이가 대략 정해진 것은 없지만 보통은 스물다섯에서 많게는 마흔까지 넘어갔다. 그런데

열일곱이란 나이에 장원급제를 했다는 것은 천재라는 뜻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훤은

염의 수업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수업시작한 날로부터 단 며칠 만에 쫓아내고야 말리라는

의욕을 불태웠다.

드디어 염의 첫 수업 날이 되었다. 훤은 석강(夕講)을 담당하게 된 염이 비현각(丕顯閣, 세자가

공부하던 건물)에 들어서는 것을 삐딱한 자세로 앉아 얼굴을 돌리지도 않고 맞았다. 아무리

세자라고는 하지만 스승에 대한 예를 따진다면 자리에서 일어나 맞아야 하는 것인데 훤은 염을

골탕 먹이기 위해 일부러 일어서지 않았다. 그런데 훤과 떨어진 스승의 자리에서 세 번의 절을

마치고 앉은 염의 얼굴을 본 순간 훤은 넋이 나가고 말았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너무나도

아름다운 청년이었기 때문이었다. 주위에 보아왔던 그 어떤 궁녀보다 아름다웠다. 훤은 그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염을 내쫓아야 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자칫 잊을 뻔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삐뚤어진 익선관을 바로 쓰지도 않고 서안에 턱을 괴고 앉아 있기만 했다.

스승이 먼저 세 번의 절을 하면 세자 또한 스승에게 세 번의 절을 해야 하는 것이 예절이었다.

훤은 이대로 있다가 염이 뭐라고 말만 하면 세자의 권위로 호통을 쳐서 기를 죽여 놓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염의 반응은 다른 스승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바른 자세로 정좌한 채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었던 것이다. 훤이 아무리 기다려도 바로

앉아라던가, 아니면 스승에 대한 예를 갖추라던가 하는 요구가 없었다. 꼼짝도 않고 정좌하여

앉아 있는 염보다 삐딱하게 앉아 있는 훤이 먼저 지쳐갔다. 하지만 훤도 고집이 있는

놈이었기에 허리가 아프고 팔이 아파도 상대가 먼저 공격하기만을 기다리며 끝까지 버텼다.

그러고 있던 어느새 45분이라는 수업시간이 지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비현각 바깥에서

울렸다. 종이 울리기가 무섭게 염은 단 한마디도 없이 눈웃음 그대로 인사하고는 물러나 나가

버렸다. 훤은 기가 막혔지만 왠지 재미가 있었다. 이제껏 스승들은 감히 세자 앞이라 꾸짖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훤이 바라는 대로 함정에 빠져주었는데, 염처럼 아름다운 미소만

남발하다 가는 경우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신경전이 하루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염은 그저 아름다운 눈웃음만을 보일 뿐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훤이 지치고 심심해졌다. 그리고 염의 목소리가 궁금하기도 했다.

며칠을 삐딱한 자세를 유지하던 훤은 결국 염에게 스승의 삼배를 올리고 자세를 바로하고

앉았다. 그렇다고 염을 스승으로 받아들여서가 아니었다. 단지 다른 공격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이전까지 배우고 있던 <중용>을, 염의 코를 납작하게 하기 위해 미리

예습까지 해 와서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염의 입에서 예상하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이제부터 천자문을 익히겠사옵니다.”

훤은 잔잔한 물결같이 아름다운 목소리에 순간 매료되었다가 얼른 정신 차리고 말을 되새겨

보았다. 어이가 없었다. 천자문은 4살 원자시절, 강학청(講學廳, 원자의 유아교육기관)에서

이미 다 배운 것이었다. 훤이 화를 버럭 내기도 전에 염은 책색서리(冊色書吏)를 불러 천자문

책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우물쭈물 거리며 훤의 눈치만 살피고 있던 책색서리는 염의 미소에

화들짝 놀라 책을 가지러 나갔다. 참다못한 훤이 소리쳤다.

“감히 나를 욕보이려 하는 것인가! 난 지금 <중용>과 <자치통감>등을 배우고 있는 몸이다!

그런데 천자문이라니!”

화가 나서 소리치는 훤과는 달리 염은 고요한 미소로 차분하게 말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소인은 이제껏 누군가를 가르쳐본 적이 없었사옵니다. 그래서 문학에

제수 받았을 때 상감마마께 고사(苦辭) 하였사온데, 제가 배운 대로만 가르치라 윤언

하시었습니다.”

“대체 그것과 천자문이 뭔 상관이란 말이냐?”

“처음 학문을 접할 때 천자문부터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제일 처음 배우는 것은 학문을

배우기 전의 마음가짐과 자세이옵니다. 세자저하께옵선 학문하기 전의 자세를 며칠 동안에

거쳐 이제야 익히셨으니 그 다음은 천자문을 하실 차례이옵니다. 소인은 배운 대로만 행하란

어명을 받잡습니다.”

훤은 화가 났지만 공격할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 사이 책색서리가 천자문을 가져다

서안에 올려두었다. 염은 조용히 책을 펼쳐 음부터 읽었다.

“천지현황”

하지만 훤은 분노로 인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염이 다시 미소로 음을 읽었다.

“천지현황”

이번에도 훤은 입을 다물고 화를 담은 눈빛만 염에게 보냈다. 염이 조용히 말했다.

“세자저하께옵선 이 한자들을 익히셨다 하시었는데, 그러면 天은 무엇이옵니까?”

“하늘이다!”

“그럼 하늘은 무엇이옵니까?”

훤은 언뜻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가만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뭐냐는 질문에 하늘을 정의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염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말만 생각하느라 쉽게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이제껏 중용을 배우고 계셨다 하시었습니다. 그럼 중용에 나오는 하늘은 어떤 모습입니까?”

분명 배운 것인데 이렇게 물어보니 훤은 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염이 말했다.

“하늘은 곧 도의 근원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명한 것을 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하였습니다. 그렇게 중과 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평안히 하고 만물이 육성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염의 코를 납작하게 하여 쫓아내리라는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있는 중이었다. 천자문의 제일

처음에 나오는 하늘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현재 배우고 있던 중용도 제대로

이해 못하고 있다는 따끔한 질책이었던 것이다. 훤이 나름대로는 공격을 했다.

“그럼 문학은 하늘과 땅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그것은 제가 답을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자저하께옵서 앞으로 학문을 하면서 배워 가셔야

하는 것이옵니다.”

“너도 제대로 설명을 못하는 것이 아니고?”

염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 후 말했다.

“저 또한 알고자 계속해서 학문을 하는 것이옵니다. <열자>에 따르면 맑고 가벼운 기운은

올라가 하늘이 되고, 흐리고 무거운 기운은 내려가서 땅이 되고, 하늘과 땅이 화합한 기운이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정기를 품어 만물이 변화 생성 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훤은 열자는 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귀가 솔깃해서 듣고 있는 훤에게 염이

다시 말했다.

“하늘과 땅이 화합한 인간의 정신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고, 육체는 땅에서 나누어 받은 것이라

합니다.”

“그런가? 그래서 인간이 죽으면 정신은 하늘로 돌아가고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염은 환하게 웃었다. 훤은 이미 진지하게 염의 말을 듣고 있었다.

“방금 세자저하께옵서 하신 말씀이 바로 <열자> 안에 있사옵니다.”

“음······. 그 책을 구해서 한번 읽어봐야 되겠구나.”

“그리고 <육도삼략>에는 하늘을 임금에 비유하고 신하를 땅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늘은 골고루 미치게 하는 것이고, 땅은 정하여진 대로 하는 것이라 하였기에······.”

이렇게 시작된 천지, 두 글자에 대한 수업은 수많은 책에 있는 것들을 설명하며 눈 깜박할

사이에 45분이 흘러가고 말았다. 염을 골탕 먹이리라는 목적은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염의 부드러움에 휘말린 훤은 매일 반복되던 생활에 조그마한 재미가 생겨나게 되었다.

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훤이 아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생소한 것들이었고, 알고 있던

것도 전혀 새롭게 와 닿았다. 그리고 염을 골탕 먹이기에는 훤이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한번쯤은 염을 곤혹스럽게 만들어 보고자 하는 일념으로 그 어떤 때 보다

열심히 공부 하게 되었다. 훤은 천자문을 배우면서 모르는 사이 많은 책을 같이 익혀갔고,

천지현황에는 왕과 신하, 왕과 백성의 도를 익혔고, 일월영측에서는 우주의 변화와 생성을

배워나갔다. 그러던 사이에 훤은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염을 좋아하고 있었고, 그 어떤

스승보다 따르고 있었다. 그래서 석강이 짧게만 느껴져 퇴궐하려는 염을 잡아 저녁을 같이

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게 되었다.

시강원 관리들의 임무 중에 돌아가면서 직숙을 하며, 세자를 밤에도 지도하는 것이 있었다.

이때는 학문이 아니라 생활지도의 책임이 강했다. 그런데 염은 직숙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서운하게 여긴 훤이 어느 날 염에게 물었다.

“난 너와 같이 놀고 싶은데 왜 밤에는 곁에 머물러 주지 않는 것인가?”

염은 조금 미안해하며 말했다.

“그 또한 저의 본분이긴 하나, 제가 아직 나이가 어려 오랫동안 입궐해 있기 힘들기도 하지만······.”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저에겐 누이가 하나 있사옵니다. 그 아이 때문에······.”

“너에겐 부모가 다 있지 않은가? 누이를 네가 돌봐야 하지는 않을 것인데?”

“그것이 아니옵고, 제가 그 아이와 있고 싶어서입니다.”

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여동생과 있고 싶다니, 이상한 취향의 사내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염이 누이를 생각하며 얼굴 한가득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말했다.

“전 제 누이와 같이 책을 읽는 것이 즐겁습니다.”

“같이 책을 읽다니? 네 누이가 책을 읽는단 말이냐? 너와 같이?”

“네, 그러하옵니다. 제가 가르치는 것이긴 하지만······.”

“그런데 예전에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은 내가 처음이라 하지 않았는가?”

염은 한동안 당황한 표정을 하더니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 아이는 다릅니다. 분명 제가 가르치기는 하지만 오히려 배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 누이가 몇 살인데?”

“저 보다 세 살 아래로 열넷 이옵니다.”

“그렇다면 나보다 두 살이나 아래가 아니냐? 그런데 너 같은 천재가 배우다니?

대체 무슨 말인가?”

“보통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고 하는데, 그 아이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 가지 의문을

제기 합니다. 그 아이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기 위해 저는 공부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즐겁습니다. 제 누이는 제게 가장 소중한 스승입니다.”

훤은 아무리 상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공부하는 여자란 신기한 존재였다.

“내게도 여동생이 있는데, 민화공주라고······. 본 적은 없겠지만 들은 적은 있을 것이다.”

“아! 한번 뵈었던 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 바로 앞에서. 면부(面膚, 왕족의 얼굴)를 뵈옵진

못하였지만.”

“그래? 아무튼 민화공주도 나 보다 세 살 아래인데 어찌나 떼쟁이에다 제멋대로인지. 아는

글자라고는 하늘 천 따지 밖에 모르고. 열세 살 여자나, 열네 살 여자는 거기서 거기 아닌가?”

이때 비현각 바로 밖에서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비현각 문이 벌컥 열렸다.

문 밖에는 민화가 울면서 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옷은 당의 차림이 아니라 생각시옷을

어디서 훔쳤는지 입고 있었다. 내시들과 궁녀들이 일제히 당황하여 우왕좌왕했다.

훤이 호통 쳤다.

“너 그 꼴이 무엇이냐? 그리고 어찌 이곳에 감히 들어온단 말이냐?”

민화는 엉엉 울면서 훤에게 다가가 사정도 없이 훤을 때리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미워요! 미워!”

“왜 그러는 거냐? 뭐야!”

“날 험담했어!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사람 앞에서 저를 험담할 수 있어요?

미워! 미워! 미워!”

“대체 왜 이래!”

훤이 화를 버럭 내도 민화는 계속해서 훤을 때렸다. 뒤늦게 민상궁이 놀라서 공주를 찾으러

오자 민화는 얼른 염에게 다가갔다. 염은 공주의 얼굴을 보면 안 되기에 재빨리 고개를

숙였지만 민화는 염의 양 볼을 손으로 감싸 쥐고 강제로 자기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아니다! 세자저하 말은 모두 엉터리다. 난 떼쟁이가 아니라 정숙한 여인이니라. 천자문도 다

배워간다. 그러니.”

민화는 결국 염에게 하던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엉엉 울면서 상궁들 손에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염과 훤은 놀라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한동안 있었다. 훤이 옆의 내시에게 물었다.

“대체 쟤 왜 저러냐? 생각시 옷을 어디서 훔쳤으며 여기엔 뭐 하러 온 것인지.

하여간 철 없다니까.”

내시는 아무 말 없이 염을 한번 본 뒤 빙그레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었다. 민화의 난입으로 인해

염의 누이에 대한 대화는 끊어졌다. 하지만 며칠 가지 않아 또 다시 염의 누이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나오는 세자 간식이 있었다. 원자시절엔 수업시작 전엔 반드시 조청 두

숟가락을 먹고 시작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주로 당분으로 되어 있는 간식을 먹었다. 당분이

학습효과를 높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루는 중국에서 수입해 오는 검은 엿이 간식으로

나왔다. 단연 최고급품의 간식이었다. 훤은 염과 같이 먹기 위해 그것을 먹지 않고 기다렸다.

그런데 먹으라고 준 엿을 염은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왜 안 먹느냐? 좋아하지 않는 것이냐?”

“그게 아니옵고······, 제 누이가 좋아할 것 같아서······.”

“아! 그때 말했던 질문 많이 한다는 그 누이? 동생을 많이 귀여워하는 것 같구나. 좀 유별난 것

아니냐?”

염은 멋쩍은지 웃기만 했다. 훤은 염의 아름다운 미소를 보자 갑자기 염의 여동생이 궁금했다.

“혹시 너를 많이 닮았느냐? 널 닮았다면 굉장히 예쁠 것 같은데.”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하는 염의 표정에서 이미 누이의 사랑스러움이 묻어났다. 왠지

누이의 얼굴을 본 것처럼 훤의 마음이 이상야릇하게 설레었다. 처음 느껴보는 사춘기 소년의

감정이었다.

“저기, 혹시 누이의 이름이 어찌 되는 것이냐?”

“네? 그건 아뢸 수가 없사옵니다. 그 아인 아직 당호(堂號, 여자의 호)도 없사옵고.”

비록 아직 어린 여자이긴 하지만 사대부가의 여자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아선 안 되는

것이었다. 굳이 이름을 불러야 한다면 당호를 불러야 하는 것이 법도였다. 더군다나 세자 앞에

미혼 처자의 이름을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름만 묻는 것인데 뭐가 그리 어려우냐? 너의 성이 허씨이니 앞은 허일 테고, 이름은?”

염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이 없었다. 훤은 어쩐지 꼭 알고 싶었다. 그래서 염을 협박했다.

“흠! 내 너를 통하지 않고 네 누이의 이름을 알아내려고 하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가 있다.

그러면 오히려 일이 더 커질 텐데?”

훤은 한다면 하는 고집쟁이였기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연우, 연우라고 하옵니다.”

“연우라······. 혹여 보슬비란 뜻의 연우(煙雨, 안개비 또는 보슬비)이냐?”

“네, 그 한자를 쓰옵니다.”

“연우······.”

훤은 마음속으로도 몇 번이나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어여쁘다. 왠지 모습 또한 어여쁠 것 같구나. 한번쯤 보고 싶다.’

염이 수업을 시작 하려고 하자 훤은 얼른 옆의 내시에게 귓속말을 했다. 내시는 바깥으로

나가더니 수업이 끝나자 나타나 작은 죽통을 염에게 가져다주었다. 염은 눈으로 의문을 던졌다.

“네가 먹지 않아 따로 검은 엿을 준비했다. 가져가서 누이와 같이 먹도록 해라.”

이때 까지만 해도 엿을 보내는 훤이나 가져가는 염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엿을 보내놓고 밤에 곰곰이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이 나라의 세자인 몸으로

한 여인에게 선물을 보낸 것이 아닌가. 그것도 둘 다 혼기가 된 나이였다. 훤은 연우가 자기가

보낸 선물을 보고 어떤 반응일지 궁금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춘기 시절의 훤은

얼굴도 모르는 여자로 인해 춘밤을 설쳤다.

#7

“그래, 뭐라고 하던가?”

다음 날 보자마자 대뜸 던진 질문이 염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훤이 답답해하며

답을 재촉했다.

“어제 검은 엿 말이다. 맛있게 먹었느냐?”

“아! 네, 맛있게 먹었사옵니다.”

훤은 그 뒤의 말을 기다렸지만 염은 뒷말 없이 책을 펼쳤다. 답에 주어가 생략되어 있어서

염만 맛있었다는 건지, 아니면 연우가 맛있게 먹었다는 답인지 애매모호했다.

“연. 아니, 네 누이도 맛있게 먹었느냐?”

“네. 무척이나 좋아하였사옵니다.”

훤은 기분이 좋아져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훤이 진정 궁금한 것은 연우가 엿을 맛있게 먹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엿을 통해 연우에게

전해진 자신의 모습이었다. 염이 자신을 연우에게 어떻게 말했는지에 대한 궁금함, 그리고

연우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궁금함이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물어보다간

경망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처음 염을 만났을 때 왜 점잖게

행동하지 않았는지 후회스럽기까지 했다.

“어흠! 저기, 혹여 날 험담하진 않았겠지?”

“예? 무슨 말씀이온지······?”

“그러니까 연우낭자에게 나에 대해 별말 없었는가 말이다.”

“네, 세자저하에 대한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으니 걱정하시지 마옵소서.”

“뭐라!”

훤이 화가 나서 소리치자 염은 의아한 눈길로 훤을 보았다. 훤은 얼른 목소리를 가다듬고

최대한 점잖게 말했다.

“어흠! 그러니까 내 말인 즉은, 어제 가져간 엿은 누가 준 것이라 말했는가 하는 것이지.”

“그냥 궁에서 얻어온 것이라고만 말하였사옵니다. 혹여 소인이 잘못 하였사옵니까?”

훤은 기운이 탁 빠졌다. 염의 말은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은 자신이 준 선물은 허공에

떠버린 격이었다. 한동안 인상을 구기고 앉아 있던 훤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런 것 정도는 말하여도 되느니. 엿을 보내준 이가 나라는 것쯤은 말해도 되는데.”

억울한 훤의 마음을 알 길이 없었던 염은 그대로 수업을 시작해버렸다. 이대로 물러나기 싫었던

훤은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도 내시를 시켜 죽통 하나를 가져왔다. 오늘 간식인

콩강정과 호두강정이었다. 콩과 호두는 머리가 좋아지는 음식이라 하여 세자의 간식으로 자주

나오는 것 중의 하나였지만 일반 민가에서는 호두는 귀한 음식이었다.

“흠! 별것 아니니 가져가거라. 그리고······, 내가 주더라는 말은 해도 된다. 이왕이면 이 나라의

세자에 대해 좋은 말만 해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야 백성들이 안심할 것이 아니냐.

에, 그리고······, 내가 처음에 너에게 예를 갖추지 않은 것은 내 인품이 못나서가 아니라 네가

스승으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시험한 것뿐이니 곡해서 말하지는 마라.”

염은 말없이 환한 미소만 지었다. 갑자기 훤이 생각난 듯 말했다.

“아차! 내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내 비록 지금 너에게 천자문을 배우고는 있지만 이는 글자를

몰라서가 아니라 네가 독특해서 이니라. 난 분명 어릴 때 천자문은 배웠느니라! 이는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네, 소인도 알고 있사옵니다.”

훤은 염의 미소에 안심이 되긴 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좀 더 그럴 듯한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른 스승에게서는 현재 <대학연의>를 배우고 있다. 꼭 전하도록 해라.”

“네? 전하다니, 그 뜻이 무엇이옵니까?”

훤은 융통성 없는 염 때문에 속이 탔다. 그렇다고 연우에게 전해달라는 말이란 것을 자기

입으로 하기도 민망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을 알아두란 말이다. 그리고 난 학문을 사랑하는 세자다. 거기다 육예(六藝,

선비가 익혀야 둬야할 여섯 가지 교양. 예절, 음악, 활쏘기, 승마, 붓글씨, 수학)도 두루 익히고

있고. 오늘 활쏘기에서 총 열 발 중, 여섯. 아니, 일곱 발을 명중했느니.”

염은 갑자기 훤이 왜 이런 말들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미소만 지었다. 훤은 자기 입으로 자기 칭찬을 계속 하자니

멋쩍고 자신이 경박해 보였다. 그래서 옆의 내시를 찌릿하고 째려보았다. 내시가 바로 눈치를

채고 훤의 말을 도왔다.

“네, 참으로 훌륭한 솜씨였사옵니다. 세조대왕께옵서도 울고 가실 명궁이었사옵니다.”

세조대왕의 활솜씨는 명궁 중에 명궁이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런 왕에 비교해서 말해주자

훤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뭐, 그 정도는 아니고. 하하. 아! 내 작금(昨今)은 시문 또한 즐기고 있다네. 들어 볼 텐가? 어흠!

날이 새는 빛이 다락 모서리를 밝히는데, 봄바람은 버들가지에 눈을 틔운다. 첫 새벽을 알리는

소리, 이미 침문(임금의 처소)에 문안하러 가고 없네. 혹여 아는 시인가?”

“네, 김부식이 지은 <동궁(세자궁)에 붙이는 봄의 글(東宮春帖子)>이 아니옵니까.”

“아, 이미 알고 있구나. 음······.”

자랑하고 싶었던 마음에 풀이 죽었다. 하지만 여기서 꺾일 훤이 아니었다.

“여기 시에서 세자가 모두 잠든 이른 새벽에, 임금께 자식으로서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문안을

드리러 간 모습이 참 아름답지 않은가. 아마도 옛날 김부식이 지금의 나의 모습을 보았음이야.”

“정녕 훌륭하시옵니다. 언제나 그러기는 쉬운 일이 아니온데.”

“뭐, 언제나는 아니고······. 아바마마께옵서 워낙에 공무로 바쁘신 분이라 자주는 못하지만.

이제부터 매일 새벽에 일어나 문안을 드릴 거라네. 그것이 바로 효도가 아니겠는가.”

옆의 내시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힘껏 참았다. 어떻게 해서든 멋진 모습을 말하려고

하는 훤의 모습도 귀엽고, 그것을 진지하게 듣고 있는 염의 모습도 재미있었다. 훤은 연우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듣고 싶어서 은근슬쩍 말을 했다.

“네가 그 시를 알고 있다면 네 누이도 알고 있는가? 같이 책을 읽는다 하였으니······.”

“네, 그 아이는 시를 좋아하옵니다. 그래서 저 보다 더 많은 시를 알고 있사옵니다.

예전에 그 시를 읽고 모든 세자저하가 그러한지 궁금해 한 적이 있었사옵니다.”

훤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몸이 저절로 염 쪽으로 쏠렸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가?”

“그때는 제가 과거에 급제하기 전이라 세자저하를 뵈옵기 전이었사옵니다.

그래서 잘 모르겠다고만 답하였사옵니다.”

훤은 실망스러웠다. 그렇지만 자기를 만나기 전이라니 뭐라고 하기도 이상했다. 괜히 그 시를

먼저 읽은 것에 대해서도 원망스러웠다. 훤은 풀이 죽었지만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러면 어떤 시를 좋아하는가?”

“시라면 다 좋아하는 것 같사옵니다만······. 얼마 전, 그 아이에게 작은 시책을 선물하여

주었사온데, 그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사옵니다.”

“어떤 시였는데?”

“새벽등불이 정인의 지워진 화장을 비추는데, 이별을 말하려니 애가 먼저 끊어지네. 차마 말

못하고 지는 달이 반쯤 비추는 뜰로 문 열고 나오니, 살구꽃 성긴 그림자만이 옷에 가득하구나.

······이 시였습니다.”

훤은 처음 들어보는 시였다. 그렇지만 연우가 슬퍼했다니 자기도 슬퍼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시를 읽고 눈물을 흘리는 여인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아리따워, 시가 아닌 그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슬프구나. 연우낭자에게 나 또한 그 시에 슬퍼하더란 말을 전해주게. 꼭 전해줘야 하네.”

“네? 아, 네.”

염은 영문을 몰랐지만 같은 시를 같은 감정으로 공유한다는 것을 전하라는 단순한 뜻으로

받아들였다. 염은 비록 학문은 높았지만 인간의 연정에 관한 부분은 상당히 뒤떨어진

소년이었기에, 훤이 연우에게 보이는 관심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못했다.

“그런데 누구의 시인가?”

“고려조에 정 포(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란 사람의 <양주객관별정인(梁州客館別情人)> 이란

시입니다.”

“음. 참! 시를 즐기는 세자라는 것도 꼭 말해야 하네.”

염이 인사하고 나가자 훤의 마음은 급해졌다. 얼른 책색서리에게 명하여 시책이란 시책은 다

가져오라 명하고 없는 시책은 구해오라는 명까지 내렸다. 그리고 열심히 시를 읽었다.

다음 날 새벽부터 자선당(資善堂, 세자가 기거하는 곳)의 움직임은 다른 날과 달리 분주했다.

세자가 새벽 파루의 북소리가 울리기 전에 꼭 일어나야 한다고 명했기 때문이었다. 내시가

조심스럽게 깨우자 훤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기는 했다. 하지만 정신까지 잠에서 쉬이 깨어나진

못했다. 비몽사몽 하는 훤을 보좌하여 궁녀와 내시는 칫솔(나무토막에 돼지털이나 말총을

촘촘히 박아 만든 고급품. 현대의 칫솔 모습과 비슷하리라 추정됨)에 고운소금과 당근가루,

금가루를 묻혀 양치를 시키고 세수까지 시켰다. 그동안도 훤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내시가 걱정되어 물었다.

“다시 주무실 것이옵니까? 아니면······.”

여전히 눈을 못 뜨고 잠속을 헤매면서도 훤은 말했다.

“아니다. 아바마마께 문안드리러 갈 것이다. 말을 했으니 행해야 한다.”

훤의 고집으로 내시는 졸고 있는 훤의 옷을 갈아입혔다. 의관을 정제할 때도 훤은 내내 졸고

있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왕의 침전으로 갔다. 가는 길에서조차 훤은 졸면서 걸었다.

뒤를 따르는 내시들과 궁녀들은 훤이 비틀거릴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세자가 침전에

나타나자 왕을 모시는 내시가 나와 왕의 침소로 세자를 안내했다. 왕은 이미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세자가 문안인사를 하자 왕은 기쁘게 맞았다.

“웬일로 우리 세자가 이리 일찍 문안을 나선 것이냐?”

“효를 다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동안 아침마다 문안을 드리지 못한 마음이 무거웠사옵니다.

이제부터 마음을 다해 이리 할 것입니다.”

여전히 눈은 게슴츠레한 상태였지만 말만큼은 또렷하게 했다. 왕은 굉장히 흡족한 모양인지

연신 웃고 있었다.

“우리 세자가 이리 기특한 것을 보니 모든 대신신료들에게 자랑해도 될 것 같구나. 아니 그런가,

상선?”

“네, 그러하옵니다.”

옆의 내시까지 맞장구를 치자 훤의 어깨는 더욱 으쓱해졌다. 게다가 대신신료들한테 자랑을

한다는 것은 염뿐만 아니라 홍문관 대제학으로 있는 염과 연우의 부친에게도 말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여러모로 연우에게 자신의 좋은 모습이 전해질 방도가 많아 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신이나 한 술 더 떠서 말했다.

“아바마마, 초조반은 드셨사옵니까?”

“아니다. 아직 전이다. 혹여 초조반까지 살피려는 것이냐?”

“네, 시선(視膳, 세자가 왕의 수라를 살피는 것) 또한 효이기 때문입니다.”

훤의 생글거리는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왕은 상선에게 일러 초조반을 가져오라 명했다. 그리고

세자의 몫도 같이 가져오라고 말했다. 잠이 덜 깬 훤의 얼굴을 보며 왕이 말했다.

“요즘 예학(睿學, 세자의 학문)은 어찌 되어 가느냐? 혹여 새 문학이 마음에 안 드는 점은

있느냐? 네가 원한다면 바꿔 주겠노라.”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있사옵니다.”

“회강(會講, 한 달에 두 번, 세자가 배운 것을 복습·평가하는 강의로 왕과 시강원 관리 모두가

참석) 때 보니 문학과의 학습 진도는 따로이 없다하여 하지 않아 걱정되었느니라.

문학이 알아서 하리라 생각하고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만.”

“문학은 뛰어난 사람이옵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훤은 초조반을 끝내고 신난 걸음으로 교태전으로 갔다. 조모인 대비는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분이기에 가지 않고 모친에게 간 것이었다. 중전 또한 말끔히 의관을 갖추고 훤을 맞아 칭찬을

해주었다. 문안을 끝내고 자선당으로 돌아온 훤은 그사이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그래서

마당에 서서 열심히 체조(아기 때부터 중요한 학습 중의 하나)를 했다. 그 무엇을 해도 신나고

행복했다. 내시에게 일러 자기가 오늘 한 일을 염에게 꼭 말하라는 것도 잊지 않고 몇 번이나

되새겼다. 그리고 조강과 주강 짬짬이 시를 읽으며 어서 석강이 오기를 기다렸다.

석강 시간이 되자 어김없이 염이 왔다. 훤이 내시를 꾹꾹 찔러 말하라고 시키자 내시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세자저하의 효심이 어찌나 지극하신지 상감마마께옵서 참으로 사랑하십니다. 새벽 파루의

북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의관을 정제하시고 상감마마께 문안을 하시옵고, 시선도 하시었습니다.”

“세자저하께옵선 모든 자식의 모범이시옵니다. 어찌 본받지 않을 수 있나이까.”

염의 진심어린 칭찬에, 훤은 피곤하더라도 언제나 문안을 하리라 다시 한 번 마음먹었다.

그리고 어제의 간식 선물과 더불어 자신의 말이 전해졌는지 궁금하여 물었다.

“강정은 맛있게 먹었느냐?”

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아직 먹지 못하고 제 방에 두었습니다.”

“왜? 무슨 일이 있었느냐?”

“그게······, 제 누이가 어제 또 부친께 종아리를 맞았사옵니다. 하여 미처 강정을 전할 경황이

없었사옵니다.”

“혹여 연우낭자가 말썽꾸러기인 건가?”

“그런 뜻이 아니옵고, 여자인 몸으로 너무 많은 책을 읽기에 부친으로부터 금서를

당하였사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기고 매일 동호(독서당, 서재)에 숨어들어 책을 몰래

훔쳐내 읽곤 합니다. 매일 종아리를 맞아도 다음날 또 책을 훔쳐 읽으니 당해낼 재간이

없사옵니다. 그러니 제 누이의 종아리엔 회초리 자국이 지워질 날이 없사옵니다.”

연우의 종아리에 새겨진 회초리 자국에 훤의 가슴이 괜히 아파왔다. 마치 자신의 종아리도

욱신거리는 듯했다. 연우의 부친이 원망스러운 마음에 퉁명스럽게 말했다.

“홍문관 대제학은 학식이 높기로 이름이 있는 자가 아니냐? 그런데 어찌 여식에게는 그리 박한

것이냐. 네가 책을 읽는 것에는 회초리를 들지 않을 것인데. 많이 맞았느냐?”

“네, 어제는 특히 심하게 맞았기에 걱정이 되옵니다. 허나 아마 지금도 책을 훔쳐내 읽고 있을

것이옵니다. 어제 종아리에 약을 바르면서도 읽고 싶은 책에 대해 제게 이리저리 물어보았기에

필시 그러할 것입니다.”

“허허. 많이 맞았단 말이지, 많이. 그 여린 종아리를 때릴 데가 어딨다고. 참으로 너무 허이.

약을 바를 정도로 많이 맞았단 말이지. 허허, 참.”

훤은 속이 상해 혼잣말처럼 계속 중얼거렸다. 이리저리 중얼거려 보아도 속상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윽고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 혹여 무슨 책을 읽고 싶어 하더냐?”

“사마천의 <사기>이옵니다. 읽던 중에 압수를 당하였기에 뒤를 몹시도 궁금해 하였사옵니다.”

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번에는 자신 있게 말했다.

“나도 그 책은 좋아하느니라. 연우낭자도 그런 책을 좋아한다니······.”

훤은 안타까운 마음과 들뜨는 마음이 공존하는 상태로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염에게 기다리라고 해놓고는 춘방책고(세자 전용 도서관)로 달려갔다. 그곳

책색서리에게 <사기>가 있는 곳을 물어 손수 몇 권을 골라잡았다. 그리고 옆에서 대신 들겠다는

것을 거절하고는 책을 껴안듯이 들고 염 앞에 가져다놓았다. 훤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거 가져가서 연우낭자에게 전하라. 그리고 이 뒤 권도 차례로 보내줄 것이니 오늘은 이것만

가져가거라.”

염은 상당히 당황했다. 세자가 읽는 책을 선뜻 받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친절을 베푸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연우를 향해서임을 알 수 있었기에 어찌 할 바를 몰라

눈앞의 책만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었다.

매일 책을 훔쳐내는 연우 때문에 집안에 들어온 부친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없어진 책을

점검하는 일이었다. 그리고는 어김없이 회초리로 이어졌다. 어제는 채워둔 동호의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갔기에 다른 날보다 더 많은 매질을 당하였다. 이 책들을 가져가면 한동안 부친

몰래 읽을 수 있을 테고, 그러면 연우의 종아리의 멍 자국도 어느 정도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염은 연우의 종아리를 위해서라도 이 책들을 챙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잠시 빌려갔다가 다시 가져오겠사옵니다. 그리하면 되올지요?”

“어? 그래, 그럼. 그걸 다 읽으면 다시 다른 책을 빌려 가면 되겠구나. 그렇게 하라.”

염이 책을 빌려가기 시작하면서부터 훤의 연우에 대한 마음은 더욱 깊어졌다. 염이 빌려가긴

하지만 읽는 것은 연우였기에, 훤은 빌려준 책을 한 번 더 읽게 되었고 다 읽고 가져온 책도

한 번 더 펼쳐보게 되었다. 때때로 훤이 읽지 않은 책도 빌려갔다. 그러면 훤 또한 그 책을

반드시 읽어보았다. 그렇게 연우가 읽는 책으로 연우를 좇았다. 혼자 연우의 모습을 이리저리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그리움이 되었다. 간간히 염을 통해 전해 듣는

연우의 모습을 접할 때마다 훤은 마냥 신기하여 큰소리로 웃곤 했다. 그러다가 차차 염의

입에서 연우가 세자에 대해 하는 말들이 섞여 나오게 되었다. 별다른 말들은 아니었다. 이렇게

자주 책을 빌려주는 세자는 마음이 넓다거나, 감사하다거나 하는 인사말 수준이

대부분이었지만 훤에겐 특별한 언어로 들렸다.

그러던 어느 날, 훤은 결심을 했다. 염의 입으로 전해 듣는 연우의 모습만으로는 오히려 갈증만

더 깊어졌기에 직접 연우에게 편지를 써 보낼 욕심을 내고야 말았다. 하지만 이것도

고민거리였다. 융통성 없는 염이 편지를 가운데서 전해줄 리가 만무하거니와 연우 또한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스러웠다. 아직 혼인 전인 세자가 규방의 처녀에게 연정을 품은 편지를

보낸다면 자칫 큰 문제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여건도 훤의 고집을

꺾지 못하였다. 문제는 어떤 내용의 편지를 쓰느냐는 것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하던 훤은

연우가 시를 좋아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때부터 시책이란 시책은 모두 뒤졌다. 그중 연우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담긴 시를 선별하였다. 그리하여 단 한편의 시를 종이에 곱게 적었다.

자신의 필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번이나 다시 쓰고 다시 써서 그중 가장 멋지게 써진 것을

봉서로 봉했다. 아무 덧붙이는 말없이 딱 한편의 시만 적었다. 혹여 문제가 되면 그냥 시만

적었을 뿐이라 발뺌하면 그만이고, 연우가 세자의 경망함을 탓해도 그저 좋은 시여서 읽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라 변명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연우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다면

분명 답시를 보내 줄 것이란 기대도 했다. 그리고 왠지 그동안 전해들은 연우란 여인이면

기대해 볼만 했다.

바다 위에 밝은 달이 떠올라, 하늘 저 끝까지 고루 비추네. 사랑하는 연인들 서로 멀리 있는

이 밤을 원망하여, 님 그리운 생각에 잠 못 이뤄 하노라. 촛불 끄고 방안에 가득한 달빛

아끼다가, 저고리 걸치고 뜰에 내려서니 촉촉이 이슬이 젖어 오네. 손으로 가득 떠서

보내드릴 수 없는 터에, 다시 잠자리에 들어 님 만나는 꿈이나 꾸어보리라.

<달밤에 임 그리며(望月懷古)> - 장구령(당나라 현종 때의 재상 겸 시인)

훤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빌려주는 책 사이에 봉서를 끼워 넣어 염에게 건넸다. 예상한 대로

염은 펄쩍 뛰며 봉서를 거부했다. 훤은 시치미를 뚝 떼고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했다.

“별 것 아니다. 내 어젯밤 읽은 시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 마침 네 누이가 시를 좋아 한다기에

그 시 한편만 적었을 뿐이다. 네 누이가 진정 시를 즐기는 이라면 내가 보내는 이 시에 대한

감상을 들려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동안 내가 빌려 주는 책과 그 봉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하오면 이 봉서는 두고 그 시책을 빌려주시옵소서. 이는 아니 될 일이옵니다.”

훤은 염의 이 같은 완강함에 순간 당황했다. 열심히 변명할 말을 찾다가 겨우 말했다.

“시책이 전부 좋았던 것이 아니라 그 시 딱 하나만 좋았을 뿐이다. 그리고 아직 그 시책을 다

못 읽었기 때문에 빌려 줄 수가 없다.”

“굳이 시를 보여주고 싶으시다면 다 읽으신 연후에 빌려주시옵소서. 이건 아니 가져가겠습니다!”

염이 강경한 만큼 훤도 강경하게 소리를 높였다.

“가져가라 하였다! 이 봉서를 뜯어 볼 사람은 네가 아니라 네 누이이니, 네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네 누이가 뜯어보고 정 예의가 아니라 여기면 다시 내게 가져오면 되는 것이고, 시에

대한 감상을 들려주고자 한다면 그 또한 네 누이의 몫이 아니겠는가. 이는 네 누이가 판단할

일이다.”

“제 누이는 규방의 정숙한 여인입니다. 기방의 여인이 아니옵니다!”

“네가 나를 어찌 보고 그리 말하느냐! 내가 기방의 여인이나 희롱하는 못난 사내란 말이냐?

난 너의 인품을 높이 사는 것처럼 네 누이의 인품 또한 높이 사기에, 같이 서책을 나누고 감상을

나누려 하는 것이다. 감히 나의 서책을 같이 보는 여인을 내가 기방 여인으로 취급할 리가

있겠느냐?”

여전히 염은 봉서를 넣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훤은 눈을 부릅뜬 채 염을 노려보고

있었다. 옆의 내시는 잔뜩 긴장하여 둘을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염이 봉서만큼은 안 가져 갈

모양이었다. 내시는 만약에 이대로 거절당한다면, 어제 오늘 내내 들떠 시를 고르고 서체

연습을 하던 훤이 가여울 것 같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훤을 거들었다.

“문학, 저 또한 같이 그 시를 읽었사옵니다. 당대 명재상의 시이니 그리 이상히 생각하지

마십시오. 경치 좋은 누각에 올라 서로의 시를 나누는 선비들이 서로를 희롱하는 것은 아니지

않사옵니까? 그리고 규방의 부녀자들 또한 서로의 시와 글을 나눈다 들었습니다. 이 봉서 또한

그리 생각 하십시오. 제가 생각건대, 문학의 누이는 나이가 어려 어느 누구와도 생각을 나눌 수

없음에 외로울 거라 생각하옵니다. 아무 뜻 없는 이 봉서에 문학께옵서 이리 하시니 세자저하만

이상한 분이 되어버릴까 저어되옵니다.”

이쯤 되자 염은 안 가져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안의 내용도 모른 채 버티다간 세자를 욕보이는

것이 될 위기였고, 그동안 서책은 가져 가 놓고 시 한편을 안 가져가겠다는 것도 어찌 보면

모순이었다. 애초에 검은 엿부터 가져가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염은 마지못해 서책과 봉서를 같이 가져갔다.

무척이나 길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다음날을 기다리기가 지루할 지경이었다. 어쩌면 염의 손이

빈손일 것이라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고, 어쩌면 시에 대한 짧은 감상이 전부인 서찰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긴 밤이 지나고 새벽 문안까지 마치고도 하루는 더디게 흘러갔다.

애타게 기다리던 석강이 되었다. 비현각으로 들어서는 염의 모습에 훤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런데 손에는 편지는 없고 간식을 넣어 보낸 죽통만이 있었다. 훤이 어리둥절하여 염을

보았다. 염은 세 번의 절을 하고 훤 앞에 죽통을 건넸다. 그리고 품속에서 하얀 봉서를 하나

꺼냈다. 순간 훤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기다렸던 것이지만 직접 눈에 들어오니 그 순간은

숨이 막혔던 것이다. 염의 손에서 봉서를 받았다. 언제나 염에게서 나는 난향이 그 봉서에

스며있었다. 그래서 연우의 향도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봉서에 정신이 팔린 훤은 죽통은 늦게

눈에 들어왔다. 죽통은 빈 것이 아니었다. 안에 흙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게 무엇이냐?”

“책을 빌려주신데 대한 제 누이의 선물이옵니다.”

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자세히 보니 죽통을 화분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무엇을 심은 것이냐?”

“그건 저도 잘 모르옵니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고 기다리시면 무엇인지 알게 되실 것이라

하였습니다.”

훤은 흥분되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염이 수업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봉서는 품안에 고이

품었다. 그리고 죽통은 행여나 넘어질 새라 옆에 조심스럽게 두었다. 수업을 끝내고도 염은

걱정스러운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인사하고 돌아갔다. 훤은 다른 때와 달리 염을 붙잡지 않고

얼른 돌려보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내시들도 저 멀리로 가 서라고 명했다. 근처를 다 물리친

훤은 그제야 품속의 봉서를 꺼냈다. 하늘에 비춰보니 안에는 분명 글씨들이 적혀있었다.

다시 한 번 내시들을 더 멀리 물러가라 손짓한 뒤에 봉서를 열었다. 안에는 훤이 보낸 내용처럼

단 한편의 시만 있었다.

서로 그리는 심정은 꿈 아니면 만날 수가 없건만, 꿈속에서 내가 님을 찾아 떠나니 님은 나를

찾아 왔던가. 바라거니 길고 긴 다른 날의 꿈에는, 오가는 꿈길에 우리 함께 만나지기를.

<서로를 그리는 꿈(相思夢)> - 황진이

짧은 시였다. 하지만 몇 번을 읽고 또 읽어 보았다. 어제 보낸 시에 꿈속에서나마 만났으면 하는

마음을 적어 보낸 것이기에, 서로의 꿈에서 만나지지 못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찾아갔기에 못

만난 것이란 이 답시에서 연우의 또 다른 일면을 보았다. 그리고 연우 또한 훤이 연우를 그리는

것처럼 같은 마음이란 확신이 들었다. 몇 번을 감격하여 읽으니 차차 연우의 서체가 눈에

들어왔다. 먼저 보낸 자신의 서체가 부끄러울 정도로 정갈하고 어여쁜 서체였다. 줄 간격도

딱 맞춰 열네 살 소녀가 적은 한자체 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품격이 넘치는 서체였다.

한자에서 삐침으로 올라가는 부분도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딱 맞춘 것이 심성 또한

그러하리란 느낌이 들었다. 훤은 멀리 서 있는 상선내시관만 살짝 오라 명했다. 내시가 와 서자

훤은 자랑하듯이 서체를 보여주었다.

“보아라. 이게 어디 열네 살 여자가 쓴 서체가 하겠는가. 혹여 이런 솜씨를 본적 있는가?”

내시 눈에는 내용보다 서체가 먼저 들어왔다.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보통 서체가 아니었다.

서체에서 고귀한 선비의 품격이 스며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여인의 아름다움 또한

가지고 있었다.

“진정 열네 살이라 하옵니까?”

“나도 놀랐느니. 한자를 아는 여인도 신기하지만 이런 서체를 구사하는 여인 또한 신기하구나.

민화공주와는 단 한 살 차이일 뿐인데 이리 다르다니.”

“홍문관 대제학은 본인뿐만 아니라 자식까지 이리 뛰어나다니. 문학도 감탄에 감탄을

하였사온데, 이건······.”

훤이 연우에 흠뻑 젖어 있던 중에 황금빛 햇살이 가득한 하늘에서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현각에 앉아 내리는 보슬비를 바라보고 있던 훤은 갑자기 일어나 죽통화분을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주위에서 만류를 해도 속 안에서부터 뜨거운 감정이 솟구친 훤을 말리기엔

역부족이었다. 훤은 죽통화분을 비를 맞게 두고는 마당 한가운데로 나가 섰다. 황금빛 햇살과

어울려 보슬비조차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빗물인 듯, 바람인 듯 조용히 내리던 보슬비는 어느새

훤의 옷자락과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훤은 팔을 벌려 보슬비를 품에 안아보았다. 훤의 품안에

뛰어든 보슬비는 열여섯 소년인 훤의 얼굴을 타고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렇게 훤의 온몸을 적시며 보슬비는 해와 더불어 있었다.

#8

행복한 마음으로 보슬비를 맞고 있는 훤과는 달리, 훤을 보좌하고 있는 자선당의 모든 사람들은

사색이 되어 각자 자기 위치에서 바삐 움직였다. 세자가 비를 맞아 자칫 감기라도 걸리면

그 책임은 온전히 그들의 몫이 되었다. 제일 먼저 자선당의 동쪽 온돌에 불을 지피고,

대형 가마솥 몇 군데에서 물을 끓였다. 그리고 자선당 내의 북수간에 있는 큰 함지박에 뜨거운

물을 붓고 인삼을 짓이겨 끓인 물을 섞었다. 차차 비가 그치자 훤은 죽통화분으로 다가갔다.

두 손으로 감싸듯 들고 한참을 보던 훤은 환한 미소로 흙냄새를 맡아보았다.

상선내관이 다가와 말했다.

“마마, 어서 안으로 드시옵소서. 감모(感冒, 감기)에 드실까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행복한 자에게 찾아오는 병도 있다더냐?”

“마마, 아무리 먼지잼(조금 오다가 그치는 비)이라고 하나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훤은 행복한 마음이었기에 더 이상 버티지 않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알았다. 내가 젖었으니 상경내관이 비현각 안에 둔 서찰을 정중히 하여 나를 따르라.”

훤은 손수 죽통화분을 들고 자선당으로 갔다. 북수간에 들어서서 상경내관에게 화분을 건넨 뒤,

옷을 벗기는 시중을 받았다. 흰 적삼차림이 되자 이제껏 궁녀들이 옆에서 시중드는 것이

아무렇지 않았는데 갑자기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내관 서너 명만 두고 다 물러가라

명했다. 그리고 목욕은 왕과 왕비를 제외하고 세자의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유모가 시켜주어야 하지만, 훤은 이 또한 물러가라 명했다. 그래서 이때부터 내관 몇 명만이

훤의 목욕시중을 들게 되었다. 훤은 망건과 상투를 풀고 함지박 안으로 들어가 몸을 푹 담갔다.

물에서 진한 인삼향이 올라왔다. 훤은 함지박 안에서도 상경내관이 든 죽통화분과 그 품에 든

서찰만 신경을 썼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시에 대한 답을 시로 받았으니, 이젠 개인 안부를

물어 봐도 될 것만 같았다. 훤은 물속에서 참방거리며 건네 볼 문구에 대해 고민했고, 아주 좋은

핑계거리가 오늘 받은 죽통화분이면 충분하리란 확신이 섰다. 빨리 편지를 쓰고픈 마음에 얼른

목욕을 마치고 동쪽 온돌방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내관들이 서안을 내쫓고 두꺼운 이불을

훤에게 덮어 씌웠다.

“서안을 가져와라! 내 쌍리(雙鯉, 개인적인 편지)를 써야 하느니라.”

“잠시만이라도 기수(이불)아래에 거하시옵소서. 부디 소인을 봐서라도.”

“난 건강하지 않느냐. 이제껏 감모는 고사하고라도 그 흔한 배앓이 한번 하지 않았는데 이리

수선을 피우다니.”

“가벼운 것은 무거이 보라하고 무거운 것은 가벼이 보라 하였습니다. 그중 건강이란 것은

아무리 무거이 보아도 넘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상선내관의 진심어린 간청에 훤은 비록 뽀로통한 표정이긴 했지만 얌전히 이불 속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팔을 쏙 빼서 연우에게서 온 서찰을 달라고 명했다. 상경내관이

품속에 소중히 품고 있던 서찰을 내 놓았다. 훤은 엎드린 채 서찰을 받더니 이내 인상을 썼다.

연우의 그 소중한 난향을 상경내관의 내음으로 지워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서찰을 펼쳐 연우의 시를 읽었다. 다시 웃음만 입가에 배시시 베어 나왔다. 서찰을 접어 봉투에

반쯤 넣다가 다시 꺼내 펼쳐 보기를 몇 차례 거치다가,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서안을 가져오너라. 내 쌍리는 적어두고 쉴 것이니라.”

상선내관도 포기하고 서안을 들고 오게 했다. 하지만 막상 서안에 앉아 붓을 드니 연우의

서체가 눈에 자꾸만 밟혔다. 자신이 쓴 모든 글씨가 다 어설프고 품격이 없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쓰다만 종이를 몇 장 구겨버린 뒤 침울하게 서안을 밀치고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왜 그러시옵니까? 제게 연유를 들려주시옵소서.”

“상선도 보지 않았느냐. 연우낭자의 서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 것은 너무나 보잘 것 없어

속상하다. 문학의 서체 또한 그 고귀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데, 자신의 오라비와 내가 얼마나

비교되겠느냐. 먼저 보낸 내 봉서를 다시 가져오라 명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면 차후 더 나아지면 될 일이옵니다. 서체란 연습으로 갈고 다듬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니

옵니까. 혹여 뛰어난 서예가를 스승으로 두는 것은 어떠하겠사옵니까?”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내 서체 연습에 게으름을

피우진 않았을 터인데.······지금당장 서예가 한명을 물색하여 데려오너라. 내 열심히 배울 것이다.”

즉시 초빙해온 서예가를 스승으로 모신 훤은 며칠 동안 자신의 서체를 다듬느라 두문불출했다.

그리고 좀 더 나아진 뒤에 연우에게 보내기 위해 서찰은 미뤘다. 그러면서 죽통화분은 정성껏

관리했다. 언제나 햇빛이 가장 잘 드는 곳에 두었고 만에 하나 화분에 그늘이 들면 주위에

호통이 내려졌다. 훤은 화분에서 예쁜 꽃이 피어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 꽃이

피어날 때쯤 자신의 서체도 피어나 아름다운 향기와 더불어 연우에게 안부를 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싹이 일주일이 지난 뒤에 돋아나왔다. 그때부터 기다림은 더욱

극진해졌다. 싹만 뚫어져라 보고 있다가 자신의 눈독에 싹이 빨리 자라지 못하는 것이란 생각에

화분 쪽을 애써 안 보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연우의 모습은 아끼며

들었고, 연우가 읽는 책을 따라 읽고, 공부하고, 서체 연습까지 하느라 때 아닌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꽃이 피어날 것이란 기대와는 달리 화분의 싹은 잎만이 점점 커지더니 줄기는

나지 않고 잎의 숫자가 점점 불어났다. 훤은 시무룩해져서 화분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아무래도 잘못 키운 것 같구나. 이런 잎을 가진 꽃도 있던가?”

옆의 상선내관이 훤의 시무룩한 얼굴을 보고는 화분의 잎을 유심히 보았다. 상선내관도 당연히

꽃일 것이란 선입견을 가지고 보았기에 화분의 잎 모양이 의아스러웠다. 자신의 추측에 스스로

놀란 상선내관이 주위의 다른 내관들을 불러 화분을 보게 했다. 내관 중 한명이 말했다.

“이건 필시 상추인 듯한데······.”

“네, 제 눈에도 분명 상추로 보여서. 꽃이 아니라······.”

내관들의 말에 훤은 놀란 눈으로 잎사귀를 뚫어지게 보았다.

“이것이 상추가 확실하냐?”

“네, 분명 상추 잎이옵니다.”

“뭔가가 잘못된 것인가? 어찌 상추가 나온단 말이냐?”

상선이 빙그레 웃으며 훤에게 말했다.

“상추를 심었으니 상추가 난 것이겠지요. 그 연유는 이 화분을 보내 준 이에게 직접 물어보셔야

할 듯하옵니다.”

“하지만 뭔가가 잘못되어 상추가 나온 것이라면?”

“자연은 거짓을 행하지 않사옵니다. 화분을 보낸 이가 필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을 것이옵니다.”

훤은 더 이상 서체 연습을 하느라 편지를 미룰 수가 없게 되었다. 궁금해서라도 이 이유를

물어야 했다. 서안에 앉아 정성껏 먹을 갈았다. 먹을 가는 것조차 옆에 있는 내관을 시키기가

싫어서 자신의 손으로 갈았다. 붓을 들고 제일 먼저 인사말부터 적어야 했는데 여기서부터

말문이 막혔다. 감정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인사말을 꺼내는 말의 깊이를 책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고민 끝에 감정을 드러내는 말은 생략하기로 했다.

연우낭자 보시오.

보내주신 화분 안에서 무엇이 나올까 많이 기다렸소. 그 궁금함에 매일을 기다리느라 눈이 빠질

지경이었다오. 그런데 현재 싹이 나와 그 잎이 어느 정도 자랐는데, 다들 꽃이 아니라 상추라

하니 어찌 된 연유인지 묻고 싶소.

훤은 마지막 보내는 이에 무슨 이름을 쓸 것인지에 대해 또 고민했다. 세자라 쓰기도 싫었고

일성대군이라 쓰기도 싫었다. 연우 앞에서는 그저 한 사람이고 싶은 마음만이 절실했다. 그래서

편지 끝에 ‘이 훤’이라고 적었다. 태양이 되라는 뜻으로 왕이 날일 변을 명하고, 그 명에 따라

관상감에서 성명학을 토대로 세자의 사주에 맞는 날일 변이 들어가는 한자 세 개를 올려,

그중 왕이 하나를 낙점하여 받은 이름 훤. 누구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 아버지와 어머니조차

불러주지 않는 이름, 그러나 단하나 자신의 이름임이 분명한 훤을 적었다. 이렇게 짧은 글을

쓰는 데에만도 하룻밤과 그 다음 날 낮을 꼬박 투자하였다. 문제는 염이란 거대한 산이었다.

석강을 마치고 어렵사리 내밀은 봉서에 염의 눈길은 아예 지나가지도 않았다. 급히 책을 챙겨

일어나는 염의 옆을 막은 건 훤을 옆에서 지켜보며 같이 그 화분에 궁금함을 가진 세자익위사

(세자 경호기관) 관원들과 내관들이었다. 상선내관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문학, 봉서를 가져가 주십시오.”

“아니 될 일입니다!”

“이건 세자저하만의 서찰이 아니라 죽통화분에서 상추가 난 것을 본 모든 이의 궁금함을 담은

서찰이옵니다. 그러니 이에 대한 답은 그 화분을 보내신 분이 직접 들려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그 이유를 문학께서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염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건 염도 모르는 의문이었다.

“단지, ······제 누이의 방 앞 화단에도 죽통화분에 난 것과 똑 같은 상추가 있는 것으로 봐서

별 뜻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만 관심을 접으심이······.”

염의 눈치만 살피던 훤이 조용히 사정하듯이 말했다.

“가져가 다오. 아무 이유가 없다는 짧은 글이라도 좋으니 받아서 가져와 다오. 문학, 그 화분을

들고 온 사람은 바로 네가 아닌가.”

주위의 사람들도 훤을 거들어 염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또 다시 염은 화분에 대한

답만을 위한 목적으로 봉서를 가져가게 되었다. 하루를 꼬박 숨 막히는 두근거림으로 답장을

기다렸다. 그리고 염이 답장을 훤에게 건넸고 수업 후 훤은 궁금해 하는 모든 눈을 물리치고

혼자서 조용히 봉서를 열었다.

무어라 부를 수 없는 분 보시오소서.

어떠한 것이 올라올까 궁금하여 그리도 기다리셨나이까. 그 기다림이 아무리 길어도 농부가

벼를 수확하기까지 기다리는 마음에 비하겠나이까. 우리 입에 취하는 여러 가지 중에 그중 빨리

자라는 축에 드는 것이 상추이옵니다. 상추는 채소로 취하며, 약재로 취하며, 분명 오래두면

꽃을 보실 수는 있을 것이나 먹지는 못하는 것이 되고 마옵니다. 기다리셨다는 기다림에

몇 배를 곱하면 조선의 백성인 농부의 마음이 되옵니다. 잎이 몇 개가 났사옵니까?

그리고 서찰 끝에 정갈하게 박힌 이름, 허 연우가 쓰여 있었다. 서찰의 길이보다 내용의 깊이에

더 마음이 떨렸고, 그리고 마지막 물음이 그리도 행복할 수가 없었다. 또 다시 봉서를 보낼 수

있는 핑계거리가 확실하게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연우의 질문에 답하겠다는데 염이 뭐라고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흐뭇해하고 있는 훤에게 상선내관이 물었다.

“왜 상추를 심은 것이란 답은 있사옵니까?”

“나에게 농부의 마음을 말하고자 한 모양이다. 내가 기다린 것 보다 더 많은 기다림으로 농부가

기다린다니. 규방의 어린 여인이 어찌 농부의 마음까지 헤아린단 말인가. 헤아린 데서 끝내지

않고 직접 자기 화단에 심어보고 느끼고, 또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주고······. 보통내기가 아니다.”

이 이후부터 훤과 연우가 본격적으로 서찰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미 연우와 훤의 편이 되어버린

주위사람들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이뤄진 일이었다. 짧게 상추에 대한 질문을 주고받던 내용은

어느새 서로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고, 점점 내용의 길이도 길어졌다. 그리하여 사사로운

매일의 자신의 생활을 적어 보내게 까지 되었다. 연우가 먹어보래서 아까워 덜덜 떨리는

기분으로 상추를 먹으면서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쌀 한 톨의 소중함까지 훤은 배워나갔고,

연우에 대한 감정이 호기심에서 설렘으로, 또 더 깊은 마음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렇게 행복한 나날이 계속 되던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어왔다.

갑자기 세자의 혼례를 위한 가례도감(嘉禮都監)이 설치되고 전국에 금혼령(禁婚令)이 내려진

것이다. 훤에게도 이 소식이 바로 들어갔다. 처음 이 소식을 접한 훤은 뛸 듯이 기뻤다. 전국에서

처녀단자를 올린다면 연우 또한 반드시 빠지지 않을 것이고, 연우가 자신의 아내가 될 것이란

부푼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훤은 연우의 처녀단자를 올렸는지에 대한 여부가 궁금하여 염의

석강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석강에 들어온 염의 안색은 너무나 어두웠다. 평소에 평온한

미소를 보이던 염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훤은 자신의 혼례문제에 들떠 그 표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석강이 끝나기가 무섭게 훤은 염에게 신이 나서 물었다.

“연우낭자의 처녀단자는 올렸는가?”

염은 침울한 표정으로 한참을 있다가 겨우 말했다.

“아직······.”

“왜? 홍문관 대제학에게 말해서 어서 올리도록 하여라. 연우낭자는 제외 대상(종실의 딸,

이씨의 딸, 과부와 첩의 딸, 고아는 제외대상)에 들어가지 않으니 반드시 올려야 하지 않느냐?”

염은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잠시 주위를 물러주실 수 없사옵니까?”

훤은 의아했지만 우선 주위의 모든 사람을 물러가라 명했다. 모든 사람이 나가고 단둘이 남게

되자 염은 서안을 밀치고 바닥에 엎드려 간청했다.

“세자저하, 부디 원컨대 소인의 작은 주청을 들어주시옵소서.”

훤은 그간 부탁이란 것은 하지 않던 염이 이렇게 나오자 깜짝 놀라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무엇이냐? 혹여 무슨 문제라고 있는 것이냐?”

“조선의 백성이라면 응당 처녀단자에 이름을 올려야 하는 것이 도리인 줄 알고 있사오나,

우리 연우만큼은 제발, 제발 제하여 주시옵소서. 소인 이렇게 엎드려 비옵니다.”

훤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세자빈 간택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기분이 나빠졌다. 이러한 의견이 연우의 뜻인 건 아닌지 두렵기까지 했다.

“난 연우낭자와 함께 하고 싶다. 그런데 왜 이러는 것이냐. 연유를 말하라.”

“함께 하실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

“내가 아바마마께 긴히 청을 올릴 것이다. 나의 세자빈으로 연우낭자만을 생각하고 있노라

내 말씀드릴 것이다.”

“아니 되실 것이옵니다. 우리 연우를 조금이라도 아끼신다면 부디 처녀단자에서 제하는 것을

상감마마께 주청 드려주시옵소서, 제발.”

“내가 싫다!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물러가라!”

훤은 화가 나서 소리친 뒤 먼저 비현각을 나와 버렸다. 그리고 성난 걸음으로 자선당에 들어가

쪼그리고 앉았다. 옆에 상선내관이 따라와 훤의 노기에 대해 물었다.

“여쭤 봐도 되올련지 모르겠사오나 제게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문학이 무어라 하였기에 이리도

노하셨사옵니까?”

훤은 슬픔과 노여움이 지나쳐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무릎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상선, 신민(臣民)이 나를 아니 좋아하는 겐가? 모두 처녀단자를 올리는 것을 꺼리는 것인가,

아니면 연우낭자가 나를 싫어하는 것인가?”

“만에 하나 연우아기씨가 세자저하를 싫어한다면 그간의 서찰을 보낼 턱이 없지 않겠사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문학은 내게 연우낭자의 처녀단자를 빼 달라 청을 하는 것인가.

내가 연우낭자와 함께 할 수 없을 것이란 건 또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아무리 생각해도

문학이 나를 탐탁찮게 여기는 것이어니.”

상선내관은 침울하게 웅크리고 있는 세자에게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망설였다. 그간 주고

받는 서찰을 꾸준히 보아오던 상선이었다. 그러기에 연우의 성품에 내심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상선내관은 심호흡을 하고 훤에게 조용히 말했다.

“마마, 이런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문학은 그런 의미가 아닐 것이옵니다.”

“그럼? 상선은 이유를 알고 있는 것인가?”

“비록 처녀단자를 올리라고 하여 세자빈을 간택하는 것이 법도이긴 하지만, 이미 세자빈으로

한사람을 내정해 두고 이러한 절차를 밟기 때문에······.”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던 훤의 얼굴이 번쩍 들려졌다. 그리고 눈으로 급하게 그 뒷말을

재촉했다. 상선이 애통한 심정으로 말했다.

“이번 간택령만이 아니라 이제껏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처녀단자를 올리는

것을 꺼리는 것이옵니다. 초간택에 참여를 하라는 명을 떨어지면 의복이나 가마의 형식을

갖추는데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거니와, 만에 하나 재간택을 거처 삼간택까지 올라가게

되면······.”

상선내관은 감히 말하기 어려워 한참을 망설였다. 훤이 어서 말하라고 재촉하자 다시 말을 이었다.

“마지막 삼간택의 세 후보에 들어가게 되면 내정자가 분명 세자빈으로 간택 될 것이고, 탈락된

나머지 두 여인은 그 또한 세자저하의 여인이라 하여 평생 홀로 살아야 하는 숙명을 가지게

되옵니다. 흰 소복만을 입어야 하고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틀어 올려 비녀를 꽂는 그런 운명

말이옵니다. 그렇게 한들 내명부 첩지조차 받을 수 없는. 그래서 모두가 처녀단자를 올리기를

꺼리는 것이지 세자저하 때문이 아니옵니다. 문학은 누이를 아끼어 그런 청을 한 것이옵니다.

이미 내정되어 있는 여인이 있기에.”

“그렇다면 탈락한 그 여인들은 궐로 들어올 수는 없는 것인가?”

“간혹 그러한 여인들이 가엾다 하여 후궁으로 들이긴 합니다.”

“아! 혹시 형님(양명군)의 모친도?”

“네, 희빈마노하(마노하:후궁과 세자빈 뒤에 붙이는 칭호. 후궁과 세자빈 뒤에 ‘마마’는 붙일 수

없음)도 삼간택에서 탈락한 것을 상감마마께옵서 가엾다하여 후에 불러들인 것이옵니다. 이는

희빈마노하 외의 다른 한명이 목을 매달고 자결하였기에 상감마마께옵서 아시게 되었던 것이지

대부분이 그대로 잊혀져버립니다.”

가만히 앉아 생각에 빠진 훤의 얼굴은 떼 부리던 소년의 표정에서 어느덧 비범함을 숨긴

눈빛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입술을 비틀며 짧은 말을 내쉬었다.

“할마마마!”

“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이번 세자빈의 내정자는 할마마마의 먼 친척 중 한명일 것이다. 어마마마가 윤씨 일파가

아니니 이번 나의 세자빈 자리만큼은 내어주지 않으려 기를 쓸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번

가례도감을 주관하는 가장 웃어른이 대비, 즉 할마마마시다. 외척세력들에게 이보다 더 절묘한

기회가 어디 있겠느냐. 그런데 이미 내정되어 있다면······, 빌어먹을!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훗날 연우아기씨를 후궁으로 불러들이시면······.”

상선내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훤의 눈빛이 매섭게 상선내관에게로 가 꽂혔다.

“후궁이 정비와 같더냐! 감히 연우낭자를 첩으로 삼으란 말이냐?”

“하오나 방도가 없사오니······.”

“아바마마는 훌륭한 군주이시나 효라는 덜미에 잡혀 있다. 백성을 위하는 것과 모친에게 효를

다해야 하는 모순 속에 갇혀 군주의 덕을 행함에 있어 그 도를 채우지 못 하는 것이 내 눈에도

보인다. 내 비록 지금 잠룡(潛龍, 승천(昇天)의 때를 기다리며 물속에 잠겨 있는 용이라는

뜻으로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 사람)의 처지이나 훗날 나의 어버이는 곧 백성이 될 것이다.

자식은 어버이 없이는 없다 하였다. <전국책>에 따르면 백성 없는 왕도 없다 하였다. 그러니

백성의 어버이는 왕이나 왕의 어버이 또한 백성. 난 아바마마를 존경하나 이와는 다른 길을

걸을 것이다! 그러기에 꼭 연우낭자여야만 한다.”

훤의 온몸을 휘감은 황금용이 때를 기다리며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이 상선내관의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눈을 빛내며 잠룡의 눈을 하고 있던 훤은 다시 풀 죽은 소년의 모습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내 지금 처지에선 아바마마께 주청 드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게다가 아바마마도 직접 간택에 참여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아는데. 아니 그런가?”

“국왕이 이제껏 한 번도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간혹 예외라는 것이 있었던 것으로

아옵니다.”

“하지만 아바마마는 할마마마를 뛰어넘지 못하신다. 아바마마만 힘을 빌려주신다면 내정된

세자빈을 바꿀 수가 있을 텐데······.”

골똘히 생각에 빠졌던 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자! 내 아바마마를 뵙고 친히 주청을 드릴 것이다.”

“아니 되옵니다. 그러면 그동안 봉서를 주고받은 것이 발각될 것이고 이는 자선당 내관들뿐만이

아니라 자칫 문학도 화를 입게 될 것이옵니다.”

“그러면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연우낭자의 처녀단자를 빼 달라 주청이라도 드리란 말이냐?”

훤이 화가 나서 날뛰자 상선내관은 어쩔 줄 몰라 고개만 조아렸다. 방안을 서성거리며 화를

이기지 못하던 훤은 결국 자선당을 나서고 말았다.

“내 목이 날아갈지언정 주청을 드릴 것이다. 대신 다른 사람들의 목은 안전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니

아마마마의 침전으로 가자! 세자빈으로 연우낭자가 아니 된다면 외척일파도 절대 아니 된다!”

왕의 침전인 강녕전에 들어서니 그제야 공무를 마친 왕도 들어서고 있었다. 훤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간략하게 인사하자 왕은 환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훤도

따라 들어갔다. 아들을 눈앞에 두고 앉은 왕은 그저 웃기만 했다. 훤은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아바마마, 소신 가까이 다가가 앉게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그래? 우리 세자가 긴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하니, 다른 이는 모두 물러가라.”

주위 사람들이 다 물러가고 단 둘만 방안에 남겨지자 세자는 왕 앞에 바짝 다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이번 세자빈 간택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세자. 거기엔 본인인 네가 간여해선 안 되는 것이 법도다.”

“그렇다면 미리 세자빈을 내정해 두는 것은 어떠한 법도 입니까?”

웃고 있던 왕의 얼굴에서 웃음이 싸늘하게 비워졌다. 그 무서움에 훤은 마음이 졸아들었지만

물러서진 않았다.

“미리 내정되어 있다 들었사옵니다. 아니옵니까?”

훤을 노려보던 왕은 그 무거운 입을 떼었다.

“미리 내정되어 있다. 그래서?”

“철회하여 주시옵소서. 엄격한 기준에 맞춘 정당한 세자빈 간택이 되었으면 하옵니다.”

“그 또한 나의 관할이 아니다. 그런 부탁은 대비전으로 가서 하거라.”

“아바마마께옵서 할마마마를 넘어주시옵소서!”

“건방진! 너는 지금 세자의 위치를 넘어서려 하고 있다! 경거망동은 삼가거라.”

“세자빈이옵니다. 장차 이 나라의 국모가 될 여인을 뽑는 자리이옵니다. 그런데 어찌

할마마마의 기준에서 마음대로 선택한 여인을 내정할 수 있다 하옵니까.”

“그것조차 알고 있는 것이냐?”

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훤 못지않게 왕의 고민도 극심했던 모양이었다. 이마를 짚고 있던 왕이

조용히 말했다.

“더 이상 말하지 말고 물러가거라. 어서 석수라를 들고 편전에 나가 낮 동안 덜 끝낸 업무를

보아야 한다. 그러니.”

“소자의 마음에 품고 있는 여인이 있사옵니다!”

“어허! 입 조심! 지금 말은 아니 들은 것으로 하겠다.”

왕은 훤의 입에서 성급하게 나온 말에 전혀 놀라지 않고 단지 입 조심만 시켰다. 어떤 여인인지

알 필요도 없다는 듯 그 어떤 질문도 않고 훤을 보았다.

“입조심을 해야 하는 것은 신하나 백성만이 아니다. 가장 입조심해야 하는 자는 바로 왕이다.

그리고 너, 세자다! 물러가라.”

“아바마마. 부디 세자빈 내정자만큼은 철회를.”

“나도 그건 어찌 할 수가 없구나. 그동안 막아보려 하다가 네 가례가 늦어진 것인데 결국은

이리 되고 말았으니. 석수라 시선은 필요 없으니 넌 나가거라.”

왕은 훤이 다시 입을 열기 전에 얼른 바깥에 소리쳤다.

“그만 다들 들어오너라. 그리고 수라도 어서 들여라!”

왕 주위의 내관들과 궁녀들이 방안으로 들어오자 훤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떠밀리듯 강녕전에서 나온 훤은 절망스런 발걸음으로 자선당으로 돌아갔다. 그 뒤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자선당의 내관과 궁녀, 세자익위사 관리도 따랐다. 훤은 자선당 뜰에 서서 애꿎은

하늘만 원망하며 노려보았다. 너무나 힘없고 허울만 좋은 세자란 위치를, 그리고 무능한 자신을

원망하며 아프도록 아랫입술만 깨물었다. 그리고 차라리 연우를 처녀단자에서 빼 달라 청하지

못한 자신의 간사한 이기심에도 분노했다.

#9

꼬박 이틀 동안 훤은 아무 말이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 문안을 했고, 수업도 받았다.

하지만 짬이 나면 혼자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예전 장난을 치기 위해 골몰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리고 연우의 처녀단자가 끝끝내 올려졌다는 염의 말을 듣고는 조용히

자선당으로 사령(使令)을 불렀다.

“현재 성균관의 재회(齋會, 성균관 유생들의 자치 기구. 일종의 학생회)의 활동은 어떤 경향을

띠는지에 관한 것과 장의(掌儀, 재회의 학생회장. 동장의·서장의로 두 명이었음)를 맡고 있는

두 명의 신원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해 오너라.”

훤의 귓속말을 들은 사령은 의아해 하며 훤을 보았다. 훤은 평소와 다름없는 장난기 가득한

소년의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 말 말고 지금 즉시 알아오너라. 그동안 장난을 안 쳤더니 심심하여 그러느니라.

단! 장난일지언정 이 일은 기무(機務, 중요하고 비밀을 지켜야 할 일)이니, 네 입은 네가

단속해야 명이 부지 될 것이다.”

사령은 고개만 갸웃하고 인사한 뒤 나갔다. 상선내관은 훤에게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얼굴에 가득한 짓궂은 표정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로 했다. 훤은 오늘 염이 건네 준

연우의 봉서를 열어 읽었다. 처녀단자로 인해 집안이 어수선할 것임이 분명한데도 내용에는

그러한 것은 없이 그저 세자의 심기가 어떤지에 대한 염려만이 있었다. 그리고 평소와 다름

없이 읽은 책 감상과 하루 있었던 일들이 적혀있었다. 오늘은 개미떼가 왜 줄지어 이동을

하는지, 사계절의 변화는 왜 생기는지, 아침놀은 비가 올 징조이며 저녁놀은 가물징조인데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의문이 적혀있었다.

“어찌 이리도 궁금한 것이 많은지······.”

연우의 표정이 손에 잡힐 듯하여 훤은 환하게 웃었다. 이윽고 무언가 결심 한 듯 옆에 있는

상선에게 말했다.

“상선, 아래 내관을 시켜 조각장(彫刻匠)중에 특히 빼어난 솜씨를 가진 자를 조용히 불러오너라.”

“대체 뭐하시려는 것인지 소인에게 만이라도.”

“사령에게 명한 것과는 다른 일이다. 그냥 연우낭자에게 뇌물이라도 바쳐볼까 하고.”

상선은 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파악하지 못한 채 심부름을 시켰다. 한참 만에 데려온

조각장에게 훤은 조용히 귓속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조각장은 한동안 난감해 하다가 훤이

건네는 패물들을 가지고 물러났다. 훤이 무엇을 하려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상선내관의

초조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야소대(밤 수업)가 끝날 즈음에 사령이 조사한 문서를 전해왔다.

훤은 문서를 훑어보더니 장난기 가득한 소년의 표정으로 사령에게 명했다.

“동장의를 불러오너라.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변복을 시켜 데려와야 한다. 지금 당장.”

“하오나 곧 인경이 시작 될 터인데······.”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야간통행증이 있지 않느냐? 그러니 그 시간까지 같이 궐로 들어오면 된다.”

사령이 급히 나가고 난 뒤에 상선은 불안하여 훤의 눈치만 살폈다.

“대체 어쩌시려고 이러시옵니까?”

“상선은 걱정 말고 개(얼굴 가리개)나 준비하거라. 내 얼굴이 앳되어 장의에게 보여주기 싫구나.”

훤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채 내관으로 변복한 장의가 들어 올 때까지 앉아 있었다.

장의는 원인도 모르고 세자의 비밀 명령에 의해 자선당까지 오고 말았다. 비록 장난 심한

세자란 악명을 떨치고 있긴 해도 세자란 곧 다음 대권을 이을 차기 왕이란 사실은 충분히

공포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직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자신이 훗날 신하가 되어 모셔야

할 왕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세자가 될 가능성이 많은 것이었다. 훤은 개로 얼굴을 가리고

장의의 얼굴을 들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장의는 꼼짝 없이 고개를 바닥에 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침묵하며 분위기를 엄하게 다스리던 훤이 입을 열었다.

“난 이 나라의 세자다. 알고 온 것이냐?”

“네, 네. 그러하옵니다. 어인 일로 미천한 이 몸을 부르시었나이까.”

“내가 왕세자책봉례를 받으며 동시에 성균관 입학례 또한 같이 받았다. 그러니 비록 성균관에

나아가 같이 수업을 받지 못하고 따로이 홀로 수업을 받긴 해도, 나 또한 성균관 유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숙인 상태로 더욱 긴장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 불안은 상선내관도 마찬가지였다.

“학덕 높은 그대들과 같은 성균관 유생이어서 참으로 자랑스러웠느니. 그런데 요즈음은······.”

“요즈음은 어떻단 말씀이옵니까?”

“내가 성균관 입학례를 받은 것이 부끄럽다. 유생들은 학문만이 길이던가? 학문을 하면 배운

대로 도를 행하는 것 또한 도가 아니런가? 아직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어도 신하는 신하인 것.

임금이 도가 아닌 길을 가려하면 도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신하의 본분인데 어찌 성균관에선

못 본 척 하고 있는 것인가?”

한참을 심사숙고 하던 장의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저기······, 혹여 미진한 이 몸이 잘못 생각하는 건 아니올련지 모르겠으나······. 이번의 세자빈

간택에 관한 말씀이시온지······.”

“신하된 입으로 현재 잘못되어져 있는 점을 말해보아라.”

장의는 주먹에 힘을 주었다. 미래의 왕이 질문을 하고 있다. 그것도 자신의 가례문제로. 입을

자칫 잘못 놀리다간 이제껏 공부해 오고 있는 모든 것이 날아가고, 가문조차 어려워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눈앞의 세자는 평소 소문으로 들어오던 철없는 장난꾸러기가 아니었다.

현재 세자빈 간택의 잘못된 점에 대해선 유생들이 무엇보다 불만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

세자는 윤씨 일파, 즉 외척의 비호아래 있는 세자이었고, 그 잘못된 점이 또한 외척세력의

처녀로 내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지금 세자는 자신을 비호하고 있는 세력의 험담을

하라는 것이었다.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지금 비밀리에 너를 데려왔다. 이는 너의 입에서 나오는 그 어떤 말도

비밀에 두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말해보아라. 세자빈 간택이 한 일족의 세력 유지를 위한

도구로 쓰여도 되는 것인가?”

“아니옵니다. 이는 필시 잘못된 것이옵니다. 우리 성균관의 재회에서도 여러 번 안건으로

나왔던 문제이옵니다.”

“그런데 왜 가만히 있는가? 두려운가? 그대들이 관직에 나아갈 때쯤, 그대들의 왕으로 있는 건

과연 지금의 상감마마실까? 다음 대에서도 외척일파가 관직자리를 다 유린한다면 과연

그대들에게 돌아갈 관직이 남아나겠는가? 그러면 그대들이 현재 밤새워 학문을 닦을 이유가

없을 것이야.”

“그러하오시면 세자저하께옵서도 저희와 뜻을 같이 하시겠다는 것이옵니까?”

“난 정당한 세자빈 간택을 지지한다! 물러가라. 앞으로 성균관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할 것이야.

그리고! 오늘 나를 만난 건 너와 나만이 아는 일이다.”

장의는 진심으로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한 뒤 물러났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훤은 개를

던지고 자세를 편안하게 했다.

“에구, 개를 들고 있으니 팔도 아프고 무지하게 힘들구먼. 상선, 어떻던가? 나도 제법 의젓해

보이지 않던가? 장의도 그렇게 생각한 것 같더냐?”

상선내관은 사색이 되어 훤을 보았다. 십년 가까이 옆에서 모시고 있지만, 시치미를 떼고

천진무구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훤이란 세자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방금 마마께옵서 지시한 것이 무엇인지는 아시옵니까? 권당(捲堂, 학생데모) 파동을 선동하신

것이옵니다!”

“단지 재회에서 상소를 올리는 것에서 그칠지, 아니면 연좌 농성에 들어갈지는 그들이 결정할 일이다.”

“마마, 자칫 이 일이 상감마마께 심려를 끼치게 되오면.”

상선내관은 말을 중단하고 입을 다물었다. 훤의 표정이 장난기를 비우고 잠룡의 눈으로 바꿨기

때문이었다.

“상선. 이번 간택 건에서의 아바마마의 심려를 오히려 덜어드리려는 것이다. 이번 일의 가장 큰

걸림돌은 아바마마가 아니시다. 아바마마도 어찌 할 수 없는 부분이란 것을 알았다. 성균관의

유생들은 현재 권당으로 번진다 해도 별로 손해 볼 것은 없다. 되려 손해보다 성공했을 시의

이익이 더 큰 것이다. 이 일이 실패로 돌아가도 대대로 성균관 유생들에게 내려지는 처벌은

관대하니 위험부담도 없고. 그러니 지금 현재 가장 움직이기 쉬운 곳이 바로 성균관이다.”

상선내관의 얼굴에 공포감이 서렸다. 이제껏 자신이 보필해온 세자가 아니었다. 그 큰 차이를

적응할 수 없었기에 더욱 공포스러웠다.

“마마, 그, 그러면 차후엔······.”

“성균관의 상소는 무시 할 수 없을 터. 이는 대간(臺諫,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사헌부와

국왕의 독주를 간쟁하는 사간원의 간관(諫官))에 큰 힘을 실어줄 것이다. 그리고 대간을

견제하는 홍문관 또한 대쪽 같은 대제학이 버티고 있다. 하니 결코 그들의 움직임에 걸림돌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오히려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가 같이 상감마마께 상소를

올릴 터이고, 아바마마는 비로써 운신할 폭이 생기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들 모두가 서로

눈치만 보며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불씨를 성균관에서 지펴주는 것뿐이다.”

“이 일이 잘못되면 세자자리가 위태로워지실 것이옵니다. 위험하옵니다.”

“세자궁은 끝까지 침묵한다!”

“네?”

상선내관이 놀라서 훤을 보았다. 단지 이렇게 일만 벌여놓고 침묵한다니,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렇게만 해 놓는다고 해서 연우가 세자빈으로 간택되진 못할 것이었다.

“정당한 세자빈 간택이라 해 놓고 내가 연우낭자를 내정해 두면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세자빈 자리를 꿰차는 것은 연우낭자의 현명함에 맡기는 수밖에. 그리고 세자궁에서

침묵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외척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이다.”

이 말은 외척이 세자로 비호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자신들에게 겨누고 있는 손톱을 숨긴 호랑이

임을 숨기겠다는 말이었다. 만약에 세자가 외척에 대한 적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발각 될 경우,

그들은 아주 작은 약점 하나라도 잡아내어 세자를 폐위시키려 온갖 악행을 일삼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세자는 그들이 이용하기에 적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철없는 어린애 같기도

하면서 그들에게 전혀 반감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세력들의 모함을 받을 만큼 멍청하지도 않다. 훤은 그런 중간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상선내관은 그간의 세자의 모습이 안전한 세자자리 확보를 위한 연극이었음을

이 순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소인, 세자저하를 뫼옵고 있음이 영광이옵니다.”

상선내관이 감격에 겨워 머리를 조아리자 훤은 어린애 같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하하하! 뭐, 그 정도는 아니고. 민망하게 왜 이러느냐. 내 이런 모습을 연우낭자에게 자랑하고

싶은데 그건 곤란하겠지?”

조금 전의 모습을 완전히 감춘 훤의 모습에 상선내관은 다시 의아해졌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그동안 스승들을 너무 심심하게 한 것 같구나. 내일은 열심히 스승들을 골려볼까? 그리고

할마마마께 어리광이나 실컷 부려봐야 것다. 말도 잘 듣고.”

훤은 방긋 웃으며 연우에게 받은 서찰을 모아 싸놓은 보에서 하나를 꺼내 읽었다. 배시시

행복한 표정을 하던 훤은 다시 보에 서찰들을 꼼꼼하게 싸서 품에 안아보았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연우의 흔적에 기대었다.

그 다음 날부터 시작된 성균관의 상소는 서서히 조정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궐 밖에 앉아

연좌 농성을 해도 왕의 답이 없자, 며칠 뒤 결국 본격적인 권당인 수업거부와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 그러자 훤의 의도대로 대간도 이에 가세를 하여 왕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아니, 엄격히 말하면 외척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었다. 왕에게도 이것은 절호의 기회였다.

그래서 세자빈 간택을 하는데 있어 어떻게 하면 공정한 심사를 할 수 있는 가에 대한 것을

경연에서 논의를 했고, 외척들의 기세에 눌려있던 대신들은 각자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훤은 다른 날과 다름없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소동과는

상관없이 날은 가고 초간택의 날은 다가왔다. 연우 또한 처녀단자에서 선발한 명단에 들어가

초간택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훤은 목욕을 마치고 나와 화를 내고 있었다. 언제나 애지중지 하던 연우의 서찰을 싼 보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잠을 잘 때도 이것을 껴안고 잘 만큼 품에서 놓지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목욕하러 들어가기 전에 자선당에 두었는데 이것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훤이 화가 나서 날뛰고 있던 차에 비현각에서 발견되었다며 시강원관리 하나가 가지고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현각에 이것이 가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훤은 직접 보가 있던 곳이

어디냐며 덜 마른 긴 머리카락을 날리며 비현각에 나갔다. 비현각의 세자 서안에 있었다는

관리의 말에 더욱 의구심이 생겨 인상을 쓰고 있던 차에 양명군이 훤을 방문했다.

“세자저하께옵서 자선당보다 비현각에 더 자주 계시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훤은 얼른 보를 내관에게 건네고 양명군을 맞았다.

“잠시 찾을 것이 있어서 이리 나왔습니다. 자선당으로 가실까요?”

“아니, 잠시 지나던 길에 들렸습니다. 뵈었으니 가봐야지요.”

“오랜만에 얼굴을 보이시고는 섭섭하게 그냥 가시겠다니요.”

훤은 자선당까지는 아니더라도 비현각에 우선 자리 잡고 앉았다. 양명군도 잠깐만이라며

자리에 앉았다.

“요즈음 허 염이란 자에게서 학문을 익힌다 들었습니다.”

“형님도 문학을 아십니까?”

“제 벗이옵니다. 그 집에 자주 가서 그에게서 학문도 익히고, 김제운이란 자에게서 검술도

익히며 막역한 사이로 지내고 있습니다.”

“아! 형님께서 검술을 배우고 있단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리고 종학(宗學, 세자이외의 왕자들의

교육기관)에도 열심이란 소식 들었습니다.”

“종학은 제가 나가고 싶어서 나가는 것이 아니고 아니 나가면 상감마마께옵서 호통을 치시니

어쩔 수 없이 나가는 겁니다. 전 벗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더 재미있는데 제 벗들은 하나같이

꽉 막힌 자들이라.”

훤은 소리 내어 웃었다. 놀자고 해도 책만 들고 있을 염이 생각나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마음대로 궐 밖을 나가지 못하는 자신과는 달리 궐 밖 출입이 자유로운 양명군이 부럽기도 했다.

“문학은 그렇다치고 김제운이란 자도 그렇습니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습니다. 저보다 한 살 아래인데 그 검술과 인품이 칼날같이

정갈하여 배움을 갖습니다.”

“저도 어떤 사람인지 한번 보고 싶습니다.”

“아마 힘들 것입니다. 그는 서자 출신이라 관직에 나갈 수 없으니 세자저하를 뵈올 기회란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스스로를 다듬는데 게을리 하지 않으니 이 또한 그를 숭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훤의 또 다른 호기심이 일었다. 염과 친하다면 그 또한 괜찮은 인간일 것 같았다.

“김제운이라······. 아비는 어떤 자입니까?”

“전 오위도총부를 통솔했던 김윤영도총관의 서자입니다. 현재 김윤영도총관은 퇴역하여 조용히

계시고, 그의 원 어미는 한때 장안을 휘어잡던 명기였으나 이미 그가 어릴 때 죽어 그는

도총관의 본처 손에 길러졌다 들었습니다. 어미가 기녀여서 인지 그의 외모 또한 출중합니다.”

“좋은 자들과 벗을 하니 형님이 부럽습니다.”

훤의 말은 조금의 거짓이 없는 진심이었다. 어릴 때부터 훤의 주위에 친구라고는 없었다.

모두가 어려워하고 피하기만 했고, 놀이를 같이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없는 일이었다.

놀다가 실수로 세자의 몸에 작은 상처라도 생기면 그들 부모까지 피해가 갔다. 그래서 어른들에

둘러싸여 지내는 것만이 전부였고 간혹 친척 아이들이 궐내에 놀러 와도 그들끼리 노는 것을

멀리서 부러운 눈으로 지켜보는 것만이 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어떤 아이도 자기들의

무리에 세자를 넣어주지 않았다. 그들과 자유롭게 놀고 있었던 것은 언제나 양명군이었다.

“그런데 문학의 집에 자주 갑니까?”

“네. 매일 저의 집 가듯이 갑니다. 그런데 요즘은 염이 바빠서 자주 가기가 힘듭니다. 그는

세자저하의 문학 일을 제하고는 독서당(젊은 관리들 중 특출 난 인재 극소수만 뽑아 다른 관직

없이 오직 학문에 전념하던 곳. 이곳을 거친 인재는 곧 엘리트 코스를 보장받음)에 거하라는

어명이 있다 들었습니다.”

훤은 새삼 염의 자질에 감탄 했다. 독서당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나라에서 키우는 인재란

뜻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문학에게 누이가 있다 들었습니다. 혹여 본적은 있습니까?”

양명군의 웃고 있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순진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는 자신의

철없는 동생을 보았다.

“누이가 있는지는 어찌 아십니까?”

“어쩌다 들었습니다. 문학처럼 아름다운가 해서.”

양명군의 표정이 복잡하게 바뀌더니 이윽고 말했다.

“별당에 있는 규방처녀를 어찌 함부로 볼 수 있습니까? 그건 예가 아니지요. 하지만 우연이 딱

한번 보긴 했는데······.”

훤의 몸이 양명군에게로 쏠렸다. 그 뒷말이 궁금해서 입안에 침이 삼켜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심장은 마구 두근거렸다.

“음, 염과는 전혀 다르게 생겼습니다. 어찌나 박색이던지, 염과 한 배에서 난 것이 맞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더이다. 제가 이제껏 본 여인 중에 그리 박색인 얼굴은 또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보지 않았습니다.”

“그, 그 정도였습니까? 정녕 문학과는 그리도 안 닮았습니까?”

“네, 그러하옵니다. 그러니 관심을 접으십시오. 이런, 잠시라 하였는데 오래 앉아있었습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열심히 예학에 힘쓰십시오.”

훤은 양명군을 보내놓고 실망하여 비현각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리 박색인 얼굴은

처음이라니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처음 염과 닮았을 것이란 기대감에 연우에게

마음이 간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 아름다운 사내의 누이라면 더 아름다울 것이란 기대감.

하지만 실망에만 그쳤을 뿐 연우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은 접어지지 않았다. 그러기엔 이미

연우에 대해 얼굴만 빼고 다른 것은 너무나도 많이 알고 난 뒤였다. 그리고 이제껏 알아온

연우에 온통 마음이 빼앗겼기에 박색이라는 것만으로 연우를 포기하려는 마음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훤은 연우가 박색이란 말에 신경이 팔려 사라졌다가 비현각에 나타난, 연우의 서찰을

싼 보에 대해선 그만 깜박 잊어버리고 말았다.

초간택의 바로 전날, 훤은 석강을 마치고 염에게 봉서를 하나 내밀었다. 염은 놀란 눈으로 그

봉서를 뚫어져라 보았다. 매일 봉서를 건네받았지만 이번 봉서는 다른 날과는 달랐다. 안에

서찰이 아니라 볼록하게 다른 것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봉해진 것이긴 하나 염은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비녀였다. 그것도 금으로 만든 봉황비녀, 즉 봉잠이었다.

봉잠은 궁궐에서 왕비나 세자빈으로 간택 된 여인에게 하사하는 패물 중에 하나였다.

염은 알면서도 두려움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해를 품은 달이다!”

“네? 무슨 말씀이온지······.”

“왕은 해라 하고 왕비는 곧 달이라고 한다. 나의 마음의 정비는 연우낭자로 이미 삼아버렸으니

그에 대한 나의 정표로 이 봉잠을 보내는 것이다. 이 봉잠은 하얀 달인 백산호를 입에 문 봉황이,

붉은 달인 적산호를 가슴에 품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연우낭자가 나를 가슴에 품고

내일부터 시작되는 세자빈간택에 최선을 다해 나에게로 오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느니.

그리고 이 나를 평생 옆에서 보필해주길 바라느니.”

그 순간 염이 느끼는 감정은 참으로 복잡하였다. 머릿속도 엉망으로 꼬여 들어갔고 가슴에

숨 막히는 통증이 느껴졌다. 이런 사태까지 온 것은 온전히 연우를 노출시킨 자신의 탓이었다.

“이 이후에 우리 연우를 어찌 하실 것이옵니까?”

“난 세자빈으로 간택되길 바랄 뿐이다.”

“만약에 초간택에서 떨어진다면 우리 연우를 깨끗이 잊어주시옵소서.”

훤은 답하지 않았다. 그런 경우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세자빈의 간택 조건에서 외모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것 보다 높았다. 때때로 이것이 문제화 되었을 만큼 외모에 치중되어

후보자들을 보았는데, 나이대가 비슷비슷한 여인들이라 대답하는 것은 다 고만고만하였기에

덕성이나 다른 것은 후보자들끼리 큰 차이가 없는 현실 때문이었다. 만약에 이미 내정된 후보가

철회되고 엄격한 기준에 맞춰 간택을 한다고 해도 박색이 선출되기란 하늘의 별따기인

셈이었다. 염은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훤의 다짐을 받고서야 봉서를 가져갔다.

초간택이 시작되었다. 그와 함께 성균관 유생들은 공관(空館, 동맹 휴학)에 돌입했다. 이 여세에

힘입어 삼사에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외척들이 수세에 몰리자 이번에는 대비가 어미라는

위치를 빌어 직접 왕을 협박하고 나섰다. 그래서 왕과 다른 대신들은 초간택이 거행되는

교태전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한 채 30명의 참여자 중, 7명을 간택하고 결말이 났다. 불행히도

그 7명 중에 연우도 들어있었다. 훤은 뛸 듯이 기뻤지만 염의 마음은 슬픔으로 굳어졌다. 그래도

아직 재간택이 남아있었다. 재간택에서 탈락만 되어 준다면 적어도 삼간택 후보에선 제외될

것이고 그러면 불행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재간택은 초간택이 있은 지 보름

뒤에 다시 거행되었다. 간택되길 비는 훤과 탈락되길 비는 염의 마음이 비현각을 뒤 덮고

있었다. 교태전 가까이 갈 수 없는 세자는 어서 빨리 사령이 결과를 가져오기만 바라고 있었다.

석강이 끝날 즈음에 사령이 숨넘어가는 소리로 달려왔다.

“결과가 나왔느냐?”

급하게 묻는 훤에게 사령은 염의 눈치를 살피며 힘겹게 말했다.

“네, 삼간택에 올라가는 후보가 결정되었사옵니다. 그런데······.”

사령은 다시 한 번 염의 눈치를 보았다. 훤이 성격 급한 티를 팍팍 내며 말했다.

“어서 말해라! 문학의 누이는 어찌 되었느냐?”

“세 후보에 들어갔다 하옵니다.”

염은 슬픔에 넋이 나가버렸다. 이와는 반대로 기뻐하는 훤에게 사령이 다시 어두운 말을 했다.

“그런데 윤대형 판윤의 여식이 올 때와 달리 육인교를 타고 차지내궁 등 50여명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갔다 하옵니다.”

훤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이것은 윤씨 일파의 여식이 내정되었음을 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다음 삼간택은 보나마나란 의미였기에 염은 무너지는 슬픔을 추스를 길이 없어

조용히 책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염이 비현각에서 나가버리자 훤의 표정은 더욱더

매서워졌다. 사령이 무서움에 덜덜 떨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런데 이상한 점이······.”

훤의 날카로운 눈빛이 사령의 졸아든 심장을 조각내었다. 마치 말을 전달하는 자신이

대역 죄인이 된 듯했다.

“그, 그렇게 차지내궁이 호위를 하며 갔는데도 내, 내전에선 글월비자를 아니 보냈다 하옵니다.”

이 말은 아직 온전히 세자빈 자리가 굳어지진 않았다는 말이었다. 세자빈으로 확정되었다는

봉서를 지닌 글월비자가 윤씨 내정자를 따라가지 않았다는 것은 왕비의 하교가 내려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는 아직 왕이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무리 대비가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인다고 해도 왕의 뜻을 따르는 왕비의 하교 없이는 무위로 돌아갈 일이었다.

“가서 장의를 다시 데려오너라.”

훤의 명령에 사령보다 상선내관이 더 놀라 세자 앞에 엎드려 간곡하게 사정했다.

“마마, 아니 되옵니다. 지금 그를 불러들였다간 탄로 날 가능성이 많사옵니다. 이 사실을 윤씨

일파가 알게 되오면 마마뿐만이 아니라 연우아기씨가 참형을 면치 못할 것이옵니다. 삼간택

후보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현재 충분히 견제되고 있을 것이옵니다. 만약에 그를 다시

불러들이신다면 이 몸 목숨을 걸고 막을 것이옵니다.”

훤은 상선내관의 간곡함에 서서히 화를 가라 앉혔다. 그리고 머릿속을 낮게 낮추었다. 한참동안

끓어 넘치는 불안감을 가라앉히니 양명군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세 명의 후보에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외모는 출중하다고 생각해도 될 일이기 때문이었다.

왜 양명군이 그런 말을 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기분은 좋아졌다. 외모가 그러하다면 다른

면에선 연우가 압도적으로 출중할 것이라 짐작되기에, 삼간택을 하는 장소에 객관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훨씬 유리할 것이다. 그 일을 가능하게 해줄 사람은 현재

가만히 있는 왕이었다. 훤은 왠지 지금까지 가만히 있는 자신의 아버지한테 믿음이 갔다.

이렇게 유리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밀어붙이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 또한 마지막 삼간택을

노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왕이 염에게 쏟는 정성, 홍문관대제학에게 거는 신념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들을 추종하는 사림세력은 훤이 왕으로 등극했을 때 외척세력과의

힘의 균형을 이뤄줄 것이다. 이런 계산이 서자 왕의 심중 또한 연우에게 가 있으리란 확신이

섰다. 그래서 훤은 왕을 믿고 조금 숨을 고르기로 했다. 이제껏 조급한 마음이었기에 세 후보에

들어와 준 것만으로도 훤은 행복했다.

보름이 다시 지나고 삼간택이 열리는 날이 되었다. 성균관의 유생들은 그 전날부터 궐밖에

앉아 호곡권당(號哭捲堂, 궐 밖에 앉아 곡소리를 내며 시위하던 데모)을 벌이며 군사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대비가 세자빈을 간택하는 날에 곡소리를 낸다는 이유로 관련 유생들을 다

처벌하라며 노발대발해도 정작 왕은 꿈쩍하지 않고 있었다. 조반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초조하게 있던 훤에게 사령이 뛸 듯이 기쁜 발걸음으로 달려왔다.

“마마! 갑자기 삼간택 장소가 변경되었다 하옵니다.”

“뭣이? 어디로?”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친 훤에게 사령은 얼굴에 희망을 가득 담고 외쳤다.

“원래 장소였던 교태전이 아니라 상감마마의 침전인 강녕전에서 거행된다 하옵니다.”

“그래서? 장소를 강녕전으로 옮긴 연유가 있을 것 아니냐?”

“삼간택을 심사하기 위해 상감마마뿐만이 아니라 종실제군 세 명과 삼사 관원 세 명 그 외에

대신 세 명이 간택에 참여한다 하옵니다.”

“그렇구나! 그들은 교태전엔 들어갈 수 없으니 마땅히 장소가 변경이 되어야 함이야! 아바마마!”

훤은 강녕전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세자를 감시하기 위해 왕이 보낸 내금위 군사가 자선당의

월대 아래에 버티고 섰다. 갑자기 내금위 군사의 감시를 받게 된 것이 기분 나쁘긴 했지만 이는

세자를 보호하려는 왕의 의도였기에 훤은 잠자코 자선당에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재간택은

점심식사를 내어주며 식사하는 모습 등 여러 가지 모습을 심사하기 위해 하루 종일 걸렸지만,

삼간택은 세 명으로 축소되어 있고 또 깊이 있는 질문이 이뤄졌기에 오전으로 결정을 내었다.

세 후보 중 단 한명만이 세자빈이 되어 오늘 주수라(점심수라)를 받게 될 것이다. 훤은

초조함으로 인해 조강도 생략했다. 보덕도 내금위 군사의 감시로 인한 것으로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 주었다. 오전 한 때가 삼년의 세월 보다 길게만 느껴졌다. 그 장소에 가지 못하고

자선당에 갇혔기에 훤의 마음은 더욱 그러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보루각에서 정오를 알리는

오고(午鼓)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내금위 군사들이 자선당에서 물러났다. 그 뒤를 이어 결과를

알아보러 사령이 뛰어갔다. 세자가 가면 안 되었기에 훤은 초조하게 자선당의 월대 위를

서성거리다가, 마당에 내려서 서성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마음엔 사령이 명나라에나 다녀온

거리만큼 늦게 느껴질 때쯤에 결과를 안고 나타났다. 훤에게 달려오는 그의 표정은 이미 결과를

말하고 있었다.

“연우낭자냐? 어?”

“네! 홍문관 대제학의 여식인 허씨 처녀가 대례복을 입었다 하옵니다.”

훤이 너무 기뻐 온 몸에 힘이 쫙 빠진 것과는 달리 상선내관이 먼저 만세를 불렀다.

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기뻐도 눈물이 난다더니, 이런 기분이구나. 난 아바마마와 연우낭자를 믿었느니. 진심으로 믿었느니.”

“감축드리옵니다, 마마.”

“내 너무 보고 싶어 대궐 담을 넘어보려고도 생각했었는데······. 그동안 잘 참았구나.

이젠 연우낭자를 볼 수 있게 되었어. 필시 눈부시게 아름다울 것이야. 아니 그렇다고 할지언정

그 학식과 인품에서 눈이 부실 것이야.”

훤은 두 팔을 벌리고 자선당의 뜰을 열심히 뛰어다녔다. 아무리 숨 가쁘게 뜀박질을 해도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못하고 서성거리기만 하다가 석강에 들어온 염을

보고는 연우를 대신해 염을 꽉 끌어안았다.

“연우낭자가 나의 아내가 될 거라네.”

“알고 있사옵니다.”

“나의 아내가 될 거라네. 어서 빨리 가례를 해 달라 조를 것이야. 그래야 연우낭자를 볼 수 있을

터이니. 연우낭자를 만나보았나?”

“아직. 이젠 저의 집으로는 올 수 없으니······.”

삼간택에서 세자빈으로 간택이 되면 그 순간부터 세자빈이었기에 자신의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별궁에 거처를 마련하고 가례까지 세자빈 예절수업을 받아야 했다. 그러니 염도 연우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 연우와의 남매애가 남다른 염이었기에 벌써부터

헤어짐에 슬펐다.

이렇게 기뻤던 날도 단 하루뿐이었다. 그 다음 날부터 별궁에 있던 연우가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한 것이었다. 평소 건강했던 것을 알고 있던 훤이었기에 그동안의 긴장으로 인해 몸살이

난 것쯤으로 여겼지만, 병세는 더욱 깊어져 결국은 본가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집안에 이유 모르게 아픈 이가 있으면 세자궁으로 들어올 수 없는 법 때문에 염도

훤 앞에서 사라졌다. 병이 나아지면 다시 가례를 진행할 것이란 왕의 윤언은 있었지만 이런

의지도 오래가지 못했다. 세자빈으로 간택된 지 단 20일이 지난 후 연우가 죽었다는 비보가

자선당으로 날아들었다. 처음에 훤은 장난이라 생각했다. 사실이 아니며 세자빈 내정자를

뒤집듯 이런 사실을 뒤집고 연우가 나타날 것이라 생각했다. 보름이 지나도록 훤은 연우의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연우가 죽은 뒤 보름 만에 초췌한 몰골의 염이 비현각에

나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석강을 했다. 훤은 염을 보니 더욱더 연우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먼저 그 사실을 재확인할 용기도 없었다. 석강을 마친 염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세자저하, 이것으로 마지막이옵니다.”

“무엇이? 무엇이 마지막이란 말인가?”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었사옵니다. 소인은 이제 죄인의 몸이니 더 이상 세자저하의 앞에 나올

수가 없사옵니다. 마지막으로 인사하라는 어명을 받고 왔사옵니다.”

훤은 연우의 죽음에 넋이 나가 있느라 염의 처지는 미처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비록 그들의

잘못은 아니지만 병이 있는 자를 말하지 않고 세자빈으로 간택하게 했으니 이는 중죄 중에

중죄였다. 그 죄를 물어 염 또한 파직은 벗어 날 수 없었고 곧 귀양에 보내 질 위기에 있었다.

이는 홍문관대제학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칫 사약을 받을 수도 있었다.

“안 된다! 너는 아바마마의 신하가 아니라 나의 신하가 될 사람이다. 그러니 이렇게는 절대

안 된다! 네가 나를 떠나면 나중에 누가 나를 보필한단 말이냐!”

훤은 염의 눈동자에 담긴 슬픔을 보았다. 자신의 처지 때문이 아니었다. 연우를 잃은 슬픔은

훤보다 더 했기에 이대로 연우를 따라 죽어도 아무 미련이 없다는 눈동자였다. 염은 품속에서

봉서를 하나 꺼냈다.

“이것······. 우리 연······. 연우가 마지막에 남긴 것이옵니다. 얼마 전 그 아이 방에 들어가니 서안

안에 감춰두었던지, 남아 있었사옵니다. 아무래도 세자저하께 남긴 것인 듯하여 가져왔사옵니다.”

훤은 떠나는 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염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울컥 울분이 치솟아 올라

사라진 곳만 응시하고 있었다. 떨리는 심정으로 연우의 봉서를 열었다. 곱게 접혀 들어가 있는

종이를 펼치는 훤의 손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다 펼친 순간 훤의 슬픔이 터져 나왔다.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힘이 없었던지 그 정갈하던 서체는 덜덜 떨며 쓴 흔적이 역력했고,

먹을 갈 힘도 없었던지 미처 덜 간 먹으로 써서 글자 주위마다 흐리게 물이 번져나간 흔적이

있었다. 힘없이 떨며 쓴 서체가 눈에 밟혀, 글을 읽을 수가 없었고, 눈물이 떨어져 내려 또 글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제대로 읽지 못하고 그 마지막 봉서를 넣어버리고 말았다. 그 뒤에도

연우가 생각날 때마다 주고받은 서찰을 꺼내 읽었지만 마지막 봉서만큼은 마음이 아파 열지 않았다.

과거의 회상에서 돌아온 염은 흐릿한 달빛 아래에서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때 전해드린 그 봉서가 주인을 제대로 찾아간 것이었나이까?”

“음. 그래, 나의 것이었소.”

“나에겐 아무것도 아니 남겨놓고는, 훗!”

염은 이제야 연우가 자기에겐 서찰 하나 남기지 않았음에 서운해진 모양이었다.

“그대는 그때 같이 있었으니 그렇지.”

“아니옵니다. 그 당시 저도 숙부 댁에서 감금당해 있었사옵니다. 혹여 돌림병인지 몰라서.”

염은 그때가 생각났는지 감정 없는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연우 옆에 있을 거라며 울부짖으며

발광하던 염을 부친은 숙부의 집에 가둬뒀었다.

“그랬군.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소.”

“이젠 옛날 일이옵니다. 그런데 마지막 봉서에 무슨 말이 적혀있었는지 물어봐도 되올련지요.

소신은 마지막 그 아이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하였사옵니다.”

“나도 기억에 없소. 슬픔에 가려 미처 다 읽지도 못하였으니. 기억나는 건.”

순간 훤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그 옛날 마지막 서찰에 적힌 구절들이 새록새록 생각났다.

그런데 그 구절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기억이 흐릿해 잘못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훤은 그 마지막 서찰을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자야한다는 핑계를 대고 급하게

염을 돌려보냈다. 궁으로 잘 오지 않는 염이었기에 훤이 먼저 염더러 일어서라는 말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염은 의아해 하며 인사한 뒤 물러났다. 염이 물러나자 훤은 급하게

아랫고상궁(왕의 개인 물품을 관리하던 궁녀)에게 명하여 귀중품을 넣어둔 고(창고)에 가서

우(雨)라 적힌 화각함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훤의 급한 표정에 밀려 궁녀 두어 명은 아랫고

상궁과 함께 뛰어서 화각함을 가져왔다. 화각함 안에는 작은 상자와 연우에게 받은 봉서들이

넣어져 있었다. 그 중 가장 아래에 있는 봉서를 뒤져서 꺼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다 물러가게

하고 세자 때부터 보필해온 상선내관과 운만 남으라고 명했다. 봉서를 펼쳐든 훤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내용을 확인한 훤의 눈에 차차 눈물은 메말라지고 번뜩이는

눈빛만이 남았다. 한참동안 글을 읽고 또 읽던 훤이 그 서찰을 운에게 건넸다.

“읽어 보아라. 연우낭자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서찰이다.”

운은 이유를 모른 채 서찰의 내용을 확인했다. 운의 눈도 놀라움으로 차갑게 굳어졌다.

세자저하 보시오소서

마지막 힘을 내어 서신을 남깁니다. 혹여 폐가 될지, 아니면 세자저하께 미처 안 전해질련지

모르겠지만 이리 적어봅니다. 이제 곧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젠 영영

세자저하를 뵈옵지 못할 것이옵니다. 딱 하나 소원이 있다면 세자저하를 뵈옵고자 하는

것뿐이었사온데 이를 이루지 못하고 가니 이 슬픔을 이루 말할 수 없음이옵니다. 부디 만수무강

하시어 이 소녀의 몫까지 살아주시옵소서.

허 연 우

“이것은······.”

“운아, 너도 이상한 점을 보았느냐?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오면 나를 영영 보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는 바꿔 말하면 아버지가 가져오는 약을 먹으면 죽는다는 말이 아닌가!”

운은 차마 답하지 못하고 마른 침만 삼켰다. 하지만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하오나 전 홍문관 대제학의 인품은 고매하기로 그 명망이 높았사옵니다. 저 또한 가까이서

글을 배웠사옵니다. 절대 자식을.”

운은 뒷말을 급하게 삼켰다. 자식을 죽였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자식을 죽일 약을

먹이다니 이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 당시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건강한 낭자였다. 그런데 그 건강하던

여인이 갑자기 죽었다. 그럼에도 그 병의 원인조차 모른다고 하였고, 간택된 세자빈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도 제대로 하지 않고 덮어버렸다. 하찮은 평민이

죽었어도 그리 소홀하게 사인(死因) 조사를 하지는 않을 것인데.”

옆에 있던 상선내관도 그 당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운의 손에 있던 서찰을

빼앗듯이 받아 내용을 확인했다. 상선이 목소리를 낮춰 울분을 토했다.

“상감마마, 필시 그 당시 어떤 일이 있었을 것이옵니다.”

“그 당시 연우낭자를 진맥한 이는 누구인가?”

“상왕께옵서 직접 주치내의관을 보내시어 병을 살피라 하였다 들었사옵니다.”

“이런! 그는 상왕께서 승하하셨을 때 사약을 받지 않았는가?”

왕이 죽으면 왕의 주치의도 죽음에 책임을 물어 사약을 받는 것이 법도였기에 원망할 수도

없었다. 훤은 잠자코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빠졌다. 의문만이 가득하고 그 의문에 대한 답은

하나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내의원에서 올리는 국화차가 들어왔다. 훤은 내일 다시 점검해

보기로 하고 화각함을 잠가 옆에 둔 채 차를 마시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어김 없이 왕이

잠에 들자 월이 들어와 훤의 잠든 옆을 지켰다.

#10

달빛이 거의 없어도 운의 눈에 보이는 월만큼은 눈부시게 빛을 내고 있었다. 한 달 간만 궐에

머문다고 했으니 이제 보름 뒤엔 이리 앉아 있어도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눈에 보여 아린

마음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사라질 것인지, 운은 이제껏 이러한 감정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라 판단할 수가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생각도 나지 않을 것이라 마음 속에

새겨보지만 이미 보름 뒤를 생각하면 생전 없던 심장의 통증이 생겨나왔다. 자신의 눈 바로

앞에 칼날이 지나가도 움직이지 않던 심장이었다. 그런 운이 봐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든 왕과, 달이 저물어도 변함없이 조용한 무표정의 월이었다. 달은 옆으로 돌린 얼굴로 한

하늘에 있지 못하는 해만 그리워 할뿐 옆에 있는 구름에는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운의 마음이

무거운 또 하나의 이유는 더 이상 해가 달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늘의 달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칭얼대며 조르던 말도 싹 지워버렸기에, 월이 왕이 잠든 옆에 있노라 먼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것을 핑계 삼고 있는지도 몰랐다. 월의 가려달란 청 때문이 아니라, 왕이 월을

찾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왕에게 충성하는 마음 때문만이 아니라, 어쩌면 이 모든 것을 핑계

삼아 그저 말하고 싶지 않은 마음일련지도 몰랐다. 또 다시 아까운 한 밤이 지났다. 한 밤이

지났다는 건 월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날 하나가 감해졌다는 뜻이었다.

새벽 4시가 되자 훤이 가뿐한 모습으로 기상했다. 내의원에서 올리는 차를 마시고 잔 이후부터

몸이 가볍고 머리가 맑아진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여전히 밤새 누군가가 자신의 옆에

있었던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떠나지 않았다. 천추전에 나가 상참의(常參儀, 매일 새벽 5시경에

6품 이상의 문무 관리가 참여하던 조회)를 하고 조계(朝啓, 상참의가 끝난 뒤 의정부와 6조등

3품 당상관 이상의 문무관리가 참여하여 국가의 주요 업무를 보고 결정하던 회의)를 했다.

어제 연우에 관한 일로 골몰하던 모습은 없었다. 상선내관은 왕이 밤사이 자고 일어나 잊어버린

건 아닌가 생각이 될 정도였다. 조계가 끝나자 훤은 대신들에게 먼저 물러나란 명을 했다.

그리고 모두가 물러가도록 기다리며 문서들을 검토했다. 모두가 물러가도 내관들과 사관 두 명

만큼은 남아있어야 했다. 훤은 그것을 기다렸던 것이다. 열심히 사초를 기록하고 있던 우사관

앞에 누군가가 다가와 쪼그리고 앉았다. 우사관이 두려워하며 눈길만 반쯤 들자 눈에 곤룡포

자락이 보였다. 그래서 재빨리 눈길을 다시 아래로 깔았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아라.”

“사, 사, 상감마마. 어찌 이러시옵니까?”

원래 왕의 얼굴을 허락 없이 보면 안 되는 것이긴 했지만, 훤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는

부담감과 어려보이는 자신의 얼굴 때문에 그러한 것을 특히 더 싫어하는 왕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우사관이었기에 왕이 고개를 들란다고 들어서 보긴 두려웠다.

“보라는데 안보는 것도 왕의 말을 거역하는 것이다!”

우사관은 두려운 눈길을 들어 왕을 보았다. 동안이긴 하지만 뚜렷한 이목구비가 여간 잘생긴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옆에 있어도 이리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경우는 얼마 없었다.

이렇게 돌발적으로 한 번씩 보게 되면 잘생긴 얼굴에 내심 놀라곤 했다. 원래 못생긴 용안(왕의

얼굴)도 잘생겼다는 의미를 붙여주지만 이번 왕은 그저 미려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함을

느끼곤 했다. 앳되어 보이는 모습이 잘생긴 외모와 더불어 조화를 이뤄, 그 모습에서 거역할 수

없는 고귀함으로 사람을 압도했다.

“하문하시옵소서. 천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것이옵니까?”

“상왕(죽은 전 왕)의 실록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내관들과 사관들이 모두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꺼번에 합창하듯 말했다.

“아니 되옵니다. 상감마마!”

우사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역대 상대왕의 실록을 금상(현직 왕)께오서 보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경국대전에도 법으로 명시되어 있사옵니다. 그리고 이제 겨우 초초(初草, 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작성한 원고)가 완성되었다 들었사옵니다.”

“난 초초나마 보길 원한다. 아니면 그 당시 기록해둔 사초라도.”

“상감마마, 폐위 연산군의 무오사화를 유념하시오소서. 그 또한 사초의 유출로 인한 비극이었사옵니다.”

“내가 전체를 보길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극히 일부만이다.”

“그것이 글자 하나라고 하여도 아니 되옵니다.”

우사관은 왜 하필 좌사관이 아니라 자기한테 와서 이러는지 원망스러웠다. 이 와중에도

좌사관은 왕이 상왕실록이나 사초를 보여 달라고 조르는 사실을 자신의 사초에 적고 있었다.

“내가 나의 아바마마께서 처리하신 일들을 배우고자 하는 부분이 있어서 이러는 것인데,

그러하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잠자코 사초를 적고 있던 좌사관이 우사관을 돕고자 말을 꺼냈다.

“그러하오시면 승정원일기를 열람하시오소서. 승정원일기에는 실록보다 더 방대한 공문서

처리 기록이 있사옵니다. 비록 신하들은 열람할 수없는 기밀이나 상감마마께오서는 자유로이

열람하실 수 있사옵니다.”

훤도 승정원일기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훤이 알고자 하는 것은 세자빈 간택 당시, 왕이

처리한 공문서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전체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연우가 죽고 난 뒤에 왕이

어떠한 사람들을 만났는가에 대한 것도 알고 싶었다. 어차피 사관들 귀를 피해 몰래 대화를 주고

받았을 것이니 그 내용까지 알게 될 거란 기대 같은 건 없었다. 연우의 죽음을 즈음하여 왕이

어떠한 사람들과 접촉했는지 그들의 행보는 어떠했는지 이것이 궁금했다. 이런 사실은

승정원일기에는 없는 것이었다. 훤은 더 이상 사관들을 조르지 않았다. 이들은 사초를 내놓느니

차라리 자신들의 목을 내놓을 사람들이었다.

“내 너를 시험한 것이었다. 앞으로 누가 사초를 보여 달라 하거든 나에게 한 이렇게 행하라.”

훤은 조반을 들기 위해 강령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침밥을 먹고 난 뒤에 강령전에 앉아

혼자만의 생각에 골몰했다. 그 당시 기억을 애써 더듬어냈지만 뾰족하게 이상한 것은 없었다.

그러던 중에 딱 하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불분명했다.

“암기반 요원(내관들 중에 특별히 뛰어난 암기력을 가진 인물 두 명을 선발하여 각종 부문을

두루 암기하게 했다가 왕이 필요할 때 마다 그때그때 대답하던 내관)을 들라 해라.”

암기반 요원 두 명이 왕 가까이로 다가와 앉았다. 훤은 심각하게 물었다.

“내 기억으로는 이전 관상감의 세 명의 교수들이 한꺼번에 사약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게 언제였느냐? 세자빈 간택이 있고 난 이후였느냐?”

“네. 삼간택이 끝나고,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죽은 허씨 처녀의 짧은 사주를 미리 알지

못했다는 죄를 물어, 허씨 처녀가 죽고 난 바로 다음날 세 교수도 사약을 청해 자결하였습니다.”

“잠깐! 사약을 청하였다고? 상왕께오서 사약을 내린 것이 아니라?”

“이 천신의 기억으로는 그리 되어 있사온데 자세한 것은 이 몸의 머릿속에 기억되지 않았사옵니다.”

훤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 당시의 관상감의 세 교수는 처녀단자로 올라온 모든 처녀의

사주를 보았을 것이다. 그중 좋은 사주 또한 그들만 알고 있었을 것이고, 명과학교수는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던 연우의 사주를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리 가까운 시일 내에 덧없이 가버릴

여인의 사주를 그가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걸 몰랐기에 사약을 청했다? 훤은 의문이 더 커졌다.

자신들의 죄를 스스로 청해 사약을 받는다고 해도 의금부에서 심사하고 판결을 하려면 많은

시일이 걸린다. 왕이 사약을 명해도 바로 다음날 형이 집행되지는 못한다. 너무 빨리 사약이

내려졌다. 이는 빨리 그들의 입을 봉해야 할 무언가가 있었다는 뜻이 분명했다. 세자빈 간택에

참여했던 관상감의 교수 세 명은 죽고 없다. 연우의 병을 진맥했던 어의도 죽고 없다. 아마도

이 모든 일을 알고 있었을 것 같은 왕도 죽고 없다. 연우에게 약을 준 전 홍문관 대제학도 연우가

죽고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고 없다. 그렇다고 아무나 잡고 물어보아선 안 되는

것이었다. 훤은 언제나의 버릇으로 운을 찾았다. 하지만 운은 조계가 시작되기 전에 쉬러 가고

없었다. 훤은 눈썹 사이에 진한 내천 자를 그리며 말했다.

“상선!”

“네,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하교하시오소서.”

“그 당시의 승정원일기를 가져오너라. 그리고 그 이전과 이후도 아무렇게나 뽑아 오너라.

그때만 가져오면 혹여 이상히 여기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윤음(임금의 말씀)의 뜻을 헤아렸나이다. 승지(승정원 관리)에게 전할 밀지를 내려주시옵소서.”

훤이 조강과 윤대(당상관이하의 실무관리들의 보고를 받는 회의)를 마치고 주수라(점심식사)를

먹으러 다시 강녕전으로 오자 그제야 내관들이 승정원일기를 찾아서 가져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양이 엄청나게 많았다. 낮 짬짬이 그리고 밤에 짧은 시간을 투자하여 그 당시 두 달간의

문서들을 확인하려니 여간해선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훤은 다른 사람 손에 맡기지 않고

서류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확인해 들어갔다. 하루 종일의 가뿐함 때문에 훤은 밤만 되면 먼저

차를 청해서 마시고 잠에 들었다. 차 때문에 깊은 잠을 자게 되는 것인데 그 차의 효능이 건강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날은 지났다. 그리고 달은 점점 더 둥글어져 훤과 중전의

합궁일이 되고 말았다.

불완전한 보름달이 뜨자 훤은 목욕을 마치고 하얀 야장의를 입었다. 그리고 하얀 두루마기를

걸치고 강녕전 뜰에 섰다. 머리엔 아무 것도 쓰지 않고 그저 황금 상투관에 황금 첨(상투비녀)을

꽂은 것이 전부였다. 교태전으로 가는 것이 싫은 마음에 괜히 뜰을 몇 바퀴 거닐며 서성거렸다.

어젯밤 차는 마시지 말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그러면 오늘 잘하면 몸이 안 좋아졌을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만약에 오늘의 합방에서 중전이 회임을 하게 된다면, 그것이

또한 왕자라면 파평부원군의 위세는 더욱 심해질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이유때문만이 아니더라도

훤은 중전과 합방하는 것이 싫었다. 평소엔 또 괜찮다가 이렇게 합궁일만 되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역한 감정이 생겨났다. 파평부원군이 싫은 것과는 뭔가가 다른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중전을 미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무작정 드는 거부감이었다.

입태시가 가까워져 가자 옆의 내관들이 훤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훤은 하는 수 없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교태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 걸음은 옆에서 보는 이들의 눈에도 더 없이 무거워

보였다. 훤은 오늘따라 날씨조차 좋은 하늘의 달로 원망하는 눈길을 띄워 올린 후 교태전으로

들어가는 양의문(兩儀門)으로 긴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며 들어갔다. 운은 거기 까지였다.

내관과 궁녀는 따라 들어갈 수 있어도 남자인 운검은 양의문 앞까지만 왕을 호위할 수 있었다.

운은 몸을 돌려 강녕전을 호위하기 위해 돌아왔다. 돌아와 강녕전 앞에 서니 멀리서 월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관상감에서 지정해둔 오늘의 왕의 방을 홀로 지켜 왕의 액을 누르며, 무사히

합방이 이뤄지길 기도하기 위해서였다. 남아있던 내관 한명이 월을 강녕전 안으로 안내했다.

월이 왕의 이불이 깔린 방에 자리 잡고 앉자 내관은 어디론가 가버렸다. 강녕전 일대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왠지 월과 운뿐인 것 같았다. 운은 방 밖의 창 앞에 서 있다가, 안에 앉은 월의

모습이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창을 열었다. 고요히 열리는 창에도 월의 움직임은

없었다. 언제나 옆모습만 보이던 월의 얼굴이 운 앞에 정면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번엔 운이

월을 정면으로 볼 수 없었다. 무표정한 월의 표정에 마음이 아릿해져 그만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다른 여인과 합방하러 간 왕을 위해 앉아 있는 월의 마음이 운에게 고스란히 넘어오고

있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그것에 힘을 빌어 운은 처음으로 월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괜찮소?”

“무엇이 말이옵니까?”

운의 숨이 턱하니 막혔다. 목소리를 들었다. 감정 없는 목소리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무엇이 괜찮은가에 대한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하는데 차마 입에 말을 올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슬쩍 말을 돌렸다.

“건강 말이오.”

“네.”

대화가 끊어졌다. 운은 그 순간도 아까워 다시 말을 이었다.

“상감마마께옵서 그대를 많이 찾으시었소.”

그리고 그 뒤의 말, 만 리 길을 찾아다닌 이가 자신이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월은 아무 말 없이 있었다. 작은 고개 짓도 없었다.

“한 달 간만 궐내에 있을 거라 들었소. 내일까지요?”

“오늘밤이 마지막이옵니다. 내일 새벽에 길을 떠날 것이옵니다.”

별운검을 잡은 운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눈길을 다시 월에게로 돌렸다. 오늘밤만

지나면 못 볼 얼굴이라 생각하니 안 볼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가오? 그때 만났던 곳?”

“아니옵니다. 그곳은 그때 결계가 깨어져 상감마마와 나으리가 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그곳을 비운 것입니다. 이제 나가면 다시 결계를 묶어 어느 누구의 발길도 들 수 없는 곳으로

갈 것이옵니다. 그곳이 어디인지 소녀도 모르옵니다.”

“괜찮소?”

“또 무엇이 말이옵니까?”

운은 고개를 들어 완전히 둥글게 차오르지 못한 달을 보았다. 내일 밤이면 완전히 둥근 달이

이곳을 비출 것이다. 그리고 그 달빛 아래에는 더 이상 월의 모습은 없을 것이었다.

“무엇이든.”

“네. 그 무엇이든 소녀는 괜찮사옵니다.”

운은 달에서 눈길을 가져와 자신의 발아래만 보았다. 옆의 달도 또 옆의 월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우두커니 서 달이 월에게 보내는 달빛을 막고, 월이 달로 보내는 설움을 막았다.

운의 그림자가 월의 손등을 어루만지고, 가슴을 쓸고 올라가 입술에 내려앉았다가, 양쪽 볼을

감싸 쥐었다가, 차마 흘러나오지 못하는 눈물을 닦아주다가, 월의 가녀린 몸 전체를 감싸

안았다. 오직 키 큰 운의 긴 그림자만이······.

교태전에 든 훤은 여전히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다. 앞에 다소곳하게 고개 숙이고 앉은 중전의

옷고름에 손이 가지지가 않았다. 힘껏 손을 뻗었지만 중전이 움찔하는 바람에 옷고름에 손이

다다르기도 전에 다시 얼른 거둬와 버렸다. 그렇게 앉아만 있는 훤의 하얀 야장의에 창문을

뚫고 들어온 달빛이 서럽게 적셔졌다가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훤의 주위로 흘러내린

달빛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훤의 마음도 그 속에 같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 순간 훤은

자신이 인간임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왕이란 존재만 되어

원자를 보기 위해 눈 감고 중전을 품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눈앞의 중전은 분명 예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어느새 입태시가 다 되었는지 교태전 뜰에서 시간을

알리는, 그리고 빨리 합하기를 몰아붙이는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양기를 북돋워 왕자를

보게 하기 위한 북소리(북의 재질인 나무와 가죽은 양으로 분류. 음인 쇠 소리는 절대 들리면

안 됨)이기도 했다. 그 둥둥거리는 소리에 훤의 심장도 같이 뛰기 시작했다.

이때 소격서의 제당에 혜각도사가 앉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홀로 비밀기도를 하던 혜각도사는 희미하게 교태전 쪽에서 들려오는 북소리가 들리자 하얀

종이 위에 파란 물감으로 알 수 없는 문자를 적어 내려갔다. 그 물감이 다 마르기도 전에 촛불에

불을 붙였다. 종이가 혜각도사의 손 위에서 활활 타오르자 그 불길을 손 안에 확 거머쥐었다.

혜각도사의 눈빛이 무섭게 빛나던 그 순간, 교태전에서 입태를 재촉 받고 있던 훤이 갑자기

자신의 심장을 거머쥐고 방바닥에 쓰러졌다.

“헉! 헉! 누, 누가. 누가 좀!”

중전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황한 중전이 바깥에 소리를 쳤다.

“밖에 누가 있느냐? 누가 좀 도와다오!”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방안의 분위기에 내전상궁이 먼저 듣고 달려왔다.

“중전마마, 무슨 일이시옵니까?”

“마마께옵서 갑자기 쓰러지셨다. 어서!”

“들어가도 되는 것이옵니까?”

“야장의 그대로시다!”

그제야 궁녀들과 내관이 급하게 들어와 왕을 살폈다. 훤은 새하얀 안색에 입술까지 새파랗게 된

상태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숨 쉬는 것조차 괴로운지 거의 컥컥 거리는 숨을

헐떡이자 상선내관까지 새파랗게 질려 급한 마음에 훤을 들쳐 업었다. 어의를 교태전으로

부르면 갖춰야할게 많았기에 차라리 강녕전으로 왕을 업고 가는 것이 빨랐다. 그곳으로

내의관들을 불러오라 명하고 강녕전으로 갔다. 나무 놀란 나머지 상선내관은 없던 힘도 불끈

생겼는지 훤을 거뜬히 업고 날듯이 뛰었다. 그에 앞서 이미 내관 하나가 강녕전으로 달려와

월을 대피시켰다. 월은 원인도 모르고 연생전으로 급히 대피했다. 운도 놀라 교태전 쪽으로

달려가니 이미 훤은 내관의 등에 업혀 침전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강녕전 이불에 내려진 훤은

이제껏 괴롭던 것이 거짓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입술에 붉은 빛깔도 되돌아왔다.

운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시옵니까!”

상선내관은 훤의 몸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고 대신 옆의 다른 내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정말 갑자기.”

이때 방으로 내의관이 아니라 관상감 세 교수가 헐레벌떡 나타났다.

“상감마마께옵선 어떠시옵니까?”

상선내관이 더욱 새파랗게 질려 물었다.

“교수들이 여긴 어떻게? 설마 단순한 어환(御患, 왕의 병)이 아니시오?”

명과학교수가 답하기도 전에 어의가 들어왔다. 미처 진맥을 하기도 전에 훤이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난 아무렇지도 않다. 다들 놀란 마음을 가라앉혀라.”

“하오나 조금 전까지는.”

“그래, 당장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말끔히 괜찮아지다니 이해할 수가 없구나.

아! 절대 꾀병은 아니었느니.”

합궁일만 되면 이리저리 핑계를 대던 전과가 있었기에 훤은 미리 선수를 쳤다. 상선내관은

여전히 놀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그 염려하는 마음이 울컥하는 목소리로 튀어나왔다.

“그리 식은땀을 흘리는 꾀병도 있다하더이까! 구순(口脣, 왕의 입술)에 혈이 말랐는가 하였습니다!”

“상선, 날 꾸짖는 것인가. 다들 이러면 내가 미안해지지 않는가. 그만들 하게. 그런데 지금까지

여기에 누가 있었나?”

훤은 물음을 던지며 운을 보았다. 운은 속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놀랐지만 겉모습만큼은 아무

표정 변화 없이 고개만 숙였다. 입이 무거운 운 대신 내관이 대답했다.

“내인(궁녀)이었습니다. 상감마마의 어침기수(왕이 잠자는 이불)를 살피느라······.”

훤은 내관이 더듬거리며 말하는 내내 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의가 말했다.

“어환을 살피겠사옵니다.”

훤은 어의가 다가와 앉자 진맥할 수 있도록 팔만 내밀었다.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은

운에게서 거두지 않았다. 운은 훤의 눈길을 느끼면서도 입만 꾹 다물고 가만히 고개 숙이고

있었다. 주위내관들은 운의 이상함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지만 훤만은 운이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의가 진맥을 한 후에 안심하여 미소를 보이자 내관과 궁녀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상선내관은 맥이 풀렸는지 어깨가 축 쳐졌다. 어떻게 훤을 업고 여기까지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훤이 웃으며 말했다.

“나보다 상선이 더 걱정이다. 내의원에서 상선에게 청심환을 내어주도록 하라.”

“지금 상황에서 어찌 천신의 몸을 걱정하시옵니까? 조금 전은 어떻게 된 일인지 부터 살피셔야

하옵니다. 어의, 어떻소?”

어의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바닥에 납작하게 숙이고 있는 관상감의 세 교수들을 보았다.

그와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이번일도 내의원 문제가 아니라 관상감의

문제였다. 명과학교수가 두려움에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서 어떻게 날아온 것인지 모르겠사오나, 북소리가 울릴 즈음에 살(殺)이······.”

“살이라니! 그 무슨 무서운 말입니까?”

어의가 깜짝 놀라 소리치자 명과학교수가 바들바들 떨며 다시 말했다.

“그것이······, 잘 모르겠사옵니다. 이 천신을 죽여.”

“죽여 달란 소리 지겹다. 그 말은 치우고 우선 살이 확실한 것인지 말하라.”

훤이 짜증스럽게 말을 자르고 들어와 묻자 명과학교수는 더욱 떨면서 말했다.

“그, 그것도 잘······.”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살이랬다가 또 잘 모르겠다고 했다가 도대체 뭐란 말이냐?”

훤이 화를 버럭 내자 이번엔 지리학교수가 말했다.

“아뢰옵기 두렵사오나 분명 상감마마의 옥체를 겨냥한 살이 날아온 것은 분명하옵니다.”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왕의 몸에 살을 보냈다는 것은 분명한 역모였다.

지리학교수가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그 살이 치명적인 것이 아니오라 일시적이기만 한 것이어서······. 게다가 이제까지의

어환을 일으킨 것과는 또 달라서······.”

“도대체 지금 그대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 것인가? 이 무슨 해괴한 말들인가!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훤의 물음에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엎드렸다. 알 수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도무지 손에 잡히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관상감에서 불출주야로 이 일을 알아볼 것이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면 녹봉을 받으면서 아무 일도 안 하려고 하였단 말인가. 당장 물러가

이 일을 조사하거라.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승지나 내관을 거치지 않고 바로 나에게 보고하도록

하라.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해야 할 것이야!”

교수들은 떨리는 발걸음으로 겨우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액받이무녀가 어디 있는지 물어

월이 있는 연생전으로 주위를 살피며 들어갔다. 월이 그림처럼 아무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천문학교수가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느냐?”

“네, 대체 무슨 일이옵니까?”

“넌 몰라도 된다. 이대로 숨어 있다가 상감마마께옵서 침수에 드시면 옆을 지키거라.”

“네.”

세 교수는 조심스럽게 연생전을 빠져나와 밖으로 나갔다. 뜰을 걸어가던 중에 갑자기

명과학교수가 놀란 눈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두 교수도 같이 걸음을 멈췄다.

“뭔가를 알아낸 것이오?”

“아니, 그게 아니라······. 방금 무녀. 이상하지 않소?”

“무엇이, 아!”

세 교수가 일제히 같은 표정이 되었다. 명과학교수가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들릴 듯 말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액받이무녀가 어찌 상감마마의 옥체에 이상이 있었음을 모를 수가 있소? 도리어 우리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다니. 그 말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른다는 뜻이 아니오.

우리보다 액받이무녀의 몸이 먼저 느껴야 하는 것이 아니오?”

“하지만 액받이무녀인 것은 확실한 것 아니오? 한 달 동안 상감마마의 옥체가 그리도

좋아지셨으니. 순식간에 스친 살이라 액받이무녀가 못 느낀 것일 수도 있소.”

“하지만······, 저 무녀에게선 일반 무녀들이 보이는 신기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소. 계속 요상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신기가 없는 무녀도 있답디까? 저래뵈도 그 장씨도무녀의 신딸이오. 우스개 소리 그만하고

소격서로 가봅시다. 혜각도사께 자문을 요청해야 할 것 같소.”

소격서로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의구심은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살이 날아온 것이 더 중요한

문제였기에 머릿속은 오늘일로 다시 채워져 두려움이 덮였다. 천문학교수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런 살에 관한 문제는 성숙청의 장씨도무녀란 사람이면 더 잘 알아낼 수 있을 텐데.”

그 말을 옆에 있던 지리학교수가 듣고 말했다.

“궐에 있었다면 그 누구도 감히 살을 날릴 엄두도 못 내었겠지요. 이제 그만 궐로 들어와 주면

좋을 텐데. 저리 허수아비 같은 대리 도무녀는 아무 일도 못하는데, 휴!”

“장씨도무녀가 성숙청을 비운지 7년이나 되었는데 아직 그녀를 대신할 무녀가 없다니, 쯧쯧.

하긴 다른 무녀들의 신력이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장씨도무녀의 신력이 너무나도 높은 탓이지······.”

그들이 침전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훤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걱정되어 자리를 뜨지

않았다. 훤이 아무렇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만 다들 자기 자리로 가거라. 모두 이 방에서 나와 같이 자려는 것은 아니겠지?”

오늘의 침소는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 버렸고 또 걱정된 마음이 많았기에 다들 방에서만

물러나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훤이 있는 방 주위를 에워싸고 앉았다. 모두 눈에서

사라지고 내관 세 명과 상궁 세 명, 그리고 운검만 남았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훤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자기마저 난리피우다간 일이 일파만파로 퍼질 것 같아 가만있었지만, 자신에게

살을 날린 것은 그 누구가 어떤 목적이든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훤은 다시 한 번 운의 표정을

살폈다. 변함없는 모습으로 자신의 옆에 앉아 있었다. 모두가 넋이 나가 느끼지 못한 열린

창문이 훤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하늘의 달도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재빨리 달에게서

눈길을 거둬 반대편을 보았다. 방금 전의 왁자지껄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귓속이 울릴 정도로

적막했다. 그 적막함 속에 훤이 작은 진동을 일으켰다.

“운아!”

“네!”

“달을 보지 않으려 등을 돌려 앉았더니 외로운 내 그림자만이 덩그러니 보이는구나. 그동안

그림자의 옅어짐에 달빛 옅어짐을 알았고, 그림자의 짙어짐에 달빛 짙어짐도 알아왔느니.”

운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 월에 대해 침묵하고 있던 왕이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었다. 이제 말할 틈이 생겼다. 그리고 이대로 오늘을 마지막으로 월을 보낼 수가 없었다.

이 이후의 사태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이 순간만큼은 둘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아니, 둘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기 보다는 월을 궐에 묶어둘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왕이었기에,

자신의 눈앞에 계속 월이 보이도록 잡아 달라 하고 싶었다. 스스로에게조차 치졸하여 외면하고

싶은 그런 부끄러운 마음이었다. 그렇지만 입 밖으로 말을 꺼내기엔 주위에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방 밖을 둘러있는 보이지 않는 눈과 귀가 있었다. 운이 무거운 입을 가까스로

열었다.

“하얀 해가 서쪽 언덕 위로 잠기니, 동쪽 봉우리 위로 하얀 달이 떠오네, 달빛이 아득하니

만 리를 비추니, 밝은 빛만이 허공중에 흩어져 내리네.”(도연명의 <잡시2>中)

훤이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운을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해져 운을

보았다. 운은 무표정하게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 시를 통해 말하는 뜻을 훤이

알아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훤은 한참동안 동그란 눈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운아! 너 나를 웃기고자 함인가? 어째 네 입에서 제법 긴 말이 나온다 했더니 그 시의 뒷부분도

마저 읊기에 길더냐? 아니면 갑자기 내 앞에서 네 시문 외우는 실력을 자랑하고자 했는데

그 뒷부분이 기억 안 난 게냐? 내가 이리 보여도 시책은 제법 읽었느니. 도연명의 시 또한 내가

즐기는 것 중에 하나가 아닌가. 하하하. 내가 그 뒤를 이어볼까?”

훤은 운이 뭐라고 말하려고 하자, 먼저 그 시의 뒤를 이어 읊었다. 그리고 시선은 운에게서

하늘의 달로 바꾸었다.

“방문 틈 사이로 찬바람 스며들어, 한밤중 잠자리 베개머리 싸늘하네. 날씨 변한 것에 계절

바뀜을 알고, 오지 않는 잠에 밤 깊음을 알겠네. 말하고 싶어도 대답할 사람 없어, 외로운

그림자에게나 잔을 권하네. 해와 달은 사람을 버려두고 가고, 뜻은 있었으나 이루지 못하였으니,

가슴 깊이 서글프고 처량한 생각에, 밤새워 뒤척이며 잠들지 못하였네.”

훤은 따뜻한 눈길로 다시 운을 보았다. 그리고 팔꿈치로 운의 가슴팍을 쿡쿡 찌르며 장난스런

표정과 말투로 말했다.

“운아. 내 마음을 알아주는 벗 하나 갖는 것이 나의 소실 적 부터의 소원이었다. 요즈음의 나의

마음을 표현한 시를 네가 먼저 내게 말하여 주다니. 이는 곧 내 마음을 알아주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내 여러 일들로 바빠 외로운 내 그림자 하나 돌볼 여가가 없었는데······. 하하하!”

“상감마마, 그.”

운이 그것이 아니란 말을 하고 싶어 입을 열려고 하는데 훤이 갑자기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하는

바람에 말이 잘려버렸다. 모두가 놀라 훤에게 다가오려 하자 훤은 손으로 입을 막고는 겨우 말했다.

“아니다. 내 운 때문에 웃다가 침을 잘못 삼켜 사래든 것뿐이다. 콜록콜록! 수긴(수건) 좀. 콜록콜록!”

상궁이 훤의 입에 수건을 가져가 대려고 하자 훤은 그 수건을 낚아 채 손수 입을 틀어막았다.

“콜록콜록!”

“상감마마, 어의를 불러오리이까?”

“사래든 것뿐이다. 그것보다 어서 차를 안 가져오고 뭘 하느냐? 오늘은 아니 가져오는 게냐?

어서 잠자리에 들고 싶구나.”

“네, 곧 가져 올 것이옵니다.”

훤의 기침이 다행히 멈춘 것 같아 안심했다. 차를 마시고 자면서부터 하루가 거뜬했기에 언제나

훤이 차를 먼저 청하곤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다음날의 많은 공무가 걱정된 모양인지 빨리

차를 마시고 자고 싶은 모양이었다. 국화향이 가득한 차가 훤의 손으로 건네졌다. 운이 급한

마음에 대뜸 말을 던졌다.

“차향이 짙사옵니다.”

이번에도 훤은 동그랗게 뜬 눈만 운에게 던지며 말했다.

“나에겐 딱 맞구나. 갑자기 웬 차향 타령이냐?”

운은 훤의 손에 든 차를 빼앗아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훤에게 차를

마시게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오늘을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란 이젠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훤의 입안에 순식간에 쏟아지듯 들어가는 차를 막기엔 늦어버리고 말았다. 운은 훤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차를 덧없이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야속한 국화향만이 온 방에 가득

차오름을 무너지는 가슴이 느껴야했다. 차를 다 마신 훤은 다시 기침이 나왔는지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상선내관이 걱정되어 물었다.

“정말 괜찮으신 것입니까?”

“어. 이번엔 급히 차를 마시고 나니 목이 컬컬해서 기침이 나온 것이니라. 내 이만 자겠노라.

놀랐더니 몸이 많이 피곤해서.”

훤은 그대로 이불 속에 들어가 누웠다. 그리고 이내 잠에 빠진 듯 했다. 훤이 잠에 빠진 것을

확인 한 사람들은 각자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았다. 운도 방문 앞에 자리를 지켰다. 마지막

절망까지 완전히 자리했다. 이젠 운도 더 이상 어찌해볼 수 없었다. 훤이 잠들었다는 것을

궁녀 하나가 알렸는지 월이 드디어 마지막 날을 훤과 함께 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다른 날과 같이 훤의 잠든 옆에 앉았다. 그렇게 앉아 어느새 누군가가 닫아버린 창을

보았다. 그리고 그 너머에 떠있는 보이지 않는 마지막 달을 보았다. 운도 마지막 월의 옆모습을

보았다. 첫날과 다름없는, 그 표정 그대로였다.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운의 통탄한 심정은 미처 월에게로 꺼내지지 못한 채 그렇게 사그라 들어야 했다. 월의 애통한

그리움도 훤의 감은 두 눈 위에만 그쳐야 했다. 저 눈이 떠져 자신을 볼 일은 없을 것이었다.

단 한 번도 훤의 눈동자를 보지 못하고 가야했다. 다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잠든 훤이 몸을

옆으로 뒤척였다. 그리고는 떠져선 안 되는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월의 눈동자와 훤의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만났다. 그 순간 월의 숨이 멎었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버렸다.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훤의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내 훤의 두 눈꺼풀이 한번 꿈뻑 움직였다.

그제야 놀란 월이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이미 훤의 손이 월의 발목을 잡이 쥔 뒤였다.

#11

월이 발목을 한번 빼내려고 하면 발목을 쥔 훤의 손에 힘이 더 가해지고, 다시 한 번 빼내려고

움직이면 그만큼 더 손에 힘이 가해졌다. 이러고 있는 둘의 움직임은 너무나 미세해서 아직

내관들의 눈에는 띄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운의 눈에는 훤의 손이 살짝 움직여 원래 있던 손의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월의 발목을 잡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저 잠결에 손이 조금

움직였는가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운은 놀라서 훤의 머리 옆에 있는 수건을 보았다. 그리고

왕이 시의 뜻을 알아차리고 차를 뱉어 내기 위해, 일부러 기침을 하면서 수건을 달라고 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운의 심장은 영원히 월을 보지 못할 것이란 절망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절망으로 어두워졌다.

훤이 월의 발목을 사정도 없이 잡아 당겼다. 그리고 힘으로 바닥에 넘어뜨려 자신의 가슴아래에

가두었다. 이번에는 훤과 월의 움직임이 컸기에 내관과 궁녀의 눈에도 띄어버렸다. 하지만

그들이 놀라기도 전에 훤은 다른 손으로 월의 어깨를 잡아 달빛이 드는 창 아래로 끌어 올린 뒤,

다시 한 번 더 자신의 가슴아래에 깔린 월이 움직일 수 없게 단단히 했다. 월은 소리를 낼 수

없었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사, 상감마마······.”

상선내관의 떨리는 목소리는 훤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훤의 오감은 오직 눈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휘영청 밝은 달빛에 눈이 부시더니 이젠 그 달빛의 어두움에 화가 났다.

“어서 촛불을 가져오너라, 어서!”

내관과 궁녀가 촛불을 준비하기까지 기다리는 것도 조급했다. 그래서 손으로 월의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이마를 만져보고, 눈을 만져도 보고, 코도 만져보고, 입술도 만져보았다.

달처럼 차가울 것이라 여겼던 뺨도 만져보았다.

“따뜻하구나. 사라지지도 않는구나. 재가 되어 날아가지도 않는구나. 사람이었구나. 귀신이

아니었구나. 그때 꿈을 꾼 것이 아니었구나. 달빛이 흰 돌을 가져다 나를 농락하였다 여겼다.

소아(素娥, 달나라의 선녀)가 나를 희롱하였다 여겼다.”

훤은 믿기지 않는 듯 계속해서 월의 얼굴을 만졌다. 내관이 촛불 두 개를 가져와 가까이에

놓았다. 하지만 그 두 개의 불빛으로는 월이 보고파서 허기진 훤을 채울 수가 없었다.

“너무나 어두워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촛불을 더 가져오너라! 궁궐에 있는 모든 불빛을 다가져오너라!”

왕의 외침에 창고 등으로 초와 촛대를 가지러 내관들과 궁녀들이 놀란 걸음으로 뛰어다녔다.

그리고 관상감의 교수들을 찾아 뛰는 내관도 있었다. 월은 훤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고자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더 아프게 어깨를 짓누르는 훤의 보복을 받아야 했다.

훤은 월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뚫어지게 보았다.

“뇌봉전별(雷逢電別, 우뢰처럼 만났다가 번개처럼 헤어진다는 뜻으로 잠깐 만났다가 곧 이별함)한

인연으로만 여겼다. 그리 끝나는가 여겼다. 그런데 네 눈에서 나의 눈부처(눈동자에 비치어

나타난 사람의 형상)를 보게 될 줄이야.”

훤의 눈에는 어두운 불빛이 운의 눈에는 너무나 환하여, 그만 고개를 돌려 어두운 구석을

보았다. 돌려진 고개를 따라 절망을 대신해 긴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가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여기저기서 가져온 촛불들로 방안을 하나씩 채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밝힌 촛불 수십

개가 훤과 월의 주위를 에워싸고 방안을 햇빛처럼 채웠다. 월이 다시 한 번 몸을 빼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월의 등이 바닥에서 조금 떨어진 틈으로 훤의 팔이 들어와 그녀의 상체를

안아 올렸다. 동시에 한 손으로 볼을 감싸듯 쥐며 옆의 눈길을 막았다. 월이 훤의 몸을 밀치며

다리를 조금 뻗자 발끝에 촛대가 닿았다.

“움직이지 마라. 촛대를 넘어뜨려 이 나라의 왕을 화마의 재물로 바칠 생각이냐?”

월이 촛대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눈길을 돌리니 훤의 손바닥이 그 길을 방해하고 있었다.

어디쯤에 촛대가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기에 자칫 잘못 움직이다간 촛대를 넘어뜨려 불길에

휩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손끝하나 꼼짝 못하고 속절없이 훤의 품에 안긴 채

있어야 했다. 하얀 비단야장의가 떨고 있는 하얀 무명소복을 꽉 안아 하나의 덩어리가 되었다.

월은 햇빛국화향을 느꼈고 훤은 달빛난향을 느꼈다. 서로의 향에 코끝이 아려왔다. 훤은 월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 대었다. 귓불에 송송이 박힌 솜털이 입술에 먼저 와 닿았다. 귓불에도

난향이 베여있었다. 그 귀에 살랑이는 따뜻한 바람과 함께 속살이는 말도 불어넣었다.

“난 이 훤이다. 넌 누구냐?”

월의 눈에는 훤의 어깨 너머로 천정만이 보였다. 천정이 흐릿하게 일렁이자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입술을 조그맣게 움직여 말을 할 듯 말듯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술 한 번 꽉

깨물고는 이 사이로 겨우 말했다.

“월이옵니다. 상감마마께오서 이름하신 월이옵니다.”

월의 목소리였다. 그때 들었던, 잊어지지 않았던 월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더 이상 힘껏 껴안을

수 없을 것 같았던 팔에 또 다시 힘이 들어갔다.

“그래, 네가 맞구나. 내가 지금 다른 사람을 착각하는 것이 아니구나.”

훤은 자신의 가슴에 와 닿은 월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표정은 더 없이 평온해 보이는

월이었건만 가슴은 더할 나위 없이 바삐 뛰고 있었다.

“놀랐느냐? 내가 널 놀라게 했느냐?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자는 척하지 않았다면 또

나를 속였을 것이니, 내가 널 속여야 했다. 너도 날 속이지 않았느냐. 그곳에 정박령으로 있을

것이라 하여 놓고는 나를 따돌리지 않았느냐.”

월은 손을 움직여 훤의 어깨를 잡았다. 밀어 내기 위해 잡았는데 힘이 들어가 지지가 않았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비단의 부드러움이 마음속에선 까칠 거렸다. 훤은 월을 조금 떼어내어 눈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품속의 여인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월아. 월아.”

“······네.”

“월아, 혹여 나를 생각한 적이 있었느냐? 나를 그리워 한 적은 있었느냐?”

월의 두 눈에 슬픔이 차올랐다. 단지 두 달에 불과한 세월만을 묻는 훤에게 아무 답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두 달에 불과한 세월에 대한 답조차 할 수 없는 처지에 마음으로만 답했다.

‘매일을 울었다 말하리까. 소녀의 눈물로 내를 만들고, 강을 만들고, 바다를 만들었다 말하리까.’

“산 그림자는 밀어도 나가지 않고 달빛은 쓸어도 다시 생긴다 하더니, 너도 그랬다. 네 달빛은

아무리 내 마음, 내 머리에서 쓸어내려 하여도 쓸어 지지가 않았다. 넌 아니었느냐?”

그랬다며 고개조차 끄덕일 수 없었다. 혹여 눈동자에 그렇다란 답이 담겨질까 두려워 훤의 눈에서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또 다시 마음으로만 답했다.

‘세 치에 불과한 짧은 혀로 끝없이 기나긴 그리움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리까. 얼마나 긴지

재어보지 못한 황하강보다 길다 어찌 말하리까. 얼마나 깊은지 재어보지 못한 바다보다 깊다

어찌 말하리까. 소녀가 무엇을 말할 수 있으리까.’

“요망한 무녀 같으니. 아주 잠시 널 보았다. 그런데 어찌 눈을 뜨고, 눈을 감아도 너만이 보이게

되었느냐. 어찌 날 힘들게 하였느냐. 이는 필시 네가 주술을 걸었음이야. 왕인 이 몸에 주술을

걸었다면 넌 능지처참을 당할 것이다. 말해보아라. 주술을 건 것이냐?”

월이 놀란 눈으로 다시 훤을 돌아보았다. 훤의 눈빛이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아니면 내 마음이 왜 이런 것이냐? 설명해다오.”

훤은 또다시 월을 가슴에 꽉 품고 그녀의 귓속에 속살거렸다.

“네 향기 때문인가. 내가 예전부터 가슴 설레 하는 난향 때문인가. 아니면 네게서 받아온

저 달이 널 잊지 못하게 언제나 비추었기 때문인가.”

“달빛이 요망하여 그런 것이옵니다. 상감마마의 어환이 깊었기에 그런 것이옵니다.”

“나의 착각이라는 것인가? 그리 말하지 마라. 네가 야속타.”

갑자기 훤이 월을 품에서 놓아 일으켜 앉혔다. 눈앞에 보인 월이 반가워 생각지 못했던

의문들이 급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네가 여기 왜 있는 것이냐? 여긴 구중궁궐이다. 그런데 어떻게 온 것이냐?”

월은 대답 없이 고개만 숙였다. 이때 관상감의 세 교수가 헐레벌떡 달려와 방문이 열린 너머에

앉아 엎드렸다.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촛불들을 넘어 갈 수가 없었기에 내관들이 있는

자리에 앉아야만했다. 훤은 놀란 눈으로 월과 교수들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게 어찌 된 것인가? 설명해보아라!”

명과학교수가 엎드려 답했다.

“그 여인은 무녀이옵니다.”

“나도 알고 있다! 나는 왜 여기 있는가 하는 걸 물었다.”

“무녀이온데······, 상감마마의 액받이무녀이옵니다. 하여 한달 간 어침 곁을 지켰사옵니다.

하지만 이제 오늘밤이 마지막이니 진첩(震疊, 왕의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

“무슨 말이냐?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 액받이라니?”

훤은 명과학교수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차차 그 의미를 파악해 들어갔다. 그 뜻을 알면 알수록 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숨 쉬기 조차 힘들어졌다. 훤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심장을 꾹 눌렀다. 심장이 옥죄어오는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 통증은 살을 받아 고통스러웠던 것보다 훨씬 더 참기 힘든 것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훤이 힘들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 여인이 나 대신, 나 대신······.”

훤은 차마 뒷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심장에서 슬픔과 분노가 끓어 넘쳐 올라왔다.

상선내관은 왕이 또 다시 쓰러지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가까이 가고 싶었지만, 촛불이 방패가

되어 있어 다가갈 수 없었기에 마음만 동동 굴렸다. 운은 여전히 구석에서 눈길을 거둬오지

않고 있었고, 월은 훤에게서 등을 돌려 앉아 바닥만 보고 있었다.

“관상감은 뭐하는 곳인가! 나에게 오는 살 하나 막지 못하면서 이 여인을 내 방패막이로

두었더란 말이냐! 감히 나를 속이고, 나에겐 아무 보고도 없이······. 감히! 감히!”

훤의 분노는 관상감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관상감을 핑계로 둔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던 자신과, 몸이 좋아졌다 기뻐했던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몰랐던 것 또한 자신의 탓임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교수들은 훤의 분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잠든 옆에 보고 없이 둔 것만을 질책하는 것이리라 여겼다.

“어쩔 수가 없었사옵니다. 어환의 원인을 몰랐기에 최선의 방법이었사옵니다. 날이 밝으면

궐 밖으로 내칠 것이옵니다. 하오니.”

“내치다니? 어디로!”

“풍수에 따라 휴 지역이라 하여 마마의 살과 액을 대신 받아 누르는 곳이 있사옵니다.

이제 새 지역을 구했사오니 그곳으로 보내 더 이상 마마의 눈에 띄지 않게 할 것이오니.”

“닥쳐라!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훤은 분노로 머리까지 아파왔다. 날이 밝으면 다시 월이 사라질 것이란 말과, 자신을 대신해

액을 받는 것이란 말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어지럽혔다. 뒤돌아 앉아있는 여린 어깨가

보였다. 사라지지 않았음 하는 마음에 급히 월의 뒷모습을 안았다. 교수들은 영문도 모르고

의아해 하기만 했다. 훤이 이를 갈듯 힘겹게 말했다.

“난 아직 아프다. 조금도 건강해지지 않았다. 그러니 궐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 계속 나의 곁에

있게 하라.”

“휴 지역에 두면 곁에 있는 것보다는 덜하지만 충분히 옥체를 지킬 수 있사옵니다. 염려놓으소서.”

“곁에 두라 하였다! 내 말이 말 같잖은가!”

“네? 하, 하오나 무녀를 곁에 계속 두시면 아니 되온데······.”

“이제껏 내 옆에 있었던 것은 그럼 무엇이냐? 내가 모르게는 되고 알게는 아니 된다 하는 말이냐!”

이제껏 엎드려 가만히 있기만 하던 천문학교수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상감마마!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마마께오서 계속 두라 명하시오면 천신들은 그 어명을 받잡을

수밖에 없사옵니다. 하오나 이 말씀은 올리겠사옵니다. 그 여인은 무녀이옵니다.”

“어느 무적에 이름이 올라 있느냐? 내가 그 무적에서 이름을 빼버리겠노라!”

“상감마마께옵서 노비를 양인으로 올리시고, 양인을 중인으로 올리시는 것은 그 또한 마마의

성택일 것이옵니다. 하오나 무녀만큼은 아니 되옵니다. 무적에서 뺀다 하여 무녀가 무녀가 아닐

수 없사옵니다. 무녀는 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옵기에 어명으로 거둬질 수 없사옵니다. 그리고

그 무녀를 곁에 두시는 것도 성택일 것이니 천신들은 받잡을 수밖에 없사옵니다. 하오나

안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무녀는 절대 마마의 승은을 입어선 안 되는 것이옵니다. 신기라는

것은 아래로 되 물림되기도 하는 것이오니, 혹여 앞으로 있을 왕손께 더 없이 큰 문제가 될

것이옵니다. 안지 않으시겠다 천신들 앞에 윤언을 내려 주시오소서. 그러 하오시면 궐 밖으로

내치지는 않겠사옵니다.”

훤은 교수들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월을 안지 말라니, 그리고 무적에서 뺄 수도 없다니

이 말들이 훤의 심장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시하고 이 자리에서 월을 안아버리기로 했다.

“다들 문 닫고 물러나거라. 지금 당장!”

훤의 어명에도 어느 누구도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상선내관까지도 훤의 말에 복종하지 않았다.

“물러가라 하였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명과학교수가 힘주어 말했다.

“오늘 밤은 원자를 보기 위한 밤이옵니다. 그 입태시가 아직 지나지 않았사옵니다.

절대 물러날 수 없사옵니다!”

“물러나라! 상선, 뭘 하는가! 어서 문 닫고 물러가라 하였다!”

“상감마마, 송구하옵니다. 이 천신도 물러날 수 없사옵니다.”

상선내관이 몸을 엎드려 훤에게 아뢴 뒤 주위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다들 문을 열어라!”

상선내관의 호령에 훤의 침소를 빙 둘러있던 문들이 스륵스륵 열리기 시작했다. 각 방과 복도에

삼삼오오 대기하고 있던 내관과 궁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따라 평소보다 많은 인원이었다.

수십 명의 눈들이 왕이 무녀를 안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훤의 분노가 폭발했다.

“상선, 정녕 목숨이 아깝지 아니 한 겐가! 여기 있는 너희의 목을 내가 못 밸성 싶으냐!

모조리 다 벨 것이다!”

훤의 외침에도 어느 누구하나 물러나는 이 없었다. 빙 둘러 주위를 보았다. 오직 달 만이 창문을

열어 안을 보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자신의 욕심만 앞세워 월을 안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눈앞에서 월을 안는다는 것은 곧 월을 욕보이는 것이었다. 훤은 망연자실하여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다. 월의 작은 어깨가 가엾어 차마 쓰다듬어 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못난

얼굴을 월이 돌아볼까도 겁났다.

“여봐라. 촛불을 치워라. 눈부시다.”

궁녀와 내관이 촛불을 하나씩 꺼서 가져나가기 시작했다. 다 가져가고 남은 자리엔 달빛만이

남았다. 그 어두움 속에서도 사람들은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어찌 할꼬, 내가 널 어찌 할꼬. 월아, 혹여 날 못난 사내라 여기진 않느냐? 얼마나 못났으면

가녀린 널 방파삼아야 한단 말이냐. 날 원망하느냐?”

“아니 옵니다. 소녀, 그런 마음 전혀 없사옵니다. 오직 송구하여······.”

“나 대신 아픈 것이냐?”

“아니옵니다. 소녀 건강하여 전혀 아프지 않사옵니다.”

“······고맙구나. 건강하여서 고맙구나.”

훤의 가슴엔 월과 재회하여 기쁜 것 보다는 참담한 마음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기대 듯 월의 목덜미에 이마를 기대고 있었다. 그렇지만 미안해서 안지는 못했다.

운은 어두움에 힘을 빌려 그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가슴이 아파 그저 두 사람을 안타까워 한

것이라고만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의 마음이 아픈 것은 서로를 못 보는 둘을 동정한 마음일

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이 달을 향해 욕심을 가진 것은 한 톨도 없었다라고 머릿속에

각인시키기로 했다. 심장까진 설득시킬 수 없어도 뇌에게만은 설득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그 마음을 다지듯 무릎 위에 가로놓인 별운검을 보았다. 왕을 지키는 호위무사의 검. 검은색

칼집에 촘촘히 새겨진 구름문양을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언제나 등에 짊어진 운검의 무게가

오늘따라 무거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음을 느꼈다.

사발에 가득 술을 붓는 장씨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사발 째 입속으로

들이켰다. 좁은 대청에 앉아 술만 들이키던 장씨는 고개를 들어 환한 달빛을 보았다.

“그 혜각도사 늙은이가 기어이 내 목을 따고야 말리라 작정을 한 게군.”

갑자기 방 안에서 자지러지는 잔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장씨는 그 비명소리에도 놀라지 않고

한쪽 입술을 찌그러뜨리며 코웃음을 쳤다.

“지랄하기는. 저 년도 주제에 무녀랍시고, 쯧쯧. 몇 푼 되지도 않는 신력으로 선몽이라고 꾼 게군.”

잔실의 비명소리에 잠귀 밝은 설이 자다 말고 깨어나 목을 벅벅 긁으며 대청으로 나왔다. 술을

마시고 있는 장씨를 발견하자 상 앞에 앉았다.

“무녀님! 쪼잔하게 사발에 퍼 마십니까? 이리 줘보십시오.”

장씨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들고 흔들어보니 안엔 조금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술병을

상 위에 두고 부엌으로 가 술독 째 가져왔다. 설이 바가지로 퍼서 들이켰다.

“으, 시원하다. 안 그래도 목이 말랐는데.”

“목이 마르면 물을 찾지 왜 술을 축내고 지랄이야? 네 년도 술은 좀 작작 마셔라. 나랑 술 마시기

내기를 하면 유일하게 네년만이 이길 수 있을 것이야.”

“내겐 물이나 술이나 매한가지 아닙니까?”

장씨는 설을 보며 힘겹게 웃었다.

“왜 그렇게 웃습니까? 징그럽게.”

“아가씨 궁궐로 보냈다고 칼 들고 내 목을 벨거라 지랄하던 네년 생각하니 기가 막혀서 그런다.

옆을 비우고 떠돌다 온 주제에.”

“에이 씨! 또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군!”

설이 술독에서 한 바가지를 더 들이키고는 팔뚝으로 입술을 쓱 닦았다. 그리고 장씨를 노려보며 말했다.

“오늘밤이 마지막이죠? 분명 관상감에서 호위하여 여기까지 모시고 온다고 한 것, 거짓 아니죠?”

설의 시퍼런 눈빛을 받으며 장씨는 술을 마셨다. 잔실이 바들바들 떨며 방에서 나와 장씨 팔을

꼭 끌어안고 붙었다.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설이 어리둥절해 하며 말했다.

“너 왜 그러냐? 소름 돋게 비명을 지르질 않나.”

잔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넋 나간 상태였다. 대신 장씨가 말했다.

“그 술독에 있는 술 지금 다 마시자. 내일부터 이 집에 남아있는 술을 마실 사람은 없을 터이니.”

“뭔 소립니까?”

“성숙청으로 복귀한다!”

설이 무슨 영문인지 묻기도 전에 잔실이 비명을 질렀다.

“악! 안 되어유. 지는 못 가유, 검은 기운이 한가득 우릴 잡아먹으러 덤벼드는데, 전 못 가유!

너무 두려워······.”

“잔실이, 이년아. 꼴깝 떨지 마라. 네년 신력으로 날 선몽했으니 그리 검은 기운만 느낀 게다.

네년의 한 사발 신력으로 한 독이나 되는 내 신력의 선몽을 보았기에 그 선몽이 부서진 게야.

아마도 그럴 게야.”

두 사람의 알 수 없는 말에 설이 술 바가지를 집어던지며 화가 나서 소리쳤다.

“대체 알아듣게 말 좀 하세요! 도대체가 무당이란 것들은 왜 뭐든지 알쏭달쏭한 말만 주고받는

답니까? 그러면 뭣 좀 있어 뵌 답니까?”

장씨가 다 마신 사발을 들고 설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누구 때문에 일이 이 지경까지 됐는데? 네 년이 관령 근처에서 임금님이 행궁에 오신단 말을

듣고, 그 말을 아가씨께 쪼르르 일러바치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다, 이년아!”

설은 쥐어 박힌 머리를 손바닥으로 쓱쓱 문지르면서 콧등을 쨍긋했다. 분명 자기 입이 방정

맞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 결계를 부서뜨린 건 무녀님이면서 왜 그럽니까? 거기다 발길 불러들이는 주술까지 행해 놓고선!”

“네년 말 듣고 그리 구슬프게 계신데, 내 심장이 무슨 무쇠를 녹여 만들었는지 알아?

단 한번으로 끝날 거라 생각했지. 따뜻한 술 한 잔을 건네어 드리는 것으로 설움이 다 할 것이라

생각했더니, 염병할. 그 임금이 궐로 돌아가 그리 어환을 앓아댈지 몰랐지.”

“무녀님이 그걸 미리 모르면 어떻게 합니까?”

“낸들 아나. 숨어 부리는 주술은 나도 미리 가늠 못하는 것을. 재수 없게 언 놈이 부린 주술인지

모르지만, 그것과 내가 결계를 깬 시기가 우연히 맞아 떨어진 것이야.”

“책임 없는 말 하지 마십시오! 두 분이 만나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으면서 대체 무슨

심보로 그런 주술을 행했는지 내 그러잖아도 따져 물으려고 했습니다.”

장씨는 얼마 남지 않은 술병의 술을 사발에 탈탈 털어 마저 붓고 벌컥벌컥 마셨다. 다 마신

사발을 멀리 마당을 향해 털고는 한숨과 더불어 말했다.

“내가 망령이 난 게지. 그때 내 잠시 취기로 사리분별을 못했어. 그 인연이 어떤 인연인데,

그리 잠시 만나는 것조차 위험했는데······. 이제 달이 구중궁궐 속에 잠겨버렸어. 꼼짝 없이······.”

설이 놀란 눈으로 장씨를 보았다. 장씨 팔에는 잔실이 여전히 매달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방금 무슨 말씀입니까?”

“사발에 술이나 더 떠다오.”

설은 대답하지 않고 팔만 내밀어 건네는 장씨의 사발을 사정도 없이 내팽개쳤다. 그리고 앞에

있던 상도 마당으로 집어던졌다. 설이 난리 부리는 통에 설의 앞에 있던 술독도 섬돌 아래도

떨어져 박살이 났다. 장씨는 흘러 떨어지는 술만 덧없이 바라보았다. 그런 장씨를 설이 멱살을 잡았다.

“궁궐 속에 잠겼다니? 그게 뭔 말입니까? 우리 아가씨께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무사히 올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어이구, 그놈의 땅바닥이 넙죽넙죽 잘도 술을 빨아먹네.”

“잡소리 치우고 어서 대답하십시오!”

멱살을 잡고 흔들어도 장씨는 덧없는 미소만 띠우며 술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상감마마의 옥체에 살이 날아갔다. 그것으로 인해 다시 운명이 꼬여버렸어. 아무래도

상감마마와 아가씨의 인연이 이어져버린 것 같어. 이제 아가씨가 궐 밖을 못 나올 터이니

우리가 들어가야지. 어쩌누. 그 늙은이가 살을 날렸어. 내 목을 따려고 살을 날렸어.”

설이 멱살을 놓았다. 눈이 풀려 헛소리를 하는 것 같은 장씨가 무서웠다. 그리고 잔실의 태도도

무서웠다. 왕의 옥체에 살을 날렸다고 해 놓고 또 자신의 목을 따려고 살을 날렸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언제나 장씨가 중얼거리는 말들 중, 열 마디 중 한마디만 건져도 많이

건지는 축에 들었다. 그런데 요즘 장씨의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거의 혼자 중얼중얼 거리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떨 땐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다가 유심히

들으면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귀를 기울이면 기어이 중간에 화가나

소리치게 되기 일쑤였다. 월이 있던 휴 지역에 결계를 깰 때도 장씨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평소 아가씨와 왕이 만나면 세상 뒤집힐 것처럼 부산떨던 사람이, 그날은 거의 눈이

뒤집어져 집 사방에 결계를 깨는 주문을 외우고 다녔다. 그리고 왕의 발길을 오게 만드는

주술을 했다며 술에 취해 중얼거렸다. 그래서 처음엔 농담하는 것이거나 술주정인 줄로만

여겼다. 그런데 그 주술을 행하고 난 다음날 장씨가 예언한대로 왕이 왔었다. 장씨의 말을 믿고

왕을 맞을 준비를 한 것은 월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일을 벌여놓고는 그 이후 장씨는 더욱더

이상해져갔다. 설은 그래서 장씨가 무서웠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만큼

무서운 것은 없었다. 아무튼 현재 설은 조금 안심하기로 했다. 아가씨가 무사하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슴을 쓸어내릴 일이었다. 그리고 한양으로 간다는 건 또 다른 기쁨일 수

있었다. 설의 마음을 읽었는지 장씨가 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년아. 예끼, 이년아. 주제를 알아라. 꼴같잖게 생긴 선머슴 주제에. 내 그리 의빈자가 댁에

가지 말라 일렀는데. 이번에 한양에 가거든 이젠 절대 가지마라. 금기를 어기면 꼭 그 대가가

있는 법이다.”

설은 입을 샐쭉거린 뒤 자신의 용무만 물었다.

“한양에는 언제 갈 겁니까?”

“지금 저 달이 다 지기 전에 여기서 출발하자. 설이 네년의 환도가 있는데 길 걱정은 점쳐보지

않아도 되겠지.”

장씨는 옆에서 여전히 떨고 있는 잔실의 등을 툭툭 때렸다.

“괜찮을 거다. 잔실이 너까지 이러면 어쩌누. 그래도 네년이 내 진짜 신딸인데. 내 너무 오래

성숙청을 비워두었다. 도무녀! 그 한스런 자리로 돌아가야지.”

#12

민화는 오늘도 어김없이 해가 떨어지자 향목욕을 하고 내당에 곱게 앉았다. 염이 여행에서

돌아온 지 한 달이 더 지났건만 아직 내당에 발걸음을 하지 않고 있었다. 원래 먼 여행을

다녀와서 한동안은 합방을 하면 안 된다는 상식쯤은 알고 있긴 했지만, 한 달이 넘기까지

내당으로 오지 않는 건 서운한 일이었다. 염이 보고 싶어서 사랑채 근처를 숨어 서성거리다

우연히 마주친 척하며 얼굴을 보긴 했다. 하지만 잠시 서서 한두 마디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오늘 낮에 만났을 때 혹시 밤에 내당에 올수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옆에서

도끼눈을 하고 있는 민상궁 때문이 입도 벙긋 못해보고 말았다. 매일을 기대감만으로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몇 번이나 거울을 보며 외양을 단장한 민화는 수틀을 꺼내 놓고 열심히 수를

놓는 시늉을 했다. 수 자체에는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단지 염이 와서 봤을 때 얼마나 우아해

보이는가 하는 것만이 중요했다. 수 한 땀 놓고 거울 한번 들여다보기를 연거푸 하다가 한번 씩

방문 쪽을 보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오늘도 이렇게 끝나고 마는가 싶어

초조해졌다. 그래도 한편으론 아직 포기하기엔 밤이 깊어지지 않았다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수가 슬슬 지겨워졌는지 하품이 자꾸만 나왔다. 그래서 수틀을 밀치고 서안에 앉아 책을

읽는 시늉을 하기로 했다. 어쩌면 수놓은 모습보다 책 읽는 모습이 염의 눈에는 더 우아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민상궁, 내 모습이 어떻느냐? 수놓는 모습이 나으냐, 아니면 이 모습이 나으냐?”

민상궁도 지겨운지 하품을 참으며 말했다.

“어느 거나 다 어여쁘시옵니다.”

“그래도 우리 서방님 눈에는 어떤 것이 더 나아 보이겠느냐?”

“그건 저도 모르지요. 의빈자가시라면 아마도 책만 눈여겨보실 것 같은데······.”

민화는 어쩐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서 깊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휴. 내 몸에 붓으로 글을 새겨 넣으면 서방님께서 날 찾아주실까? 그 글들이 보고 싶어

옷고름을 풀어주지 않으실까?”

“먹물 지우려면 고생하실 것이옵니다.”

민화는 민상궁을 쌜쭉하니 쳐다보았다. 입을 삐죽하는데 그만 눈물도 삐죽거리며 나올 것

같았다. 염이 너무도 보고 싶었다. 매일매일 아무것도 안하고 둘이만 꼭 붙어있으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을 것 같은데, 염은 책과 더불어 있는 것이 곧 무릉도원이라 여길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민화는 서안 서랍에서 붉은색의 화려한 궁낭(宮囊, 향낭, 주머니,

노리개 등의 기능을 한꺼번에 한 복주머니의 일종)을 꺼냈다. 이때까지 지겨워 하품을 참던

민상궁의 눈이 번쩍 뜨였다.

“공주자가, 뭐, 뭐하시려는?”

“서방님이 독서삼매경에 빠져 아무래도 아내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만 모양이시다.

내 지금 당장 가서.”

“아니 되옵니다!”

민상궁은 당황하여 팔을 펼치고 급히 방문을 막아섰다. 그리고 옆에서 같이 지겨워하고 있던

여종에게 말했다.

“넌 어서 저쪽 문을 막아라. 절대 비켜드리면 안 된다. 공주자가! 체통을 지키시옵소서.

이 시간에 안채 여인이 사랑채에 드는 것은 절대 아니 되.”

“그놈의 체통! 체통! 민상궁이 눈 떠서 지금까지 체통이란 말을 몇 번 했는지 아느냐? 비켜라!”

“공주자가, 제발.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오소서.”

“안 비키면 소리칠 테다! 어머님 귀에 다 들리도록 사랑채 가고 싶다고 크게크게 소리쳐 버릴 테다!”

이 막무가내의 공주에 놀라 민상궁은 옆으로 비키며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 그럼 아랫것들한테 들키지 않게 조심, 또 조심하시어······.”

“넌 여기 있거라.”

민화가 궁낭을 소중히 끌어안고 냉큼 밖으로 나가자 민상궁은 이마를 짚었다.

“이 일을 대비마마께옵서 아시게 되면 난 또 회초리감이야. 에구, 내 팔자야.”

민화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까치발로

뛰어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난 쪽문으로 갔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정문은 이미 잠겨 있을

것이기에 오직 뒤로 난 쪽문 길 밖에 없었는데, 쪽문은 어느 사대부 집이든 젊은 부부만이

드나들 수 있게 고안한 비밀 문으로 대체로 잠그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민화는 이 쪽문만큼

사랑스러운 것도 없었다. 이쪽 길로는 하인들도 얼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남편이

주로 사용해야 할 문이지만, 이 집 쪽문을 이용하는 사람은 주로 민화였다. 목을 쭉 빼서

사랑채를 보니 불이 켜져 있었다. 민화는 재빨리 뛰어 사랑채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방안으로 뛰어든 민화 때문에 염이 책 읽다 말고 자칫 비명을 지를 뻔했다.

“고, 공주. 무슨 일입니까?”

민화는 쭈삣거리며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염은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뒤늦게 미소를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 굽혀 정중히 인사했다. 얼떨결에 민화도 따라 인사했다. 염이 다시

자리에 앉아 미소를 보였다. 민화는 그 미소에 안심이 되자 신발을 신은 채로 방안에 들어온

것을 깨달았다. 얼른 신발을 벗어 방문 앞에 놓고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혹시 누가 볼까

걱정되어 방문 밖으로 내 놓지는 못했다. 민화는 그렇게 멀찌감치 앉아 염의 눈치만 살피며

궁낭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염이 입을 열기 전에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먼저 말했다.

“저기······, 저 때문에 놀라시었죠?”

“갑자기여서······. 무슨 용무이십니까?”

무슨 용무냐는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고개 숙인 채 애꿎은

궁낭만 열심히 매만졌다. 용기 내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 했다.

“가까이 오라 아니 하시어요?”

“아! 제가 잠시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리 오십시오.”

염은 미안해하며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조금 비켜 앉아 옆으로 오게 했다. 민화는 냉큼

다가가 염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마음이 앞서 너무 바짝 다가가 앉았기에 염이 오른쪽 팔을

움직이기가 불편해졌을 정도였다. 민화는 염에게서 나는 난향이 좋아 힘껏 숨을 들이켰다.

“서방님을 방해하러 온 것이 아니어요. 저 여기 얌전히 있을 것이니 읽던 책 마저 읽으시어요.

책 다 읽으시면 말씀드리겠사와요.”

눈을 똘망똘망 뜨고 말하면서도 부끄러워 몸을 비비 꼬는 모습에 염은 조용히 미소만 보낸 뒤

책을 들여다보았다. 책 읽으랬다고 진짜 책을 읽는 염이 원망스러웠지만, 옆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서 조용히 있었다. 염의 옆얼굴에 구멍이 뚫릴 정도로 쳐다봐도 책에

집중하고 있는 염은 의식하지 못했다. 민화 또한 염에게 정신이 집중되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책장을 넘기는 염의 하얀 손이 너무도 우아하고 아름다워 어느새 손을 뻗어 슬금슬금 만지고

있었던 것이다. 기분이 좋아 자기도 모르게 입에 헤 벌어졌다. 손으로 슬금거리는 것도 부족해

이번에는 볼을 가져다 대어보았다. 염의 따뜻한 손에 행복해져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민화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눈을 슬쩍

떠보니 물끄러미 자신을 보고 있는 염의 눈과 바로 마주쳤다. 얼굴이 붉은 꽃보다 더 붉어졌다.

민망함을 감출 수 없어 천천히 볼을 떼어내어 상체를 꼿꼿하게 했다. 그리고 또 다시 궁낭이

희생양이 되었다. 염이 빙그레 웃으며 책갈피를 끼운 뒤 책을 덮었다. 그리고 민화를 향해 앉았다.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듣겠습니다.”

“저기, 방해를 하였어요? 이제 방해 안할 터이니 계속 책 읽으시어요.”

“아닙니다. 저도 막 책을 덮으려 하였습니다.”

민화는 부끄러워 몸을 비비 꼬면서 궁낭 입구를 열었다 닫았다 한참을 망설였다. 궁낭으로 입을

가리며 염의 눈치를 보니 염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궁낭 안에

들어 있던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꺼냈다.

“이, 이거······.”

염은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펼쳤다. 민화는 여전히 염의 눈치만 보며 계속 궁낭만 만지작거렸다.

펼친 종이에는 날짜들이 적혀있었다. 염은 멋쩍은 미소를 보이며 서안 위에 그 종이를 올렸다.

민화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민상궁이······. 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민상궁이 꼭 귀한 아들을 봐야 한다며 관상감에 가서

날짜를 택일 받아 온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 날짜에······. 그러니까······.”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종이에 적힌 날짜는 염과 민화의 사주로 뽑은 합방일 날짜였다. 그 날짜에 합방하면 귀한

아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민상궁이 스스로 이 날짜를 받아 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민화가 민상궁을 숨 막힐 정도로 졸라서 관상감에 날짜를 받아오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받아온

날짜가 눈물이 날 정도로 횟수가 적었다. 받아온 두 달 치에서 날짜는 고작 여섯 개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민화는 실상 귀한 아들 따위에는 그리 큰 욕심은 없었다. 그러잖아도 내당으로

걸음을 잘 하지 않는 염이었기에 아들 본다는 족쇄라도 채워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전부였다.

그래서 날짜 사이사이에 민화가 손수 괴발개발 날짜를 더 끼워 넣었다. 누가 봐도 민화가

써 넣은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것 같은데, 민화는 혼자만은 들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염이라고 표가 확 나는데 중간에 민화가 날짜를 더 써 넣은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 날짜들은 무엇입니까?”

민화는 염이 민화의 글자들을 가리키자 화들짝 놀랐다. 얼굴을 새빨갛게 하여 한참을 방바닥만

긁다가 모기만한 소리로 겨우 핑계를 대었다.

“귀숙일자(씨내리는 날이라 하여 여염집 부녀자들이 외우고 있던 것) 중에 빠진 것이 있어서

어쩔 수없이······. 민상궁이 꼭 넣어야 한 대서······. 춘 갑인 춘 을묘 하 병오 하 정사 추 경신

추 신유 동 임자 동 계축. 소첩도 이렇게 외우고 있사와요. 그리고 어떻게 좋은지 모르겠지만

민상궁이 좋다는 날도 넣었는데······.”

“알겠습니다.”

염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다른 종이에 옮겨 적었다. 염이 순순히 받아들이자 민화는 속으로

날짜를 몇 개 더 넣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저기, 소첩은 잘 모르지만, 진짜 잘 모르지만 <포박자>에는 20대 남자는 방중절도일이 3일에서

4일에 한 번 씩이 좋다고 하였사와요. 소첩은 오직 서방님 건강이 걱정되와······.”

부끄러워하면서도 민망한 말을 꼬박꼬박 잘도 하는 민화였다. 오히려 부끄러워 아무 말 못하는

쪽은 염이었다. 염이 붉히는 볼에 민화는 붉은 색을 더 보탰다.

“거기다가 <옥방비결>(중국의 유명한 성 의학서)에 따르면 건강한 20대 남자는 하루에 2회 하는

것이 좋다고 민상궁이······. 서방님도 건강하시니······. 매일매일······.”

“매, 매일? 허허. 공주께서 저를 놀리시려는 겁니까?”

“아니어요! 분명 그렇게 되어 있사와요. 제가 똑똑히 확인. 아, 아니 민상궁이 똑똑히 말해주었는데······.”

염은 곰곰이 계산해보았다. 염이란 인간이 따르는 예를 갖춰 한 번의 합방을 하는 순서를

따져본다면 하루에 두 번이란 횟수는 하루 종일 다른 일은 아무 것도 못한다는 뜻이었다.

실제 <옥방비결>에 그렇게 명시가 되어있다는 민화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지만, 염도 이 책의

아성은 들은 적이 있기에 믿어지지 않았다. 민화와 책이 말하는 한 번의 횟수와, 염이 생각하는

한 번의 횟수는 굉장한 괴리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민화가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여겼다.

“공주, 저 이래뵈도 서당에서 <보정>(保精, 생리철학으로 일종의 성교육)을 배운 몸입니다.

그러니 농일랑 마십시오. 그리고 관례를 치르면서 <상투탈막이>도 외웠고, 혼례 전에 사랑들이

(혼례를 치르기 전 가까운 친척집-주로 삼촌-에 가서 받던 성교육)도 하였습니다. 이 모든

배움 속에 하루에 두 번이란 횟수는 없었습니다.”

“아니어요! 정말 이어요!”

민화는 책을 당장 가져다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그 책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들킬

것이기에 입을 다물었다. 염은 종이를 접어 궁낭에 다시 넣어 주었다. 민화는 합방일 날짜를

서로 약속한 종이를 나눠가진 것이 기뻐 궁낭을 꼭 감싸 쥐었다. 그리고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리고 중얼거렸다.

“진짠데······, 하루 2회······.”

“밤이 깊었습니다. 그만 내당으로 가보셔야지요.”

민화는 화들짝 놀랐다. 또 다시 부끄러워 몸을 비비꼬면서 손가락으로 아직 먹물이 덜 마른

염의 종이를 가리켰다.

“여기······.”

민화가 가리킨 곳은 오늘 밤의 날짜를 적은 곳이었다. 염은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속삭였다.

“미리 기별을 주시지 않고요. 오늘이란 것을 알았더라면 몸과 마음을 미리 준비해두었을 것입니다.”

“아니 오시었잖아요. 아무리 기다려도 내당에 걸음 한번 하지 않으시었잖아요.”

민화는 목소리에 그만 원망을 가득 담아 울먹거리고 말았다. 보고 싶어 서성거리는 것도

민화였고, 밤마다 목을 빼고 기다린 것도 민화였다. 그래도 너무 사랑해서 원망하는 마음보다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 자신과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살아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서,

이 남자를 탐내며 울었던 그 시간들도 있었기에 내당에 찾아주지 않는 서운함 쯤은 웃고

털어버릴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만 꼭꼭 숨겨왔던 원망스런 마음이 목소리로 흘러나오고

만 것이었다. 염은 민화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기다리시었습니까?”

“네, 언제나. 매일을 기다리어요. 서방님은 소첩을 부덕한 아내로 만들어 버렸사와요. 점잖지

못하게 사랑채나 넘나드는······.”

“가야지, 가야지 하였는데 책 읽다 정신을 차리면 너무나 밤 깊은 시간이라 감히 내당에

걸음하지 못하였습니다.”

“소첩을 점잖지 못하다, 음탕하다 꾸짖지 마시어요. 이 또한 서방님이 이리 만드신 것이어요.

서방님께서 보고 싶어 하는 책을 못 구해 속상한 것도, 제가 서방님을 못 뵈어 속상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어요.”

염은 책을 비유해서 말한 민화의 말이 어느 비유보다 가슴에 와 닿았다. 염이라고 민화의

지극한 사랑을 모를 리가 없었다. 과분하리 만큼 벅차서 오히려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7년 전, 유배를 당할 처지에 놓인 염과 홍문관대제학을 이 여인이 지켜준 거나 진배

없었다. 공주는 이 집안의 은인이었다.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비록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의빈의 처지가 되긴 했지만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아니어요. 소첩의 인내가 부족한 탓이어요. 그래도 서방님은 딴 여인에게 한눈을 파는 것이

아니잖아요. 만약에 다른 사내처럼 그러시오면 소첩, 가슴 아파 죽어버릴 지도 몰라요.”

민화의 괜한 엄포였다. 의빈은 첩을 둘 수가 없었다. 만에 하나 다른 여인과 하룻밤을 보낸다면

단지 그것만으로도 그 여인이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첩도 없이 오직 공주만을 처로

삼아야 했다. 그리고 공주가 먼저 죽어버려도 재처를 들일 수가 없었다. 들인다 해도 그 어떤

사대부가의 여인이라도 첩으로 되어버렸다. 이것이 의빈에게 법으로 가해진 또 다른 금고(禁錮)였다.

“서방님을 첨앙(瞻仰, 우러러 사모함)하는 소첩의 마음을 아시어요?”

염은 대답 없이 따뜻하게 민화의 등만 어루만져 줄뿐이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민화의

사랑고백에 대한 답은 들려주지 않았다. ‘나도 공주를 사랑한다.’라는 이 간단한 말은 절대 입에

담지 않았다. 민화는 단지 사랑표현에 인색할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건 일종의

믿음이었다. 결혼하고부터 지금까지 여자문제로 민화를 속상하게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속상하게 하는 상대는 민화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 책이란 것이었다.

민화는 염을 꼭 끌어안았다.

“소첩, 서방님이 눈길 주시는 꽃들에도 시샘할 것이어요. 서방님의 얼굴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바람에도 시샘할 것이어요. 서방님이 디디어신 땅에도 시샘할 것이어요.”

“꽃은 공주가 아니십니까? 하하하.”

“금새 시드는 꽃은 싫어요. 아바마마께 제 이름의 꽃화를 불화로 바꿔 달라 청을 드린 적

있었사온데 안 된다 하시었어요. 칫! 불과 불꽃. 더 없는 궁합인데.”

“불꽃도 꽃입니다. 그러니 저도 공주와 같은 꽃입니다.”

민화는 웃고 있는 염의 입술에 냉큼 입을 가져가 대었다. 염이 피하지 않고 민화의 입술을

받아주는 것에 더욱 용기 내어 염의 입 안으로 겁먹은 혀를 조심스럽게 넣어보았다. 염은 깜짝

놀라 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거절당한 거라 여기고 한가득 겁먹은 민화의 큰 눈과 마주치자

이번에는 염이 먼저 합구(合口, 키스)를 해주었다. 이 또한 어찌나 조심스럽게 움직이는지

민화는 염의 혀의 움직임에 속부터 먼저 타 들어갔다. 또 갑자기 염이 민화를 떼어냈다.

아직 황홀함에 빠져있느라 민화는 눈이 떠지지가 않았다.

“아내를 대하는데 있어 이리 준비 없이는 예가 아닙니다.”

“소첩이 이리 사랑채에 달려온 것도 예는 아니어요, 뭐.”

그놈의 예의 타령에 민화는 삐친 모습을 보였다. 이런 상황이 되면 예의 따위는 벗어던지고

불꽃처럼 타올랐으면 하는데 염이란 사내는 꼭 이불 속에서도 예의란 시덥잖은 옷을 갖추는

것이 문제였다.

“제가 몸을 닦고 내당에 갈 것이니 먼저 가 계십시오.”

민화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몸을 닦고’ 이 의미는 날이 샐 때쯤에나 내당에 나타나겠다는

뜻이었다. 몸을 닦는데 어지간히 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어김없이 염의

옷고름을 먼저 푼 것은 민화였다. 정숙한 척 기다리다간 염의 손길이 민화의 옷고름에 닿을

때는 내일 해가 중천에 떴을 쯤에야 가능할 것이었다. 그러면 그전에 민화의 속이 새까맣게

타서 이 세상을 하직한 뒤일 것이 분명했다. 당황하는 염의 윗옷을 벗겨 뒤로 감췄다.

“그렇게 해서 몸을 닦으러 나가보시어요.”

적삼차림으로 방문 밖을 나가는 것도 염의 상식으론 어림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벗

겨놓고 얼굴 빨개져 부끄러워하는 모습 때문에 염은 민화를 탓하지도 못했다. 민화는 나이가

스물 살, 한 달 뒤면 스물한 살이 되는데도 앳되어 보이는 얼굴 때문에 언뜻 열 예닐곱 살로 밖에

안 보였다. 그래서인지 민화가 하는 짓은 뭐든지 귀여워보였다. 이렇게 민망하게 만드는 것도

귀여웠다.

“그럼 손만이라도 씻고······.”

민화는 재빨리 자신의 치마를 들어 안에 입은 속치마로 염의 손을 쓱쓱 닦아주었다. 염은

합방에 들기 전에 손을 씻을 땐 꼭 벚꽃 말려 갈아둔 것을 비누로 사용했다. 아내의 몸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가르침 때문이었다. 더러운 손으로 여인의 소중한 곳을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는

것은 누구나 가르침을 받지만 거의 지키지 않는 것이었는데, 염은 다른 사내들과는 달리 그대로

실천하는 융통성 없는 사내였다. 그렇기에 마른 속치마로 대충 닦는 것은 절대 염이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염이 옷을 빼앗아 입을 기세였다. 그래서 민화가 먼저 선수 쳤다.

“소첩이 물을 떠 오겠사와요.”

민화는 얼른 일어나 신발을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급히 대야에 따뜻한 물을 떠왔다.

어찌나 조심성 없는지 민화의 옷은 물에 흠뻑 젖어있었다. 염이 물에 손을 넣고 벚꽃가루로

손을 비비니 민화도 그 손을 마주잡고 같이 비볐다. 물과 가루가 손을 간질이자 민화는 까르르

거리며 웃었다. 염의 하얀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마주 끼운 느낌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염은 깨끗한 무명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손을 씻으며 같이 물에 적셔 두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손수건에 벚꽃향이 스며들었다. 요의 가운데에도 수건을 깔았다. 요에 얼룩이

생기면 하인들이 볼 테고 사랑채 요에 생긴 얼룩은 민화의 흉일 될 것이기에 특히 조심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민화는 빨리 자기 옷고름을 풀어주지 않는다며 조급해 하고 있었다.

그래서 염이 수건을 정성스레 깔 동안에 염 몰래 자기 옷고름을 자기 손으로 잡아 당겨

느슨하게 만들었다. 이미 웃통이 벗겨져 적삼차림이 민망하긴 했지만 염은 예의를 갖춰

민화에게 합방을 하겠노라는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드디어 염의 손이 민화의 옷고름에

닿았다. 참으로 굼뜨는 손길이었다. 저고리를 벗겨내는 것도 그렇게 더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벗겨 낸 저고리를 정성껏 접어서 옆에 놔두는 것도 염이 생각하는 예의 있는 합방의 절차였다.

민화는 자기 손으로 확 옷을 벗어던지고 싶었지만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었기에 숨을 들이키며

참기로 했다. 그나마 민화가 굼뜨는 염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쪽진 머리를 푸는 것 하나였다.

치마, 그리고 아래에 첩첩이 입은 속치마를 벗겨내고 적삼 아래의 속곳까지 다 벗겨내

단정하게도 접은 옷이 차곡차곡 옆에 쌓일 때쯤, 민화의 귀에는 어디선가 닭 울음이 들리는 듯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민화의 두통수를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싸며 눕혔다. 그런 뒤 이번에는

자신의 옷을 열심히 벗어 접기 시작했다. 민화의 조급증 같은 건 조금도 헤아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준비를 끝낸 염이 적삼차림으로 이불 속에 들어왔다. 그 어떤 경우라도 절대

급하게 서둘지 않는 염이었다. 민화의 위 적삼의 옷고름을 풀고 치마를 조금 끌어내려 젖가슴을

드러나게 했다. 비록 앳된 얼굴이지만 젖가슴만큼은 제법 풍만한 편이었다. 민화의 몸에 염의

손길이 지나다녔다. 이 순간 민화는 자신이 깨어지기 쉬운 얇은 사기도자기란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염의 손길은 조심스러웠고 격조가 있었다. 염의 손길이 지나간 자신의 몸에선 여기저기

벚꽃이 피어나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그리고 염의 손길아래에 비로소 자신은 완전한 꽃이

되어 만개하는 것 같았다. 염은 기다렸다. 민화의 몸에서 충분한 꽃즙이 흘러내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사내 된 몸의 예의였다. 그리고 그 꽃즙이 흘러내리게 노력하는 것도 사내의

도리였다. 꽃즙이 덜 준비된 여인의 몸에 들어가는 것은 더불어 같이 합방하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민화는 염과는 달리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꽃즙이 흘러내리기도 전에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꽃즙으로 젖어있었다. 염의 점잖은 몸이 민화의 안으로 들어갔다.

민화는 감사한 마음으로 자신의 몸 안에 꼭 힘주어 받았다. 자신의 몸 안이 원하는 부위를

스치면 손으로 염의 어깨를 꽉 잡아 말없이 그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러면 염이 알아서 그

부위에 좀 더 신경 써서 움직여주었다. 민화는 황홀함으로 넘어가는 신음소리를 참아가며 염의

몸이 움직일 때 마다 힘을 주어가며 염에게도 황홀함을 주었다. 그렇게 은밀한 부분에 힘의

강약을 주면 남자들이 더 좋아한다는 것을 책에서 배웠었다. 아녀자라고 남편에게 받기만 해서

안 된다는 배움을 행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 다 만족한 입태를 끝내고 난 뒤 염은 미리 적셔

두었던 손수건으로 민화의 꽃즙을 닦아내주었다. 베개가 일인용이라 민화는 염의 팔을 베고

나란히 누웠다.

“혹여 소첩이 얼마나 행복한지 말씀드린 적 있었사와요?”

“네, 언제나 말씀하시니.”

“서방님이 아시는 것 보다 더 많이 행복할 것이어요.”

‘서방님은요?’라는 이 말은 묻지 못했다. 아마도 그렇다라고 답해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온전히 진심이 아님을 민화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신분 때문에 염이 학문을 떨치지 못하는

것을 민화도 모를 리가 없었다. 아마도 자신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이 남자를 달라고 떼를

부리지 않았다면, 이 남자는 귀양이 끝나고 현재 왕인 훤에게 등용되어 그 뜻을 펼치며 살고

있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렇게 쓸쓸한 사랑채와 동호(서재)에 학자들로

빼곡하게 모여, 서로 간에 상기된 얼굴로 학문토론 하느라 시끄러웠을 것이란 것도 민화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사내의 날개를 자르고 옆에 둔 죄책감은 민화를 언제나 따라다니고 있었다.

#13

석수라를 끝마친 훤은 더 이상 편전에 나가지 않고 침전에서 업무를 보았다. 이전에는 석수라를

들기가 무섭게 간단한 산책을 하고 바로 편전에 나가 나머지 야간업무를 보았지만, 비밀리에

검토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져서 침전에 서안을 가져다 두고 밤늦도록 일을 했다. 침전의 수십

칸이 달하는 방들 중에 어느 곳도 가구를 두지 못했다. 화재를 대비해서 이기도 하지만 자칫

가구는 무기가 되기도 하기에 왕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훤이 침전에서

업무를 보게 되면 간이 서안을 들고 내관들이 움직여야 했기에 상당히 불편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훤은 어쩔 수 없이 이런 번잡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강녕전에 앉아서야

삼일간의 근신을 마친 상선내관과도 비로소 개인적인 인사를 나누었다.

“그래, 내 말을 거역하여 근신을 당한 기분은 어떻더냐?”

“마땅히 받아야 할 근신이었사옵니다. 하오나 앞으로도 천신은 계속 그리할 것이옵니다.

천신은 상감마마를 보필해야 하는 사명과 더불어 종묘사직 또한 보필해야 하오니.”

“됐다! 내 서글퍼지려 하느니.”

훤은 쓸쓸한 표정으로 승정원일기를 펼쳤다. 훤의 옆에는 언제나처럼 운이 앉아있었다.

“운아. 석반은 잘 먹었느냐?”

“네.”

“······건개(반찬)는 뭐로 먹었느냐?”

“무엇을 묻고자 하시옵니까?”

“하하. 네 목소리 들은 지 하도 오래된 듯 하여 듣고자 한 것뿐이다.”

훤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지만 운은 고개만 깊숙하게 한번 숙인 뒤 또 입을 다물었다. 다시 한 번

말을 붙여보려 했으나 바깥에서 관상감의 명과학교수가 왔다는 외침이 들렸다. 그래서 검토하던

승정원일기를 덮고 오늘 미처 결제를 끝내지 못한 문서들을 펼치고 들어오라고 명했다.

명과학교수가 가지고 들어온 것은 훤이 명령한 성숙청무녀의 무적(巫籍)이었다.

상선내관이 무적을 받아 훤에게 건네주었다.

“사이에 갈피를 꽂아둔 곳이옵니다.”

명과학교수 말대로 사이에 꽂아둔 곳을 펼쳤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기록이라고는

6년 전 날짜와 무명자(無名者, 이름이 없는 사람)란 글자가 전부였다. 훤은 운이 그곳을 볼 수

있게끔 틈을 내어 보여주었다. 운은 훤의 뜻을 이해하고 그곳을 유심히 보았다.

“어찌하여 이것뿐인가?”

“성숙청 무적은 도무녀가 관리 하는 것이옵니다. 하여 천신은 거기까지는 잘 모르옵니다.”

“나의 액. 내 곁을 지키는 무녀가 아니냐? 그런데 아는 것이 없다니 이 무슨 어이없는 말인가!”

훤이 차마 자신의 액받이무녀라 입에 담기도 서글퍼 곁을 지키는 무녀라고 말을 돌렸다.

그 어떻게 돌려 말해도 가슴에 촘촘히 박히는 가시들은 따돌리지 못했다.

“성숙청 무녀는 다른 관청에 소속된 무녀들과는 다르옵니다. 동서활인원과 각 고을의 관청에

무적이 올라있는 무녀들은 백성 개인의 기복(祈福)행위와 의원의 힘으로 안 되는 병을 치유하는

일을 하기에 그 해당 관청이 관리를 하지만, 성숙청은 오직 나라를 기복하는 일을 하는 곳이라

철저히 비밀리에 무적을 관리하옵니다. 천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옵니다.”

“그렇다면 내 곁을 지키는 무녀를 선발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성숙청에서 아무렇게나 뽑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성숙청의 도무녀가 추천하는 처녀 무녀 중에 관상감에서 사주를 풀어 상감마마와

합이 맞는지 본 뒤에 결정하는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그 합은 네가 보았겠구나?”

“하, 하오나 합을 본 후에 그 무녀에 관한 것은 즉시 태워서 버렸기에 기억하고 있는 것이 없사옵니다.”

명과학교수는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물론 성숙청에서 건네준 무녀의 생년월일시를 즉시

태워버린 것은 맞지만 이 또한 기억해야 하는 것도 명과학교수의 일이었다. 왕의 생년월일시를

누설하면 안 되는 것처럼 액받이무녀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 아무리 왕이라 해도 말해줄 수 없었다.

“언제 선발하였느냐?”

“상감마마께옵서 즉위하실 때 같이······.”

“4년 전? 그렇다면 나이쯤은 기억나지 않느냐?”

훤의 질문에 명과학교수는 고민에 빠졌다. 나이쯤은 괜찮았다. 무적에 다른 무녀들은 나이가

기재되어 있는데 오히려 액받이무녀만 빠져있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었다.

“올해로 스물하나, 새해가 오면 스물둘이 되옵니다.”

‘연우낭자가 살아있다면 동갑이었겠구나. 나란 놈도 우습구나. 얼굴도 모르고 연심을 품질 않나,

아무것도 모르고 얼굴만 아는 여인에게 연심을 품질 않나. 희한한 놈일세.’

훤은 씁쓸하게 웃으며 곰곰이 계산해보았다. 무적에 올라 있은 지는 6년 전이니 적어도 그 이전

까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단 말이었다. 글도 박식하게 알고 자태도 품위 있는 것으로

보면 분명 양반가의 여식이었을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그리고 그때 처음 만났던 곳에서 여종이

‘아가씨’라고 한 것과, 거친 일 한번 해보지 않은 듯한 고운 손을 보면 더더욱 확신이 섰다.

귀하게 자라지 않았다면 결코 그런 손이 되지 못했을 것이었다. 궁궐의 많은 궁녀들도 얼굴이

아무리 고와도 손의 거침은 숨길 수가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성도 있었을 것이고,

이름도 있었을 것이었다.

“성숙청의 무녀는 어떻게 뽑는 것이냐?”

“신내림을 받은 무녀 중에 특히 신기가 높은 무녀를 데려온다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인도 신내림을 받은 것인가?”

“그러할 것이옵니다.”

“그럼 신내림을 받기 전에는?”

“천신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네가 그녀의 사주를 보았다 하지 않았는가?”

“사주를 본 것이 아니라 상감마마와의 합만을 보았습니다. 신기가 내린 사주는 괘가 흩어져

있기에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하여 보지 않습니다.”

“합은 보아도 사주는 보지 않는다? 뭔 뜻인가?”

“합을 보는 방법과 사주를 보는 방법은 다르옵니다. 합을 볼 땐 상감마마와 액받이무녀의

사주를 같이 풀어 보면 괘가 보이지만, 그 여인의 괘만 따로이 보면 보이진 않았단 뜻이옵니다.”

“음······.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지만, 알았다. 이 여인의 신모는 누구인가?”

“장씨도무녀이옵니다.”“그럼 그 장씨도무녀는 이 여인의 친모는 아닐 것이나, 어디서 온

여인인지는 알 것이 아닌가?”

명과학교수는 입을 다물었다. 훤의 술수에 넘어갈 뻔 했다. 이렇게 조목조목 따지고 들어오면

어느새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마는 실수를 유도하는 것. 이것은 훤이 잘 쓰는 유도심문이었다.

명과학교수도 월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긴 했지만 훤의 유도에 넘어가면 자신도 미처 모르고 있던

답이 나올 것만 같아 더 이상 입을 열기가 무서웠다. 답이 없자 훤은 다시 질문했다.

“말하라! 장씨도무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궁궐에 없사옵니다. 더 이상은 천신도 모르옵니다.”

“도무녀도 엄연히 나라의 녹봉을 받는 자리라 알고 있다. 그런데 궐내에 없다니!”

“7년 전에 자리를 물리고 나갔사온데, 장씨도무녀의 신력을 넘어서는 도무녀가 없어 대리자만을

우선에 두었사옵니다. 지금도 불러들이려 노력하고 있사옵니다.”

“7년 전이라······. 무슨 연유로 성숙청을 나갔단 말이냐?”

“잘 모르오나 성균관 유생들이 성숙청의 철폐를 강력하게 요구하여 더 이상 있기 싫다며

나간 것으로 아옵니다.”

훤은 고개를 갸웃했다. 7년 전이라면 세자빈 간택이 있었고, 성균관에서는 그 일과 관련하여

권당을 하느라 성숙청 같은 곳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오히려 성균관에서 성숙청 철폐를

요구하여 상소를 올리던 때는 그 전과 그 이후였다. 게다가 이 상소는 하루 이틀 이어져 온 것이

아니라 성숙청이 생긴 이래 시시때때로 끊임없이 불거져 나왔던 문제였다.

“장씨도무녀······. 어떤 자냐?”

“조선이 건국한 이래 최고의 큰무당이라 들었사옵니다. 하지만 천신도 훈도로 있을 때 한번

보았을 뿐인지라 자세히 알진 못하옵니다.”

훤은 생각에 빠져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 큰무당의 신딸이라······. 묶이는 인연이 무섭다하여 이름하지 않은 신모란 자가

장씨도무녀란 말이지.”

훤은 처음 만난 날 월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분명 월의 신모에 대해 물었을 때 그녀의 답은

그러했다. 자신이 신딸로 삼았으면서도 인연이 묶이는 것이 무서워 신딸에게 이름을 주지

않았다는 장씨도무녀. 월의 그 전 이름을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단지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할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픈 것을 대신하여 액받이무녀가 아픈 것이 확실한가?”

“네? 그, 그러한 것이 마땅하긴 하오나······. 아뢰옵긴 송구하오나 이 액받이무녀는 상감마마와의

합이 너무도 잘 맞는 것이온지 신기하게도 무녀가 대신 아프거나 하는 것은 없사옵니다.

그러니 심려는 마시옵소서.”

훤은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인지, 아니면 월이 아파도 내색을

하지 않는 것인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훤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머리가 아프다. 무녀를 불러오라.”

상선내관은 왕이 어디가 아프다고만 하면 걱정부터 앞서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훤의 꾀병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어의를 불러오는 것이·······.”

훤은 더욱 찌푸린 표정으로 명과학교수를 보고 말했다.

“아직 인경이 되기 전이지만 데리고 오라. 내 머리는 무녀가 있어야 괜찮아지느니. 어서!”

명과학교수는 어쩔 수 없이 성숙청 무적을 들고 물러났다. 상선내관과 운만 남게 되자 훤은

조용히 운에게 물었다.

“운아, 이상한 점이 있지 않느냐? 네가 다른 관령 소속의 무적들을 보았을 것이니 이상한 점을

말해보아라.”

“다른 무적에는 각 무녀들의 신상에 대해, 심지어 생긴 특색까지 소상하게 적혀있었사옵니다.

하온데 방금의 성숙청 무적은 다르옵니다.”

“어떻게 다르단 말이냐?”

“마치 무적에 올리긴 했지만 사람 자체는 숨기려는 듯이 보이옵니다.”

“다른 무녀들은 생김새 까지는 아니지만 이름과 나이는 적혀있었다. 월은 다른 무녀들 보다

더 무언가를 감춰둔 것 같더군. 그 무적에 무명자란 글을 올린 자가 바로 장씨도무녀란 말이다!

대체 무슨 의도로······.”

훤은 턱을 괴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월과 처음 만난 날을 되풀이해서 기억해보았다. 월이 그때

거짓을 아뢰지는 않는다고 했었다. 무명자. 이름이 없는 것은 분명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월은 무녀가 되기 전을 전생이라 말했었다. 그건 그 전생을 기억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선 안 되는 것이란 뜻이었다. 전생이란 전혀 다른 신분에 전혀 다른 삶을 의미하는 것이니,

훤은 월이란 여인이 더욱 궁금해졌다.

한참 만에 월이 들어와 네 번의 큰 절을 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자태였다. 훤은 서안에

이마를 괴고 월에게 가까이 오라고 명했다. 월이 가까이 다가와 앉자 훤은 어리광 섞인

표정으로 월을 보았다.

“머리가 너무 아프구나. 그래서 널 일찍 불렀다. 내 이마를 짚어 다오.”

월이 주춤 거리며 앉아만 있는 것이 답답하여 성격 급한 훤이 먼저 손을 가져와 자기 이마에

강제로 올렸다. 월이 손을 빼내려고 해도 강한 힘으로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역시, 말끔해졌구나. 이상하지? 어째서 네가 있는 것만으로 이리 머리가 맑아지는 것인지.”

월이 다시 손을 빼내려고 하자 이번에는 허리를 안아 잡아 당겼다.

“가만히 좀 있으라.”

훤은 월의 손을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상선내관이 보고 있기가 민망할 정도로 손을 만졌다.

한참을 정신 집중해서 만지작거리던 훤이 월의 손가락에 깍지를 끼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참으로 고운 손이로구나. 섬섬옥수가 그대의 손을 일컬었음이야.”

“상감마마의 어수(왕의 손) 또한 그러하옵니다.”

“당연하지. 난 태어나서부터 줄곧 손을 사용할 일은 하지 못했으니. 기껏 활시위나 당기고

말고삐 잡는다던가 책장 넘기는데 사용한 것이 전부이니. 그대의 손도 기껏 책장 넘기는 것 말고는

사용한 적이 없었단 말이렷다.”

훤은 월의 손을 놓고 두 팔로 월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무녀가 되기 전의 네가 어떤 이름의 어떤 신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귀한 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신분이었을 것이다. 네가 나에게 말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손수 알아낼 것이다.

아참! 머리 아프다는 거 꾀병이었느니라. 네가 보고파서 그랬으니 실없다 생각지 마라.”

상선내관이 둘이 너무 꼭 붙어 있는 것이 염려되어 노심초사하였다. 월의 미색이 뛰어나 왕이

잠에서 깨서 보게 되면 큰일이라 줄곧 생각했었지만, 막상 깨어나니 일은 더욱 커져있었다.

아직 상세한 것은 알지 못하지만 눈치 상으로 행궁에서 미행을 빠져나가 한 번은 만났던 사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왕이 달 타령 해대던 것도 어찌 보면 전부 저 여인을 지칭한

것이란 짐작도 되었다. 그러니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상감마마, 승정원일기는 아니 보실 것이옵니까?”

훤은 상선내관을 쳐다보며 월에게서 차츰 떨어져 서안에 바로 앉았다. 하지만 훤은 상선내관이

안심할 틈이 없이 재빨리 월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승정원일기를 펼쳤다.

“상선, 볼에 입 맞춘 것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그러니 그리 놀란 눈으로 보지 말라.”

상선내관은 월을 쳐다보았다.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월이었다. 훤도 월을 보았다.

“아, 미안하구나. 내 널 놀라게 하려던 것은 아닌데. 그럼 널 놀라게 한 죄로 나도 벌을 받지.”

말을 끝낸 훤은 또 다시 재빨리 월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얼굴에는 한가득 장난스런

미소를 담고 있었다.

“사, 상감마마······.”

월이 당황하여 말을 더듬는 모습에 훤은 더욱 기분이 좋아졌는지 큰소리로 웃으며

승정원일기를 보았다.

“하하하. 내가 판단컨대 입 맞추는 것도 괜찮느니라. 볼이 되는데 어찌 입이 안 되겠느냐?

월아, 이렇게 만났으니 내 절대 널 놓치지 않을 것이다. 분명 방법이 있을 게다. 기다려다오.

네가 날 위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을 떠나지 마라.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그것 하나뿐이다.”

월이 아닌 승정원일기에 눈을 두고 말하는 훤이 운의 눈에는 더 애처롭게 보였다. 그래서

급하게 월의 입술만 훔치고 마는 모습에 질투란 것은 느낄 수도 없었다. 현재 훤이 애써 웃으며

태연한 척 버티고 있을 것이란 것은 운과 상선내관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월은 왕이 무엇을

조사하는지 까맣게 모른 채 옆에 다소곳하게 앉아있었다. 딱 한 달만 궐내에 머물러야 한다는

장씨의 말이 귓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훤의 미소가 이내 장씨의 말을 멀리 쫒아내

버리곤 했다. 그래서 떨리는 마음과 두려운 마음이 함께하고 있었다.

교태전의 서쪽 온돌방이 왕비의 정침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이 방은 비어있었다. 중전윤씨는

왕비의 정침에 있는 있기만 하면 불안하고 짜증이 일어났다. 그래서 주로 교태전의 동 침전인

함원전(含元殿) 중에서도 작은 방 한 곳에 주로 기거했다. 궁녀들 눈치가 보여 정침에 애써 앉아

있으려 해 보아도 마치 남의 집에 손님으로 와 있는 것 같이 안정이 되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함원전의 작은방은 괜찮았다. 내전상궁이 중전윤씨에게 조용히 물었다.

“마마, 상감마마의 성후를 여쭙지 아니 하셔도 되는지요?”

중전윤씨는 불편해 하며 더듬거렸다.

“가, 강령하시다 하지 않았느냐?”

“하오나 마마께옵서 친히 가보셔야 하오는 건 아니 올련지요. 그 날로부터 며칠이 지났사온데······.”

중전윤씨의 인상이 자기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합궁일에 훤이 쓰러졌을 때 누구보다 안심이

되었던 것은 중전이었다. 이상하리만큼 왕에게 정이 가질 않았다. 그저 그 모습만을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멋있건만 합궁일만 택해지면 그날부터 중전은 무언가에 뒤쫓긴

사람마냥 불안하고 왕이 무서워졌다. 왕이 자기 옷고름에 손을 가져다 대는 것조차 싫었다.

아무리 괜찮다며 스스로를 위로해도 쉽사리 그런 감정들이 누그러지지 않았다. 왕이 괜찮아졌다는

것도 상궁을 통해서만 들었을 뿐 직접 가서 왕을 보진 않았다. 자기 아래에 있는 상궁들조차

그런 중전을 이상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조심하려 해도 은연중에 인상으로

드러나 버리곤 했다.

“마마께옵서 공무로 많이 바쁘시온데 나까지 귀찮게 해드려서야 되겠느냐?”

“하오나, 마마······.”

“오늘은 나도 바쁘니 다음에 가서 뵐 것이다. 그렇게 있지 말고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너라.”

“알겠사옵니다. 아래 궁녀를 시켜 성후를 걱정하옵신다고 아뢰겠나이다.”

내전상궁은 심부름을 시킨 뒤 왕비가 갈아입을 옷을 가져왔다. 중전윤씨는 왕비의 옷인

당의차림을 불편해 하기 때문에 해가 떨어지기만 하면 바로 편한 저고리와 치마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당의를 입을 땐 꼭 안에 적삼을 두 겹이나 껴입었다. 겨울 뿐만이 아니라 여름에도

이렇게 입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당의가 불편했다. 혹시나 상궁들이 자신을 정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것도 불안해하는 것 중에 하나였다. 자신의 편 하나 없이, 마음을 털어

놓을 사람 하나 없이, 오직 눈치를 봐야할 사람들 밖에 없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성숙청 무녀들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모습이 혜각도사와 관상감의 교수들 눈에 안 들어올 리가 없었다. 혜각도사는 그 느낌을 알아차려

침묵했고, 관상감의 교수들은 대리 도무녀에게 물어보았다. 답으로 큰무녀가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큰무녀의 복귀! 그건 교수들이 두 팔을 들고 반길 일이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기이한 일들은 그녀의 신력을 빌린다면 쉽게 풀릴 수 있을 지도 모르거니와 관상감에서

다 지고 있는 짐을 성숙청과 나눠 질 수도 있었다. 대리 도무녀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신력이

미치지 못하는 일을 접할 때 마다 아무도 못 찾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 꼭두각시란 자리에서 내려 올 수가 있게 되었다.

그렇게 모든 사람의 기다림을 받는 장씨도무녀가 드디어 궐내 성숙청에 도착했다. 그 옆에는

잔실과 설이 같이 있었다. 모든 무녀들이 궐 밖까지 나와 장씨도무녀에게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 장씨의 뒤를 따라 성숙청 안으로 들어왔다. 장씨는 성숙청에 들어서자마자 액받이무녀를

찾았다. 하지만 월은 밤새 왕의 곁에 있다가 잠들었기에 아직 자고 있던 중이었다. 장씨가

모두의 인사를 받고 난 뒤에 다른 무녀가 월을 깨웠는지 데리고 왔다. 월은 다른 무녀들과는

달리 이제껏 장씨가 올 것이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자기 눈앞에 장씨가

보이자 장씨의 경고가 생각나 고개만 숙이고 자리에 섰다. 장씨는 그런 월을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다가 주위 무녀들을 나가라고 명했다. 시끄럽던 사람들이 나가고 나자 설이 얼른 월에게

달려가 꼭 끌어안았다.

“괜찮으십니까? 걱정되어 부리나케 왔습니다.”

월은 대답하지 못하고 장씨만 보았다. 눈 한가득 이제 어떻게 되는지 두려움을 담아 묻고 있었다.

장씨는 힘든 미소로 말했다.

“설이 년이 어찌나 빨리 걷던지 따라 뛰느라 이 늙은이 가랑이가 찢어지는가 하였소.”

장씨도 월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여 주며 다시 말했다.

“어찌 되것지요. 이렇게 된 건 다 내 탓이요. 아가씨 탓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고. 무엇보다

이제 말조심이나 하십시다. 이 시간부터 내 아가씨한테 반말을 하겠소.”

“진즉에 그러셔야 했지 않사옵니까?”

“혼자 힘들지 않았소? 난 설이 년이 내 목 벨거라 지랄하는 바람에 많이 힘들었소.”

장씨는 웃으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긴 여행 때문에 힘들었던 탓도 있었지만 궐내에 가득한

어수선함 때문에 더 정신이 없었다. 월이 걱정되어 물었다.

“긴 길이 힘드셨습니까?”

“아니, 그보다 한적한 곳에 있다가 이렇게 북적이는 곳에 오니 적응이 안 되어 그렇소.

조금만 지나면 언제 그랬나 싶게 곧 이곳에 다시 익숙해져 살아가겠지.”

잔실은 처음 성숙청이란 곳에 왔기 때문에 낯설고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장씨는 그런 잔실이 조차 정신없게 느껴졌는지 옆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한참을 숨을 돌린 뒤 장씨는 그제야 왕에 대해 물었다.

“상감마마께옵선 괜찮으시오?”

“네, 제가 오고 나서 좋아지셨다 합니다. 관상감에선 아직까지 원인을 모른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신모님은 아시겠습니까?”

“글쎄······. 이제 도착해서 바로 알 수는 없겠지만······. 차차 알아봐야겠지.”

장씨가 골똘하게 생각에 빠져있을 때 쯤 혜각도사가 갑자기 들어왔다. 장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미리 말도 놓지 않고 불쑥 들어오는 이런 경우가 어디 있소!”

혜각도사는 장씨를 보고 있지 않았다. 오직 월을 쳐다보며 앞으로 와서 월 앞에 큰 절을 올렸다.

장씨가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보며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화를 냈다.

“이 늙은이가 실성을 했나? 어서 일어나시오!”

혜각도사는 일어나지 않고 몸을 숙인 그 상태로 조용히 말했다.

“교태전의 주인이시여. 이 몸이 죄인이라 그간 예를 갖추지도 못 하였사옵니다.”

월은 차분하게 미소로 말했다.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소녀는 비천한 무녀일 뿐이옵니다.”

“세자빈 간택 당시 소인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사옵니다. 그 죄는 죽어도 마땅하옵니다.”

월은 장씨의 눈치만 보았다. 장씨는 지쳤는지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큰일 만들 늙은이 일세. 쯧쯧. 허연우, 그 아가씨는 이미 죽고 없소. 똑똑히 보시오!

눈앞에 있는 건 무녀일 뿐이오. 액받이무녀.”

혜각도사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숙청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제야 모두가 놀라

장씨를 보았다. 설이 펄쩍 뛰며 말했다.

“저 늙은이 누굽니까? 어찌 아가씨를 알고 있는 것입니까?”

“호들갑떨지 마라. 발설할 인간은 아니다. 하지만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구나.”

장씨는 놀란 눈으로 서 있는 월을 보고 물었다.

“두렵소?”

월은 쓸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한숨과 같이 말했다.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이미 소녀의 전생이 되어버린 허연우란 이름을 들었사온데······.”

#14

훤은 오랫동안 검토해 오고 있던 승정원일기를 덮었다. 잠을 설쳐가며 애쓴 보람도 없이

짐작한 대로 주요문서는 남아있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표면적인 내용뿐이었다.

별궁에서 알 수 없는 고열과 번갈을 겪다가 때때로 숨이 막힌다는 호소를 하기도 했다는 기록만이

있었고, 죽음에 관한 것도 그저 원인 모를 병사(病死)로 기록되어 있었다. 사대부가의 여인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부친인 홍문관대제학이 조용히 일의 마무리를 원했기에 시신을 세밀히

관찰하지는 않았다는 기록도 있었다. 이렇게 마무리 된 데에는 어의의 병사라는 소견서의

뒷받침도 한몫했다. 훤은 선왕이 이리 어영부영 사건을 덮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분명 따로 조사를 했을 것이고,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승지와 내관을 거치지

않고 왕이 직접 보고를 받아 기밀로 처리되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러 문서 기록들로 인해 훤이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단 하나

있었다. 연우가 죽었을 당시 세자빈으로 간택되었지만 가례를 치르지 않고 죽었을 경우 첩지를

내려야 하는가, 아니면 무위로 돌려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연우는

세자빈으로서가 아니라 댕기머리를 올리지 않은 처녀귀로 규정되어졌다는 기록이 남아있었다.

세자와의 아주 작은 인연의 끈마저 완전히 없애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훤은 7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이러한 논의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해서든 세자빈으로

두어 달라 졸라보았을 것이다. 비록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후회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훤은 승정원일기를 밀쳐냈다.

“다시 승정원에 가져다 두어라.”

상선내관은 참담한 표정의 훤을 보며 걱정되어 물었다.

“아무 것도 없었사옵니까?”

“그렇다.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기가 막힐 정도로 아무 것도 없다.”

“그러하면 이제 어쩌실 것이옵니까?”

훤은 서안에 머리를 받히고 엉뚱한 말을 했다.

“월은 어찌하여 와있지 아니 한 것이냐? 언제나 침전에 있어라 하지 않았느냐!”

“하오나, 상감마마······.”

“어서 데려오너라! 숨 막혀 죽을 것 같다.”

훤의 괴로워하는 모습에 상선내관은 걱정이 되었다. 그 어떤 누구도 왕의 노기를 가라앉힐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월이란 무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현재로선 그나마 고마운 일인지도

몰랐다. 성숙청에서 월을 불러오는 시간은 제법 걸렸다. 그 시간 동안 훤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세 그대로 있었다. 월이 절을 올릴 때도 고개를 들어 보지 않았다. 운 또한 왕의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앉아 월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왕이 있는 자리에선 특히 더 그랬다.

훤은 월이 멀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으려하자 화난 목소리로 입만 열었다.

“어디에 앉는 것이냐! 내가 너의 자리가 그곳이라 하더냐?”

월은 다소곳한 눈길로 상선내관을 보았다. 상선내관은 어서 왕의 옆으로 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월이 다가가 앉자마자 훤은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이 말 같지도 않게 여기느냐? 분명 침전에 있어라 하지 않았느냐?”

“괴로운 일이 있으시옵니까?”

훤은 말없이 월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었다. 놀라서 몸이 경직된 월의 손을 잡고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내관과 궁녀는 일제히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운도 몸을 돌려 앉았다. 가까스로

슬픔을 참은 훤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살아있는 너 하나에게도 아무 것도 못해주는데, 죽은 여인에게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느냐?

이 하얀 소복도 벗어던지게 해주지 못하고, 이 어여쁜 손가락에 놋가락지일 망정 끼워주지 못하는데.”

훤은 손을 더듬어 월의 댕기를 앞으로 넘겨왔다. 붉은색 댕기가 눈에 쓰라리게 박혔다.

그 댕기에 입을 맞추며 다시 중얼거렸다.

“이 가엾은 댕기조차 풀어주지 못한다. 너도, 그리고······. 너의 머리를 올려 비녀를 꽂아주는

사내는 나이고 싶은데, 다른 사내에겐 허락하고 싶지 않은데······. 나란 놈은 아무것도 못한다.

그런데도 임금이란다.”

“윤언을 받잡기 민망하여이다.”

“그렇지. 월이 너에게도 난 그저 왕이기만 할 테지.”

홀로 읊조리는 훤의 말에 마음속에서 큰 물결이 일듯 출렁한 쪽은 월이었다. 그저 왕인 것이 아니라,

오직 왕으로만 대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어찌 할 수 없어 얼굴에 표정조차 담을 수 없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고개를 드는 연우란 전생의 기억도 월의 무표정에 무게를 실었다.

월의 허벅지에 슬픔을 비비던 훤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달빛도 좋은데 산책이나 하자!”

이제 막 그믐달을 벗어난 흐린 달빛이 좋다하는 것은 순전히 핑계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지만

우울하게 방안에 있는 것 보다는 산책을 하는 것이 더 나을 거라는 판단에 모두 일어섰다.

월도 따라 일어섰지만 훤과 같이 산책에 나갈 폼은 아니었다. 훤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월아, 너도 가야지. 산책하는 도중에 또 살을 맞으면 어쩌란 말이냐?”

상선내관은 훤이 무슨 꿍꿍인지 불안했지만 생각해볼 짬도 없이 월에게 따라 나서라는 눈짓을 했다.

대청에서 내려서는 훤의 발아래에 석(왕의 신발)이 신겨 졌다. 하지만 월은 버선발로 월대

아래까지 내려가 그곳에 던져져 있던 초라한 짚신을 신었다. 훤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눈썹사이에

슬픔을 담은 채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일렬로 훤의 뒤를 따라 산책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월이 궁녀들보다 뒤처져 걷는 것에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훤은 앞서서 걸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월을 자신의 바로 옆으로 불렀다. 그렇게 또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산책만

했다. 오직 소복차림만 한 월이 매서운 겨울밤의 추위에 오돌오돌 떠는 것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운은 바로 뒤를 따르며 월의 몸이 걱정되어 뒤통수만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또 다시 훤은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월의 손을 잡고

뒤돌아 말했다.

“그대들은 너무도 가까이 나를 따른다. 조금 물러나 따르도록 해라.”

다들 놀라 주춤거리며 서있기만 하고 물러나진 않았다. 훤이 소리를 높였다.

“어허! 물러나 따르라고 했다!”

상선내관은 굉장히 불안했다. 하지만 왕이 무엇을 하려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어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운을 제외한 모두가 두어 발 뒤로 물러났다. 훤은 운을 보고도 말했다.

“운아, 너도 같이 물러나거라.”

하는 수 없이 운도 조용히 두어 발 뒤로 물러났다. 훤은 손을 들어 더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계속되는 훤의 손짓에 모든 사람들이 상당히 멀리까지 물러나야만 했다. 어느 정도 만족스런

거리가 되자 훤은 월의 허리를 감아 잡아 당겨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월의 턱을 손으로 들어

얼굴을 가까이 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월이 조용히 말했다.

“지금 무엇을 하려 하시옵니까?”

“내가 무엇을 하려는 것 같으냐? 무녀라면 알아맞혀 보아라.”

월이 아무 대답도 못하자 훤은 미소로 속삭였다.

“못 알아맞추는 것을 보니 넌 아무래도 무녀는 아닌가 보다. 앞으로 나에게 무녀라 속이면

죄를 물을 것이다.”

훤은 월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려했다. 월이 얼른 입술을 피해 고개를 돌리려 하자

턱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고정시켰다. 하지만 훤은 월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지는 않고

입술이 닿을 듯 말듯 한 거리에서 멈췄다. 그리고 눈동자만 돌려 내관들이 있는 곳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왕이 여자를 가까이 했을 경우에 해야 되는 법도대로 다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순간 훤의 한쪽 입고리가 짓궂게 올라갔다. 그리고 월을 한쪽 어깨에 짊어지고 달리기 시작한

것은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월이 깜짝 놀라 말하려 하자 훤은 잽싸게 달리며 말했다.

“어명이다! 아무 말 마라. 내 널 보쌈 하는 중이다.”

운은 훤이 도망을 치는 것을 느꼈지만 일부러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내관들은 두 사람이

멀리 도망가고 나서야 낌새를 채고 고개를 들었다. 모두가 우왕좌왕하며 왕을 뒤쫓아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운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슬픈 표정으로 가만히 있다가 사람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

훌쩍 담 위로 뛰어 올라 담을 따라 홀로 쫓기 시작했다.

훤은 월을 어깨에 메고 뛰는 것이 즐거운지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이대로 궐 밖으로 도망을

치진 못하는 것은 누구보다 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도망치는 시늉이라도 내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뒤쫓아 오는 발걸음이 느껴지자 조급한 발걸음은 더욱 바빠졌다.

복잡한 건물과 건물 사이를 정신없게 뛰어 다녔지만 금세 잡힐 것처럼 뒤쫓는 무리의 발걸음이

가까이 느껴졌다. 그래서 한 건물의 대청 아래에 우선 숨어들어 월을 내려놓았다. 훤은 숨이

차올라 헉헉 거리면서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걱정마라. 어릴 때부터 숨바꼭질에선 나를 당해날 놈이 없었다.”

“어디로 가시려는 것이옵니까?”

캄캄한 대청 아래라 월의 표정이 어떤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월도 즐거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그 표정은 무녀가 아닌 한 여인의 표정인 듯 하여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어둠에

파묻혀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손으로 그 얼굴을 더듬었다.

“어디로 가려는 지는 나도 모른다. 어디든 너와 나 단둘만 있을 수 있는 곳이라면······.

아주 잠깐만이라도 좋다. 너와 단둘만 있고 싶느니.”

“하오나 상감마.”

월은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훤이 입술로 말을 완전히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뛰고 난 뒤라

숨을 가삐 내쉬는 훤의 혀조차 달음박질에 길들여졌는지 조급하게 서둘렀다. 하지만 월의 입술은

놀라 붙었는지 훤에게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월의 턱을 잡아 훤 스스로 길을 내어 안으로

들어갔다. 음밀한 월의 입 안 여기저기를 혀끝으로 느꼈다. 그리고 차가운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떨고 있는 월의 혀끝을 자신의 혀로 따뜻하게 해주려 했지만 온몸이 열기로 뜨거워 진

것은 훤이 먼저였다. 월도 서서히 땅의 냉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훤의 입술이 뜨거워 입안에서부터

온몸으로 그 뜨거움이 번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훤의 숨 가쁜 호흡도 월에게 옮겨와

심장마저 가쁘게 뛰기 시작했다. 둘이 서로의 입술을 나누고 있는 건물 앞으로 왕을 찾는 발걸음들이

주르르 뛰어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그 근처로 와서 이리저리 찾는지 한참을 맴돌았지만 대청

아래에 왕이 숨어들었을 거라 상상도 못했는지 들여다보진 않았다. 그 와중에도 훤은 월의

입술을 놓지 않았다. 월도 훤의 입술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훤이 입술을 떼어 낼까 겁이 났다.

앞에서 맴돌던 발걸음들이 다른 곳으로 뛰어가 다시 조용해 졌다. 훤이 멀어져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월의 입술을 놓아주고는 속삭였다.

“월아. 너 뜀박질 잘 하느냐?”

“네?”

“또 도망가자. 뛰기 힘들다면 내 이번에도 널 어깨에 메고 뛸 것이다. 보쌈이 좋으냐,

같이 손잡고 도망하는 것이 좋으냐? 어찌 해줄까?”

월은 왕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어둠에 의지해 조용히 말했다.

“같이 도망하겠나이다.”

“우리가 아무리 뛰어 봤자 대궐 안을 벗어나진 못하겠지만 이 넓디넓은 궁궐 안에 우리 단둘의

몸 숨길 곳이 없겠느냐? 그런데 음······.”

월은 고민하는 척 뜸을 들이는 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음······,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군사암호를 뭐로 정해주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구나. 정신없이

바빠 급하게 무언가를 써준 건 기억나는데 그것이 어제의 암호였는지 그제의 암호였는지

아리송한 것이······. 큰일이군. 월아, 열심히 뛰어라. 만약에 내관들이 아닌 내 얼굴을 모르는

군사들의 손에 잡힌다면 우린 그 자리에서 사살 될 것이다.”

월이 깜짝 놀라 훤의 팔을 잡았다.

“아니 되옵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

“뛰어라! 돌아가진 않을 것이니 날 살리는 길은 그것뿐이다.”

훤은 월의 손을 잡아 당겨 발걸음들이 사라진 반대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월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훤의 손에 이끌려가면서도 지금 가고 있는 곳이 지옥이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뛰어 도망하는 것도 오늘 이 잠시의 장난일 뿐이겠지만, 사람들의 손에 잡히면 그것으로

툭툭 털며 없었던 일이 되어 왕과 무녀로 돌아가야 하겠지만 이 찰나의 도망이 행복했다.

열심히 뛰다가 담 너머에 군사가 지나가자 훤은 담장 뒤로 몸을 붙여 숨었다. 그렇게 숨다가

뛰다가 하면서 달려간 곳 멀리에 큰 연못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 위에 우아한

정자가 보였다. 하지만 그 곳으로 가기엔 왔다 갔다 하는 군사들이 많아 쉽게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았다. 훤은 숨을 고르며 군사들이 틈을 보이길 기다렸다. 그리고 아주 잠깐의 틈이 보이자

정자로 뛰었다. 연못 위에 걸쳐져 있는 취향교(연못 위로 나 있는 다리)를 건너 가까스로 정자

안으로 몸을 숨겼다. 그제야 놓지 않고 줄곧 잡고 있던 월의 손을 놓았다. 월은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을 헐떡이느라 바빴지만 훤은 자신의 곤룡포를 벗어 월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월은 왕의 옷을

걸쳐서는 안 되기에 놀라서 옷을 벗어내려 했다. 하지만 훤의 단단한 손이 월의 어깨를 꽉 쥐며 말했다.

“내가 너의 소복이 보기 싫어서이니 벗지 마라. 추우니 입고 있어라.”

“추우니 상감마마께옵서 입으셔야 하옵니다. 도리어 소녀의 옷이나마 벗어 덮어드려야 하온데.”

“오호! 대담한 여인일세. 감히 내 앞에서 옷을 벗겠단 말이냐?”

“그 뜻이 아니오라.”

“여긴 너와 나 단 둘 뿐이다. 내관도 없고 궁녀도 없으니 왕도 없고 무녀도 없다. 그러니 이곳에

있는 건 한 사내와 한 여인일 뿐이다. 그리고 네게 걸쳐준 이 옷은 곤룡포가 아니라 한 여인을

따뜻하게 해주고자 하는 사내의 마음이니라. 그 마음을 거절하겠단 것이냐?”

단 둘! 이것은 월에게로 와서 묘한 주술이 되었다. 훤은 싱긋이 웃으며 다리가 있는 쪽의 창을

조금 열어 바깥 동정을 살폈다. 그리고 가운데 있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말했다.

“이곳이 어딘지 아느냐?”

월은 여전히 문 앞에 가만히 선채로 말했다.

“모르옵니다.”

“이곳은 취로정(翠露亭, 현재는 향원정)이다. 비취이슬이라고 하지. 아바마마께옵서 살아생전

어마마마와 함께 담소를 즐기던 곳이니라. 어디든 내관과 궁녀가 따라다니니 불편하셨는지

이곳에 드실 때는 꼭 주위사람들을 취향교 저편에 세워두고 두 분만이 이곳으로 드셨는데,

나도 너와 이곳에 꼭 한번 와보고 싶었느니. 비록 밝은 날 이리 같이 하진 못하지만.

오늘은 어째 달빛마저도 어둡구나.”

취로정 안으로 들어온 달빛이 창살의 무늬를 찍어다 훤의 얼굴과 옷에 그려놓았다.

훤은 멀리 서 있는 월에게 미소로 말했다.

“이곳의 아름다움은 호랑이도 흠모한다 하였느니라. 호랑이가 널 물어 가면 어쩌려고 그리 서 있느냐?

이리 오너라.”

“호랑이라 하였사옵니까?”

“그래. 밤이 되면 이 취로정에 호랑이가 출몰한단 소문 못 들었느냐?”

월은 믿지 않는 표정으로 싱긋이 미소 지었다. 월의 미소에 훤은 더 기분이 좋아졌다.

“허허. 믿지 않는단 것이냐? 그런데 어찌 하냐. 내 말은 진실인 것을. 세조대왕이 이 연못과

취로정을 만들었는데 그 이후로 이곳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자, 세조대왕께옵서 친히 많은

장수를 거느리고 인왕산과 백악산 등지로 호랑이 사냥을 다니셨다. 하지만 결국은 못 잡았다

들었다. 지금도 밤사이에 호랑이 발자국이 종종 발견되곤 하느니라. 호랑이가 유독 이곳만을

좋아하는 연유를 모르겠느니.”

“어찌 궐내에까지 호랑이가 들어올 수 있다 하옵니까? 그러니 소녀가 못 믿을 밖에요.”

“이 취로정 뒤로 산줄기가 뻗어있으니 그렇지. 네가 나에게 거짓을 아뢰진 않는다 한 것처럼

나도 네게 거짓을 말하진 않는다.”

월은 그래도 훤에게 다가가 서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로 먼저 다가가기가 힘겨웠다.

훤이 애가 타서 말했다.

“어서 이리 다가오너라. 지나가는 시간이 아깝지 않느냐? 조만간 우리가 있는 곳을 들킬지도

모르는데. 아니, 곧 들킬 것인데 그 사이에 네가 나를 만져볼 시간은 아주 잠깐이다.

그리 멀리 서서 바라보는 것은 내관들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가능하지 않느냐.”

월의 발걸음이 주술에 이끌린 듯 훤에게로 서서히 다가갔다. 훤 앞에 고개를 숙이지도, 눈길을

아래로 깔지도 않고 오직 훤의 눈만 보고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 선 월의 눈에 슬픔을 담은

훤의 눈동자가 보였다. 훨의 고운 손끝이 훤의 눈 위로 내려앉았다. 그 긴 세월 그리워만 했던

얼굴이 손끝에 따뜻한 형체를 띠고 더듬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월의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훤의 얼굴 위로 떨어져 내렸다. 월은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리는지도 못 느끼고 있었다.

“월아······.”

월은 훤의 얼굴을 자신의 품에 끌어 앉았다. 훤은 월의 심장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울음소리조차

삼켜 심장 안에서만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훤은 월의 가냘픈 허리를 끌어안았다.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비록 왕이지만 월의 울음을 덜어줄 수가 없었다.

“월아, 말해보아라. 이름이 무엇이냐? 네 아비는 누구며, 네 어미는 누구냐? 오라비는 있었느냐?

너에게도 가족이 있질 않았느냐? 말해다오. 내가 널 도울 수 있게 해다오.”

“월이옵니다. 그저 무녀일 뿐이옵니다.”

아무리 단 둘이라는 주술이 있긴 했지만 허연우란 이름을 답하기엔 그 주술은 미약했다.

그래서 마음으로만 답할 수밖에 없었다.

‘허연우라 하옵니다. 혹여 잊으신 이름인지는 모르겠사오나, 허연우라 하옵니다. 오라버니가

전해주는 세자저하의 봉서에 얼굴을 붉히며 잠 못 이루던 연우이옵니다. 소녀, 연우란 이름은

잊을지언정 어찌 세자저하의 봉서에 담겨 있던 그 글들을 잊을 수 있으리까.

혹여, 혹여 잊으셨나이까. 연우를 기억하나이까.’

월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훤의 귓가에는 월의 울음소리만 생생하게 들렸다. 알 수 없는 그

사연들이 안타까워 좀 더 캐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취로정 밖의 나뭇가지

사이를 비집고 바람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은 너의 사연을 알고 같이 울어주는데 나만 너의 사연을 모르는구나.”

“바람의 울음도 들을 줄 아시옵니까?”

“이리 너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으니 네 신기가 나에게로 옮겨왔나 보구나.”

훤은 월을 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리고 월의 얼굴에 흘러내린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었다.

“내 지금은 네 얼굴에 흘러내린 눈물만 닦아주지만 나중엔 너의 마음에 흘러내린 눈물도

닦을 수 있게 해다오.”

월은 희미한 미소만 보였다. 훤의 말에 기대감을 가지지는 않았다. 도리어 훤의 마음을 어지럽게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미안했다. 이렇게 왕의 얼굴만이라도 한번 보게 해달라는 소원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삶이었기에 이 이상의 욕심을 가지는 것은 죄였다. 훤은 조금 열린 창밖으로

군사 두 명이 이상하게 여기고 취향교를 건너오려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운이 그 다리 앞을 막아섰다. 운검의 출몰에 군사들은 취로정에 있는 사람이 왕이란

것을 눈치 채고 바로 물러나 주었다. 훤은 희미한 달빛이 만들어내는 창살무늬에 마음을 실어

시를 읊었다.

“서로 그리는 심정은 꿈 아니면 만날 수가 없건만, 꿈속에서 내가 님을 찾아 떠나니 님은 나를

찾아 왔던가. 바라거니 길고 긴 다른 날의 꿈에는, 오가는 꿈길에 우리 함께 만나지기를.”

<서로를 그리는 꿈(相思夢)> - 황진이

옛날 연우에게서 처음으로 받았던 서찰에 적혀있던 시가 불현듯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월이 놀라는 눈빛을 미처 보지 못한 훤은 서글픈 미소와 같이 말을 이었다.

“세자시절 내가 마음 설레며 읽고 또 읽었던 시다. 그때 이 시는 그저 가슴을 두근대게 하느라

바빴는데······. 오늘 이 시는 서글프구나. 내가 잠든 시간에 넌 깨어있고, 네가 잠든 시간에

난 깨어있으니 꿈에서 조차 만나 미소를 나눌 수 없을 것 아니냐. 그나마 꿈속일망정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었던 그때는 행복하였느니.”

‘연우를 기억하고 계셨사옵니까?’

월은 기쁘고도 서글픈 눈빛을 감추느라 눈을 감았다. 그리고 훤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연우의 모습은 그저 글자 몇 개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월은 기뻤다. 그토록 이나 그리워하던 이의 가슴 속에 자리하고 남아있었다는 것만으로 연우를

버리고 월로 살아도 한이 없을 것 같았다. 월이 조그만 소리로 시를 읊었다.

“바다 위에 밝은 달이 떠올라, 하늘 저 끝까지 고루 비추네. 사랑하는 연인들 서로 멀리 있는

이 밤을 원망하여, 님 그리운 생각에 잠 못 이뤄 하노라. 촛불 끄고 방안에 가득한 달빛 아끼다가,

저고리 걸치고 뜰에 내려서니 촉촉이 이슬이 젖어 오네. 손으로 가득 떠서 보내드릴 수 없는 터에,

다시 잠자리에 들어 님 만나는 꿈이나 꾸어보리라.”

<달밤에 임 그리며(望月懷古)> - 장구령(당나라 현종 때의 재상 겸 시인)

훤이 연우에게 제일 처음 보낸 서찰에 적혀있던 시였다. 순간 훤의 몸에 경직이 일어났다.

“소녀가 좋아하는 시이옵니다. 멀리 있어 만나지 못하는 것보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리 있는

것만 못한 사이도 있다는 것을 예전엔 몰랐사옵니다.”

월이 또 몰랐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훤의 눈치가 얼마나 빠른가 하는 것이었다.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혀 훤은 월을 끌어안았다. 월의 어깨너머로 훤의 무서운 눈길이 번뜩였지만

이내 그 매서움은 사라졌다.

‘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건가. 아무리 요 며칠간 연우낭자와 월 사이에서

어지러웠기로 단지 시 하나로 둘을 동일인물로 생각하다니, 정녕 내 정신이 이상한 것이야.

어찌 죽은 연우낭자가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말이 안 되는 것이야.

그저 내 바램 일 뿐이야.’

운검을 본 군사들에게서 들었는지 내관과 궁녀가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훤은 오늘의

도망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시간이 왔음을 알았다. 월을 내려놓고 얼른 곤룡포를 갖춰 입었다.

그리고 월의 옷매무새도 정돈해 주고는 멀찌감치 떨어져 마치 이제껏 줄곧 그런 자세로

있었는 양 창밖을 향해 뒷짐 지고 섰다.

“월아, 다음에는 경회루로 도망하자꾸나. 그곳은 더 큰 연못이 있고, 그 위엔 놀잇배도 띄워져

있느니. 그리고 그 큰 연못엔 수십 마리의 용이 떼 지어 살고 있느니라.”

월은 빙긋이 웃었다. 언젠가 오라비인 염에게서 들었던 말이었다. 경회루의 수많은 기둥에 용을

조각했기에, 그 용들이 일렁이는 수면에 비치면 마치 용이 물속에 잠겨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경회루의 연못엔 용이 살고 있다는 말을 했었다. 훤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선내관이 사색이 된 표정으로 취로정 안으로 들어왔다. 훤은 환하게 웃으며 상선내관을 보았다.

“상선, 잔소리는 조금만 하세. 내 오랜만에 숨바꼭질이 즐거웠으니.”

“상감마마, 어찌 이리 놀라게 하시옵니까? 옥체를 생각하셔야 하옵니다.”

“이제 돌아가자.”

훤이 앞서 취로정을 나섰다. 그리고 월도 상선내관의 차가운 눈빛을 받으며 뒤를 따라 강녕전으로

돌아왔다. 강녕전의 동쪽 온돌방은 뜨겁게 데워져 있었다. 훤은 표범 가죽을 덮어쓰고 멀리

앉은 월에게 자신의 품으로 오라며 한쪽 팔을 펼쳤다. 상선내관이 최대한 몸을 낮춰 호소했다.

“상감마마, 어찌 계속하여 무녀를 가까이 하려 하시옵니까?”

“가엾지 않느냐. 왕에게 끌려 다니느라 추위에 오돌오돌 떨었는데 뭔 잘못이 있기에 저 곳에

떨고 있어야 하느냐? 월은 왕의 어명을 따른 죄밖에 없느니.”

“그런 뜻이 아님을 아시지 않사옵니까?”

“월아, 이리 오너라. 네가 오지 아니한다면 내가 그쪽으로 갈 것이다.”

하지만 월은 멀리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곳은 이제 단둘이라는 주술이 없는 곳이었다.

훤은 답답한지 벌떡 일어나 월에게 다가가 앉았다.

“참으로 귀찮게 하는 여인일세. 넌 나의 말만 들어라.”

훤은 월을 아랫목으로 안아 데리고 왔다. 그리고 표범가죽으로 자신과 월을 같이 둘러 꼭 붙어

앉았다. 운은 고개를 돌리고 그들의 옆에 앉아 있었다. 상선내관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무녀를 꾸짖을 수도 없었다.

“마마, 밤에 취로정엔 가시지 말라 아뢰었는데 어찌 가셨사옵니까? 호랑이가 출몰한다 하지

않았사옵니까?”

상선내관의 한숨 섞인 말을 훤은 냉큼 받았다.

“월아, 거봐라. 호랑이가 나타난다 하지 않았느냐. 내 눈으로 아직 본적은 없지만.

난 너에게 거짓을 말하진 않는다.”

훤은 월에게는 의기양양하게 말해놓고는 상선내관을 향해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상선, 내 운검을 믿고 그리 있었느니라. 운이 내 뒤를 계속 따라온 것을 알기에.

그러니 걱정일랑 마라.”

상선도 운검을 믿고 그나마 안심하고 있었다. 단지 추위까지 운검이 막아주진 못하기에 화가 난

것이었다. 내의원에서 몸에서 열이 나게 하는 차를 가져와 훤에게 올렸다. 훤은 그 차를 한 모금

머금고 그대로 자신의 입에서 월의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모두들 납작하게 몸을 숙였다.

운도 몸을 돌려 앉았다. 그렇게 차를 나눠 마시고 난 뒤 훤은 월을 품속에 더욱 당겨 안고는

표정은 더 없는 왕의 모습으로 말했다.

“내일 날 밝거든 이전 상선내관을 불러 오너라. 선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한 친신(임금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은 바로 그 자이다. 그리고 선왕의 두터운 신임 또한 받고 있었던

자였기에 승정원일기에 남아있지 않는 문서들 중에 기억하는 것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비밀리에 조속히 대령시키도록 하라.”

월은 훤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차마 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왕의 얼굴을 하고 있는 훤도

보고 싶었지만 우렁찬 목소리만 느껴야했다. 그리고 연우가 느꼈던 감정과는 다른 서글픈

설렘이 느껴졌다.

#15

난데없는 왕의 입궐 명령에 전 상선내관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궐내로 들어왔다.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친 선전관 때문에 아래 하인에게조차 어디 간다는 말도 못하고 따라나섰는데,

다른 곳도 아니고 침전인 강녕전으로 끌려오자 혼이 먼저 내뺐는지 정신이 하나 없었다.

조반을 먹고 난 훤은 잔뜩 긴장하고 있는 전 상선내관을 더욱 긴장하게 만드느라 바로 그가

있는 방으로 가지 않고 기다렸다. 곧 올 것이라던 왕이 오지 않자 전 상선내관의 긴장은 더욱

심해졌다. 한참 만에 그의 앞에 운검을 대동하고 나타난 왕은 또 다시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손끝 하나로 자신의 목숨을 꺾을 수도 있는 것이 왕이라는 존재였다.

그런 왕이 바로 눈앞에서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는 것은 보통의 공포가 아니었다.

그래서 전 상선내관의 긴장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렇게 사람의 피를 말리던 침묵의 시간이

지나자 훤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그, 그, 그렇사옵니다.”

“너는 상왕의 친신이 분명하렷다!”

“네? 네. 그러하온데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사오나, 하문하시오소서.”

“내 곧 편전에 나가봐야 하기에 짧게 묻겠다. 7년 전, 세자빈 간택 때.”

훤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앞의 전 상선내관의 몸이 경기를 일으키듯 움찔했기 때문이었다.

그 찰나의 움직임을 훤은 놓치지 않았다.

“세자빈 간택이라는 말만으로도 넌 내가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 알고 있군.”

“무, 무엇을 이르심인지 이 천신 도저히 헤아리지 못 하겠나이다.”

훤은 또 다시 입을 다물었다. 뒷말 없는 왕도 무섭지만,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바닥만 보고

있어야 하기에, 왕의 표정을 감조차 잡을 수 없는 것이 더 오금이 저리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전 상선내관의 숨이 넘어갈 때 쯤 훤의 입이 열렸다.

“그 당시 세자빈으로 간택 된 전 홍문관대제학의 여식인 허연우! 그 허씨 처녀의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가?”

“모, 모르옵니다. 이 천신이 무엇을 알겠사옵니까?”

훤의 한쪽 입고리가 비틀어졌다.

“오호, 이상한 일일세. 허씨 처녀의 사인이 병사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인데 네가 모르겠다니.

그렇다는 것은 병사가 아니라는 말이렷다?”

전 상선내관이 화들짝 놀라 더듬거리며 말했다.

“기, 기억이 나옵니다. 천신이 노쇠하여 기억을 못한 것이온데, 병사였던 것이 이제야 기억이

나옵니다.”

“탄망(誕妄, 거짓되고 망령되다)한 자로다! 누구 앞이라고 감히 그 따위 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훤이 갑자기 소리를 높여 호통 치자 전 상선내관은 더욱더 어쩔 줄 모르고 당황했다.

훤은 목소리를 가라 앉혀 조용히 말했다.

“병사가 아니라면······, 타살인가?”

“아니옵니다! 그 어찌 천부당만부당한 윤언이시옵니까? 그 당시 어의까지 병을 살폈는데,

다른 것 없이 오직 알 수 없는 병이라 하였사옵니다.”

“조금 전까진 잘 모르겠다고 하여놓고 갑자기 너의 기억이 회춘을 하는 것이냐? 어의가 병을

살핀 것까지 기억을 하는 것을 보면, 세자빈 허씨가 죽은 뒤에 상왕께옵서 따로 조사시켜

보고 받은 기무장계(機務狀啓, 비밀리에 조사하여 왕에게 보고하는 중요 문서)도 기억하고 있겠군.”

세자빈 허씨! 그 말을 들은 순간 전 상선내관은 이 일이 단순한 하문이 아니라 취조임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처녀귀로 규정하고 덮어버린 것을 굳이 세자빈이라고 까지 칭하며 말을 꺼내는 것은

그 당시의 사건을 다시 뒤집을 것이라는 뜻이었고, 이미 어느 정도의 타살이란 정황을 확보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왕의 목소리는 위엄이 있었다.

게다가 훤의 비상한 머리는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그 비상한 머리가 이 일을 체계적으로

파고든다면 아니, 이미 파고들었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전 상선내관의 손과 발은 더 이상

떨리지 조차 않았다. 오금도 저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기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세자빈 허씨란 말은 그만큼 무서운 말이었다.

“말하라! 기무장계를 기억하느냐?”

“천신,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진정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비록 가까이 뫼옵는

상선내관이란 자리에 천신이 있었사오나, 상왕께옵서 지시하신 기무장계를 어찌 보았겠사옵니까?

그것은 상왕께옵서만 읽으시었습니다.”

훤의 입가에 미소 한 자락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훤의 옆에 앉아 있던 운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짐작으로 시작했던 것이 기정사실로 밝혀진 것이었다. 전 상선내관은 연우의 죽음이 병사가

아니었음을 실수한 것과 동시에 기무장계가 있었다는 것도 실토한 것이었다. 훤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알겠느니. 넌 집으로 돌아가 있도록 하라. 곧 다시 부를 터이니.”

두려운 마음을 거머쥐고 강녕전을 나오던 전 상선내관은 미처 월대를 다 내려오기도 전에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제야 자신이 한 말실수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넋이 나가

멍하니 앉아있는 그에게 지나가던 내관이 다가와 부축해서 데리고 나갔다.

전상선내관이 물러가고 나자 훤에게 운이 물었다.

“어찌하여 더 캐묻지 않으셨사옵니까?”

“넌 저자를 잘 모르겠지만, 내가 만약에 더 캐묻는다면 분명 혀를 깨물고 자결을 할지언정

선왕께서 묻어버린 일을 발설하진 않을 자다. 짐작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저자를 부른 것뿐이었다.”

이제 짐작이 맞는 것은 입증되었다. 하지만 앞으로 이 사건을 어떻게 조사해 나가야 할지 막막하여

이마를 짚었다. 공개적으로 조사할 수 없는 어려움이 더 막막했다. 그리고 연우의 억울한

사연을 이제까지 알아채지 못한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그 당시 그저 슬픔이라는 자신만의

감정에 취해 주위를 돌아보지 못한 것은 순전히 훤, 자신의 죄였다. 훤은 긴 한숨과 함께

상선내관에게 물었다.

“월은 지금 어디 있느냐?”

“아마도 잠들어 있을 것 같사옵니다.”

“어디에서?”

“성숙청 근처의 행랑이 아닌가 하옵니다.”

“성숙청!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관상감의 교수가 성숙청의 도무녀가 복귀했다던가?

하여간 그 엇비슷한 말을 했던 것도 같은데.”

훤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가 상선내관에게 말했다.

“상선, 성숙청으로 가자.”

“아니 되옵니다. 그곳은 상감마마께옵서 행차하실 곳이 못 되옵니다.

원하시오면 곧 액받이무녀를 불러오겠사옵니다.”

상선내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훤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잠들어 있는 월을 왜 데려오려 하는가? 잠시 들르려 하는 것이니 나서도록 하라.”

성큼 방을 나서는 왕이 무슨 일로 성숙청으로 가려는지 미처 생각할 틈도 없었다.

급히 따라나서며 왕의 빠른 걸음에 보조를 맞추는 것이 더 바빴다.

성숙청 뜰에 홀연히 행차한 왕으로 인해 성숙청의 무녀들은 일제히 당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씨도무녀는 침착하게 홀로 뜰에 나가 큰 절 네 번을 올리고 차가운 땅바닥에 엎드렸다.

장씨를 뚫어지게 보고 있던 훤은 그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그 유명한 장씨도무녀냐?”

“도무녀 자리에 있는 장씨인 것은 맞사옵니다.”

“그동안 도무녀 자리를 비웠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디에 있었느냐?”

“쇤네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묻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지 않사옵니까?”

훤은 왔다 갔다 하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다시 묻겠다. 7년 전에 자리를 비웠다고 들었다. 왜 비웠느냐?”

“쇤네의 신기에 따라 비웠사옵니다.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불운한 일이 있을 거란

하늘의 계시였사옵니다.”

하늘을 들먹인다면 더 이상의 것은 물을 수 없는 것이었다. 차라리 관상감의 교수에게서 들은

‘유생들의 상소에 밀려서’라는 답을 들려주었다면 물을 말이 많았을 것이다. 훤은 말없이

서성이다가 이럴 때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것이 확실할 거란 판단이 섰다.

“7년 전에 관상감 전 세 교수들이 일제히 사약을 청해 자결한 사건이 있었다. 그때 너도 있었을 터.

이유를 아느냐?”

“쇤네도 정확히는 알지 못 하옵니다. 비록 성숙청과 소격서, 관상감의 업무 중 서로 간에 유대가

필요한 부분이 있긴 하나, 상호교환 하는 부분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그 당시

기억으로는 그들의 실수에 의해 상왕께옵서 상심하시었기에 자결한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이 여자는 뭔가를 알고는 있다는 생각이 깊숙이 들었다. 하지만 훤이 현재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성급하게 세자빈 사건 자체를 캐물을 수는 없었다.

그것보다 더 이 여자에게 묻고 싶은 것은 월에 대한 것이었다. 훤은 다시 물었다.

“나의 액받이무녀의 신모가 너냐?”

불쑥 물음이 월에 대한 것으로 바뀌자 장씨는 당황했다. 곧이어 단지 화제를 돌린 것뿐임을

깨달아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하옵니다.”

“어디서 어떻게 만났느냐?”

“길가다 주웠사옵니다.”

“길에서 줍기엔 너무나 어여쁜 아이가 아니냐?”

“어여뻐도 길에서 주운 것은 사실이옵니다.”

“말씨가 한양 말이던데, 한양에서 주운 것이냐?”

“한양에 살았던 아이인지는 모르겠사오나 흘러흘러 온양까지 내려간 것인지 그곳에서 신기가

있는 그 아이를 신딸로 들였사옵니다.”

“신딸로 들였으면 월의 과거도 알아보았을 것 아니냐?”

“신산스런 무녀들의 팔자이옵니다. 신기가 들기 전의 삶이란 것이 어찌 있겠사옵니까?

게다가 그 아인 액받이무녀의 팔자. 하여 이름도 주지 않았사온데, 하물며 그 아이의 과거를

어찌 알아보았겠사옵니까?”

“이해 안 되는 것이 있느니.”

장씨는 지레 놀랐지만 태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훤은 머릿속을 정리하며 생각에 잠긴 채

서성거리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성숙청의 무적은 도무녀가 관리하는 것이라 들었다. 그런데 넌 7년 전에 자리를 비우고 나갔는데,

6년 전 그 아이가 어찌 무적에 올랐느냐? 게다가 성숙청의 무녀는 다른 관청의 무녀들에 비해

누리는 혜택이 많아 그 경쟁이 치열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만큼 신력이 높은 무녀가

선출된다고 들었는데, 그다지 신력이 높아 뵈지도 않는 그 아이가 어떻게 성숙청의 무적에

오를 수 있었느냐?”

“신력이란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오이까? 그 아인 그 아이 나름대로의 신력이 있사옵고,

그 신력을 서찰로 전해 무적에 올리라 하였을 뿐이옵니다.”

“너의 일방적인 권한으로 성숙청 무적에 올렸단 것이군. 그러면 어떻게 무적에 무명자라 올리면서

그 아인 성숙청에 보내지 않았느냐?”

“그건······, 액받이무녀이기에.”

“액받이무녀로 선발된 건 4년 전. 즉, 무적에 오른 지 2년이 지난 뒤로 알고 있다.”

장씨는 말문이 막히자 속에서 욕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대체 왕이 이런 세세한 것까지 왜 묻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월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하기엔 그 질문의 농도가 짙었고,

어찌 보면 월의 신상과는 별 상관이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왕이 무엇을 알고자 하는지

더욱더 파악하기 힘들었다. 훤이 입을 다문 장씨에게로 갑자기 소리를 쳤다.

“나에게 무엇을 감추려는 것인가! 필시 너는 월의 이전 이름도 알고 있고, 그 아이의 사연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숨기려는 것인가?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날 속이려

하기 때문에, 왜 날 속이려는지 알고 싶단 말이다! 난 월의 원래 이름보다, 월의 이름을 숨기는

이유가 더 궁금하다. 숨기는 이유를 말하라!”

“숨기는 것은 없사옵니다. 그러니 이유랄 것도 없사옵니다.”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왕의 호통에 조금도 밀리지 않고 똑 같은 목소리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만으로 이 여자의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태도 때문에 마치 왕이 생떼를 부리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 이상 장씨도무녀를 상대하는 것은 시간낭비란 생각이 들었다.

훤은 일단 지금은 접고 넘어가기로 했다.

“월은 어디에 있는가?”

“저 뒤의 행랑에 잠들어 있사옵니다.”

“안내하라.”

상선내관이 조용히 아뢰었다.

“상감마마, 조강에 드셔야 하옵니다. 지금쯤 대신들이 다 모여 있을 것이옵니다.”

“알고 있다. 잠깐이면 된다.”

훤은 결국 장씨도무녀의 안내를 받아 월이 잠들어 있다는 행랑 앞에 섰다. 초라하디 초라한

행랑의 섬돌 위에는 월의 초라한 짚신이 놓여있었다. 강녕전 월대 아래에 던져져 있던 짚신이

가엾어 아무 말 못하고 쳐다만 보았던 것이 생각났다. 그나마 이곳은 섬돌 위에 신이 올려져

있으니 다행이라 스스로 위안 삼았다. 왕 옆에 서 있는 운의 마음도 쓰라렸다. 도린곁이라더니

그 말 그대로 성숙청 뒤의 이리 어두운 곳에 작은 몸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 한 켠이

칼날에 베인 듯 시큰거렸다. 한참을 방문만 애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훤은 주위사람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해서 걸어라. 많은 사람들의 발소리에 깰라.”

옆에서 서두르는 사람들에 밀려 월이 잠든 방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월이 잠든 자신의 머리맡을 지키는 것처럼 자신도 월의 머리맡을 지켜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밀려있는 만기가 많았다. 훤은 만기를 외면해선 안 되는 왕이었다.

경연청에 들어간 왕을 호위한 운은 바로 물러나 나왔다. 그리고 선전관청 근처의 행랑에 몸을

잠시 누웠다가 깊게 잠들지 못하고 일어났다. 누워서나 일어나서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월이란 여인 때문에 요 근래 깊은 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왕의 옆에 있으면 안 보려 해도 보이는

것이 월이었고, 애써 외면한 눈길만큼 가슴에 들어오는 것도 그녀의 존재였다. 그녀를 가슴에

담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운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왕의 무녀였고, 왕의 가슴속에 있는

여자였다. 결코 자신이 눈길을 주어선 안 되는 왕의 여자였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내는 자신의 주군이었고, 주군이 그녀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해도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사내는 자신이었다. 사내로서 월의 앞에 설 수 없기에 가슴에 담아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운은 잡념을 떨치려 이마에 홍건을 질끈 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헝클어진

마음속을 잘라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검술훈련장으로 달려가 검을 휘둘렸다. 하지만 휘두르는

별운검 아래에 잘려져 떨어지는 것은 월에 대한 마음이 아니라, 월을 외면하려는 자신의 의지였다.

검술연습이 끝나도 마음은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인지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 발걸음을

유혹하여 이끈 곳은 월이 잠들어 있던 행랑 앞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이곳으로 온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월의 낡은 짚신을 보아버린 뒤였다. 왕의 옆에 선 운검의 눈이 아니라 한 사내의 눈이 되어

그 짚신을 보았다. 그리고 그 짚신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손끝으로 짚신을 만져보았다.

왕의 손길은 월의 몸에 닿을 수 있지만 운의 손길이 닿을 수 있는 건 이렇게 벗어둔 차가운 짚신이

고작이었다. 월의 몸에 손끝이 스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때 등 뒤에서 검을 든 자의

기척이 느껴져 운의 본능은 순식간에 별운검을 빼들고 몸을 돌려 검 날을 상대의 목에 겨누었다.

운의 검에 목이 겨누어진 사람은 설이었다. 너무나 재빠른 운의 검에 설의 검은 칼집에서 반도 채

빼어내지 못한 상태였다. 운은 설을 발견하고도 검을 내려놓지 않았다. 오히려 손에 더욱 힘을 줘

칼날을 세웠다. 설은 당황하여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검을 내려놓으시죠? 전 아무 잘못 없으니.”

“언젠가 의빈자가의 저택 앞에서 마주친 적 있었지?”

설은 시치미를 떼고 빙그레 웃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전 의빈자가의 저택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운은 칼날을 설의 목에 더욱 바짝 붙여 넣었다. 설에겐 운의 동작에 조금의 빈틈도 없어 진짜

목을 벨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운은 같은 말을 두 번 입에 담지 않았다. 말 대신

검으로 다시 묻고 있었다. 설도 사실을 털어 놓을 수 없었기에 목에 겨누어진 칼날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돌리며 검을 뽑았다. 설의 몸동작에 운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사람 잘못 보았다 하지 않았습니까!”

설은 더 이상 핑계를 댈 수가 없었다. 갑자기 운의 검이 설의 몸 여기저기를 파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설은 자신의 검으로 운의 검을 막아내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장난으로

겨누는 검이 아니었다. 자칫 실수를 할 시엔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할 만큼 진심으로 겨누는

검이었다. 그래서 왜 운검이 자신을 이렇게 밀어붙이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정신없이

방어만 하던 설에게 공격의 틈이 보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운이 공격할 기회를 준 것이었다.

설은 자신도 모르게 그 공격의 틈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운의 몸은 그 검을 피하며

검 날을 따라 돌아 정확하게 환도를 잡은 설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또 다시 운의 검은 설의

목에 겨누어졌다. 운의 차가운 목소리가 설의 귀를 얼려버렸다.

“어디서 검술을 익혔느냐?”

“젠장! 날 시험했군. 어쩐지 철옹성 같은 틈이 쉽게도 보인다 했더니만.”

설은 왜 운이 자신에게 검을 겨누었는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돌이키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너의 검은 나의 검술 스승의 것이다. 하지만 스승의 제자 중에 여자는 없었다. 어디서 어떻게 익혔느냐?”

“홀로 익혔습니다. 그러니 운검나으리의 검술과 비슷한 것은 단순히 우연일 뿐입니다.

그보다 검 좀 치워주십시오. 이러다 제 목을 베겠습니다.”

하지만 운의 검은 조금도 거둬주지 않았다. 설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러고 있는 건 상관없지만 우리 아가씨께서 무척이나 놀란 것 같은데.”

운이 눈길을 슬쩍 돌려보니 방 앞에 월이 놀란 눈으로 서 있었다. 운은 차분히 검을 거둬 칼집에 꽂고는

월에게 몸을 돌려 섰다. 월은 신을 신으며 운에게 다가왔다.

“여긴 어인 일이시옵니까? 혹여 상감마마께 무슨 일이라도······.”

“아니오. 잠시 지나던 길에.”

“그런데 저 아이와 왜 검을 겨누고 있었사옵니까?”

“······나와 같은 검술을 쓰는 것이 이상하여 물어보았소.”

“우연이겠지요. 저 아인 혼자 장난삼아 검술을 닦은 아이입니다. 어찌 감히 운검나으리와 같은

검술을 쓴다 생각하셨사옵니까?”

옆에서 설이 퉁명스럽게 말을 끼워 넣었다.

“검술은 비슷할지 모르겠으나 실력은 천지차이입니다. 왜 검을 쥔 자들이 운검의 검술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지 비로소 알 것 같습니다. 잠시나마 검을 겨누어 볼 수 있었음이 영광입니다.”

운은 홀로 검술을 익혔다는 말을 믿진 않았지만 더 이상 추궁하지도 않았다. 밝은 햇빛 아래에서는

처음 보는 월의 모습이 다른 생각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용건도 없이

이곳에 얼쩡거린 것이 들킬 새라 얼른 인사하고 물러났다. 왕의 곁으로 돌아오고 있던 도중

운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의빈자가의 저택. 비슷한 검술. 그리고 여종!

무언가 어렴풋하게 짚이는 것이 있었다.

옛날, 어릴 때부터 염의 집은 좋은 검술 훈련장이었다. 홍문관대제학에게 글을 배운 뒤,

어김없이 염과 양명군과 더불어 서로 검술을 익혔었다. 운은 어릴 때부터 검술 스승이 따로 있었다.

그 스승에게서 배운 것을 염, 양명군과 나누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주로 검술을 가르치는 쪽은

운이었고 양명군은 곧잘 그 검술을 따라했지만, 염은 도무지 그 실력이 늘지 않았다.

그때 어느 날 염이 했던 말이 있었다.

“난 도무지 소질이 없나보군. 우리 연우의 몸종은 지나가다 한번 보고도 곧잘 따라 하던데

난 어째 그 아이 보다 못하이.”

“여종이라 하였습니까?”

“자주 숨어서 훔쳐보았는지 내가 혼자 연습하고 있을 때 나에게 와서는, 자네는 이렇게 하는데

난 왜 팔꿈치가 아래로 쳐지느냐 가르쳐주더군.”

옆에서 양명군이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염, 자네가 소질이 없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여아보다 못한 건 또 처음 알았군.

맞아. 자네는 팔꿈치가 자꾸 아래로 쳐져 검 날이 정확하지 못하긴 하지.”

그런 대화가 오고 간 뒤에도 검술 연습을 하면 가끔 누군가가 훔쳐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정체는 몸종이란 아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훔쳐보던 아이의 느낌도 없어져

잊고 있었다.

운은 여전히 발걸음을 멈춘 상태에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 여종이 더 이상 훔쳐보지 않게 된 게

언제쯤인지 하는 것이었는데, 그건 염의 누이가 죽은 그 시점과 일치했다. 아마도 그 즈음에

다른 곳으로 팔려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검술이 비슷한 점과 왜 그녀가

의빈자가의 저택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건

의빈자가의 저택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거짓말을 한 점이었다.

생각에 잠긴 운의 주위로 급한 발걸음의 의금부 관원들이 뛰어다녔다. 그래서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하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의금부 관원들은 급하게 편전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운도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혀 그들을 앞질러 왕에게로 달려갔다. 왕은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지방관리들의

윤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안심한 것은 아주 잠시 뿐이었다. 곧이어 조금 전의 의금부 관원이

급하게 내관을 통해 말을 전달해 왔다. 내관이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왕에게 조그맣게 말했다.

“상감마마, 의금부에서 방금······.”

“무슨 일인데 말을 못하느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 상선내관이 조금 전 사가에서 목을 매고 자결하였다 하옵니다.”

“뭣이!”

훤은 놀랍고 화가 난다기 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그에게 물어 본 것이 대체 뭐가 있기에 자결까지

한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어이없던 감정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차차

더 큰 의문 덩어리가 되어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훤의 머리는 그의 죽음을 기름으로 해서

급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전 상선내관은 많은 것을 숨기기 위해 자결을 했지만, 자신의

자결로 인해 훤에게 드러낸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건 상왕이 세자빈의 죽음을 둘러싸고

조사했던 것이 뭐였는가는 덮었지만, 왜 그것을 덮어버렸는가 하는 것을 죽음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왕이 사실을 덮어야 하는 이유, 그것을 전 상선내관이 자결을 하면서 까지 입을

다물어야 하는 이유, 답은 단 하나 밖에 없었다. 아직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연우의 죽음에

개입한 인물들은 왕족일 가능성이 확실 했다. 세자빈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대역죄였다.

그것이 왕족이란 것은 일대풍파가 일어날 사건이었을 테고, 아무리 왕족이라고 해도 중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렇기에 상왕은 사건을 덮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왕족이 누군가 하는 것인데, 연우의 죽음으로 인해 가장 큰 혜택을 받은 쪽일 테고

이 또한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상왕의 어머니! 외척일파의 지주인 현재 왕대비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심증만 일 뿐 심증을 뒷받침 해줄 수 있는 증거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증거가 되어질 가능성이 있던 전 상선내관은 자결을 해버렸다. 게다가 왕족의 소행이라면

연우의 마지막 봉서에 적혀있던 사실, 홍문관대제학의 손으로 연우에게 약을 먹인 건 설명되지

않는 것이었다. 또 하나 알 수 없는 사실이 있다면 관상감의 전 세 교수들의 집단 자결이었다.

시기를 되짚어보면 연우가 죽은 바로 다음날 자결을 한 것이니까, 세자빈의 사인 조사가

이뤄지기도 전에 그들은 자결을 한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훤의 머릿속은 또 다시

‘왜?’라는 단어만으로 빼곡하게 들어찼다. 그리고 왜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몰아내고 들어오는

다른 단어들은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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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똥누나의 발전소 핑쿠레디 cafe.daum.net/barjunso #16

석강을 위해 경연청에 모인 대신들과 학자들은 서로 간에 눈치만 살피며 학문토론을 했다.

하지만 신경들은 모두 오늘 있었던 전 상선내관의 자결에 쏠려 있었다. 왕의 눈치를 살폈지만

왕은 아무렇지 않게 석강을 하고 있어 먼저 자결한 이유를 묻기가 곤란했다.

그래서 석강이 끝나갈 즈음에 대사헌(大司憲:종2품)이 겨우 물을 기회를 잡았다.

“상감마마. 신, 사헌부의 대사헌 아뢰옵니다.······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하지만 힘들게 입을 연 대사헌의 말을 싹둑 자르고 훤이 먼저 말했다.

“전 상선내관의 자결 때문에 그러는 것인가?”

훤의 태연한 말에 일제히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 뒤의 말을 기다렸다.

“경들도 들었다시피 전 상선내관이 이유도 모르는 자결을 하였다.”

“상감마마, 천신들이 들은 바로는 전 상선내관이 오늘 오전, 강녕전에 들었다가 퇴궐하였다

들었사옵니다. 헌데 자결한 이유를 상감마마께옵서 모른다 하시오면 어찌 하옵니까?”

훤은 조용히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의금부(義禁府, 왕명(王命)에 의해서만 죄인을 추국하는

사법기관)의 관원과 형조(刑曹, 일반적인 중앙사법기관) 관원, 그리고 각각의 대신들을 훑어보았다.

이 일은 순리대로 한다면 형조에서 조사를 해야 했다. 하지만 형조는 친 외척세력이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는 곳이었다. 자칫 일이 잘못되면 연우의 죽음을 캐보기도 전에 외척들의 귀로 흘러들어갈

위험이 있었다. 그렇다고 전 상선내관의 자결을 조사하지 않는 것도 대신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것이었다. 훤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난 진정 이유를 모르겠느니. 하여 의금부에 일러 이유를 조사하라 명하겠노라.”

“신, 형조판서 아뢰옵니다. 어이하여 의금부에 조사를 명하시옵니까? 응당 형조 관할이 아니옵니까?

형조에서 조사하겠사옵니다.”

훤은 그러잖아도 머리가 복잡해서 화가 나 있는 것을 힘들게 평안한 모습으로 가장하고 있었는데

형조판서의 개입으로 그만 화가 뻗혔다. 그렇다고 드러내 놓고 화를 낼 수는 없었기에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거짓말을 했다.

“오늘 오전 전 상선내관을 부른 이유는 내수사(內需司, 왕실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던 곳으로

주로 내시부의 내관들이 겸직했음. 왕실의 사유재산은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특이한 것으로

태조 이성계의 부친대까지의 막대한 재산-함경도의 3분의 2가량이 이성계 조부의 땅이라 불릴

정도의 재력-을 국고로 편입해야 한다는 대신들의 의견을 태종 이방원이 무시하고 왕의 개인재산으로

둔 것인데, 대물림 하면서 그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대했을

것이라 추정함. 한마디로 조선의 왕은 대적할 상대 없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재벌. 백성의 세금을

거둬들인 국고(國庫)와는 구분된 전혀 별개의 것. 그리고 조선전·중기까지는 여자에게도 상속권이

있었기 때문에 왕비의 친정-대부분 부자였음-에서 상속받은 재산도 왕비 개인이 사용하거나

사후에 내수사에 포함되기도 했음)에서 상왕대의 내탕금(內帑金, 왕의 개인자금, 사용했던 용도는

왕의 성격 따라 완전히 달랐음)에 대해 물을 것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아무 대답 없이 퇴궐하여서는

자결을 한 것이었기에 이는 형조 관할이 아니라 응당 의금부 관할이라 여기는 바, 굳이 형조에서

조사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라.”

형조판서 이하, 다른 대신들은 왕의 말에 수긍하며 깊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국고라면 몰라도,

자고로 내수사에 관련한 일에 대해서는 대신들은 그 어떤 개입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법이었다.

특히 내탕금은 더욱 그러했다. 훤은 대략 자신의 말이 먹혀든 것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녕전으로 돌아갔다.

강녕전의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훤은 머리에 쓰고 있던 익선관을 벗어 방바닥에 사정도 없이

패대기를 쳤다. 하루 종일 참고 있던 분노를 침전에 들어서서야 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상선내관이 당황하여 익선관을 바쳐 들었다.

“상감마마, 고정하시오소서.”

하지만 훤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화를 참지 못하고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혹시나 말(襪, 왕의 버선)이 방바닥에 미끄러지지는 않을까 모두가 마음을 졸였다.

왔다 갔다 하던 훤이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던 운에게 침착하게 말했다.

“어차피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구나.”

운은 아무 변화 없이 서있기만 했지만 훤은 운이 자신의 말에 긍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당연히 주위의 어느 누구도 운의 긍정을 느낄 리가 없었다. 그래서 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운 이외에는 아무도 알 길이 없었다. 훤은 상전내관(왕명을 전달하는 내시)

에게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상전은 들으라. 지금 당장 의금부로 가서 모든 의금부관원의 신상이 적혀있는 문부(文簿)를

가져오너라. 일개 나장(羅將, 의금부 소속의 최 하급직 군졸) 하나라도 빠뜨리지 말라.”

성선내관이 조용히 아뢰었다.

“상감마마, 무엇이 그리 조급하시옵니까? 우선 석수라부터 진어하신 연후에 어명을 내리시옵소서.

그리 하시어도 늦지 않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훤은 머릿속 정리를 위해 우선 자리에 털썩 앉았다. 운에게 말한 것처럼 전 상선내관의 자결은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랐다. 의금부에서 아무리 비밀리에 연우의 죽음을 조사한다고 해도 그

움직임이 대신들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 외척들 눈에 당연히 이상하게 보일 것이기에

섣불리 조사를 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 전 상선내관의 자결은 좋은 방패가 되어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는 전 상선내관의 자결을 조사하는 것처럼 하고, 안으로는 연우의 죽음을

조사하는 것. 이것이 훤의 현재 계획이었다. 철저히 물밑조사를 하기 위해서는 믿을만한 자를

의금부에서 골라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운의 두뇌를 투입하고 싶지만 운검은 아주 조금

움직여도 그 움직임의 크기는 다른 자들보다 몇 배는 커 보이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의금부라면 형조보다 승산이 있었다. 그래서 믿을만한 자를 골라내는 이일이 어쩌면 가장 큰

위험일지도 모르기에 마음이 조급한 것이었다. 그리고 막막하기만 하던 일에 돌파구가 생긴 것

같아서 어렴풋하게 생기도 돌았다.

석수라를 마치고, 의금부의 문부를 살피던 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놀랍게도 세자빈 간택

당시 자선당으로 불려왔던 성균관 동장의가 의금부의 도사(都寺, 종5품으로 실무관리)로 승진해

있었다. 처음 그가 과거에 급제했을 때는 아직 상왕이 계실 때였다. 그래서 외직으로만 돌던

그를 훤이 등극한 이후에 혹시나 필요할지 몰라서 왕의 수족 기능을 담당하는 의금부에 발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현재 문신중월부시법(1년에 4번 치르는 관리들의 승진시험)의

의해서 특진을 한번 했고, 또 그 외에도 단계별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올라 실무자인 도사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일을 맡겨도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훤은 그 어떤 자보다 반가웠다. 그리고 문부에 기록된 사항들을 유심히 보니 전최(殿最, 관리들의

평상시 근무성적을 매긴 것)의 성적도 좋았고, 외척세력에 기죽지 않고 의연하게 자기 갈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라, 그런 그를 의금부수장인 판사가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물론 의금부판사도

오래전에 훤이 믿을만한 자로 낙점해두었었다. 어쩐지 연우의 한 맺힌 넋이 도와주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훤은 안심한 표정으로 상전내관에게 일렀다.

“상전, 승정원으로 가서 의금부에 명일(내일)의 윤대(실무관리들의 업무보고)에 의금부도사를

필히 대령토록 논관을 내리라 전하라.”

“네!”

훤은 상전내관이 나가고 나서야 목욕하러 갔다. 뜨거운 목욕물에 푹 담그고 보니 하루 종일

조급했던 마음이 제법 안정이 되었다. 그리고 연우에게 느끼는 죄의식이 조금 덜어진 듯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월에게 아무것도 못해주는 막막한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연우를 생각하며

마음이 아프면 월에게 미안했고, 월에게 깊어지는 감정 때문에 연우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연우의 죽음을 접했을 때 두 번 다시는 설레는 마음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연우만이 마음속 유일한 정비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월이란 존재는 그러한 마음을 송두리째

흩어 놓아버렸다. 훤은 두 여인을 마음에 품었기에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사내놈이라 자조했다.

훤은 하얀 야장의 차림에 긴 머리를 푼 모습으로 월을 맞았다. 의관을 정제한 왕의 모습이 아니라

완전히 자유로운 훤의 모습에 월은 차마 눈을 들기도 황송했다. 훤은 두 팔을 벌려 월에게 말했다.

“이리 오너라. 너의 자리는 나의 품 안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월은 다소곳하게 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훤은 여전히 자세를 바꾸지 않고 말했다.

“어허!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러했지만 어지간히도 왕명을 거역하기만 하는 고약한 여인이로다.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때가 더 좋았느니. 그때는 그나마 알아듣기 힘들긴 했지만 말은 곧잘 하였으니.

지금의 너의 입은 참으로 야속하리만큼 꼭꼭 닫고 있구나.”

어제보다 더 멀어진 거리에 훤은 긴 한숨을 내쉬며 팔을 내렸다. 월이라고 어찌 훤의 품으로

달려오고 싶지 않겠냐 만은 그럴 수가 없기에 더 힘겹다는 것을 훤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생떼로

인해 혹시 월이 더 힘겹지는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훤을 괴롭혔다. 훤은 긴 눈길을 들어

창문에 스며든 달의 흔적을 보았다. 월의 무표정을 보느니 차라리 달그림자를 보는 것이 마음이

덜 아렸다. 훤은 달의 흔적만을 느끼며 조용히 말했다.

“오늘 성숙청에 갔었다. 혹여 들었느냐?”

월의 입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어제 취로정에서 감정을 보였던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였기에,

이젠 두 번 다시 자신의 표정은 보이지 않으리라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연우는 죽어 없어져야했다.

살아나서는 안 되는 존재이기에 무녀, 월의 표정만을 보여야 했다. 그런데 그런 무녀의 표정이

훤의 마음을 괴롭힌다는 것이 더 힘겨웠다. 훤은 달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더 빠를 것이라 여겼는지

다시 말했다.

“그곳 무녀들도 모두 너와 같이 흰 소복차림일 것이라 여겼는데, 아니더구나. 오직 너만이 하얀

소복이구나. 왜 그런 것이냐? 네가 액받이무녀라 꼭 그 옷만을 입어야 하는 것이냐,

아니면 네가 그 옷을 고집하는 것이냐?”

여전히 월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훤은 눈길을 월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애달프게 웃으며 말했다.

“난 하얀 소복이라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세자빈이나 왕비 후보자들 중, 삼간택에서 떨어진

두 여인은 평생을 수절하며 하얀 소복차림으로 지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참 어이가 없는 법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인지 하얀 소복만 보면 그 말이 생각나는구나. 나를 본적이 없어도 나의 여인인······.

원래 왕과 액받이무녀도 만나선 안 되는 것이라던데······.”

훤은 월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변화되는 그 무언가를

보고 싶었다. 어제 무녀가 아닌 여인의 표정을 보았기에 오늘의 갈증을 더욱 심해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왠지 낯이 익는 듯도 싶구나. 어디서 너 같이 어여쁜 것을 보았겠는가 만은 낯이 익어.

처음 보았을 때부터 기이하게도 낯설지가 않았으이. 아마도 인연이 닿으려 그랬나 보다.”

훤이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말을 운은 날카롭게 주워 새겼다. 운도 그랬다. 어쩐지 낯설지가

않은 건 운도 마찬가지였기에 그 낯익은 근원을 찾고자 했고 그것은 운에게 그리 힘든 것이 아니었다.

허 염! 그와 이목구비뿐만이 아니라 분위기, 심지어 말하는 어투까지 닮아 있었다. 곧이어 오늘

확인한 연우의 몸종이었던 여인이 그 근원을 견고히 했고, 순식간에 운의 머릿속에서 연우와

월이 겹쳐졌다. 하지만 운은 머리를 애써 저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연우와 월의 연관성은 짙어졌다. 비록 연우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염을 통해 한 번씩 연우에 대해 들었던 것이 있었다. 그중 일반적인 규방여인이라 생각하기

힘들었던 것이 바로 학식이었다. 때로는 책을 빌려가고자 하면 염이 기다리라고 해 놓고는

그 책을 연우에게서 받아다 줄때가 있었을 만큼 연우는 특이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월도 처음 만나던 날, 방안에 있었던 서책들과 입에서 흘러나왔던 말들이 상당한 학식임을

드러내 놓고 있었기에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었다. 한양 땅에 그 정도의 책을 읽은 사대부가의

여인이 몇이나 될까를 생각한다면 둘을 다른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연우와 월은 같은 나이였고, 연우가 죽은지 일 년 뒤에 월은 무적에 올랐다. 단 일 년의

시간만이 비어있었다. 도리어 연우에서 월로 가기엔 그 일 년의 시간이란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운의 머릿속은 다시 크게 도리질을 쳤다.

‘하지만 연우낭자는 분명히 죽었는데······. 그때 연우낭자를 땅에 묻었단 말을 분명히 의빈자가께서

하셨. 아!’

운은 연우가 죽었을 당시가 기억이 나자 알 수 없는 뜨거운 불기둥 하나가 가슴속에서 솟구쳐

오름을 느꼈다. 그때 염은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연우를 따라 자살이라도 해버릴 것 같아 걱정되어

양명군과 운이 24시간을 따라다녀야 했다. 그때도 분명히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연우의 염습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은 자는 보통 살아날 가능성을 위해

최소한 삼일이라는 기간을 두고 염습을 한 뒤에 땅에 묻는 것이 일반적인 절차다.

그런데 연우가 죽었을 때, 염이 반쯤 미쳐서 웅얼거렸던 말이 있었다. ‘우리 연우를 차가운 땅에

묻어 버렸다. 단 하루도 재우지 않고, 염습도 하지 않고, 죽은 뒤에 바로 땅에 묻어버렸어.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라는 말이었다. 이상하긴 했지만 어렸을 때라 장례절차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구나 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 상황이 되고 보니 이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운의 머리가 자신의 기억과 지금 상황들 사이에서 종횡무진하고 있을

동안에도 훤은 월에게로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계속해서 드러내고 있었다.

“나에게 아무리 많은 내탕금이 있다한들 무엇하겠느냐? 너의 그 짚신을 비단혜로 바꿔주지 못하고,

너의 무명 소복을 비단당의로 바꿔주지 못하는데. 어찌 입고 신는 것조차 신분의 규제를 둔 것인지······.

너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나의 이 비단야장의가 미안하구나.”

훤의 머릿속은 운과는 달리 월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를 필사적으로 궁리했다.

그 무엇이라도 좋았다. 줄 수만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받아줄 수 있는 것이라면······.

이윽고 고개를 상선에게로 돌려 말했다.

“상선, 가서 나의 가야금을 가져오너라. 다른 것은 줄 수 없으니 선율이나마 주고 싶구나.”

월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 흔들림을 훤은 미처 보지 못했다. 훤의 가야금 솜씨가

탁월하다는 것은 연우였을 때 가슴 설레며 들었던 말이었다. 그 실력은 가야금이 뛰어났다는

세종대왕의 명성을 넘어설 정도라며 오라비인 염이 해준 말이기도 했다. 훤의 서찰에도 간간히

연우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글이 적혀있었고 언젠가 만나는 날이 오면, 그런 꿈같은 날이 오면

듣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다. 비록 무녀의 몸으로서 일망정 그런 꿈같은 날이 왔는데도, 이날이

행복하지가 않았다. 한 날이 가면 그 가는 한 날 만큼 슬픔은 더해져 가고 설움은 곱절로 깊어져

가는 듯 했다. 그래서 자신의 욕심이 과한 것이라 스스로를 비난하는 수밖에 없었다.

훤도 상선내관이 가져온 가야금 줄을 고르며 연우를 떠올렸다. 언젠가 만나는 날이 오면,

그런 꿈같은 날이 오면 연우 앞에서 자신의 가야금 소리를 들려주리라 생각했었다. 서체나 글은

연우 앞에서 뽐낼 수가 없었기에 연우가 못한다는 가야금만큼은 자랑할 수 있을 것이라 더욱

열심히 연습했던 기억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비록 연우에겐 끝끝내 들려주지 못했지만, 월에게는

들려줄 수 있어 다행이라 여기기로 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훤의 손끝아래에서 명주실로

된 가야금 줄이 맑은 음성으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한 음씩 줄을 뜯을 때 마다 월의 몸은 훤에게서

멀리 앉아 있었지만, 연우의 혼은 그 음에 이끌려 어느새 훤의 바로 앞으로 다가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훤은 연주하던 간간히 월을 힐끔거리며 보았지만 월의 모습은 아무 변동이 없었다.

그래서 혹시나 월이 가야금 선율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한곡을 끝내고

훤은 월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떠하냐?”

월은 훤에게 대답을 해야 했다. 왕의 음악을 듣고 의례적인 답을 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님을

알고 있기에 감정 없는 ‘뛰어나십니다.’란 답을 올려야 했다. 그것이 무녀로서의 답이었다.

월은 입술을 조그맣게 벌렸다. 그런데 그 작은 틈으로 울컥하는 연우의 울음이 먼저 올라오는

바람에 급하게 입을 앙다물었다. 그것만으로는 올라오는 울음을 막을 수가 없어서 자신의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더 이상 감정을 보이는 것은 스스로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아랫입술이 이에 잘려져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참아야한다며 힐책했다. 훤은 월의 앙다문

입술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고 겉으로는 따뜻하게 말했다.

“구슬픈 음을 뜯었는데 아무도 내 가야금소리에 눈물을 흘리는 자가 없구나. 이제껏 내 솜씨를

칭찬했던 이들은 모두가 아첨이었단 말인가? 아첨이라도 좋다. 왕의 가야금 소리에 울어주는 것,

그 또한 충정이니라. 지금 이후로 흘리는 눈물은 내 가야금 선율에 의한 것이니 그 눈물의 연유를

묻지 않을 것이다.”

그제야 월의 왼쪽 눈에서 굵은 눈물 한 점이 떨어져 내렸다. 아무 변화 없이 오직 눈물 한 점만이

떨어져 훤의 마음에 파문을 그렸다. 훤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무표정한 표정보다는

떨어져 내리는 눈물이 덜 서글펐다. 그래서 자신이 덜 서글프기 위해 더 많은 눈물을 흘려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가야금 줄을 뜯었다. 눈물은 월이 흘리지만 울음소리는 가야금이 대신

내어 주었다. 그리고 가야금의 울음소리는 훤의 손끝에 의해 만들어졌다.

월은 훤의 잠든 옆을 지키다가 파루의 북소리가 울리는 소리에 훤이 잠에서 깨어나자, 인사를

올린 뒤 물러나 성숙청으로 돌아왔다. 설이 나와 월을 맞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불어나는

슬픔에 자신의 작은 방으로 몸을 숨겨도 그 슬픔까지 숨겨지지 못했다. 파루의 북소리에 장씨도

일어났는지 월의 방으로 들어왔다. 월이 장씨를 향해 무거운 미소를 보이자 장씨는 그만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미소가 징그러워 안 오려하였는데······.”

월은 여전히 무거운 미소로 차분하게 말했다.

“신모님이 말씀하신 죽느니 만도 못한 일이란 것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습니다.

사람의 감정이란 것이 어이하여 보태어지기만 하고 덜어지지 않는 것이온지, 소녀의 미진한

머리로는 알 수가 없음입니다.”

“아직까지 덜어지지 않고 보태어지는 것이라면 더 긴 세월이 남았단 뜻이오. 앞으로 흘릴 눈물이

이제껏 흘려온 눈물보다 많이 남았단 뜻이오. 이 시간이 흐르고 덜어지는 날이 오면 그땐 흘릴

눈물이 흘렸던 눈물보다 적게 남음을 뜻하는 것이니. 그러니 쉬엄쉬엄 서러워하오.”

월의 턱이 서러움에 경련이 일었다. 혹시나 울음이 나올까 한숨조차 내쉬지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신모님. 신모님의 주술이 그리도 뛰어나시오면 소녀의 눈을 감게 해주시면 아니 되올련지요.

상감마마의 기억 속에 월을 지우고 소녀를 죽여주시면 아니 되올련지요. 연우도 가고, 월도 가면

상감마마가 가여우시니 기억이 없어지면 괜찮을 것입니다. 그것이 안 된다면 소녀의 기억 속에

연우를 지워주시면 아니 되올련지요?”

설은 자신의 거친 손으로 연우의 여린 손을 잡았다. 옆에 있어도 아가씨의 짐을 덜어줄 수 없기에

같이 서러워졌다. 어떻게 해서든 지켜주고 싶지만 연우가 짊어진 짐 덩어리는 온전히 연우의

어깨위에만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짐 덩어리란 것이 솜 덩어리로 된 것인지 물을 흡수한 양

점점 더 지탱하기 힘들어져가고 있는 것이 설에게도 보였다. 그래도 힘들게나마 살아가고 있던

연우가 오늘 죽음을 입에 담았다. 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살아있는 자신의 손에 힘을 줘

아가씨의 손을 더욱 꽉 쥐는 것 밖에 없었다. 그렇게 살아있는 기운을 나눠 갖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연우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이어졌다.

“같은 한양 땅 아래에서 그리도 보고 싶던 어머니도 못 뵈고, 우리 오라버니도 못 뵙니다.

우리 어머니는 많이 늙으시었는지, 우리 오라버니는 더욱 아름다워지셨는지 소녀의 눈으로

뵈옵지 못합니다. 불초한 이 여식은 아버지 무덤이 어디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그리 세상을

버리셨을 때 임종조차 뵈옵지 못하였습니다. 소녀가 먼저 가 있는 줄 알고 저 세상에서 소녀를

찾아 헤매이시진 않을까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상감마마께 그리웠노라 말씀 올리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이 연우의 기억들이 사라지면 소녀의 감정도 덜어지겠지요. 지울 수만 있다면

지워주시면 아니 되올련지요.”

“그럴 수만 있다면 이 잡것의 머릿속부터 지우고 잡소.”

장씨는 허적허적 일어나 월의 방을 나왔다. 눈물이 베갯잇을 적시더라도 눕게 두어야 했기에

설도 방을 나왔다. 설은 애꿎은 환도를 꺼내 두어 번 공중을 갈랐다. 설이 환도를 휘두르는 것은

설도 베어야 하는 그리움을 향해서 인 것을 장씨는 알기에 조용히 허공에게 말하듯 뇌까렸다.

“쯧쯧. 눈이 불꽃을 향해 가면 어찌 되간대? 애시당초 혼자만이 품었던 감정. 그러니 그리움이란 것도

혼자만의 것이어니······.”

#17

동이 터오기 전, 구름만 어두운 하늘을 가득히 메우더니 어느 사이엔가 눈을 뿌리기 시작했다.

한번 내리기 시작한 눈은 시나브로 쌓여 왕이 편전으로 나설 즈음에는 급히 어도(御道,궐내에

왕이 다니던 길)를 비로 쓸어내야 했다. 훤은 어도로 내려서며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언제부터 내린 눈인가?”

“상감마마께옵서 기침하신 이후였사옵니다.”

내관의 답에 훤은 비로소 안심하며 중얼거렸다.

“그러한가? 다행이구나. 발은 젖지 않고 갔구나.”

훤은 눈을 본 순간 제일 먼저 새벽에 성숙청으로 돌아가려고 월대 아래까지 버선발로 내려섰을

월의 발이, 눈이 스며들어 시리진 않았을지 부터 생각난 것이었다. 그리고 젖지 않았을 거라

여기면서도 마음은 이미 눈에 젖어 시려져 있었다. 지금 이 눈이 계속 쌓인다면 오늘밤 침전으로

오는 월의 짚신은 이 눈을 밟게 될 것이고, 짚신이란 것은 눈을 막아주진 못할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눈이 쌓여 다니는 길이 불편하지 않게 궐내의 모든 눈을 수시로 쓸도록 하라. 굳이 어도만이 아니라

신민(臣民)이 다니는 곳도 쓸어, 어느 누구 하나라도 눈에 발이 시리지 않도록!”

“분부 받자와 거행하겠나이다.”

훤은 발끝에 눈 하나 묻히지 않고 천추전으로 들었다. 온돌로 따뜻하게 데워져 있는 온기에 조차

월이 잠든 방의 온돌을 걱정했다. 북쪽 차가운 행랑에 볕이라고는 발걸음 하지 않을 것 같았던

그 방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온돌을 데울 장작은 제대로 있는지도 걱정스러웠다.

당장 달려가 월의 이불 아래에 손을 넣어 확인해 보고픈 마음에 자리를 박차고 한번 일어났지만,

눈앞에 상참의를 위해 새벽부터 등청해 있는 대신들로 인해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운은

상참의가 시작되자 어지러운 마음까지 거두어 물러나 나갔다.

훤은 조강을 간략하게 끝낸 뒤, 대신들을 향해 어느 때 보다 더 위엄을 갖춰 말했다.

“소격서의 제조(소격서에서 가장 상급 직위, 종2품) 들어 있는가?”

갑작스런 왕의 호명에 소격서제조뿐만이 아니라 모든 대신들이 놀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소격서제조는

화관무직(華官?職, 이름이 높고 녹이 많은 벼슬. 즉, 중요관직)이 아니기 때문에 왕으로부터

멀리 앉아 있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신, 소격서제조 들어 있사옵니다. 윤언하시오소서.”

“원래 소격서에선 새해 정월달 첫 신일(辛日)에 원구단(圓丘壇)에서 정기적으로 제천의례를

주관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 새해에는 반드시 행하길 명하노라.”

“네에?”

소격서제조 뿐만이 아니라 모든 대신들, 심지어 옆의 내관들까지 놀라 일시에 쥐 죽은 듯이

고요해 졌다. 그리고 방금 자신들의 귀가 무엇을 들었는지 의심이라도 하는 듯 서로의 눈치를

봤다. 사헌부의 대사헌이 큰 목소리로 간청했다.

“주상전하! 어명을 거두어 주시오소서.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분부이시옵니다. 원구단이라니요!

그러잖아도 소격서를 혁파하지 않고 둔 것만으로도 현성지군의 뇌명에 누가 되고 있사온데,

어찌 원구단에서의 제천의례를 명하시옵니까?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왜 아니 되는가?”

감정이 실리지 않은 조용한 왕의 목소리에 신료들은 소름이 돋았다. 차라리 화를 내며 물어보았다면

거기에 상응해 답을 올릴 수 있겠지만 감정 벗은 목소리는 그 어심(御心, 왕의 심중)을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수긍하고 물러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왕이 물은 만큼만

답하는 것. 이것이 지금 현재의 최선이라 생각한 대사헌이 용기 내어 답했다.

“조선은 명나라에 제후의 예를 취하고 있습니다. 제후의 나라에서 감히 원구단 제천의례를 행할 수

없음이옵니다.”

“그렇다면 원구단에서 제천의례를 행하는 것은 누구여야 가능한가?”

너무나 당연한 것을 되묻는 왕도 두려웠다. 하지만 대사헌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것은 천자이신 명나라의 황제폐하만이 행할 수 있사옵니다.”

“음, 그렇군. 알겠다. 천자라······. 난 그럼 무엇인가? 경들이 충성을 맹세한 나는 그럼 무엇인가?

그렇다는 건 경들은 조선의 왕인 나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명나라의 왕에게

충성한다는 것이렷다?”

조선의 왕과 명나라의 왕을 동격으로 놓고 말하는 훤의 목소리는 약간의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대사헌은 자신이 서서히 훤의 술수에 말려들고 있음을 느꼈지만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 뜻은 결단코 아니옵니다. 천신들은 주상전하의 신하들이옵니다. 그것은 진실로 변함이

없는 것이옵고, 단지 제후의 예를 취하겠다 맹세한 태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조급하게 말하는 대사헌과는 달리 훤의 말은 여유로 가득했다.

“무슨 말인지 알았느니.······헌데 제후국이 되겠다 맹세하신 그 태조대왕께옵선 매년 원구단에

제천의례를 올리시었는데 이는 어찌 된 것인지······. 원구단에 제천의례를 올리는 것은 천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면 태조대왕께오선 명나라의 황제와 똑같은 천자란 뜻이 아닌가?

아, 그리고 태조대왕을 상왕으로 두셨던 정종대왕께옵서도 매년 원구단에서 제천의례를 올리시었고,

태종대왕께오서도 그러하시었지? 이는 어찌 설명할 텐가?”

“하오나 그 당시엔 국가의 의례가 규정되기 전이었사옵니다.”

“의례가 규정되기 전이었기에 그 당시의 제천의례는 잘못되었다? 그렇다는 것은 태조대왕!

정종대왕! 태종대왕! 이 상대왕들이 하신 모든 것은 잘못되었다? 그 당시에도 제후국의 예가

있어 명나라에 조선백성들의 피를 짠 조공과 조선의 딸인 어린 처녀를 공녀로 보내었거늘!

이것을 본다면 분명 그 당시에도 제후의 예라는 것이 있었다. 헌데도 원구단에서의 제천의례는

성대히 행하여졌다. 어찌 설명할 텐가?”

어느덧 왕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에 밀릴 새라 대사헌도 목소리에 힘을 가했다.

“이젠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있사옵고 모든 의례는 그에 따르고 있사옵니다.

국조오례의에는 원구단에서의 제천의례는 규정한 바가 없사옵니다.”

훤의 말이 일시에 사라졌다. 말문이 막혀서는 절대 아니었다. 신하들도 그것을 알기에 더욱

긴장되었다. 한 박자의 말을 쉬고 뱉어낼 말은 신하들을 향한 공격이 담겨있을 거란 것을 직감

할 수 있었다. 훤은 괜히 서안 위에 놓인 서책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신하들의 분위기를 읽었다.

이윽고 훤은 높낮이가 일정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설명하듯 말했다.

“그 국조오례의를 편찬하라 명한 분은 세종대왕이시었다. 집현전의 학자들과 더불어 같이 토의하여

그 절충안을 찾으시면서 참고했던 것은 당나라와 명나라의 예서도 있었지만 고려까지의 예서인

<고금상정례>도 참고 되었다. 성종대왕에 이르러 완성이 되긴 했지만 모든 기틀은 세종대왕 때

만들어져 있었고, 세조대왕 땐 그것을 더욱 견고히 하여 거의 완성단계였다. 하지만! 세종대왕과

세조대왕, 이 상대왕들께오서도 원구단에 제천의례를 행하시었다. 국조오례의에 규정한 것과는

상관없이!”

훤은 말을 멈추고 파평부원군을 뚫어지게 보았다. 하지만 대신들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왕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리도 제후의 예를 따지고자 한다면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존재자체가 제후의 예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그러기에 명나라의 사신이 오면 제일 먼저 경국대전부터 숨기느라 바쁜 것이거늘.

조선의 가장 상급법전은 중국의 법이 아니라 바로 경국대전! 헌데 경국대전은 되는데 제천의례는

아니 된다? 허참! 이해가 안 되어이.”

파평부원군은 왕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해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평소 자신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위였다. 그런데 까닭모를 시선을 받으며 왕이 자신의 편을 들어달라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와 닿는 시선이 차갑기 그지 없었기에

더욱 머리가 복잡해져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이런 당황을 파악한 훤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묻겠다! 파평부원군이 답하라! 국조오례의의 마지막 단계에서 누구의 손이 거쳐 갔는가? 그리고

경국대전이 완성되기 직전의 갑오대전은 누구의 손을 거쳤는가?”

자신을 지목 당하자 그제야 어리둥절해 있던 파평부원군의 심장에 시퍼런 칼날이 날아와 꽂힘을

느꼈다. 이제껏 왕이 말한 원구단이니, 제천의례니, 국조오례의니 하는 말의 속뜻은 바로 왕의

장인인 국구를 향해 있는 말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법과 의례의 기반이 되는 경국대전과 국조오례의는 둘 다 성종 때 완성이 되었다.

하지만 경국대전의 모체인 갑오대전과 국조오례의는 성종이 어렸을 때, 정희왕후 윤씨의 수렴청정을

받을 당시 완성된 것이었다. 즉, 당시의 성종의 장인이었던 한명회(예종과 성종의 장인. 세조의

왕위찬탈의 일등 공신이었고 조선시대 국구를 논할 때 가장 대표적인 인물)의 손을 거쳐 간 것이었다.

정희왕후는 세조의 정비로 아래에 의경세자와 해양대군, 의숙공주를 두었다. 그런데 의경세자는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리다가 월산군과 자을산군을 남겨두고 죽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인 해양대군이

세자에 책봉되어 5살 연상인 한명회의 큰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례를 올린 다음해에 죽고 아래의 아들 인성대군은 유년기에 죽어버렸다. 해양대군이 바로,

세조가 죽고 19살의 어린 나이로 왕의 자리에 오른 예종이었다. 하지만 이때 예종에겐 한백륜이란

다른 장인이 있었다. 그리고 한명회의 큰 딸에서가 아니라 한백륜의 딸에게서 제안대군과

현숙공주를 두었다. 그런데 예종도 즉위한 뒤, 14개월 만에 알 수 없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나마도 즉위기간 대부분을 정희왕후의 섭정아래에 메여있었다. 예종이 갑자기 죽자,

차기 왕은 순리대로라면 제안대군이 되어야 했지만 한명회는 정희왕후와 결탁하여 또 다른 사위인

자을산군을 왕으로 앉혔다. 제안대군이 4살이라 어리다는 핑계였지만, 자을산군도 13살의 어린

나이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가 곧 성종이었다. 무엇보다 자을산군은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이었고

이보다 나이가 많은 장손인 월산군이 버젓이 살아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분 없는 자을산군의

왕 추대는 순전히 한명회가 국구로 세도를 이어가려는 술수였던 것이다. 그런데 한명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월산군이 아니었다. 상대는 세종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아들로

세조의 총애를 받을 만큼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인물인 구성군이었다. 구성군은 세조가 ‘이시애의

난’ 때 사도병마도총사로 임명했고 그는 이 난을 평정하고 돌아와 오위도총부 총관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영의정으로 특서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28살이었다. 예종이 죽자 한명회는 종실의

중심축인 구성군이 그 어떤 존재보다 두려웠기에 성종을 왕좌에 올린 뒤 1년도 되지 않아 그에게

유배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만든 법이 왕족의 관리등용 금지법이었다. 한명회라는 국구의 세도

영위를 위해 왕권강화란 미명 아래에 만들어진 이 법은, 왕 이외의 종친들은 물론 왕의 사위인

의빈까지도 관리등용 금고법으로 갑오대전에 명시되었고 이것이 그대로 경국대전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와 반대로 국구의 막강한 권한은 법으로 보장해두었다. 국조오례의에도 제후의 예를

핑계 삼아 왕의 신성권인 원구단의 제천의례를 없애고, 왕권을 떨어뜨리는 그 아래 중사 제례부터

명시했다. 이 모두가 성종이 성인이 되어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이어받기 전, 7년 동안 장인

한명회의 섭정 아래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왕권을 약화시키고, 국구의 권한을 강화한 폐단. 훤은 그것을 파평부원군에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원구단에서 제천의례를 거행하겠다는 것은 왕의 신성권을 되찾아 왕권을 강화하고,

아울러 국구의 세도를 약화시키겠다는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그런데 훤이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것은 다른 왕이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것과는 철저하게 다른 것이었다. 훤은 어릴 때부터 세종대왕을

좋아하여 세종이 빼어났다는 가야금을 따라 배웠을 정도였다. 그런 세종대왕을 좇아 왕권을

강화해 나갈 것이고, 이는 세조대왕처럼 무단강권식 왕권강화가 아니라 문치주의식 왕권강화를

해 나갈 것이란 짐작을 가능하게 했다. 훤의 학문 깊이에서 오는 추측도 이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이렇게 되면 국구뿐만이 아니라 국구의 힘으로 관직에 등용되어 있는 외척일파를 모조리 밀어내고

학문으로 무장된 새로운 인재들을 등용 할 것이란 뜻도 되었기에 파평부원군의 마음은 분노로

들끓었다. 자신을 손쉽게 쳐내기 위해 자신의 딸인 중전을 여지껏 처녀귀신으로 두고 있는 것이란

원망도 섞였다. 어차피 왕이 건강해도 외척일파를 완전히 몰아내기 전에는 중전과의 합방은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국구와 세자의 외조부는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차라리 왕의 건강이 나빠져 조정에 관여할 수 없게 되는 것이 파평부원군에겐 더 도움이

되었다. 한명회가 경국대전에 명시해 놓은 국구의 막강한 권한! 이것이 현재 파평부원군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 가장 든든한 힘이었다.

훤은 다시 조용히 파평부원군에게 물었다.

“어찌 답이 없는가? 마지막에 누구의 손을 거쳤는가?”

“정희왕후이시옵니다.”

일부러 국구인 한명회는 거론하지 않고 답했다. 정희왕후가 명실공이 수렴청정을 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내 훤이 이 답을 비웃으며 말했다.

“국구! 그대가 조금이라도 생각이란 것을 한다면 그리 답하진 않았을 것인데. 정희왕후께오선

한자를 모르시는 분이었다. 하여 승정원의 승지들이 한문으로 적혀있는 모든 공문서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청단을 받고, 그 청단을 다시 한문으로 번역하는 번거로운 일을 하였다. 헌데 한문으로 된

국조오례의와 경국대전의 분량이 어찌되는데 그 많은 것의 손을 보셨단 말이냐?”

비록 정희왕후가 한명회와 결탁해 성종에게 옥쇄를 넘기긴 했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제안대군을

세종의 일곱 번째 아들인 평원대군의 양자로 입양시키고 월산군, 귀양 가 있던 구성군까지

신분을 보장해주면서 지켜낸 인물이었다. 그리고 왕권도 성공적으로 지켜낸 뒤 성종이 20살이 된

그해 더 이상의 정사에 관여하지 않고 깨끗이 물러나, 성종이 성군이 될 수 있는 초석을 닦아놓은

인물이기도 했다. 성종 때 조선의 모든 제도와 문물이 확립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을 이룩한 사람은

성종이라기보다, 정희왕후에 가까웠다. 성종이 정사를 주관하기 시작한 뒤, 세조의 측근인

훈구세력을 쳐내고 사림세력을 끌어들일 때도 그녀는 그 어떤 제재 없이 성종의 뒤에서 힘이

되어주었다. 이와는 달리 자신의 할머니는 상왕의 정사에도 사사건건 개입을 했고, 그런 왕대비에게서

빼앗듯이 왕권을 이양 받은 훤이었다. 그래서 정희왕후를 들먹였기 때문에 훤은 비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명회로부터 그나마 왕권을 지켜낸 정희왕후를, 현재 왕대비와 같은 통속인

파평부원군이 감히 입에 담아선 안 되는 것이었다. 훤은 또 다시 사헌부의 대사헌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요즈음 지방관의 윤대를 받으며 느낀 바로는 유향소가 원활하게 시행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특정 일파의 위세 아래 탐관오리가 득세를 하니 어찌 유향소가 제대로 시행될 수 있겠는가?

허니 의정부에선 이를 다시 한 번 검토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훤은 외척일파와 사림세력 모두 말을 잃은 것을 보고는 빙그레 웃으며 경연청을 나갔다. 원구단의

제천의례가 성리학에 반하는 것이라 한다면 유향소는 오히려 일반백성들에게까지 성리학의

교리를 전파하는 기구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울러 사림세력이 정계로 진출하는 발판이 되기도

하는 지방자치기구가 유향소였던 것이다. 또한 원구단의 제천의례가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라면

유향소는 이와는 정반대 성격인 왕권견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로서 왕의 심중은 확실해졌다.

왕권을 강화하기 전에는 사림들이 정계로 나와 주지 않을 것이기에 우선 왕권부터 강화하여

전 홍문관대제학의 죽음으로 숨어버린 사림세력을 정계로 끌어와 외척일파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다시금 사림세력 중심의 왕권강화로 재편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기에 왕의 원구단 제천의례에

가장 먼저 반대를 들고 일어나야 할 사림세력은 목소리를 낮춰야 하는 상황이었고, 이에 격분하여

들고 일어나야 하는 쪽은 오히려 외척일파가 되어버렸다. 왕이 나가고 난 뒤에도 각자 한참을

생각하던 신료들은 외척일파와 사림세력으로 나뉘어 삼삼오오 흩어졌다. 모두가 정신없이

이 일에 대한 대책을 논의해야 할 판이었다.

상선내관은 왕이 산책하는 것을 뒤따르며 내내 불안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훤은 눈이 내리는 것도, 추위도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상감마마, 산책하시기에 좋지 않은 날씨이옵니다. 게다가 옆에 운검도 없이 위험하옵니다.”

“그러한가? 하하하.”

훤은 웃으며 상선내관을 보았다. 새파랗게 질린 상선내관의 표정을 보고는 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상선은 너무 생각이 많아. 생각이 많으니 걱정도 많지. 상선내관의 자리는 생각이 많으면

아니 되는 것이야.”

“하오나······. 조정이 많이 시끄러울 것이옵니다.”

“그래야지. 시끄러워 지지 않으면 곤란하지.”

훤은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눈을 보았다. 시끄러워져야한다. 그래야 연우의 죽음을 조사하러

다닐 의금부도사의 움직임이 원활해질 테고, 그만큼 빨리 조사가 가능해질 것이었다. 외척들은

자신들의 세도가 풍전등화의 기로에 놓여있는데 일개 의금부도사에게 신경을 쓰진 못할 것이니,

의금부도사의 움직임을 그저 전상선내관의 죽음을 캐고 다니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말 것이었다.

훤은 이번의 소란을 던져 세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겠다는 속셈이었다. 연우의 죽음에

직간접으로 왕대비뿐만이 아니라 파평부원군도 개입되어 있을 거란 확신에서 오는 결정이었다.

그들이 원구단의 제천의례를 막느라 진을 빼고 있는 동안, 그들의 뒤통수 바로 뒤에서 세자빈

사살비리를 캐내어 그들을 일시에 몰아내리란 계획. 하지만 거의 도박에 가까운 위험이 있었다.

그들을 몰아내고 그들 자리를 메워줄 사림세력 없이는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그래서 불안하기는

상선내관보다 왕이 더 심한 상태였다. 훤은 자신의 불안을 달래 듯 먼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의 스승은 지금 이 나에게 어떤 미소를 보여줄까나······.”

산책은 아주 잠깐 동안이었다. 다시 발길을 돌려 조계를 위해 천추전으로 들어갔다. 승정원의

승지들은 아직까지 자신들의 의견을 조율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에게 어떠한 발언도 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자리에서 정사처리에만 신경을 쓸 뿐이었다. 훤도 조금 전의 조강에서의

선포는 머리에 없는 듯이 보였다. 조계가 끝난 뒤 실무관리들의 윤대가 시작되었다. 왕의 앞에

두 줄로 서로 마주보고 앉은 실무관리들 사이에 관상감의 지리학교수와 의금부의 도사도 보였다.

먼저 관상감의 지리학교수에게 왕이 말했다.

“지리학교수! 간만이구나. 관상감에선 어떠한가?”

“연말이라 다른 교수들은 바빠서 며칠 동안 퇴궐도 못하고 있기에 천신만이 송구하옵게도

상감마마를 뵈옵니다.”

“그렇겠군. 달력을 편찬하여 백성들에게 나눠주려니 바쁜 것은 당연하지. 아울러 새해의 시간과

천문을 재계산하기만으로도 바쁠 것이야. 노고가 많구나.”

관상감의 명과학교수가 바쁘다는 것만큼 훤의 어깨가 가벼운 것도 없었다. 그가 바쁘기에 중전과의

합방에 대한 압박을 덜 받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왕이면 관상감에선 쭉 바빴으면 하는

것이 훤의 진심이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지리학교수가 들었으니 이에 준하여 말하겠다. 지도편찬은 국가의 안위가 달린 문제다.

허니 면밀한 지도편찬을 하되, 기밀은 철저히 하라. 그리고 현재까지 보유하고 있는 지도를

다음 달까지 나에게 보고토록 하라.”

“즉시 거행하겠사옵니다.”

“그리고 천문학교수와 명과학교수에게 다음 한 해 동안의 날씨를 명확하게 추산해 보고하라 일러라.”

“알겠사옵니다.”

다른 실무관료들을 거쳐 드디어 의금부도사의 차례가 되었다. 훤은 말로 하지 않고 종이에 글을

써서 그에게 전하도록 했다. 어명을 적은 문서에는 전 상선내관의 자결을 조사하라는 어명이

적혀있었고, 수결(手決, 일종의 sign. 관직에 있던 사람이 도장과 같은 격으로 쓰던 부호 같은

것으로 현재의 서명과 같은 의미였음.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독특한 문화) 위에 옥새까지 명확하게

찍혀있었다. 이를 읽은 의금부도사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을 말로 해도

되는데 글로 써서 내린 것도 이상하고, 옥새는 그렇다고 쳐도 왕의 수결까지 써넣은 것이

이상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말했다.

“분부 받잡고 성심껏 조사하겠사옵니다.”

내관은 그 문서를 다시 사관에게 가져가 사초에 초록하게 한 뒤에 의금부도사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문서를 품안에 고이 넣었다. 윤대가 끝나고 천추전을 나서는 의금부도사를 왕의 사령이

눈으로 잡았다. 그는 의아하게 여기면서 다른 사람 눈을 따돌리며 그를 따라 갔다. 아무도 없는

외진 곳에 도달한 사령은 그제야 주위를 한번 살핀 뒤, 의금부도사에게 품속 밀지를 꺼내주고는

등을 돌려 섰다. 의금부도사는 밀지를 읽고 깜짝 놀라서 사령의 뒷모습 보았다. 왕의 밀지 내용은

전 상선내관의 자결을 조사하는 척 하면서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가 죽은 허씨처녀의 죽음에

대해 비밀리에 조사하여 매일 왕에게 보고하라는 어명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여러 설명도

적혀있었다. 처음에 의심스러웠던 눈은 왕의 수결과 옥새를 확인하고는 단단해졌다. 조금 전

천추전 안에서 받은 문서에 있던 수결과 옥새와 똑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절대 가짜는 아니었다.

사령이 인사하고 가고 난 뒤에도 의금부도사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근처의 아궁이에 왕의 기밀문서를 넣어 태웠다. 훤이 마지막에 태우라는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의금부로 돌아갔다.

운은 잠에서 깨어나 선전관청으로 갔다. 그곳도 어김없이 왕의 선포에 소란해져 있었다.

처음에 원인을 몰랐던 운은 다른 선전관들의 말을 듣고 사태를 파악했다. 그리고 이내 왕의

의중을 파악했다. 다른 선전관들은 운에게 정황을 설명하면서 운의 표정에서 조금이나마 왕의

의중을 훔쳐보자 했지만 운검의 표정은 왕보다 더 변화가 없었다. 운은 그 소란과는 상관없다는 듯

훈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눈에 아랑곳 하지 않고 검술 훈련을 끝낸 뒤, 운은 왕의 곁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연우와 월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이것을 확인

하는 방법은 염에게로 달려가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가장 간단하면서도 명확한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염에게 드러내 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아직까지 연우를 생각하며 슬퍼하는 염에겐

연우가 월로 살아있어도 비극이었고, 월이 만약에 연우가 아니어도 슬플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염이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하게 알아보아야 했다. 운은 마구간으로 달려가 이전에

왕이 하사한 자신의 말인 흑마를 타고 눈발을 가르며 염의 집으로 달려갔다.

달리는 말 위에서 왕의 옆을 비우는 운검의 마음은 더 조급했다.

#18

막상 염의 집 앞에 도착한 운은 말과 더불어 꼼짝도 하지 않고 오직 대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옷의 어깨와 머리 위, 그리고 붉은 운검 위에 하얀 눈이 쌓이고, 말의 검은 갈기에도 눈이

쌓여 가는데, 눈동자의 움직임 하나 없이 마치 돌로 굳은 석조인간 마냥 말 위에 앉은 채로 있기만 했다.

말의 입과 코에서 뿜어 나오는 김이 아니었다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운의 꾹 다문 입술은 마음속에 있는 의문과, 그리고 드러내선 안 되는 자신의

마음을 가슴속에 쌓아두기라도 하듯 하얀 입김조차 뱉어 내지 않았다. 마침 하인 하나가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문을 연 하인의 눈에 들어 온 것은 눈발 속에 있던 시커멓게 큰 형체였다. 순간 눈에 들어온

그것의 위용에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놀란 마음으로 다시 찬찬히 보니

싸늘한 눈으로 자기 쪽을 보고 있는 것은 운검나으리였다. 하인은 벌떡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눈을

털어낼 경황도 없이 운검 앞으로 갔다.

“나, 나으리, 부르셨는데 소인네가 못들은 것입니까? 눈이 소리를 삼킨듯한데 이를 어찌합죠?”

운은 감정의 흐름 없이 말만 내뱉었다.

“아니다. 부르기 전이다.”

운은 말 위에서 훌쩍 땅으로 내려섰다. 운의 흑목화 아래에 흰 눈이 밟혀 푹 패지었다. 하인이

말의 고삐를 잡으려고 하자, 흑마는 냉정하게 그 손길을 뿌리치고 운 쪽으로 두어 발 떼어 붙었다.

운이 직접 고삐를 하인에게 건네고 말의 얼굴을 한번 쓰다듬었다. 그러니 고집 센 말은 겨우

하인의 손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눈을 털고 따뜻하게 해주거라.”

“네. 당연하옵죠.”

운이 말과 같이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본 어린 하인 놈이 부리나케 사랑채의 염에게로 달려가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의빈자가! 운검이 말을 타고 왔습니다.”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염은 깜짝 놀라 사랑방 문을 열었다. 여간 바쁜 일이 아니면 말을 타고

여기로 오진 않는 운이었고, 게다가 이런 눈을 맞으면서까지 올 일이란 것은 그만큼 급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랑채의 대청에 나가선 염의 눈에 이내 운이 들어왔다.

운은 염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서서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앞으로 걸어왔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운은 염의 놀란 눈을 보고서야 자신의 방문이 뜬금없는 짓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저 지나던 길에 잠시······.”

“아, 우선 안으로······.”

운이 섬돌 위에 올라서 목화를 벗으려 하자 염은 운의 머리와 어깨에 묻어 있는 눈을 털어주었다.

그리고 사랑방으로 들어가 마주 보고 앉았다. 그렇게 앉아서도 염의 불안한 눈빛은 거둬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운은 자신이 눈 속을 헤치면서까지 여기 온 타당한 핑계를 대야했다. 열심히

궁리하다가 오늘 왕이 원구단 제천의례를 거행하겠다는 어명이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상감마마께옵서 소격서에 일러 원구단에서 제천의례를 주관하라 하시었답니다.”

염의 표정이 걱정으로 일그러졌다.

“어찌 그런······. 그렇게 되면 성균관이나 사림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인데. 어떠한 어심이시기에

그들을 적으로 돌리려 하시는 겁니까? 나 또한 비록 주자학에 심취하여 있긴 하나, 사림세력은

주자학 이외의 것은 모두 미신이라 치부하는 편협 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중국만이 전부이며,

명나라만을 신봉하는 명사대주의자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환웅을 몰아내고 중국의 공자에

절을 올리는······. 하여 조선의 역사서들마저도 중국 중심으로 죄다 고치는 폐단을 일삼고 있고

심지어 단군조선보다 기자조선을 우선으로 하고 있는데, 원구단이라······.”

“아울러 유향소를 원활하게 하라 명하시었습니다.”

“더 더욱이나 모르겠습니다. 사림뿐만이 아니라 외척까지 적으로 돌리시려는 것입니까?”

이때 여종이 따뜻한 차를 다반에 내어왔다. 그래서 잠시 말을 멈추고 여종이 물러나가길 기다렸다.

둘은 차를 마시며 침묵했다. 염은 왕의 의중을 생각하느라 침묵했고, 운은 연우에 대해 어떻게

물어봐야 하는지 골몰하느라 침묵했다. 침묵은 염이 먼저 깨뜨렸다.

“분명 제가 다 헤아리지 못하는 어심이 계실 것입니다.”

“반대하시진 않을 것입니까?”

“전 의빈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 어떤 말도 드릴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전 현리(玄理, 노자 장자의 도.

즉, 도교) 또한 즐겨 읽는 몸입니다. 주자학만이 전부라 여기지도 않을 뿐 아니라 원구단을 없애지

않는 것은 명나라에 대한 우리 조선의 마지막 자존심이라 생각합니다. 허니 전 언제나 상감마마의 뜻을

봉숭합니다.”

이렇게 마무리를 했으니 염의 입에선 더 이상 이 일에 대한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운은 자신의 본래 목적을 슬슬 꺼내야 했다.

“갑자기 생각 난 것인데, 옛날 여종 하나가 검술 연습을 하고 있으면 몰래 훔쳐보곤 하지 않았습니까?”

“언제를 말하는 것인지······. 아! 우리 연우의 몸종이었던.”

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연우의 이름이 입에 올려지자 이내 참담한 표정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슬픈 표정을 가리려는 듯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그런 염을 상대로 계속 물어야 하는

운의 마음도 복잡했다.

“그 몸종, 현재 어찌 되었습니까?”

“글쎄요······. 그 즈음에 어디론가 팔려간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로 보이지 않았으니.”

“어디로 팔려갔는지는 모르십니까?”

“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 아이를?”

“그냥······. 혹여 이름은 기억하십니까?”

염은 조용히 생각하다가 밖에 눈 내리는 소리에 불현듯 생각났는지 말했다.

“설! 설이라 하였습니다. 잊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제가 그 아이의 이름을 설이라 바꿔주었습니다.”

운은 눈으로 염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염은 빙그레 웃으며 기억을 더듬어 말했다.

“처음 우리 집으로 팔려왔을 때 그 아이의 이름은 아마도 ‘이년’ 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무렇게나

부르다 그 이름이 되어버렸겠지요. 그래서 제가 부르기 민망한 이름을 우리 연우의 옆에 두게

할 수 없었기에 설이란 이름으로 바꾸라 하고 노비문서의 이름도 설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또 다시 연우란 이름에 염의 표정이 슬프게 변했다. 이번엔 염의 표정을 외면하기 위해 운이 차를

마셨다. 물어보아야 했다. 말마다 꼭꼭 ‘우리’란 말을 앞에 붙이는 연우란 존재에 대해,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해 물어보아야 했다. 그렇기에 염의 표정까지 가슴에 느껴선 안 되는 것이었다.

“누이 되시는 분, 의빈자가와 많이 닮았었습니까?”

염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미소보다 눈물이 먼저 떨어져 내릴 듯해서 운은 더욱

눈을 다반 위의 찻잔에 고정했다. 염의 떨리는 목소리가 답했다.

“네.······누구나 그리 말하였지요. 일가친척들이 모이면 우리 연우와 저를 모르는 누가 보아도

남매로 아니 볼 수 없을 거라······, 그리 농담을 하곤 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언제나 같이 있었기에

말하는 모양새나 표정까지 저를 닮아간다며 선친께서 걱정을 많이 하시었······.”

염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슬픔을 삼키려는 듯 차를 삼켜 가슴속으로 밀어 넣었다. 슬픔을

내리 깐 눈길은 월과 판박이 마냥 똑같았다. 찻잔을 바쳐 든 아름다운 손의 모양새도 똑같았다.

새하얀 피부도 똑같았고, 단정한 귓바퀴의 모양도 똑같았다. 그리고 은은히 풍겨 나오는 품격 있는

난향도 똑같았다.

“의빈자가껜 언제나 난향이 납니다. 혹여 그것도 닮았습니까?”

“그랬었지요. 우리 연우는 꼭 난목욕을 하였습니다. 모친께서 복숭아꽃등을 말려 갈아둔 것이 있는데

그건 아니 쓰고 선친과 제가 쓰기 위해 둔 난초가루를 꺼내 썼지요. 선비의 향이라 그리 하지 말라

하여도······.”

그래서 염은 누이의 향을 잊지 않기 위해 아직까지 변함없이 난향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연우 또한 오라비의 향기를 잊지 않기 위해 난향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리라 운은 생각했다.

“참으로 많은 서책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운의 말에 염은 살포시 고개만 끄덕였다. 운이 다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인 된 몸으로, 그리고 그 나이에 그리 많은 책을 읽는 경우가 거의 없지요?······아마도,······살아있다면

지금쯤 상당한 수준에 이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만.”

“여전히 제 서책에 눈독을 들였겠지요. 살아있다면······.”

“······무덤에는 자주 가십니까?”

염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한번 무덤을 찾아가면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무덤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느라 내려오는 때를 놓치곤 했기에 잘 찾아가지 않았다. 아직도 어디선가 연우가 맑은

목소리로 오라버니를 부르는 것 같고, 돌아보면 여전히 미소로 다가올 것만 같기에, 무덤을 볼

때마다 매번 죽어지는 연우를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연우낭자를 세상 뜬 바로 그날 묘혈 안에 넣었다 하였지요?”

“나의 천추의 한이 될 것입니다. 우리 연우를 그리 보낸 죄 많은 오라비라······.”

운은 차마 묻기 미안해서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무겁디무거운 질문을 했다.

“연우낭자가 관에 들어가는 것을 보시었습니까?”

염이 한숨인지, 대답인지 분간할 수 없는 말을 입 밖으로 내었다.

“네. 염습도 아니 하고, 노잣돈도 아니 넣고······. 우리 연우는 관도 참으로 작더이다.”

“관이 묘혈에 들어가는 것을 직접 보시었습니까?”

염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묘혈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은 연우는 월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었다. 그 순간 운의 마음이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안심된 자신의 마음에

스스로 놀랐다. 또한 알게 되었다. 안심이 된 이유, 도착하고서도 대문 밖에 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이유, 그것은 바로 월이 연우가 아니길 바라는 숨어있던 운의 간절한 마음이었다.

연우는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던 여인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곧 중전이 되어야 하는, 운검은 감히

올려다보아서도 안 되는 신분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서자인 운검에게 있어서 무녀인 월의 벽보다,

중전인 연우의 벽은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차라리 그저 무녀이기만을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어진 염의 말에 운의 몸이 차갑게 굳어졌다.

“우리 연우는 몸도 굳지 않더이다. 죽은지 어느 정도 지나면 몸이 딱딱하게 굳는다 하던데,

선친께서도 세상을 버리셨을 때 그러하였는데 그 아이는 차갑기만 할 뿐 굳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여 청지기(대갓집의 집사)가 혹여 깨어날지 모른다고,······이리도 새하얗게 어여쁜데 아까워

어찌 땅에 묻을 수 있냐며 아니 묻겠다 선친께 아뢰는 것도 보았습니다.”

“몸이 굳어지지 않았다니요?”

목소리의 변화는 없었지만 염도 운의 이상한 놀람이 느껴졌다.

“선친께선 그 아이가 병상에 있을 때 마셨던 탕약 때문이라 하시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염도 말하고 보니 이제야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부친의 죽음을 겪지 않았다면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지만, 두 시신의 상태가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 사후경직이란 것을 생각한다면

연우는 거의 살아있었던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단지 숨을 쉬지 않고 맥박이 뛰지 않는 것, 그리고

차가운 것. 딱 이 세 가지만 아니면 잠자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 새롭게 기억이 났다.

하지만 생각은 이상하다는 것 아래에만 그쳤고, 지금 살아 있으리라는 것은 감히 추측도 하지 못했다.

“흙으로 덮고 봉묘를 만드는 것도 보시었습니까?”

“······부끄럽게도 그건 못 보았습니다. 제가 그만 까무러치는 바람에.”

운은 충분히 그랬을 것이라 생각했다. 염과 연우는 다른 남매들과는 달리 사이가 유별날 정도로

좋아보였다. 특히 염의 연우를 귀애하는 마음은 곧잘 양명군의 빈축을 사곤 했을 정도였다.

남매가 있어도 각각 배다른 사이고 더군다나 얼굴도 겨우 알며 지내는 운은 그런 남매애가

부럽기도 했었다.

“그럼 봉묘를 만드는 것 까지는 누가 보았습니까?”

“선친과 청지기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았다고 들었습니다.”

관을 묘혈 속에 넣어 봉묘까지 만들었다면 절대로 살아날 리가 없었다. 만에 하나 살아있는

자를 생매장 시켰다고 해도 바로 즉시 파내지 않았다면 살아날 수가 없었다. 누군가 도술이라도

부리지 않은 한에는. 운의 표정이 다시 차갑게 굳어졌다. 그리고 불안한 표정을 숨기기 위해

다 마신 찻잔을 손에 한 번 쥐었다가 놓았다. 도술까지는 아니더라도 주술을 부릴 수 있는 자가

월의 옆에 있었다. 조선에서 제일 신력이 높다는 장씨도무녀! 월의 신모였다. 그 이름 높은

도무녀가 이 일의 가운데에 있었다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무녀 중에 죽은 것처럼

보이는 약을 먹이고는 굿을 하여 자신의 능력으로 다시 되살리는 것 마냥,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는 술수를 쓰는 간악한 무리가 있다는 것은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방법을 알고 있다면

연우의 죽음도 충분히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얼마 전에 장씨도무녀도

7년 전, 성숙청에서 사라졌었다는 말을 들었다. 우연치고는 참으로 묘한 연관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월이 연우일거라 여겨졌다. 이번에는 확신에 가까웠다. 그래서 운의 심장은 차갑게

얼어져 버렸다. 염은 자신의 감정을 추슬러 세우고 뒤늦게 미소로 말했다.

“이상한 일입니다. 양명군도 아니고 제운이 우리 연우에 대해 묻다니······.”

“그저 의빈자가를 뵈니 누이와도 닮았었는지 갑자기 궁금하였을 뿐입니다.”

염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옛날 연우가 살아있을 때 양명군이 연우에게 그리도 관심을 보여도

운은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당시엔 연우와 닮았는지 관심도 없던 사내가

이제 와서 궁금해 한다니 이해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만 가보아야겠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습니다.”

염도 따라 일어나 운과 같이 밖으로 나갔다. 아직까지 눈발은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멀리 중문간행랑채에서 손님이 나가는 것을 본 청지기가 달려 나왔다. 운은 염에게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인사하고 대문으로 갔다. 대문에는 하인이 말을 데려와 운에게 고삐를 넘기고 사라졌다.

대문 밖에 까지 손님을 배웅해야 하는 청지기만이 남자, 운은 조용히 말했다.

“오늘 의빈자가의 누이분에 대해 담소를 나누었다.”

청지기는 운의 목소리를 들은 것인 신기하여 휘둥그레 쳐다보았다. 운은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자네가 봉묘를 만드는 것 까지 보았다고?”

“네, 그랬습죠.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정경부인(貞敬夫人)께선 자리를 보전하고

누우셨고, 의빈자가께선 실신하시었고, 집안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돌아가신 주인어르신만이

봉묘를 만드는 것을 그저 보기만 하셨는데, 그 속이 어디 사람 속이었겠습니까?”

“봉묘까지 다 만들고 바로 그곳을 내려왔는가?”

“네, 그랬습죠. 전 내려왔다가 얼마 있지 않아 다시 봉묘를 둘러보러 갔었지만.”

청지기는 긴 한숨을 내쉬며 그때가 생각났는지 안타까운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가슴 아프실까봐 윗분들께는 소인네가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그 잠깐 사이에 까마귀 떼인지,

들짐승인지 우리 아기씨 봉묘를 파헤치다 말았더라구요. 제가 다시 안 가봤다면 큰일이었을 겁니다.

그리 가신 것만으로도 억장이 무너질 노릇인데······.”

파헤치다가 만 것이 아니라 파헤쳤다가 다시 덮던 중이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면, 월은 연우였다. 그리고 지금 중전에 있어야 하는 신분임이 분명했다.

운은 말에 올라 궁궐로 향했다. 흔들리는 운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말은 운이 흔들리지 않게

조심스레 걸었다. 운은 하늘로 얼굴을 들었다. 태양을 가린 구름이 눈을 뿌리는 것일 텐데도

하늘의 구름은 눈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운은 입 안에서 하얀 김을 뽑아 하늘로 올렸다.

하지만 운의 뜨거운 마음을 내팽개치기라도 하듯 입김은 하늘로 오르다 말고 무겁게 땅으로

떨어지며 사라졌다. 운은 눈을 게슴츠레 떠서 하늘을 쏘아보았다. 굵어진 눈발에 체온은 떨어져갔지만

운의 심장의 뜨거움은 그것과는 달리 더 올라만 가고 있음에 원망스러웠다.

“나의 목숨은 내 것이 아니라 나의 주군의 것인데, 어찌 심장은 따로이 노는 것이냐······.”

염은 운이 헤집고 간 마음을 정돈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청 앞에 서서 떨어지는 눈만 물끄러미 보았다.

이제는 연우의 죽음을 잊어야 하는데도 쉽지가 않았다. 어디선가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투둑하고

떨어져 내리는 소리에 눈길이 갔다. 아직도 연우가 장난을 친 것이라 착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어린 연우는 눈 내린 마당을 뛰놀며 눈뭉치를 염에게 던지고 있었다. 눈뭉치를 맞은

어린 염도 눈을 뭉쳤다. 하지만 맞아서 연우가 다치기라고 할까 걱정되어 느슨하게 뭉쳤고,

이것은 언제나 연우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공중에 부스스 흩어져 내렸다. 마당 여기저기에

어린 연우의 발자국이 찍혀졌다. 어린 염의 발자국도 찍혀졌다. 대청 앞에 서 있던 염은 눈 내린

마당에 내려서서 발자국을 찍어보았다. 그때의 발자국보다 분명 커져 있었다.

“연우야, 너의 발이 네게로 왔나보구나. 그때의 너와 나의 작은 발이 합하여 지금의 내 발 크기가

된 것이어니······.”

염은 어린 둘의 발을 합한 발자국을 마당에 천천히 찍어나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뽀드득하는

발자국 소리가 연우의 발자국 소리인양 느껴졌다. 그래서 얼굴에선 미소가 머금어졌지만 눈에선

눈물이 고였다가 떨어졌다. 그러고 있자니 자신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염은 또 다시 연우로 착각하고 말았다. 재빨리 돌아보았다. 그런데 눈에 들어온 건 연우가 아니라

민화였다. 염은 눈물 흘린 것이 부끄러워 다시 재빨리 고개를 돌려 눈물을 감추었다. 그렇게

자신에게서 등을 보이며 선 염으로 인해 민화의 가슴은 메어졌다. 미처 눈물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등이 눈과 더불어서 더 없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래서 고개를 푹 숙이고 애꿎은 옷고름만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염은 얼굴에 묻은 눈을 털어내듯 눈물을 닦고 목소리를 평온하게 하여 말했다.

“추운데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여전히 등을 보이고 있었기에 염의 부드러운 목소리도 민화의 메어진 가슴을 풀어 내리진 못했다.

일이 있어야만 여기 올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보고 싶어서 왔을 뿐이기에 오기 온 이유를

물으면 답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더 고개만 떨구었다. 게다가 오늘밤은 부부합방의 약속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해서 눈이 펑펑 내리면 어떻게 되는 건지 묻고 싶기도 했다. 몇 안 되는

합방일이 날씨 때문에 물 건너 갈 판이었다. 이건 민화에게 있어선 천재지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서방님은 아니 추우시어요?”

염은 그제야 몸을 돌려 민화를 보았다. 눈물로 콧등과 눈시울이 빨개진 건 추위 때문으로 보였다.

“옷이 얇아 보입니다. 공주께서 추우시겠습니다.”

민화는 염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용기 내어 고개를 들었다. 염의 부드러운 표정이 눈앞에 있었다.

더 이상 빨리 뛸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심장이 쿵쿵 거리며 심하다 싶을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눈이 소리를 흡수하지 않았다면 염에게 자신의 뛰는 심장소리가 들렸을 것이라 생각했다.

“소첩, 춥사와요.”

이렇게 말하면 염이 따뜻하게 안아 줄 것 같았다. 그런데 염은 이런 경우에도 융통성이란 것은 없었다.

“그렇게 보입니다. 코가 새빨간 것이. 이리 계시지 말고 내당으로 들어가십시오.”

“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조금 전까지는 그러했지만 이젠 서방님과 같이 있으니 춥지

않사와요.”

“아닙니다. 많이 추워 보이십니다. 대체 민상궁은 어디 있는 겁니까?”

염은 진심으로 민화의 몸이 걱정되었던 것인데, 민화는 염이 자신을 빨리 내당으로 보내려고 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풀이 죽어 겨우 말했다.

“사랑방에 들어가면 아니 되어요? 같이······.”

“아, 그럼 우선 급하게 사랑방에 들어 몸을 녹입시다.”

이렇게 민화는 참으로 힘겹게 사랑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랑방에 들어간 순간 민화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안에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화의 뒤를 따라

들어온 염도 깜짝 놀랐다. 안에는 소리 소문도 없이 양명군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여긴 어찌 들어오셨습니까?”

“월장하였네. 내가 월장에는 일가견이 있지 않은가?”

양명군은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심상찮아 보였다. 양명군은 민화를 보며 말을 이었다.

“하하하. 내외간에 정이 두텁기도 하구나. 비록 눈이 내려 어둡긴 하나 아직 대낮인건 분명한데

이리 붙어있으니.”

민화는 속도 모르는 소리라 대꾸하고 싶었지만 염이 옆에 있어서 꾹 참았다.

양명군은 이번엔 염을 보며 말했다.

“우리 집 안으로 소인배 몇 마리가 걸음을 하였다네. 하여 이리 피신을 온 것이야. 오늘밤 여기에

숨어 있으면 아니 되겠는가?”

염은 운이 말해준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인 뒤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민화는 그런 것을 모르기 때문에 양명군의 오늘밤 기숙하겠단 말이 그렇게 분통터질 수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밤 합방은 완전히 깨어진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건 천재지변이

아니라 인재지변이었다.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양명군을 쏘아보았다. 염이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민화에게 말했다.

“여기 양명군이 오셨단 것을 비밀로 하여주십시오. 아랫것들에게도 조심하시고.”

아무래도 많이 심각한 모양이었다. 민화는 궁에서 태어나 궁에서 자란 공주였다. 그렇기에 이런

살얼음 같은 분위기는 피부가 먼저 알게 되었다. 분명 상감마마와 관련해 조정에 위태로운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민화는 더욱더 양명군이 원망스러웠다. 왜 하필 의빈에게

쪼르르 달려왔는가 하는 것이었다. 혹시나 염에게 좋지 않은 불똥이라도 튈까 싶어 민화는 미리

마음이 불안해졌다. 양명군은 방안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다반을 보았다.

“내외간이 같이 마신 것인가?”

“아, 아닙니다, 방금 제운이 다녀갔습니다. 마주치지 못하였습니까?”

“참으로 아깝군. 조금만 일찍 왔더라면 그를 보았을 것인데.”

염은 민화에게 그만 내당으로 건너가라는 눈짓을 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민화는 사랑방을

나가야 했다. 민화가 나가고 나자 염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제운의 말로는 원구단에서 제천의례를 거행하라 어명을 내리셨다 하였습니다.”

“명나라에 대한 자신감이지. 그리고 조선이 그 위의 왕조들을 이었다는 정통성에 대한 자신감이기도

하고. 조선이 명나라에 대해 사대를 하게 된 것도 정통성 부재로 인한 것이었으니, 날 때부터

적통으로서의 정통성을 지닌 금상(현재의 왕)은 그러한 바탕에서 나온 제후의 예는 우습기 그지없을

수밖에. 단지 사대사상에 젖은 신하들이 상감마마의 뜻을 따라 줄지가 걱정이야. 당장 간신배가

내게 아첨 넣으러 온 것을 보면 이번 사태는 심각한 것 같더군.”

양명군! 비록 서자이긴 하지만 왕의 형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후사도 없는 왕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신하들이 잘못되게 만들기라도 한다면 다음 왕좌는 제일 먼저 양명군의 차례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 신하들이 발길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현재 왕이 위험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걱정 어린 염의 표정을 본 양명군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상감마마의 성명(聖明, 임금의 밝은 지혜)은 익히 알고 계시지 않은가? 난 괜찮을 것이라 생각한다네.

오히려 걱정해야 하는 놈은 파평부원군일세, 그려. 그동안 숨겨왔던 칼을 정식으로 꺼내 겨눈 격이니.

내 오늘밤에 이곳에 거했다가 눈이 그치면 내일 오전 깨에 저잣거리에 나가 의복 풀어 헤치고

술에 취해 잠들어, 오가는 신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겠네. 아주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얼어 죽기 전에 사람을 보내주게나. 하하하.”

염은 양명군을 부드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양명군은 소리는 웃고 있었지만 표정은 웃고 있지 않았다.

영특한 사람이었다. 그것을 숨기려 애를 쓰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도 이번에는 왕의

선포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귓불의 세환귀고리를 자꾸만 만져대는 버릇, 그것은 그가 극심하게

불안할 때 하는 버릇이었다.

#19

운이 왕 앞에 나타난 것은 훤이 지방관의 윤대를 마치고, 숙직할 관료의 명단을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소리도 없이 자신의 자리에 선 운에게 훤은 눈길만 한번 던졌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문서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관료들의 명단 아래에 계자인(왕의 공문서 결재도장, 옥새와는

별개)을 찍은 후 오늘밤의 군사암호로 ‘雲淚痕(운누흔, 구름의 눈물자국)’을 적었다. 운은 군사암호를

확인하고 난 뒤 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너무나 눈치 빠른 왕이었기에 지금 자신이 월과

연우를 생각하는 어지러운 마음까지 읽어내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 훤은 공문서를 확인하면서

내관에게 입으로만 말했다.

“지금당장 목욕 준비를 하거라. 추위를 몰아내고 싶다.”

갑자기 목욕준비를 하라는 왕의 말에 모두가 의아 했다. 아직 밀린 공문서와 상소문이 서안에

가득했고, 여섯 승지들의 서안위에도 가득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이 시간에 목욕이라니,

그것도 최대한 많은 공문서를 직접 읽기 위해 언제나 노심초사하는 왕이었기에 더 의아했다.

하지만 그래서 한편으로는 더 놀랐다. 혹시나 감기가 오려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상세내관이 급한 걸음으로 침전으로 달려갔다.

목욕준비가 다 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훤은 침전의 북수간으로 들었다. 거대한 함지박 안에서

인삼향이 물씬 풍겨나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운이 문 앞에 버티고 서고 궁녀들이 왕의

옷을 벗기기 위해 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훤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궁녀들을 손으로 저지하고

운을 보고 섰다.

“운아, 운검을 풀어 내게 다오.”

운이 운검을 풀어 훤에게 바쳤다. 훤은 운검을 들고 다시 말했다.

“너의 별운검도 다오.”

다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운은 의문제기 하나 없이 순순히 별운검을 왕에게 바쳤다.

별운검까지 받아든 훤은 옆으로 상경내관을 불러 별운검을 들게 했다.

“궁녀들은 모두 이곳을 나가라.”

궁녀들이 젠걸음으로 다 물러나가자 훤은 운검을 칼집에서 길게 빼어 들었다. 칼집 안에 숨겨져

있던 칼날에 음각된, 구름을 휘감은 용의 문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칼날을 들여다보던 훤은 갑자기

운검을 휘둘러 운의 목에 겨누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내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자신의 목에 칼날이 들어온 그 순간에도 운의 눈썹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훤은 운의 목에 칼날을 바짝 붙여 세우며 말했다.

“의복을 벗어라.”

운은 천천히 옷을 벗었다. 내관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상감마마’만 열심히 부르고 있었다.

운이 전립과 협수를 벗었다. 그리고 그 밑에 입은 저고리도 벗었다. 검은색 저고리 아래에 하얀

적삼이 드러났다. 훤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운아,······재미가 없구나. 검을 겨누면 놀라는 시늉이라도 해야 장난으로 검을 겨누는 내가 재미가

있지 않겠느냐?”

그제야 내관들은 안심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지만 운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훤은 운의 목에

겨누었던 검을 거두어 다시 칼집에 꽂으며 말했다.

“그리 얇게 입고서는 눈 맞으며 어딜 그리 다녀온 것이냐?”

운은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염의 집에 다녀온 것 만이라면 말할 수는 있었다. 이전에도

간혹 다녀왔기 때문에 자리를 비운 것 자체는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에 사전 보고도 없이 굳이 다니러 갔다 온 이유를 궁금해 할 훤이었고, 그러면

이 일에 대해 집요하게 캐물을 성격이었다. 왕의 영민함을 알기에 운은 말할 수 없었다.

월과 연우가 동일인이라는 것은 순전히 운의 추측일 뿐이었다. 이 추측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증거

따위는 없었다. 그것을 핑계로 두었다. 말하면, 입에 연우와 월을 동시에 담게 되면 그 순간부터

월이란 존재는 운의 눈 끝에서 더 멀리 돌아 앉아버릴 것이었다. 잠시 동안 만이라도, 옆모습만이나마

보고 있고 싶었다. 그래서 그 어떤 말도 아직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훤은 입을 다문 운이 지쳐보였다.

몸이 아니라 다른 그 무엇이 빈틈없던 사내를 힘겹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원래 운검이라 하면 여러 명을 두어 서로 교대로 호위를 하여야 하는데, 내가 너 이외는 아무도

믿질 못하니······. 이는 너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나도 처음엔 여럿을 두려 하였다. 그런데

모두가 하나같이 너와 비교가 되기에 이리 된 것이야. 이제 와서 다시 운검을 선발하기엔 지금

상황이 그닥 좋지가 않구나. 세조대왕 때도 운검에 의한 암살사건이 있지 않았느냐? 운검의 자리는

왕을 사살하기에 가장 좋은 자리기에 아무나 둘 수가 없다.”

세조 때의 사건이란,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 성삼문의 부친인 성승과 유응부가 임시 운검직인

운검장군을 맡게 되자, 그것을 기회로 잡아 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운검으로 죽일

계획을 세웠던 것을 말했다. 공개적인 연회나 의례행사 때는 운검이란 자리는 반드시 종2품 이상의

무관이 맡아야 하기에 평소 왕을 호위하던 실제 운검은 봉운검수문장(捧雲劍守門將, 당하관의

하급직)직을 맡아 왕의 뒤를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때도 왕의 진짜 보검인 운검은

봉운검수문장이 지니고, 임시 운검직을 맡은 운검장군은 따로 제작된 의례용 운검을 가지게 되었다.

운검장군을 맡은 계기로 계획된 이 일을 미리 눈치 챈 한명회는 성승과 유응부가 운검을 지니고

연회장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고, 결국 이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 계획은 바로 세조의

귀로 들어가게 되었고, 즉각 이 계획에 가담되었던 자들을 숙청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곧 사육신이었다.

이 사건 이후로는 운검자리는 특히 조심해서 사람을 두게 되었다. 훤은 장난스런 표정으로 운에게 말했다.

“운아, 이왕이면 바지도 마저 벗고 저 물 속으로 들어가거라.”

운은 눈을 들어 물을 보았다. 물속이라면 옥탕(玉湯, 왕의 목욕탕)으로 들어가란 말이었다.

옥탕은 왕 이외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중전이라 해도 안 되는 것이었다.

운의 입술은 말이 지나갈 틈만 비켜주었다.

“아니 되옵니다.”

“들어가라. 어명이다! 널 위해 준비하라 명한 물이다!”

“받잡을 수 없사옵니다.”

“네놈이 감히 불충을 저지르려 하는 것이냐? 그리 싸늘한 몸을 가지고 내 옆에 와서는 그 차가움을

내게 옮기려 하다니, 게다가 나를 호위하는 놈은 달랑 너 하난데 만에 하나 네가 앓아누우면 난

어찌 되겠느냐? 그 또한 불충인 것을 모르느냐? 네 발로 아니 들어가겠다 버틴다면 내 손으로

널 끌어다 물속에 넣어버릴 것이다.”

내관들도 고개를 숙여 일제히 운을 종용했다. 운은 마지못해 잠깐만 물속에 들기로 하고 검은색

바지를 벗었다. 바지 아래에 흰 속고의가 드러났다. 위아래 속옷 차림으로 뜨거운 물 속으로

들어가자, 훤은 운검을 운의 옷 위에 놓았다. 그리고 운의 별운검을 든 내관에게 말했다.

“운검이 이각(二刻, 30분)이 지나기 전에 저 물속에서 나오거든 네가 든 검으로 목을 베어버려라.”

“네에? 무, 무, 무슨 그런 어명을······. 아무리 운검이 맨손이라 하나 천신이 어찌 그의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릴 수 있겠사옵니까?”

“하긴 그도 그렇겠구나.······그렇다면 네 스스로 네 목을 베면 되겠구나. 하하하.”

눈이 둥그레진 내관을 두고 훤은 운에게 다가가 한쪽 어깨를 짚었다.

“운아, 내 비록 너에게 높은 품계를 내리진 못하나, 가장 아끼고 있다. 그러니 아프지 마라.

설혹 그것이 마음이라 하더라도.”

훤은 내관 세 명을 남겨놓고 북수간을 나서며 남겨진 내관들에게 명했다.

“오늘, 책임지고 운검을 침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방에서 쉬게 하라.”

“네.”

운은 방문을 닫고 사라진 왕의 느낌이 느껴지자 별운검을 들고 있는 내관을 보았다. 내관은

운검이 물속에서 나올 것만 같아 겁을 잔뜩 먹고 검을 빼어 자신의 목을 겨누었다.

“절대 나오면 안 됩니다!”

“이각은 너무 긴 시간입니다.”

“그래도 어명이십니다! 이각이 아니라 하루 동안이라 하여도 따르셔야 합니다.”

운은 긴 한숨을 쉬며 물속에 머리끝까지 숨겼다. 그렇게 물속에 들어간 운은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훤은 편전으로 다시 가려던 발걸음을 왕대비전으로 돌렸다. 왕대비전에는 훤의 조모인 왕대비와

모친인 대비가 함께 있었다. 훤이 자리에 앉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마마마께옵서도 여기 계신지 몰랐습니다.”

“저도 문안차 온 것입니다. 저는 그렇다 치더라도 주상께선 어인 일이십니까?”

“저도 할마마마를 뵈옵고자 이리 왔습니다.”

정답게 인사를 나누는 모자 사이에서 왕대비는 불편한 표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말했다.

“흠! 주상이 이 할미에겐 무슨 볼일이 있답디까? 또 제 친지 중에 누구 하나 귀양 보내고 싶으신 겝니까?”

대비는 왕과 왕대비의 눈치를 보며 서먹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더욱 방긋 웃으며 말했다.

“청이 있어 이리 발걸음 하였습니다. 아울러 어마마마께도 같이 청을 드리려고 하였는데

이리 더불어 계시니 더욱 좋습니다.”

대비는 왕대비의 눈치를 한번 힐끔 본 후, 최대한 평화롭게 웃으며 말했다.

“무엇을 청하시려는 것입니까? 무엇이든 제가 힘닿는데 까지 도와드릴 것입니다.”

“하하하. 어마마마께옵선 할마마마를 도와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왕대비도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조금 전의 불편한 표정이 조금 누그러져 말했다.

“말씀하여 보십시오, 뒷방늙은이인 이 할미에게 청하고픈 일이 무엇인지.”

“성숙청에 일러 사독제(四瀆祭, 사독에 제례를 올리는 일. 사독:왕조의 운명을 기원하며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네 강. 동독(낙동강), 서독(대동강), 남독(한강), 북독(용흥강))를 하여 주십시오.”

사독제를 한다는 것은 왕실의 기원을 떠나 백성들에게 왕실이 얼마나 튼튼한지를 과시하는 계기로

사용하기도 했고, 유학이 아닌 무속신앙을 믿는 백성들의 마음에 안정을 주는 행위이기도 했다.

훤은 백성들을 위해, 또한 앞으로 외척을 제거하기 전에 미리 왕대비를 위로하기 위해, 매년

새해가 되면 행하는 사독제를 거행하기로 한 것이었다. 훤의 의도대로 왕대비의 표정에 기쁨이 보였다.

하지만 왕대비는 금새 환하게 웃기도 멋쩍은지 시치미를 뗐다. 성숙청에서 하고 싶은 굿이 많아도

왕과 유학자들의 반대에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왕의 말이 더 없이 반가웠던 것이다. 훤은 왕대비의

표정을 보며 더욱 친근감 깃든 표정으로 말했다.

“사독제를 행하면서 아울러 할마마마의 만수무강도 빌 것입니다. 성숙청은 대대로 대비전과

왕대비전의 비호아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가장 큰 어른이신 할마마마께옵서

주관하셔야 합니다. 장씨도무녀에게 일러 준비하라 하십시오.”

“방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장씨도무녀라 하셨습니까?”

화들짝 놀라 소리치는 왕대비 때문에 훤도 덩달아 놀랐다. 그리고 그 순간 훤의 눈빛에 스치는

이상한 예감을 숨기느라 훤은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네, 장씨도무녀. 유명하다, 유명하다 말은 들었는데 그리도 유명하옵니까?

어찌 할마마마도 알고 계십니까?”

“예, 예전에 성숙청에 있을 때 본적이 있으니까······, 그런데 장씨를 주상은 어찌 아시는 겝니까?

혹여 그자가 성숙청에 돌아와 있는 겝니까?”

“네, 얼마 전에.”

왕대비의 표정에 미소가 사라졌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심각하게 굳어져 한참동안 있더니 훤에게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주상의 말씀은 알겠으니 이 할미가 힘껏 주관하여 보겠습니다. 그러니 유생들의 반발이나

막아주십시오. 이만 가 보십시오, 바쁜 걸음을 떼신 것일 텐데······.”

급히 밀어내는 듯한 분위기에 밀려 훤은 왕대비전을 나왔다. 하지만 왕대비전의 월대 아래에

내려선 훤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다시금 왕대비전을 차가운 눈으로 돌아보았다. 성숙청은 왕실의

구복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 유학자들의 반발에 밀려 이제는 거의가 대비들의 개인 구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당연히 왕대비와 장씨도무녀는 아는 사이일 것이다. 그러니 오랜만에

돌아온 장씨도무녀의 소식에 놀랄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렇게만 생각하기엔 훤의

마음은 그리 녹록하지 못했다. 장씨도무녀는 7년 전 사건이란 훤의 의심 그물 안에 걸려 있는 사람이었다.

아울러 왕대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두 사람을 결코 떼어서 생각해선 안 될 것이었다.

훤은 의문 섞인 발걸음을 힘겹게 들어 편전으로 돌아갔다.

왕대비는 대비마저도 급하게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박상궁에게 말했다.

“박상궁, 지금 당장 성숙청으로 가서 장씨를 불러오너라.”

“네, 알겠사옵니다.”

답을 올린 박상궁은 아랫사람을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멀리 있는 성숙청으로 달려갔다.

성숙청으로 들어서는 박상궁을 장씨가 먼저 발견하고는 옆에 있던 잔실에게 급하게 속삭였다.

“잔실아, 혹시 모르니 가서 아가씨를 방에서 못 나오게 해라.”

잔실은 박상궁을 힐끔 본 다음 성숙청 뒤로 빠져 나갔다. 장씨는 박상궁의 시선에서 잔실이

사라지는 곳을 가로 막으며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오랜만입니다, 장씨도무녀. 지금 왕대비마마께옵서 찾아계십니다. 가시지요.”

“몰골이 이러한데 아니 될 일입니다. 목간이라도 하고난 이후에.”

“지금 당장 데려오라 하시었습니다.”

장씨는 희미하게 웃으며 박상궁을 따라 나섰다. 박상궁의 뒤를 따라가는 장씨의 표정엔 무서우리 만큼

아무것도 없었다. 희미하게 웃던 그것마저 사라지고 오직 혼이 없는 몸뚱아리 만 걸어가는 듯 했다.

장씨는 발 너머에 왕대비를 두고 고개를 푹 숙여 앉았다. 왕대비의 내리깐 목소리가 장씨를 향했다.

“오랜만이다. 장씨가 맞는 것이냐?”

“네, 그러하옵니다.”

“성숙청에 돌아온 줄 몰랐구나. 어찌하여 내게 먼저 기별하지 아니 한 것이냐?”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았사옵고, 또한 먼 곳을 돌아왔기에 더러운 혼이 여기저기 붙은 몸으로

왕대비마마 앞에 설수가 없었사옵니다. 지금도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기도하는 있는 중이었사옵니다.”

“찾아오지는 못하더라도 돌아왔단 기별은 하여야 하지 않느냐!”

“쇤네의 소견이 짧았사옵니다.”

장씨의 차분한 목소리에 소리를 높인 왕대비가 머쓱해졌다. 장씨가 성숙청에 돌아왔단 말을

들었을 때부터 왕대비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인사오지 않는 장씨는 더 불안했다.

이윽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린 왕대비가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

“너와 나의 사이는 이리 소원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그대가 더 잘 알 게야. 그렇지 아니한 겐가?”

“쇤네는 하늘의 명을 따라 성숙청을 비운 것이었사옵니다. 하여 소원해진 것은 아니옵니다.”

“그래, 그때도 그리 말하고 내 곁을 떠났었지.······아무튼 옛날 일은 접어두는 것이 서로 간에 좋으니까

이만 하고, 이리 부른 김에 상감마마의 뜻도 전하겠네. 사독제를 거행하라 명하셨다. 하여 그대가

준비를 하여야 할 것이다.”

“사독제라 하시면,······손이 모자라옵니다.”

“그런가? 그래도 자네 재량껏 준비하도록 하게. 그리고 내 개인적으로 명할 것도 있느니.

이상하게도 주상과 중전 사이에 아직까지 합방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원진살(元嗔煞,

부부 사이에 까닭 없이 서로 미워하는 액)이 든 모양인데 자네가 풀어주어야 할 것 같더군.

내 그래서 자네를 애타게 기다린 게야. 자네라면 쉬이 할 수 있을 터이니.”

고개를 숙인 장씨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발이 왕대비 사이에 놓여있었기에 마음껏 비웃는

표정을 방바닥에 지어보일 수 있었다.

‘원진살이란 것도 부부 인연이 있어야 드는 법. 애초에 들 원진살이 어디 있다고, 훗!’

장씨가 대답이 없자 왕대비가 다시 물었다.

“왜 답이 없는가? 원진살 정도면 쉬이 없앨 수 있지 아니한가?”

“감히 상감마마와 중전마마의 부부궁합에 쇤네는 간여할 수 없사옵니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는 능력이면서 그리 말하다니, 겸손한 것인가? 하여 주게나.

어여 원자를 보기 전에는 내가 마음을 놓지 못할 것이야.”

어차피 풀 원진살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 어떤 짓을 해도 무의미한 것이었다. 지금의 중전 윤씨가

훤의 부인으로 교태전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사주에서는 도가 넘어 선 것이었고, 죄가 넘어선

것이었다. 지금도 그 자리를 견디기엔 중전의 신경은 너무나 가늘었다. 그녀는 숨기고 있어도

장씨는 느낄 수 있었다. 교태전의 동쪽 방에 오랫동안 앉아 있지 못하는 중전이란 것을.

장씨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핑계를 대었다.

“굳이 원진살을 없애는 치성을 드리고자 하시오면 조금 기다리셔야 하옵니다. 쇤네의 씻김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새해에 사독제도 준비해야 하오면······.”

“그럼 그 뒤엔 가능한 것인가?”

“그 또한 아니옵니다. 사독제가 끝나면 다시 씻김을 하여야 하고, 그런 이후에나 원진살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인지 쇤네가 볼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라도 해 주게. 그럼 이제 자네가 어디에서 무얼 하였는지 담소라도 나눔세.”

“쇤네 아직 씻김이 끝나지 않았기에 혹여 왕대비마마께 해라도 있을까 저어되옵니다.

하여 물러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왕대비는 더 이상 장씨를 잡아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떨떠름하게 허락해 주었다.

해가 떨어지자, 파평부원군의 집으로 외척일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여든

그들은 파평부원군의 노기에 숨을 죽이며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지금의 상감마마를 상대하기엔 우리의 힘이 부칩니다.”

파평부원군은 노기 서린 비웃음을 흘리며 서안 위에 얹은 주먹에 힘을 주었다.

“흥! 우리를 밀어내기 위해 사림들을 끌어 들이겠다? 그들이 순순히 원구단의 제천의례를

눈감아 줄 것 같은가? 어림도 없지!”

“상감마마께옵선 원래부터 원구단의 의미를 각별히 여기셨습니다. 이일을 핑계 삼아 조선의

긍지를 높이고저 하시는 어심도 깔려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긍지를 높이시어도 이 나를 쳐내진 못할 것이다. 그동안 너무 강령하시도록 내버려 두었다.

송구하지만 병상에 계속 계셔주시는 것이 우리를 위해 좋을 것이야. 갑자기 안후가 강령하여지신

원인은 알아냈느냐?”

두 줄로 쭉 늘어앉은 사람들 사이에 한 사람이 고개를 드밀고 말했다.

“혹여 액받이무녀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액받이무녀? 소문으로는 그런 것이 있단 말은 들었는데, 그것이 실제 하였느냐?”

“소인도 관상감에서 흘러나온 말을 들었습니다.”

“관상감에서 반갑지 않은 일을 하였군. 그럼 액받이무녀에 대해 또 들은 것은 없느냐?”

“성숙청 소속의 무녀란 소문이 있었사옵니다. 워낙에 비밀에 부쳐진 일이라 더 이상은······.”

“성숙청? 하하하하.”

파평부원군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방안을 뒤덮었다. 그의 웃는 의미를 몰라 다들 의아해 하며

서로의 얼굴들만 보았다. 파평부원군는 승리에 찬 목소리로 모여 있는 이들에게 말했다.

“일이 이리 쉽다니. 성숙청이라 하면 왕대비마마의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는 것은

그 액받이무녀란 것의 존재를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왕을 강령하게 하는 그것을 없애면

모든 일은 끝나는 것이다. 어찌 이보다 쉬울 수 있을 것인가? 하하하”

“하지만 그게 쉬울까요?”

“나에게 좋은 방법이 있다. 알아서 할 것이니 인경이 되기 전에 모두 돌아들 가라. 한동안은

상감마마의 눈에 나지 않는 것이 좋아.”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들 물러가는 중에도 파평부원군은 자리에 앉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리 쉽다니. 무녀란 것이 어디 사람이냐, 그런 것 하나 죽이는 것은 일 축에도 들지 않는 것이니······.”

#20

아침 느즈막하게 일어난 민화는 자신의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 어젯밤 양명군의

기숙으로 염과 같이 있을 수가 없게 되자, 홀로 속상해 하다가 울면서 잠들었기 때문에 눈이

퉁퉁 부어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부운 것이 비단 눈만이 아니었다. 얼굴 전체가 못난이 마냥

부어있었다. 이런 얼굴로 아침 식사를 하러 안방으로 가면 시어머니 눈에 띌 것이고, 그러면 괜히

그 화살은 염에게로 갈 것이었다. 그래서 아침부터 애꿎은 민상궁의 발걸음만 바빠졌다. 마침 눈이

한가득 쌓여있었기에 눈덩어리를 뭉쳐 민화의 얼굴에 얼음찜질을 했다. 하지만 부기를 채 가라앉히기도

전에 부름에 의해 부운 얼굴 그대로 안방에 가야했다. 민화는 최대한 얼굴을 시어머니께 보이지 않게

돌리고 들어가 등을 돌려 주춤주춤 앉았다. 그렇다고 그 모습을 못 볼 신씨도 아니었다.

“공주자가, 그 면부는 어쩐 일이시옵니까? 혹여 또 풍천위가.”

신씨의 놀란 목소리에 민화는 더듬거리며 핑계를 대었다.

“아, 아니어요. 잠을 너무 많이 자고 났더니 이리 된 것뿐이어요.”

신씨는 긴 한숨을 쉬었다. 신씨라고 공주의 외로움을 모를 리가 없었다. 전 홍문관대제학이 살아생전

딱 지금의 염처럼 그랬기에 누구보다 공주의 마음을 더 잘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민화의 처지가

더 나으면 나을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신씨는 남편뿐만이 아니라 자식 둘마저 그놈의

책이란 것에 빼앗긴 셈이었다. 아들놈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딸자식인 연우마저 그랬었다.

손수 인형을 만들어줘도 오라비 옷자락 붙잡고 쫒아 다니느라 그것은 본채 만 채 했고, 책만 손에

쥐어주면 활짝 어여쁜 웃음을 보였던 여식이었다. 신씨는 연우 생각에 밥이 돌덩이가 되어 넘어가지

않았다. 민화도 밥맛이 없어서 몇 숟가락 뜨다가 말았다. 지금쯤 사랑채에선 염과 양명군이 식사를

하고 있을 것이고, 자신은 여기에서 식사를 하는 염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에 그쳐야 하는 것이 속상했다.

대충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온 민화는 얼른 얼굴 부기를 가라앉히고 염에게 가볼 생각으로

열심히 얼음찜질을 했다. 그런데 민상궁이 얼음 보자기를 빼앗았다.

“이러시다가 면부에 동상 걸리시옵니다. 어이구, 이를 어째. 시뻘겋게 실핏줄이 섰네!”

“그렇지만 난 빨리 서방님께 가고 싶은데 이렇게 못난 얼굴로는 싫단 말이야.”

“부기 가라앉히기 전에 동상으로 더 엉망이 되어버리겠사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어여뻐

지실 것이옵니다. 그러니······.”

민화는 다시 속상해졌다. 어젯밤은 다른 날과는 다른 밤이었다. 앞으로 새해다 뭐다해서 염과의

합방일은 보름 뒤에나 가능했다. 그나마도 민화의 달거리와 겹쳐버리면 건너갈 확률이 많았다.

그 조급증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민화가 바라는 것은 꼭 합방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저 얼굴만 보아도 좋았다. 염의 향기만 맡고 있어도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야속하게도 모두 민화에게 참아라, 기다려라, 이 말만 했다. 민화는 이 이상 참는 법도, 기다리는

법도 알지를 못했다. 그래서 불퉁해진 얼굴로 거울을 확인한 뒤, 뒷문으로 나갔다. 눈은 그쳤지만

눈의 냉기를 머금은 매서운 바람이 민화의 코와 볼을 새빨갛게 만들고 입안에서 하얀 입김을 뽑아냈다.

하지만 막상 사랑채로 나가는 쪽문에 가까워져서는 부운 얼굴이 밉게 보일까 걱정되어 그 문턱을

넘지 못하고 하염없이 서성거렸다. 쪽문을 넘어서려다 참아야 한다며 스스로를 꾸짖고, 이제 방으로

들어가야지 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걸음을 돌리기를 하루 종일 하였다. 안채와 쪽문 사이의

작은 길에 쌓여있던 눈은 처음엔 민화의 작은 발자국을 하나씩 남기다가 그 위에 민화의 발자국으로

다져지고 또 다져졌다. 그렇게 민화의 발아래의 눈은 푹신하던 형체가 없어지고, 민화의 기다림은

고스란히 얼어붙은 빙판이 되어버렸다.

결국 민화는 하루 종일 서성대기만 하다가 염의 머리털 하나 보지 못하고 민상궁에게 붙들려 방안에

갇히고 말았다. 도대체 안채는 무엇이고, 바깥채는 무엇이기에 젊은 내외를 각각 분리해 놓고

지내게 하는지 민화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눈 바로 앞에 사랑채가 있고 그 안에 서방님이

계시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도 가까이 가지 못하는 여인의 예라는 것도 화가 났다. 그래서 툴툴거리며

서안 위에 책을 펼쳤다. 심각한 표정으로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던 민화는 책 위에 철푸덕 엎어지며

소리쳤다.

“이 책들은 모두 엉터리다!”

행여나 공주가 또 사랑채로 뛰어들지 않을까 염려되어 문 앞을 막고 앉아 있던 민상궁과 여종은

공주의 외침에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자가, 또 무엇 때문에 그러시옵니까?”

민화는 서안 위에 박고 있던 얼굴을 들어 턱을 괴며 울먹였다.

“민상궁, 이 책들 말이다. <소녀경>이나 <옥방비결>이나, <포박자>나 아마도 사내놈들이 죄다

쓴 것이 아니겠느냐?”

“아무래도 그러하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왜요?”

“그런데, 휴! 아무리 찾아봐도 없구나. 남자가 여자의 몸에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면 여자가

‘아이고, 살려주슈. 나 죽네.’ 이렇게 할 것이란 설명들은 많은데, 여자가 남자의 몸에 어떻게 하면

남자가 ‘아이고, 나 죽네, 한번만 더 해주.’ 이렇게 되는지는 없단 말이다. 여자의 몸의 변화에

따라 어느 정도의 흥분상태에 도달했는지까지 상세하게도 구분지어 설명되어 있건만 사내의

몸 변화는 설명이 없으니. 어째서일까?”

“망측하옵니다! 여인네들이 그런 것을 알아 무엇 할 것이옵니까? 행여라도 생각지 마옵소서.

체통을 생각하셔야 하옵니다.”

민화는 민상궁의 말에 표정을 쌜쭉하게 하여 고개를 다른 쪽으로 획 돌렸다.

“에잇! 숫처녀인 민상궁을 붙잡고 무얼 의논하겠다고······. 내가 사내 후리는 법을 터득하면 서방님도

그 맛에 홀려 나를 매일 찾지 않으시겠느냐? 그렇다고 내가 이 책들을 서방님께 쑥 내밀어

‘이 책에 있는 것처럼 해주시어요.’ 이렇게 말 할 순 없는 노릇이고.”

민상궁이 민화의 어이가 없는 말에, 하지만 실천에 옮길지도 모르는 가능성에 펄쩍 뛰면서 말했다.

“절대 아니 되옵니다! 만에 하나 그리하시오면 제 입에서 ‘아이고, 나 죽네.’ 소리가 나올 것입니다.”

민화는 민상궁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았다. 오직 염의 입에서 ‘공주, 밤새도록 합시다.’란 말이

나오는 것을 상상하느라 얼굴이 발그레 하기 바빴다. 그리고 화려하게 웃음 짓는 염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도 숨이 막혀, 상상속의 염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며 혼자서 몸을 비비 꼬았다.

민상궁은 민화의 모습을 보며 가련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귀엽기도 했다. 그리고 민화의 첫날밤이

생각나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염의 나이 18살, 그리고 민화의 나이 14살에 가례를 올렸다. 철없던 민화는 그저 염과 한집에서

살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가례를 올리는 날도 행복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민화의 생각과는

달리 가례는 올리되 15살 이전에는 합방은 할 수 없다는 <주자가례>에 따라, 가례만 올리고 한방에

있어보지도 못한 채 그날부터 민화는 안채에 염은 사랑채에 각각 분리되어 생활하게 되었다.

그리고 염은 여전히 민화 앞에서 신하가 공주를 대하는 예를 갖추었다. 14살의 어린 신부였던

민화는 며칠에 한번 정도도 안 되게 얼굴을 볼까 말까하는 염에게 잘 보이고자, 아침부터 분단장하고

머리엔 화려한 가체를 하고 온종일 있었다. 민화의 얼굴보다 몇 배는 큰 가체의 무게에 목이

아파 눈물이 날 것 같아도 오직 염에게 예쁘게 보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참았다. 그리고 지금처럼

그때도 사랑채 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서성거렸었다. 그러다가 혼자서 사랑채로 가는 뒷길에 숨어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런데 그 모습을 공교롭게도 염에게 들키고 말았다. 민화가 울고 있어서 인지

아니면 주위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날의 염은 다른 날과는 달리 민화에게

인사만 올리고 가버리지 않고 민화의 앞으로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공주, 이곳에 어찌 홀로 계십니까? 궁궐이 그리우신 겁니까?”

민화는 가체 무게에 짓눌려 도리질을 칠 수도 없었다. 그리운 것은 궁궐이 아니라 염이었지만

그렇다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다정한 염의 목소리에 야속한 눈물은 더욱 흘러내렸다.

민화의 눈물에 당황한 염이 다시 말했다.

“궁궐이 그리우시다면 내일이라도 저와 같이······.”

“아니어요. 그저······, 그저······다리(가체)가 무거워서······.”

미처 염이 보고 싶어서란 말은 못하고 거짓으로 가체 핑계를 대었는데, 염은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민화의 머리에 얹어진 가체는 버거워보였다. 염은 울고 있는

민화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끌었다. 민화는 어디로 가는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민화가 느낀

것은 오로지 자신의 손을 잡은 염의 따뜻한 손뿐이었다. 처음으로 잡아보는 염의 손이었고 염의

온기였다. 그래서 혹시나 놓칠 새라 작은 두 손으로 염의 손을 꽉 쥐었다. 염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곳은 민화의 방이었다. 민화를 앉히고 염이 한 일은 서툰 손길로 가체를 장식하고 있던 떨잠 등을

뽑아내고 가체를 걷어 낸 것이었다. 그리고 쪽진 머리에 비녀를 꽂고 그곳에 뒤꽂이 등으로 가볍게

장식을 해주고는 민화를 향해 더 없이 아름다운 미소로 말했다.

“공주의 뒤통수는 동그래서 참으로 어여쁘시옵니다. 허니 징그러운 다리로 가리지 마십시오.

저는 다리가 징그러워 싫더이다.”

“하지만······.”

“그럼 집 안에선 이러고 계시다가 출타하실 때 하시지요. 다른 이들에게 어여쁘게 보이고

싶으실 터이니.”

민화는 힘껏 도리질을 쳤다. 무거운 가체가 없어진 도리질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이젠 출타할 때도 안 할 것이어요.”

어차피 염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었던 마음이었기에 염이 징그럽다면 할 필요가 없었다. 염 이외의

다른 누구한테도 예쁘게 보이는 것엔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이대로 염이

벌떡 일어나 나가버리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염의 옷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염은 자신의 옷자락을

꼭 쥔 민화의 주먹을 보고는 멋쩍은 웃음만 짓다가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앉아 있어야 했다.

달리 나눌 말이 없어 염은 방바닥만 보고 있어야 했지만 민화는 너무나 행복해서 염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행복을 참을 수 없었던 민화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염의 볼에

입을 맞춰버리고 말았다. 민화의 얼굴이 붉어졌는지, 염의 얼굴이 붉어졌는지 서로는 알지 못했다.

때마침 붉은 노을이 어린 신랑신부가 있는 방안으로 몰래 걸어 들어와 둘을 훔쳐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민화는 첫 합방일만 손꼽아 기다렸다. 첫 합방일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지만 그것만

거치면 완전한 부부가 된다는 말을 들었기에 자신이 15살만 되면 더 이상 염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민화가 15살이 되기 직전에 전 홍문관대제학이 숨을 거두었다.

염은 부친의 삼년상을 무덤 옆에서 치르기 위해 산으로 들어갔고, 삼년간 둘은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 삼년은 그저 무심하게만 지나가지는 않았다. 민화의 그리움과 눈물을 거름삼아 민화는 꽃 같은 17살,

그리고 염은 21살의 청년으로 변화시켰다. 더 이상 어린 신부도 어린 신랑도 아니었다.

염이 산에서 돌아온다는 날, 민화의 꽃단장은 온전히 민상궁 몫이었다. 가슴 떨림이 손 떨림으로

번져 민화의 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왔다는 염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민화의 방으로 와주질 않았다. 민화는 삼일을 넘기지 못하고 또다시 쪽문 길에 떨어져 내린

붉은 단풍잎을 밟으며 서성거렸다. 혹시라도 염의 머리카락이나마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쪽문

틈새로 얼굴을 빼꼼이 내밀고 열심히 사랑채를 훔쳐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서럽도록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공주? 사랑채에 뭐가 있습니까?”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소년의 목소리가 아니라 근엄한 사내의 목소리로

변해있었지만, 변함없는 그의 난향이 이미 코끝에 다다라 있었기에······. 그리고 누군지 알 수 있었기에

더욱더 돌아볼 수가 없었다. 부끄러워 그 자리에 서서 쪽문만 손끝으로 매만질 뿐이었다.

“······삼일 전에 오셨다 들었사온데, 어이하여 소첩에겐 걸음하지 않으셨사와요?”

“산에서 내려와서 삼일간은 안채에 들어가면 아니 된다 하여 오늘 왔습니다. 그런데 내당에 없으시기에

이리 와 보았습니다.······제게 언제까지 등만 보여주실 것입니까?”

돌아보지 않아도 염의 미소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안돌아 볼 수도 없었다. 반쯤 돌아서서

얼른 곁 눈길로 염의 얼굴을 훔쳤다. 삼년 만에 민화의 눈앞에 선 염은 아름답기만 하던 모습에

남자다움이 더해져서 민화의 심장을 숨도 쉬지 못하게 움켜쥐었다. 예전에는 어색하던 갓과 도포도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마, 많이 변하시었어요.”

“공주도 그렇습니다. 처음에 못 알아 볼 뻔 하였습니다.”

어색한 부부의 사이로 붉은 단풍잎이 떨어져 내렸다. 그중 한 놈이 민화의 어깨위에 살풋 엉덩이를

걸쳤다. 그놈을 떨어내기 위해 염의 손이 뻗어져 민화의 어깨에 다다랐다. 민화는 염의 스치는

손끝에 잡힌 단풍잎을 따라 눈길을 돌렸다. 염은 희롱하듯 단풍잎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고 그에

눈길을 맞추던 민화의 시선도 염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염이 눈웃음을 건네 왔다. 그런데 민화는

미소에 답해주지 못하고 큰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눈물에 민망해진 민화는

울먹이는 소리로 단풍잎을 탓했다.

“붉은 것에 입을 맞추고 싶으시오면, 붉은 것이 단풍잎만은 아니어요.”

염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이번에는 염의 갓 위에 또 다른 놈이 엉덩이를 걸쳤다. 그놈은 민화의

손끝에 잡혀졌다. 그리고 그대로 민화의 입술에 다다랐다. 하지만 민화의 손은 염의 손에 잡혀져

아래로 끌어내려졌고, 단풍잎이 있던 자리는 염의 입술이 차지했다. 너무 놀라 처음으로 와 닿은

염의 입술을 미처 느낄 사이도 없이 다시 멀어졌고, 염은 빙그레 웃는 웃음과 더불어

속삭이는 듯 말했다.

“어찌 아시었습니까? 붉은 것을 탐하는 마음을 달래려 단풍잎을 먼저 쥔 것을.”

염은 민화에게 한 번 더 환한 웃음을 보이고는 쪽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민화는 급한 마음에

염의 도포 자락을 잡았다.

“저······, 저······.”

“말씀하십시오.”

“저 그동안 17살이 되었사와요. 그러니 이제······.”

염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별 말없이 쪽문을 넘어가버렸다. 민화는 한참동안 염이 사라진 문만

보고 있다가 안채로 돌아왔다. 그런데 방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관상감에서 뽑아준 염과의

합방일 날짜였다. 세 날짜 중 한 날을 민화가 지정하면 되는 거였다. 물론 따져볼 것 없이

제일 처음 날짜로 낙점했다.

그 날짜에 맞춰 집안은 조용히 첫 합방식을 준비했다. 민화도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몸의 향기를 위해 매일 꼬박꼬박 모향이삭과 잎을 달인 물에 영릉향(零陵香)을 넣은 것을 마셔야 했다.

비록 마실 때는 역해서 싫었지만 먹고 난 뒤에는 몸에서 향기가 뿜어져 나와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민상궁에게서 첫날밤을 치루는 사전 지식을 습득해야 했다. 듣기 민망해 하며 얼굴을

붉히곤 했지만 민화는 곧잘 알아들었다. 아니, 알아듣는 것처럼 보였다. 민화가 기다리던 첫날밤이

되었다. 염은 민화의 방으로 들어와 민화에게 큰 절을 한번 올렸다. 그리고 민화도 그에 대한 답으로

큰 절을 했다. 제일 먼저 염은 자신의 갓부터 벗고는 민화의 쪽진 머리에서 뒤꽂이 장식들을 뺀 뒤

비녀를 뺐다. 옷고름을 풀어 옷을 하나씩 벗기는 것도 가슴이 두근거렸고 염이 속옷차림으로

자신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끌어안는 것도 좋았다. 입술이 포개지면서 자신의 입안으로 염의 혀가

들어오는 것도 처음엔 깜짝 놀라긴 했지만 온몸이 뜨거워지면서 행복했다. 그리고 염의 손이

젖가슴을 쓰다듬을 때도 세상이 안보일 만큼 묘한 황홀감이 들었다. 그런데 황홀했던 것은

거기까지였다. 염의 몸과 민화의 몸이 하나가 된 그 순간 민화는 그만 비명을 지를 뻔했다.

무한정 좋을 것이라고만 여겼던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민상궁이 ‘아플 것이옵니다.

하지만 절대 표를 내어선 아니 되옵니다, 참으시옵소서.’라고 줄기차게 말해왔던 것이 머릿속에

뚜렷하게 들어온 순간이기도 했다. 민화는 민상궁의 말 때문이 아니라 혹시라도 염이 싫어하지는

않을까 그것만 걱정되어 입술을 깨물었다. 염이 자신의 몸을 완전히 거둬 갔을 때도 민화는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두 사람이 동침을 베고 누워서도 민화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염이 잠에 들어도

민화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천정만 보았다.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새벽달이 지기 전에 염은 옷을 챙겨 입고 민화의 방을 빠져나갔다. 아직 민화가 자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발걸음도 조심하면서 문을 조용히 여닫고 사라졌다. 그렇지만 민화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염이 나간 것을 확인 한 민상궁이 조심해서 건넛방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민화의 입에서 자그마한 신음소리가 나왔다.

“미, 민상궁. 여기······.”

민상궁이 놀라서 사잇문을 열고 민화의 방으로 들어왔다.

“괜찮으시옵니까?”

“민상궁. 나 참았다. 너무나 아픈데도 참았느니. 혹여 서방님이 언짢으실까 나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장하시옵니다. 잘 참으시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아프다.”

민상궁이 대견해 하며 미소를 보이자 민화는 누운 그대로 눈물만 흘렸다.

“그런데 다른 여인들도 이리 참겠지? 매번 이럴진대. 나도 참을 것이다. 서방님만 원하신다면

난 매일 이렇게 아프다고 해도 참을 것이다.”

“매번은 아니옵니다. 처음만 지나면 차차 좋아지실 것이옵니다.”

민화의 결심이 가엽게도 그 이후 염의 발길은 매일은 고사하고 한 달에 한 번도 오지 않는 날이 많았고,

민화의 몸 또한 더 이상 아프기는 거녕 염이 주는 쾌감에 젖게 되었다.

민상궁은 첫날밤 치른 뒤 울던 민화가 생각나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젠 그런

모습은 간 곳없고 여러 책을 뒤적이며 염을 이불속으로 끌어들일 궁리만 하고 있는 것이 영락없는

성숙한 여인네의 모습이었다. 책을 읽던 민화는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하루 종일 추운

바깥에서 서성거리다 지쳐버렸던 것이다. 민상궁이 민화를 이불 속에 눕혔다. 민화도 어차피 약속되어

있던 밤도 아니니 밤새워 기다린다고 해도 오지 않을 염이란 포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얼었던

몸이 따뜻한 이불 아래에서 풀어졌기에 쉽게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얼었던 마음은 아무리

따뜻한 이불이라 해도 녹아지지 않았다.

염은 운동 삼아 검술연습을 한 뒤에 목욕을 했다. 몸을 깨끗이 하고 방안에 앉으니 오늘 하루 종일

공주가 안 보였던 것이 걱정되었다. 한번쯤은 오가다 마주쳤을 것인데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윽고 어제 눈을 맞으며 자신의 뒤를 따라 걷던 것이 기억났다. 염은 문득 스치는

생각에 민화와의 합방날짜를 적어둔 종이를 서안 서랍에서 꺼내 보았다.

“이런, 어제였구나. 양명군이 계셨다곤 해도 내가 약조를 어기다니······.”

염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기 때문인지 민화를 떠올리자 오늘따라 몸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몸이 동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민화를 보지 못한 오늘하루가 허전했다. 아직 늦지 않은

밤이니 내당에 걸음 한다고 해도 안 될 것은 없었다. 그래서 염은 의관을 정제하고 중문을 지나

안채로 갔다. 그런데 민화의 방에 불이 꺼져 있었다. 불 꺼진 방을 보고 있던 염은 발길을 돌리려다가

혹시나 이제 막 잠자리에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작은 소리로 헛기침을 했다.

“어흠! 어흠!”

염의 이 작은 헛기침을 먼저 들은 것은 민상궁이었다. 바깥쪽 방에 새우잠을 자고 있던 민상궁은

얼른 잠에서 깨어나 낮은 자세로 기다시피 해서 사잇문을 열고 민화에게로 갔다. 이제껏 목이 빠져라

기다렸던 민화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민상궁은 어떻게 해서든 민화를 깨우고자 했다. 하지만 한번

잠에 빠져든 민화는 민상궁이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았다. 이윽고 발길을 돌려 염이 가려는

것이 느껴졌다. 민상궁은 급한 마음에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이미 염은 뒷모습을 보이며

안채의 섬돌 아래로 내려서고 있었다.

“의빈자가!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소서.”

염이 걸음을 멈추고 상체만 조금 돌려 민상궁을 보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공주자가께서 일어나실 것이옵니다. 그러니······.”

“아니다. 내 잠시 지나던 길이었느니라. 공주께서 깨어나실지 모르니 조용히 하라.”

염은 몸을 돌려 안채에서 사라졌다. 민상궁은 민화 대신 염의 하얀 도포자락에 매달려 기다려 달라

외치고 싶었다. 내일 이렇게 염이 왔다 간 사실을 말해야 하는 자신의 마음도 슬프기 그지 없었다.

염은 안채의 뒷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쪽문에 다다르지 못하고 그만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일어선 염의 눈엔 민화의 기다림이 빙판이 되어 있는 것이 들어왔다.

그리고 작은 발로 촘촘하게 닦은 길에서 자신을 기다리며 서성거렸을 민화의 모습이 에누리 없이

그려졌다. 민화의 생각에 웃음 짓던 염은 이내 내일 이곳에 다시 올지도 모르는 민화가 걱정되었다.

덤벙거리면서 온 민화가 자신처럼 엉덩방아를 찧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염은 삽을 가져다 길에

다져진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삽질도 서툴고 다져진 눈이 꽁꽁 얼어 진도가 나가진 않았지만,

차츰 길이 보였다. 대강 삽으로 길을 내고 난 뒤 다시 빗자루로 쓸어 완전히 빙판을 제거했다.

그리고 혹시나 민화가 쪽문을 넘을지도 몰라서 쪽문과 사랑채로 가는 길의 눈도 깨끗하게 쓸었다.

염은 홀로 쓸쓸히 뒤뜰에 섰다. 조용한 집이었다. 그리고 쓸쓸하리만큼 사람이 찾지 않는 집이기도 했다.

학문을 논하는 이들은 염을 찾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었고, 학문을 하지 않는 자들은 주로 향락과

사치를 일삼기에 염이 어울리길 싫어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쓸쓸한 집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염은 오늘따라 유난히 집안이 쓸쓸함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뒤뜰에 크게 자리한 매화나무가 염의

눈길을 잡았다. 가지마다 눈이 쌓여 있었지만, 그 눈 밑에 싹을 숨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섣달의 눈이 외로운 마을에 쌓여 아직 녹지 않았는데, 누가 사립문을 기꺼이 두드리겠는가?

밤이 오자 홀연히 맑은 향기가 일어, 차례로 몇 가지에 매화가 핀 것을 알았구나.”<눈 온 뒤(雪後)

-유방선(호:태재, 뛰어난 학자였으나 등용되지 못하고 유배생활을 했지만 문하에 서거정등의 많은

학자를 배출했음)>

나지막하게 시를 한 수 읊은 염은 매화나무를 향해 쓸쓸한 미소를 보내며 혼잣말을 했다.

“태재가 나를 앞서 내 마음을 읊었는가? 허나 태재는 나보다는 나을 것이야. 그에게는 문하의 많은

제자는 있지 아니 하였는가. 나는 그저 가슴 속의 불꽃만 스스로 삭이는 것 외엔 할 수가 없으니······.”

언뜻 쓸쓸한 눈빛을 가르며 매화나무 뒤의 그늘에 누군가가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염이 뚫어지게 그곳을 응시하자 그늘 뒤의 사람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눈길로 훔치는 것도 훔치는 것이라 할 수 있느니. 누군가? 이 나를 훔쳐보는 이가. 청녀(靑女, 눈과

서리의 여신)가 걸음한 것이 아니라면 나오너라!”

어두움이 발을 옮겨 디뎠는지 발아래 밟힌 눈이 뽀드득 하는 농염한 신음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이윽고 모습을 드러내며 어두움이 말을 했다.

“쇤네를 어찌 청녀의 걸음에 비할 수 있습니까?”

여인이었다. 하지만 염은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염의 시선을 눈이 반사하는 빛이 도와주었다.

희미한 달빛과 눈이 반사하는 빛에 의지해 여인의 형체를 살폈고 이내 염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설? 설이냐?”

#21

‘금기를 어기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설의 머릿속에서 장씨도무녀가 말했다. 하지만 그보다 염이 자신을 기억하고 이름을 불러준 것이

더 기뻐 머릿속 장씨의 말은 조용히 눈 녹듯 사라졌다.

“도련님, 쇤네를 기억하십니까?”

염은 머쓱하여 미소만 지었다. 아마도 어제 운이 물어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쉽게 기억해 내지

못했을 것이기에, 기억하고 있다란 답을 들려주기가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말을 돌렸다.

“오랜만이구나, 도련님이란 말은 이젠 듣지 못하는 말인데······.”

“그렇군요. 이젠 자가라 하여야 되는 것을······.”

설의 서글픈 중얼거림을 염은 느끼지 못했다. 오직 이곳에 설이 홀연히 나타난 것만이 궁금했다.

“여기서 무얼 하는 것이냐? 혹여 담을 넘은 것이냐?”

설은 답하지 않았다. 절대 의빈의 저택에는 가지 말라 하는 말을 어기고 그리운 마음에만 이끌려

온 것이었기에, 게다가 훔쳐보기만 하리라 했지만 넋을 잃고 보다가 염에게 들킨 것이기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염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리 있으니 기억이 나는 듯도 싶구나. 예전에도 너는 내가 무어라 묻기만 하면 그렇게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서 있었지. 그래, 기억이 나는구나.”

불만 가득한 표정. 기억이 나는 듯······. 설은 쓸쓸히 웃었다. 염이 평범하게 내뱉는 말들이 설에게는

설렘이 되고 비수가 되었다.

‘쇤네의 표정을 불만 가득한 것으로 기억하셨습니까? 천한 종년의 몸으로 차마 도련님 앞에 미소할 수

없었음을 모르시겠지요.’

‘이년’이 이름 되어버린 여종 아이가 있었다. 아비가 노비였고, 어미가 노비였다. 그래서 날 때부터

천하디천한 노비였다. 아비는 ‘이년’이 뱃속에 있을 때 어디론가 팔려갔단 말을 들었다. 어미 또한

‘이년’이 세 살 무렵엔가 어디론가 팔려갔단 말을 들었다. 그전에 어미가 자신의 딸을 무어라고

불렀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노비들이 남겨진 아이에게 ‘이년, 저년’ 천하게 부르다가 ‘이년’이

이름이 되어버렸다는 것 말고는 자신에 대해 아는 것도 하나 없었다.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이것 하라고 시키면 그저 시키는 대로 일하면 되었다. 구박하면 구박 들으면 되었고,

때리면 맞으면 되었다. 같은 노비들조차 ‘바보 등신 같은 년’이라 욕을 해도 그것이 기분 나빠해야

하는 것인지 조차 몰랐다. 이윽고 ‘이년’도 팔려 이집으로 오게 되었다. 자신을 사고 판 가격이

얼마인지 조차 알지 못했던, 7살 때의 일이었다.

새로 오게 된 집은 전에 있던 집보다 조금 더 큰 것 외에는 별반 다를 것도 없었기에 낯선 것 하나

모르고 익숙해졌다. 그리고 이 집의 누각에 글을 읽고 있는 염을 처음 보게 되었다. 그때는 멍하니

넋을 잃고 쳐다만 보고 있었던 이유도 몰랐다. 전복을 입고 복건을 쓴 대갓집 도령들은 그동안

수도 없이 보아왔었다. 자신에게 나뭇가지로 찌르고 발길로 걷어차도 응당 그것이 당연하려니

생각해왔던 그런 도령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기에, 해코지를 당하지 않으려면 재빨리 도망을 쳐야

했지만 발길과 눈길은 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실제로 벌어진 입에선 침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입에서 침이 떨어져 내리는 줄도 몰랐다. 염이 책을 보던 눈길을 들어 침 흘리는 지저분한

여종을 보았다. 하지만 여종에겐 그 움직임조차 현실 같지가 않았다. 꼼짝하지 않고 자신을 보고

있는 여종을 이상하게 생각하던 염은 자신의 서안 위에 있는 곶감 접시를 보았다. 염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곶감 하나를 쥐고 일어나 여종에게로 다가왔다. ‘이년’은 해코지를 당하지 않으려면

빨리 도망가야 했지만 자신에게로 가까워지는 아름다운 도령의 미소에 취해 더욱더 멍해졌다.

도령은 다가와 서서 발길질이 아니라 손을 내밀었다. 의아해 하며 본 그 손에는 곶감이 쥐어져 있었다.

“이것이 먹고 싶어 그리도 본 것이 아니냐?”

목소리조차 상냥했다. 그리고 발길질이 당연하다 여겼기에 내밀어진 곶감은 신기한 것이었다.

맑은 목소리가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인지 멍하니 보고 있었던 이유가 어쩌면 정말 곶감이 먹고 싶어서

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곶감을 보긴 했지만 눈에 들어 온 것은 곶감이 아닌, 새하얗고

아름다운 손이었다. 여종은 곶감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려다 말고 재빨리 뒤춤으로 손을 감추었다.

그리고는 손등을 등 뒤에 계속해서 문지르기만 할 뿐 앞으로 손을 내밀지 못했다. 시커멓고

거친 손이었다. 손톱 밑에는 시꺼먼 때가 끼어 있고, 손등은 쩍쩍 갈라져 피딱지까지 앉아 있는

못생긴 손이었다. 하얗고 아름다운 손에 비해 자신의 못생긴 손의 차이를 안 그 순간 ‘이년’은 태어나서

처음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세상에는 아름답고 추한 것이 나뉘어 있고, 귀하고 천한 것이 나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추하고 천한 쪽에 분류되어 있는 존재임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아무 말 없이 퉁명스런 얼굴로 있는 여종에게 염이 다시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여 새로 온 아이냐? 이름이 무엇이냐?”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차마 ‘이년’이라 말할 수가 없었다. 이제껏 누가 물어보면

잘도 답하던 것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말하기 싫은 자신의 이름을

안 그 순간, 수치심이 무엇인지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다시 한 번 곶감을 내미는 손길을 따라

눈길을 들어 주인댁 도령을 보았다. 박꽃마냥 새하얀 치아를 보이며 웃고 있었다. 그 미소에 답하여

마주 미소 짓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는 염의 손에 있는 곶감을 낚아채듯 빼앗아 쥐고

그 자리를 도망쳤다. 도망쳐 달리는 두 눈에서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맞으면 아프기 때문에

울어는 보았지만, 누가 때린 것도 아닌데 가슴 한 켠이 아프면서 눈물이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추운 응달에 몸과 마음을 숨기고 앉아 곶감을 먹으면서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소매로 눈물,

콧물 닦으면서 하염없이 먹었던 곶감이 맛을 못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가슴이 아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그때 처음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왜 그런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서글픔을 깨닫기엔 7살 나이는 아직 어리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몰래 눈물 훔치다가 느즈막하게 행랑에 가니, 행랑어멈이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년아! 어딜 있다가 온 거야?”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자 행랑어멈이 바쁜 손길로 ‘이년’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그리고 마루에

앉히고는 댕기머리를 풀어 그곳에 이를 잡는 약을 뿌렸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설’이다.”

“네? 왜요?”

“넌 원래 우리 아기씨 몸종으로 데리고 온 거야. 그런데 네 이름은 아기씨께 안 좋으니 도련님께서

‘설’로 바꾸라고 하셨어. 어울리지도 않게 설이라니. 네 년한테는 과분한 이름이지, 암.”

“도련님? 이 댁에 도련님은 몇 분인데요?”

“딱 한 분뿐이지. 어찌나 출중하신지 아직 11살 밖에 안 되셨는데도 벌써부터 온갖 대갓집에서

넣어대는 매파를 거절하느라 골치가 아파. 네 년은 얼굴도 보아선 안 되는 분이야!”

‘이미 보았는데······.’

설······. 입속으로 발음해보았다. 혀가 굽이져 휘어지는 것이 정말 어여쁘게 느껴졌다. 새하얀 눈은

자신에게 과분한 것을 떠나 어울리지 조차 않는 것 같았지만, 어느새 입 꼬리는 저절로 올라가 있었다.

며칠 동안이나 때 빼고 광 낸 뒤, 태어나서 처음으로 깨끗한 옷을 입고 아기씨가 있다는 별당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안채 중에서도 첩첩이 안쪽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그곳에서 처음 연우를 보게 되었다.

바깥에 우두커니 서 있는 설을 향해 예쁜 미소를 보이던 아기씨는 그 미소뿐만이 아니라 생긴 모습까지

도련님과 닮아 있었다. 그리고 상냥한 목소리도 닮아 있었다.

“추운데 왜 그러고 있느냐? 이리 오지 않고.”

주춤거리며 가까이 다가가 앉자 연우는 설의 손을 잡아끌어 화로 위에 손을 따뜻하게 올렸다.

도련님의 손과 닮은 아름다운 손이 자신의 못생긴 손을 잡고 있는 것이 부끄러워 얼른 빼내려고 하자

연우는 오히려 더 꽉 잡았다.

“네 손이 너무 차구나. 이러고 있으면 따뜻해질 것이야. 설이라고 들었다. 나이는 어찌 되느냐?”

“이, 일곱······.”

“일곱? 나보다 한 살 어리구나.”

설은 다시 한 번 연우를 보았다. 한 살 많다고 해도 키나 덩치는 자기보다 자그마해 보였다.

그리고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예쁜 모습에 설은 다시금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렇게 처음 만난

연우는 설에게 ‘자신이 모시는 아기씨’가 아니라 자신에게 새롭게 이름다운 이름을 준

‘도련님의 누이’였다.

연우의 몸종이란 자리는 무척이나 좋은 것이었다. 연우가 설에게 어리다는 이유로 가벼운 심부름만

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자주 가까이서 도련님을 뵐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염은 누이를

아끼는 마음이 지극했기 때문에 별당에 자주 와 연우를 돌보면서 책을 읽어주었다. 비록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미소가 아니어서 훔쳐보아야만 했지만, 그것이 서럽지는 않았다. 어쩌다 설과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보내주긴 해도 설은 그 미소에 퉁명스런 표정으로 대꾸하는 것이 전부였기에

서러워할 수도 없었다.

한번은 지나가다 염이 혼자서 검술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서툰 검을 휘둘려 짚으로 된

과녁을 베었는데 그만 검이 들어가다 말고 멈춰버리고 말았다. 염은 끙끙 거리며 검을 다시 빼내려고

애를 썼고 그 모습에 설은 숨어서 킥킥 거리며 웃었다. 그때는 염의 검술이 무엇이 서툴고 어떤

점이 잘못된 것인지 몰랐다. 그저 실수하는 그 모습조차 멋있어서 가끔 훔쳐보러 가곤 했다.

그러다가 염과 그 친구들이 함께 검술을 연습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친구 중에서 유난히

말없는 도령의 자세와 비교해서 본 설의 눈엔 염의 잘못된 자세가 확연이 들어왔다.

그래서 염 혼자 연습하는 때는 기다려 다가가 처음으로 자신 있게 말을 붙였다.

“도련님, 도련님의 자세는 잘못된 것이 많습니다. 잠깐만 검을 빌려주십시오.”

염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검을 설에게 건네주었다.

“다치지 않게 조심하거라.”

설은 염의 친구들의 자세를 흉내 내어 다리를 벌리고 팔꿈치에 각도를 내어 검을 눈의 시선에 맞춰 들었다.

“도련님은 언제나 팔꿈치가 아래로 쳐집니다. 그러니 검이 가깝게는 시선에 맞춰지는 것 같아도,

멀리로 뻗으면 힘이 들어가지 못하고 과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후 검을 뻗으며 휘둘러 과녁을 베었다. 비록 검이 다 베지 못하고 과녁 중간에 걸쳐지긴 했지만

어린 여아치고는 상당한 솜씨였다. 염이 놀란 눈으로 말했다.

“언제 검을 배운 적이 있느냐?”

“아,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다 연습하시는 것을 보았을 뿐인데······.”

“나보다 재능이 뛰어난 것 같지만······.”

염은 설에게서 검을 받아들고는 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설이라고 하였느냐? 여인은 검을 쥐면 그 운명이 슬퍼진다 하였다. 그러니 장난으로라도

검을 쥐지는 말아라.”

설은 염의 얼굴을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또다시 도망을 쳐 그늘진 곳으로 몸을 숨겼다.

염의 손이 닿은 정수리가 너무나 뜨거워 마치 데인 것 같이 화끈거렸다.

‘여인······.’

설은 여태껏 몰랐던 것을 염의 입을 통해 알게 된 것 같이 설렜다. 자신이 여인의 몸이란 것을

새롭게 알게 된 그때, 또 하나 알게 된 것은 염은 자신과는 반대로 사내라는 것이었다. 나이 8살에

알게 된 두근거림이었다. 그렇게 알게 된 두근거림은 이내 차가운 슬픔이 되어 설의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얼굴도 보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는 그저 얼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설은 그렇게 9살이 되어도 염을 훔쳐만 보았고, 11살이 되어도 훔쳐만 보았고,

13살이 되어도 여전히 훔쳐만 보았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염 앞에서는 미소를 보이지 못했다.

미소를 보여선 안 되는, 마음을 보여선 안 되는 천것이란 것을 어린 나이에도 잘 알고 있었기에

염 앞에서는 깊어지는 마음이 더해질수록 그만큼 더 퉁명스러워졌다. 마치 눈이 불꽃 가까이 가진

못하고 그 멀리에만 쌓이고 또 쌓이듯······.

설은 또 다시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팔려가게 되었다. 연우가 세자빈으로 간택된지 20여일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연우는 아파서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있고 염은 숙부 댁에 갇혀 보이지도 않는데,

전 홍문관대제학은 홀연히 설을 무노비로 팔았다며 한 여인에게 넘겼다. 그 여인이 장씨도무녀였다.

설은 처음엔 어안이 벙벙해서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장씨가 설의 팔을 잡아끌고 대문을 나설 때야

자신에게 닥친 것이 어떤 일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두 번 다시 염을 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더 이상 훔쳐만 보는 일도 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었다. 설은 미친 듯이 집으로 다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는 전 홍문관대제학의 다리에 매달려 눈물로 빌고 또 빌었다. 몇 배는 더 일할 테니 다른 곳에

보내지만 말아달라며 소리 내어 울었다. 목이 쉴 정도로 울었지만 그는 설을 다시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설은 장씨의 손에 끌려 이 집의 대문을 넘어갔다. 끌려가면서도 설은 소리 내어 울었다.

그리고 그렇게 끌려가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뱃속에 있을 때 자식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어디론가

팔려갈 수밖에 없었을 노비였던 아비를 떠올렸고, 자신이 세 살 때 어린 자식을 두고 어디론가

팔려갈 수밖에 없었을 노비였던 어미를 떠올렸다. 그들의 슬픔이 더해져서인지 아니면 염을 보지

못하고 가는 슬픔이 커서인지 설은 더욱더 큰소리로 울 수밖에 없었다.

“울어라. 주인이 팔면 팔리고 건네면 건네는 대로, 그리 옮겨 다니는 것이 노비의 팔자.

소 돼지 접붙이듯 아무 놈이나 씨를 붙여도 아무 말 못하는 것이 종년팔자, 그 씨의 아비 되어도

자기 자식이라 말 못하는 종놈팔자, 종년이 낳은 씨는 종년의 자식이 아니라 주인집의 소유에 불과한

노비팔자. 그래, 울어라. 세상이 네년 눈물로 홍수가 난다한들, 네년의 종년 팔자는 바뀌지 못하니.”

설에게 나지막하게 뇌까리며 걷는 장씨의 잔인한 말이 오히려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 후, 설의 주인이 홍문관대제학에서 장씨도무녀로 바뀌었다. 하지만 여전히 연우의 몸종이었다.

단지 연우가 홍문관대제학의 여식이 아니라 이름 없는 무녀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설에게

연우는 여전히 ‘도련님의 누이’였다. 그 누이를 지켜주고 싶었다.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래서 도련님의 손과 닮은 연우의 손이

망가지는 것이 싫어 그만큼 자신의 손이 망가졌다. 연우에게서 나는 도련님의 향기가 지워지지

않게 수시로 산을 돌아다니며 난초를 구해서 말리고 갈아 목욕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도 그리움이

더욱더 사무치는 날이면 홀로 도련님이 하던 몸동작을 따라했다. 도련님이 가지고 있던 검과 비슷한

길이의 나뭇가지로 말없이 서있는 나무를 때리고, 죄 없는 하늘을 찔렸다.

그러다가 결국은 염에 대한 그리움을 못 참고 장씨에게서 도망을 치고 말았다. 온양에서 한양까지

물어물어 고생하여 도련님의 집에 도착했다. 막상 도착하고서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담 너머

서성거리다가 염을 보게 되었다. 담을 넘어 염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거지꼴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가 부끄러워 또다시 훔쳐만 보고 있었다. 그동안 더욱더 멋있게 변해있었다.

그런 도련님에게 사랑스러운 여인이 총총걸음으로 다가가 말을 거는 것이 보였다.

“서방님,······.”

그 뒤에 여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서방님’이란 말만 귓속에 맴돌고

또 맴돌아 넋을 잃게 만들었다. 이윽고 염의 소리도 들렸다.

“공주,······.”

그리도 그 뒤의 말도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설은 급하게 응달로 자신의 초라한 몰골과 신분을

숨기며 앉았다. 옛날처럼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대신 웃음만이 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천한

노비와 가장 존귀한 공주. 그렇게 응달에 앉아 염을 그리워한 자기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사랑마저

마음껏 비웃었다.

“그동안 어디서 무얼 하였느냐? 이리 온 것을 보니 한양에 살고 있나 보구나. 주인은 좋은 사람이냐?”

매화나무 아래에서 염은 여전히 미소로 설에게 물었다. 설은 그동안 계속에서 염에게 다니러 와서

훔쳐만 보고 갔던 것처럼, 오늘도 여전히 그의 앞에 다가가 서지 못하고 눈 쌓인 발아래만 보았다.

“네, 좋은 주인 밑에 있습니다.”

“다행이구나. 어느 댁에 있느냐?”

설은 대답하지 않았다. 답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퉁명스런 얼굴로 가만히 있자 염이 다시 말했다.

“네가 언제 이곳을 떠났던가? 우리 연우가 죽기 전인가, 후인가?”

“전입니다.”

“······그래, 죽은 것은 알고 있구나.”

설은 염의 슬픈 표정을 외면했다. 그리고 자신의 향해 보인 표정 모두가 연우가 생각이 나서임을

설은 모르지 않았다. 염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제 처녀가 다 되었구나. 머리에 댕기가 있는 것을 보니 아직 혼인은 아니 한 것이냐?”

“네.”

“이런, 어찌하다?”

염이 설을 물끄러미 보았다. 하지만 설은 염이 자신을 보고 있는 그 순간에도 그의 눈동자는

설이 아니라 연우를 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연우가 살아있다면 자기처럼 처녀가 되어

있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염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설은 퉁명스런

얼굴로 고개만 숙였다.

이때 멀리서 하인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설이 먼저 그쪽을 보고 염도 따라서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빈자가, 추운데 여기서 무얼 하시는 겁니까?”

“아, 예전에.”

염이 소개시켜 주려고 설이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미 설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네? 무어라 하시었습니까?”

“아니다, 아무것도.”

염은 이상한 예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흔적조차 없었다. 그리고 몇 달 전, 여행을 떠났을 때

자신을 따르던 정체 모를 무언가가 생각났다.

‘설마, 저 아이가? 노비의 몸으로 나를 어찌 따라다닐 수 있단 말인가? 이상 하구나······.’

설이 염의 눈길이 돌려진 틈 사이로 담을 넘어 도망친 곳은 누구의 집인지도 모르는 담장 어두움이었다.

그곳에 웅크리고 앉아 염과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몇 마디 주고받은 기쁨보다는 여전히 변함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웃었다.

“이년의 몸뚱아리를 이 땅에 점지하신 천주제신이시여! 이년이 그리도 천합니까? 살도 천하고

피도 천하고 뼛속 깊이 천하니, 이 마음마저 천한 것입니까? 어찌 이리도 천하게 점지 하셨습니까!”

다음날 새벽 무렵, 잠자던 염은 가늘게 눈을 뜨다가 희미한 사람 형체에 깜짝 놀라 몸을 반쯤 일으키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형체의 주인이 민화임을 곧 알게 되었다. 민화는 자다 깬 모습 그대로였다.

“고, 공주. 예서 뭐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것보다 언제부터 이러고 계신 겁니까?”

“조금 전에. 어젯밤에 내당에 오시었다 들었사와요. 그래서······.”

“잠시 지나가다 들린 것입니다.”

“미워요!”

“네? 무엇이요?”

어리둥절해 하는 염의 가슴팍을 민화는 성난 얼굴로 때렸다. 비록 때리는 주먹에 힘이 들어가 있진

않았지만 염이 밉다는 민화의 말은 진심이었다. 이젠 단 하루도 마음 놓고 기다리지 않을 날이

없게 되었다. 이제껏 안 기다린 날은 단 하루도 없긴 했지만, 이제껏 보다 더욱 지극하게 기다리게

되어버렸다. 어제처럼 아무리 졸려도 이젠 잘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만큼 더 가슴

아파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약속일도 아닌 어제, 내당을 찾아준 염이 고맙기 보다는

하염없이 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차림으로 여기까지 온 것입니까?”

민화는 염의 가슴팍을 때리다 말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민상궁이

흥분한 말투로 어제 염이 다녀간 말을 해주었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즉시 사랑채로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막상 사랑방에 들어와서도 염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고 있느라 깨우지 못하고 있었다.

염이 황당한 듯 미소 지으며 자신이 덮고 있던 이불을 들쳤다.

“공주, 추운데 이리 들어오시지요.”

민화는 냉큼 이불 속으로 들어가 염의 품안에 얼굴을 묻었다. 염은 이불을 푹 덮어주고는

그 이불 속에서 싸늘한 민화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아직 제가 미우십니까?”

민화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손은 어느새 염의 적삼 옷고름을 풀어 헤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아닌 밤에 홍두깨마냥 적삼차림으로 사랑채로 뛰어간 공주 탓에, 민상궁은

혼비백산하여 공주의 의복을 챙겨들고 사랑채에 도둑걸음으로 왔다 갔다 하는 수고를 하고 있었다.

#22

종묘대제를 위한 왕의 종묘정전으로의 대가(가장 성대한 왕의 궐 밖 행차) 행차 때문에 경복궁

일대와 한양이 동시에 시끌벅적했다. 왕의 침전도 마찬가지였다. 궁녀가 아닌 내관들이 조심스럽게

훤에게 왕의 최고 예복인 구장복을 입히고 옷고름을 매어주었다. 앞은 양 어깨에 용의 문양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저 하늘을 상징하는 화려한 검은 색만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뒤에서 보면 등에 산의 문양이 있고,

양쪽 소매 끝에 불, 꿩, 종이(宗彛, 호랑이와 원숭이)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 뒤를 이어 다른

내관이 대대(大帶)와 폐슬(蔽膝)을 받들어 훤의 가슴에 둘렸다. 그리고 차례로 패(佩)와 수(綬)를

장식했다. 마지막으로 옥대를 한 뒤 머리에 면류관을 씌었다. 훤은 눈앞을 류(旒, 앞뒤에 옥과 오색구슬

등을 꿰어 늘어뜨린 것)가 가로막는 것이 답답해서 싫었지만 구장복 자체는 좋아했다. 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7살 때, 세자 책봉식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세자 신분으로 처음

칠장복을 입고 면류관을 썼었다. 그런데 책봉의례가 길다보니, 옷은 작은 몸이 감당하기엔 엄청나게

무겁고, 면류관의 류는 눈앞에서 흔들거려 어지러운데 거기다 오줌까지 마려웠다. 온갖 대신들이

즐비하게 모여 있으니 어린 나이여도 상황의 중대함은 알았기에 의젓하게 행동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몸은 비비 꼬이고 식은땀까지 났었다. 하지만 훤보다 더 식은땀을 흘린 사람은 훤의

낌새를 알아 챈 부왕이었다. 그때의 부왕이 입고 있던 구장복과 같은 것을 현재 훤이 입고 있었다.

훤은 상선내관이 받들어 건네는 청옥으로 된 규(圭)를 양손으로 모아 잡았다. 그러자 뒤에 있던

소매 끝의 문양이 앞으로 드러나 더욱더 화려해졌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강녕전을 나섰다. 훤은 월대를 내려서기 전에 먼 눈길로 성숙청 쪽을 보았다.

제례 준비로 인해 6일 동안 월을 보지 못한 보고픔이 추위보다 더 사무쳤다. 매일 하루에 한 번씩

목욕재계를 하고 주위에 여인을 가까이 두어선 안 되는 법도 때문이었다. 그전에는 여인이 아니라

그저 무녀일 뿐이라 했기에, 이럴 때만 달라지는 사람들의 말에 훤은 쓴 웃음만 나왔다. 그리고

어두운 작은 방에 갇히듯 몸을 숨기고 있을 월이 가엾어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궐내에 월을 가둬 두고 그녀를 더욱 괴롭히고 있는 것이 아닌지, 월을 조금이라도 더 위한다면

궐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 건 아닌지 훤은 고민했고 또 그 고민에 당황해 하고 있었다.

왕은 근정전으로 나아갔다. 그 뒤에 다른 날과 달리 검은색 철제 갑옷을 입고 투구를 옆에 든 운검이

따랐다. 왕이 홍련(紅輦, 왕의 붉은 색 가마)에 오르자 내관이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전후좌우로

가리개를 내리려고 했다. 그래서 훤이 급하게 저지 했다.

“무얼 하는 것이냐? 궐 밖에 백성들이 모이지 않은 것이냐?”

“아니옵니다. 이런 추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신민이 상감마마를 뵈옵고저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고 있사옵니다. 며칠을 달려온 이들도 있다하옵니다.”

“그런데 가리개로 나를 가리다니! 비록 백성들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나 나는 그들을 볼 것이다.

백성들도 나를 보고자 뿌리친 추위가 아니냐.”

“하오나 옥체를······.”

내관은 훤의 고집이 느껴졌기에 스스로 입을 다물고 물러났다. 전후에 수십 명의 가마꾼이 홍련을

들고 일어서자 운도 검은색 바탕에 황금색 용 문양이 그려진 용문투구를 머리에 썼다. 그리고 말에

올라타서 검은색 복면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용문투구 앞에 차양가리개가 있어 눈을 감추기 때문에

운검은 머리끝부터 발끝, 심지어 타고 있는 말까지 새까맣게만 보였다. 훤은 운의 말이 홍련의

바로 뒤에 자리를 잡고 서자 혼잣말처럼 운에게 말했다.

“아깝구나. 그 잘난 얼굴을 신민은 구경도 못하니.”

운검은 왕의 말을 못들은 건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는 건 건방진 흑마도

마찬가지였다.

행렬이 시작되었다. 맨 앞에는 갑옷과 무기로 완전무장한 수백 명의 군사들이 정렬하여 왕의 위용을

백성들에게 전하고, 그 뒤를 화려한 깃발과 창검들이 따르며 구경나온 백성들에게서 왕에 대해,

또한 나라에 대한 경탄과 경외심을 거둬들였다. 그 다음 왕의 홍련의 앞 뒤로 군악대가 장중한

음악을 연주하며 왕을 호위했다. 왕의 뒤로 양명군과 더불어 종친들이, 염과 더불어 문무백관들이

말을 타고 왕을 수행했고, 마지막으로 무장한 군사 수백 명이 따랐다. 길가에 오돌오돌 떨어가면서

왕의 행렬을 구경나온 백성들은 비록 왕이 가까이 오면 일제히 땅바닥에 엎드려야 했지만, 그 외의

행렬들은 일어나서 구경할 수 있었다. 그리고 1만 명에 달하는 웅장한 행렬의 규모를 통해 자신들의 나라,

즉 왕의 건제함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행렬 이외에도 수백 명의 매복병들이

경복궁과 종묘정전 사이에 곳곳에 숨어 왕을 호위했다.

왕이 경복궁을 벗어남과 동시에 경복궁과 한양 일대는 비상계엄이 발령되었다. 왕이 경복궁에

있을 때는 모든 행정과 궁궐 수비는 왕 중심의 지배권 하에 놓여 있다. 하지만 왕이 이렇게 경복궁을

비우게 되면 궁궐 수비는 유도대신, 유도대장, 수궁대장, 이렇게 세 명의 책임 하에 놓이게 된다.

유도대신은 한양의 행정적 총책을 맡고, 유도대장은 궁성 밖과 한양의 경비를 담당하며 각각 궁궐 밖에서

비상 숙직을 했다. 이 둘은 국왕과 대신들의 협의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수궁대장은 이들과는 달리

왕의 장인인 국구가 담당하는 것이 법규였다. 그리고 수궁대장의 역할은 궐내에 숙직하면서 궁궐

안의 수비를 책임지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훤이 비운 경복궁은 온전히 파평부원군의 손아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몇 달 전, 온양행궁에 행차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었다. 이것이 훤이 가장

싫어하는 법이었고, 반대로 파평부원군은 가장 좋아하는 법이었다.

훤은 축시(새벽1에서 3시 사이)에 시작되는 제례를 기다리기 위해 종묘정전의 어숙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목욕재계를 위해 어목욕청으로 들어가 물에 몸을 담갔다. 종묘정전! 죽은 왕들이

사는 궁궐이었다. 언젠가는 이곳에 훤도 모셔질 것이었다. 그래서 이곳에만 오면 왕임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미약한 자신의 힘을 더욱더 절실히 느끼게 되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아마도 세종도 그러

했을 것이고, 성종도 그러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비도 그러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훤은 부왕이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함께 이곳에 왔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그것이 마지막인지도

몰랐었다. 하지만 부왕은 자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음을 무의식중에 느꼈기 때문인지,

아니면 세자와 가까이 있게 되어서 인지 처음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조금이나마 보였었다.

어숙실 내에 있는 세자재실에 세자인 훤이 머물고, 어재실에 왕이 머물렀다. 조용히 정좌하고 앉아

있던 훤은 기분이 묘해졌다. 평소 자선당과 강령전은 너무나 멀리 있기 때문에 아버지란 존재를

느끼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곳 어숙실에선 몇 발자국만 가면 아버지가 계신 어재실에 들어갈 수

있단 생각에 아버지가 왕이 아닌 혈육으로 무한정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면류관은 벗어두고

칠장복 차림으로 앞의 뜰로 나갔다. 그런데 그곳엔 왕도 면류관을 쓰지 않은 구장복 차림으로 나와

하늘의 별을 보고 있었다.

“아바마마, 추운데 이곳에서 무얼 그리 보시옵니까?”

왕은 다른 날과는 달리 아버지 된 눈으로 세자를 보았다.

“세자야 말로 무엇 하러 나왔느냐?”

훤은 달리 할 말이 없어 하늘의 별을 보며 말했다.

“소자도 하늘의 별을 보러 나왔사옵니다.”

왕은 쓸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 우리 세자는 내 앞에서 소자라 칭하는데, 양명은 꼬박꼬박 나에게 소신이라고만 칭하지.

언제부터 그랬을까······. 난 못난 아비야. 그것조차 모르고 있다니. 우리 세자는 몇 살이 되었느냐?”

“올해로 19살이 되었사옵니다.”

“열아홉. 아직도 어리구나. 내가 우리 세자를 위해서 조금은 더 살아야 할 텐데······.”

“아바마마는 강령하시옵니다. 그리 말씀하시지 마옵소서.”

왕은 여전히 쓸쓸한 미소로 훤을 보며 말했다.

“내 아들 세자. 왕도 사람이기에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나도 그러 할 것이다. 그것이 내일일지, 1년 뒤일지,

10년 뒤일지는 모르겠지만.······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소자, 새겨듣겠사옵니다.”

“······미안하다는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느니.”

“무슨 뜻이온지 소자 미진하여 알아듣지 못하겠사옵니다.”

“우리 세자를 위해 지켜주고 싶었는데, 이 아비가 무능하여 놓아버리고 말았어. 미안하구나.”

“무엇을 지켜주지 못하셨단 말씀이시옵니까? 그리고 무엇을 놓아버리셨단 말씀이옵니까?”

왕은 자신의 아들이 말하는 요점을 정확하게 받아들여 준 것이 기뻤는지 환하게 웃었다.

“우리 세자는 영리하면서도 현명하단 것을 내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언젠가는 나의 이 말의 뜻을

알게 될 것이야. 만약에 그런 날이 오거든, 내 미리 부탁을 하겠느니. 너와 같은 피를 가진 이들!

그들을 용서해 다오.”

훤은 왕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끄러미 왕의 눈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왕은 다정한

손길을 훤의 어깨에 올렸다. 그리고 젖어드는 눈빛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지키고자 했던 이들을 용서하고, 부디 지켜다오. 정 아니 되겠거든 제일 먼저 이 아비를

용서하지 마라.······내 아들 세자야. 왕의 자리란 쓸쓸하단다. 오직 자기 자신 이외는 모두가 언제든

적이 될 수 있고,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적과 결탁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런데 그 적이 자신의 핏줄

일 수도 있을 것이야.”

그 당시 기억을 떠올리던 훤의 이마 사이가 심하게 구겨졌다.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라 그저 평소와

같이 왕의 도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상황이 되고 보니 부왕이 했던 말의 뜻이

어쩌면 세자빈 사건을 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억을 악착같이 더듬어

토씨 하나, 표정 하나까지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여전히 무슨 의미인지 파악이 안 되었다.

‘세자를 위해 지켜주고 싶었던 것이 만약에 연우낭자였다면, 놓아버렸단 것은 이 사건의 가담자들?

아니, 그건 아닐 것이야. 아바마마는 누구 소행인지 알고 계셨을 듯하니. 그들을 일컫는 말이었다면

용서해주었단 말이 더 맞는 말이었을 터이니. 아무리 생각해도 지켜주고 싶었다는 인물과 놓아버렸다는

인물이 같은 의미가 분명한데, 그렇다는 건?’

훤은 생각에 빠져 물에 일렁거리는 자신의 물그림자를 보았다. 그 속에 부왕이 서글픈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순간 훤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물이 요란하게 출렁이다가 차츰 차분해졌다.

찬찬히 다시 살펴보니 부왕의 눈빛과 같은 자신의 모습이었다. 물그림자의 부왕에게 마음속으로 물었다.

‘연우낭자이옵니까? 아바마마가 놓아버렸다는 이가? 놓아버렸다는 의미가 대체 무엇이옵니까?

놓아버렸다는 것은 도망가게 내버려 두었다는 뜻인데, 연우낭자가 도망이라도 했단 말씀이옵니까?’

마음속으로 아무리 물어도 부왕의 눈빛은 답이 없었다. 물속에 있는 부왕의 눈빛에 다시 물었다.

‘지켜야 하는 핏줄들은 또 무어란 말씀이옵니까? 제가 용서해야 하는 핏줄이 혹여 할마마마만이

아니란 말씀이옵니까?’

답이 없는 물속의 눈빛을 일렁이는 물결이 산산조각 내며 흩어 버리고 말았다.

축시가 시작되는 종소리가 보루각에서 시작되어 종각에도 울러 퍼지자, 일렁이는 물결에 산산조각 난

훤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종묘제례가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자신의 형인 양명군도 가까이에 있었다.

하지만 제주는 형인 양명군이 아닌 왕인 훤의 몫이었다.

해가 떠 날이 밝아져서야 모든 종묘제례는 끝이 났다. 그리고 환궁을 위한 어가 행렬이 다시 시작되었다.

근 7일간 월을 보지 못한 훤은 어서 강녕전에 들어가자마자 월을 불러 볼 것이란 기대로 마음이 조급했다.

그리고 오늘 정무는 쉬기 때문에 하루 종일 월을 곁에 둘 것이란 생각도 했다. 그래서인지 종묘정전으로

가던 길과 경복궁으로 돌아가는 길이 같은 길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길이 훨씬 길게 느껴졌다.

강녕전에 들어서자마자 내관에게 일러 월을 데려오라 명했다. 그러고도 무거운 구장복을 벗지 않았다.

구장복은 왕이 가례를 치를 때 입는 옷이기 때문에 어쩐지 월에게 자신의 차림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운도 투구만 벗은 채로 갑옷 차림 그대로 있어야 했다. 훤이 월을 기다리기가 조급하여

자리에 일어선 채로 서성거리고 있자니 문 밖에서 내관이 아뢰는 소리가 들렸다.

“상감마마, 중전마마 드셨사옵니다.”

월이라 생각하고 반가웠던 마음에 순식간에 찬물이 끼얹어진 기분이었다. 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 털썩 앉았다.

“들라 해라.”

문이 열리고 화려한 가체와 당의 차림의 왕비가 들어왔다. 하지만 의복이 아무리 화려해도 혈색은

더 없이 어두워만 보였다.

“어쩐 일이요?”

훤의 차가운 말에 중전은 멈칫하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례는 잘 치르셨는지요?”

“어느 때와 다름없었소. 다른 볼일은 없는 것이오?”

“네? 아, 그것이······.”

중전도 이렇게 오고 싶지 않았다. 왕에게 와야 할 일이 생겨도 온갖 핑계를 대면서까지 안 오려고

애를 썼지만, 오늘은 파평부원군의 잔소리에 어쩔 수 없이 올 엄두를 낸 것이었다. 그런데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나가라는듯한 왕의 종용을 당하자, 힘들게 생각해둔 대화거리가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교태전에서 뿐만이 아니라 왕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 또한 단 한순간도 왕비였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중전의 눈에 비친 왕 또한 단 한순간도 지아비였던 적이 없었다. 왕비가 나가지 않고 앉아있자

훤은 이대로 있다가는 월이 들어오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귀찮은 듯 말했다.

“밤 새 제례를 올렸더니 피곤하오.”

“아! 제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사옵니다. 그럼 편히 쉬시옵소서.”

중전은 당황한 마음으로 급하게 일어나 물러나갔다. 나온 방의 문이 등 뒤에 빈틈없이 닫히자 중전은

조용히 서서 슬픈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의 죄업입니다. 그 죄업의 대가가 상감마마의 미움이옵니다. 이 이름뿐인 중전이란 자리는

바로 상감마마의 미움과 맞바꾼 것이니, 제가 어찌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중전이 강녕전에서 나오려는 찰나, 월이 월대의 첫 계단에 막 발을 올리려고 하고 있었다.

월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누가 나오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무의식중에 급히 월대의 계단 옆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월이 몸을 숨긴 찰나에 중전은 월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중전이 월대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궁녀들을 거느리고 양의문을 넘어가는 모습을 월은 숨죽이고 보았다. 한때 만났던

사이였다. 그리고 연우가 세자빈으로 간택 되었을 때, 저 여인도 연우 앞에서 큰 절을 올렸었다.

월은 한참을 몸을 숨기고 있다가 강녕전으로 들어갔다. 월이 아뢰고 방으로 들어서는 것을 훤은

환하게 웃으며 저리에서 일어나 맞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기까지 기다리는 것도 못 참아

월에게 다가갔다. 운은 왕의 옆에 서 있다가 고개를 월의 반대편으로 돌려 자신의 마음을 감추었다.

월은 눈앞에 왕이 성큼 다가오자 얼른 허리를 숙였지만, 이내 훤의 손에 잡혀 고개를 들어야 했다.

훤이 월의 턱을 잡고 눈길을 서로의 시선에 맞추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밝은 햇빛 아래에서 둘은

만나게 되었다.

“네가 이리 생겼었구나.”

훤은 기뻤지만 월은 구장복의 위용에 눌려 가슴이 막막했다. 어쩌면 조금 전 중전을 본 가슴이

더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훤은 월을 구장복으로 감싸 안았다. 이렇게 한다고 해도 월의 신분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지만 밝은 낮에도 입고 있는 하얀 소복을 가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조금 전

화려한 중전의 의복을 보았기 때문인지 월의 옷에 가슴이 저렸다.

“제례는 잘 치르셨사옵니까?”

“7일이 너무나 길었다.”

“소녀도 같이 기도하였사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하였단 말이냐?”

“······무녀로서 종묘사직의 번영을 위해 기도하였사옵니다.”

“무녀로서라······. 그러하면 올 한 해를 예언해 보아라! 내가 중전에게서 원자라도 볼 것 같으냐,

아니면 조선 땅에 대풍년이라도 들것 같으냐?”

훤은 화풀이를 하는 것인지 월의 가냘픈 몸을 부셔버리려는 듯 힘껏 끌어안았다.

격앙된 훤의 목소리와는 달리 월은 바닥에 깔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원자를 보셔야 하옵고, 풍년은 들어야 하옵니다. 새해 들어 파루의 북소리가 여전히 북으로 치는 것을

들었사옵고, 종각에서도 북소리가 올라오는 것을 들었사옵니다. 하오니 올해도 풍년일 것이라

모든 신민이 기뻐하였을 것이고, 또한 상감마마의 성은에 감읍하였을 것이옵니다.”

훤의 눈빛이 차갑게 멈추었다. 그리고 차가운 눈빛과는 반대로 최대한 따뜻하게 말했다.

“여전히 북소리이지. 예전에는 파루도 종소리였는데, 그렇지?”

“네, 예전에 종각에서 올라오는 파루가 종소리로 들리면 가뭄이 든다하여 걱정하곤 하옵지요.”

“······월아, 종각이 한양 외에도 있더냐?”

월은 자신의 말에서 훤이 무언가를 알아챈 것을 느꼈다. 그래서 몸을 빼내려고 했지만 단단히 힘을 준

훤의 팔 안에서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훤의 머릿속은 재빨리 돌아가고 있었다.

파루를 알리는 소리는 원래 북으로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하지만 가뭄이 들 것이라고 관상감에서

예언을 하게 되면 그 해는 북소리를 종소리로 바꾸는 것이 관례였다. 가뭄은 음의 기운이 부족하여

생기는 것이기에 양의 소리인 북소리 대신에, 음의 소리인 종소리로 음의 기운을 돋우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전왕 대에서 자주 발생했고, 훤이 등극하고 나서부터는 단 한 번도 파루를 종소리로

알린 적이 없었다. 이것을 들었다는 것은 월이 살던 곳이 한양 도성 안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훤이

놀란 것은 다른 것에 있었다. 그것은 월이 실수로 흘린 언어습관이었다. ‘종각에서 올라오는’ 이라는

표현은 특정 구역에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바로 고관대작들이 모여 사는 북촌! 종각을 가운데 두고

남쪽으로는 일반 서민이나 중인, 당하관들이 주로 살고 있었기에 그들은 ‘종각에서 내려오는’이란

표현들을 썼다. 하지만 북쪽에는 대부분이 당상관 이상의 고관대작들이 모여 살았고, 그들은 ‘종각에서

올라오는’이란 표현이 습관처럼 굳어져 있었다. 훤은 월의 정체를 정리해보았다. 월은 적어도 6년

이전까지는 한양의 북촌에 살던 당상관 이상의 고관대작의 여식으로 많은 책을 읽은 여인이었다.

훤은 이 조건에 부합하는 여인 중에서 단 한명만 알고 있었다. 그건 바로 연우였다.

훤은 월을 자신의 품에서 거칠게 떼어내어 다시 얼굴을 보았다. 낯이 익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에서야 닮은 이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얼굴도 모르는 연우와 서찰을 주고받으며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수천 번도 더 얼굴을 만들어보았던 자신의 정비인 연우와 너무도 닮아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훤의 머릿속으로 취로정에서의 일과, 온양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번개처럼 들어와 박혔다.

월의 말들과 표정들도 연우가 되어 심장으로 박혀들었다. 그래서인지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가슴이

고통스러웠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던 월의 눈이 새파랗게 놀란 것도 보였다. 하지만 월이 본 것은

훤의 입술이었다. 새파랗게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식은땀도 흘리고 있었다.

이윽고 훤이 가슴을 쥐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상감마마!”

월의 놀란 외침에 내관들이 놀라서 달려왔다. 훤도 단순히 놀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몸에 살(殺)이

날아왔음을 깨달았다. 훤은 바들바들 떨리는 팔을 뻗어 남아 있는 힘을 자아내어 힘껏 월을 밀었다.

“내······, 내 옆에······오지 마라!”

하지만 월은 언제나 물러나던 평소와 반대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더욱 앞으로 다가와 왕을 끌어안았다.

왕을 안은 팔도 떨리고 있었다. 상선내관도 새파랗게 질려 왕의 면류관을 벗겼다. 훤은 정신이

아득해 지는 순간에도 자신의 액받이인 월의 몸만이 걱정되었다.

“무엄하다! 노······놓아라. 네게 나의 살이······, 아니 된다. 물러나라. 최대한······나에게서······.”

“아니 되옵니다. 마마! 정신차리시옵소서. 마마!”

월의 울부짖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 애달픈 소리에 이끌려 정신이 힘겹게 돌아오려 했다.

어의가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왕을 끌어안고 있던 월을 밀쳐내고 왕의 손목을 잡아 진맥했다.

그 뒤를 명과학교수가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왕이 아닌 액받이무녀를 보고 더 놀라 자신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네가 어찌 멀쩡한 것이냐! 무녀가 맞는 것이냐?”

아득한 정신 가운데서도 훤은 그 말을 주워들었다. 하지만 고통 때문에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훤이 말했다.

“운아! 월을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라!”

운이 움직이자 명과학교수가 큰소리로 외쳤다.

“아니 되옵니다! 그나마도 곁에 두어야 하옵니다!”

명과학교수 뿐만이 아니라 월도 왕에게 매달렸다.

“마마! 있을 것이옵니다. 있어라 하시옵소서.”

운의 손끝이 월의 뒷목덜미를 내리쳤다. 이윽고 월이 힘없이 쓰러졌다. 운은 정신을 잃은 월을

번쩍 안아들었다. 상선내관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무얼 하시는 게요, 운검! 진정 상감마마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운검이 아니오!

당장 그 무녀를 내려놓으시오!”

“소인은 상감마마의 어명만을 받잡습니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운의 말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왕을 배신한 운은 그대로 월을 안고

강녕전 밖으로 나갔다. 왕이 아닌 오직 월을 위해 한 행동이었기에 명백하게 왕을 배신한 마음이었다.

훤은 어지러운 운의 마음까지 읽고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23

운은 월을 안고 강녕전을 나와서야 그토록 눈길로만 탐내던 여인이 자신의 품안에 안겨있음을

깨달았다. 차마 눈길을 아래로 내려 월의 얼굴을 볼 수 없음에 하늘의 풍성한 구름만을

우러러 보았다. 비록 궐의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일 테지만 조만간 저 구름은 궐 밖의

멀리 멀리로 흘러 자유로이 떠다닐 것이었다. 운은 품안에 안고 보니 월의 숨결이 느껴졌고

그 숨결을 훔치고픈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이대로 이렇게 안은 채로 궐 밖의 아무도 없는

곳으로, 왕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 품속의 여인을 영원히 안고 있고 싶었다.

단지 바램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고 싶어 자신의 말이 있는 마구간 쪽으로 눈길을 두어봤다.

하지만 입술만 깨물고 월의 얼굴과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잡고 있는 족쇄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운은 성숙청으로 월을 데리고 갔다. 그런데 성숙청이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누구 없소?”

운의 간결한 외침에 성숙청 뒤 곁에서 설이 걸어 나왔다. 설은 운의 품안에 안긴 월을

발견하자 깜짝 놀라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대체 왜 그런 겁니까?”

설이 흥분하여 야단법석을 떠는 바람에 운은 단순히 기절시킨 것이라는 말을 할 틈을 찾지

못했다. 한참을 소란 떨던 설은 운이 차갑게 입을 다문 것을 발견하고 슬쩍 쳐다보았다.

염만을 마음에 품고 있던 설이기에 염의 따뜻함과는 정 반대인 운의 차가움에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설의 소란이 멈추자 운이 입을 열었다.

“눕혀야겠다. 안내해라.”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이리 주시지요.”

운은 입을 다물고 서 있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방까지 안고 가겠다는 의사가

전해져 왔다. 머쓱해진 설은 앞장서서 방으로 안내하고는 급히 요를 깔았다. 운은 방안에

들어서서 요 위에 월을 조심스럽게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운의 행동거지를 보고 있던

설은 그를 보던 눈빛을 애잔하게 바꾸었다. 더 없이 차가운 사내였지만 이불을 덮어주는

손끝이 너무도 따뜻해 월을 향한 운의 마음을 알아채고 만 것이었다.

“다른 무녀들은?”

손끝은 따뜻할지 모르겠지만 목소리는 설을 향해서인지 차갑기 그지없었다.

“사독제를 위해 모두 한강에 나가 있습니다.”

운의 인상이 굳어졌다. 분명 왕에게 날아온 것이 살이었기에, 이는 주술을 아는 이의 소행일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각 관령의 무적에 올라 있는 이들은 오늘 모두 사독제에 참여했을 것이었다.

게다가 소격서의 도사나 도류들도 원구단의 제천의례를 준비하기 위해 궐을 비운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살을 날린 이는 무적에 올라 있지 않은 누군가일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더욱

더 범인을 찾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했다. 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지금 상감마마께 살이 날아들어 잠시 기절시킨 것뿐이니 곧 깨어날 것이다.”

“네? 그럼 상감마마께오선?”

“의식을 잃으셨다. 하지만 무녀는 무탈하니 기이하군.”

운이 몸을 돌려 방문을 열려고 하자 설은 뒷모습에 말을 던졌다.

“기이해 하신다기 보다는, 무탈하여 안심하신듯 합니다?”

문을 열려던 운의 손이 멈췄다. 설은 눈길을 월에게 향하고 조용히 말했다.

“구름은 달을 가리는 것일 뿐, 품는 것이 아닙니다.”

시커먼 뒷모습은 움찔하는 기척도 없었다. 대신 운의 차가운 목소리가 설의 심장을 때렸다.

“구름은 달을 가릴 뿐이지만, 비는 품을 수 있다.”

비? 갑자기 비란 단어가 운의 입에서 떠오르자 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 무슨 뜻입니까?”

“의빈께서 네가 설이라고 하더군.”

설은 치마 아래에 숨겨둔 환도를 빼내기 위해 치마를 잡았다. 하지만 운의 다음 말에

동작을 멈추었다.

“환도를 빼어낸 즉시 너의 목은 떨어져 이 방에 뒹굴 것이다. 그리고 환도를 빼낸다면 달이

보슬비임을 네가 증명하는 것이다.”

설은 운의 뒷모습이 던지는 매서움에 환도를 빼내지 못했다.

“누가 또 알고 있습니까? 혹여 상감마마께옵서도? 아니 그보다, 의빈께옵선······?”

“아직은. 달에게도 입 다물고 있어라.”

“무엇을 말입니까? 비를 알고 있는 구름을, 아니면 비를 품고 있는 구름을?”

운은 둘 다를 뜻하듯 대답하지 않고 방을 나가버렸다.

사독제를 끝낸 무녀들이 돌아온 것은 해가 완전히 저문 저녁이었다. 지친 몸으로 궐내에

들어선 그녀들은 스산한 분위기를 먼저 느꼈다. 장씨는 당황한 얼굴로 뛰다시피 하여 월의

방으로 들어갔다. 월은 어두운 방안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장씨가 방문을 닫고 월에게

다가가 앉아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이윽고 장씨는 월이 품에 품고 있는 것을 보았다.

품안에 있는 것은 연우가 세자에게서 정표로 받았던 봉잠이었다. 옆에 걱정 어린 눈으로 있는

설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계셨냐?”

“상감마마께옵서 살을 맞으셨다 합니다.”

“언제부터냐고 물었잖아!”

장씨의 외침에 월이 정신이 들었는지 고개를 들어 말했다.

“정오쯤에······.”

“하필 아무도 없을 때. 아니지, 아무도 없으니 주술을 행하기엔 적기였을 테지.”

“······주술이 확실한 것이옵니까?”

월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장씨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월은 눈빛은 반짝이며 장씨의 눈을

보았지만 말씨는 다소곳하게 말했다.

“모두가 궐을 비운 어제와 오늘, 참으로 조용하였습니다. 소녀는 이 방에서 나갈 수 없었기에

알지 못하지만, 상감마마께옵서 비우신 궐을 대신 지키는 이가 있지 않겠사옵니까? 아무래도

온양에 행차하시었을 때 뵈었던 상감마마께옵선 건강하시었기에, 그 뒤 어환이 드셨단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사옵니다. 그러니 그때 궐을 비운 사이, 그리고 이번에 궐을 비운 사이

무언가가 이뤄지건 아닐련지요.”

장씨도 월의 추측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어렴풋하게 잡혀질 듯 했다. 월이 다시 고개를

꺄우뚱 하며 말했다.

“하지만 마마께옵서 궐에 계셨을 때, 그러니까 제가 궐에 입궐한지 한 달 되는 그날에도

살이 든 것을 보면 아닐 것 같기도 하고······.”

“아! 그건 전혀 다른 것이었소. 상감마마를 해치려했던 살이 아니라······. 아무튼

그것은 별개의 것이오. 이제껏 그것을 생각하시었소?”

월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품안에 있던 봉잠을 손에 들고 보면서 말했다.

“설아, 잠시 나가 있어주겠니?”

걱정으로 머뭇거리던 설이 나가자, 월은 무념의 목소리로 말했다.

“왜 신기가 없는 저를 무녀로 만드셨는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신모님, 소녀는 무엇입니까?”

장씨는 놀라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뿐이었다.

“신기가 없다는 건 언제부터 아시었소?”

“5년 전, 잔실이가 신내림을 받을 때부터입니다. 소녀는 그러한 신내림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이상하다 생각하였습니다.”

“무녀가 아닌 줄 알면서 왜 4년 전에 액받이무녀를 하시겠다 하였소?”

“제 목숨을 살려주신 신모님이 하시라 하였기에······.”

장씨의 한쪽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이 담겨졌다. 그리고 옛날, 세자빈이 간택된 그날에 대비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말들이 바람처럼 장씨의 귓가에 속삭여대고 있었다.

“방금 무어라 하시었습니까?”

“세자빈이 바뀌었으니 없애라고 하였다. 주상이 물샐 틈 없이 호위를 하고 있기에 독살도,

암살도 할 수가 없으니 접근하지 않고 행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자네의 능력뿐이네.”

“쇤네는 왕실의 구복을 위해 있는 것이옵니다. 이미 세자빈이 되시었으니 그분 또한

왕실의 분이십니다.”

“왕실의 구복이라 하였는가? 성숙청의 입지가 그리 좋은 것이 아닐 텐데? 성숙청이 아무리

왕실을 위해 일한다 하여도 유학자들의 끊임없는 혁파요구에 지금은 존폐위기가 아닌가?

그런 성숙청을 내가 더 이상 비호를 해주지 않는다면 어찌 될 것이라 생각하는가?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축출 시켜주마.”

“협박······이십니까?”

“아니, 명령이다!”

“세자빈이십니다.”

“그러니 내가 진즉에 간택되기 전에 죽이라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것도 개념치 마라.

자네가 죽이고 나면 세자빈이 아닐 것이니. 간택되었던 적도 없었던 일로 내가 만들 것이다.

그러니 문제 될 것이 없지 않겠느냐?”

“하오나 사람의 목숨을 앗는 주술에는······.”

“그때 말하였던 조건을 또 들먹이는가? 마지막 조건 중 불가능하다고 했던, 간절한 소망이

담긴 여인의 초경이 묻은 개짐(생리대)! 그 조건이 채워졌다면?”

“······”

“허연우란 아이를 자네의 주술로 죽여라!”

장씨는 평생 털어내지 못한 그 말들을 뿌리치려고 그 당시에도 감아버렸던 주름진 눈을

또 다시 감았다. 월이 과거의 말을 떨치고 현재의 말을 귓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하면 소녀가 다시 묻겠습니다. 신모님은 어이하여 무녀도 아닌 저를 액받이무녀로

지정하시었습니까?”

장씨는 눈을 감은 채 무거운 입을 열었다.

“액받이무녀는 상감마마와 더 없이 깊은 인연이어도 절대 만날 수 없는 사이. 하여 두 분을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고 싶었소.”

‘그렇게 내 죄를 영원히 묻어버리고 싶었소.’

“그런데 왜 이제는 만나게 해주셨습니까?”

“······염병할, 만나게 해주고 싶어져 버렸으니까.”

‘정을 주지 않으려 이름 하지 않았건만, 어느새 나에게 세자빈이 되어 계셨으니까.’

“왜 저에게 신기가 들었다 하여 속이셨습니까?”

“속이지 않았다면 아가씨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 아니오. 무녀의 몸으로는 가문에

누가 될 것이니 스스로 걸어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그랬소.”

장씨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고결한 연우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 눈동자는 알고 있었다. 세자빈에게 살수를 던진 이가 장씨임을!

“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모른 척 하고 있었소?”

“신모님이 저를 살리셨기에······.”

“그 반대임을 알고 계시잖소?”

월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살리시었습니다. 신모님이 그리 하지 않았다면 소녀는 오래전 흙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신딸이 아닌 존재가 신모님 곁에 있다간, 이미 소녀를 죽이라 사주한 이들의

눈에 발각되었을 터, 하여 그 눈들을 속이기 위해 소녀를 무적에 올리셨단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단지 소녀가 미진하여 이러한 것을 이해하고 납득하기까지가 오래 걸렸습니다.

그 사이 미련하게도 원망도 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자신을 죽인 이를 원망하여서 죄송하다니, 장씨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더 기가 막힌 건

그동안 마음속에 폭풍이 칠 정도로 어지러웠을 텐데도 그 어떤 내색도 하지 않은 연우란 존재였다.

“참으로 무서운 여인이었구려. 그 사실을 알고도 그리 평온하게 내 옆에 있었다니.

난 설이 년에게 목이 달아날 것이라 각오하고 있었건만. 하하하.”

장씨의 빈 웃음이 방안을 메웠다. 차차 헛 울던 웃음도 사라지고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왜 지금에서야 내게 내색을 하는 것이오?”

“저 자신이 원망스러워서입니다. 왜 저는 액받이무녀조차 아닌 것입니까?

차라리 제가 진짜였더라면, 상감마마께옵서 그리도······.”

평온한 표정을 가르고 굵은 눈물이 흘러 봉잠 위로 떨어져 내렸다. 자신의 눈앞에서

처참하리만큼 슬픈 눈동자를 하다 입술에 핏기조차 버리고, 쓰러져 주저앉던 훤의 모습이

되풀이 되고 또 되풀이되어 지금까지 월의 눈앞에 펼쳐졌다. 자신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였다면

훤이 그리 고통스럽게 쓰러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훤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는 자신을

견딜 수가 없어 아픈 입술을 깨물었다. 무녀가 아님을 알았음에도 액받이무녀의 자리에

계속 있었던 것은 월의 욕심이었다. 어차피 오라비 곁에 돌아갈 수 없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죽음을 사주한 이들이 알게 되면 장씨뿐만이 아니라, 겨우 목숨을 건진

오라비까지 자칫 화를 입을 수도 있었기에 세상에서 죽은 이로 살아가는 것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차피 훤과 만날 수 없다면 가짜 액받이무녀일 망정 있고 싶었다.

보잘 것 없는 인연이라고 하더라도, 훤이 영원히 자신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가더라도

실낱같은 인연의 끈이나마 닿아있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욕심이 지금의 화를 부른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의 존재가 왕에게 주는 것이라고는 심려와 슬픔, 혼란뿐이었다.

월이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장씨의 무릎에 엎드려 흐느꼈다.

“제발, 소녀를 가짜가 아닌 진짜 무녀로 만들어 주시오소서. 상감마마를 위해 소녀가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오소서. 가장 강력한 주술은 인간의 마음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소녀의 마음이 간절하지 않은 것입니까?”

“무녀란 것이 하기 싫다하여 그만둘 수 없는 것처럼, 하고 싶다하여 할 수도 없는 것이오.”

“그렇다면, 어찌하면 상감마마를 살릴 수 있으오리까. 어찌하면 고통스럽지 않게 하여

드리리까. 필요하다면 소녀의 피를 뽑아 쓰옵소서. 마지막 한 톨까지 기꺼이 바칠 것이옵니다.

소녀의 살점이 필요하다시면, 기꺼이 뜯어드릴 것이옵니다. 소녀의 뼈를 조각조각내어

갈아 드릴 것이옵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저로 인해 고통스런 상감마마께 더 이상의 고통은

없도록, 부디······.”

장씨의 깊은 한숨이 숨결이 되어 월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이 또한 자신이 저지른 죄였기에

월의 어깨를 토닥여 줄 수가 없었다.

“요상하오. 이번 일은 정말 요상하오.”

강녕전에서 혼수상태에 있던 훤의 의식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그 옆에 대비가 자신의

아들을 눈물로 지키고 있었다. 힘겹게 눈을 뜬 왕에게로 일제히 몰려들었다.

“주상, 정신을 치리시오. 이 어미를 보아서라도. 주상!”

훤은 힘겨운 듯 입술을 움직여 작은 소리를 뱉어냈다.

“의······금부 판·····사를 불러오라. 지금······당장.”

정신이 들자마자 한 말치고는 이상하여 대비는 아들의 어깨를 잡아 다시 물었다.

“주상, 방금 무어라 하시었습니까? 이 어미가 보이시는 것입니까?”

“어마마마, 의금부 판······사를······.”

대비는 얼굴에 눈물이 범벅된 상태로 내관들에게 명했다.

“무얼 하시는 게요! 당장 의금부 판사를 대령토록 하시오!”

“하오나 상감마마께오선 의식이 불분명 하시어······.”

“내 아들은 멀쩡하오! 그러니 어서 그자를 데려오시오!”

상경내관이 선전관에게 말을 전하러 강녕전을 나갔다. 대비는 아들이 혹시라도 다시 의식을

잃을까봐 물을 적신 수건으로 식은땀에 젖은 얼굴을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

“주상, 정신을 잃으시면 아니 됩니다. 이 어미 목소리를 잘 듣고 저의 목소리를 따라 이리

깨어 나오시오.”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의식이 눈물어린 대비의 목소리가 이끌어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힘겨운 입술을 움직였다.

“서안을······, 어서······.”

대비는 아들이 지금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의식을 잃었다가

돌아온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해 보였다. 갑자기 의금부 판사를 찾지 않나,

서안을 찾지 않나, 대비는 걱정으로 더 큰 눈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아들이 정상임을 믿고 싶었다.

“주상께서 명하시었다. 서안을 가져오너라!”

대비의 명령에 내관들이 재빨리 서안을 가지고 들어왔다. 훤은 대비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겨우 일어났다. 떨리는 손으로 먹을 들었다. 상선내관이 먹을 잡는 훤의 손앞을 막으며 말했다.

“상감마마, 천신이 먹을 갈아드리겠사옵니다.”

훤은 그 손을 뿌리쳤다.

“어마마마,······잠시 ······떨어져 주십시오. 그리고 다들 내 곁에서 물러나라.”

훤은 모두를 물리친 뒤, 손수 연적에 담긴 물을 벼루에 붓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힘없는 손으로

고집스레 먹을 갈고 있는 모습을 보며 분명 정상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비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바들바들 떨면서 먹을 갈던 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연우의 가녀린 모습이 훤의 눈앞에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봉서를 쓸 때 이렇게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힘겹게 먹을 갈았을 모습이 안쓰러워 눈물이 나왔다.

지금 자신이 아픈 것 보다 더 아팠다. 평소보다 훨씬 오랫동안 힘겹게 먹을 간 훤은 붓으로

먹을 찍어 종이에 올렸다. 다 갈았다고 생각했던 먹이 물만 가득하게 종이에 번져 나왔다.

훤은 자신을 힐책하듯 입술을 깨물었다. 연우도 분명 지금처럼 이랬을 것이었다. 이토록이나

힘겹게 쓴 봉서를 미처 다 읽어주지 못했던 그때의 자신이 더 없이 미웠다.

훤은 마지막 힘을 자아내어 의금부 도사에게 글을 썼다.

<세자빈 허씨의 죽음에 대해 다시 조사하라. 특히 장례식은 어찌 치러졌는지를 철저히 조사하라.>

연우의 글보다 훨씬 짧은 글임에도 붓을 잡은 손끝이 휙휙 꺾어질 듯했고, 앉아있는 숨이

끊어질 듯 고통스러웠다. 또 다시 의식이 멀어지려는 듯 혼미해졌다.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훤은 수결을 적었고, 마지막으로 옥새까지 꾹 눌러 찍었다. 훤은 봉서에 넣어 봉합한 뒤

사령을 불렀다.

“이것을 의금부도사에게 ······은밀히 전하라.”

사령이 받아들고 물러가자, 대비가 다가와 훤을 안아 부축했다.

“주상, 도대체 얼마나 중대한 일이시기에 이런 상황에서······.”

“어마마마, 걱정 하시지 마십시오.”

훤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대비의 귀에만 들리는 소리로 말했다.

“어마마마, 연우낭자를 기억하시옵니까?”

“누구?”

“세, 세자빈 간택 때······, 어마마마께오선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어여뻤지요?

짙은 속눈썹에 ······새하얀 피부, 녹발(검고 윤택한 아름다운 머릿결)······.”

대비는 놀라서 자신의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렸다. 대비도 연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연우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들이 연우를 말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아들이 그녀의 원혼에 시달려 이리 아픈 것이란 생각으로까지 번졌다.

대비는 두려운 마음으로 훤을 꼬옥 끌어안았다. 혹시나 자신의 가엾은 아들이 미쳤다고

할까봐 옆의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의금부 판사가 강녕전에 들어왔다. 훤은 몸을 가눌 수가 없었기에 자리에 누워 판사를 맞았다.

“상감마마, 찾아계시었습니까?”

훤은 간헐적으로 끊어지는 숨을 헐떡이며, 하지만 그 와중에도 위엄 있게 말했다.

“내 비록 힘겹긴 하나, 제정신이오. 그러니 잘 들으시오. 지금 당장 왕대비전으로 가서

왕대비를 온양행궁으로 모시도록 하시오.”

뜬금없는 왕의 어명이었기에 다들 의아해했다. 하지만 대비는 자신의 아들이 정신이상으로

몰릴 것을 걱정하여 옆에서 도왔다.

“효성이 지극하신 상감마마시오. 하여 왕대비마마께 병이 미칠까 걱정하시는 것을 어이하여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오! 어명을 반드시 받잡으시오!”

그제야 다들 왕의 지극한 효심에 감읍하여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훤의 의중은 그것이

아니었다. 너무 오래 월을 궐내에 머물게 했다. 궐내의 사람 입이란 것이 얼마나 가벼운지

훤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이렇게 죽음으로 몰려고 작정한 이들이라면 액받이무녀의 존재를

알아내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고, 연우와 월이 동일 인물임이 드러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연우와 월은 몸은 하나인데 위험은 그 두 배로 높아질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한 번 더 연우를 죽이려 들 것이었다. 그래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왕대비부터 연우에게서 떨어진 곳에 일종의 유배를 명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왕대비는 연우의

얼굴을 알고 있기에 가장 조심해야 할 인물이었다.

훤은 다시 침을 한번 삼키고 말했다.

“상선, 의금부판사를 액받이무녀에게로 안내하여 그녀를 감금시켜라. 가장 먼저 행하라.”

이제까지 없는 듯 방안 한구석에서 침묵하고 있던 운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왕을 보았다.

다른 내관도 놀란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대비는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만 갸웃거렸다.

“나라의 녹을 먹는 이가 자신의 업무를 다하지 못하여 나를 이 지경이 되게 한 죄,

벌을 받아 마땅하다! 내 몸을 일으키는 즉시, 죄를 추궁할 것이니 우선 비밀리에 나의

침전 내에 내 방과는 떨어진 곳에 감금시키도록 해라.”

정신이 다시 혼미해지고 있었다. 생각하는 것조차 힘겨웠기에 자신이 제대로 된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지만, 훤은 숨을 몰아쉬고 난 뒤, 왜 감옥이 아닌 침전에 감금시키라고

하는지 이상히 여기는 사람들을 위해 힘겨운 입을 다시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자가 있어서 그나마 내가 숨은 건진 것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침전 내에 두어야하며,

이 순간부터 침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그녀의 존재를 다른 곳에 발설을 할 시엔

지금 이곳에 있는 모두의 목을 벨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왕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운은 왕의 심중을 알 것 같았다. 왕의 침전!

이곳이 궐내에서 그나마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성숙청은 너무나 외지고 그 근처는 여자들만

있기에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왕은 정신을 차리기가 무섭게 혹시나 모를 이들의 손으로부터

월을 지키고자 모든 힘을 쏟고 있는 것이었다. 훤은 월이 침전으로 들어오는 것까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

#24

양명군의 집으로 평소 발걸음 하지 않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사랑방에 앉아

양명군의 눈치만 살피는 사람들에게 그는 굳은 표정으로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몇 시간을 그러고 있었는지 다들 발이 저려 엉덩이가 조금씩 들썩여질 때쯤에야 양명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추운 길을 헤치면서까지 이리 몰려 온 연유가 무엇이오?”

“아니, 저희들은 새해 인사차······.”

양명군은 한쪽 입 꼬리가 저절로 뒤틀리는 것을 숨기고 웃음으로 말했다.

“고맙소. 상감마마께옵서 쓰러지셨단 소식보다 그대들의 방문이 먼저인 것을 보니 참으로

감동이오. 여기에 몰려든 숫자를 헤아려 보니 오늘 상감마마께서 쓰러지신 건 상당히

심각한 모양이구려.”

“궐에서 흘러나온 소식으로는 좀······. 당연히 상감마마께옵서 강령해지실거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저희로서는 만의 하나에 해당하는 차후의 문제도 생각 안할 수가 없기에······.”

양명군은 웃으며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평소 없던 유비무환이 마구 샘솟는 모양이군. 하긴, 아직 후사도 없는 왕이

사경을 헤맨다는데 어느 신하가 걱정이 안 되겠소. 당연히 상감마마의 성후보다

걱정이 되어야지. 안 그렇소?”

모인 사람들은 눈만 깜빡거리며 당황해했다. 양명군의 인품이란 것은 옛날부터 종잡을 수

없는 위인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지인들 사이에선 의리 있는 세상 제일의 사내란 평이 있는

반면에, 마음대로 살기 위해 재혼도 마다하는 기인으로, 대신들 앞에서는 망나니로 악명이

높았다. 어릴 때, 부왕 앞에서 서책을 집어 던진 사건은 악명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들은 양명군의 심사가 뒤틀린 것을 느꼈기에 적당히 다른 사람 중에 하나라도 자리를

뜨면 따라서 일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모두 서로 일어나기만을 바라는 눈치라 먼저

일어서는 자는 없었다. 혹시라도 왕이 죽게 될 경우를 대비해 먼저 일어나 나가 손해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생각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양명군은 얼굴에

웃음을 지우고 옆에 있던 환도를 들며 차분한 음색으로 말했다.

“아직 분명히 살아계시는 상감마마를 두고 왕 자리를 논하시겠다?”

사람들이 뜨끔할 사이, 양명군은 칼집에서 환도를 꺼내 한번 날을 눈길로 쓸어보더니

서안 위에 칼집과 칼을 나란히 놓았다. 사람들은 양명군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양명군은 천천히 손끝으로 칼날을 따라 아래로 쓸면서 말했다.

“멋지게 선 날이 살 떨리게 흥분시키는군. 누구의 목부터 베어줄까? 그 목들을 궐로

가져다 상감마마께 고해드릴 테니. 어환에 계실 동안 역모를 생각한 이들의 목이라 아뢰면

나에게 커다란 재물을 주시지 않겠소? 목 하나당 비단 한필이면 헐값인가?”

“여, 역모라니 어찌 그리 살벌한 말씀을 하십니까! 모두 일어나 가십시다. 허허참!”

한사람이 떨치고 일어나자 하나둘씩 따라 나가버렸다. 그리고 사랑방에 양명군만 홀로

남게 되었다. 한참을 서안 위에 이마를 괴고 있던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을 타고

궁궐로 향했다.

양명군이 궐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훤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침전으로 가는 향오문 앞의 군사들은 양명군을 넘어가지 못하게 했다.

양명군에게 있어서 훤은 왕이기도 하지만 피를 나눈 형제이기도 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겐

그렇지 않은 듯 하여 괜히 쓴 웃음만 나왔다. 걱정한 발걸음이 허탈하기까지 했다.

한편으론 훤의 의식이 있었다면 양명군을 향오문 밖에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기에

지금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향오문 안으로의 진입을 거부당하고도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 왕의 상태를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는 답 외는 들을 수가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돌아서 가던 양명군의 뒤로 소란한 발소리가 느껴졌다.

재빨리 되돌아보니 의금부판사와 상선내관, 그리고 군사 두 명이 어디론가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다른 사람도 그렇지만 특히 상선내관의 혼비백산한 표정이 마음에 걸려 양명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가 다시 돌아오면 훤의 병세를 물어보리라 생각하고 멀찌감치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상선내관이 가장 잘 대답해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숙청으로 들이닥친 의금부 관원들은 이내 월의 방으로 들어갔다. 월과 장씨는 깜짝 놀라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월은 얼른 봉잠을 접어둔 이불 사이에 숨겼다.

“이 무슨 짓들입니까? 이곳이 어딘 줄 알고!”

장씨의 호통에 잠시 움찔하던 판사는 밀려나지 않고 큰 소리로 말했다.

“상감마마를 작금의 상태에 이르게 한 죄를 물어 액받이무녀를 감금하라는 어명이오!”

월이 놀란 눈으로 상선내관의 발목을 잡고 올려다보았다.

“깨어나신 것이옵니까? 이제 괜찮으신 것이옵니까?”

자신을 감금하라는 어명인데도 그 말은 들리지 않은 듯, 오직 상감마마만을 걱정하여

얼굴 가득 희망의 빛으로 묻는 월이 상선내관의 가슴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기다려도 왕의

상태를 말해주지 않자, 월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따라 나섰다.

오히려 장씨가 월을 대신해 물었다.

“어디로 데리고 가시는 겁니까? 적어도 저에게는 말씀을 해주셔야 합니다!”

“침전에 감금하라는 어명이셨소. 그럼.”

장씨는 다행이다 싶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향오문 멀리에서 물러나 상선내관을 기다리고 있던 양명군은 나갈 때와 달리 여인 한명이

더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둠의 방해로 사람을 구분하긴 힘들었지만 궐내에서 소복을 입은

여인은 독특한 경우이기에 저절로 눈길이 머물렀다. 처음엔 자박자박 다소곳한 걸음걸이에

눈길이 머물렀고, 두 번째는 곳곳에 세워둔 횃불에 비친 미색이 인간 같지 않아 눈길이

머물렀다. 그리고 마지막엔 어디선가 본 듯 낯이 익어서 눈길을 접을 수가 없었다.

그들 일행에게로 다가가던 양명군의 발자국은 어디서 본 얼굴인지 골몰하느라 자신도

모르게 우뚝 멈춰 섰다. 어둠 안에 서있던 양명군을 발견하지 못한 그들이 향오문을

넘어 갈 때 쯤, 로의 불길에 잡힌 그녀의 얼굴이 뚜렷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서 있던 양명군의 다리가 휘청 꺾였다가 제자리에 섰다. 하지만 마음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설마······, 여, 연우낭자?”

양명군은 이내 머리를 세차게 도리질 쳤다. 절대 그럴 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7년이나 지난 세월동안 자신의 기억이 흩어졌을 뿐이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양명군은 연우를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었기에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본 것이 귀신이 아님을 확인해 보기 위해 향오문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다가갔다.

“방금 들어간 여인이 누군가?”

“잘 모르겠사옵니다.”

“잘 모르는 여인을 어찌 향오문 안으로 출입시킨단 말인가!”

“잘 모르겠사옵니다. 소인들은 이 말 외엔 할 수가 없사옵니다.”

“산 사람인가?”

“네?”

“살아있는 인간인가 물었다!”

“물론입니다.”

군사들은 양명군이 여인의 미색에 놀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들도 처음 월을 보고 ‘성숙청의 무녀는 역시나 다르구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양명군은 다시 한 번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군사들의 저지로 돌아서야만 했다.

어쩌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조급한 마음으로 염의 집을 향해

말을 모는 것 외엔 없었다.

양명군은 의빈의 집 안으로 까지 말을 타고 달려 들어왔다. 그리고 하인이 말고삐를

잡아주기도 전에 말에서 훌쩍 내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랑채로 들이닥쳤다.

하인이 염에게 먼저 양명군이 왔음을 알릴 경황도 없었다.

염은 왕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후로 사랑방에 앉아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고

정좌하여 앉아 있었다. 신하된 도리로 어찌 입안에 물 한 모금이라도 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염이 이러고 있으니 민화도 이 소식을 전해 듣고는 오라비인 왕 때문이 아니라 서방님인

염을 따라서 아무것도 안 먹고 안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왕이 쾌차하길 빌었다.

그러기 전에는 신하의 도리를 따지는 염과의 합방은 꿈도 꿀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왕이 일어나기를 빌고 있던 염이었기에 새파랗게 질린 양명군이 방에 들이닥쳤을 때는

왕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서 심장이 멎었다.

“상감마마께옵서 어찌 되시었습니까?”

“나도 못 뵈었네. 그보다 자네, 연우낭자······.”

염이 놀란 눈으로 양명군을 보자 그는 얼른 입을 다물고, 엉덩이가 방바닥에 닿기도 전에

다시 일어나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큰일이 난 것이 분명하지요?”

양명군은 다시 방바닥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연우낭자 말일세.”

연우란 이름에 염의 표정이 서글프게 바뀌었지만 양명군은 다른 날과는 달리 그런 표정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양명군은 앉아서도 똥마려운 강아지 마냥 좌불안석하며 귓불의

세환귀고리만 만지작거렸다.

“연우낭자, 연우낭자 말일세. 그러니까 자네 누이.”

딴말 없이 연우란 이름만 되풀이해서 말해대는 양명군 때문에 성격 느긋한 염마저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우리 연우는 왜 물으십니까?”

“그때, 장례식 분명 치른 것이 맞지? 분명히 땅에 묻었다고······.”

“양명군 답지 않게 그 일은 왜 들추십니까? 얼마 전에 제운도 느닷없이 달려와서 같은

말을 묻더니······.”

양명군의 눈이 확신으로 뚜렷해졌다.

“제운이 말인가? 그 운검이? 그럼 그때 눈 오던 날 다녀갔다던?”

“네, 그날. 그런데 도대체 자꾸 우리 연우 일은 왜 물으십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양명군은 조금 전에 연우와 꼭 닮은 여인을 보았다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그리고 양명군 스스로도 납득이 안 되는 일이었다.

연우는 분명히 땅 속에 묻었다. 그것은 양명군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살아있는 것을 설명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단순히 닮은 여인으로 보는 것이

제대로 된 이성을 가진 인간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제운, 그리고 석연찮은 장례절차.

양명군은 더 확실한 증거인 장례절차보다 제운이 연우를 입에 담은 것이 더 확실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그가 지금 와서 연우를 떠올릴 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우선 제운을

만나야 했다. 하지만 그는 현재 만날 수가 없었다. 양명군은 자기 스스로도 머리에 떠오른

의문들을 감당할 수가 없어 간다는 인사도 없이 홀연히 사랑방을 나가버렸다.

염은 회오리바람이 방안을 휩쓸고 간 느낌이었다. 후다닥 들어와서는 우왕좌왕하다가 휭

하니 가버린 양명군이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지금 혼란에 빠진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지금 와서 연우를 말한 제운과 새파랗게 질린

양명군을 통해 어렴풋하게 연우와 관련한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양명군이 염에게로 달려와 소동을 부리고 있을 동안, 왕대비전에는 파평부원군이 들어있었다.

주위에 사람을 물리치고 오직 두 사람만이 마주 앉아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리 찾아온 것이요, 부원군?”

“긴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얼마 전에 청을 드린 성숙청의 액받이무녀 말이옵니다.”

“내가 알아내서 준 것이 잘못되기라도 하였소? 난 그런 천한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소.

지금 우리 주상이 쓰러져 마음이 좋질 못한데. 얼른 강령해지시어 원자를 보아야 우리가

한시름 덜 터인데.”

파평부원군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오히려 그 반대이옵니다.”

“······무슨 뜻이오?······설마, 지금 주상이 쓰러지신 것이 그대 소행이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주상이 미령하신 성후가 모두? 하지만 성숙청의 장씨도무녀는 절대

왕실에 살을 날린 여인이 아니오. 하여 액받이무녀에 관한 것도 그녀를 통하지 않고 다른

이를 통해 알아봐 준 것이오.”

“살을 날릴 수 있는 이가 조선팔도에 장씨도무녀 하나뿐이옵니까?”

“그렇다면 정녕 자네가 주상을?”

가만히 대답 없이 긍정을 하고 있는 파평부원군에게로 왕대비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지금 제정신이오! 감히 주상의 성체에 살을 던지다니. 이것은 역모 중의 역모!

내 이를 두고 볼 줄 아시오! 나부터 용서치 않을 것이오!”

“어차피 왕대비마마께옵선 저희와 한 배를 타시었습니다. 옛날 세자빈간택 당시, 살수를

주도하신 것을 기억 못하시는 것이옵니까? 소인은 왕대비마마께 배운 것이옵고,

이것을 실토해버릴 수도 있사옵니다.”

주먹을 쥔 왕대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 당시 가문을 위해 했던 일이 지금 자신의

손자의 목숨을 쥐어틀게 될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주상과 중전에게서 원자를 보는 것이 현명한 것이오.”

왕대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파평부원군의 목소리는 마치 실권을 장악한 듯

왕보다 더 당당했다.

“강령해지시면 우리 목이 일시에 달아날 것이옵니다.”

“무엇 때문에? 만의 하나 세자빈 사건이 발각이 난다고 해도 주상의 약점을 우리가 쥐고

있질 않소. 그러니······.”

파평부원군은 얼굴에 싸늘한 미소를 띠우고 품속에 있던 봉서를 꺼내 왕대비 앞으로 내밀었다.

“그 또한 살아있지 않을 때나 가능한 일이옵니다.”

“무······슨 뜻이오?”

왕대비를 봉서를 들고 뜯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강녕전의 왕의 궁녀들이 방안에

들이닥쳤다. 왕대비는 급히 봉서를 당의 안으로 감추고는 소리쳤다.

“이 무슨 무례한 짓들인가! 강녕전 궁녀들이 감히 먼저 아뢰지도 않고 방안에 들어오다니!”

왕대비의 호통에도 궁녀들은 일사분란하게 왕대비의 짐을 꾸렸다.

“멈추지 못할까! 어느 안전이라고 나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이냐! 밖에 아무도 없느냐!”

하지만 바깥은 조용했다. 이윽고 대강의 짐을 다 꾸린 궁녀들이 나가고 다른 두 궁녀가

들어와 왕대비의 양쪽 팔을 각각 잡아 일으켰다.

“놔라! 무엄하다!”

왕대비는 궁녀들의 손에 이끌려 바깥으로 나갔다. 오싹하리만큼 매서운 추위 속에

의금부판사를 위시해서 군사들이 왕대비전 뜰에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왕대비의

가마가 놓여있었다.

“판사! 네가 목숨이 아깝지 아니한 것이냐!”

“왕대비마마를 윗자와 상감마마께옵서 친히 어명하신 것이옵니다. 이제부터 온양행궁으로

모실 것이옵니다. 긴 여행이 되실 것이니 성심껏 모시겠사옵니다.”

“난 안 간다, 이것들아!”

하지만 궁녀들은 왕대비를 강제로 가마에 태우고 덮개로 덮었다. 그와 동시에 가마꾼들이

일어나 어두운 밤을 달리기 시작했다. 왕대비의 고함소리가 차츰 멀어지자, 파평부원군이

왕대비전 뜰에 나와 섰다. 그는 야비한 웃음을 흘리며 기분 좋게 중얼거렸다.

“상감마마께옵서 처음으로 내 마음에 쏙 드는 일을 해주셨군. 이제 쓸모없어진 늙은이를

스스로 치워주시다니. 오히려 있으면 방해만 되었을 터······.”

흔들리는 가마에 갇힌 채 고함을 치다 지친 왕대비는 자신의 손에 파평부원군이 준 봉서가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두운 가마 안이었지만 바깥에서 따르는 일행들이 들고 뛰는

불빛들에 의지해 힘겹게 내용을 확인했다. 편지 내용에는 허연우의 생년월일과,

액받이무녀의 생년월일이 적혀있었는데 한 글자도 다른 것이 없이 똑같았다.

그리고 끝에 둘은 같은 사람이란 글도 있었다. 왕대비는 분노로 눈을 뒤집으며 봉서를

갈기갈기 찢어 발겼다.

“감히! 감히 부원군이 나를 배신한 것도 모자라, 장씨도무녀 그 자도 날 속이다니!”

왕대비의 속이 끓어오르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녀를 태운 가마는 궁궐과 더욱더 멀어지고 있었다.

#25

“어······어디 있느냐?”

사경을 헤매던 훤이 눈을 뜨자마자 힘겹게 입 밖으로 뱉은 말이었다. 근 하루를 꼬박

정신을 잃은 상태였었다. 상선내관은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 않아 훤의 입 근처로 귀를

가져갔다. 힘겨운 훤의 말이 다시금 들려왔다.

“연. 아니, 월. 어디에 있느냐?”

훤의 거칠고 뜨거운 입김에 상선내관의 귀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힘들게 애타는 심정을

숨기고 평온하게 말했다.

“연생전에 있사옵니다.”

“여······기는?”

“지리학교수의 의견에 따라 경성전으로 옮겼사옵니다.”

“멀리 있구나······.”

강녕전을 가운데 두고 양 옆에 마주보고 있는 연생전과 경성전. 이 두 거리조차 훤에게는

멀리 느껴졌다. 그래서 혹시라도 다시 연우를 잃을까 불안했다.

“월의 몸은 괜찮더냐?”

“네, 다행하옵게도.”

“다행이다.······혹여 추운 곳에 두었느냐? 그 아이의 열을 다 내가 가져온 건

아닌지, 난 이렇게 뜨거운데······.”

“상감마마의 성체가 뜨거운 것이옵니다.”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아느냐?”

“언제나처럼 가만히 앉아 있사옵니다.”

“혹여 눈은 좀 붙였다더냐?”

“가엾게도, 꼬박 앉아만 있사옵니다. 상감마마를 걱정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훤의 얼굴이 월을 걱정하는 마음 때문인지, 몸의 병 때문인지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이리 데리고 오면······그 아이에게 혹여 나의 병이······?”

가까이 데리고 오라고 명하려다가 월의 몸에 영향이 가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운 마음이

먼저 앞섰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고통 중에 극히 일부라 하더라도 월에게 가게 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이 미어지도록 연우가 보고 싶었다. 훤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발견한

상선내관의 가슴도 아릿해져 자신도 모르게 말을 했다.

“이리 데리고 오겠사옵니다.”

“아니다. 아, 아니, 혹여 라도 모르니 데리고 오되 이 방으로는 들이지 마라.”

상선내관이 물러나자 어의가 다가와 훤을 진맥했다. 하지만 끊어질 듯 약한 맥만 잡혀졌기에

얼굴을 차마 들 수가 없었고, 주위에 있던 모든 이들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이런 맥으로

의식을 차리고 힘겹게나마 말이란 것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훤이 있는 경성전으로 연우도 건너왔다. 그리고 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옆방에 앉았다.

훤은 누워서 연우의 기척이 느껴지는 방 쪽을 보고 있었다. 이윽고 자리에 앉았는지

기척조차 잠잠해졌다. 막상 방문 너머에 연우의 기척이 사라지자 훤의 심장은 연우에 대한

그리움으로 더욱 심하게 고통스러워졌다. 어떻게 해서든 연우를 느껴보리라 애를 써도

이방 저방 골고루 애정을 쏟는 달빛의 방해로, 그리고 이 방만을 밝힌 촛불의 방해로

힘들었다. 문 하나만 열면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옛날 촉촉하게 가슴에 젖어들어 춘밤을

설치게 했던 그 여인이 문 건너에 있었다. 죽어서나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연우가

너무나 보고 싶어 상선내관을 찾았다.

“어떻더냐?”

“아프지는 않다하옵니다. 하지만 가엾어서 차마 볼 수가 없사옵니다.

그러니 상감마마께옵서 어서 성체를 일으키시옵소서.”

“······나의 이 모습을 본다면······저 아이의 마음이 더 아프겠지?”

훤은 욕심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연우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보다 자신의 그리움을

고통과 함께 삼키는 것을 택하기로 했다.

“상선, 이 방의 모든 불빛을 없애라.······그리고, 저 방에만 촛불을 켜라.”

상선내관은 의아해 하며 왕의 말에 따라 궁녀들에게 지시했다. 왕의 방에 불이 꺼지자 순간

세상에 어둠만이 있는 듯하더니, 궁녀가 불 한 자락을 건너 방에 밝히자 가로막은 방문에

연우의 서글픈 그림자가 곱디고운 붓으로 그린 듯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졌다. 연우를

그림자로나마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그림자가 아프게 눈에 들어온 또 한 사람이 운이었다.

그는 어두운 구석에 앉아 고개를 달을 향해 두어버렸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 훤만이

그 그림자를 눈 안에 잡고 있었다.

‘그림자 자태조차 고옵구나······. 저 자태의 주인이 정녕, 정녕······.’

훤의 초췌한 얼굴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벌떡 일어나 저 방문을 열고 연우를 보고

싶었다. 연우를 안고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힘찬 목소리로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힘을 줘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따금씩 방안을 돌던 공기가

촛불을 농락하고 지나면 촛불이 소름 돋아 흔들려 떨고, 그 촛불 떨림에 연우의 그림자마저

흐느껴 울면 훤의 심장도 그대로 촛농처럼 녹아내렸다. 훤은 그림자나마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손끝이 병으로 인해 자신의 것이 아닌 듯 어명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병보다

훤의 그리움이 한층 짙었다. 결국 훤의 손이 들려져 허공중에 뻗어졌다. 비록 손끝에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훤의 눈 속에는 연우의 그림자를 쓰다듬는 자신의 손끝이 보였다.

‘그날, 널 처음 만났던 비 오던 밤. 그 방에서 네가 이런 자태로 앉아 있었던 연유가······

그랬구나. 그래서 달을 보았구나. 이런 찢어지는 마음으로 달을 그리도 구슬피 보았구나.

그것도 모르고 난 네게 답하지 않는다 힐책만 하였구나. 이름을 물을 때마다 네가 삼키던

것이 연우란 이름만이 아니었구나. 지금 내 가슴속에 있는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이름과

같이 삼켰더냐.’

훤은 연우가 그동안 어떤 심정으로 자신의 옆에 머물러 있었는지 그 고통의 깊이를 가늠

할 수조차 없었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그동안 보아왔던 연우의 모든 표정들이 가슴을

난도질 했다. 연우의 그림자가 조금 움직였다. 그리고 방문의 창호지에 연우의 손바닥이

찍혀졌다. 문 건너에서 어두움만을 보아야 하는 연우도 훤의 기척을 느끼고 싶어

손바닥으로 문을 짚었던 것이었다. 연우의 손바닥을 본 훤의 턱에서 경련이 일었다.

‘너도 내가 보고 싶은 것이냐······. 너에게 죄만 지은 나약한 나 같은 놈을

보고파 해주는 것이냐······.’

훤은 힘이 들어가 지지 않는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핏기조차 없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어날 것이다! 반드시 일어나서 널 이렇게 만든 놈들을 내 손으로 도륙을 내어 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두 번 다시 널 잃지 않을 것이다. 아프게도 하지 않을 것이다.

너의 코끝에 있는 솜털 하나라도 아프지 않도록······이 손으로 지켜낼 것이다.’

아주 잠시 동안 다시 의식을 잃었다. 하지만 연우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훤을

흔들어 깨웠다. 다행스럽게도 단아한 연우의 그림자는 변함없이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훤의 마음에서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심장이 아픈 그림자를 편안하게

뉘어 잠들게 해주고 싶었다. 훤은 손끝으로 상선내관을 불렀다. 왕의 입술 가까이에 귀를

가져가 대자 여전히 잦아지지 않는 거친 호흡으로 말했다.

“저 아이에게······조금이라도 자라고 일러라.”

“천신 또한 그리 일렀는데······. 아마도 잠이 오지 않는듯 하옵니다.”

잠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의 마음과 똑 같이, 혹여라도 두 번 다시 못 보게

되면 어쩌나 겁이나 잠을 이를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훤은 자신의 마음이 가여운 것과

똑같이 그녀의 마음이 가여웠다.

“상선, 저 아이에게 예전에 내가 마신 국화차를······. 잠에 들 수 있도록.”

한참 만에 궁녀가 연우에게 차를 가져다주었다. 연우는 차를 들고 향기를 먼저 마시며

어두운 방 저편을 보았다. 국화향에서 보고파 목이 메인 훤의 향기가 느껴졌고,

그 향기는 찻잔을 잡은 단정한 손끝을 떨리게 만들었다. 향기만 마시고 있는 연우에게

궁녀가 재촉했다.

“이상한 것이 아니다. 상감마마께옵서 내리신 것이니 마셔라.”

이상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독물이든, 양잿물이든 훤이 마시라고 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달게 마실 수 있었다. 단지 마시지 않고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건너 방의 훤의

느낌을 차향으로 대신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계속되는 궁녀의 재촉에 연우는 하는 수 없이

차를 마셨다. 하지만 그 뒤에도 한참을 다소곳하게 앉아 있다가 겨우 옆으로 누워 잠들었다.

건너 방에서 의식을 힘겹게 잡고 있던 훤은 옆으로 기울어져 잠들어지는 연우의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진 그녀를 느낄 수가 있었다. 문을 열라고 명령하기 위해

상선내관을 다시 불렀다. 하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연우를 보고픈 마음이 더 먼저 울컥하고

올라왔다. 상선내관은 말하지도 못하고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키는 왕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닫힌 문을 천천히 열었다. 서서히 달이 떠오듯 머리끝이 보이고 이내 이마가

보이고 감은 눈과 입술이 보였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훤과 가까이 있고 싶어 문에 최대한

붙어, 훤 쪽을 보며 옆으로 잠든 그녀의 마음이 보였다. 긴 세월 그리도 애타게 보고팠던

연우는 훤 앞에 그렇게 설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훤은 손을 뻗었다. 이젠 그림자가 아닌

잠든 연우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손이 닿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샌가 연우가 쑤욱 가까워지더니 손끝에 그녀의 얼굴이 닿았다. 옆에 잠자코

지켜보던 내관들이 더 안타까워 왕의 요를 연우에게로 당겨주었기 때문이었다.

손끝에 닿은 연우는 차가웠다. 훤의 손이 뜨거웠기 때문이었지만 그녀의 차가움만이 느껴져

가슴에는 사나운 회오리바람이 휘몰려 지나갔다. 움직이기 힘들었던 손은 연우의 얼굴

위에서는 힘든 것도 모르고 움직여졌다. 연우를 느끼기 바빴기에 숨이 가쁘고, 고통스런

통증도 느낄 사이가 없었다. 그 순간 연우의 얼굴을 쓰다듬던 훤의 손이 멈춰졌다.

분명 깊이 잠든 연우였는데,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연우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는 줄도 모르고 잠들어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눈물을 흘린 날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을 것이었다. 다음날 일어나 자신이

적신 베갯잇을 발견하고는 스스로를 위로해 주지 못할망정 꾸짖기만 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아픈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르고 지나쳐 버렸는지도 몰랐다.

또 어쩌면 눈물을 흘린 날이 더 흔하고 흔해 눈물 흘리지 않고 잠에선 깬 날을 오히려

신기해 했을련지도 몰랐다. 연우가 죽은 나이 겨우 14살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부모와

그리고 그리도 사이좋던 오라비와 생이별하고, 머나먼 타지에서 죽은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훤은 그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연우를 위로해준 적이 없었음이 괴로웠다.

영영 일으켜 질 것 같지 않았던 훤의 상체가 일으켜졌다. 그리고 힘겹게 다가가 자신의

이마를 연우의 관자놀이에 올렸다. 훤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졌다. 떨어진 눈물은 연우의

속눈썹에 스며들어 마치 연우의 눈물인듯 그녀의 눈물 줄기를 따라 떨어져 내렸다.

마치 그녀의 슬픈 사연을 따라 읽어가듯 눈물 줄기는 하나가 되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훤의 몸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직 연우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몸을

일으켜 아주 잠시 동안만 앉아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누구 하나 이

사태를 속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관상감에서도, 그리고 소격서와 성숙청에서

조차 원인을 모르겠다며 고개만 젖고 있었다. 그러니 바쁜 것은 내의원의 어의들이었다.

대비도 더 이상 울며 지낼 수만은 없었다. 자신의 아들을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의심을 푸는 것 밖에 없었다. 그래서 성숙청으로 친히 가서 장씨도무녀를 찾았다.

대비는 성숙청 내부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기에 장씨가 뜰로 나와 그녀를 맞았다.

“여긴 어인 일이시옵니까?”

“잠시 자네와 의논할 일이 있어서이네.”

핼쑥한 얼굴의 대비는 주위에 있는 이들을 멀리로 물리쳤다. 그리고 단 둘이 되어서도

망설이며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대비는 장씨가 낯설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믿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인지도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현재 대비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장씨외엔 달리 아는 사람도 없었다.

“긴히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이리 왔네.”

“하명 하시옵소서.”

“······자네의 명성은 익히 왕대비마마를 통해 알고 있었다. 이리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지만.”

“영광이옵니다. 쇤네를 찾은 연유가 무엇이옵니까?”

“주상의 이번 어환의 원인을 알 것 같기도 해서······.”

장씨의 눈이 반가움 반, 놀라움 반이 되어 대비를 쳐다보았다. 대비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한숨과 더불어 말했다.

“아무래도 옛날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가 죽은 풍천위의 누이가 원귀가 되어 주상을

괴롭히고 있는 모양이야.”

“네?”

장씨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온몸이 떨렸다. 그래서 대비의 다음말만 숨죽이며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주상께오서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자꾸 그 아이를 말씀하시는 것이······. 그런데

본적도 없는 그 아이를 마치 본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이 더 요상해서.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세자빈으로 간택되고 가례도 못 올리고 죽은 것만도 억울한데, 처녀귀로

만들어버렸으니 어찌 원귀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자네가 그 원귀를 위로해주게나.”

장씨의 표정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래서 핑계를 대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그렇사옵니까? 쇤네가 미흡하여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사옵니다. 상감마마께옵서

분명 보신 것처럼······?”

“그렇다니까. 그러니 내 생각이 맞을 것이야. 자네가 굿을 하면 주상께서 쾌차하시지

않겠는가?”

“제가 긴밀히 알아보겠사옵니다. 허니 지금은 돌아가 계시오소서.”

대비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조선의 국무인 그녀를 안 믿을 수가 없었다. 대비를

배웅하고 난 장씨는 떨리는 다리로 어떻게 성숙청으로 들어가 앉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왕이 연우를 알아본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그녀의 넋을 뺏고 있었다.

왕이 몸을 일으켜 미음을 들었다는 다행한 소식이 의빈의 집에도 날아들었다. 그래서 염도

미음을 먹었고, 민화도 덩달아 같이 앉아 미음을 먹었다. 염이 한 숟가락 뜨면 자신도

한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민화는 염이 크게 건강을 해치기 전에 오라비인 훤이 살아나 준

것이 고마웠다. 같이 굶었지만 민화는 자신의 입으로 들어가는 미음보다 염의 입으로

들어가는 미음이 더 신경 쓰였다. 사이좋게 미음을 나누고 있던 그들에게 대비전에서

비자(婢子, 별궁·본곁·종친 사이의 문안 편지를 전달하던 여자 종)가 나왔다는 청지기의

보고가 있었다. 민화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라 생각하고 사랑방을 나갔다.

염도 민화와 같은 생각으로 나갔으나, 나왔다는 비자는 보이지 않았다. 의아해 하는

그들에게 청지기가 말했다.

“정경부인께 전할 서찰이라 하여 안채로 갔습니다.”

신씨와 대비는 가끔 서찰을 주고받는 사이이긴 했다. 하지만 왕의 어환으로 정신없는

이때 비자를 보내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염은 마당에 내려서서 비자가 돌아간 것을

확인하고는 급히 안채로 들어갔다.

“어머니, 소자입니다.”

그런데 방안에선 대답은 없고 소리죽인 울음소리만 들렸다. 놀란 염은 헐레벌떡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무슨 일입니까? 궐에서 낭보라도?”

신씨는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박고 울고 있었다. 염이 다그쳐 묻자 겨우 울음을 죽이며

말했다.

“우리 연우가······우리 연우가 상감마마를 괴롭힌단다. 세상에. 욱욱.”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염은 신씨의 앞에 놓인 서찰을 읽었다. 내용은 기가 막히게도 왕이 연우를 본 것처럼

말하는 것으로 보아, 연우의 원귀가 왕을 괴롭히고 있는 것 같으니 합심하여 굿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염의 억장도 무너졌다. 신씨는 더욱 울음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우리 착한 연우가 행여 상감마마께 해코지를 하려고. 처녀귀로 죽은 것만으로도 원통한데,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워 두 번 죽이려 들다니. 우리 연우가 왜 자신이 사모한 분을 괴롭혀!

원귀라는 것이 있다면 내가 한번 보자. 우리 연우 나도 한번 보자! 귀신이라도 좋으니

얼굴이라도 한번 보았음······. 가엾은 것.”

“누가 듣습니다. 고정하십시오.”

염은 무너지는 가슴으로 사랑채로 돌아왔다. 민화가 무슨 일인지를 눈으로 묻고 있었지만

답하지 않고 하늘만 보았다. 원망스러워도 원망스럽다고 말할 수없는 민화의 어머니였다.

민화는 조심스럽게 염의 눈치만 보았다.

민화가 안채로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가고 나자, 청지기가 머뭇거리며 염에게 다가왔다.

“저······, 말씀드리기가 송구스럽지만 아무래도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무슨 일이냐?”

“노비 각섬이가 말한 것인데요, 어제 누가 연우아기씨 장례식에 대해 묻더랍니다.”

염의 눈이 또 한 차례 슬픔으로 무너졌다. 청지기는 더욱 머뭇거리며 힘들게 말했다.

“그게······,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관료쯤은 되어 보이더라고 하구요,

여타 장례식과 다른 점에 대해 소상히 캐묻더랍니다. 어린 아기씨의 장례식이니 다를 수도

있구만은.”

“소상히 말해 보거라!”

갑자기 다급하게 묻는 염에게 청지기는 깜짝 놀라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도 그냥 들은 말입니다. 그냥 대충 말해준 것이 끝이랍니다. 얼마 전에 운검나으리도

연우아기씨에 대해 묻더니, 요즘 부쩍 이상합니다.”

“제운이 자네에게도 우리 연우에 대해 물었단 말이냐?”

“네, 주인어른과 말씀 나누었다기에 저도 아무 생각 없이 술술 말해버렸습니다.

제가 혹여 잘못한 것은 아니겠죠?”

염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순간 방금 서찰의 내용 중에 왕이 연우를 본 것 같이 말하더라는

문구가 뇌리에 깊숙하게 스쳤다. 염이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청지기를 보았다.

“제운에게 무어라 말해주었느냐?”

“저기, 가슴 아프실까봐 제가 말씀드리지 않은 것을······. 장례가 끝나고 제가

다시 묘를 살피러 갔을 때 연우아기씨의 봉묘를 들짐승인지 모르겠지만 파헤치다 말았었다고.

하지만 분명 깊이 파헤친 것이 아니었고, 바로 제가 다시 손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슬퍼하시지 마십시오.”

염은 복잡한 머리와 무너지는 억장을 동시에 느끼며 사랑방으로 들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동안 주위에서 일어난 이상한 것들이 염의 머리를 덮쳤고, 어쩐지 연우가 살아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점점 치우쳐졌다. 연우가 살아있다면 오라비인

자신에게 오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세자빈 간택이 있은 이후부터의

이상했던 일들이 염의 머리에 상세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힘겹게 머릿속에서

싸우던 염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그리고 창고로 가서 곡괭이를 가지고 나왔다.

청지기가 깜짝 놀라 염의 뒤를 따랐다.

“어딜 가십니까?”

하지만 염은 무서운 눈빛으로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다. 그래서 청지기는 곡괭이를

빼앗듯이 들고 염을 따라 걸었다. 염을 따르던 그의 표정이 차츰 두려움으로 뒤덮였다.

염이 가고 있는 곳, 그곳은 바로 연우의 무덤이었다. 청지기의 표정이 더욱 두려웠던

이유는 자신이 들고 있는 곡괭이가 쓰일 용도였다.

의금부도사가 조사한 연우의 장례식에 대한 자료가 훤의 손에 들어갔다. 훤은 숨 가쁜 몸을

하고서도 힘겹게 내용을 확인했다. 장례식에 대한 여러 정황이 훤의 심중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훤은 아랫고상궁에게 명하여 ‘雨’라고 적힌 화각함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그리고 뜬금없이 곤룡포를 가져오라고 했다. 해가 떨어져 어두운 저녁에, 그것도 아직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인데 옷을 갖춰 입겠다고 하는 것이 이상했다. 하지만 왕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이 왕의 몸을 씻기고 옷을 입혔다. 훤은 익선관까지 갖춰 쓰고는 화각함을 열어

연우의 서찰이 아닌, 안에 있는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그 상자 안에 붉은 비단으로

감싼 무언가를 꺼내 옷소매에 넣었다.

“부축을 해다오.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러니 월도 밖으로 나오라 일러라.”

“마마, 아직은 아니 되옵니다. 일어설 수도 없지 않사옵니까?”

“그러니 부축을 하라 않느냐!”

문 건너 방에서 월은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겨우 훤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월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훤이 양 옆에 내관들의 부축을 받고 강녕전을 나오니 연우가 월대 아래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초췌한 훤의 얼굴에 가슴이 먹먹해졌지만 표정만은 깨끗이 비우고 왕의 앞에 섰다.

“월아, 오랜만이다.”

“소녀가 미진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가까이 와서 날 부축해라.”

훤은 다가선 연우에게 몸을 기대듯 한 팔로 힘껏 끌어안았다. 한동안 왕이 몸을 기댄

것인지 아니면 안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 흘렸다. 서서히 왕의 발이 떨어졌다.

내관 두 명이 부축해도 힘겨웠던 훤이었는데, 어떤 기적이 온 것인지 연우 혼자 부축해도

신기하게도 걸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연우에게 힘을 덜 들게 하기 위해 애쓰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훤은 침전을 벗어나 편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모두를 기다리라고 명하고 연우에게만

의지하여 천추전 안으로 들어갔다. 운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처음에는 안 된다며 말렸지만,

가누기조차 힘든 몸으로 무슨 일이 생길 리가 없었기에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한편으론

두 사람을 같이 있게 해주고픈 마음도 있었다. 천추전으로 들어선 훤은 신기하게도

혼자 두 다리로 설 수 있었다.

“이상하다. 너와 단둘이 있고 보니 몸이 절로 좋아지나 보구나.”

“정말 괜찮으시옵니까?”

훤은 연우를 더욱 끌어안으며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여전히 창백한 안색이 연우의 가슴을

슬프게 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를 아느냐?”

“모르옵니다.”

“저곳이 보이느냐?”

연우는 훤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곳엔 왕의 서안이 놓여 있었고, 용이 조각된

용평상이 있었다. 훤이 왕으로서 위엄을 갖춰 앉는 곳이었다.

“아니, 내가 보란 것은 용평상이 아니라 그 뒤의 <일월오악도>가 그려진 병풍이다.”

연우는 일월오악도를 보았다. 왕이 다스리는 국토를 상징하는 다섯 개의 큰 산이 그려져

있었고, 왕을 상징하는 붉은 해와 왕비를 상징하는 하얀 달이 같은 하늘에 그려져 있었다.

훤은 연우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말했다.

“붉은 해와 하얀 달. 왕과 왕비를 말한다. 난 예전, 세자시절 저 병풍에 담긴 뜻을

여인의 비녀로 만들어 달라 조각장에게 명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마음에 품은

그 여인에게 주고 싶어서.”

훤의 품안에 안겨있던 연우의 몸이 두려움으로 경직되었다. 하지만 뒤에서 연우를 안고

있는 훤의 표정을 살필 수 없는 것이 더 두려웠다. 훤은 팔의 소매에 넣어두었던

작은 상자 속에 있던 것을 천천히 꺼냈다. 연우가 가지고 있던 봉잠과 똑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뜻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분명 침전에 감금되기 전에 자신이 가진 봉잠은

접은 이불 사이에 넣어두었었다. 혼란한 연우의 귓가를 훤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것과 똑 같은 것을 본 적 있소?”

어투까지 달라진 것에 놀란 연우는 훤을 밀쳐 내고 돌아서서 뒷걸음을 했다.

“이것은 가례시에 적의와 함께 착용하는 쌍봉잠이오. 몰랐소? 하나는 내가 가지고,

하나는 내가 마음에 품은 여인에게 보냈소.”

“가, 갑자기 무슨 뜻이온지, 소녀 알아듣지 못하겠사옵니다. 그리고 하대를 하시옵소서.

비천한 이 몸에게 어, 어찌하여 공대를 하시옵니까?”

연우는 더욱더 뒷걸음질을 했다. 자꾸만 멀어져 가는 연우를 안타까이 보고 있던 훤은

눈물을 떨구며 말했다.

“존재하는 만물은 돌아가고 또 돌아가도 다 돌아가지 못하니, 다 돌아갔는가 하고 보면

아직 다 돌아가지 않았네,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 끝까지 가도 돌아감은 끝나지 않는 것,

묻노니 그대는 어디로 돌아갈 건가.”(화담 서경덕의 <유물> 2연)

처음 만난 날 연우가 훤이 읊은 1연에 대해 답하듯 들려준 시였다. 뒷걸음을 멈춘 연우에게

훤은 다시 말했다.

“돌려보내려 해도 돌아가지 않고, 잊으려 해도 잊어지지 않고 남아있던 것이

나를 향한 마음이었소, 연우낭자?”

#26

연우는 훤의 말을 이해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렀다. 그리고 이해하고 나서도

더 이상의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오직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의 애끊는 눈빛뿐이었다.

그 눈빛이 슬프게 누군가를 불렀다.

“연우낭자.”

그가 부른 이가 누군지 몰라야 한다는 것. 이외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우선 그의

눈빛을 보아선 안 되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 눈빛에 빨려들듯 자꾸만 달려가

안기고픈 두 다리를 막을 방도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인 방어였다. 그래서 다가가는

마음과는 반대로 두어 발 더 뒷걸음을 한 뒤, 몸을 반쯤 돌려 옆으로 섰다.

“연우란 여인이 누구시온데, 이리 천한 몸뚱이에 걸친단 말씀이옵니까?”

감아버린 연우의 눈엔 처참하게 일그러진 훤의 표정은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슬픔에 짓이겨진 목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잖아도 숨쉬기조차 힘든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참이오?”

훤의 힘든 걸음이 연우를 향해 내딛어졌다. 하지만 훤이 다가서는 거리만큼 연우는

물러났다. 그렇게 물러만 나니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졌다. 왕의 용상에 오르는

계단까지 다다른 것이었다. 그곳엔 왕 이외는 오를 수 없는 곳이었다. 물러설 수없는

상황이 되자 훤은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그 자리에 멈췄다.

“나의 눈은 천한 것은 담지 않으니, 지금 내 눈에 있는 그 몸은 천한 것이 아니오.

바로 연우낭자의 몸이오.”

“어환이 깊으시어 혼미하신 듯 하옵니다.”

“아니라 말하지 마시오! 연우낭자면 연우낭자라 하고, 아니라 하여도 연우낭자라 하시오!”

연우는 훤의 눈물에 젖어 눅눅해진 자신의 심장을 두 손으로 눌렀다. 그 심장은 연우가

아니란 말을 뱉어내지 못하게 했다. 이미 알아버린 그에게 어설픈 거짓말로 둘러대다간

그를 더 슬프게 만들게 될 것이었다.

“난 하고픈 말이 너무나 많았소. 그 말을 하지 못한 심장이 망가져 버리고 만 것이니,

들어주시오. 연우낭자가 아니어도 연우낭자가 되어 들어주시오.”

듣고 싶었다. 자신이 이제까지 죽지 못하고 살아온 이유가 바로 지금 훤의 입에서 나올

말들을 듣고 싶어서였다. 그 지극한 마음이 연우의 의지를 배반하고 발걸음을 훤에게로

인도하고 말았다. 가까이 다가서서 마주한 그들 사이에는 세상의 시간조차 숨을 죽이고

멈춘듯했다. 서로가 서로의 눈에서 자신들의 눈부처를 보았다. 그리고 훤의 눈 속을 가득

메운 연우의 눈부처는 더 이상 무녀의 신분이 아니었다. 왕의 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순간 훤의 눈동자에서 연우가 사라졌다. 대신 눈에서 사라진 그녀는

훤의 품안에 꽉 들어차 있었다. 연우의 두 팔도 훤을 품안에 가득 끌어안았다.

“연우낭자······,”

훤은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삼키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막상 말을 하려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도 없었다.

“······하고픈 말이 많았는데, 너무 많아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소.”

말 못하는 훤을 대신해서 연우는 자신이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물었다.

“혹여 보고 싶었다 말씀하시려 하였사옵니까?”

“그렇소. 하지만 그 말이 아니오. 보고 싶었단 말로는 내 마음을 다 말할 수 없기에,

세자시절 그대와 만나면 해줄 많은 말들을 생각해 뒀었소. 그런데 그대가 너무 늦게

내 앞에 나타나 지금은 잊어버리고 말았소. 많은 말들이 있었는데······,

그대는 없었소.”

“마음으로 이미 들었사옵니다.”

“왜 내게 오지 않았소?”

“경복궁이 광한전(달나라의 궁전)보다 더 멀었기 때문이옵니다.”

“왜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소? 알았더라면······, 알았더라면······.”

“언제나 꾸어오던 꿈과 같아서 지금도 꿈속이라 여겼기 때문이옵니다. 덧없이 깨어나면

서럽지 않게······.”

훤은 품속에서 연우를 떨어뜨려 다시 눈을 들여다보았다. 눈물 가득한 여인의 눈 속에

똑 같이 눈물 흘리는 사내가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소. 정말 아무것도······. 나를 많이 원망하였소?”

“소녀의 마음이 좁디좁아 그리움만으로도 차고 넘쳤으니, 어찌 원망이 자리할 곳이

있었겠사옵니까?”

“그럼 난 마음이 넓은 사내인가 보오. 그동안 그리움만으로도 부족하여, 너무 많은 원망도

하였으니.”

“무엇이 그리도 원망스럽더이까?”

“세상 가득 설렘으로만 채워놓고는 한순간에 빼앗아 가버려 원망하였소. 세상을 떠나고도

내 마음에선 떠나지 않아서 원망하였소. 이젠 볼 수 없는데, 보고픈 마음은 더하여져 감에

원망하였소. 짝 잃은 쌍봉잠 한 짝을 쓸모없어지게 하여 원망하였소. 많은 말들을 전하지도

못한 채 나 홀로 삭이게 하여 원망하였소.”

“원망하시오소서. 그런 원망이어든, 잊어버려 원망하지 않았단 말보다 기쁘옵니다.”

“지금도 원망스럽소. 멋진 사내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도 많은 연습을 하였는데,

지금은 울보가 된 사내외엔 보여주지 못하니.”

연우는 감히 왕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손끝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쓰다듬어 보았다.

“이리도 멋진 분이신지는 소녀, 미처 알지 못했나이다.”

“난 알고 있었소. 이리도 아름다울 거라 내 이미 알고 있었기에 보고 싶었소.

그리고······, 그대를 만나면 꼭 하고픈 것이 있었소.”

연우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기도 전에 훤의 입술이 연우의 입술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리고 숨 쉬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 거짓말인양 아주 긴 호흡으로 연우의 심장에 고여

썩어있는 응어리들을 빨아들였다. 오랫동안 계속된 힘 있는 흡입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린 쪽은 연우였다. 훤은 단단한 두 다리로 버티고 서서 연우의 허리를 안아

부축했다. 하지만 입술은 놓아주지 않았다.

“상감마마! 무슨 일 있으시옵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천추전 안에서 왕과 무녀가 나오지 않자, 걱정된 내관들이 목소리를 높여

안의 동정을 살피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무시하던 훤은 계속해서 바깥에서 외치는

방해하는 소리에 기분이 상해버렸다.

“무슨 일이 있을 리가 있느냐!”

화가 나서 외치는 훤의 우렁찬 소리에 연우는 몽롱해진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조금 전

침전에서의 모습과 확실하게 차이가 있는 훤의 상태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어의를 들이시어 어환을 살피시옵소서.”

“싫소! 난 그대에게 하고픈 말이 아직 많이 남았소. 조금만 더 단둘이 있으면 안 되겠소?”

“마마! 지금 안으로 불러들이시옵소서.”

훤은 연우가 왜 갑자기 조급하게 사람들을 불러들이라는지 미처 헤아릴 정신이 없었다.

오직 연우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 외엔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눈에

아직 눈물이 그치지 않은 자신과는 다른 연우의 태도가 못내 서운하고 속상했다.

훤은 아무 말 없이 용평상으로 올라가 앉았다. 연우가 부축하지 않아도 조금 비틀거리기만

했을 뿐 힘들지 않은 걸음이었다. 훤도 그제야 자신의 몸의 변화가 심상찮음을 깨달았다.

연우로 인해 기적이 일어난 것으로만 치부하기엔 변화가 확실했다.

“그대는 괜찮소? 혹여 나 대신······?”

“소녀, 아무렇지 않사옵니다. 어의부터 부르시옵소서.”

훤은 봉잠을 소매 자락에 넣고는 외쳤다.

“모두들 안으로 들라!”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들어왔다. 운은 들어서자마자,

용평상 아래에 서 있는 월부터 확인했다. 그리고 그 옆에 섰다. 훤은 어의를 보며 말했다.

“어서 나의 병을 살펴보아라.”

어의가 조심스럽게 훤의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맥을 집어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침전을 나오기 전까지는 쉽게 잡혀지지 않던 맥이 지금은 되살아나 있었던 것이다.

훤은 어의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그의 환한 표정에서 건강이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좋아진 건강이 이상하여 연우만 물끄러미 보았다.

‘진짜 신기가 있는 무녀가 맞는 것인가? 그래서 전 홍문관대제학이 자신의 손으로 딸에게

약을 먹이고, 장씨도무녀가 살려낸 것인가? 그렇다는 것은 할마마마나 외척일파들과는

무관하다는 말인데······. 내가 그들의 소행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틀렸던 것인가?’

같은 시간, 염은 연우의 무덤에 도착하여 곡괭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를 본 청지기가

기겁을 하며 무덤을 자신의 몸으로 막았다.

“어찌 이러십니까? 가엾은 아기씨 무덤입니다요.”

“비켜라!”

염의 표정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왠지 사람 껍데기만 있는 듯 하여 청지기의 마음은

더 안타까웠다.

“어찌 이러시는지 말씀해주십시오. 그러면 비켜드릴 것입니다요.”

그는 더 이상 막무가내로 무덤을 향해 덤벼드는 염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염의 손에서 강제로 곡괭이를 빼앗아 들었다.

“소인네가 하겠습니다! 주인님이 이런 일을 하시게 하느니, 차라리 소인네가 무덤을

파헤치고 그 벌을 받겠습니다.”

청지기는 심호흡을 하고 곡괭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평소 염이 쓰다듬는 것조차 아까워

하던 무덤을 내리쳤다. 꽁꽁 언 땅이 쉽게 곡괭이를 받아들여주지 않았지만, 힘들게 안으로

파 들어갔다. 염은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서 있었고, 곡괭이질을 하고 있는 청지기의

눈에선 안타까운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참을 언 땅과 씨름하고 나니 드디어 관이

보이기 시작했다. 청지기는 손으로 흙을 허겁지겁 치우고 소리쳤다.

“관이 보입니다! 이제 됐습죠?”

“관 뚜껑을 열어라.”

“네? 시, 시신까지 확인하시겠단 말씀입니까? 그건 절대 아니 될.”

“어서 열어라! 아니면 내가 열 것이다.”

청지기는 긴 한숨을 내 쉬었다. 주인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필시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무덤을 파헤치는 것이 누구보다 가슴 아픈 사람도 바로 주인님일

것이기에 청지기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곡괭이로 관 뚜껑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관 뚜껑은 고정 되어 있지 않고 곡괭이를 가져다 대기가 무섭게 스륵 열렸다.

“이럴 수가! 그때 분명 관 뚜껑을 못으로 박았는데······.”

미적거리고 있는 청지기를 참을 수가 없었던 염은 묘혈로 들어와 자신의 손으로 관 뚜껑을

밀쳤다. 염과 같이 관 속을 본 청지기의 얼굴도 새파랗게 질렸다. 그 속에는 흙 몇 덩어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염은 휘청거리며 묘혈의 벽 쪽에 주저앉듯이 기댔다.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대체 아기씨 시신이 어디에 있습니까? 소인네가 그 동안 계속

무덤을 돌보아 왔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진실입니다요. 그런데 한 번도 무덤이 손상된 적이

없었는데······. 그렇다면 묻은 그날?”

청지기는 더욱더 넋이 빠진 염을 보았다. 염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나마 기절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 싶었다.

“대체 누가 벼락 맞을 짓을 한 겁니까? 감히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던 분의 시신을!

서, 설마 사, 사, 살아 계.”

청지기는 행여 자신이 내뱉은 말이 바람결에라도 흘러갈까 두려워 손으로 얼른 입을 막았다.

마치 살아있는 시신과 같아서 묻지 말고 더 있어야 한다며 전 홍문관대제학께 울면서

호소했던 그였다. 그가 본 연우의 시신은 결코 시신으로 보이지 않았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마음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얼이 나간 염보다 정신을 먼저 차렸다. 그리고 급히 염을

묘혈 위로 끌어내고 훔쳐보는 이가 없나 주위를 경계해 가며 무덤을 덮기 시작했다.

“그, 그럼, 지금 어디 계신 걸까요?”

‘어디? 우리 연우가 있는 곳이 무덤 안이 아니라면······?’

염은 눈길을 들어 경복궁이 있는 곳을 보았다. 운이 보고, 양명군이 보고, 왕이 볼 수 있는 곳.

그곳은 경복궁밖엔 없었다.

‘예전에 무슨 일이 벌어졌었고, 지금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강녕전으로 돌아온 훤은 또 다시 심장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왕의 안색이 나빠진 것을

확인한 연우는 얼른 방안을 둘러보았다. 천장과 벽, 그리고 바닥을 훑어보던 연우는

방바닥의 네 모퉁이 중에 유독 한곳이 다름을 느꼈다. 훤도 연우의 눈길이 닿은 곳을 보았다.

그곳엔 누군가 뜯어내고 다시 붙인 흔적이 있었다. 연우는 구석으로 가서 장판을 뜯어냈다.

연우의 이상한 행동에 내관이 소리를 높여 호통했다.

“지금 무슨 짓이냐! 감히 무녀 주제에 왕의 침전을!”

하지만 다른 내관들과는 달리 운은 재빨리 연우가 뜯어낸 곳으로 갔다. 운의 이 사이로

말이 갈리듯 나왔다.

“부적입니다!”

깜짝 놀란 내관들이 몰려와 바닥을 확인했다. 그곳엔 믿을 수 없게도 정체모를 부적이

숨겨져 있었다. 연우는 일어나 옆방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한쪽 모퉁이를

뜯어내 부적이 있음을 확인했다. 내관들 모두 흩어져 각 칸 마다 부적이 있는 것을 찾아냈다.

나머지 몇 명의 내관들은 각각 연생전과 경성전으로 가서 그곳에서도 부적을 찾아냈다.

침전의 모든 칸에 부적이 없는 곳이 없었던 것이다. 상선내관이 연우를 보며 말했다.

“역시 무녀는 무녀였군. 이렇게 알아낸 것을 보니.”

하지만 훤의 머릿속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구삼년폐풍월(堂狗三年吠風月,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이라 했다. 신기로

알아낸 것이 아니라 오직 영민함으로 알아 낸 것이다. 연우낭자에겐 신기라는 것은 없다!’

훤은 내관들을 향해 말했다.

“지금 당장 관상감의 세 교수들과 소격서의 혜각도사, 그리고······

성숙청의 장씨도무녀를 불러오라!”

연우가 왕 앞에 엎드려 말했다.

“상감마마, 성숙청에는 소녀가 다녀오겠사옵니다.”

연우의 마음도 급했다. 왕이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된 것에 대해서 먼저 장씨에게 말하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해야 했다. 연우에게 있어서는 다른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훤은 잠시라도 연우와 떨어지는 것이 두려웠지만, 그녀의 사정도 있을 것이기에 마지못해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물러나는 연우를 보며 훤은 의아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였다면 자신이 연우임을 말하였을 것이다. 지금이 아니라 하여도 처음 온양에서 보았을 때,

나였다면 반드시 말했을 것이다. 살아있었다고, 원한을 풀어달라며. 그런데 왜 숨기고 있었을까?

그토록 설움을 삼키면서까지 연우가 아니라 했을까? 연우낭자가 자신의 신분으로 돌아오면

안 되는 어떤 이유가 있다는 뜻인데, 혹여 아바마마가 보호하고자 했던 이와 연관이 있는

것인가? 연우낭자조차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지켜야만 하는 그 무엇이 있단 말인가?

장씨도무녀! 그자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연우는 장씨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무거운 걸음으로 성숙청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연우임을 드러내 보이고 만 것을 스스로 자책해 보았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래서 왕이 자신을 알아차린 기쁨을 느낄 사이도 없이 가슴 무거운

막막함만을 느껴야 했다. 성숙청 뜰에 설이 서성거리다가 연우가 들어서자 웃으며 맞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어두운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던 검을 든 자객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었다.

#27

설의 눈에 연우의 뒤와 옆으로 다가오는 검은 무리가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의 뒤편으로도

자객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설은 얼른 연우의 팔을 잡아 자객들의 틈을 비집고

담장으로 밀쳐 세웠다. 전 방향보다는 담장에 연우를 기대게 하는 것이 훨씬 호위하기

좋기 때문이었다. 눈으로 훑어보니 자객은 모두 5명이었다. 이들의 목적까지 설이 헤아릴

필요는 없었다. 상대가 검을 들고 있으니, 검을 꺼내야 했다. 설이 조심스럽게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자, 자객들은 영문을 몰라 다가오던 걸음을 주춤했다.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설은 치마 아래에 감춰두었던 환도를 꺼냈다. 자객들은 갑자기 환도를 잡은

여인이 가로막을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던지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이내 설이 여자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그들이 검을 휘두르며 다가왔다.

설은 환도를 칼집에서 빼내어 자세를 갖추고는 화가 나서 중얼거렸다.

“젠장맞을 땡무당 같으니. 무당이랍시고 알아듣지도 못할 말만 중얼거리더니 이럴 땐

예언 비스무리한 것도 해주질 못하는데, 무당은 무슨 놈의 얼어 죽을 무당! 도무녀란 것도

개나 소나 다 할 수 있는 것이었나 보군. 신력 높은 거 좋아하네. 순 사기꾼 땡무당!”

이렇게 중얼거린다는 것은 설이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이기에 연우는 칼을 움켜진 설의 손을

차분하게 잡으며 자객들을 향해 말했다.

“누구를 해치려 이리 오셨습니까? 저는 가진 것 하나 없는 무녀입니다. 이렇게 자객들이

노릴 만한 것이 못되지요. 혹여 이유라도 듣고 죽을 수는 없습니까?”

칼날을 눈앞에 둔 여인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차분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가

빨리 돌던 공기의 흐름조차 멈추게 만든 듯했다. 그리고 목소리와 더불어 달빛을 받아

하얀 빛을 반사하는 모습이 마치 이 세상 사람 같지 않고 성스러운 기운조차 감돌았기에,

오히려 검을 든 자객들이 긴장하여 검을 고쳐 잡았다.

“이유는 모르고 그냥 죽이라는 명령만 따를 뿐이다!”

일제히 연우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자객들의 검 날과 설의 검 날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조용한 밤하늘 위로 잘게 부서져 올라갔다. 다섯 개의 검을 죄다 받아친 설 때문에 그들은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그들의 검이 연우가 아닌 설에게로 집중되었다. 하지만 훈련된

힘 있는 장정 다섯을 상대하기엔 설은 역부족이었다. 뒤에 있는 연우 쪽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설이 그들의 검을 다 방어하지 못하게 되자,

그들은 서서히 연우에게로 검 날을 돌렸다. 설은 흐트러진 자세를 하고서도 그 모든 검을

막아내려 했지만, 결국 연우에게로 가는 아찔한 검을 겨우 받아치며 그 검객을 베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로 오는 또 다른 검은 그대로 받았다. 연우의 비명이 성숙청을 뒤덮었고,

동시에 검을 쥔 설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순식간에 설의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젠장! 젠장!”

설은 자신이 다친 것 보다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 검을 쥐기 힘든 것에 더 화가나 이를

갈았다. 설의 검에 베어진 한명은 쓰러지고 남은 네 명의 시선이 새하얀 연우에게로

집중되었다. 설은 그들의 시선을 알고도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팔 때문에 입술을

깨물었다. 자객들의 검이 연우를 향해 날아들 때였다. 설이 힘겹게 검을 들어 올린 순간

자객들의 눈앞에 있던 새하얀 여인이 사라지고, 하늘에서 내려왔는지 땅에서 솟았는지

알 수 없는 새까만 것이 눈 깜박할 사이에 시선을 가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사이도 없었다. 그것보다 먼저 자신들의 동료 중에 한명이 비명조차

없이 쓰러져 죽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이 두려운 눈길로 다시 새까만 것의 정체를 파악했을

때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뒷걸음질을 쳤다. 긴 검은 머리를 휘날리며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이는 분명 운검이었다.

“으악! 우, 운검이 여긴 어떻게?”

내어 지르는 소리가 이미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공포가 담겨 있었다. 눈으로 확인은

못했지만, 아마도 방금 쓰러져 죽은 동료를 벤 검일 것이라 추정되는 별운검이 운의 왼손에

쥐어져 있었다. 설은 운의 등을 보고는 안심하여 다리에 힘을 풀고 쓰러졌다. 하지만

그녀를 끌어안고 피가 솟아나는 어깨를 손으로 막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연우

때문에 차마 눈까지 감을 수는 없었다.

검객들이 느닷없는 운검의 출연으로 두려워하느라 정신없을 때, 운은 등에 짊어지고 있는

운검을 오른손으로 서서히 빼내었다. 칼집에서 나오면서 검 날이 우는 소리가 마치 용의

울음소리 인양 검객들을 호령했다. 그들의 뒷목덜미가 죽음을 예감하고 머리털을 바짝

세웠다. 달빛과 하나가 된 운검의 검 날은 운의 오른손에 잡혀 연우를 가로 막았다.

그리고 오직 왼손의 별운검만으로 남아 있는 세 명의 검객들을 겨누었다.

겁에 질린 목소리가 말했다.

“어째서 운검까지 꺼낸 것이냐? 여긴 왕도 없는데!”

오직 왕을 호위하기 위해 존재하는 운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할 만도 했다. 하지만 운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춤사위를 펼치듯 순식간에 그들 쪽으로 파고들어 별운검을 두 번

휘둘렀다. 한 번의 큰 휘두름에 두 명의 목이 동시에 베어졌고, 또 한 번의 휘두름에

나머지 한명의 가슴이 베어졌다. 그들의 검은 운의 별운검과 한번 닿아볼 영광도 누리지

못하고 처참하게 쓰러졌다. 운은 한 번도 휘두르지 않은 운검을 등의 칼집에 다시 넣으며

이젠 듣지 못하는 시신들을 향해 답했다.

“운검이 움직이는 이유, 운검을 칼집에서 빼내는 이유는 단하나, 어명에 의해서다!”

설이 연우의 품에 안긴 채 힘겹게 웃으며 말했다.

“시체한테 말해줘 봤자 들을 수나 있습니까? 그리고 왜 눈 깜빡할 사이에 끝내셨습니까?

좋은 눈요기 하나 싶었는데 눈 한번 깜박이고 나니 다 죽어 있어서, 이렇게 허무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제가 실력이 형편없는 것 같아서 속상한걸요.”

“설아, 설아······.”

연우의 울음소리에 설은 눈길을 연우에게로 돌리고 미소를 보였다.

“울지 마세요. 어깨를 조금 베인 것뿐인데, 이건 된장 한 덩어리만 붙이면 사흘 뒤엔

아물어요.”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설이 네가······.”

“아가씨 덕분에 평생 살아생전 한번 구경하기도 힘들다는 운검의 궁중검술을 보았는걸요.

방금 아가씨는 못 보셨죠? 양 손에 칼을 쥔, 쌍검법. 그런데 쪼잔하게 금방 끝내 버려서

제대로 구경도 못했네요. 조금만 더 보여주시지. 하하하.”

설은 자신이 다친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연우가 다쳤다면, 염을 대신해 자신의 마음이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었다. 그래서 피가 흘러내리는 자신의 상처가 오히려 고마웠다.

연우의 비명소리에 놀라 나와 있던 성숙청의 무녀들이 그제야 가까이 다가와 설의 상처를

확인했다. 그리고 순찰을 돌던 군사들이 연우의 비명을 들어서인지, 아니면 운검에

새겨진 용의 울음소리를 들어서인지 달려왔다. 그들은 먼저 운검을 향해 인사를 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암호를 대라!”

운은 군사들조차 안심할 수 없었기에 오늘 왕이 힘든 몸으로 정해준 암호를 물었다.

“네? 백일장(白日長, 밝은 해는 영원하다)!”

운은 그들을 향해 별운검의 끝으로 설이 벤 놈과 마지막에 자신이 가슴을 벤 놈을 각각

가리켰다. 군사들이 확인을 해보니 그 둘만 숨이 붙어 있었다.

“심문을 위해 남겨둔 자들이다. 의금부로 넘겨라!”

군사들이 시신들을 정리하는 사이, 무녀와 무노비들이 설을 성숙청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연우도 설을 따라 성숙청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운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연우가

눈물 가득한 눈으로 운을 보았다. 무슨 일인지 묻는 눈이었지만 운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팔을 잡아 세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우를 걱정한 마음이 앞서 무의식중에 그만

팔부터 잡아버렸긴 했지만 한번 잡은 그 팔을 놓아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눈물

흘리며 떨고 있는 그녀를 안아줄 수는 더 더욱이나 없었다. 아주 조금의 힘만 주어 팔을

잡아당기면 눈앞의 여인을 품에 안아줄 수 있었지만, 그 욕구를 참느라 연우의 팔을 잡은

운의 손엔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너무 움켜진 바람에 연우가 팔이 아파 콧잔등을

살짝 찡긋했다. 운은 그제야 놀란 듯 자신의 손을 놓았다.

“흰 옷이 피로 물들었소. 빨리 정리하시오. 상감마마께옵서 기다리시니.”

“그러고 보니 여긴 어떻게······?”

“상감마마께옵서 걱정되시어 나를 보내시었소.”

연우가 모습을 감추자마자 안절부절 하던 왕이 운에게 뒤를 따라 갔다 오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찌 되었을지 생각하니 운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다행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이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다면 설이 다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연우가 가슴 아픈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을 것이란 생각에 미안했다.

“감사합니다.”

“그런 말······들을 자격이 없소.”

이때 안에서 장씨가 놀란 눈으로 나왔다. 연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설이는 어떻습니까?”

장씨는 운을 힐끔 본 뒤에 말했다.

“나더러 땡무당이라며 설래발 치는 것을 보니 죽진 않겠더군. 그런데 상감마마 곁을

비우고 여긴 왜?”

“침전에서 부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신모님을 불러오란 어명으로 왔습니다.”

“부적?”

장씨의 표정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연우를 보았다.

연우는 옆에 운이 버티고 있어서 왕이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것에 대해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씨가 연우의 팔을 잡아 성숙청 안으로 끌고 들어가며 속삭였다.

“상감마마께오서 아시게 되었소?”

연우의 무거운 고개가 끄덕여졌다.

“역시······. 나 먼저 강녕전으로 갈 터이니 핏자국을 씻어내고 얼른 오시오.”

장씨가 성숙청을 나오자 바로 문 앞에 운이 서 있었다.

“에구, 놀래라! 뭔 놈의 키가 그리도 크오?”

“무녀는?”

“여긴 무녀 천지요. 방금 전 아이를 묻는 것이라면 여기서 조금 기다리시오. 핏자국은

씻고 상감마마의 곁으로 가도 갈 수 있을 것 아니겠소? 설마 목간통 옆에서 지키겠단 소린

아닐 테고. 다른 무녀들이 옆을 지킬 것이니 뭔 일이 나면 소리칠 것이오.”

장씨는 가려다가 걸음을 멈추고 운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을 빤히 보던 장씨는 달빛 역광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자, 반대편으로 돌아가 서서 운을 뚫어져라 보았다. 운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훑어 내렸다. 조선 제일의 신력이라고 하는 도무녀의

시선은 마치 운의 속내까지 꿰뚫어보는 듯해서 운은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장씨는 운을 보며 신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허참! 이런 놈을 뽑아 낸 년 밑구녕은 어찌 생겼을꼬. 미끈한 것이 잘났구만.

떡 벌어진 어깨에, 호리낭창하면서도 힘 있는 저 허리 좀 보게나. 하이고, 저 허리가

아래에 계집을 깔고 돌려대면 비명횡사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겠구먼. 죽는 년도 입 꼬리가

귀에 걸린 채 죽을 것이니 퍽도 좋을 것이고. 그런데······쯧쯧, 어지간히도 무거운

허리구먼. 아무 계집년 아래나 찾아들진 않을 인물이야. 저리 아까운 허리를 두고 정조

따위나 지키다니. 별 시덥잖은 허리가 여러 계집을 두는 것도 불행이지만, 저런 허리를

여러 계집이 나눠 갖질 못하는 것은 더 큰 불행이야.’

“허리 무거운 것이 그닥 좋은 것만은 아니군.”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 가는 장씨의 뒷모습을 운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꿰뚫어보는

듯한 도무녀의 시선 끝에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무언가 심오한 속뜻이 있을 것만 같아서

고민에 빠졌지만, 끝내 무슨 뜻인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운은 불안한 마음 때문인지 한참 동안 연우를 기다린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운 앞에

나타난 그녀는 조금 전의 피투성이가 되었던 모습은 남아 있지 않고 언제나처럼 단아한

모습 그대로였다.

“괜찮소?”

한마디라도 나누고픈 마음에 기껏 생각해낸 말이었다. 그런데 연우는 자신이 아니라 다친

설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네,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다른 무녀님들의 처방으로 어깨에 피도 멎었다고 합니다.

운검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다행이라는 말은 운이 하고 싶었다. 이날까지 손에 잡은 검에 감정을 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자객들에 둘러싸인 연우를 본 순간, 운이 잡은 검엔 분노가 실렸다. 그리고 자신의

검에 죽은 그들의 시신을 보면서도 두려움에 손이 떨렸었다. 왕이 아니었다면 연우를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녀의 죽음 자체가 운에겐 공포로 다가왔었다. 아마도 그래서

였을 것이다. 자신의 눈앞에서 동문서답을 하고 있는 그녀가 감사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담은 이유는. 연우는 운검의 궁중검술보다 운의 미소를 구경하기가 더 힘들다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그 미소를 받았다.

운이 발걸음을 옮기자 연우가 그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사내를 앞서 걸을 수 없는 여인의

몸이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걷다가 운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뒤따르면 위험하오.”

연우는 어쩔 수 없이 운의 옆에서 나란히 걸어야 했다. 연우의 머리 위로 달도 따라 걸었지만

운의 눈에는 그녀보다 눈부시진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와 닿은 연우의 달빛그림자가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고, 조금만 더 같이 있고픈 마음에 의해 긴 다리의 운이 연우의

걸음보다 더 느려졌다. 성숙청은 경복궁 중에서도 북쪽의 외진 곳에 있었다. 그래서 강녕전과의

거리도 상당히 멀었다. 하지만 연우와 단둘이 걷고 있는 길이 운에겐 너무나 짧게

느껴졌다. 지금쯤 강녕전에선 연우를 해치려던 자객들의 소식에 훤의 분노가 하늘을 뒤덮고

있을 것이었고, 어디에선가는 연우와 왕을 해치려는 음모가 오고가고 있을 것이었다.

이 급박한 시간 속에서 운은 연우와 나란히 걷는 이 길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그녀의 그림자가 닿은 자신의 어깨가 화끈거리고 있음을 느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침전으로 들어가는 향오문을 넘어 설 때였다. 당연히 강녕전 안에서

관상감의 교수 등과 회의를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훤이, 내관들과 더불어 뜰에서

조급하게 서성거리며 연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우에 대한 걱정으로 자신의 몸 상태까지

잊은 듯했다. 훤은 향오문을 넘어오는 두 사람을 발견한 순간, 가슴에 뜨거운 불기둥

하나가 솟아올라 왔다. 이제껏 본적 없는 운의 부드러운 표정을 보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달빛에 비친 그의 표정은 밝은 빛 아래보다 훨씬 차갑게 보임에도, 지금의 그의 표정은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이내 훤의 머리에서 자신이 의식을 잃기 직전에 연우를 품에 안고

나가던 운의 뒷모습이 떠올랐고, 그동안 간간히 보이던 그의 슬픈 표정들도 떠올랐다.

원인을 알 수 없었던 그의 혼란들의 정체를 훤은 눈치 채고 말았던 것이다. 가까이 다가와

인사를 올리는 연우를 보란 듯이 끌어안은 것도 운에 대한 훤의 질투였다. 아파서 골골대는

못난 사내의 모습만 연우에게 보이고 있는 것도 화나는데, 보지 않아도 분명 멋진 사내의

모습으로 연우를 구해냈을 운에 대해서 질투가 안날 수가 없었다.

운은 고개를 돌렸다. 왕이 여자를 안았기에 신하로서 고개를 돌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에 담긴 여인이 다른 사내의 품에 안긴 것을 차마 볼 수 없었기에 고개를

돌린 것이었다. 고작 그녀의 그림자가 자신의 몸에 닿은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조금 전의

길이 초라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슬픈 질투를 감추며 홀로 선 자신의

그림자만을 보았다. 운의 뒤로 왕의 분노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성숙청이 경복궁의 외진 곳에 있다고는 하나, 엄연히 궐내다! 그런데 어찌 허락받지

않은 검객들이 궐내에 들어올 수가 있단 말이냐?”

“검술로 단련된 자들이었사옵니다.”

“모두가 다섯이라 들었다. 그런데 모두가 훈련된 자들이었단 말이냐?”

“송구하옵게도 그러하옵니다. 무녀를 지키던 여종도 무예가 뛰어난 편인데, 크게 다쳤습니다.”

훤은 품 안에서 연우를 놓았다. 그리고 경직된 표정으로 운을 보았다.

“혹여 누군가의 돈을 받은 저잣거리의 왈자(깡패)더냐, 아니면······?”

“······왈자들의 검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소신이 운검임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운은 달빛에 언 훤을 보았다. 왕이 두려운 입을 열었다.

“사병을 가지고 훈련시키는 것은 역모로 간주하여 금지되어 있는 것이 국법이다.

그렇다는 것은 누군가가 사병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냐!”

운은 대답할 수 없는 민감한 문제였다. 그럴 가능성이 짙었지만, 증거도 없었다. 입을 다문

운에게 왕이 다시 말했다.

“몇 안 되는 사병이나마 가질 수 있는 것은 왕자여야 가능하다.”

왕자라는 말에 운이 완강하게 말했다. 왕자라면 곧 양명군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절대, 절대······. 자객들은 무녀를 납치하려던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죽이려고 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절대 양명군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형님이라면 납치를 했을 것이란 뜻이냐?”

운은 깜짝 놀라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방금 양명군의 무고를 변호하기 위해 내뱉은

말은 무녀가 연우임을 말하는 동시에, 옛날에 양명군이 연우를 마음에 품었던 사실까지

실토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운이 다시 자신의 말을 덮기 위해 말했다.

“양명군과는 오랫동안 벗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의 인품은 상감마마께옵서 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사가에는 하인 몇 명만이 전부입니다. 그러니······.”

“운아!······너도 알고 있구나. 언제부터 알고 있었느냐?”

운은 왕이 하는 말의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을 알고 있었단 말인지 한참을 생각한 끝에

두려운 눈길을 왕에게 보냈다. 왕의 말은 곧 왕도 월이 연우임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훤은 연우를 바라보며 운의 추측에 쇄기를 박는 말을 던졌다.

“나보다는 먼저 알았군. 그리고 나에게 왜 말을 해주지 않았는지도 알 것 같군.”

운은 변명의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자신을 보는 연우의

눈길도 느꼈지만, 마주 보지 못했다.

#28

강녕전에는 관상감의 세 교수와 혜각도사, 장씨도무녀가 마주보고 앉아서 부적을 확인하고

있었다. 방안 곳곳을 밝힌 촛불들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것과 똑같이 그들의 눈동자도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훤은 연우를 자신의 등 뒤에 있는 방에 숨기듯 두었다.

마치 강녕전이 교태전을 뒤에 두고 보호하듯 서 있는 것처럼 훤도 자신의 뒤에 연우를 둔 것이었다.

그리고 차마 운의 눈길은 닿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닿아지지 못해 돌린 옆얼굴이

그녀를 느끼는 것조차 싫은 마음이 있었다. 운의 스산한 옆얼굴을 보는 것도 운을 아끼는

마음과 더불어 훤을 괴롭히고 있었다. 훤은 애써 머리를 털고 눈앞에 앉은 이들의 눈동자의

떨림을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기력을 집중하려고 애썼다. 훤의 건강이 비록

조금은 나아졌다고는 하나, 이따금씩 앉아있는 몸이 휙휙 꺾이곤 했지만, 그들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신경전은 뚜렷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부적이 무엇인가?”

훤의 물음에 어느 누구도 먼저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비밀,

그것으로 인해 각자가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데 미묘하게 어긋나고 있었던 것이다. 훤조차

어긋나게 만드는 비밀들의 실체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우선 이것부터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르긴 해도 그 부적은 나를 해치려는 것이 분명한데······. 나에겐 액받이무녀가 있다.

헌데 어찌 그 여인은 두고 내가 아픈 것이냐? 누가 먼저 설명할 것이냐?”

혜각도사가 먼저 몸을 엎드려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것보다는 우선 이 부적들이 어떻게 어소(御所, 왕이 있는 곳)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부터 살피시어야 하옵니다.”

“그 또한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내가 궐을 비운 사이겠지. 아! 그렇게 생각하면

합궁일에 교태전에서 쓰러졌던 것을 보면 아닌 것도 같고. 그날은 그럼 궐 밖에서 누군가가

주술을 부린 것인가?”

혜각도사가 멈칫할 틈도 없이 이번에는 지리학교수가 몸을 엎으려 말했다.

“궐 밖에서 부리는 주술은 절대 경복궁 내에 영향을 미칠 수 없사옵니다. 분명 그날의 주술은

다른 것과는 다른 것이 확실한 것이라 생각되옵고, 또한 온양행궁에 다니어 오신 이후와

이번의 일도 각기 다른 기운이옵니다. 하여 관상감의 천신들이 살의 본질을 지금까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옵니다.”

“그 말은 세 주술이 모두 다른 자의 소행이란 말이냐?”

“그 또한 알 수가 없음이옵니다.”

훤은 갑갑한 심정으로 장씨를 보았다. 입을 다문 채 어떠한 표정도 없는 날카로운 눈매.

그녀는 무언가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 이유는 그녀가 감추어야 할

비밀들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 분명했다. 훤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번득이며 스치는 생각을 잡았다.

“잠깐! 지리학교수 들어라. 방금 궐 밖에서 부리는 주술은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하였는가?

그것이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이옵니다. 이곳 경복궁은 곳곳에 해악한 주술들이 범접할 수 없도록 지키는

것들이 있사옵니다. 근정전의 사신과 십이지신, 서수의 상들도 그러한 예이옵니다.

또한 경북궁의 구조가 정통적인 오문삼조식(중국과 우리나라의 궁궐구조의 원칙)에서

조금씩 어긋나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광화문 앞의 육조거리(육조와 중요관서들이

마주보고 선 가장 큰 길. 오늘날의 세종로)를 통해 주술이 들어오는 것을 남쪽으로 황토현이란

작은 언덕이 막아주게 되어 있사옵고, 동시에 젊은 어미의 젖산인 백악산이 어미가 자식을

보호하듯 뒤에서 막아주고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그날 궐내에서 누군가가 주술을 부렸단 뜻인데, 그날의 궐내 명단을 조사해

보면 원흉을 찾을 수 있을 것 아니냐? 그것과 오늘 자객이 깨어나면 그들을 심문하여

대조를 하면 되겠다!”

훤의 가슴에 빛이 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 빛이 미처 번지기도 전에 어둡게 만드는

이가 있었으니, 이가 혜각도사였다.

“상감마마! 천신을 죽여주시옵소서!”

훤은 장씨를 보던 눈빛을 혜각도사에게로 돌렸다.

“그날의 살수는 천신이 보낸 것이었사옵니다.”

훤을 비롯해서 침전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혜각도사는

상왕의 신임을 받은 인물이었고 또한 훤이 믿고 있는 측근 중의 한명이었다. 그렇기에

역모와 다름없는 그의 발언에 모두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훤도 처음엔 충격을

받았지만 차차 의아해지고, 끝내는 이것이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까지 도달했다.

“생각이 나는군. 그날 교수들이 말했던, 살은 살인데 살과는 다르다는 묘한 말의 뜻을!

혜각도사! 너는 나를 죽이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이유를 말하라. 혹여 나를 위한 일시적인

살이었느냐?”

“상감마마를 윗잡는 살임과 동시에, 나아가 종묘사직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것이었사옵니다.

천신을 죽여주시옵소서.”

훤은 혜각도사의 말을 파악했다. 그날 살을 받아 아팠기에 왔던 기적! 그것은 월, 즉 연우와의

재회였다. 혜각도사가 다시 말했다.

“한번 끊어진 인연은 돌이킬 수 없듯이, 한번 이어진 인연 또한 돌이킬 수 없는 것이옵니다.

이어져선 안 되는 인연이 이어져 버리면, 그 전에 끊어진 인연을 두 번 다시 이을 수 없는

것이 되옵기에 그리한 것이옵니다.”

훤은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 원래 하늘이 정한 인연은 연우였지만, 인간이 이 인연을

끊어내고 인연이 아닌 중전윤씨와 이어 놓은 것이다. 그렇기에 그날 중전윤씨와의 합방이

이뤄져 버렸다면, 인간이 저질러 놓은 인연이 기정사실화 되어버려 두 번 다시는 연우와의

인연이 닿지 못했을 것이란 뜻이었다.

“고맙구나, 혜각도사.”

이번엔 왕의 말에 사람들이 놀랐다. 참수를 시켜도 시원찮을 마당에 감사의 인사라니.

둘 사이에 오고 간 깊은 뜻을 알아들은 이는 운과 장씨 뿐이었다. 그리고 혜각도사도

다른 의미로 놀랐다. 왕의 말을 통해 월이 연우임을 알고 있단 뜻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가슴에 안심과 행복, 두려움이 동시에 꿈틀거렸다. 훤은 비밀 하나를 걷어낸 기분으로

말했다.

“그날의 주술을 뺀다면, 나머지 둘은 모두 내가 궐을 비운 사이에 일어났다는 의미다!

내가 궐을 비운 사이에 침전에 누가 들어왔는가? 아니, 누가 들어올 수 있는가?”

궐내에 머무는 사람들은 그 수가 부지기수였다. 그중 침전에 들어올 수 있는 이는 궁녀와

내관들이었다. 그리고 중전과 대비, 왕대비도 가능했다.

“할마마마?”

낮게 중얼거리는 훤의 말을 장씨가 냉큼 받았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성숙청은 왕대비마마의 명을 받은 적이 있사온데, 어서 원자아기시를

볼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사옵니다. 상감마마께옵서 어환에 계시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옵니다.”

“난 너의 말을 믿지 않는다! 내가 죽으면 안 될지 모르나, 아파서 누워있는 것은 할마마마께

덕이 되기 때문이다.”

“하오나 원자아기시를 보시는 것이 더 덕이 되옵니다.”

이번에는 입 다물고 있던 명과학교수가 감정을 꾹꾹 눌러 삼키듯이 말했다.

“이 부적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주술이 담겨있사옵니다. 살아나신 것이 기적일 따름입니다.”

훤의 머릿속이 더욱 헝클어졌다. 죽이려 하였다니, 그렇다는 것은 절대 왕대비와는 상관없는

일이란 뜻이었다. 혜각도사는 명과학교수의 말에 부적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한참을 부적에

새겨진 기호들을 풀어보더니 갑자기 놀란 눈을 장씨에게로 돌렸다. 왕과 교수들의 눈길이

따라 움직이자,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훤의 의구심을

따돌리지는 못했다.

“말하라! 무엇을 알아낸 것인가?”

가지런히 바닥을 짚고 있는 혜각도사의 주름진 두 손등에 핏줄이 투둑투둑 올라왔다.

“이것은······상감마마를 향한 부적이 아닌 듯 보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분명 왕이 아팠는데, 왕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그의 말은 궤변처럼 느껴졌다. 명과학교수가 다시 부적을 확인했다. 이내 그의 눈빛이

혜각도사와는 다른 의미를 담고 장씨를 보았다. 훤은 그들의 눈빛에 조급해져서 마음이 타들어갔다.

“무엇인가? 명과학교수가 답하라!”

“······상감마마가 아닌, 액받이무녀를 죽이고자하는 부적이옵니다. 헌데 어찌······?”

훤의 분노가 방안 공기를 뒤흔들며 울러 퍼졌다. 그 공기의 뜨거움은 뒤의 방에 앉아 있던

연우의 감정과 하나가 되었다. 훤이 느낀 분노는 자신이 아닌 연우를 죽이려 한 자들에

대한 것이었고, 연우의 분노는 자신이 받아서 죽어야 했던 것이 훤을 고통스럽게 만든 것에

대한 분노였다. 명과학교수의 눈빛은 장씨를 더욱더 찔러대었다. 그가 내뿜지 못하고 삼키는

말들을 훤은 내어지르게 하고 싶었다.

“명과학교수! 도무녀에게 하고픈 말이 있거든 지금 여기서 하라! 내가 없다 여기거라.”

“······액받이무녀라는 그 성숙청의 수종무녀가 진짜 무녀인 것이오?”

훤의 의문을 대신 말해준 셈이었다. 이 말을 들은 옆에 있던 천문학교수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이, 이보시오. 섣부른 말은 삼가시오. 이번의 일은 어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궐에 들어와서는 상감마마의 어환이 확연이 나아지지 않았소이까? 이는 명백한 증거요.

장씨도무녀의 신딸인데, 감히 의심을 할 수 있겠소?”

“그것이 함정이었소! 감히 장씨도무녀의 신딸이니 당연히 신력이 뛰어날 것이란 선입견!

이것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장씨도무녀이기에 신기가 없는 여인을 무녀로 쉽게 둔갑시킬 수

있는 것이오.”

“신기가 없는 여인이렷다? 분명 그러하렷다? 그러면 이제 그 여인을 내가 안아도 그대들이

반대할 수 없단 뜻이렷다?”

이 심각한 대화중에 뜬금없는 왕의 환희에 찬 말이 방안 공기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훤도 들떠서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 때문에 머쓱해졌다. 지금은 연우를 안을 수 있다는

사실보다 신기란 것이 없다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춰야 했기 때문이었다.

훤은 목소리를 위엄 있게 바꾸어 말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느니. 그 부적이 액받이무녀를 죽이려했다는데 내가 아픈 것이

어찌 된 것이며, 이전에 신기가 없는데도 나의 건강이 좋아진 것은 또 무슨 조화인가?”

모두의 시선이 장씨에게로 쏠렸다. 이것에 대한 답을 해야 하는 사람은 장씨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대신 혜각도사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한양은 원래가 도읍지로 두기엔 불완전한 곳. 턱없이 약한 동쪽 지세는 적장자로서

세자에 책봉된 분들을 단명케 하거나, 왕권을 이어받기 힘들게 하는 폐단을 안고 있사옵니다.

하여 도성의 4대문의 이름을 정할 때 남대문을 숭례문, 서대문을 돈의문, 북문을 숙청문.

이렇게 각각 3글자로 정하였지만 유독 동대문만 4글자, 흥인지문이라 명하였사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보완이 힘들었던 것이 바로 국왕의 성후, 그 중 특히 취약한 것이

적장자로 임금에 오르신 국왕의 성후였사옵니다. 한양 땅에 도읍을 정하면 적장자가 왕이

되기 힘들 것이고, 된다 하여도 단명할 것이란 예언도 있었기에, 이러한 불완전한 도읍지를

보완하기 위해 둔 또 다른 궁궐이 호중(충청남북도)땅의 온양행궁이었사옵니다.

차가운 한양의 기운을 따뜻하게 만드는 온양!”

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군. 한양 가까이에 좋은 온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생에 한번 찾기도 힘든 곳에

온천욕을 위한 행궁을 둔 것이 이상하다 했더니만. 온양행궁이 그러한 이유로 작지만 완벽한

궁궐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이었구나. 그런데 그 말을 왜 하는 것인가?”

훤의 질문에 이번에는 지리학교수가 얼굴이 밝아져서 말했다.

“이제야 알 것 같사옵니다. 도무녀가 왜 온양 근처의 어라산 기슭에 있었는지를! 그리고

그 근처의 휴지역에 액받이무녀를 둔 이유를! 그건, 지금의 액받이무녀에겐 신기가 없기 때문이

분명하옵니다. 지금의 액받이무녀는 비록 신기는 없을지 모르나 상감마마와는 더 없는 합을

가진 사주. 그 합만으로도 상감마마의 기를 윤택하게 만들 수가 있을 정도이옵니다.

그리고 없는 신기를 대신하여 주는 것이 휴지역이었고, 나라의 우환을 밟아 누르는

풍수지역이 바로 어라산 기슭이었던 것이옵니다. 자고로 이곳엔 大장군의 묘가 봉해져야

한다는 예언(현재 이곳엔 이순신장군의 묘소인 현충사가 있음)이 있었사온데,

그것을 도무녀가 대신하여 주었던 것입니다.”

명과학교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의문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표정이었다.

그가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이 맞다면, 휴지역의 결계가 깨어지고 난 뒤에 살을 받으신 것이 이해가 되지만,

그 뒤는? 강령하여 지신 것은 어찌 설명할 것이오?”

명과학교수는 자신이 말한 뒤 스스로 답을 찾았다. 그래서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도무녀가 우리를 철저히 속이시었군! 상감마마의 성후가 강령하여 지신 것은 도무녀께서

스스로의 수명을 깎아서 주술을 부릴 수 있는 것인데, 그것에 속았군!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신력이 없는 여인을 액받이무녀로 둔 것이오?”

장씨의 입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심지어 수많은 진실을 담은 자신의 눈조차 감아버렸다.

훤의 무거운 목소리가 관상감의 교수와 가까이에 있는 내관들, 멀리에 있는 궁녀들을 향했다.

“아직도 모르겠는가? 그 여인이 누구인지?”

어리둥절한 눈빛들이 두리번거리며 옆으로 날아다녔다. 혜각도사가 관상감의 교수들에게

해답을 주었다.

“관상감에선 원래 중전의 운명을 받으신 분이 딱 한분만이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었소.

아니 그렇소?”

세 교수의 얼굴들이 일제히 창백해졌다. 관상감에서 덮어 둘 수밖에 없는 문제,

지금의 중전윤씨와의 합방에 온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왕의 사주에서

중전은 죽은 허씨 처녀 단 한명 뿐이기 때문이었다. 명과학교수가 갑자기 생각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머릿속에서 풀어보니, 액받이무녀의 사주가 중전의 사주가 맞군! 그런데 이번에

액받이무녀를 향한 살로 인해 어찌 상감마마께옵서 의식을 잃으신 것인지······?”

느닷없이 장씨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감정들이 흘러내리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드디어 무거운 그녀의 입이 열리는 순간이 되었고,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번의 이 부적은 액받이무녀를 향한 것이었을 뿐, 허씨 처녀를 향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저주의 부적을 쓴 자가 단지 신기가 있는 무녀로만 알았기에 잘못 쓰여 진 부적이 비틀어져

상감마마께 날아간 듯 보이옵고, 아마도······무녀를 지키고자 하는 상감마마의 지극하신

성심이 대신하여 스스로에게 불러들였을 가능성도 있사옵니다. 인간의 지극한 마음만큼

강한 주술은 없는 법이니······. 문제는 이번의 일로 부적을 쓴 자가 무녀의 정체를

알았을 것이옵니다.”

“그랬군! 그래서 오늘 자객을 보낸 것이었어. 다시 한 번 더 세자빈 허씨를 죽이기 위해!

난 그자들의 정체를 모르는데 그쪽은 무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니, 위험하다!

그들이 자객이 아닌 살을 쏘게 된다면. 잠깐! 바깥에서 부리는 주술이 경복궁 내에

들어올 수가 없기 때문에 자객을 보낸 것인가? 그렇다는 건 궐내는 주술로부터는 안전하다는 뜻이군.”

훤은 중얼거림을 멈추고 생각에 빠졌다. 이번의 부적은 자신을 죽이려는 의도는 없는 것이

분명했다. 단지 저번처럼 앓아누워 조정에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액받이무녀를 먼저 없애려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와는 다른 상황이 벌어졌기에 연우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부리나케 다시 죽이려 하였을 것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세자빈허씨를 죽이려 했던 자들과

이번에 연우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낸 자들이 한통속이라는 뜻이었다. 왕대비가 아니라면,

왕이 궐을 비운 사이 강녕전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을 머릿속에서 열심히 생각한 끝에

수궁대장을 떠올렸다. 왕이 궐을 비우면 궐내에서 숙직을 하며 궐을 지키는 임무를 지닌

수궁대장! 즉, 국구 파평부원군이었다. 어쩌면 세자빈허씨를 죽이려던 자들 중의 핵심은

왕대비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중심축에서는 왕대비와 파평부원군의 의견이 달랐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현재의 왕대비는 외척들에게 따돌려졌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훤은 머리가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아 깊은 한숨을 뿜어내어 보았다. 이제까지

훤을 그저 병상에 두어 조정을 유린하려는 의도가 전부였을 파평부원군이 연우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연우의 죽음에 관련된 또 다른 왕족의 정체도 미궁 속에 있었다. 지금 당장 파평부원군을

잡아서 심문을 할 수도 없었다. 명확한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그를 잡아들였다가는 혹시나

남아있을 지도 모르는 증거마저 인멸시키게 될지 모르고, 아직 미궁에 있는 또 다른 왕족의

정체가 파묻혀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파평부원군과 그 일파가,

어쩌면 훤의 가족일지도 모르는 그 왕족을 방패로 삼아 살아남을지도 모르는 위험이었다.

#29

어둠 속에 여전히 의문이 숨겨져 있는 상황에서도 아침은 오고 또한 날은 밝았다.

밤사이 한 숨도 이루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이들은 비단 강녕전에 모여 있던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염도 마찬가지로 뜬눈으로 새웠다. 청지기가 만류하지 않았다면

야밤에 흙투성이가 된 옷차림으로 이곳 강녕전으로 달려왔을 것이다. 하룻밤을 백년 밤처럼

보내고, 날이 밝을 즈음에 눈이 퀭한 염이 강녕전에 나타나 알현을 요청했다.

마침 모두가 물러가고 눈을 붙이기 위해 누우려던 훤에게 내시가 다가와 귓속말로

그의 알현을 알렸다. 느닷없는 염의 입궐로 훤은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시선은 저절로

연우가 있는 방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도 연우의 일을 눈치 챈 것을 직감했다.

내시가 재차 물었다.

“어찌 하올련지요?”

훤은 대답 대신 방문을 향해 말했다.

“혹여 잠에 든 것이오?”

“상감마마께옵서 아직 들지 않은 곳에 소녀가 어찌 먼저 들어 있으오리까?”

훤의 눈가에 미소가 스며들었다. 이제 더 이상 액받이무녀가 아닌 그녀이기에 같은 시간에

잠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아직 교태전을 내어 줄 수는 없지만, 옆에 무녀가 아닌

한 여인으로 둘 수 있게 된 만으로도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방문을 열겠소.”

미리 통보하는 것도 미래의 중전에 대한 예우였다. 훤의 말이 끝나자, 방 앞을 지키던

궁녀들에 의해 방문이 스르르 소리 없이 열렸다. 흐트러짐 없이 정갈함 그대로 앉은 연우의

모습이 보이자, 방안에 있던 내관들과 궁녀들이 모두 엎드려 예를 올렸다. 엎드린 이들 중,

누구보다 상선내관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세자시절의 훤을 보필하면서부터

연우란 여인은 그에게도 특별한 존재였다. 왕에게 하나밖에 없는 중전이라면 그에게도

하나밖에 없는 왕비였다. 감격에 겨운 그와는 달리, 더 이상의 슬픔조차 느낄 수 없는

차가운 심장으로 몸을 숙인 이는 운이었다. 운의 차가운 심장의 고통은 연우에게로 가지 않고

훤에게로만 가서 닿았다. 운도 왕이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속눈썹이 그늘져 떨렸다. 이런 흐트러진 마음으론 더 이상 왕의 옆에

있을 수 없다는 생각도 짙어지고 있었다. 훤은 운의 마음을 외면하며 말했다.

“그대의 오라비인 풍천위가 왔소. 만나보고 싶지 않소?”

평소 변함없는 모습만을 보이던 그녀의 손이 화들짝 놀라 잠시 흐트러졌다. 훤이 보고 싶었던

것만큼 보고팠던 이가 오라버니였다. 그리고 이 둘은 합한 것 보다 더 보고팠던 이가 어머니였다.

보고 싶은 마음을 털어내려는 듯 연우의 고개가 세차게 저어졌다. 내어젓는 고개를 따라 눈물도

갈팡질팡하며 흘러내렸다.

“만나선 아니 되옵니다.”

“왜?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질 것이오. 만나고 싶었을 것 아니오? 그리고 사이좋던 남매였는데,

석강이 끝나면 어김없이 그대에게 달려가던 풍천위를 내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오라버니의 물음이 건너온다면 답할 말이 없기 때문이옵니다. 오라버니가 슬프지 않도록

부디 도와주시옵소서. 슬픔은 소녀만이 가지겠사옵니다.”

훤은 위로의 말을 이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망설임 끝에 방문을 닫으라는 손짓을 했다.

방문 뒤로 연우의 모습이 사라지자 훤은 자세를 가다듬고 염을 불러들이라는 명을 했다.

방안에 들어와 큰 절을 올리는 염의 불안한 표정이 이미 연우를 찾으러 왔음을 훤히

내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절을 마치고 앉아서도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훤은 남매의 가운데에 앉아 무거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른 아침에 풍천위가 어쩐 일로 나를 찾아왔소?”

“아, 그것이······. 성후 미령하신 것은 어떠하시옵니까?”

염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훤을 지나 방문을 뚫고 연우의 귀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삼키다 넘쳐흐른 연우의 소리 없는 울음이 훤의 등 뒤로 비수처럼 꽂혀들었다.

“좋아졌소. 정경부인의 건강은 어떻소?”

연우가 궁금해 할 것을 대신 물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염은 연우의 느낌을 찾느라 분주하여

말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건성으로 답했다.

“네, 건강하옵니다. 무엇보다 상감마마께옵서 강령하시다니 안심이 되옵니다.”

염은 대충 성의 없는 말을 하고서는 앞의 왕의 존재는 무시하고 더욱 심하게 두리번거렸다.

염이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워도 방문 뒤에 숨어 있는 연우의 흔적을 느끼기는 역부족이었다.

이성 없이 계속되는 그의 불충에도 훤은 가만히 기다렸다. 염은 왕의 침묵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송구하옵니다. 저······, 혹여 소신에게 숨기는 것이 계시옵니까?”

“풍천위가 궁금해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시오.”

“······궁금한 것은 없사온데······.”

“나 또한 숨기는 것은 없소.”

방문 너머에서는 연우가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오라버니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심정이 지금 어떤지 헤아릴 수가 있었다.

연우는 오라버니가 어떻게 변했는지, 아름다운 미소는 그대로인지 방문 틈을 만들어 조금이나마

훔쳐보고 싶었지만 그 욕구조차 잘라내었다. 그리고 방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눈물줄기가

너무나 굵어,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훤은 염의 간절한

눈빛이 마치 연우의 눈빛으로 보여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리 걸음하기 힘들었을 것이오만, 지금 몸이 좋지 못해 누워야겠으니 그만 물러나도록

하시오. 풍천위가 와주어 기쁘오.”

“저······.”

훤은 몸을 돌아 누워버렸다. 서로가 보고파 애끊는 남매를 만나게 해줄 수 없는 자신의

미약함에 화가나 이불마저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자신이 사랑하는 연우가 울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존경하는 염의 심장에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연우의 이름을 돌려주지 못하는 지금은 둘을 만나게 해줄 수가 없었다. 연우가 그의 질문에

답할 수 없는 것처럼 훤도 그 어떤 실마리를 풀어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연우의 시신을

무덤에 넣었던 그 고통의 몇 배가 다시 염을 덮치고 말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그 고통에 잠식당해 있을 것이었다. 단지 지금의 고통 뒤에 더 큰 슬픔의 해일이 덮치기

전일뿐이었다. 염은 도움을 구하는 눈길로 운을 보았다. 그의 눈빛은 연우가 있는 곳을

집요하게 묻고 있었다. 하지만 운조차 염에게 그 어떤 답의 눈빛도 되돌려 주지 않았다.

염이 내쫓기듯 강녕전을 나가자, 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연우가 있는 방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얼굴을 감싸 쥐고 눈물을 참고 있는 연우를 힘껏 끌어안았다.

“내 곧 만나게 해드리리다. 그대의 어머니도 만나게 해드리리다. 곧! 곧!”

훤은 자신의 말에 안도하기는 거녕 더욱더 두려워하는 연우를 느낄 수가 있었다.

“두렵소? 무엇이 그리고 그대를 두렵게 하는 것이오? 무엇이 두려워 그대의 오라비조차

아니 만난다 하는 것이오?”

“버티고선 미래가 두렵고, 운명을 안은 현재가 두렵고,······소녀를 할퀴고 가버린

과거가 두렵사옵니다.”

“그대를 할퀸 과거를 알고 있는 것이오? 그것을 내가 알게 되는 것이 두려운 것이오?”

연우는 고개를 젓지도, 그렇다고 끄덕이지도 않은 채 훤의 품안에 파고들었다.

이미 훤의 품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욕심은 다 채워진 것과 다름없었다.

“상감마마를 한번만 뵈옵고자 하는 욕심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사옵니다. 소녀, 상감마마께오서

어쩌다 한번 찾으시는 작은 방에 있어도 과하다 감읍할 것이오니, 더 이상은······,

부디 더 이상은······.”

“세상의 그 어떤 사내가 사랑하는 여인을 안고프지 않겠소만, 나보다 더 간절한 사내는 없을

것이오. 난 그대를 안고 싶소. 그리고 그대와의 사이에서만 원자를 보고 싶소.

그러니, 나의 중전이 반드시 되어주어야겠소!”

흔들림 없는 훤의 목소리에 연우의 두려움은 한층 더 깊어졌다. 어쩌면 하늘늑대별에 덮인

어두움의 원인이 자신의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영원히 무덤 속에서 나와선

안 되는 것인데, 무덤 속에서 나왔어도 죽은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인데, 이렇게 버젓이

살아 경복궁으로 걸어 들어왔기에 벌어지고 있는 혼란은 모두 자신의 탓이라 생각되었다.

훤은 거대한 품으로 연우의 두려움까지 안았다. 연우가 이렇게까지 두려워하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어쩌면 그녀의 가족인, 염과 상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그마한 의심이 들었고,

그것은 곧장 그녀와 더불어 훤의 두려움도 되었다.

내쫓기듯 나온 염은 우두커니 월대 아래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 강녕전의

위용을 보고 있었다. 바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 틈에서 염은 홀로 정지된 시간 속에 있는 듯,

다시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추위 속에 하염없이 있었다.

추위에 얼어붙은 마음은 연우가 살아있다는 기쁨도, 만나지 못하는 슬픔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염에게 있어서는 마치 지금이 꿈속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차차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연우의 처지가 지금 어떠하기에 자신에게 보여주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양명군은 말을 타고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한 채, 오직 말의 발굽에만 길을 물었다.

훤과 연우, 염, 그리고 운이 혼란하다면 양명군 또한 이들에 못지않게 혼란했다.

오랜 시간 한양 일대를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니고 나서야 말이 지나던 길이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그리고 가슴이 먼저 쓰린 감정을 잡아채는 곳, 정업원(주로 후궁이나 왕족이 기거하던

상류층의 비구니 사찰)이었다. 정업원! 지난 왕들의 살아있는 후궁들이 생매장되어 있는 곳.

왕의 정비는 남아 대비나 왕대비가 되어 전을 하사받아 궐내에 머무르는 것과는 달리,

일개 후궁들은 반 강제로 비구니가 되어 정업원에 갇혀 수절을 감시당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정업원에 양명군의 모친인 희빈박씨도 있었다.

양명군이 온 것을 전해들은 박씨가 작은 탑 앞에 서있던 자신의 아들에게로 다가왔다.

회색의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단정하게 쪽진 머리를 한 자신의 어머니를 보자 양명군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나마 그녀의 머리가 삭발이 아닌 이유는 아직 양명군이 차기

왕의 서열에 있기 때문이었다. 선왕이 살아있을 때의 화려한 차림새의 어머니와 지금의

초라한 모습이 양명군의 가슴에 겹쳐져 선왕에게 버림받은 설움을 새롭게 했다.

박씨가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

“어찌 기별도 없이 오시었습니까, 양명군?”

“지나던 길이라 기별할 수 없었습니다.”

박씨의 애처로운 손길이 뒤로 젖혀진 아들의 갓을 바로 잡아주며 끈을 매어주었다.

그리고 온화한 부처와도 같은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사람들에게 일부러 흐트러진 모습만을 보이기도 힘드시지요? 이 어미가 그런 양명군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알아주길 바래요.”

“욕을 듣는 것이 그리도 자랑스럽습니까?”

오늘따라 묘하게 서슬이 서있는 말투였다. 박씨의 놀란 손길이 갓끈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양명군의 옷깃을 여며주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하게 말했다.

“이 어미가 왜 이곳에 미련 없이 걸어 들어왔는지 똑똑하니까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이 어미는 일찍이 궐 밖에서 홀로 늙어가야 했을 목숨이었지만, 상왕마마의 은덕으로 양명군을

보았습니다. 그 이상의 욕심은 죄입니다. 이 어미는 지금의 상감마마의 강령을 위해

기도하고 있답니다. 양명군, 욕심은 아니 됩니다.”

“어머니는 아십니까? 제가 무엇을 욕심내었었는지? 아마도 모르실 것입니다!”

“······무엇을 욕심내었습니까?”

“과거에 내어보았던 욕심이 있었습니다. 저에게도······.”

박씨는 슬픈 눈동자로 호소하는 자신의 아들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무엇에 웃고, 무엇에 행복하고, 무엇에 가슴 아파했는지, 지난 과거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아는 것이 없었다. 아무리 아들을 사랑한다고 해도,

자신의 부덕 탓인지 아들의 마음까지 다 알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는 혼자만 감정을

삭이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박씨는 지금도 아들의 슬픈 눈동자가 무엇을 호소하고 있는지

헤아리지 못했다.

“과거일지언정 욕심은 아니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저는 양명(陽明) 즉, 밝은 햇볕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햇볕이 밝아도 해와는 염연히

다른 것 아닙니까? 상왕께오서 정하신 것입니다.”

양명군은 허탈하게 큰 소리로 웃으며 어머니에게서 몸을 돌렸다. 뜰을 지나 정업원의

대문을 나설 때까지 양명군의 허한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이곳으로 인도한

말의 등에 올라타고선 웃음을 그쳤다. 그리고 젖어드는 눈길로 먼 북쪽 하늘을 보았다.

오직 훤의 아버지이기만 했던, 그리고 단 한순간도 자신에게 아버지였던 적이 없었던

전왕이 죽어 간 곳, 북망산천을······.

양명군은 10살에 양명군으로 봉해졌고, 그해 종학에 입학하였다. 그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

7살에 일성대군으로 봉해지면서 세자책봉례를 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나이였다.

양명군의 영특함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도 그때를 즈음했을 때였다.

종학에서의 수업은 종친들이 모여 있는 것이므로 수업이란 것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때때로 양명군의 삼촌벌인 어린 왕자들끼리 옷을 쥐어뜯고 싸움이 나도 수업을 담당한

박사들이 감당하기엔 그들의 품계가 너무나 높았다. 오직 세자 하나만을 교육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세자시강원과는 천지 차이였던 것이다. 그중 양명군은 특별히 뛰어난 학생으로

박사들의 입에 오르내리다가, 서서히 대신들의 입에도 오르내리게 되었다. 칭찬을 받는

것이 좋았던 이유는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미소를 보여준 적이 없는 아버지가 어쩌면

이 소식을 듣고 칭찬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더 열심히

공부했는지도 모른다.

<소학>을 떼고, <자치통감>까지 마친 후, <대학>을 공부하고 나서야 사정전에서 왕의 앞에

겨우 서게 되었다. 자신의 아버지 앞에 그동안 배운 것을 보이고 칭찬 받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들떠 잠을 설쳤던 나이가 13살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그리 환한

미소를 보여주지 않았다. 익히 양명군의 영특함을 들었을 것인데도, 영특하다는 자체가

불쾌한 듯, 심지어 양명군 자체가 불쾌한 듯 차가운 인상으로 질문을 던졌다.

“대학을 배운다고 들었다. 글자만 안다고 해서 배운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니, 그 뜻까지

알아야 비로소 배웠다 할 것이다. 물건은 근본과 끝이 있고, 일은 시작이 있으니,

먼저 하고 뒤에 할 바를 알면 도에 가까울 것이다. 이것의 해석을 말해보아라.”

양명군은 아버지의 태도가 내심 서운했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기에 또록또록하게 대답했다.

“덕을 밝히는 것은 근본이 되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끝이 되며, 그칠 줄 알면

시초가 되고, 터득할 수 있는 것은 끝이 되는 것이니, 근본과 시초는 먼저 할 것이요,

끝과 마침은 뒤에 할 것이란 뜻입니다.”

“덕을 밝힌다는 것이 무엇이냐?”

“대학에서의 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왕의 근본은 덕을 밝히는 것이고,

이것은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으로 끝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라 생각하옵니다.”

“참으로 건방지구나!”

스스로 대답을 잘했다고 생각할 즈음에 들려온 왕의 호통은 어린 양명군의 머리를 심하게

흩어놓았다. 자신이 혹시나 잘못 답했나 싶어 되짚어 보았지만 틀리게 답한 것은 없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양명군에게로 왕의 살벌한 호통이 이어졌다.

“너의 위치가 무엇이기에 불충하게도 왕의 도에 대해 말하는 것이냐! 박사! 감히 일개

왕자군에 불과한 이 아이에게 제왕의 학문인 대학을 자세히 가르치는 저의가 무엇이냐?”

단지 아버지의 칭찬만을 듣고 싶었던 양명군에게 날아온 것은 이렇듯 잔인하게 그의 작은

기대조차 짓밟는 왕의 노여움뿐이었다. 계속되는 왕의 노여움이 잦아들고 환한 미소가

떠오른 것은 뒤이어 동생, 훤이 나타나서였다. 훤은 왕에게 먼저 절을 올리고

형인, 양명군에게도 방긋 웃는 웃음을 보내왔다. 사정전 안의 살벌한 기운을 눈치 챘기에

이를 무마시키고자 더 귀여운 웃음을 보인 것이었다. 양명군은 훤의 뒤로 수많은 스승들이

따라 앉는 것을 보았다. 달랑 한명의 스승만을 대동하고 들어온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차이였다. 더 없이 아버지다운 왕의 목소리가 훤을 향했다.

“우리 세자는 요즘 예학에 뛰어나 나를 기쁘게 하는구나. 짧은 시간에 소학을 마쳤다 들었다.”

“네! 스승들 덕분이옵니다.”

“그래, 소학 중에 우리 세자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무엇이냐?”

“공자의 말 중에, 부모가 나를 완전하게 낳아 주셨으니 자식 된 나도 그 몸을 완전하게

보전하여 부모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 이것을 효도(孝道)라고 하는 것이다. 라는 구절이옵니다.”

별 대단한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왕의 웃음소리가 사정전을 뒤흔들었다.

“하하하. 세상의 근본이 되는 것이 바로 효이니, 소학의 많은 내용 중에 그 대목이 가장

좋다하는 우리 세자야 말로 이미 세상의 이치를 터득했음이야. 공자의 말 중에

또 좋아하는 구절이 있느냐?”

“근본이 상하게 되면 거기에 따라서 가지도 죽게 되니, 먼저 근본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구절도 좋아하옵니다. 소학에 나오는 글들은 모든 이가 익혀서 나쁠 것이 없다 생각되옵니다.”

“하하하. 우리 세자를 잘 가르친 춘방(세자시강원)과 계방(세자익위사)의 관리 모두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갑자기 왕의 말이 중단되었다. 가만히 앉아있던 양명군이 그만 비참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에 놓여있던 대학 서책을 왕을 향해 던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비록 왕에게까지 도달하기엔 그 길이가 턱없이 길어 중도에 떨어져 내렸지만, 사정전에

있던 모든 이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양명군은 일어선 그대로 사정전을 나가버렸다.

그의 뒤로 분노어린 왕의 호통이 줄곧 따라왔다.

“저 발칙한 놈 같으니! 당장 저놈 스승의 곤장을 치도록 하라!”

훤이 뒤따라 달려와 양명군의 팔을 잡지 않았다면 그는 경복궁 밖으로 영원히 달아나 버렸을 것이었다.

“전 형님이 좋습니다.”

대뜸 던지는 훤의 말에 양명군은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걱정해주는 동생의 따뜻한 눈을 보았다.

“제가 좋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형님은 아바마마를 꼭 닮아 현명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바마마를 닮다니요? 오히려 세자저하께오서······.”

훤은 방긋이 웃어보였다. 둘은 다른 듯 닮은 형제였다. 훤은 양명군의 팔을 여전히 잡은

채로 말했다.

“아바마마께 아무리 화가 나도 저에게까지 화내지는 말아주십시오.”

양명군은 유일하게 동생만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듯 해서, 아버지한테 상처 입은

마음이 위로가 되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부터 양명군은 아바마마와 소자란 단어 대신, 상감마마와 소신이란

단어만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종학의 박사들과 대신들은 양명군이 책을 던진

일만 입에 담았고, 더 이상 그의 영특함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았다.

양명군의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지만, 홍문관대제학의 집에 출입하면서부터 어느덧

아물어져 갔다. 염과 권력에서 떠나 자유로이 학문을 이야기 할 수 있어서 좋았고,

운과 검술을 나눌 수 있음이 좋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자신이 갈구하던

아버지의 정을 홍문관대제학에게서 나눠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운 부성애는 양명군이 원하던 바로 그것이었기에 스승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그를 따랐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되고 싶었다. 처음에 홍문관대제학의 여식인 연우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이러한 마음 때문이었다. 어차피 왕에게서는 정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세자의 아버지에 지나지 않음을 어린 나이에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양명군은 몇 년 동안 염의 집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지만, 연우의 머리털 하나도 구경하지

못했다. 한번쯤은 실수로라도 만날 수 있었을 텐데도 쉽사리 만나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한번만 보여 달라는 청에도 염의 눈썹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양명군이

선택한 방법은 월장이라는 것이었다. 저녁 어스름이 지기 전에 인사하고 집을 나가서는

곧장 담을 넘기 시작했다. 그동안 드나들면서 익힌 집의 구조는 눈을 감고도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였기에 별당까지 침범해 들어가는 것은 아주 쉬웠다.

“설이냐?”

마지막 담을 넘어 별당의 작은 뜰에 발을 내리자마자 들려온 여인의 조용한 목소리였다.

양명군은 목소리의 주인이 연우임을 확신했다. 그가 연우를 찾아볼 필요도 없이 발자국 소리에

그녀가 먼저 기척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연우는 방안에 앉아 여종이라 생각해서 방문을

열고 뜰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여종이 아니라 낯선 남정네가 월장을 한 것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놀란 그녀는 급하게 방문을 닫으려고 했고, 닫히는 문에 더 놀란 양명군은

재빨리 닫히는 방문을 잡았다.

“잠깐! 난 이상한 사람이 아니외다!”

“월장한 사람이 이상하지 않다면 어느 누굴 이상한 사람이라 한다더이까?”

“난 이 나라의 왕자인 양명군이오!”

“왕이라 한들 이러한 것은 예가 아닙니다.”

양명군은 순간 웃음이 나왔다. 말투가 염의 판박이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연우의 호기심이 일어났다.

“어찌하여 그리 웃으십니까?”

“어여쁜 여인의 얼굴에 청렴한 선비의 말투가 너무나 잘 어울리기에 웃은 것이오.

염의 누이가 확실한 것 같소.”

양명군은 여전히 방문을 강제로 잡은 상태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정식으로 인사하오리다. 난 양명군이오.”

“내당의 여인에게 통성명을 하자는 말씀이옵니까?”

“······아니 될 일이긴 하오만······. 알겠소. 나만 밝히는 것으로 만족하고,

내 그대 이름이 허 연우란 것은 모르는 것으로 하겠소이다.”

갑자기 닫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연우의 손이 방문을 놓았다. 양명군은 연우의 눈길이

자신의 뒤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온전히 드러난 그녀의 모습에 넋이 나가, 등 뒤에서 그를 노려보는 염의 뜨거운 불길은

미처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염이 양명군의 팔을 죄인 잡듯이 잡았다.

그리고 양명군을 질질 끌고 나가는 순간에도 그의 눈동자는 연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다음부터 어떻게 해서든 연우의 얼굴을 보고자 수시로 월장하는 양명군과, 이를 막고자하는

염의 끊임없는 술래잡기가 시작되었고 가끔씩 목적을 달성하기도 했다. 양명군의 월장을

대제학까지 나서서 말려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의 깊어지는 마음은 더더욱

말릴 수 없는 일이었다. 불행히도 이 당시 이미 연우와 훤 사이에 서찰이 오고가고 있을 때였다.

양명군은 자신의 혼기가 훨씬 지나있음을 알고 있었다. 세자를 외척과 혼인시키지 않으려는

왕의 고심 때문에 세자의 혼기가 늦어지고 있었고, 또한 자신의 혼기까지 더불어 늦어지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왕이 양명군의 혼기 따위는 생각조차 안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도 딱히 결혼이란 것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연우를 알고 나서부터는 달라졌다.

무언가 뒤쫓기는 듯한 불안함이 줄곧 그를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도 연우를 만나고 난 이후부터였다.

양명군은 이러한 정체 모를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 그동안 따로 만난 적이 없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갔다. 강녕전에 있던 왕은 사정전에서 보던 왕과는 조금 달라보였지만,

무뚝뚝한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양명군이 이곳에 어쩐 일이냐?”

오랜만이라는 말이나, 다른 안부인사 없이 첫 말부터가 이유를 묻는 말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서운함에 몸서리를 치며 입을 다물어 버렸겠지만, 이번에 찾은 용건은

이런 정도는 넘길 수 있게 했다.

“소신, 상감마마께 내알(은밀한 청)드릴 것이 있어 들었사옵니다.”

양명군이 청을 드리러 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놀랐는지 왕의 인상은 한동안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조금 후에 입을 열었다.

“말해보아라.”

“소신의 가례에 대해 듣고 싶사옵니다.”

왕의 의아한 표정을 보며 양명군은 다시 말했다.

“소신, 언제가 되어도 상관이 없사오나 반드시 안사람으로 해주시길 바라는 여인이 있사옵니다.

부디 소신의 작은 소원을 들어주시옵소서.”

왕은 양명군의 작은 소원이라는 것이 귀여웠던지, 그리고 정말 소박한 청이라고 생각했는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느 집안의 처녀냐?”

양명군은 왕의 미소에 어리둥절했지만 가슴 한구석에서는 감격으로 아려왔다. 말도 안 되는

청이라 내쳐질 것을 각오하고 왔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양명군은 작은 기대를 가지고 말했다.

“홍문관대제학의 여식인 허 연우란 여인입니다. 아름답고 서책 또한 많이 읽은 여인으로

인품이 오라비인 허 염 문학과 똑 닮았사옵고, 또······.”

“그 여인에 대한 칭찬으로 밤을 샐 것이냐?”

양명군은 웃고 있는 왕의 표정에서 안심을 했다. 홍문관대제학의 여식이라면 왕도 흔쾌히

승낙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왕의 승낙이 내려졌다.

“알았다. 내 세자의 가례가 끝나면 생각해보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동안의 양명군의 맺힌 한이 녹아내린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날 느낀 감격이 부서진 것은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세자의 가례를 위한 가례도감의 설치에 가장 기뻐했던 이는 바로 양명군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의 월장은 자제하고 있었고, 혼자만의 비밀에 들떠있었다. 왕의 약조를 철썩

같이 믿고 있었기에 그에게 있어서 연우는 이미 자신의 아내가 된 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이 기쁨은 비현각에서 세자를 만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갓 목욕을 마쳤는지 젖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무언가를 찾고 있던 세자에게 인사를 걸었던 그 순간, 세자 또한

연우를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염의 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집요하게

물어보던 세자의 눈은 이미 사랑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급하게 왕에게로 달려갔다.

다시 한 번 약조를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양명군은 강녕전 뜰에서 왕이 집무를 끝내고 올 때까지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 뒤에 나타난 왕은 다른 그 어떤 때보다 차가운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왕의 뒤를 따라 강녕전 안으로 들어가는 양명군의 발걸음은 애처로울 만큼

떨고 있었다. 방에 앉자마자 양명군의 다급한 입이 먼저 열렸다.

“상감마마, 소신에게 하신 약조를 기억하고 계시지요?”

“약조라니? 내가 너에게 무엇을 약조하였단 말이냐?”

왕의 차가운 목소리가 양명군의 불안함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양명군은 다시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신과 홍문관대제학의 여식과의 가례······.”

“그 일이라면 난 너에게 약조한 적이 없다.”

“네? 하지만 분명······.”

“생각해보마고 했었지, 성사시켜주겠다 하지는 않았잖느냐?”

양명군은 쓰러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왕에 대한,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흘러내리는 눈물은 막을 수가 없었다.

비단 지금의 억울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가슴에 쌓여있던 한이 한꺼번에

눈물이 되어 흘러나왔던 것이었다. 왕은 양명군의 눈물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사내의 그릇이란 것이 왕이 되어야 할 자가 있고 신하가 되어야 할 자가 있는 것처럼,

여인 또한 그러하다. 중전이 되어야 할 그릇과 군부인(왕자군의 처)이 되어야 할 그릇 중에,

애석하게도 홍문관대제학의 여식은 중전의 그릇이라 이리 된 것뿐이니 원망은 하지 말라.”

양명군은 터져 나오는 울분과 비명을 꼭꼭 씹어 삼켜야만 했다. 왕이 되어야 할 그릇과

신하가 되어야 할 그릇은 누가 정하는 것이며, 중전이 되어야 할 그릇과 군부인이 되어야

할 그릇은 또 누가 정하는 것이냐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이 말까지 씹어서 삼켰다.

말에 올라탄 채로 하염없이 북망산천을 보고 있던 양명군은 그 당시 내어지르지 못했던

울분을 또다시 삼켰다. 염과 운, 심지어 어머니까지 알지 못하는 양명군의 비밀이었다.

오직 전왕만이 알고 있었지만, 그는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양명군이 내민 손은

잡아주지 않고 훤의 손만을 꼭 쥔 채 가버리고 말았다. 양명군은 또다시 말의 발굽에만

길을 물으며 씁쓸하게 웃음 띤 입으로 중얼거렸다.

“아바마마. 금상에게서 중전이 되지 못한 연우낭자를 빼앗고, 용상마저 빼앗아 궁원제향에

제주가 되어 아바마마의 신주 앞에 술을 올리게 되면,······소자는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이옵니까?”

#30

운이 살려둔 자객들이 의금부 옥사에서 심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자결했다는 소식이 강녕전의

훤에게로 날아들었다. 또 다시 하나의 실마리가 끊어져 버린 것이었기에 훤의 분노는

내관들로서는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연우가 말 없는 상냥함으로 훤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그는 화병으로 다시 쓰러졌을 것이었다. 훤은 연우의 눈동자를 보며 힘들게

미소를 되찾았다.

“그대에게로 가는 길이 너무나 멀게만 느껴지오. 마음은 조급한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연우는 훤에게 있어서 위로를 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녀가 없었던 이전의 삶이란 것은

전혀 없었던 것만 같은 생각에 그녀의 눈동자만 보았다.

위로를 주는 그녀의 말이 훤을 어루만졌다.

“이리 마주하고 있음에도 멀게만 느껴지시옵니까?”

훤은 대답 대신 연우의 옷고름을 슬그머니 쓰다듬으며 외로운 미소를 보였다.

“사내의 욕정을 헤아린다면 그리 무심한 질문을 하진 못할 것이오.”

연우의 붉어진 눈길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는 지금 이대로 그가 안겠다고만 하면 기꺼이

응해줄 것이었다. 그렇기에 지금을 참는 것은 연우가 아니라 오직 훤이었다. 사랑하기에

안기고픈 연우의 마음과, 반대로 사랑하기에 참고 있는 훤의 마음으로 인해 죄 없는 연우의

옷고름에만 훤의 손때가 묻고 있었다. 처음 신기가 없다는 것에 들떴던 마음이 이제는

인내의 고통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떨리는 긴 한숨소리가 탄식의 말과 함께 나왔다.

“아아······. 열녀문을 받은 여인의 한이 무엇인지 알 것 같소.”

숙인 연우의 붉은 얼굴에 보기 드문 미소가 떠올랐다. 훤은 결코 엄살이 아니었지만

그녀에겐 농담으로 와 닿았고, 어쩌면 훤은 꽤나 사랑스러운 사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엄 있는 멋진 모습 속에 장난기 가득한 귀여운 모습도 같이 가진,

그래서 더 가슴 설레게 하는 사내. 훤도 연우가 어쩌면 꽤나 새침데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청초한 모습 아래에 숨겨진 그녀의 고집이 밉기보다는 훤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연우의 또 다른 모습에 설레느라 바빠진 훤의 머리는 방금 전까지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있었는지 잠시 동안이나마 잊고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운의 무표정한 얼굴 뒤에

감춰진 생각들도 잊고자 했다. 가장 의지하고 있는 신하인 그가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도 잊고자 했다.

미소를 나누던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의금부도사의 급한 알현이 들어왔다. 이제까지 밀지로

전해오던 그의 조사였기에 직접 알현을 요청한 것은 사뭇 놀라운 일이었다. 그의 조사에서

급진전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직감한 훤은 아쉽지만 연우를 등 뒤의 방으로 보냈다.

그리고 운을 옆으로 바짝 다가와 앉으라고 명한 뒤 그를 불러들였다. 훤은 그를 유심히

관찰했다. 절을 하고 다가와 앉은 의금부도사의 얼굴은 초췌해져 있었고,

눈빛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오랜만이다. 의금부에서 얼마 전 투옥된 자객 두 명이 차례로 자결하였단 소식이 방금 들어왔다.

알고 있겠지?”

“그들의 신원도 아직 오리무중이온데, 참으로 면목 없사옵니다.”

“어차피 너의 일은 따로이 있었으니, 네가 면목 없어 할 필요는 없다. 어찌 되었느냐?”

다급하게 묻는 왕의 물음에도 의금부도사의 입은 무엇이 두려운지 열리지 않고, 불안한 눈동자만

이리저리 서성거리고 있었다. 훤은 장씨도무녀가 비밀을 꽁꽁 싸매고 입을 열지 않는 것에

질려있었기에 그의 침묵에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러잖아도 비밀을 담고 봉한 입들로 인해 신경이 날카롭다. 그런데 너조차 내 앞에서

입을 봉하는 것이냐!”

“그, 그것이 아니옵고······.”

“어제 내가 조사하라고 명했던 것의 결과는 나왔느냐?”

훤이 그에게 내렸던 명령은 전왕이 세자빈허씨의 죽음에 관한 일을 마무리하고 덮었던

그 바로 전날까지의 행보를 조사해오라는 것이었다. 그런 간단한 답조차 미적거리며

하지 않자 훤은 더욱 화가 났다.

“조사를 못한 것이냐?”

“아니옵니다. 각 관청의 기록들을 조사하였고, 또한 전 암기반내관을 만나서 물어도 보았사옵니다.”

“그자가 아직 살아있었단 말이냐?”

“좌 암기반내관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지만, 우 암기반내관은 건재하였사옵고,

그의 기억력도 여전하여 날짜까지 정확하게 짚었사옵니다.”

훤의 얼굴이 희망으로 환해졌다. 암기반의 내관이라면 그때의 일을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었고 다른 어떤 기록보다 믿을 수 있는 것이었기에, 조금 전의 절망을 완전히

걷어낼 수 있었다.

“아바마마께옵서 마지막까지 만난 자가 누구이더냐?”

“천신, 그전에 알고픈 것이 있사옵니다.”

“무엇을 말이냐?”

의금부도사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키고는 어렵사리 말하기 시작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처음 천신이 조사하였던 것은 세자빈허씨가 어떻게 죽게 되었는가에

관한 것이었사옵니다. 하지만 천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그 어떤 실마리도 찾을 수가 없었던 차에,

곧 상감마마의 분부로 장례식 당시에 있었던 이상한 점에 대해 조사를 하였사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당시의 상왕마마의 행보에 대해 조사를 하였사옵니다. 천신은 처음에

각각 다른 조사로만 여겼사온데,······아니었던 것이옵니까?”

그가 무언가를 알아낸 것이란 확고한 느낌이 훤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훤의 목구멍으로

침 삼키는 소리가 옆에 앉은 운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말하라! 상왕께서 어떤 자들을 만나시었더냐?”

“모르옵니다.”

“뭐라?”

훤의 조급한 마음이 분노로 올라오려 하자, 그가 얼른 말을 이었다.

“어떤 자들을 만나시었는지 모르오나, 어디를 다니시었는지는 알 수 있었사옵니다.”

훤은 그를 기대에 찬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눈으로

독촉하고 있었다. 그의 입이 왕의 눈총에 밀려 무겁게 열렸다.

“숙영재에 몇 번 드나드신 연후에 모든 사건의 조사를 거두어 들이셨사옵니다.”

훤은 긴장하고 있던 마음에 힘이 빠졌다. 숙영재는 민화공주가 혼례를 올리기 전까지

기거하던 건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상왕이 지나치게 귀애한 탓에 민화의 버릇이 나빠진다는

소리가 나돌 정도였기에 그곳에 자주 드나든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훤이 허탈한 한숨을 내쉬려 하자, 옆의 운이 입을 떼었다.

“그 당시 만기가 많지 않았사옵니까?”

훤의 놀란 눈이 저절로 운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말 그대로 그 당시 상왕은 눈 돌릴 틈 없이

과중한 업무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귀애하는 민화였다고는 하지만 침전으로

찾아오는 민화를 반길지언정, 친히 숙영재를 찾아갈 만큼 시간으로나 마음으로나 여유가

없었을 것이었다. 의금부도사가 다시 말했다.

“상왕마마께오서 숙영재에 다녀오시었던 날, 밤 세워 시름에 잠기시었다가 다음날 조사를

그만두라 어명하시었다 하옵니다. 의금부의 모든 문건도 그때를 즈음하여 없어졌사옵니다.”

훤은 아직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의 진위를 생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깊은 생각을 몰아내고 있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숙영재에 다녀오시었다던 그날 밤, 상왕마마의 용안에

낙루를 보이셨다 하옵니다.”

훤은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숙영재에 기거하고 있던 민화 때문에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라,

귀여운 민화의 웃음을 보며 위로받기 위해 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훤은 절대 민화는

상관없을 것이라고 스스로의 마음을 토닥였다. 민화가 세자빈시해사건에 관련될 이유가 없었다.

‘아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을 것이야. 민화공주는 비록 천방지축이긴 하지만, 심성은 고운

아이다. 누군가를 죽일 아이도 아니지만, 만약에 죽이려 하였다고 해도 그것에 합당한

동기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민화공주에겐 그런 것이 없!’

순간 훤의 머릿속에 하늘이 찢어지는 굉음이 들려왔다. 옛날 염에게서 석강을 받고 있을 때

생각시옷을 훔쳐 입고 비현각에 난입하여 소리치며 울던 민화의 모습이, 훤의 심장을

산산조각 내며 떠올랐다. 어쩌면 민화에게 동기란 것이 있었다면 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상왕이 그리도 아끼던 인재였던 염을 의빈으로 간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맞아떨어졌다. 무엇보다 민화는 상왕이 이 모든 일을 덮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훤은 끊어질 것 같은 절망으로 운의 어깨에 기댔다. 그 절망 속에서도 훤은 마지막까지

민화가 아닐 것이란 고집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훤의 절망이 고스란히 연우에게도

전해져 문 너머에 앉은 그녀의 마음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와 똑같은 절망에 젖어들었다.

이때, 내관이 때마침 민화가 강녕전 밖에서 왕의 성후를 여쭙는다고 아뢰었다. 훤은 왜 민화가

입궐했는지까지는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어서 그녀의 입에서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누이에게 사과하게 되기를 빌었다.

“의금부도사는 잠시 물러가 있고, 민화공주는 속히 들라하라!”

감정을 억누른 훤의 목소리에 의금부도사는 여러 의문들을 미처 다 풀어내지 못하고,

일어나 물러나갔다. 그리고 고운 당의 차림으로 환한 얼굴의 민화가 뒤이어 들어왔다.

훤의 분노를 전혀 알지 못하는 민화는 무엇에 신이 났는지 연신 헤벌쭉거리며 절을 올렸다.

오라비의 건강이 걱정되어 온 표정은 결단코 아니었다. 그녀가 몸가짐을 조심하여 자리에 앉자

훤은 감정을 마음속 깊숙하게 깔고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풍천위는 어찌 지내느냐?”

“음······, 잘 지내고 있다고 아뢰어야 하는지 모르겠사옵니다. 얼마 전부터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 걱정하고 있사옵기에. 하지만 겉으로는 무탈하니······.”

충분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누이가 살아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염의 정신이 제대로일 리가

없었다. 민화는 훤이 운에게 기대듯 앉아 있는 것이 이상했는지, 눈을 똘망거리고 쳐다보았다.

“앉아계시는 것이 힘드실 만큼 성후 미령하시옵니까? 많이 강령해지시었다 들었사온데······.”

“넌 그런 질문을 하면서도 어찌 입은 여전히 헤벌쭉이냐? 내가 걱정되는 것은 아닌가 보구나.”

“오라버니도 참, 어찌 걱정이 아니 되겠사옵니까? 앗! 전 그만 돌아가야 되옵니다.

서방님께 어서 가야 되옵기에.”

훤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엉덩이가 바닥에 닿기가 무섭게 풍천위에게로 가고 싶어 하다니······,

그리도 그가 좋으냐?”

풍천위란 말에 민화의 입이 헤벌쭉 벌어져 귀에 걸릴 정도가 되었다. 표정만으로 답을 들은

셈이었다.

“그의 어디가 그리도 좋으냐?”

“오라버니! 또 저를 놀리시는 것이옵니까? 미워요!”

“민화공주! 그러하면 언제부터 그를 첨앙하였느냐?”

훤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의아했던 민화는 눈동자만 굴리며 가만히 있었다.

민화를 대신하여 훤이 답했다.

“옛날 네가 생각시옷을 훔쳐 입고 비현각에 나타났을 때, 이미 그를 마음에 두고 있었더냐?”

민화도 두려운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더욱더 입을 다물었다.

“말하라! 그때 이미 마음에 두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훤의 분노 가득한 목소리가 강녕전을 뒤흔들었다. 왕의 큰소리에 놀란 민화는 큰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맺어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왜 물어보시는 것이옵니까? 그리고 왜 진노하시었사옵니까? 저 무서워서······.”

“그때 넌 풍천위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짓을 하였느냐?”

“무엇을 말씀이옵니까? 전 오라버니가 하시는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사옵니다!”

“풍천위의 누이!”

순간 민화의 심장이 지옥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더 커진 눈을 향한

훤의 추궁이 이어졌다.

“그래도 모른다 할 것이냐!”

민화의 고개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세차게 도리질 쳤다. 하지만 이미 눈은 진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르옵니다! 몰라요! 전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민화공주! 난 너의 오라비다. 그러니 말해다오.”

겁에 질린 표정으로 도리질만 치던 민화는 결국 바닥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민화와 함께 훤도 겁에 질려 소리 없이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지? 넌 아무 상관없는 것이지? 아니라고 말하라. 부디 넌 끝까지 모른다고 말하라!”

“엉엉! 서방님에게는 비밀로 하여주시옵소서. 오라버니께서 저를 벌하시어도 좋사옵니다.

염라대왕한테 일러도 좋사옵니다. 하지만 서방님에게만은 제발······, 제발!”

훤의 몸에서 순식간에 힘이 빠져나갔다. 옆에서 운이 부축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쓰러져 버렸을

것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린 훤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직 민화의

대성통곡하는 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소리로 등 뒤에서 연우가 눈물을 참는

소리가 울려왔다. 훤은 넋이 나간채로 입만 움직여 말을 뽑아냈다.

“왜······, 왜 그랬느냐? 왜 네가 세자빈허씨의 시살에 관여하였느냐?”

“서방님을······가질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없었기에······.”

“연우낭자가 세자빈으로 간택되어도 아바마마께 간청하였다면 풍천위와도.”

“아니 된다 하시었사옵니다! 아바마마께오서 서방님은 간사지재(여러 세대를 통하여 썩 드물게

나타나는 뛰어난 인재)이니 절대 의빈이 되어선 아니 된다 하시었사옵니다! 제가 며칠 동안

곡기마저 끊고 간청하였사온데, 그래도 아니 된다 하시었기에······, 엉엉!”

“할마마마께서 널 꼬드긴 것이냐? 넌 할마마마가 시키는 대로 한 것이냐?”

바닥에 엎드린 채 통곡하고 있는 민화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마침 제가 초경을 시작하였사온데,······저의 소원이 담긴 개짐만 있으면 서방님의

누이를 죽일 수 있고, 그러면 아바마마는 서방님과의 혼례를 올려주실 수밖에 없을 거라

하시었기에······, 서방님의 누이가 죽기를 비는 주술에 참여하였사옵니다.”

머릿속에서 넋이 나간 상태에서도 훤은 그때의 상황이 이해가 되고 있었다. 상왕에게 있어서

염은 훤을 위해 아껴둔 인재였다. 훗날 훤이 왕이 되었을 때 그 옆을 보좌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무리해서까지 세자시강원의 문학으로 제수를 하였고, 미래의 왕과 미래의 신하가

우정을 쌓을 수 있도록 미리 터를 마련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염의 뒤를 버티고 있던

홍문관대제학과 사림세력은 외척세력에 밀린 힘의 균형을 이뤄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외척들에게 있어서 염이라는 나이 어린 사내는 미래를 위협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천천히 준비하고 있던 상왕의 계산에서 어긋났던 것이 민화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귀애하는 딸이라고 해도 그는 염을 의빈으로 들이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고, 더욱더 날개를 달아주려던 것이 연우의 세자빈간택이었을 것이다.

세자빈의 오라비에게 주어지는 막대한 권한을 다른 누구도 아닌 염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염이 아니라 아들인 훤과 조정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욕심 하나

없이 순수하게 염만을 원하는 민화의 사랑은 궁지에 몰린 외척들의 수장인 왕대비윤씨에게

있어선 더없는 기회였을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연우를 죽이는 일은 단지 세자빈의

자리만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사림세력의 조정 진입의 물꼬를 막는 것이었다.

세자빈이 죽고, 염과 홍문학대제학이 걸어야 할 길은 죽음이었을 것이었기에 상왕은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살리려고 했을 것이고, 그들과의 타협점이 살려두되 의빈으로 염의 날개를

꺾는 것이었다. 상왕은 이 모든 음모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외척들을 처결하자면

자신의 어미인 왕대비윤씨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민화까지 엮여들어 가야했고,

결국 상왕은 눈물을 흘리며 이 모든 일을 덮지 않을 수 없었다. 외척들은 그렇게 안전하게

상왕의 약점인 민화를 방패막이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그들이 의도했던 대로

이루어졌다. 공교롭게도 홍문관대제학은 상왕보다 먼저 죽어주었고, 염은 지금까지 철저하게

금고를 당한 상황이고, 사림세력들은 초야로 숨어들어 가버렸다. 그들의 의도와 다르게

진행된 것이 있다면 훤이란 존재뿐이었다. 외척들의 비호 아래에만 있었다고 생각했을 훤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 훤은 그 당시 상왕이 자신의 사랑과 민화의 사랑

사이에서 갈등했을 것이란 것은 짐작했지만, 또 다른 자식인 양명군의 사랑까지 그를

괴롭혔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뚜렷하게 알게 된 것은 그 당시 연우가 세자빈으로

간택되었기에 외척들에게서 이겼다고 생각했던 것이 착각에 불과했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철저하게 그들의 음모에 패배했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훤은 마지막의 종묘정전에서 보았던 부왕을 떠올렸다. 외척에게 왕권을 유린당하고 거죽만

남아있던 상왕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들에게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 당부하던 상왕의

비탄을 떠올렸다. 그는 알고 있었다. 연우가 살아있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 이런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미리 왕대비윤씨와 민화를 용서해달라는 유언을 남긴 것이었다.

“네가······, 네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는 아느냐?”

민화는 울음을 멈추고 비탄에 잠긴 목소리로 묻는 훤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소리는 잦아들어

있었지만 눈물은 더욱 굵어져서 얼굴을 타고 떨어지고 있었다. 민화가 훤의 절망스런

눈빛을 보며 말했다.

“똑같은 눈빛과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말씀을 아바마마도 제게 하시었사옵니다.

그때의 저는 모른다고만 답하였지요. 왜냐하면 정말 몰랐으니까······. 그 후 서방님의

눈물을 보았사옵니다. 누이가 가고 없는 별당에 홀로 앉아 피 같은 눈물을 삼키는 서방님을

보고서야, 제가 무슨 짓을 하였는지 알게 되었사옵니다. 제 손으로 서방님의 인생을

처참하게 부수어 버렸다는 사실을, 그리고 서방님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것을요.”

“이 바보 같은 것아! 아바마마껜 더한 잘못을 지었다! 홍문관대제학에게도 죽을죄를 지은

것이다! 내게도! 연우낭자에게도!”

“전 그때 생각하였던 것이 있었사옵니다. 천당에서 몇 억년의 세월을 보내기 위해 다른

사내의 품에서 몇 십 년을 사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지옥불 속에서 몇 억년의 세월을

보내더라도 서방님의 품속에서 단 며칠을 사는 것이 좋은가! 저는 후자를 택했던 것이고,

그때의 선택을 지금도 후회하지는 않사옵니다. 또 다시 저에게 선택을 하라시면 저는

주저 없이 서방님을 택할 것이기에······. 저의 지옥불 속의 몇 억년이,

다른 이들의 천당에서의 몇 억년 보다 훨씬 행복할 것이옵니다.”

민화의 확고부동한 태도에 훤의 어깨가 힘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연우의 어깨도 체념과

더불어 힘없이 떨어졌다. 연우의 눈에선 눈물도 말랐고, 덧없는 미소만이 입가에 떠올랐다.

하지만 훤은 체념하지 않았다.

“너를 벌할 것이다! 아무리 누이라 하더라도! 너를 벌하지 않으면 그 일에 가담한

외척들의 죄도 물을 수 없기에!”

민화는 눈물과 함께 고개도 떨어뜨렸다.

“저를 벌하시는 것은 받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제 뱃속에 있는 풍천위의 씨를 같이

벌하지는 마시오소서.”

“뭐? 방금 무어라 한 것이냐?”

“오늘 입궐한 것은 오라버니를 뵈옵는 것과 겸사겸사로 내의원에 다니러 온 것이옵니다.

있어야 할 환경(環經, 왕족의 달거리)이 없어 민상궁이 혹여 모른다 하여······.

진맥을 받았사온데, 태기가 있는 것이 확실하다 하옵니다.”

훤의 표정엔 아무 것도 담겨진 것이 없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헤아릴

머리도 남아있지 않았다. 민화는 씩씩하게 눈물을 닦았다. 갑자기 염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염을 잃을 것만 같아 불안해서 어서 그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불안한 눈을 두리번거리며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급하게 나가버렸다. 그렇게 가고 없는 민화의 자리엔 울분을 토해내는 훤의 비명만이

가득 채워졌고, 운은 아픈 희망을 가지고 연우가 있는 방의 문을 보았다.

#31

“상감마마······.”

훤을 찾는 연우의 애끊는 소리가 방문 너머로부터 들어와 훤의 비명 속에 파묻혔다.

또 다시 연우의 목소리가 훤을 붙들었다.

“소녀, 그리 들어도 되옵니까? 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비명인지, 울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훤의 목소리가 열리려는 방문을 향해 애원했다.

“아니 되오! 난······그대를 볼 수가 없소.”

“마마······.”

“그대를 그리 만든 자를 잡아 도륙을 낼 것이라 맹세하였었소. 그런데, 그대를 그리 만든

자들이 나의······피붙이였소. 그대의 죽음을 사주하고, 그대를 죽이고,

그대의 억울한 죽음을 덮은 이가 모두 나의 가족이었소. 내가 무슨 낯으로 그댈 볼 수 있겠소!”

바닥에 두 팔을 지탱하고 앉은 훤의 얼굴에서 떨어진 눈물이 바닥에 쌓일 듯 내렸다.

“소녀를 영원히 아니 보실 것이옵니까? 그렇게 또 한 번 소녀를 죽이시려는 것이옵니까?”

말 속에 섞인 연우의 눈물이 훤의 심장을 더욱더 괴롭혔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기엔 스스로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망설이는 훤을 견디지 못한 것은 이번에는 연우였다.

어명을 어기고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무너지지 않으려고 힘들게 지탱하고 앉은 훤의 등 뒤로

달려가 부축하듯 안았다. 등에 와 닿은 연우의 체온이 훤의 절망도 같이 끌어안았다.

“두려운 것이 무어냐고 하문하시었사옵니까? 소녀가 두려웠던 것은 이것이었사옵니다.

상감마마께옵서 상심하시고, 소녀를 아니 보실까봐 두려웠사옵니다.”

“그대가 이리 된 것이 나 때문이나 마찬가지요.”

“그리 말씀하시오면, 소녀가 살아있음을 스스로 원망하오리다.”

“난 그대에게 가장 멋진 사내이고 싶었소. 그런데 가장 못난 사내였소.”

훤은 자신의 허리를 힘주어 끌어안은 연우의 팔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부왕의 말이 훤의 심장으로 들려왔다.

‘내가 지키고자 했던 이들을 용서하고, 부디 지켜다오. 정 아니 되겠거든 제일 먼저

이 아비를 용서하지 마라.’

“아바마마······, 아바마마!”

훤의 애타는 부름은 하늘이 아닌 연우의 심장에 울려 퍼졌다. 연우는 부왕이 남긴 목소리와

자신의 눈물 사이에 있는 사랑하는 님의 슬픔과 고뇌를 덜어주고 싶었다.

“소녀, 상감마마의 곁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무슨 상관이 있으오리까. 어떤 옷을 입든,

어떤 신분이든, 작은 방에 숨어 살지언정 기쁠 것이옵니다. 이름도 상관없사옵니다.

소녀에겐 상감마마께옵서 이름하신 월이 있지 않으옵니까? 월이라 하여주시옵소서.

······그러니 부디 상감마마의 누이를, 핏줄을 마마의 손으로 벌하지 마옵소서.”

훤은 연우의 팔을 사납게 풀며 몸을 돌려 그녀와 마주보았다. 그리고 연우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두 손으로 그녀의 양쪽 어깨를 아프도록 잡았다.

“난 그대를 사랑하는 한 사내이기도 하지만, 이 나라의 왕이기도 하오. 비록 나 태어나던

날까지 기억하진 못해도, 내 기억에 있는 어린 나는, 지금의 나를 위해 학문을 익혔소.

내가 익혀온 것은 오직 왕으로서의 도리만이 있었고, 그 가운데엔 언제나 백성이 있었소.

왕으로서의 횡포는 배우질 못하였소. 처음 온양에서 만났던 그 밤, 그대가 나에게 그대도

조선의 백성이라 하였소. 백성은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도 숨어 살고, 단지 나의 핏줄이라

하여 죄를 지은 이는 행복하게 사는 세상! 그런 조선의 왕을 만들고자, 그 많은 스승이

나를 가르치진 않았소. 그런데 그대는 나에게 그런 조선의 왕이 되라 하는 것이오!”

연우의 눈에 비친 훤은 왕이었다. 인간으로서의 갈등과, 왕으로서의 갈등을 동시에 해야만

하는 불쌍한 사내였다. 그 가엾은 사내에게 애원했다.

“그러면 우리 오라버니는 어찌하란 말씀이옵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 오라버니,

······가엾어서 어찌하옵니까? 이 일을 알게 되면, 오라버니는 견딜 수 없을 것이옵니다.”

“그대는 그대 오라비만 가엾고, 나는 가엾지 않은 것이오? 그대가 중전이 아니면 다른 여인을

안아야만 하는데, 그런 나는 가엾지 않은 것이오? 그런 그대는 가엾지 않은 것이오!”

“가엾사옵니다. 하지만 누이를 벌하시는 상감마마는 더 가엾사옵니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대 오라비의 행복이 가엾소. 자신의 누이를 죽인 여인을 은혜로

여기며 부부로 살고 있는, 앞으로도 살아갈 나의 스승이 가엾소.”

“그러기에 소녀, 간청 드리옵니다. 우리 오라버니 이대로 모르고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내가 불행할 것이오.”

“소녀의 욕심은 이미 다 채워졌사옵니다. 무엇을 더 소망하오리까.”

“그대의 숨어 산 긴 세월은 억울하지 않소? 얼마나 괴로운 삶이었을지 나는 다 헤아리지도

못하오. 단지 뭇사람들이 그대를 사람이 아니라 한다던 스쳐가는 말조차 지금껏 내 가슴에 밟혀······.”

훤은 올라오는 울음소리를 목구멍 안으로 쑤셔 삼켰다. 그의 고통과 똑같이 연우의 얼굴도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괴로웠기에 그 고통을 오라버니와 나누고 싶지 않은 것이옵니다. 연우란 여인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났는지·······.”

옆에서 속으로만 눈물을 흘리며 두 사람을 지켜만 보고 있던 운의 눈빛이 무언가를

휘어잡으며 왕을 보았다. 그의 비상한 눈빛을 알아챈 훤이 눈물 맺힌 눈빛으로 그를 휘감았다.

“상감마마! 이상한 것이 있사옵니다. 공주자가는 세자빈허씨를 죽이는 주술에 참여하였다고

하였사옵니다. 하지만 세자빈허씨는 결국엔 주술로 죽은 것이 아니지 않사옵니까?”

훤의 눈빛도 비상한 눈빛으로 탈바꿈했다. 갑자기 병을 일으킨 것의 원인은 주술이 분명할

것이었다. 하지만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다.

“전 홍문학대제학이 마시게 한 탕약이다!”

훤의 외침에 두 사내의 시선과 더불어 내관들의 시선도 일제히 연우를 향했다.

연우의 어깨를 잡고 있는 훤의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연우는 훤의 눈동자에 차분한 음색으로 말을 심었다.

“아버지의 탕약······. 소녀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어린 연우가 마셨던 것은 썩어

떨어진 아버지의 심장덩어리와 눈물이었던 것과, 그리고 이름 없는 무녀로 다시 눈을 뜬 곳이

무덤의 죽음 속이었던 것뿐이옵니다.”

세상이 온통 뜨거웠다. 심장은 타들어 가 듯 더욱더 뜨거웠다. 수엽 덥수룩한 낯선 사람들이

병을 살핀 뒤 고개를 젓는 것이 멀어지는 의식 속에 간간히 잡혔다. 망연자실한 아버지의

표정이 연우의 눈에 들어오기도 했고, 누워있는 연우보다 더 아파보이는 어머니의 눈빛도

눈에 들어왔다. 너무 많은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달래주고 싶었지만 입술은 아무리

노력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오라버니가 보이지 않아 찾아달란 말도 힘이 없어

하지 못했다. 며칠 동안 앓았는지 알지 못한 시간들이 흘렸다. 의식을 잃었다가 잠시 깨어나기를

되풀이하는 동안 눈에 띄게 초췌해져 가는 부모님의 얼굴에 죄송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일어나지지도 않았다.

또 어떤 사람이 병을 살피러 왔다. 어의라며 왔었던 사람들과는 달랐지만, 관복을 입고

있었다. 아버지와 그, 단둘이 나누는 말소리가 의식만 겨우 있는 연우의 귀로 흘러들어왔다.

“관상감에서 우리 여식의 병을 살피는 연유가 무엇이오?”

“어의께서 병명을 알 수 없다하기에 혹시나 해서 온 것입니다.······아무래도

신병인 것 같습니다.”

“신병이라니? 그것이 무슨 말이오? 신병이라면······이 아이에게 신이라도 내렸단

말씀이오?”

“죄송스럽지만, 개인적인 소견일 뿐입니다. 아직 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비밀로

하여드리겠습니다.”

소름끼칠 만큼의 정적이 흘렸다. 연우는 아버지를 불러 그 말의 뜻을 묻고 싶었지만,

눈과 입이 떠지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은 그저 아픈 것보다 더 심각해진 아버지의 절망이었다.

어린 연우는 신병이 있는 여인을 처녀단자에 올리고, 세자빈으로 간택하게 만든 집안의

죄를 알지 못했다. 그저 평범한 병보다 더 무거운 죄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아마도 이 대화는 아버지만이 알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감히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상의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며칠이 지나 이번에는 어느 여인이 찾아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장씨도무녀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도무녀라 하였소? 왕실을 위해 있는 자네가 여긴 어인 일이오?”

“제 신기가 이리로 인도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 눈은 피해온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신기가 인도하였다니?”

절망어린 아버지의 목소리 뒤로 한참동안 침묵하고 앉아있던 장씨의 입에선 매서운

답만이 흘러나왔다.

“신기로 인한 병이 맞습니다. 어찌하실 것입니까? 신내림을 받지 않으면 이대로 계속

고통을 받을 것이고, 신내림을 받는다면 무녀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대제학영감뿐만이 아니라 자제분, 그리고 일가친척 모두 사약을 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니오! 그럴 리가 없소! 이 아인 그저 평범한 아이오. 게다가 친척 누구도 신병을 앓은

사람이 없는데······.”

사약이란 말에 연우의 힘겨운 의식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아버지의 어두운 등이 보였고,

그리고 장씨와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떠진 연우의 눈에 당황했는지 장씨의 고개가 무의식적으로

숙여졌다. 자신도 모르게 숙여진 고개에 스스로 더 놀란 모양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힘겹게라도 웃어주려는 연우의 눈에서 얼른 고개를 돌리며 급하게 말했다.

“특이하긴 하지만, 큰 그릇이다 보니 큰 신이 내리고 싶은 모양입니다. 떼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제 말을 믿지 못하는 듯 하니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나지요.

곧 다시 오겠습니다.”

장씨가 물러가고 난 뒤로 아버지의 시름은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장씨의 말을 믿지 않았는지,

아니면 믿기 싫었는지 다른 의원에게도 연우의 병을 물어보았다. 그 역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라고만 했다. 그래서 차차 아버지의 의심도 신병 쪽으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의 절망도 굳어져갔다. 가문을 위해, 왕을 위해, 세자를 위해, 그리고 조선의

종묘사직을 위해 연우는 살아선 안 되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누군가가 몇 번

다녀간 것 같았지만 의식이 없었기에 누군지,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의 결정은 그 사이에 내려진 듯 했다. 연우는 그 결정이 가문을 위해

내려졌음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평소와 다른 날이었다. 언제나 탕약을 달이던 사람은 어머니였다. 방 밖에 쪼그리고 앉아

몇 시간이고 약을 달이던 어머니의 그림자가 그날은 아버지의 그림자로 바꿔져 있었다.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이젠 정말 마지막이란 생각, 그리고 영원히 세자저하를 못보고

죽는 다는 생각이 연우의 의식을 두들겨 깨웠다. 의식조차 없던 몸을 일으켜 힘겹게

서안에 기대 앉았다. 연적에 있던 물을 벼루에 붓고 먹을 갈려고 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주위에 설을 찾았지만, 언제부터인지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힘없는 손으로 먹을 갈 수밖에 없었다. 먹이 움직여질 때마다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저 궐에서 얻어온 것으로만 여겼던 맛있는 검은 엿이 세자가 준 것이란 것을 알고 놀랐던

가슴이 떠올랐고, 끊임 없이 건네져 오던 서책들에 어리둥절했던 것도 떠올랐다.

그리고 처음 받았던 세자의 서찰에 적힌 시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할 수 없어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기억도 떠올랐다. 답시를 보낸 그날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태양의

황금빛에 물든 보슬비를 맞았던 것도 떠올랐고, 그 다음 퇴궐하여 오는 오라버니의 빈손에

낙담했던 것도 떠올랐다. 왜 바로 서찰을 보내주지 않았는지 만나면 물어보리라 했던 꿈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내당의 여인이 그런 시를 보내어 정숙하지 못하다며 실망한 것은

아닌지 내내 불안했던 시간이 흐른 뒤, 손에 건네져 온 세자의 서찰에 눈물마저 핑 돌았던

것이 꿈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세자라는 분도 자신과 똑같이 이름이란 것이 있는 사람이란

것에 미소를 지었었다. 혹시나 또 서찰이 안 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답장의 마지막

구절에 상추의 잎이 몇 개더냐는 뜬금없는 질문을 넣었었다. 질문 때문에라도 답장을

안 줄 수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계속되었던 그 뒤의 행복들은 이제 한낱

상상과도 같은 덧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서찰에서 주고받던 말보다 더 많은 말들을

만나면 나눌 것이라 아껴두었었고, 눈앞에 그 꿈이 닿았던 순간에 처참하게 사라져가고

있었다. 연우는 마지막 서찰을 힘겹게 적었다. 끝끝내 얼굴도 보지 못하고 마지막 인사를

남겨야 하는 것에 슬픔이 실리지 않도록, 최대한 담담히 쓰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서찰을 봉하고는 서안 서랍에 넣었다. 오라버니가 어쩌면 찾아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세자의 정표인 봉잠을 저고리 안의 가슴에

숨겨 넣었다.

아버지가 탕약을 가지고 들어왔을 때의 연우는 모든 마음의 준비를 끝내고 다른 날과

다름없이 자리에 누워있었다. 탕약을 서안 위에 올리면서 갈다만 듯한 벼루가 보였지만,

슬픔에 덮인 눈은 그것을 넣어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연우가 잠에서 깨지 않기를 바라는

듯한 손길로 연우를 깨웠다. 연우는 갓 잠에서 깨어나듯 눈을 떠 아버지를 보았다.

이미 많은 눈물을 흘린 듯 아버지의 눈과 얼굴은 부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우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눈에선 쉴 새 없이 또 눈물이 흘러나왔다. 연우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고, 아버지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연우의 눈을 피해 탕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약이 아직 뜨겁구나. 식혀서······.”

그의 떨리는 손이 숟가락을 잡아 탕약을 천천히 저었다. 연우는 누워 오라버니와 닮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연우에게로 스며들었다.

“연우야, 아버지가 그동안 많이 미안했다. 너에게 미안한 것 밖에 기억나지 않는구나.

······이럴 줄 알았다면 그리 종아리를 때리지도 않았을 텐데······.

읽고 싶어 하던 책 읽게 하고, 하고 싶어 하던 것 다 하게 해줄 걸······,

앞으로도 많은 세월이 남은 줄로만 알았단다, 어리석게도.”

이미 다 식어 더 이상 김도 올라오지 않는 탕약을 아버지는 계속해서 젓고만 있었다.

더 이상 식을 것이 없게 된 탕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던 아버지는 연우를 안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기대게 한 뒤, 탕약그릇을 들었다. 탕약을 한 숟가락 든 아버지의

떨리는 손은 연우의 입으로 다가오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있었다. 힘겨운 연우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어서 주세요. 병······낫고 싶어요.”

아버지의 눈물이 비오듯 연우의 이마로, 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한 숟가락씩 연우의

입에 탕약을, 자신의 썩어 떨어진 심장을 떠 넣었다. 연우는 아버지가 속상하시지 않게

얼굴에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이 아버지를 더욱더 괴롭히는 줄도 몰랐다.

“약이 쓰느냐?”

“써요, 많이······.”

아버지의 썩은 심장이 너무나도 썼고, 아버지의 눈물이 너무나도 짰다. 그래서 쓰고 짠맛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약을 다 마신 연우를 아버지는 꼬옥 끌어안았다.

“우리 연우, 아버지가 안고 있자. 잠들 때까지······.”

“네,······아버지께······오라버니 향기가 나서 좋아요.”

아버지는 끌어안은 연우의 가슴에 딱딱한 것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얼른 품에서

떼어내 보니, 못 보던 봉잠이 삐죽하게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연우는 아버지께 들킨 것이

불안하여 두 손으로 봉잠을 숨겼다.

“이것을 품에 가지고 자고 싶어요.······그렇게 하게 해주세요.”

“연우야······.”

아버지는 알게 되었다. 딸이 자신을 죽이는 약임을 알면서도 웃는 얼굴로 받아 마신 것이란 사실을.

뒤이어 아버지의 찢어지는 절규가 방안을 뒤덮었다.

“연우야, 연우야, 연우야, 연우야······.”

끊임없이 연우를 부르는 아버지의 통곡소리가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뚜렷하게 들려왔다.

아마도 평생 불러야 할 이름을 이날 다 불러보려는 것이었는지 연우를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 들어가는 연우를 계속 따라왔고, 아버지의 품속이었기에 어둠이

두렵지 않았다. 그렇게 연우의 심장이 멈추는 순간 아버지의 심장도 더 이상의 삶의 의지를 잃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자신의 내어 쉬는 숨소리조차 우렁차게 들리는 그곳이 어딘지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더 이상 아버지의 품이 아닌 관 속이었다.

죽음보다 더한 공포가 연우를 덮쳤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관 뚜껑이 열리고

낯익은 설이 연우를 끌어안았지만, 여전히 연우는 관 속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주위에 장씨가 있었고, 낯선 남자 셋이 더 있었지만, 겁에 질린 연우의 눈에는 설 이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오랜 세월이 흐를 동안 연우는 관 속의

공포에서 살아야했다.

#32

민화는 달리듯이 걷는 가마꾼의 걸음도 느리게만 느껴져 조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덩(공주나 옹주가 타던 가마)이 지금 비탈을 올라가는 것이냐? 어찌 이리도 걸음이 느린 것이냐?”

바깥에서 가마꾼과 함께 헐레벌떡 뛰고 있던 민상궁이 헉헉거리며 말했다.

“지금도 많이 흔들려 위험하옵니다. 특히 조심하셔야 함을 모르시옵니까?”

그리고 가마꾼을 향해 호통했다.

“흔들리지 않게 하라지 않았느냐! 잘못하다간 다들 경을 칠 것이다!”

가마꾼들은 누구 말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몰라서 뛰다 걷다 하며 안절부절 했다.

가마 속의 민화는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염이 홀연히 자신의 손에서 달아나 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것은 상상도 하기 싫은 무서움이었다. 그날의 무서웠던 주술이 끝난 후

모든 것이 끝났다고만 생각했었다. 이제는 영원히 염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오라비인 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민화에게 있어서는 아버지 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치 왕이 염을 빼앗아

가기라도 하는 듯 숨이 가쁘고 입안이 타들어갔다. 그리고 그를 당장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민화는 민상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랑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바깥에서 미리 기척할 사이도 없었다. 그런데 사랑방에 앉아 책을 읽던 염은 요란스러운

민화의 등장에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민화가 입궐하기 전에 인사하려고 들었을 때,

그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다. 마치 껍데기만 있고, 넋은 빼앗긴 사람 마냥. 민화는 자신이

들어온 것도 못 느끼고 앉아만 있는 염에게 바짝 붙어 그의 팔을 끌어안았다.

그제야 염은 놀란 눈으로 민화를 보았다.

“아, 다녀오시었습니까?”

“뭣을 그리도 골똘히 생각하시는 것이어요?”

“아무것도·······. 상감마마께오선 강녕하시었습니까?”

“네. 많이······.”

“······혹여 다른 어떤 윤언은 없으시었는지······?”

망설이는 듯한 염의 물음에 민화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그가 다른 때와 달라 보여서도

무서웠고, 그의 눈동자가 너무나 슬퍼 보여서도 무서웠다. 그래서 그의 팔을 더욱 힘주어

끌어안으며 말했다.

“왜 그, 그런 질문을 하시어요?”

“아, 아닙니다. 오랜만의 입궐이신데, 대비마마 곁에 좀 더 계시다 오시지 않고요.”

“서방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있을 수가 없었사와요. 너무너무 보고파서······.

아참! 소첩, 내의원에 들렸다 오는 길이어요.”

염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몸은 민화의 옆에 붙들려 있는데 마음은 저 멀리 북풍과

더불어 떠돌고 있는 듯 힘없이 말했다.

“내의원엔 어인 일로? 의원을 집에 부르시지 않고요?”

민화는 대답 대신 방그레 웃어보였다. 염이 좀 더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더 이상의 집중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진해서 그의 신경을 끌어 모았다.

“소첩,······서방님의 아이를 뱃속에 가지었다 하여요.”

민화를 보고 있던 염의 눈동자가 짙은 색을 찾았다. 기쁜 표정을 눈에 담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어두워졌다.

“죄송합니다, 공주. 제가 먼저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전혀 몰랐으니.”

“아니어요! 소첩도 몰랐사와요. 그리고 잉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표시도 없었고,

입덧도 앞으로 차차 할 것이라 하였고, 또······.”

민화는 염의 미소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의 미소가 몸에 닿자, 부끄러움에 몸이 비비꼬였다.

하지만 그에게서 눈을 떼지는 않았다.

“공주, 감사하단 말로 전하기엔 그 뜻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은혜만 입고, 돌려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공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저도 이제 아버지를 뵐 면목이 생기었습니다.

장하십니다.”

“안아주시어요.”

염은 깨어질 그릇이라도 품는 듯 조심스럽게 민화를 안았다. 하지만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은 살아있는 누이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민화의 어깨너머에는 대제학이 연우의

시신을 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옛날 그때, 염이 집으로 돌아와 연우의 방으로 달려갔을 때

눈에 보였던 것은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었다. 아무리 주위에서 연우의 시신을 그만 놓으라며

애원하는데도, 그는 연우를 안은 채 ‘아직 따뜻하다. 아직 살아있다.’는 말만 되풀이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염의 눈에도 이미 세상을 떠난 작았던 누이와 세상을

버린 아버지의 마음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마음을 죽이고 떠났던 가엾은

누이가 살아있었다. 염은 누이를 안아줄 수 없는 품으로 민화를 끌어안았다. 민화도 염의

품에서 힘껏 끌어안았다. 아무도 이 사람을 자신에게서 빼앗아가지 못하리라 생각하면서도

눈물은 모르는 사이에 흘러나왔다. 염의 청렴한, 너무나도 깨끗한 향기가 민화를 안았지만,

그녀의 몸은 영릉향으로 인해 그 향기에 물들어지지 않았다. 독과 악기(惡氣)를 없앤다는

영릉향, 그것이 아무리 짙은 향기를 내뿜어도 민화의 죄를 전부 가릴 수는 없었기에······.

“아바마마!”

어린 민화가 넘어질 듯 아버지를 부르며 달려가면 그는 왕의 체통도 내던지고, 몸을 구부정하게

숙인 채 두 팔을 앞으로 뻗으며 민화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하늘 높이 안아 올렸다.

그러면 민화는 왕을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같은 자식이라도

세자와 양명군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강녕전에 들어서도 민화는 방바닥에

앉아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왕의 허벅지가 당연하다시피 되어 있는 민화의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왕은 아무리 상심한 일이 있어도 민화의 얼굴만 보면 기분이 좋아졌고,

방긋 웃는 애교 있는 미소를 보면 어느새 같이 웃고 있었다. 민화는 그렇게 왕의 허벅지에

앉아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왕의 가장 많은 뽀뽀를 받았다.

왕비가 왕의 뽀뽀에 민화의 볼이 닳는다며 농담을 던질 정도였다.

민화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은 민화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민화는 자신이 떠받들어져

살아가는 것에 대해 특별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살아왔기에

자연스러운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녀는 무엇인가에 욕심을 내어본 적도 없었다.

욕심을 내어보기도 전에 이미 그녀의 손에 그 어떤 것이던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열셋이 되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그리고 열셋이 된 어느 날, 민화에겐 전혀 다른 세상이 열렸다. 염, 그를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비현각에서 서책을 앞으로 나란히 들고 월대 아래로 내려서던 염은 민화의 눈에는 선남이

하늘의 구름에서 내려서는 듯 환상처럼 보였다. 관복을 입기에는 턱없이 어려보이는

사내였지만, 그 어떤 자들보다 관복이 어울렸기에 천신의 아들이 민화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내려온 듯한 순간적인 상상에 빠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민화와 그 뒤의 궁녀들을

발견하고는 몸을 숙이며 등을 돌려 섰다. 공주를 보아서는 안 되는 신하였기 때문이었지만,

민화는 등을 돌려선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염의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막상 얼굴을

보자니 부끄럽고, 안 보자니 보고 싶은 마음에 그저 빙글빙글 돌기만 했고, 민화를 따라

궁녀들도 어쩔 줄 몰라 하며 같이 돌았다. 염의 옆과 뒤에선 눈을 들어 그를 보고,

앞에서는 차마 보기 부끄러워 눈을 내려 땅을 보던 긴 시간이 흐르자. 염의 입이 열렸다.

“어지럽사옵니다.”

목소리조차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웠다. 민화는 그의 목소리에 놀라 빙글빙글 돌던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용기 내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가까이서 본 그의 얼굴은 눈이

멀어버릴 만큼 아름다웠다. 부끄러움! 민화가 처음으로 느껴본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를

보고 있는 얼굴은 더운 열기가 화르르 뿜어져 나와 새빨갛게 변해져 버렸다. 민화는 자신의

뛰는 가슴에 놀라 뒤에 서 있던 민상궁의 가슴에 안겨들며 심장소리가 파묻혀버릴 만큼

큰소리로 까르르거리며 웃어버렸다. 그리고 민상궁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염의 얼굴을

곁 눈길로 훔쳐보았다.

그 이후부터 민화는 간간히 이상야릇한 표정을 했다. 밥숟가락을 들다가도 멍하니 있기가

일쑤였고, 베실베실 새어나오는 실없는 웃음을 참기도 힘들어졌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염의 모습은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민화는 염의 얼굴을 볼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공주의 신분이기에 그가 얼굴을 보아주지 않는 것이란 것을 알고 공주의 옷을 벗었다.

그리고 궁녀들의 눈을 따돌리고 몰래 숙영재를 빠져나가기 위해 생각시 한 명을 협박하여

옷을 빼앗아 입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생각시로 변장한 것도 아니었다. 정수리에 있던 옥으로

깎은 배시댕기와, 금실로 수놓아진 댕기, 그리고 화려한 온혜는 누가 봐도 공주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지만, 민화는 속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숨어들어간

비현각에서 다시 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말들을 세자에게

하고 있었지만, 비현각에 귀를 붙여 듣고 있던 민화에겐 노랫가락처럼 들려왔다.

모르긴 몰라도 어려운 말을 공부만 하는 세자오라비에게 해줄 정도라면 그는 대단히 유식한

사람임에 틀림없단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민화의 귀가 더욱더 비현각에 붙는

대화가 들려왔다. 분명 세자와 그 사이에 자신에 대한 것이 거론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안의 대화를 유심히 들었다.

“내게도 여동생이 있는데, 민화공주라고······. 본 적은 없겠지만 들은 적은 있을 것이다.”

“아! 한번 뵈었던 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 바로 앞에서. 면부를 뵈옵진 못하였지만.”

민화는 자신에 대한 염의 평가가 듣고 싶어 상기된 얼굴로 더욱더 비현각에 붙어 섰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세자의 목소리만 들렸다.

“그래? 아무튼 민화공주도 나 보다 세 살 아래인데 어찌나 떼쟁이에다 제멋대로인지.

아는 글자라고는 하늘 천 따지 밖에 모르고. 열세 살 여자나, 열네 살 여자는 거기서 거기 아닌가?”

이것은 민화에겐 자신의 험담으로 인식되었고, 순간 창피함과 오라비에 대한 배신감으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래서 다짜고짜 비현각으로 들어가 휘저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후, 숙영재로 끌려온 민화는 중전에게서 엄격한 꾸중을 들었다. 그리고 민상궁이 민화를

대신해서 종아리를 맞아야 했다. 생각시옷을 빼앗아 입고, 숙영재를 몰래 빠져나간 것,

그리고 세자가 수업 중인 비현각에 들어간 것 등의 잘못을 꾸중 받는 중에도 아름다운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없었기에 민화는 줄곧 머릿속에서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한동안은 감시하는 눈길이 삼엄하여 비현각에 놀러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머릿속에서 염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민화의 머릿속을 차지하는 면적은 점점 넓어져갔고,

그를 생각하며 평소 잘 읽지 않는 서책이라는 것도 가까이 했다. 그리고 또 다시 경계가

풀어진 틈을 타서 생각시 한명을 협박하여 옷을 빌려 입고는 비현각으로 도망쳤다.

이번은 저번과는 달리 비현각에 붙어서 대화는 엿듣지 않았다. 비현각의 월대 아래에 숨어

염이 나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민화는 비현각을 지키고 서있던 세자익위사 관원들에게

숨어있던 것이 발각이 되자 조용히 있으라는 명령을 했고, 옷만 생각시 옷을 입은 공주임을

뻔히 알고 있던 그들은 적어도 세자의 수업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공주의 숨바꼭질을

방해할 이유가 없었기에 못 본 척 해주었다. 그리고 기다린 보람 끝에 염이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염은 월대 아래를 본다거나 하는 헛짓 한번 없이 정갈한 걸음으로

비현각을 벗어났고, 민화는 그 뒤를 쏜살같이 쫓아갔다.

그의 단정한 뒷모습에 이끌려 쫓아가던 민화는 이대로 계속 쫓아만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리나케 뛰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처음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칫했던 염은 이윽고 민화를 조심스럽게 내려 보았고, 곧 자신의

앞을 막아선 여인이 공주임을 알아차렸다. 민화는 염의 눈길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부끄러움에

옷고름만 잡았다. 염은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눈을 아래로 향하고 말했다.

“공주아기시께오서 소인에게 어쩐 용무이시옵니까?”

민화는 부끄러워하던 표정을 멈추고 큰 눈을 껌벅거리며 염을 보았다. 용무! 왜 숨어서

염을 기다렸는지, 왜 따라왔는지, 그리고 왜 이렇게 막아섰는지 민화 자신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염을 보고 있던 민화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엉뚱한 말을 꺼냈다.

“난 공주가 아니라 생각시다. 옷을 보면 모르겠느냐? 그러니 나를 보아라.”

염은 빙그레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공주의 말투로 호령하면서 공주가 아니라는 소녀가

귀여웠다. 공주가 왜 이러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떤 놀이 중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염은 놀이일망정 공주에 대한 예는 갖추느라 눈을 들어 민화를 봐주지는 않았다.

민화는 허리를 숙인 채 눈을 내리 깐 염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짙고 긴 속눈썹이 자꾸만

민화를 유혹했다.

“예, 예쁘다······.”

자신도 모르게 말을 흘려버렸지만, 민화는 말을 한 것도 모른 채 계속 염을 보았다.

“무엇을 말씀이옵니까?”

“전부 다······.”

그런데 어느새 민화의 손끝은 염의 속눈썹에 다다라 있었다. 염 보다 민화가 더 놀랬다.

깜짝 놀란 민화는 손을 등 뒤로 급히 숨겼다. 그의 속눈썹이 닿았던 손끝에 불이 붙은 듯

뜨거웠다. 염은 나이에 비해 워낙에 어려보이는 공주였기에 그녀의 행동에 신경 쓸 겨를 없이,

그녀가 이곳에 있는 이유만 생각했다. 계속 자신의 뒤를 쫓아왔으리란 것은 상상도 못했기에

놀이 중에 길을 잃은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송구하오나, 공주아기시의 놀이동무는 어디에 있사옵니까?”

“어? 놀이동무라니? 그런 건 모른다.”

염은 공주가 길을 잃은 것이라는 생각을 확정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민화는 염의 머릿속을 전혀 모른 채 부끄러워하며 궁금해 하던 것을 물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

“열일곱이옵니다.”

“와! 그럼 부인은 있느냐?”

“아직 미취한 몸이옵니다.”

“와! 와! 그럼 정혼한 여인은 있느냐?”

“아직 없사옵니다.”

“와! 와! 와! 아참!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이름말이다.”

“······허 염이라 하옵니다.”

“염······, 햐! 참참! 넌 세자오라버니와 무얼 하느냐? 매일 같이 공부하던데

오라버니의 글동무인 것이냐?”

“비슷하옵니다.”

민화는 신이 나서 염에게 질문을 퍼부었고, 그는 대책 없이 질문에 답할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말했지만, 나도 천자문을 다 읽었다. 그리고 요즘엔 <열녀전>을 읽고 있는데······.”

민화는 신이 나서 떠들어 대는 자신과는 달리 난처해하며 단답만 하는 그의 모습에 말을

멈추었다. 어쩐지 정숙한 여인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인 것이 민망하기도 했다.

“난 정숙한 여인이다. 난······. 나를 좀 보아라.”

염은 여전히 난처한 미소만 보였다. 그리고 민화를 향해 눈길을 올리지도 않았다.

염은 길을 잃은 것으로 보이는 공주를 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민화는 아무 것도 모르고 줄래줄래 염의 뒤를

따라 걸었다. 민화가 뒤따라오는지 모르고 걷던 것과는 달리, 보폭을 짧게 해서 천천히

걸으며 간간히 공주가 따라오는지 살피는 염을 보며, 민화는 새어나오는 행복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비록 그를 상대로 즐거운 대화는 할 수 없었지만, 이제껏 놀았던

그 어떤 재미난 놀이보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즐거웠다. 아무 것도 안하고 이렇게 계속

걷기만 하는 것도 즐거웠다. 그런데 그의 말없는 뒷모습을 보며 걷는 길은 아주 짧게 끝이 났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따라왔던 곳은 비현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곳 뜰에는

공주를 찾으러 온 궁녀들이 있었다. 그들이 사색이 되어 민화에게 달려오자 염은 공주에게

허리를 깊숙하게 숙여 인사한 뒤, 비현각을 나가버렸다. 민화는 궁녀들에게 붙잡힌 채

그렇게 가버리는 염을 원망어린 눈길로 계속 좇았지만 그는 눈길을 느끼지도 못했다.

숙영재로 돌아온 민화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염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발그레한

미소를 만들어 내었다. 가까이서 본 그의 모습은 한층 더 아름다웠고, 걷는 걸음새와

움직이는 자태, 말하는 어투는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점잖았던 것도 마음이 설레게 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도 멈춰지지 않았고, 오히려 주위 가득 염으로만 채워 놓았다.

하지만 설렌 것도 잠시, 저녁이 되자 걱정스런 얼굴의 왕이 숙영재로 찾아왔다.

민화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왕의 허벅지에 앉지 않았다. 이제는 조금 성숙한 여인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왕을 앞에 두고 염을 생각하느라 히죽거리는 민화에게 왕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민화공주, 오늘 또 생각시 차림으로 비현각에 갔었더냐?”

“네? 그랬긴 하지만 세자 오라버니의 예학을 방해하진 않았사옵니다.”

“그래, 세자를 보러간 것이 아니라면 누구를 보러간 것이더냐?”

다른 날과는 달리 심각한 아버지의 표정에 민화는 우물쭈물 거렸다. 염을 보러간 것이

그렇게나 잘못된 것인지는 몰랐기에 아버지의 심각함을 헤아리지 못했다.

“저번에도 비현각에 뛰어들어 문학을 붙잡고 곤혹스럽게 하였다 들었다. 그리고 오늘도

숨어 있다가 그를 뒤따라 갔었다더구나. 혹여 내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라도 있느냐?”

민화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문학이라니요?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세자의 스승 말이다, 허 염!”

“아! 그 사람이 세자 오라버니의 스승이옵니까? 글동무가 아니라? 우와!”

민화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털북숭이 늙은이도 아닌데 세자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니,

그가 더욱 근사하게 느껴졌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옵니다!”

얼굴이 발그레해져 말하는 민화를 본 왕은 더욱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 대단하지. 대단한 인재고 말고. 우리 공주가 그를 보러 간 것은 아니겠지?”

“보러 가면 아니 되는 것이옵니까? 오라버니를 방해하는 것도 아닌데······.

소녀, 그 사람이 너무 멋있사옵니다. 그런데 소녀가 공주라서 얼굴을 보아주지 않아

속상하옵니다. 그 사람더러 소녀를 보아도 된다고 아바마마께오서 어명하여 주시옵소서.”

왕은 골치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혹시나 공주가 그에게 반해있으면 어쩌나 했던 염려가

현실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자선당 쪽으로는 가지 말아라. 그리고 문학을 보러가서도 아니 되느니라.”

“왜······아니 되는 것이옵니까?”

“그는 간사지재다. 그리고 너는 공주다. 그러니 생각을 해서도 아니 되는 것이야.”

민화는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왕은 민화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며, 한숨과 함께 어렵게 말했다.

“우리 공주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아서 이해를 못하는 것 같구나. 조선은 말이다,

공주의 지아비는 관직에 나올 수가 없단다. 그렇기에 뛰어난 인재는 의빈으로 가둬두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야.”

“그, 그렇다면 소녀는 못생기고, 팔푼이 같은 사내와 혼인해야 한다는 것이옵니까?”

“그런 것이 아니다. 단지 그는 아니 된단 말이다. 그는 미래의 왕을 위해.”

민화는 눈물을 글썽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소녀는 그런 것 모르옵니다! 그리고 소녀도 그를 생각하려고 애를 쓴 것이 아니옵니다.

가만히 있어도 그가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래서 비현각에 그를 보러간 것뿐이옵니다.

야단하시려거든 온종일 소녀를 따라다니는 그의 모습을 야단하시옵소서.”

“그를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 하지 않느냐! 나라고 그가 탐나지 않는 줄 아느냐?

조선 제일의 사내를 우리 공주의 배필로 삼고 싶지 않은 줄 아느냐?

하지만 조선의 법이 그러한데 어쩌겠느냐? 왕은 경국대전을 넘어설 수 없느니라.”

민화는 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다. 조선의 법이 무엇인지, 자신의 현실이 무엇인지

다 헤아릴 수 없어도 그를 생각해선 안 된다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못난 남편을 둔 불행한

고모님들이 자신의 미래가 될 것만 같아 서글퍼졌다.

“싫어요! 소녀, 싫사옵니다. 공주도 하기 싫사옵니다. 소녀는 앞으로도 그 사람을 보러 갈

것이옵니다. 이제껏 그 사람만큼 멋있는 사람을 본적이 없사옵니다! 잘난 사내는 모두 다른

여인의 것이 되고, 못난 팔푼이를 공주의 지아비로 두는 것이 대체 말이 되옵니까?”

왕은 딸의 고집을 달래느라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꿨다.

“팔푼이가 아니라 적당히 괜찮은 사람으로 간택을 해줄.”

“엉엉! 싫어요! 고모님들의 지아비가 왜 하나같이 망나니들인지 소녀, 이제야 알 것 같사옵니다.

사치한 허영덩어리들! 소녀 싫사옵니다. 허 염처럼 고아한 선비가 좋사옵니다!”

공주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의빈들은 아무리 학문을 갈고닦아도 관직에 나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같이 글은 멀리 하고 주색과 사치만 일삼았다. 처음부터 그들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건실한 인물로 간택을 해도 그들에게 처해진 현실이 그렇다 보니 저절로 인간성이

변해갈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공주나 옹주들이 불행한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왕은 민화를 어린애 달래듯 달래보았다.

“고아한 선비 중에서 간택해 줄 터이니.”

“허 염! 그 사람만이 좋사옵니다! 아바마마, 다른 인재는 얼마든지 있지 않사옵니까?”

“그 같은 이가 의빈이 된다면 그는 불행해질 것이다. 넌 그를 몰라. 그의 시권(과거 답안지)을

보고 난 손이 떨렸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 시작인 사람이다. 어제의 학식에 놀라고,

하루만이 지난 오늘의 진보에 놀라게 하는 이가 그다. 그의 외모는 그의 내면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을 정도니, 의빈으로 두면 그보다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느냐?”

민화를 포기시키기 위해 하는 왕의 말은 민화를 염에게 더욱더 빠져들게 만들었다.

왕은 숙영재의 궁녀들에게 앞으로 오늘과 같은 일이 또 있으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란

어명을 남기고 가버렸다.

그 이후 민화는 삼엄한 경계 때문에 더 이상 자선당 쪽으로는 갈 수가 없었다. 궁녀뿐만이

아니라 곳곳의 군사들도 공주가 나타나면 길을 비켜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만큼 보고픔도

점점 더 커져갔다. 아무도 편들어 주지 않는 공주의 그리움을 위로해주는 사람은 대비윤씨가

전부였다. 그래서 민화는 그녀에게 상심한 마음을 자주 털어놓았고, 염을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이 죄가 아니란 것을 위로받았다. 염에 대한 마음이 참을 수 없게 된 것은 이 이후였다.

이제 마주칠 수조차 없는 염을 마음에 담고 터덜터덜 강녕전으로 오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께 한번만 더 애원해 보기 위해서였는데, 강녕전의 뜰에 염이 있었던 것이다.

다른 관리들과 같이 있던 그의 아름다움은 단연 월등하게 눈에 들어왔고, 그 전에 보았을 때

보다 훨씬 멋있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은 충격처럼 와 닿았다.

비록 민화를 발견하고 웃은 것이 아니라 옆의 다른 관리에게 웃어준 것이었지만 민화의

심장은 경기에 소스라쳤고, 다리엔 힘이 풀려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만날 것이란 사전

각오가 없이 갑자기 보게 된 것이었기에, 심장과 다리도 각자 상의 없이 움직여진 것이었다.

깜짝 놀란 것은 민상궁과 궁녀들이었다. 자신들이 살기위해서는 왕의 눈에 띄기 전에

부리나케 민화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했다.

민화는 왕에 대한 단식투쟁까지 해보았지만, 왕의 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공주가 몇 번 본 것만으로 마음이 깊어진 것이었기에 이대로 버티면 곧 시들해질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세자의 가례를 위한 세자빈간택이 진행되었다.

처음에 이런 것엔 관심도 없었던 민화에게 특별한 의식이 된 것은, 세자빈 후보에 염의

누이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부터였다. 세자빈으로 염의 누이가 간택된 그날, 민화는

그곳으로 나가지 않았다. 공주이기에 간택된 세자빈으로부터 큰절을 받아야 했지만,

달거리를 시작하는 바람에 나가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나가기 싫었다. 염은 의빈이 되어선

안 되고, 그의 누이는 세자빈이 되어도 되는 불평등에 철없는 화가 났고, 완전히 염과는

맺어지지 못할 것이란 절망도 민화를 슬픔으로 몰아붙였다. 그런 민화에게 간택이 끝난

그날 즉시 속삭여온 대비윤씨의 말은 민화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 일을 진행시키면 사태는

어떻게 변하고 자신이 외척들에게 어떻게 이용당하게 될 것이란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단지 민화의 귀에는 염의 누이나 세자빈의 죽음을 주술 하는 것이란 말보다, 염과 맺어질 수

있다는 것이 더 크게 들어왔다. 그리고 그 주술로 인해 그때의 염의 환한 웃음은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것이란 것은 알지 못했고,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의 슬픈 눈동자만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양명군이 한양 일대를 방황하다가 집에 도착하자, 그의 하인이 안절부절 하며 다가왔다.

양명군은 그의 이상함을 느끼고 집 안으로 차가운 눈길을 던졌다.

“무슨 일이냐? 누가 집 안에 들어 있는 것이냐?”

하인은 양명군의 손에서 말고삐를 받아들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송구하오나, 파평부원군이 계속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놈이 진정 실성을 한 게냐? 그따위 놈을 나의 집에 들이다니!”

“소인네가 아무리 들어오지 말라 하는데도 부득부득 집 안으로 들어오는지라 말릴 수가

없었사옵니다.”

양명군은 화난 손길로 주던 말고삐를 다시 빼앗아 들었다.

“내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때까지 그자를 내쫓지 않는다면 네놈 목이 성하지 못할 것이다!”

하인의 눈이 도와달라는 눈빛을 했다. 일개 하인인 주제에 국구를 내쫓는다는 것은 양명군에게

목이 달아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빛에 상관없이 양명군은 말에

훌쩍 올라탄 뒤, 사라져 버렸다. 파평부원군이 자신을 찾는 것! 그것은 다른 소인배들이

자신을 찾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양명군은 미칠 것만 같은 가슴으로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지르며 말을 몰았다.

#33

강녕전의 왕 앞에 앉은 장씨는 고개만 방바닥에 붙인 채 아무 말도 없었다. 그것은 훤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어두운 달빛의 개수만 세는 듯 닫힌 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장씨는 보이지 않는 건너 방에 있는 연우의 흔적과, 짧은 한숨조차 내뱉지 못하고 삼키고

있는 왕의 느낌으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죄 또한 왕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묻겠다. 도무녀는 답하라. 내가 너에게 상을 내려야 하는 것이냐, 아니면 벌을 내려야

하는 것이냐?”

엄숙하지만, 차가운 기색은 없는 왕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장씨는 답하지 못했다.

“둘 다 해당하는 것이냐?”

이번에도 답하지 못했다.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하고 물어보고 있는 왕이었다. 앉아서도

천리를 내다보는 능력을 지닌 왕다운 왕이었다. 궐에 앉아만 있어야 하는 왕이란 존재가

지녀야할 가장 중요한 능력이었고, 훤은 그 능력을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앞에 몸을 숙이고 앉아 있는 죄 많은 몸일망정 스스로 영광스러움을

말하고 있었다.

“대비전이 성숙청에 미치는 힘을 본다면 도무녀는 감히 거역하지는 못했을 터이니,

옛날 대비의 주도 아래 행하여진 세자빈 시살에서 저주의 주술을 주관한 자는 분명

너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다시 살린 것이냐?”

“쇤네가 날린 것은 분명 살수였사옵니다. 단지 세자빈마노하의 마음이 지극한 것을 몰랐기에,

그리고 이미 이어져 있었던 인연인줄 몰랐기에 주술이 듣지 않았을 뿐이옵니다.

하오니, 죽여주시옵소서.”

“네 말이 진정 사실이라면, 죽여도 곱게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이 몸을 갈갈이 찢어 조선팔도에 뿔뿔이 흩어버리시어도 한없사옵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만 죽음에 한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장씨에게서 풍기는 태도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죽음 앞에 태연한 자가 그 당시엔 어이하여 대비전의 말에 굴복하였는가?”

“유학의 중심 앞에 언제 어느 때 철폐될지도 모르는 성숙청이옵니다. 그 칼바람이 쇤네의

대에서 휘둘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욕심이었사옵니다. 성숙청이 비록 왕실의 구복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미명 아래에 있사오나, 나약한 백성의 마음을 가뭄 때는 희망을 주고,

홍수 때는 어루만지며 왕과 백성을 하나로 잇고 있사옵니다. 그렇기에 조선의 땅에,

그리고 조선의 하늘에 더 이상 음악과 춤을 바칠 수 없게 되는 것이 두려웠사옵니다.”

“그렇다면 전 홍문관대제학을 찾아가 세자빈허씨가 신병이 들었다 거짓을 말한 관상감의

관료도 공범이었느냐?”

“상감마마! 이 몸을 찢어 죽여도 쇤네는 할 말이 없사옵니다. 하오나 그들까지 더러운

한통속으로 넣지 마시옵소서.”

이번의 장씨의 말은 원통한 듯 완강했다. 진실로 그들의 의도와 죽음은 외척들과는

상관없는 듯해서 훤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주술이 있고 난 이후에 그 사건의 음모를 알게 되었겠구나. 하지만 돌이키자니

더욱 세자빈의 생명이 위험해질 것이고. 그대로 세자빈이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그들은

너와 상의한 끝에 세자빈을 안전한 곳으로 빼돌린 것이다. 맞느냐?”

장씨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노력이 헛된 일이 아님을 알아주는

왕의 성명에 눈물 한줄기만 흘러나왔다. 훤도 장씨의 답과는 상관없이 계속 말했다.

“그렇다면 죽은 지리학교수가 네가 있어야 할 곳과 휴지역들을 미리 정해둔 것이었겠구나.

풍수와는 상관없는 네가 지금의 관상감 교수들 모르게 있었다 하여 의아해 여기었더랬다.”

이번에도 장씨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대답이 없어도 훤의 추측이 제대로 된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자결을 하였는가?”

“비밀은 단 한명이라도 덜 아는 것이 새어나가지 않는 것이라 하여, 또한······.”

뒷말을 잇지 못하는 장씨가 차마 말 못하는 진실을 훤은 알아차렸다.

“상왕을 속이는 것 또한 불충이기에 그리하였구나. 그들의 죽음의 진실을 아옵셨을

아바마마께옵서도 통탄하시었을 것이야.······조선의 충신은 청요직(淸要職)의 기록에

있는 인물들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 없이도 있구나. 그것을 왕이 모르고,

백성이 모르고, 후세가 모를 뿐이다.”

훤은 진심으로 그들의 명복을 기도했다. 비밀을 묻기 위해, 종묘사직을 위한 일이 왕을 위하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이 하였을 고민을 위해, 그리고 결국 왕은 알지 못하는

불충한 죄를 스스로에게 내렸을 그들의 충심에 감사하는 고개를 숙였다. 오랜 침묵 끝에

훤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전 홍문관대제학도 진짜 신기가 든 것인 줄로만 알고 여식에게 약을 먹였겠구나.

그것이 살리는 약인 줄로는 모르고. 그에겐 진실을 말하지 그랬느냐? 그랬다면 그는 그리

고통스럽게 살다 일찍 죽지 않았을 것인데·······. 살아 여식을 다시 볼 수 있었을 것인데······.”

“그는 충신이라 오히려 진실을 말하면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기에 그리한 것이옵니다.

그는 단순히 고통스럽지 않고,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신기를 죽음 뒤엔 사라지게 하는

약제인 줄로만 알았사옵니다.”

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의 생전을 기억하고 있었다. 부왕이 염을 의빈으로

간택하는 대신 대제학이 길게 살아 훤을 도와주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부왕의 뜻을

받들지 못하고 슬픔 속에 살다, 슬픔에 심장을 잠식당해 죽어갔다. 그의 슬펐던 표정들이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금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왕에게 민화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었다면, 대제학에게 있어서 연우도 똑같은 무게였을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손수 딸의

입에 독약을 넣을 수밖에 없도록 몰고 간 잔인한 자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제 그의 한을

풀어주어야 했다. 백성의 슬픔을 걷어야 하고, 충신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해야 하고,

자신의 사랑을 위로받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슬퍼하며 갈등할 시간이 없었다. 외척들이

언제 어디서 칼보다 더 위험한 것을 들이 댈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훤이 고개를

들어 장씨를 보며 웅장한 왕의 목소리로 말했다.

“부적을 쓴 자를 아직 알아내지 못했느냐? 적어도 무당이 아니겠느냐?”

“상감마마께옵서 쓰러지진 그날, 조선팔도의 모든 무적에 있는 자들은 사독제를 위해

각 4군데의 강으로 모였었사옵니다. 한강의 사독제에도 성숙청의 무녀들뿐만이 아니라,

일손이 턱없이 부족한 탓에 한양의 도성 내에 있는 각심절본무당(한양의 서쪽영역을 담당하던

무당으로 주로 도성 내의 나라굿을 담당), 구파발본무당(서쪽영역을 담당하던 무당으로

주로 제당에서 하는 나라굿을 담당), 노들본무당(남쪽을 담당하면서, 지역으로서의 한양 땅을

수호하던 무당으로, 왕실에서 명하는 굿중에서 지방으로 가서 하는 굿도 담당) 등등 아무도

빠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옵니다.”

장씨는 말을 마치고 다시 한 번 그날을 기억해 보았다. 차례로 도무녀 앞에 자신들을

밝히며 고개를 숙이던 그들 중 빠진 이들은 없었고, 그 아래 무녀들도 모두 대동하고

왔노라 고했었다.

“부적이라 하면 그날 당일에 쓰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사주를 알아야 부적을

쓸 것인데, 액받이무녀의 사주를 아는 이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닐 터인데.”

“관상감의 세 교수 이외에는 아는 자들이 없사옵니다.”

“결국은······어느 누구도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인가?”

훤은 관상감의 교수들은 아니란 판단을 내렸다. 그들은 오히려 외척들과 연계된 부적 쓴

자들보다 모든 상황을 나중에 안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현재로선 이들을 제외한

성숙청 내부인물들이나, 아니면 관상감의 내부인물들 모두 용의선상에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성숙청 외의 무녀들도 예외란 없었다. 사독제에 참여하기 전, 부적을 써두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도무녀는 그만 물러가라.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너에게도 자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장씨는 연우를 중전으로 모시고, 비로써 죄 많은 몸뚱이를 땅 속에 뉘일 수 있다면 그만한

왕의 은혜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진심으로 몸을 숙였다.

훤은 장씨를 물러가게 한 뒤에도 오랫동안 달빛만 세고 있었다. 간간히 고개를 돌려 연우가

있는 방문에 눈길을 두어보긴 했지만, 이내 죄인 된 마음으로 눈길을 거두어 왔다.

그리고 골똘히 옆에 앉은 운을 쳐다보았다. 운은 왕을 보지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훤은 그의 감은 눈 속에 담긴 번민을 헤아리고도 남았다. 그 번민은 이미 정리가 되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해 있을 것이었다. 그가 선택할 것은 분명 왕의 곁을 떠나는 것이란

것도 훤은 알고 있었다. 야장의로 갈아입고 이불 속에 들어서도 생각에 잠긴 채 뒤척이느라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날이 밝으면, 어쩌면 운이 자신의 곁을 떠날 것이라 말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더한 죄를 품고도 곁에 있는 자들이 있는데, 운은 사랑을 품은 죄로 곁을

떠날 것이란 생각에 그가 더욱 아까웠다. 사내로서 그를 질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마음이지만,

왕으로서 그는 절대 놓쳐선 안 되는 신하였고, 또한 세상에 유일한 벗이었다.

운이 마음 속 결론을 낸 것처럼 훤도 고민할 사이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적들은 왕에게 고민할 시간 따윈 주지 않은 채 이미 움직이고 있을 것이기에.

뜬눈으로 밤을 샌 훤은 파루의 북이 울기도 전에 자리에 일어나 몸을 씻었다.

무언가 어제 밤과는 달리 기운이 넘치는 듯해서 주위 사람들의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다.

그런데 몸은 많이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곤룡포를 물리친 뒤, 야장의 차림 그대로 있었다.

여느 때였다면, 아직 편전에 납시면 안 된다는 내관들과 어서 빨리 편전에 나가야 한다며

곤룡포를 달라 호통 치는 왕 사이에 실랑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은 나아진 건강에도

불구하고 왕은 편전에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불안한 상황이라, 건강해진

모습을 대신들 눈에 보여서 하루라도 빨리 민심을 다스려야 하는데도 왕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움직이질 않았다.

훤이 초조반를 끝낸 뒤, 자리에 정좌하고 서안 앞에 앉자마자 운이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런 운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훤이 말했다.

“운아! 잠시 너의 본가에 다녀와야겠다.”

운의 몸이 멈칫했다. 그런 사이 훤은 종이에 무언가를 쓰더니 봉서로 봉했다. 그리고 또 다른

서찰도 써서 봉서로 봉했다. 그렇게 두 개의 봉서를 운에게 내밀며 훤이 말했다.

“혹여 나에게 하고픈 말이 있거든, 다녀와서 하도록 해라. 이쪽의 봉서는 정경부인박씨에게

전하고, 나머지는······양명군에게 전하고 오너라. 단 양명군의 집안으로 들어갈 땐

어느 누구의 눈에 띠지 않게 극비리에 다녀와야 할 것이야.”

정경부인박씨라면 운에게 성을 준 남자의 정실이었다. 그리고 운을 키워준 분이기도 했다.

흔들리는 운의 기운을 알아차린 훤은 조용한 어조로 속삭이듯 말했다.

“이렇게 밤사이 잠 못 자고 본가에 가면, 너의 모친이 가슴 아파하겠구나. 오랜만에 본가에

가는 것이니 양명군에게 먼저 들렸다가 본가에서 하룻밤이라도 쉬고 오너라.”

훤의 말뜻은 운검이 자리를 비우면 사람들 눈에 크게 띄기 때문에 운검의 본가에 가는 것을

크게 보이게 하고, 양명군의 집에 들르는 것은 보이지 않게 덮으라는 것이었다.

운은 어명이기에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고 봉서를 품속에 넣은 뒤 물러나갔다.

운이 사라지자 훤은 서안을 밀치며 연우를 찾았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표정으로

건너 방에서 나왔다. 왕 앞에 절을 하려는 연우를 훤은 냉큼 달려와 번쩍 안아 들었다.

“꺅!”

들릴 듯 말 듯한 외마디 비명 소리가 연우의 입에서 나오자, 훤은 의아한 듯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대도 그런 인간적인 소리를 낼 줄 아는 것이오?”

“갑자기 놀라게 하시니······.”

훤은 붉어진 그녀의 표정을 보며 큰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그녀를 안은 채로 방안을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내관들과 연우는 훤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눈만 둥그레져

볼 수밖에 없었다.

“상감마마, 편전에는 아니 나가시옵니까?”

연우의 조심스런 물음에 훤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대가 없는 편전엔 나가기 싫소. 아프다 하며 그대를 안고 이곳에 계속 있을 것이오.”

“아니 되옵니다. 내려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우의 아랫입술은 훤의 이에 물려버렸다. 비록 살짝 문 것이라고는 해도

입술이란 곳이 워낙에 여린 곳이라 제법 아팠다. 무엇보다 갑작스런 일이라 연우의 눈동자는

놀라서 커질 대로 커졌다.

“어찌 된 입술이 내가 싫어하는 말만 내뱉는단 말이오. 참으로 미운 입이 아닐 수 없소.

아니 된단 말은 이제 지겨우니 하지 마시오.”

그리고 이번에는 입술이 아니라 귓불을 깨물었다. 연우가 당황하며 말했다.

“귀란 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사옵니다.”

“대신 내 말을 잘 듣지 않잖소. 미워도 이렇게까지 미운 귀는 없었소.”

괜한 핑계에 불과했다. 안아 들어 얼굴을 가까이 하고보니 눈앞에 어른거리는 연우의

입술을 참을 수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일을 저질렀던 것이고, 하얀 솜털 박힌 귓불도

그래서 깨물어 버렸던 것이다. 훤은 스스로도 민망했는지 연우를 안은 채로 쪼그려 앉았다가

힘껏 일어났다.

“어차피 지금 편전에 나가보았자 그대가 보고 싶어 월대를 내려서기도 전에 가던 길 돌아

올 것이 분명한데, 곤룡포 갖춰 입는 것이 더 귀찮소. 숫자나 헤아리시오.”

뜬금없는 말에 연우는 또 다시 의아해졌다.

“네? 숫자라니 무슨 뜻이옵니까?”

“내가 방금 한번 앉았다 일어서지 않았소? 그러니 하나란 수를 세란 말이오.”

훤은 다시 앉았다가 일어섰다. 그러면서 둘을 헤아렸다. 연우도 얼떨결에 둘을 세었다.

그리고 그 세는 수는 점점 불어갔다. 내관들은 훤이 땀까지 뻘뻘 흘리며 연우를 안고 앉았다가

일어서기를 끊임없이 하는 것을 보고 급하게 내의원을 밖에 대기 시켰다. 언제나 그렇지만

의중을 알 수가 없는 왕이었다. 아무 생각 없어서 편전에 나가지 않는 것도 아닐 것이고,

저리 여인을 안고 힘들게 움직이지도 않을 것이었다. 상선내관이 보다 못해 입을 열었다.

“상감마마! 아직은 옥체를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병상에 계셨사온데,

그리 힘들게 움직이시오면······.”

“그러니 어서 힘을 길러야 하지 않겠느냐? 난 앞으로도 계속 아픈 몸이다. 다들 그리 알려라.

내가 건강해지면 그들은 또 다시 숨어버릴 것이다. 그러니 내가 아픈 것은 미끼다.

스스로 그들의 야욕을 드러낼 때까지! 영차!”

왕은 지금 나름대로 운동이란 것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체력을 어서 원상복귀

시키기 위해, 그리고 바깥사람들이 모르게 하기 위해 방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었다.

연우는 훤이 힘들지 않게 그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원래도 뜨거웠던 그의 몸이 서서히

더 뜨거워져 가고 있음을 연우의 몸이 느끼고 있었다. 그런 만큼 점점 지쳐가고 있기도 했다.

지쳐가는 것이 민망했던 훤은 또 농담을 던졌다.

“몸에 힘이 솟구치길 바랐더니 이 힘이란 것이 한 곳으로 몰려버린 것 같소. 그대를 안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반응이긴 하지만.”

연우는 이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훤은 덜덜 떨리는 두 다리로 한 번 더 앉았다 일어서서는

자신을 깊이 있는 눈동자로 보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사내만이 알 수 있는 고충을 말하는 것이오.”

그제야 말의 뜻을 헤아린 연우가 붉어진 눈길을 돌리기도 전에 훤이 말을 이었다.

“내 그대에게 궁금한 것이 있소. 어렸을 때, 무덤 속에 들어가기 전까지 혹여 큰소리로

웃어본 적 있소?”

“소녀의 웃음소리가 너무 커서 모친은 손바닥으로 조용히 방바닥을 치곤 하였사옵니다.”

“방바닥을?”

“네, 여자의 웃음소리는 방바닥에 나지막하게 깔려야 한다며······.”

“하하하. 난 그대의 웃음소리가 듣고 싶은데. 큰 웃음소리라면 더 더욱이나 환영이오.

하지만 울기도 많이 하였을 것이오. 툭하면 종아리를 맞는단 말을 들었소.”

“부끄럽게 오라버니가 그런 말도 전했더이까? 많이 맞았사옵니다. 맞아 눈물이 맺힌 채로

이내 웃으며 뛰어다니곤 하였지요.”

그때는 울면 속으로 삼키지 않고 바로 굵은 눈물 덩어리를 끊임없이 쏟아내었다.

소리도 내어 울었다. 하지만 웃고 있는 지금보다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그때가 더 행복했었다.

종아리 맞을 일이 전혀 없었던 염도 간혹 종아리를 맞곤 하였는데, 그 모든 원인이

연우 때문이었다. 그러면 연우는 자신이 맞을 때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더 큰소리로

울었다. 연우가 염의 몫까지 울어버리면, 그는 ‘네가 그리 울면 이 오라버니가 아플 수가

없지 않느냐?’라며 웃어버리곤 했다. 그래서 염은 회초리로 부은 종아리를 하고도 단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었다. 연우 대신 맞는 종아리이기에 마음은 더 편안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연우는 어릴 때 가졌던 궁금함 한 토막을 떠올렸다.

“소녀도 궁금한 것 여쭈어도 되올지요?”

훤은 지쳤는지 더 이상 앉았다 일어서는 것을 하지 않고 숨을 고르며 서서 눈으로 물었다.

“저······, 왜 소녀가 시를 보낸 뒤에 서찰이 없었사옵니까?”

훤의 눈이 놀라 둥그레졌다.

“기다렸소?”

훤은 답하지 않고 연우가 자신의 서찰을 기다렸다는 새로운 사실에 기쁘기부터 했다.

이미 오래전에 만나 나누었어야 할 말들을 지금하고 있는 상황이 서글프긴 했지만,

이렇게 다시 살아서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을 일이었다.

“기다리는 줄 알았다면 서체 연습 따윈 하지 않고 바로 보냈을 것이오. 풍천위가 의외로

의뭉스럽소. 그런 귀 뜸도 않은 것을 보면.”

“소녀는 오라버니가 알게 될까 노심초사 하였는지라, 알게 하지 않았사옵니다.”

“난 그대를 만나면 그대 오라비 험담을 많이 하려 하였소. 그댄 모를 것이오. 내가 봉서를

전해달라고만 하면 보지도 않고 달아나려는 것을 협박까지 해가며 보내었더랬소.”

어린 시절 그때가 생각나 연우는 비로소 환한 미소와 더불어 웃음 띤 말을 했다.

“하루는 퇴궐하여 온 오라버니가 세상 시름을 다 짊어진 듯 보였사옵니다. 연유를 물어보니

눈물만 흘리며 답은 없더니, 한참 만에 내어 놓은 것이 세자저하의 봉서였더이다.”

훤은 연우의 사랑스러운 미소에 가슴이 설레, 그리고 마치 그 장면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 같아 큰소리로 웃었다. 염 또한 어린 나이였었다. 세자가 건네는 봉서를 차마

거절은 못하고 가져가서는, 아무에게도 의논도 못한 채 그가 하였을 고민을 생각하니

불쌍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하지만 크게 웃던 웃음은 차차 사라졌다. 그리고 연우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현재의 염의 모습과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연우는 오라비가 걱정되어 훤을 보며 애원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소녀는 이미 넘치는 행복을 가졌사오니.”

더 이상 뒤의 말을 하게 훤이 내버려두지 않았다. 듣기 싫은 말이 나오는 연우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가로막았다. 짧게 겹쳐졌던 입술이 떨어졌다.

“방금까지의 행복한 마음을 싹 없애는 데에 그대 혀가 가장 큰 역할을 하였으니,

이 정도의 벌로도 모자란 감이 있소.”

또 한 번의 입맞춤이 이어졌다. 이제까지는 차마 느낄 수 없었던 훤의 입술이 이번에는

신비로운 향기로 와 닿았다. 사내의 입안 향기가 달았다. 아마도 양치할 때 썼던

죽염향인 것도 같고, 금가루 향인 것도 같고, 녹차향인 것도 같았지만, 그의 혀끝은 연우의

입 속이 녹아내릴 만큼 단향이 진동했다. 어릴 때 세자가 보내준 줄도 모르고 먹었던 검은

엿보다도 달았다. 연우는 훤의 혀끝 맛에 취해 자신을 안고 있는 그의 팔이 힘에 부쳐

덜덜 떨고 있는 것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은 더욱 느낄 수가 없었다.

팔과 다리에 힘이 빠져 나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면서도 훤은 끝까지 연우의 입술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연우의 두 팔도 훤의 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끝끝내 바닥에 퍼져 앉고 나서야

훤은 입술을 떼고는 민망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수를 오십 가까이 세지 않았소? 방금 병상에서 일어난 몸으로 이 정도를 한다는 것은

보통 힘으론 불가능 한 것이오. 그 어떤 사내가 나만큼 한단 말이오? 상선! 아니 그런가?”

어릴 때처럼 이런 상황에선 자신의 편을 만드는 훤의 버릇이 나왔다.

“네, 그러 하옵니다. 상감마마. 건강한 사내도 불가능하옵니다.”

상선의 도움말이 이번에는 훤의 기분을 으쓱하게 하지 못했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남성의 힘을 말하는데, 내관인 그의 말은 신빙성을 주는데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운이 옆에 없어서 천만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에겐 오십까지의 수는

거뜬하고도 남을 것이기에 그러했다. 그러면서 거칠게 헐떡이는 숨을 연우에게 숨기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이젠 다리에 힘이 없어서 일어서지 못하고, 그 힘없는 다리 사이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앉아있어야 하는 민망한 연우를 팔로 안고만 있었다. 훤의 눈앞에 보이는

연우의 옆얼굴, 숙인 고개에 반쯤 내리깐 짙은 속눈썹이 슬퍼보였다.

부끄러운 듯한 표정까지 슬퍼보였다. 이 슬픈 옆모습은 언제나 운이 보고 있었다.

“앞으로는 절대 그대 혼자 무덤 속에 들어가게 하지 않을 것이오. 우리는 한날, 한시에

죽어 같은 관속에 들어갈 것이니, 무섭지도 않게 하리다.”

고개 돌린 연우의 얼굴이 미소를 보였다. 미소조차 슬퍼보였다. 과거를 회상하던 조금 전의

미소를 보았기에 지금의 미소는 더욱 훤의 가슴을 휘저었다. 그리고 연우는 자신이 보인

미소에 눈동자를 일그러뜨리는 훤을 보았다. 조금 전의 큰 웃음소리를 들었기에 그의 표정이

연우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는 무덤 속이라면, 무서울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가 먼저 죽고 난 세상이 더 무서울 것 같았다. 그렇게 된다면, 그가 먼저 무덤 속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의 시신을 안고 기꺼이 무덤 속에 생매장될 것이리라 생각했다.

“한날, 한시에······, 부디 한날, 한시에······.”

담담히 내뱉으려던 목소리가 눈물이 삼켜진 듯 민망할 정도로 떨리며 나왔다. 그 목소리가

안 되어 보여 훤은 두 손으로 연우의 양 볼을 감싸 쥐고, 목소리가 나온 곳에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입을 통해 들어간 따뜻한 기운이 그녀의 시린 가슴에 스며들어

조금이라도 녹을 수 있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연우의 시린 가슴을 미처 다 데우기도 전에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방문 밖에 있던 내관이 작은 소리로 고하는 말이었다.

“상감마마, 대비마마 드셨사옵니다.”

연우와 훤이 동시에 당황하여 떨어졌다. 그리고 이제까지 숨죽이고 몸을 돌려 등을 보이고

있던 내관들과 궁녀들도 일제히 각자의 자리로 돌아왔다. 훤은 연우를 뒷방에 숨기는 것을

제일 먼저 했다. 그리고 이불 속에 얼른 들어가 누웠다. 그렇게 준비를 끝내자마자 아들을

걱정하느라 핼쑥해진 얼굴로 대비한씨가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연우를 안고 힘든 운동을 한

훤이었다. 그랬기에 얼굴은 땀에 젖어 있었고, 볼은 붉어져 있었고, 숨을 가쁘게 뛰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대비의 눈에는 영락없이 아픈 가련한 아들로 보여, 그만 눈물을 쏟았다.

누워 있는 아들의 옆에 앉아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아들의 손은 너무도 뜨거웠고,

바들바들 떨기까지 했다.

“어째서······나아지기는 커녕, 더욱 나빠져 가시는 것입니까, 주상?”

“그, 그것이······. 죄송합니다, 어마마마.”

어머니의 아픈 마음은 알지만 바른대로 말하지 못하는 훤의 마음도 불편했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드십니까?”

훤이 아파서 죽겠다는 듯한 힘없는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대비는 더욱 힘주어 아들의

손을 잡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상, 그 아이 입니까? 억울하게 세자빈으로 간택되었어도 처녀귀로 눈 감은,

풍천위의 누이가 주상을 괴롭히는 것입니까?”

언뜻 대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훤은 연우의 존재를 들킨 것은 아닌지 지레 깜짝 놀랐다.

“무슨······?”

“그 아이의 원귀가 주상을 괴롭히는 것이지요?”

훤은 대비의 말끝에 연우와 처음 만났던 날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귀신이냐······, 사람이냐······?”

“뭇사람들은 소녀를 일컬어 사람이 아니라 하더이다.”

“그러하면 정녕 귀신이란 말이더냐.”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한 맺힌 넋이 바로 소녀이옵니다.”

진짜 원귀인 것 같았다. 그림자가 있는 귀신도 있느냐고 물었던 것은 그 마음을 몰아내고자

했던 마음이었었다. 그래서 서방님을 기다리다 재가 되어버린 원귀처럼 자신의 손이 닿으면

그녀도 재로 변해버릴 것만 같아서, 마지막까지 그녀의 몸에 손끝 한번 스치지 못하고

일어났어야 했다. 정혼자의 손이 닿아야만 재가 되는 원귀, 월을 건드리면 재가 될 것 같은 느낌,

그것은 월의 정혼자는 훤이란 뜻이었다. 그렇기에 어쩌면 처음 만났던 모르는 그 사이에도

월이 연우임을 무의식은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곳에서 원귀처럼 오지 않을 정혼자를

기다렸을 연우의 넋이 훤의 눈에서 눈물을 만들어 내었다. 그 눈물은 연우가 아니라 대비가 보았다.

“그 아이가 맞군요! 내 짐작이 맞았어. 주상, 우리 굿을 합시다. 마침 실력이 따를 자가

없다하는 성숙청의 장씨도무녀가 돌아왔다고 하니, 그에게 명하여 굿을 합시다.”

“······굿이라니요?”

어리둥절해진 훤은 자신이 지금 꾀병 중인 것도 망각했다. 하지만 대비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 아이를 좋은 곳으로 보내는 굿 말입니다.”

“좋은 곳으로? 연우낭자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굿이겠지요?”

훤의 눈빛이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급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눈빛은 순식간에 심각한

표정으로 바꿔놓았다. 훤의 눈빛이 무서웠던지 대비는 우물거리며 훤을 설득했다.

“주상의 건강이 지금까지 나아지지 않으니, 궐내에서 굿을 한다하여도 유생들의 반발은

그다지 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준비는 대비전에서 할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상소는 못할 테지요. 제발, 허락하여 주십시오. 주상, 이 어미에게 효도한다

생각하시고. 굿을 해야 제 마음이 편안할 것 같습니다.”

“하십시오!”

의외로 순순히 허락해주는 훤 때문에 도리어 대비가 깜짝 놀랐다. 그리고 허락하는 목소리도

대단히 반가운 듯 힘이 있었기에 대비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그렇다고 의아한 생각이 연우가

살아서 옆에 있는 사실에까지 미치지는 못하고, 단순히 원귀에 너무 시달려 반가워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대신, 풍천위의 사가엔 굿 하는 사연은 비밀로 하였으면······.”

“아! 이미 같이 굿을 하자는 서찰을 보내었는데······.”

“어떤 내용으로요?”

“아무래도 주상이 그 아이를 본 듯 말씀하시는 것이 원귀가 옆에서 괴롭히는 것 같다는······.”

점점 화가 치미는 훤의 얼굴 때문에 대비의 말은 꼬리가 슬그머니 없어져갔다.

훤은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을 억지로 내려눌렀다. 그 서찰을 받고 오열하였을 신씨부인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염이 결정적로 연우가 살아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는 민화가 꼭 닮은 이가 바로 대비였던 것이다.

“굿 준비 하십시오, 어마마마. 그리고 굿하는 이유는 원귀를 쫓는 것이 아니라,

저의 강령을 위한 것이라 하여 두십시오. 그리고 전 잠시 누워야겠습니다.”

훤은 즉시 눈을 감아버렸다. 그래서 대비는 아들의 손을 한 번 더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대비가 물러나자마자 훤은 눈을 번쩍 뜨고 이불을 확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히 도무녀를 대령토록 하라! 속히! 어마마마 보다 먼저 가서 데리고 오라!”

화급한 왕의 어명에 내관들의 급한 걸음이 선전관에게 전달되었고,

선전관의 걸음도 급해져 성숙청으로 갔다.

#34

아침, 사랑채의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양명군은 아무 내색 없이 서안 앞에 앉았다. 그리고

방의 바깥 기척을 살피던 그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자리에 앉은 채로 입을 열었다.

“제운, 자네 들어있는가?”

양명군의 등 뒤에 있던 병풍 너머에서 운의 싸늘한 목소리가 답했다.

“송구하옵게도 허락도 없이 숨어들어 있었사옵니다.”

“어명이라도 받자와 온 게로군.”

양명군의 목소리 속에 서운함이 담겨있었다. 옛날 언제나 얼굴을 마주하고 정을 나누던 벗도

이제는 어명이 가운데 끼어들지 않고서는 만나기 힘들어졌다. 그리고 그 벗은 완전한 왕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직책이 운검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뜸함이 서운함이 되고,

그것은 왕에 대한 질투로 변질되었다.

“아직은 출타하시기에 이른 아침이옵니다. 헌데 어디를 다니시다 오신 것입니까?”

운이 왕의 사람으로서 질문을 하고 있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도 양명군의 입가엔 씁쓸한

미소가 잡혔다.

“내가 생각 없이 쏘다닌 것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닌데 그 질문은 서운하네, 그려.”

“걱정되기에 무례한 말씀을 올렸사옵니다. 죄송하옵니다.”

“자네가 걱정하는 것이라고는 기껏 상감마마뿐이 아니겠는가?”

“하오나 현재로선 소인이 걱정되는 것은 양명군이십니다.”

양명군은 입술 끝에 잡은 씁쓸한 미소를 버리고 서안 끝을 손으로 힘껏 잡았다. 숨어 있는

운의 손을 대신한 것이었다.

“숨어 들은 연유가 무엇인가?”

“서안 서랍에 이미 두었습니다.”

양명군은 서안 서랍을 열었다. 그곳엔 왕이 보낸 봉서가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긴 한숨만을

쉬었을 뿐 봉서를 뜯어보지 않고 물끄러미 쳐다만 보았다. 그리고 깊은 상념을 떨쳐내지 못하는

손길로 귓불의 세환귀고리를 만지작거렸다.

“시름을 달래시려다 귀고리가 먼저 닳겠사옵니다.”

눈길이 닿아 있지 않아도 마음은 닿아있기에, 보지 않고도 양명군의 버릇을 보고 있는 운이었다.

양명군은 운의 마음에 위로를 받은 것인지 펼치기 괴로운 봉서를 뜯어 천천히 펼쳤다.

글을 읽어 나가는 그의 눈동자가 어둠으로 변한 것은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

끝까지 다 읽은 서찰을 서안 위에 무겁게 내려놓은 그는 더 이상 한숨으로 감정을 뱉어내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눈길은 글자를 좇아 의미를 되새겼다.

“상감마마께오선 기어코 나를 사지로 밀어 넣겠단 것인가?”

양명군의 목소리엔 절망이 있었다. 그리고 슬픔도 있었다. 그 슬픔을 짓이기듯 왕의 서찰을

힘껏 손 안에 구겨 쥐었다. 구겨 잡은 그의 손이 자신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르르 떨렸다.

“제운! 살아 곁에 있는가? 풍천위의······?”

운은 양명군이 염의 누이인 연우를 묻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운의 입은 아무 말이 없었다.

“살아있었어. 그 여인이 연우낭자가 맞았구나! 상감마마의 곁에······.”

양명군의 입술이 뒤틀렸다. 첫사랑의 그녀가 살아 있었던 것이 확실해진 기쁨보다 그에겐

그녀가 왕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 더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더 이상 과장된 웃음소리는

나오지 않고 뒤틀린 감정만이 목소리에 담겼다.

“훗!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제나 상감마마의 것이지. 그리움조차 그렇지. 나 또한 같은

그리움을 품었었다네. 배는 다르나 한 아비의 아래에 태어났음에도 어찌 세상의 모든 것은

상감마마만의 것인가? 어찌하여 작은 비의 한줄기조차 내게 나누어주지 않는 것인가?”

병풍의 어두움에 파묻힌 운의 마음도 어두워졌다. 운은 비를 그리워한 적이 없었다.

양명군이 들떠 설쳐댔기 때문이었는지, 직접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애당초 다른 신분이라 마음을 닫아버렸던 탓이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연우란 여인은

그저 벗의 누이에 불과했었다. 가끔 전해 들었던 소식에 가슴이 설렌 적은 있었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운이 그리워한 것은 아주 작은 달빛 한 조각에 불과했다.

그 달빛이 빗물이 되어버렸을 뿐이었다.

“제운, 자네는 나에게 검을 겨눌 수 있는가?”

양명군의 물음에 구름은 말없이 하늘 위를 흘러만 가고 있었다. 그리고 병풍 뒤의 운의 기척은

어느 사이엔가 사라지고 없었다.

운이 본가에 도착하자 하인들이 달려 나와 허리 숙여 그를 맞았다. 운은 말의 고삐를 하인에게

건네준 뒤 곧장 안채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 안에서 운이 온 것을

박씨부인에게 알리는 여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운의 힘 있는

걸음소리 때문이었는지 뜰 쪽으로 난 안방의 방문이 활짝 열렸다. 방안에는 나이는 들었지만

여인답지 않은 기골을 가진 박씨가 운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운이 안방 앞의 뜰에

서기도 전에 어느새 그곳엔 하인들이 멍석을 깔아놓고 있었다. 그는 멍석 위에서 박씨를 향해

큰 절을 올렸다.

“마님! 새해 들어 처음 뵙습니다.”

운의 목소리를 들은 박씨의 표정은 싸늘하게 된 채로 그가 아직 고개를 들기도 전에 열었던

방문을 다시 닫아버렸다. 운은 고개를 숙인 채 닫혀 지는 방문의 소리를 들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안방으로 들어갔고, 그의 뒤에선 멍석을 말아 챙기는 하인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방문을 닫고 박씨와 단둘이 되자 운은 다시 한 번 큰절을 올렸다.

그제야 비로소 박씨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운이 서자로서 올리는 절이 아닌, 자식으로서

올리는 절만이 그녀가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추운데 이리 가까이 오너라.”

운은 큰 키를 일으켜 그녀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늠름한 그의 모습이 자랑스러운 듯 박씨의

미소는 한층 짙어졌다. 운은 품속에 있던 왕의 봉서를 꺼내어 박씨 앞에 내밀었다.

“상감마마의 밀서입니다.”

그녀는 그것에 눈길도 보내지 않고 집어서 옆의 서안 서랍에 넣었다.

“젊은 임금께서 다 늙은 나에게 연서를 보낸 것은 아닐 터이니. 하하하!”

그녀는 왕이 보낸 밀서가 자신에게 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은밀한 내방을

통해 어딘가로 건너갈 밀서로 인해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왕이 아니라 운이었다.

“몸조심 하거라.”

그녀의 걱정 어린 눈길이 상념이 깃든 운의 진한 눈썹에 머물렀다.

“우리 운이가 무언가 속상한 일이 있는 것이냐? 오랜만에 찾은 네 모습이 달라 보이는구나.”

“아닙니다.”

운의 부정에도 그녀는 의심의 눈초리를 놓지 않았다.

“널 힘들게 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왕이라 하여도!”

그녀의 눈빛이 운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운은 상처받은 자신의 마음까지 뚫어보는 것 만

같은 그녀의 눈빛을 피하여 고개를 떨어뜨렸다.

운을 친 자식처럼 키워준 박씨부인은 무인집안에서 무인의 피를 받아 태어난 여장부였다.

그런 집안의 힘으로 남편을 오위도총관까지 끌어올린 것이었다. 하지만 도총관은 은혜를

버리고 장안 제일의 난봉꾼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거느린 여인은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지만, 박씨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평생토록 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운을 낳아준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유일한 아들,

하지만 그 아들에게서 결코 들을 수 없는 말 ‘어머니’. 운이 내뱉는 ‘마님’이란 말은

도총관의 계집질보다 더 큰 상처가 되어 가슴 한구석을 부서뜨렸다. 박씨는 눈길만으로도

쓰다듬기 아까운 가엾은 아들을 향해 조용히 중얼거렸다.

“우리 운······, 아깝구나.”

운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박씨를 보았다. 이따금씩 버릇처럼 그녀가 내뱉는 말이었다.

그녀는 눈가 주름 속에 안타까운 눈물을 숨기며 말했다.

“밤을 꼬박 새우고 이리 나온 것인가 보구나. 상감마마께옵서 너를 총애하는 것은 감사하지만······.

여전히 당하관에서 올라가질 않으니, 휴! 이제껏 운검직에 있었던 자들 중에 당하관은 네가

유일할 것이다. 그 서자란 신분이 무어라고 승급도 못해주는 것이냐······.”

“서자의 몸으로 지금 상감마마를 뫼옵고 있는 것이 더 영광입니다.”

“사내란 것들은 참으로 어리석지. 여인이 개가하면 자식이 금고를 당하는 것과 똑같이 첩에게서

보는 서자도 금고를 당하는 것은 마찬가지일진대, 자신들의 손으로 그 법을 만들어 놓았으면서

오히려 여인들 보다 더 그 법을 따르질 않으니. 참으로 어이없는 족속들이야.

······미안하구나, 운아. 내가 널 낳아주지 못해서.”

운은 미동 없이 어머니라 부를 수 없는 여인을 보았다. 그녀에게서 태어났다면 서자가

아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어쩌면 연우란 여인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호기심이란 것을

가졌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면 왕보다 먼저 그녀를 알게 되었을 것이고, 좀 더 먼 옛날부터

그녀를 생각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를 향해 당당한 미소를 보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들킬세라 혼자만의 감정으로 숨기고 또 숨기지 않고,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박씨를 향해 속으로만 삭이며 불러보지 못했던 어머니란

말도 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운의 나이 6살, 처음으로 본가에 온 그를 박씨는 차갑게 맞았다. 남편의 애첩에게서 난 자식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어미가 덜렁 아들 하나 두고 덧없이 죽어 오갈 때 없어졌기에,

여인의 덕행이란 강제로 인해 마지못해 데리고 온 아이였을 뿐이었다. 어미가 살아있을 때도

버려진 듯 살아온 아이란 것을 들었지만 연민이란 감정을 느끼진 않았다. 단지 꾹 다문 입술이

단 한마디의 말도 흘리지 않는 것을 보고 벙어리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또릿한 눈빛이

아깝다고 느꼈다.

운은 어미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아이였다. 장안에 이름 높은 명기가 어미였지만

그녀의 냉대 속에 자랐기에 가슴에 들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어미의 인생을 망친,

태어나서는 안 되는 아이가 자신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만난 박씨의 차가운

눈빛조차 운에겐 어미의 눈빛보다는 따뜻하게 느껴졌다. 얼굴도 잘 모르는 아비란 사람의

집에 오게 된 운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기껏 할 수 있었던 것은 하인들과 같이 일을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운이 자신의 키보다 더 긴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고 있을 때였다. 지나가던 박씨가

그것을 보고는 곧장 다가와 운의 뺨을 때렸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지만, 운은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이전에도 어미란 여인에게 곧잘 당하던 것이기도 했지만, 박씨의 손은 그녀보다

매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가 너에게 이런 일을 하라더냐!”

“죄송합니다.”

박씨는 처음으로 들은 운의 목소리 때문에 깜짝 놀랐다.

“벙어리가 아니었구나.”

그녀는 뺨을 맞고도 표정 변화가 없는 아이가 가엾어 보였다. 우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 같았다.

“뺨을 맞았으면 눈물을 흘려야 한다. 네 나이의 아이는 그래야 정상이다.”

운은 박씨가 하는 말의 뜻을 알지 못해 눈망울을 굴리며 쳐다보았다. 그녀는 왠지 정이

들것만 같은 아이의 눈빛을 피하려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일할 하인이 부족해서 널 데려온 것이 아니다. 비록 반쪽 핏줄이긴 하나, 도총관의 핏줄이 아니냐.

하인들과는 몸가짐을 달리 하거라.”

“······네.”

박씨는 가려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발을 멈춰 운을 향해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것이 있느냐?”

운은 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답하지 않는 운을

대신해서 박씨가 답을 주었다.

“혹여 글은 아느냐?”

“모릅니다.”

“배우고 싶으냐?”

“네.”

“천자문 정도라면 내가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나라도 괜찮다면······.”

“감사합니다!”

박씨는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하지만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을 알지는 못했다.

운에게 천자문을 가르치기로 한 것이 실수였다는 것은 오래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너무나도 영리했다. 그래서 언젠가 세상과 만나게 될 서자로 태어난 아이가 가련했다.

가련한 마음이 깊어질수록 운을 탐내는 마음도 길어졌다.

“아깝구나······.”

글을 배울 때마다 이따금씩 박씨가 중얼거리는 말을 운은 들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서자로 태어난 것이 아깝다란 뜻으로만 이해했다. 운이 천자문을 다 배워갈 때쯤에 본가에

한 사나이가 찾아왔다. 키가 크고 강한 눈매의 검은 옷으로만 무장한 남자였는데,

운은 그의 힘 있는 등 뒤에 메고 있는 긴 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다가가 검의 끝을 잡았다. 갑자기 잡혀진 검 때문에 화들짝 놀란 것은 그 사나이였다.

눈 깜박할 사이에 몸을 돌린 그는 손으로 운의 턱을 잡아챘다. 사나이의 큰 손에 잡혀진

운의 얼굴은 절반이상이 가려진 채 눈동자만 보였다. 놀라지도 굴하지도 않는, 아이답지 않은

심지 깊은 눈동자였다. 그리고 그 눈동자에 매료된 사나이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도 망각한 채

운의 눈동자만 보고 있었다.

“무엇하는 짓이냐! 운에게서 손 떼지 못하겠느냐?”

화가 난 듯 소리치는 박씨의 목소리에 그 사나이는 정신이 든 듯 운의 턱을 놓아주었다.

“누님!”

박씨는 운을 자신의 치마 뒤로 숨기며 그 사나이를 향해 말했다.

“어느 누구도 내 허락 없이 운에게 손을 댈 수 없다!”

그는 어느 사이엔가 변해있는 박씨를 보았다. 그녀는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누님이 저를 부르신 연유가 이 아이 때문이었군요.”

그는 그녀의 치마너머에서 고개를 빼고 자신을 보고 있는 운을 다시 한 번 쳐다보고는 거친

발걸음으로 흑목화를 벗고 안방으로 먼저 들어가 버렸다. 박씨는 운을 향해 자애로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운아. 저 검이 마음에 드느냐?”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마음에 드느냐?”

“······네.”

처음으로 무언가에 흥미를 가진 운이 박씨에겐 작은 기쁨이 되었다.

“저 검은 운검이란 것이다. 언젠가 꼭 네 손에 쥐어주마.”

운은 운검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지만 박씨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방안에 들어서는 박씨를 향해 이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나이가 감정을 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인 자형의 애첩의 배에서 난 놈입니다!”

박씨는 서글픈 눈매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저 놈이 날 배를 지가 골라 났겠느냐? 나에게 오고파도 내 배에 터를 잡을 수 없어 다른

배를 빌어 난 게지.”

“누님! 그러면 왜 저에게 그리 슬픈 눈을 보이십니까?”

“내가 슬퍼 보이느냐? 그러면 그것은 네 자형 때문이 아니라, 저 아이를 내 배로 낳지 못한

슬픔으로 인한 것이다. 내가 널 부른 이유는 네가 저 아이에게 힘이 되어주길 바래서다.

도와다오.”

사나이의 짙은 눈썹 사이가 심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의 누님을 저버린 자형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을 훤히 읽고 있던 박씨가 미소로 말했다.

“운검대장 자리에 있는 사내의 속이 그리 옹졸해서야, 원. 어차피 네 녀석도 그 놈에게

반하지 않았느냐?”

“······훌륭한 눈빛입니다.”

“훌륭한 것은 비단 눈빛만이 아니다. 그 아이의 골격 또한 더 없이 훌륭하다.

아마도 자라면 다른 놈들 보다 머리통 하나 정도는 더 클 것이야.”

“큰 키에 날렵한 몸매로 클 골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검에는 더 없는 체격을······.

설마? 누님!”

운검대장은 박씨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명확하게 알아차렸다. 운에게 검술을 익히게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조선에서 검술이 뛰어난 자가 오를 수 있는 곳은 운검이란 자리뿐이었다.

하지만 운검은 당상관의 귀족이 아니면 결코 맡을 수 없는 직책이기도 했다.

“욕심이 과하십니다.”

“넌 그 아이에게 검술만 가르치면 된다. 다른 것을 부탁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서자입니다! 그 아이에게 욕심을 내시면 누님의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늦었다. 이미 그 아이로 인해 울고 웃게 되었으니. 뱃속에 열 달을 품어야만 지 새끼가

된다더냐? 난 그 아이가 세상에 나가기 전의 수십 달과 수년을 내 품에 품어 그 아이를

낳아갈 것이다.”

“세상은 서자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영리하면 할수록 더욱 그 아이를 할퀴려 달려들 것입니다.”

“내 몸도 같이 할퀴어지면 될 것이다. 그러면 상처도 그 아이 반, 내 반 나눌 수 있을 것이니

그만큼 상처도 빨리 아물지 않겠느냐? 난 내 날개를 뜯어 붙여주더라도 그 아이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구나.”

박씨의 애원에 굴복한 것인지, 아니면 운검대장의 마음도 운의 눈동자에 빼앗겨 버린 탓인지

한참동안 고민하다가 체념한 듯 말했다.

“제가 홍문관대제학께 보낼 서찰을 써드리겠습니다. 먼저 그분께 학문을 익히게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검술은 그 다음입니다. 누님은 친히 속수(옛날 제자가 처음으로 스승을 뵐 때

가지고 가던 예물)를 준비하여 주십시오.”

“홍문학대제학이라······. 그의 고매한 인품은 내방에도 들려올 정도니 운이를 맡기기엔

더 없는 것 같구나.”

“인품도 인품이지만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서자도 차별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분의 자제와 좋은 벗이 될 듯해서 입니다.”

박씨는 동생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퉁명스럽게 말하긴 하지만 오히려 자신보다 더 운을

배려해 주고 있는 마음이 고마워서였다.

“대제학의 내부(아내)가 신씨부인이라 했던가? 그 여인은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기에

그런 분과 연을 맺었을꼬.”

“부럽습니까?”

“그 여인을 부럽다 아니하는 내방 여인이 있는 줄 아느냐?”

“그나저나 누님. 그 다음은 어쩌실 것입니까? 검술을 가르치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은? 익힌 검술을 어디다 쓸 수 있겠습니까?”

“우림위(羽林衛)가 있질 않느냐?”

우림위! 이것은 내금위(內禁衛), 겸사복(兼司僕)과 더불어 국왕의 경호부대인 내삼청(內三聽)의

하나로, 내금위와 겸사복이 의관자제들로 구성된 것과는 달리, 우림위는 지배계층의

첩의 자손들을 위해 설치한 부대였다. 이곳에만 들어가게 된다면 왕의 눈에 들게 될

가능성도 높았기에 박씨는 그것을 노리고 있었다.

“이제껏 운검은 내금위에서만 뽑았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차후에 논할 일이다. 다행히 운이 내가 생각하는대로 자라준다면 고민은

나의 몫이 아니라 국왕의 몫일 것이다.”

운검대장은 실제로 얼마가지 않아 앞으로 왕이 될 세자가 고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운은 눈빛과 골격보다도 자질이 더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며칠에 한번 꼴로 밖에

가르치지 않는데도 전생에도 검을 쥐었던 자가 확실하리라 여겨질 만큼 검술을 흡수하는

속도가 빨랐다.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지나치게 말이 없어 귀엽지 않다는 점뿐이었다.

운검대장은 운을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박씨보다도 운을 운검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것은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운이 운검을 잡지 않는다면 그것은 왕에게

그만큼 위협이 될 것이란 예감 때문이었다.

별다른 질문이나 말이 없던 운이 검술을 배우고 난 어느 날, 문득 운검대장에게 말했다.

“스승님. 운검이 무엇입니까?”

“어떤 운검을 물어보는 것이냐?”

“······모르겠습니다. 여러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나의 등에 있는 검도 운검이고, 나를 일컬어서도 운검이라 한다. 어느 쪽이 궁금한 것이냐?”

“둘 다 궁금합니다.”

운검대장은 큰 소리로 웃으며 운을 힘껏 끌어안았다. 사람에게 안겨본 적이 없는 운으로서는

그의 포옹이 당황스러웠지만 아무 말 없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가슴이란 것이 어쩌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막연히 생각해보았다. 운의 외로움을 알아챈 운검대장은 더욱 힘껏

그를 안았다.

“넌 내가 뭐하는 놈인지도 모르고 검을 배우고 있었느냐?”

“마님의 동생이신 것만으로 저는 충분합니다.”

“성격 나쁜 나의 누님이 좋으냐?”

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박씨가 좋지만, 그런 말은 하면 안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스승도 좋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운검대장은 운을 품에서 놓으며 그의 눈동자에

자신의 눈동자를 바짝 붙이며 말했다.

“운아! 내가 짊어진 검은 운검. 상감마마의 보검이란다. 그리고 나는 상감마마를 호위하는

무사, 운검이란다. 운검은 나와 더불어 모두 다섯이고 그중에 내가 맡고 있는 것은 운검대장이다.

지금 내가 너에겐 그저 검술만을 가르치고 있긴 하지만, 언젠가 너에게 꼭 운검술을 가르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운검술은 다릅니까?”

“다르다마다. 일반검술은 자신만을 지키는 것이지만 운검술은 왕을 지키기 위한 검술이니

많이 다를 수밖에. 왕은 궁술은 익히지만 검술은 익히지 않기에, 운검들은 유사시에 운검을

잡은 오른 손은 왕의 손이 되어야 하고 별운검을 잡은 왼손은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한단다.

운검과 별운검은 길이도 다르고 무게도 다르기에 두 검을 이용한 쌍검법은 더욱이 어려운 것이다.

운아! 만약에 나를 좋아한다면, 나의 누님을 좋아한다면 너에게 운검술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다오. 네가 운검이 되지 못하면 가르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단다.”

“제가 운검이 된다면 마님께서 기뻐하실까요?”

“아니! 네가 운검이 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이 운검이라면,

그래서 그것을 네가 이룬다면 기뻐하실 것이다. 중요한 것은 네가 검술이 좋은가 하는 것이다.”

운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네. 재미있습니다.”

처음으로 보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운검대장은 다시 한 번 운을 힘껏 끌어안았다.

“넌 나의 누님을 많이 닮았구나. 필시 누님에게 오기 위해 다른 배를 빌어 태어난 것일 게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그들만의 것이었다. 세상은 운을 서자의 신분에 묶어 두었다.

비록 뼈와 살은 다른 이에게 받았으나, 정신과 영혼은 박씨가 만들어 준 것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녀에게 어머니라 부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깝구나.”

운은 박씨가 옛날부터 중얼거리던 말의 의미를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했다. 단지 서자로서의

운의 처지를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운을 낳지 못해 아깝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박씨는

어느덧 청년이 되어있는 아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분명 네게 힘든 일이 있는 것이구나.”

“아닙니다. 상감마마의 은혜가 하해와 같아서·····.”

운은 박씨의 걱정 어린 마음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만두고 싶어도 운검직을

내어놓을 수도 없었다. 박씨를 위해서도 상처 난 마음을 얼음으로 꽁꽁 얼려 감각을 무뎌지게

해야만 했다. 그리고 왕과 월이 나누는 행복한 미소를 바라보아야만 했다.

“제가 상감마마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 운이는 죄를 지을 놈이 아니다. 단지 대쪽과도 같은 너의 마음이 틈을 주지 않았을

뿐일 테지. 상감마마께옵선 너의 죄를 탓하시더냐?”

“아닙니다.”

“너를 알아보고 옆에 두었던 분이다. 그분께서 죄를 묻지 않는다면 네 스스로도 너의 죄를

묻지 말아라.”

운은 가만히 고개만 숙였다. 그리고 박씨를 만나게 되면 절대 운검직을 그만둘 수 없을 것이란

계산을 한 왕의 속셈도 알게 되었다. 왕은 운보다도 더 운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박씨의 눈에는 운의 상처가 확연히 보였다. 덜어 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옛날의 마음은

내방에 박힌 여인의 아집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운의 상처로 인해 알게 되었다.

“널 세상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었는데, 세상의 시름은 나를 속이고 내 눈 뒤로 돌아

널 눈물짓게 하고 있는지 몰랐구나.”

아마도 그녀가 지켜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운은 없었을 것이기에, 이제는 자신보다도

더 작아져버린 그녀 앞에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다. 그리고 운은 어느새 궁궐로 돌아가

부딪히게 될 일들을 머릿속에서 점검하고 있었다.

#35

방안에 넋을 잃은 채 우두커니 앉아만 있는 염의 책은 오랫동안 한곳만 펼쳐져 있었다.

며칠째 계속 그 쪽이었다. 그의 사라진 넋은 어둑해져 책의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 사내종이 조심스럽게 들어와 촛불을 밝히고 나가는데도

아무 기척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염은 책에 열중해 있으면 누가 방안에 들었다 나가는 것을

못 느끼기에 사내종은 염이 평소와 같다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사내종이 나간 뒤,

염은 초점 없는 눈길을 들어 흔들리는 촛불을 보았다. 그 불꽃 속에는 죽은 어린 연우를

안고 있는 아버지의 등이 보였고, 힘없이 떨어져 있던 누이의 작은 손이 보였다.

그리고 염의 뒤에는 임종 직전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젓다 연우를 부르며 죽어간 아버지가 있었다.

맺힌 한이 사무쳐 감지도 못하고 죽어간 아버지의 두 눈을 덮었던 자신의 손이 있었다.

염은 아버지의 한이 닿았던 자신의 손바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아버지, 연우가 살아있습니다. 이 오라비에게 오지도 않고 살아 있습니다. 혹여 저 세상에서

아직도 연우를 찾아 헤매십니까?’

염은 아버지의 뜬 눈이 닿았던 손바닥에 자신의 눈을 대고 눈물을 흘렸다. 연우가 살아 있는

것을 알고, 어디 있는지도 아는데 볼 수는 없는 마음이 그의 심정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그의 입술만 이에 짓눌려 멍들어 가야만 했다.

“작은 불꽃이라도 타올라야 어둠을 조금이나마 밝힐 것인데······, 세상엔 타오르지

못하는 불꽃도 있군요.”

문득 들려오는 설의 목소리에 염은 고개를 들었다. 언제 어느 틈에 들어왔는지 설은 먼발치의

방구석 어둠에 몸을 숨기고 앉아 있었다. 자객의 칼에 다친 어깨를 묶어 옷 아래에 숨기긴

했지만, 아직은 움직이면 안 되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염을 훔쳐보러 나온 것이었다.

“도련님의 상심이 깊어 보여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무에 그리 슬픈 것입니까?”

“설······? 너로구나. 갑자기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지는······. 외람된 질문일지

모르겠지만 이전에도 간혹 이곳에 왔었느냐?”

설은 염의 의심 섞인 눈빛을 보았다. 그가 하고 있는 의심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기에

답 없이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았다. 그리워한 거리보다 그의 얼굴은 더 멀리 있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그의 조용한 음색은 설을 묘하게 들뜨게 했다. 설은 천천히 염의 곁으로 다가갔다.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리는 아픈 상처자국이 그녀의 이마에 깊은 주름을 만들어 냈지만,

염은 어두운 불빛 탓에 알아채지는 못했다. 가까이 다가가 앉은 설에게로 염의 난향이 덮쳐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이윽고 들려온 염의 말이 설의 정신을 더욱 혼미하게 만들었다.

“네가 지금 모시고 있는 주인이 예전의 주인이냐?”

“······그 물음을 위해 가까이 다가와 앉으라 하시었습니까?”

“말해다오. 어떻게 된 것이냐?”

“쇤네가 무얼 알겠습니까? 돌아가신 주인어른께서 쇤네를 팔았고, 쇤네는 팔려간 것 외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어디로 팔려갔던 것이냐? 우리 연우가 간 곳과 같은 곳이 아니겠느냐?”

설은 그가 느끼는 슬픔을 고스란히 가슴에 담았다. 가엾게도 그가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어디에 있었느냐? 언제부터 경북궁 안에 있었느냐? 너와 같이 있었느냐?”

“같이 있었습니다. 그 이상은 묻지 말아주십시오.”

완강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 이상 다그쳐 묻지 못하고 염은 가만히 설을 훑어보았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 못하는 연우를 그동안 같이 있었다는 설을 통해 대신 보고자 했다.

향기 없는 눈꽃은 난향을 묻혀 전하고 있었다. 설은 염의 의도를 뻔히 알고 있음에도

그의 섬세한 눈길에 몸이 달아올랐다.

“우리 연우가 널 보낸 것이었나? 내 소식을 듣고파서?”

울먹이는 염의 목소리였다. 설은 물기어린 그의 눈동자를 보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다.

“제 의지였습니다. 제가 보고파서였습니다.”

염의 슬픈 표정이 멈췄다. 그리고 무슨 뜻인지 묻은 표정으로 설을 보았다. 연우가 아닌

설을 보는 그의 눈은 서운하리만큼 감정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설의 눈길은 그의 눈동자를

외면하며 입술로 흘러들었다. 마치 염의 입술을 처음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리고 사내의 입술도 색기라는 것을 머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정하고 청렴하기에

더욱 짙은 향기가 느껴졌다.

“무엇을 보고 있느냐?”

설은 염의 입술이 움직이자 화들짝 놀라 눈길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자신의 음탕한 생각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쇤네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죄송합니다.”

“사람이 사람 얼굴을 보는데 뭐가 그리 죄송하다고.”

설은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려 이마를 구기며 말했다.

“참으로 야속하신 분이십니다. 쇤네더러 사람이라니······.”

염의 눈이 둥그러졌다. 설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또 다시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넌 언제나 알 수 없는 말만 던지는구나. 내가 널 사람이라 하여 야속하다니.”

설은 고개를 들어 그를 원망스럽게 보았다. 차라리 그가 야비한 사내였다면, 그의 인품이

조금이라도 낮았다면, 그가 하녀조차 인격으로 대하지 않았다면 일찌감치 마음을 접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움켜잡고 놓아주지 않는 그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느냐? 내가 혹여 네게 잘못이라도 한 것이냐?”

미안한 듯 조심스러운 염의 목소리가 도리어 설을 화나게 했다.

“의빈이십니다! 그러니 하찮은 저 같은 것에는 그 어떤 짓을 하더라도 잘못일 수가 없습니다.

저 같은 것이 감히 의빈이신 도련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매질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잘못한 것인지 물으시는 것입니까? 왜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변함없이······.”

자꾸만 튀어나오는 그를 향한 마음이 설을 슬프게 했다. 불빛조차 어두운 방안에 단둘만

앉아 있기에 더욱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다. 조금만 용기 내어 향기로운 그의 품에 뛰어들고 싶었다.

나중에 죽임을 당하더라도 옷고름을 잡아당겨 그를 범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처참한 죽음도

아름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설은 자신의 아름답지 못한 몸을 떠올렸다. 옷깃 아래로 떨어져

들어간 염의 고운 목덜미가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상처로 흉측해진 자신의 몸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설은 원망스런 눈길을 촛불로 옮겼다. 어두운 불빛일망정 촛불이 꺼진다면

어쩌면 상처로 얼룩진 자신의 몸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급한 욕정이 입으로 하여금 바람을 일으켜 불을 끄게 만들었다. 갑자기 꺼진 촛불에

염이 당황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옷고름을 잡아당기는 설의 손동작에 깜짝 놀라 말했다.

“잠깐! 무얼 하려는 것이냐?”

“도련님, 부디 쇤네를 내치지 말아주십시오.”

“가,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인지 말해다오.”

“오랫동안 도련님의 숨결을 탐하였습니다. 하여 단 하룻밤이라도 도련님의 숨결을

나누어 받고 싶을 뿐입니다.”

염이 차분하게 당황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어두운 달빛 아래에 설에 대한 가엾은 눈빛을

보내왔다. 그 눈빛의 청아함에 설의 몸은 부끄러움으로 뒤덮였다. 그래서 더 이상 옷을 풀어

헤칠 수가 없었다.

“나는 대의도 명분도 없는 헛 사내다. 어찌하여 이 나를 품었느냐.”

그의 목소리가 슬펐다. 설을 감싸 안는 그의 배려가 더 슬펐다. 그래서 설의 목소리는 더욱

퉁명스러워졌다.

“전 천하고 무지하여 대의가 무엇인지 명분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마음을 거두어라. 난 네가 마음에 품을 이유도, 필요도, 가치도 없는 사내다.”

“이유도 제 마음이 만든 것이옵고, 필요도 제 마음이 원한 것이옵고, 가치도 제 마음이

매기는 것입니다. 차라리 저의 목숨을 거두라 하십시오.”

한번 드러낸 마음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드러낸 설의 사랑에 염의 눈빛은 애정이 아닌

연민만을 보였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감히 의빈을 마음에 품은 여종을 탓하지 않고 그 마음을

몰라 준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나누어 받고자 했던 염의 숨결은 한숨이 되어 조용히

방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하룻밤 만입니다. 쇤네를 가엾게 여기신다면······.”

“그러기에 더욱 안 되느니라. 마음 없는 사내의 몸은 네 마음을 저버리는 것이다.”

“숨어살겠습니다. 영원히 도련님의 눈앞에 나타나지도 않겠습니다. 한번만이라도 안아주십시오.

마음이 없다 해도.”

설의 애원이 방안의 어둠과 뒤엉켜있었다. 하지만 염의 태도는 단정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가 타이르듯 말했다.

“나에겐 친한 벗이 둘 있다. 그들은 모두 서자로 태어나 살아가고 있지. 내 그들의 슬픔을

아는데, 벗 된 도리로 어찌 그와 같은 슬픔을 또 만들겠느냐.”

열 여자 마다할 사내는 없다고 했기에 그의 단정한 태도는 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 그의 속마음을 물었다.

“단지······그뿐입니까?”

“난 한 여인의 지아비다.”

“제가 무슨 야망이 있어서 대감 마나님 자리를 탐하겠습니까? 전 소실 자리를 원하는 것도,

천첩 자리를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 하룻밤입니다.”

“여인에게만 정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내에게도 마음이 이끄는 정절이란 것이 있는 것이니.”

설의 손에 주먹이 쥐어졌다. 자신의 불안함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어렵사리 물었다.

“마음이 이끄는 정절이라 함은······, 공주자가를 일컫는 것입니까?”

그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곧은 눈으로 말했다.

“비록 나라에서 정해준 연이지만, 오랫동안 부부의 인연을 맺었고, 그 인연이 정이 되고

또한 사랑도 되었구나. 그리고 대의도 명분도 잃은 나를 살게 하여 주었다. 그러니 마음을

접고 너도 좋은 인연을 만나도록 하려무나.”

설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 흘러내렸다. 염에게 거절당한 마음이 슬퍼서가 아니었다.

공주를 사랑하고 있다 말하는 그의 마음이 가엾어 견딜 수가 없었다. 많고 많은 여자들 중에

자신의 대의와 명분을 앗아 가버린 여인을 사랑하고 있는, 그리고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염의 사랑이 불쌍했고, 그의 부질없는 정절이 불쌍했다. 이젠 연우가 살아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기에 머지않은 미래에 그가 느껴야 할 절망이 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는 점점 높아져갔고, 염은 숨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단지

미안한 생각에 울음을 멈추라고 하지 않았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운은 다시 입궐하여 훤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왕에 대한 예를 끝마치고도

오랫동안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비록 들지 않아 보이지 않는 표정이긴 했지만 훤은 졸였던

마음을 쓸어내렸다. 놓아주기 싫은 신하가 다시 돌아와 있었다. 아직은 슬픈 입매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박씨부인에게서 나누어받은 강한 의지는 슬픔을 가릴 여력은 가지고 있었다.

훤이 미소로 말했다.

“돌아왔구나.”

운은 움직임 없는 고개 숙인 그대로 기운으로만 반갑게 인사를 받았다. 하룻밤 사이 놀라울

정도로 건강해져 있는 왕의 모습이 더 반가웠다.

“어명을 받잡았사옵니다.”

“정경부인 박씨를 믿기에 그리 한 것이다. 내 비록 자네의 어미를 직접 보진 못하였으나,

너 같은 신하를 만들어 낸 여인이라면 그 어떤 신하보다 믿을 만 한 것일 터이니.

어차피 박씨는 왕인 내가 아니라 아들인 너를 위해 움직일 것이다.”

운은 고개를 들어 왕을 보았다. 하얀 야장의를 입은 왕이 벗의 눈으로 운을 보고 웃고 있었다.

왕 또한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훤에게 운은 단순한 신하가 아니었다.

그 마음이 미소에서 느껴졌다.

“운아, 나는 남녀 간에만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친구 간에도,

그리고 군신 간에도 운명이 있지. 널 처음 만났던 날, 난 친구로 신하로 운명을 느꼈다.”

운은 긍정하는 눈빛으로 훤을 마주 보았다. 내삼청의 훈련 도중에 갑자기 행차했던 훤은

수백 명이나 되는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 군사들 가운데에 유독 운에게만 눈이 고정되어 있었었다.

그때의 마음이 새롭게 떠올랐다.

“운······. 구름······.”

훤은 낮게 읊조리며 닫힌 창문 너머에 흘러가는 구름을 보듯이, 구름 너머의 더 먼 곳을 보듯이

창 쪽으로 먼 시선을 두었다.

“너는 무슨 연유로 왕의 측근무사를 운검이라 하는지 아느냐?”

“모르옵니다.”

“환웅······.”

훤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운을 보았다. 운은 무표정하게 왕을 보았다.

“환웅이 하늘에서 조선 땅으로 내려오실 때 운사, 우사, 풍백 등을 거느리고 오셨지.

하지만 풍백과 우사는 먼저 하늘로 돌아갔지만, 마지막까지 조선 땅에 남아 환웅을 지킨

신하가 바로 운사! 그렇기에 왕을 보필하는 것은 대대로 구름이 아니겠느냐?

나의 구름은 너 뿐이다. 그러니 널 놓아줄 수가 없구나, 운아.”

운은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훤에게 구름이 유일하게 운뿐인 것처럼, 운에게 있어서

태양도 유일하게 훤뿐이었다. 그것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36

파평부원군이 양명군을 찾아왔다는 하인의 떨리는 목소리가 행여나 담장을 넘어 다른

이들의 귀로 흘러들어갈 새라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어떤 말도 없이 자신의 입안으로

술잔만 털어 넣었다. 물러 나간 하인을 통해 전달되어진 말은 양명군이 만나기를 거절하더란

것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파평부원군을 보내고, 그 다음 날도, 그리고 또 그 다음 날도

찾아오는 유혹의 발길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며칠의 헛걸음 뒤에 파평부원군은 기어이

양명군의 사랑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되었다. 양명군은 그간의 며칠이란 시간동안

술만 들이켰는지 흐트러진 옷매무새에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파평부원군을 맞았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술상과 비워진 술병 몇 개가 나뒹굴어져 있었다.

“어찌하여 나요?”

취기로 흐트러진 양명군의 목소리가 절을 올리는 파평부원군을 때렸다. 그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절을 마친 파평부원군은 자리에 앉아서야 입을 열었다.

“어찌하여 양명군이시라니요?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옵니까?”

“그대가 찾은 이가 왜 나인가 말이오!”

“무슨 뜻인지······? 혹여 양명군을 찾은 저의 이유를 물으시는 것이라면 이렇게

답해드리지요. 상감마마의 성후가 걱정되어 의논코저 함이라고······.”

“내가 언제 날 찾은 이유를 물었소? 어이하여 다른 왕자군들을 두고 나를 찾았는가를 물었소!”

양명군의 화난 목소리가 사랑채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파평부원군은 여전히 왕권을 농락하듯,

양명군을 농락하듯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상감마마의 성후를 의논하기엔 서장자이신 양명군 외에 누가 더 적격이겠습니까?

하긴 제가 상감마마의 숙부들을 찾아가면 참으로 큰 환대를 받았을 것인데······.”

양명군의 아랫니가 윗니에 짓눌러졌다. 분명 그랬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그와 마주보고

앉은 것이기도 했다. 양명군은 파평부원군을 경멸하는 표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말했다.

“그런데 그리 큰 환대를 마다하고 어이하여 나요?”

파평부원군은 눈으로 양명군의 흐트러진 자세를 살펴보았다. 취기로 흐트러진 듯 보이나

결코 빈틈은 없는 왕자였다. 언제나 자신의 속내를 보이지 않는 현재의 왕과 너무도 닮아서

이용하기엔 위험부담이 크긴 하지만, 그런 그이기에 왕으로 추대한다면 그의 중심 아래에

많은 사람이 뭉칠 것이니 더 없이 적격인 사람이었다.

“환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기와 자질이라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어떤 동기가 있고, 어떤 자질이 있단 말이오?”

“왕이 되고자 하는 동기와 왕으로 받들어질 자질!”

“나도 모르는 나를 알고 있다 말할 참이오! 난 갑갑한 왕 자리도 싫고, 나를 받드는 자들도 귀찮소.

한량으로 사는 재미만 아는 나를 가당찮은 역모에 끌어들이지 마시오!”

“상왕전하께옵서 양명군을 어찌 대하셨는지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양명군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리고 조용히 자신의 슬픈 눈동자를 가리려는 듯 눈꺼풀을 덮었다.

하지만 감정을 다 삭이지 못하고 목소리에 한을 담아 말했다.

“왕이라면······그리 하시어야 하오. 비록 정통성을 지닌 적자이나 위에 서장자인

형이 있는 세자라면 애정을, 그리고 힘을 서장자에게 나누어주면 어린 나이에 보위를 잇는

세자에 위험한 것이니. 왕권을 위해서라도 마땅히 그리 하시어야 하오.”

마치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기 위한 말인 듯 들렸다. 영특한 머리는 이해하되, 치유되지 못한

상처받은 마음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그의 번뇌를 느낀 파평부원군의 가슴엔 작은 희망이 일렁였다.

한 잔의 술을 더 마시고 난 양명군이 적막한 주위 공기에 보조를 맞춰 말했다.

“상감마마의 성후를 의논코저 한다면 내의원을 찾으시오.”

“이번의 어환은 오래갈 듯 합니다. 그전에 다른 왕자군들께서 거사하지 않을 것이란 장담은

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할뿐더러 그 역모 자체로 상감마마의 상심이 되실 것입니다.”

“그들은 상감마마 뿐 아니라 윤씨 일파조차 말살시키고 싶을 테니. 파평부원군! 어줍잖은

충신 흉내는 그만 내고 이제 시커먼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어떻겠소?”

파평부원군은 입을 다문 채 양명군의 입 안으로 흘러들어가는 술만 보았다. 그에겐 권하지도 않고

오직 자작만 하고 있는 양명군의 속내를 먼저 알기 위해 굴리는 눈동자 소리만 요란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서안 위에 꺼내 놓지 않는 그의 검도 궁금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미

칼집에서 날을 꺼내들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떠한 저의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왕좌에 대한

욕심을 비로소 드러내는 것인지, 단순히 취기 때문인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파평부원군의 눈길이 양명군의 손에 멈췄다. 옆으로 비스듬히 앉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술을 따르는 술병의 끝은 잔을 조금씩 비켜나고 있었던 것이다. 양명군이 다시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난 금상을 죽이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소! 하지만 가지고는 싶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단 하나도 빠짐없이 고스란히······가지고 싶지.”

“소인이라면 가능하게 하여 드릴 수 있습니다.”

“금상은 실수했어. 이렇게 쓰러지시려거든, 소격서의 제천의례나, 유향소는 명하질 말았어야지.

그로 인해 그 어떤 세력도 역모의 명분을 가지게 되었으니······. 의식불명인 금상을

지키기 위해서 난······숙부들 보다 먼저 왕권을 잡아야만 하겠군, 젠장!”

“훌륭하신 명분이옵니다!”

파평부원군은 더 이상의 말은 꺼낼 수가 없었다. 그동안의 양명군치고는 너무 쉽게 일이

풀리고 있는 것이 지나칠 만큼 의아스러웠다. 취기를 원인으로 돌리기에도 이상했다.

아직까지 술 한 잔 권하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지나가는 나그네라 하더라도 물 한 잔이나마

건네는 것이 미덕인데, 파평부원군 앞에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더 의아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가 더 양명군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너무 쉽게 일이 풀리고 있는 것이 영 꺼림직 하군. 난 파평부원군을 믿을 수가 없소!”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말하는 양명군으로 인해 파평부원군은 흠칫 놀랐다. 하지만 양명군은

그가 놀란 것을 알아차리지 않은 듯 혀 꼬인 소리로 웅얼거렸다.

“나의 한량 자리를 내어 놓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나, 그대의 국구 자리는 내어 놓기

쉬운 일은 결코 아닐 것인데······. 나 보다 그대가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오.”

파평부원군의 망설임은 더욱 깊어졌다. 양명군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는 이미 떠난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대로라면 양명군이 자신의 휘하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의 휘하에

묶일 가능성이 짙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를 이용하려다가 자칫 그에게 자신이 이용당하고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순간 파평부원군의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왜 많은 대신들이 다음 보위를 떠올릴 때, 제일 먼저 양명군인가 하는 것을!

그리고 왜 상왕조차 자신의 아들인 양명군을 그리도 배척하였는지를! 취기로 흐트러진 상황에서도

결국 주도권을 잡아가는 양명군의 위력이었다. 이때, 갑자기 울러 퍼지는 양명군의 웃음소리에

파평부원군의 정신이 퍼뜩 들었다.

“하하하! 나를 우습게 알고 그 발로 쉽게도 걸어 들어왔는데, 이젠 두려워진 게요?

나를 이용하려다 도리어 나에게 당할 것 같소? 자! 그럼 이제 어떡하나? 이 방에 들어올 땐

그대의 의지였으나, 나갈 땐 내 허락 없이는 안 되는 것을. 하하하!”

이 방에 들어서서부터 단 한 번도 양명군은 파평부원군에게 눈길을 던진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속생각을 그대로 읊어대는 그가 두려웠다.

하지만 이 이상 당황하면 영영 주도권을 빼앗겨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인은 국구 자리를 절대 내어놓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대 여식의 나이가 열두어 살 정도랬던가? 지금의 중전을 버리고 새로운 중전을 만들어

또 다시 국구가 되시겠단 속셈이로군. 가엾은 여인들. 아비를 잘못 만나서, 쯧쯧.”

파평부원군의 목구멍을 타고 마른 침이 넘어갔다. 그리고 여전히 술잔만 보고 있는 양명군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파평부원군의 몸과 머리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소인을 시험코저 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젠 파평부원군의 물음에 양명군의 답이 없었다. 단지 알 수 없는 미소만 보인 채 끝도 없이

술만 들이킬 뿐이었다.

“소인을 시험코자 하시는 것입니까!”

“소리가 높소!”

양명군이 소리를 높이며 드디어 파평부원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섬칫할 만큼의

냉기를 품어내는 그의 눈빛엔 조금의 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동안 보아온 양명군이 아니었다.

멀리 앉은 거리였지만 양명군의 눈빛만큼은 파평부원군의 숨통을 쥔 채 너무도 가까이 있었다.

“그대가 먼저 나를 시험코자 했으니, 나 또한 그대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고, 그대가 나를

믿지 못하니, 나 또한 그대를 못 믿는 것이오. 서로의 목숨을 내어놓고 이야기를 나누어도

모자랄 판에, 속셈을 훤히 드러내 놓고 말하는 그대를 내 어찌 믿을 수 있겠소.”

“제가 믿질 못하는 이유는.”

“이제껏 내가 소인배들을 검으로 위협하여 내쫓았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왜 지금 갑자기 돌변하신 것입니까?”

“돌변? 그것이 아니지. 내 야욕이 검 하나에 놀라 일어서 나가는 그런 보잘 것 없는 것들에게

내비칠 정도로 값어치 없는 것이 아니었을 뿐이지. 내가 그 정도의 신중함도 없을 것 같소?”

파평부원군은 그가 이제껏 마신 술이 어디로 갔는지를 먼저 묻고 싶었다. 분명 마시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파평부원군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양명군의 목을 쥘 힘을 끌어내었다.

“왕권 하나만을 욕심내는 것입니까?”

“난 왕권 따위에는 관심 없소. 그대의 나이 어린 여식은 더더욱이나 관심 없소.”

또 다시 무언가가 뒤틀려져 가는 것 같았다. 끝을 모르는 그의 주량만큼이나, 그의 속내도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왕권에만 욕심을 드러냈다면 양명군을 더 믿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잠자코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내가 욕심내는 것은 종묘제례에서의 제주 자리와,······풍천위의 누이······.”

파평부원군의 손등 힘줄이 힘껏 돋아졌다. 자신의 손아귀에 양명군이 잡혀진 듯 했다.

오래 전부터 궐내 여인들 사이에 헛소문처럼 들려왔던 양명군의 사랑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상대가 세자빈으로 간택된 허씨처녀였던 것도 궁녀들 사이에선 아주 재미난 이야기거리였다.

그리고 상왕에게 자신의 아내로 삼게 해달라 청했다가 거절당했던 슬픈 사연도 궐내에서 비밀처럼,

소설처럼 떠돌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파평부원군의 눈에

보이는 양명군의 슬픈 표정도 사실이었다.

“살아······있는 것도 아십니까?”

“그렇기에 욕심내는 것이 아니겠소? 얼마 전 상감마마의 성후를 묻고자 갔을 때 우연히

보았더랬소. 살아 있는 것을······. 이젠 놓치지 않을 것이오. 상왕께옵서도 또 다시

내게서 빼앗아 가진 못할 것이오.”

얼마 전이라면 갑자기 양명군이 이상해졌다는 보고를 받은 즈음이란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상한 사람이었지만, 요즈음의 그의 방황은 사람들의 입 사이에 유난히 자주 오르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원인이 드러났기에, 어쩐지 그의 돌변이 납득되는 것도 같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그를 신뢰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속내를 확실히 떠보는 데는 다른 방법이 있었다.

“저의 여식이 중전자리에 앉게 되는 것에 변함이 없다면, 풍천위의 누이를 어찌하시던

상관 없습니다만. 단, 이미 한번 죽었던 여인을 다시 되살리는 것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모로 복잡할 것이니······.”

파평부원군의 말은 연우를 후궁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처럼 죽은 사람으로

숨어살게 해라는 뜻이었기에 양명군의 얼굴에 망설이는 기색이 드러났다. 어느 때보다 오랜

고민 끝에 어렵게 그의 입이 열렸다.

“그 방법 외에는 없다면······.”

“그럼 뜻을 같이 하는 것으로 믿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젠 가장 큰 걸림돌부터 의논하는 것이

순서겠지요?”

주도권은 다시 파평부원군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젠 양명군보다 그의 목소리에 더 큰 힘이 실렸다.

술잔만 잡고 더 이상 술을 들이키지 않는 양명군을 보면서 파평부원군은 천천히 말했다.

“왕의 가장 측근인 운검과 풍천위를, 왕보다 먼저 제거하는 것!”

양명군의 윗니와 아랫니 사이의 마찰음이 소름끼칠 정도로 큰 소리를 내었다. 그와 동시에

술잔을 쥔 그의 손이 자신의 손아귀 힘을 참지 못하고 파르르 떨렸다. 파평부원군은 양명군의

표정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하면서, 말소리엔 감정을 담지 않고 차근차근 보고하듯 말했다.

“운검, 김제운을 미리 제거하지 않고서는 왕에게 가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그는 혼자서

역대 최강이라 불리던 상왕의 다섯 명의 운검을 상대로 싸워, 그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 아닙니까?

그 하나가 부대 하나와 맞먹는 전력입니다. 그리고 궐내 군사들이 가지는 그에 대한 경외감은

결속력으로 이어지지요.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인물입니다. 그리고 풍천위!”

“그 보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자는 없소.”

“그 조용함이 더 무서운 법이지요. 왜 제일 먼저 그의 날개를 잘라버렸는지 모르신다 하진

못할 것입니다. 얼마 전 그의 단순한 여행도 우리에겐 공포였습니다. 그의 발길과 만난

산림학사들이 얼마나 들끓었는지도 우린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여행이었지만,

상감마마껜 사림세력을 응집시키는 계기였습니다. 왕권이 뒤집어지면 그에 따른 납득가능한

명분이 오고가야만 할 것인데, 그를 상대로 학문적 타당함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왕권이 뒤집힘과 동시에 뭉쳐질 사림세력의 중심이 될 풍천위를 미리 제거하는 것.

이것은 운검과 더불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양명군의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었다. 자신의 떨리는 심정을 가리려는 듯 술병을 술잔에

기울였지만 그나마 술병도 이젠 비어있었다. 그래서 떨리는 손으로 빈 잔을 마셨다.

“그들은······나의 친구들이오.”

“하지만 양명군의 신하가 되어줄 자들은 결코 아니지요.”

파평부원군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그들은 양명군이 왕이 된다면 제일 먼저 양명군의

목에 칼을 겨누어줄 의로운 친구들이었다.

“그들을 먼저 죽인다면 거사를 일으키기도 전에 왕에게 들키고 말 것이오. 왕과 동시라면 모를까.”

“그것도 그렇겠군요. 하지만 풍천위는 그전에 그의 인격을 먼저 죽일 것입니다.”

“인격을 먼저 죽이다니, 그것이 무슨 뜻이오?”

“그것까지 말씀드릴 정도로 양명군과 소인 사이에 신뢰가 깊진 못하다고 생각되옵니다만.

그럼 오늘은 이만하고 소인은 물러나겠습니다. 참! 약소하게나마 선물로 하인 세 명을 바칩니다.

장정들이니 값은 꽤나 나갈 것입니다.”

장정 셋이라면 훈련된 군사를 말하는 것이고 이것은 곧 양명군을 감시하고 있겠다는 뜻이었다.

의기양양한 태도로 파평부원군이 나가자 양명군은 머리를 두 손으로 싸매고 술상에 엎어졌다.

“풍천위의 연약한 외모에 속지 마라. 그보다 내면이 강한 자는 없을 것이니. 죽을 인격이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죽어졌을 인격이었다.”

#37

“오늘도 파평부원군에게서 어떠한 소식도 없으시었느냐?”

“네, 중전마마. 송구하옵게도······.”

중전윤씨는 어지럽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궁녀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숙인 고개로 인해 무거운 가체가 그녀를 더욱 힘들게 했지만, 무엇보다 더 힘든 것은 마치

자신을 버리기라도 한 듯 발길을 끊은 파평부원군이었다. 중전이란 신분을 가지고도 교태전에

스스로 들어가지 못해 함원전에 겨우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그나마 유일한 의지가 되었던 이가 아버지였건만, 이제 그 아버지에게서조차 버림을 받은 것만

같아 그녀의 불안은 극도로 심각해져 있었다. 이따금씩 환청을 들을 때도 있었다. 그 환청은

언제나 ‘감히 중전도 아닌 것이 중전을 죽이고 앉아 있느냐!’는 꾸짖는 목소리였다.

그것은 그녀 스스로 만들어낸 목소리임을 아는데도 마음은 어느새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중전윤씨는 짓누르는 마음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보고 싶었지만 다른 방법은 달리 찾지

못하고 자신의 무거운 가체를 벗는 것만 겨우 생각해내었다. 그래서 궁녀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경대를 꺼내 거울을 펼쳤다. 그런데 펼쳐진 경대의 거울은 중전윤씨의 얼굴이 아닌, 그녀의

등 뒤에 고고하게 떠 있는 달을 먼저 담았다. 물끄러미 넋 나간 사람 마냥 거울에 담긴 달을

보고 있기만 하는 중전에게로 궁녀들이 다가가 얼른 가체를 벗겼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정신 나간 상태로 달을, 그리고 달이 의미하는 진정한 중전인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허씨 처녀, 연우를 보고 있었다. 비슷한 또래였음에도 간택으로 모인 여인들 중 단연 눈에 띄었었다.

어느 누구보다 세자빈다워 얼굴조차 감히 볼 수 없을 만큼 황송했던 기분도 아직까지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재간택이 끝나고 후보내정자로 확정되어 육인교를 타고 차지내궁의

호위를 받으며 가던 그때, 단촐한 가마에 오르던 연우와 비교되어 더 송구스러웠던 기억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 지금의 왕비 당의를 입고 있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그 연우였다.

상궁이 나지막하게 아뢰었다.

“춥사오니 그만 창문을 닫겠사옵니다.”

창문이 닫혀지자, 중전윤씨의 눈 초점은 그제야 경대 거울에 맞춰졌다.

“모두 잠시 물러나 있거라.”

다른 때와 다름없는 중전의 힘없는 목소리에 상궁과 궁녀들은 일제히 물러나 나갔다.

그리고 그녀를 홀로 둔 방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아버지. 저를 버리실 것입니까? 그렇다는 것은 상감마마를 기어이······.”

한 번도 지아비라 생각해 본적 없는 왕이었지만,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자신에게 ‘윤씨’라는 성과 ‘보경(寶鏡, 보배로운 거울)’이라는 이름을 준 자신의 아버지가 왕을,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 어이하여 모르십니까? 저는 단지 거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달이 잠시 거울에 비쳐

빛을 낸다 하여도 거울이 달일 수는 없듯, 저도 중전일 수는 없는 것인데·····.”

중전윤씨의 귓가에 또 다시 누군가의 호통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움찔거리며 실성한 듯

품속에 숨겨두었던 은장도를 꺼내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찢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비의 당의가

은장도에 갈기갈기 찢어진 것과 같이 그녀의 몸에도 여기저기 상처자국이 생기고 있었지만,

스스로는 아무런 고통도 느낄 수가 없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그리고 깜짝 놀라

자신이 저지른 짓을 보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그 순간에도 자신의 몸에 난 상처보다

이 장면을 보게 될 궁녀들의 눈초리가 더 걱정되었다. 그래서 아파할 거를 없이 얼른

넝마가 되어 있는 당의를 벗어 숨기기에 바빴다. 그녀는 우왕좌왕 하다가 달리 숨길 데가 없어

깔고 앉은 요 아래에 급히 두었다. 이제 곧 들어올 궁녀들에게 금방 들키고 말 것이란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녀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얀 비단 소복 곳곳에 상처에서 번져 나온

붉은 핏자국이 그녀의 입가에 창백한 미소를 만들어 내었다.

“내가 어찌하다 이리 되었을꼬. 나에게도 평범한 아낙의 꿈이 있었거늘, 이곳 구중궁궐 안에

내 꿈을 담을 수가 없구나. 내가 중전일 수 없으니, 차라리 상감마마께오서 왕이 아니었더라면

좋았을 걸······.”

소격서의 뜰로 지친 혜각도사가 내려섰다. 이유와 목적을 알 수 없는 혜각도사의 오랜 기도 뒤였기에,

그를 걱정하는 도류가 따라 나왔다. 하지만 혜각도사는 그 도류에게조차 눈길로 들어가라 명하고

뜰 안을 가득 메운 바람을 홀로 맞이했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새하얗게 샌 머리카락을 움직였지만,

그는 바람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달이라······. 헛으로 붙이는 이름조차 우연인 것은 없는 법이지.

운명이 이끈 인연의 작은 길이 우연일 뿐······.”

약하던 바람이 순간 세차게 일어 혜각도사를 가득 감싸 안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상왕전하, 혹여 떠돌고 있는 이 바람이 마마이시옵니까? 조선팔도 구비구비 떠돌다 지쳐도,

지친 마음 하나 눕지 못하는······.”

혜각도사의 눈앞에는 어느새 상왕이 슬픈 모습으로 등을 돌려 서고 있었다.

“상감마마, 급히 천신을 부르신 연유가 무엇이옵니까?”

아직은 흰 머리카락보다 검은 머리카락이 더 많은 혜각도사가 왕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물었지만,

왕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눈으로 보지 않아도 강녕전을 가득 뒤덮고 있는 왕의 고뇌가

느껴졌다. 아마도 곧 있을 세자빈 간택문제로 속을 끓이고 있을 것이란 짐작만 겨우 할 수 있었다.

혜각도사는 고개를 들어 왕을 보았다. 그는 앞에 서찰 꾸러미를 펼쳐놓고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것이 다 무엇이옵니까?”

“내가 세자의 품에서 훔쳐낸 것이라네. 허허허.”

왕의 웃음이 기쁜듯 하면서도 슬프도록 공허하게 울려왔다. 내관이 조용히 서찰들을 혜각도사

앞으로 가져다 놓고 물러났다. 그래서 이유도 모른 채 서찰 중 하나를 펼쳐보았다.

정갈하고 아름다운 필체가 눈에 먼저 들어왔고, 뒤이어 귀한 신분이 될 빛을 머금은 이름 석 자,

‘허연우’가 보였다.

“우리 세자가 언제나 품에 안고 다니는 것이라네.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여인이 아닌,

서찰을 안고 잔다더군. 동궁전에 그리도 어여쁜 궁녀들이 있음에도 말일세. 참으로 이상타 생각했었다네.

그래서 세자의 그러한 행동들이 아직은 이성에 눈을 뜨지 못한 탓이라 여겼더니만······.

내 기이하게 여겨 세자가 잠시 목욕하는 동안 서찰을 훔쳐오라 했는데, 그것들을 읽어보니

세자의 심정을 알 것 같군.”

혜각도사는 언뜻 왕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것이

무엇인지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혜각도사! 정녕 허연우란 아이가 미래, 교태전의 주인이란 말인가?”

“외척들의 반발이 걱정되시옵니까?”

왕의 고개가 천천히 저어졌다. 그리고 슬픔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양명군이 처음으로 아들로서 이 아비에게 청한 것이 허연우란 아이일세. 난 양명군의

청을 들어주고 싶다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가엾은 내 아들의 그 청을······.”

왕의 슬픈 눈길이 다시금 훔쳐온 서찰에 고정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 새겨진 연우의 심성을

되새겼다. 양명군의 가슴에 있는 여인은 이미 세자에게 닿아 있었고, 세자의 마음 또한 이미

깊어져 있었다. 왕도 처음에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제껏 상처받으며 살아온

양명군을 위해서라도 연우는 양명군에게 주고 싶었다. 그런데 세자의 사주에 있는 유일한 여인이

바로 연우였다. 이것은 연우를 양명군과 이어주면, 세자의 후사(後嗣)는 끊어진다는 뜻이었고,

아울러 미래의 조정이 힘겨울 것이란 뜻이기도 했다. 왕이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세자의

목욕이 끝나간다는 보고와 함께 급한 발걸음으로 내관들이 서찰을 챙겨나갔다. 그러고도 한참을

고민하던 왕이 힘겹게 결심을 내렸는지 중얼거렸다.

“차라리 서찰을 훔쳐보지 말걸. 결국 난 끝까지 우리 양명군에게 죄를 짓는구나······.”

세자빈간택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에 혜각도사는 명나라의 백운관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래서 왕의 고민을 마주하고도 불길한 기운을 남겨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혜각도사가 명나라에서 돌아왔을 때는 마침 홍문관대제학이 세상을 뜬 그날이었다.

대제학을 잃은 왕의 상심은 극에 달해 있었다. 미래 왕인 세자를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모든 것을 잃고, 그나마 마지막 희망이었던 대제학마저 왕인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떴기에,

왕은 3일 동안 공무를 파하고 거애(擧哀, 머리를 풀고 곡을 하는 것)를 하고 있었다.

“상감마마, 천신 돌아왔사옵니다.”

“상감? 내가 임금이었더냐? 그렇군. 세간에선 우매한 자를 일컬어 임금이라 하나보군.

아니면 무능한 사내를 일컬어 임금이라 하나보군.”

왕의 목소리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의 한탄에 혜각도사의 마음도 울컥 받혀 올라왔다.

“상감마마······.”

“왕을 왕이라 생각하지 않는 신하들 위에 어찌 왕이 존재한다더냐? 마지막 신하를 잃었으니,

난 더 이상 임금도 아니다.”

왕의 통곡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소리죽인 통곡소리였다.

“내가 죽였다. 내 신하를 내 손으로 죽였다! 대제학의 두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 자가 바로 나다!”

혜각도사의 눈에도 왕과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어떤 말로도 왕을 위로할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그렇게 왕은 스스로를 책망했다. 어느덧 정신을 가다듬은 왕이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혜각도사, 부탁이 하나있네.”

“그것이 무엇이든 천신, 성심을 다해 받들겠사옵니다.”

왕은 눈물 맺힌 눈으로 혜각도사를 쳐다보았다. 그 눈에는 왕이 아닌 나약한 인간의 고뇌가

담겨있었다.

“아무래도 나의 명도 다해가는 모양이다. 그렇게 되면 강녕전의 주인이 바뀌듯, 교태전의

주인도 바뀌겠지. 부디, 그 교태전에 주인 아닌 자는 들 수 없게 해다오. 교태전의 주인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러기 전에는 나 죽어도 죽지 못하고 바람처럼 떠돌 것이야.”

혜각도사의 고개가 저절로 떨어졌다. 그 말의 의미를 알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왕의 부탁이 가여웠다.

그리고 왕이 이때 남긴 부탁이 마지막이 되어버린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대제학의

심장이 썩어간 것과 똑같이 왕도 심장이 썩어 같은 곳으로 갔기 때문이었다. 세자와 양명군,

그리고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던 그 순간, 왕은 죽어가는 손을 뻗었다.

한 손은 세자, 또 다른 한 손은 가엾은 자신의 아들 양명군에게로 향했지만, 결국 지켜보는

수많은 신하들의 눈이 두려워, 서장자에게로 가던 손을 거두어 세자의 손을 잡은 손에

겹칠 수밖에 없었다. 아비를 보는 양명군의 원망어린 눈빛을 가슴에 묻고, 차마 잡아주지

못해 더 아린 가슴을 죽음에 묻고, 수많은 비밀과 더불어 그렇게 눈을 감았다. 언제나 왕권을

유린당한 그였지만,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그는 아비가 아닌 왕으로서 눈을 감았다.

차갑게 일은 바람이 양명군의 사랑방에도 부딪혀왔다. 하지만 방안에 앉은 양명군에게는

와 닿지 못하고 어디론가 휩쓸려 가버렸다. 그 바람 소리에 소름끼쳐 한 인간들은 양명군을

제외한 사랑방에 모여든 역모가담자들이었다.

“바, 바람소리가 참으로 을씨년스럽습니다.”

“지금 바람소리에 귀를 열어둘 시간이 있느냐?”

양명군의 조용한 목소리는 방안 가득 울려 어느덧 바람소리를 완전히 몰아내었다. 파평부원군의

통솔 아래에 모여든 그들이었지만, 이젠 양명군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양명군의 움직임에

눈길을 모으고 있었다.

“언제 일어나 앉으실지 모르는 왕이다. 일어나 앉는 즉시, 여기 모여 앉은 모두의 목을

베어버릴 선견지명을 지니신! 시간이 촉박함을 모르는가!”

“그러시기엔 증거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궁궐 안을 수비하는 내삼청 이외엔 마땅한 군사력을

지니지 못하신 왕이십니다.”

“조선의 비상전투력을 능멸하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지요. 반대로 저희 측 사병의 힘이 그만큼 막강하단 뜻입니다. 그리고 궐 밖의

군대를 불러들이기까지의 시간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양명군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머금어졌다. 그리고 방안에 앉은 이들을 둘러보며 차분히 말했다.

“그대들은 착각을 하고 있군. 상감마마께오서 열아홉 어린 나이에 왕권을 잡으실 때, 가장

먼저 무엇을 잡으셨는지 잊었는가? 그것은 군사권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왕의

손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상감마마 이외에 군사력의 실체를 아는 자가 있느냐? 마땅한 군사력이

없다는 것, 난 그것이 더 두렵다.”

양명군의 말에 모두 숨을 죽였다. 그의 말처럼 왕은 언제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상대였다.

쉽게 생각하고 왔던 결과가 지금 이렇게 궁지에 몰려 양명군의 뒤로 숨은 꼴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눈은 저절로 양명군의 입술에 고정되었다. 하지만 그의 입은 단단히 닫힌 채

틈을 보이지 않았다. 침묵만이 자리한 곳에 파평부원군의 목소리가 떠돌았다.

“존재하지 않기에 두려운 것뿐입니다. 상감마마께서 궐을 비우실 때, 수궁대장의 자리에

있는 자가 바로 저, 국구입니다. 그때 면면히 살펴본바, 그 어떤 흔적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만의 하나, 숨겨놓은 군사력이 있다면 자금의 흐름 또한 있을 것인데,

그 또한 흔적조차 없습니다.”

모두의 얼굴에 안심한 표정이 넘쳐났다. 하지만 곧이어 나온 양명군의 말에 다시 어두워졌다.

“국고의 자금이야 그렇겠지만, 상감마마의 막대한 내탕금은 사정이 다르지.

그 흐름을 어찌 알겠소?”

“그 아무리 내탕금이라 하여도 어느 정도의 윤곽은 있는 법입니다.”

심각하게 고민하던 양명군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와 더불어 다른 이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순간 바깥에서 또 다시 바람소리가 요란하게 일더니, 하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룁니다! 지금 정업원에서 급히 심부름을 나온 자가 상자를 전해 달라 하였사옵니다.”

정업원이라면 양명군의 모친인 희빈박씨가 보낸 심부름이었다. 평소 없던 기별을 야심한

시각에 보낸 것이었기에, 양명군의 표정은 두려움으로 뒤덮였다.

“가지고 와라!”

방문을 열고 하인이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든 상자를 가지고 들어와 양명군이 앉은 서안에

올려두고 나갔다. 양명군은 조심스런 손길로 상자를 열었다. 그 순간, 그의 손끝과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상자 안에 담겨 있었던 것은 여인의 단정하게 땋은 머리카락이었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의 주인은 바로 희빈박씨임을 알 수 있었다.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세상의 인연을 잘라내고, 아들 양명군을 잘라내고, 그녀는 비구니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오직 상감마마의 성후만을 기원하며, 아들의 목을 쥐어틀기 위해서 잘라내어 버린 머리카락!

그 의미는 아들을 향해 왕권에 대한 욕심을 버리라는 협박과도 같은 것이었다.

양명군의 떨리는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것에 얼굴을 묻어 눈물을 감추었다.

방안에 모인 사람들의 가슴도 싸늘한 아픔에 물들었다. 처절하리만큼 상왕의 냉대 속에 살아온

모자의 슬픔에 동화되었고, 그것은 바로 양명군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다. 이윽고 양명군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머리카락을 옆에 있던 화로에 집어넣었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사람들의 눈이 놀라 허둥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양명군의 슬픔에 눌려

놀란 소리는 낼 수조차 없었다. 처음엔 머리카락의 무게에 화로의 불길도 꺼질 듯 하더니,

시간이 흐르자, 차차 머리카락 나는 냄새가 방안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 냄새는 바로 양명군의

심장이 타들어가는 냄새였다. 그렇기에 그 어떤 누구도 코를 막지 못하고 양명군의 핏대 선

눈시울만 바라보았다. 그의 이 사이로 말이 갈려 나왔다.

“이제 희빈박씨는 죽었다. 나의 어미도, 상왕의 첩도 죽고 없다. 한낱 비구니 따위가 나를

막을 수 있겠는가!”

양명군은 서안 서랍을 뒤져 작은 서책 하나를 꺼냈다. 그 서책은 일반 서책의 절반 크기에

하얀 백지만이 있는 공책이었다. 그는 표지를 젖히고 제일 첫 장의 오른 쪽에 ‘陽明君(양명군)’

이라 적고 그 아래에 수결을 적었다. 그런 후, 제일 가까이에 앉아있는 파평부원군에게 서책을 건넸다.

“나와 진심으로 함께 할 자, 나와 더불어 자신의 이름도 함께 하라. 비록 지금은 그 서책의

표지에 제목이 비어있으나, 내 즉위하자마자 그곳에는 공신록(功臣錄)이란 제목이 들어갈 것이다.”

그 말은 방안의 모든 이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모이지 못한 가담자들도

하나로 이을 수 있는 매개체가 되었다. 그렇게 방안에 뒤덮인 연기와 양명군의 심장이 타들어가는

매캐한 냄새 속에서 그들은 정성껏 자신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이어갔고, 방안에 들어오지 못한

바람은 용의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바깥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38

“서방님! 소첩, 안으로 들어도 되어요?”

민화의 애교어린 목소리가 복잡한 염의 머릿속을 두드렸다. 그래서 서책에서 고개를 들어

민화의 느낌이 배여든 방문을 보았지만, 염의 귀에 뒤이어 들어온 것은 청지기의 목소리였다.

“주인어른, 누가 서찰을 건네주고 갔다고 합니다. 올릴까요?”

염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는 서찰이라고 하나,

그 또한 보낸 이가 있을 것이기에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나가서 받는 것이 법도였기 때문이었다.

방문 밖에 나간 염은 섬돌 아래로 내려서서 먼저 민화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부터 한 뒤에,

청지기를 보았다.

“누가 보낸 서찰이라 하던가?”

“그건 모르굽쇼, 처음 보는 자였다 합니다요. 아마도 또 주인어른과 시문을 나누고픈 이의

소행인 것 같습니다요.”

시문 한 줄조차 자유롭게 쓸 수없는 염이었기에, 그를 동경하는 이들은 이런 식으로 염에게

자신의 글을 보내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염은 의빈의 자리에 있는 자의 법도를

행하느라 답시를 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염은 쓸쓸히 서찰을 받아들며 민화를 향해 말했다.

“공주께선 어인 일로 사랑채로 오셨습니까?”

언제나 보아도 가슴 떨리는 염의 미소였다. 비록 어린 날의 환한 미소는 아니었지만,

애수어린 그의 미소는 지금의 정갈한 외모와 더불어 민화를 더욱 더 안달하게 만들었다.

“서방님의 글 읽는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제가 아니, 소첩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염의 미소가 민화의 심장을 다시금 힘껏 쥐었다가 놓았다. 좀처럼 보기 드문 미소였다.

한동안 어지럽던 그의 미소만을 느꼈었지만, 오늘은 어제와 그리고 그제와 달리 안정되게 느껴졌다.

여전히 누이의 죽음에 대한 수수께끼가 거둬지지 않았지만, 어느덧 연우가 살아있는 것에

대한 기쁨이 민화의 뱃속에 살아 자리한 태아와 같이 기쁨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연우와 온 가족이 언젠간 상봉할 것이란 기대도 가지게 되었다.

“공주, 어젯밤 바람소리가 무섭진 않으셨습니까?”

“걱정되시었으면 안채로 건너왔어도 되었잖아요!”

살풋 눈을 흘긴 민화가 염의 품에 안기듯 기대었다. 순간 당황한 청지기가 못 본 척 하며

물러났다. 당황한 것은 염도 마찬가지였다.

“허허, 공주! 사람의 눈을 두려이 여기셔야 합니다.”

그리고는 당황한 손길로 서찰을 뜯어 펼쳤다. 처음엔 단순히 당황한 눈길을 두는 것에 불과했던

종이 위의 글자들이 차차 염의 눈동자로 빨려 들어갔고, 그렇게 눈동자로 흡수된 글자들은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민화의 눈길은 염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분세수를 즐기는

사대부가의 청년들 보다 새하얀 염의 얼굴이 서서히 하얗다 못해 청색의 빛을 띄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담백한 입술이 창백하게 떨렸다. 불길한 예감이 민화를 덮쳤다.

그래서 염의 손에서 서찰을 빼앗듯이 하여 내용을 확인했다.

<의빈대감께 부치는 글

누이의 죽음이 아직까지 끝나지 않은 것을 아십니까? 옛날의 죽음이 병사가 아닌 것은 아십니까?

주술이 누이를 죽인 것을 아십니까? 그 주술이 의빈을 가지고자 하는 욕심에 눈이 먼 민화공주의

소행인 것은 아십니까? 그리고 누이의 죽음을 끝까지 덮은 이가 상왕인 것은 아십니까?

지금은 상감마마의 액받이무녀가 되어 있는 의빈대감의 가엾은 누이를 모른다 하지 마십시오.>

민화의 얼굴이 염의 얼굴보다 더 창백하게 얼룩졌다. 그리고 서찰을 쥔 손과 땅을 버티고 선

다리가 후들거리며 그녀의 온 몸을 흔들었다. 아니라고, 서찰의 내용은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혀가 목 안으로 말려들어갔는지 그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세차게 고개를 저었지만

염의 눈길을 아무것도 담지 않은 채 땅을 향해 멈춰 있었다. 민화는 염의 얼굴을 자신에게로

돌려 도리질을 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그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염의 눈동자와는 상관없이 그의 몸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러났다. 민화의 손끝이 소름끼치는 듯.

민화의 손에서 서찰이 떨어져 내렸다.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그녀를 본 염의 눈에는

서찰의 진실을 답하고 있는 민화의 눈동자가 보였다. 이윽고 민화의 심장을 끌어안은 채

서찰이 떨어져 내렸던 것과 똑같이 염도 연분홍색 도포자락을 힘없이 펄럭이며 차가운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주저앉은 염에게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어떤 감정도, 그 어떤 의식도 없이 껍데기만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민화의 찢어질 듯

차가운 비명소리가 염을 뒤덮었다. 하지만 염의 눈동자는 비어져 땅으로,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서방님! 서방님!”

염은 자신을 서방님이라 부르는 여자가 울면서 끌어 앉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의 품이

누이를 죽인 자의 품이라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단지 입에서는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말이 흘러나왔다.

“왜······, 왜······.”

“아니어요! 거짓이어요!”

“저를 가지고저 하였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담담했다. 감정이 들어있지 않으니, 그도 들어 있지 않은 말이었다.

민화의 품에 으스러질 듯 안겨있는 사내의 몸은 텅 비어있었던 것이다. 민화의 눈물과

비명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공포에 질려 행여나 놓칠새라 그의 몸을 더듬으며 계속해서

고쳐 안았다. 그 어떻게 안아도 염이 자꾸만 빠져 나가는 것 같아 손끝으로 그의 얼굴을

더듬어 눈동자와 마주했다.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염의 눈동자 속에는 그만을 담고 있는

눈동자를 가진 민화가 들어있었다.

“아니어요, 제발······.”

염의 무의식이 민화의 눈동자에게 물었다.

“저의 무엇을 가지고저 하였습니까? 그리하여 지금은 저의 무엇을 가지셨습니까?”

민화는 아무 것도 답할 수가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를 가지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의 것이 되고 싶었다. 그의 것이 되고 싶었기에 그를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모든 것을 비워버린 그를 가지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비워버린

그를 마주한 지금 이 순간, 바로 조금 전까지의 염은 아주 조금의 그녀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고, 그 감정이 그의 가슴을 더욱더 죽이고 있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죽어가는

마음이 민화를 그 어떤 생지옥보다 더 고통스러운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왜 지금에서야 마음을 보이시는 것이어요? 이렇게 소첩의 죄를 아시게 될 일이었더라면

차라리······, 차라리 소첩을 사랑하지 마시지······. 그냥 몸만 머물러 계시지······.

몸만으로도 소첩에겐 과한 것이었는데······. 소첩을 벌하시기 위해 마음을 보이는 것이어요?”

너무나도 가지고 싶었던 염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염의 마음이 자신을 향한 벌이 되었다.

그 마음에 기대어 마지막까지 그에게 매달렸다.

“저의 뱃속에 있는 서방님의 아이를 잊지 마시어요, 부디.”

염의 입가에 감정 없는 미소가 잡혔다. 스스로도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나의 누이를 액받이무녀로 둔 상감마마의 외조카겠지. 나의 누이의 죽음을 가린 상왕마마의

외손자겠지. 나의 누이를 죽인 공주의 아이겠지.”

의식 없는 미소와 의식 없는 말과 더불어 염의 의식 없는 왼쪽 눈이 눈물을 토해냈다.

강녕전의 밤은 어김없이 숨죽여 찾아왔다. 방문 너머에 훤을 두고 잠자리에 누운 연우는 방문을

원망해보았자 소용없는 일이었기에, 방안에 찾아든 달빛을 얼굴 가리개 삼아 잠을 청했다.

하지만 오늘 낮에 의금부의 도사로부터 비밀 보고를 받고 연우를 바라보던 왕의 표정이 슬펐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잠들 수가 없었다. 그 보고가 오라비와 관계된 일인 것만 같아 더욱 그랬다.

힘들게 잠에 든 아주 잠깐의 순간, 자그마한 기척이 느껴져 눈을 떴다. 그런데 잠에 먼저 든

줄로만 알았던 훤이 어느새 연우가 원망하던 방문을 없애고 그녀의 옆에 앉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으로 들어온 그의 눈빛은 무서울 만큼 슬퍼보였다.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는 연우의

어깨를 훤의 손이 잡아 다시 눕혔다. 연우가 조용히 물었다.

“상감마마, 어인 일로······?”

“그대 곁에 누운 어둠을 시기하여 쫓아내고자 무례를 범하였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소녀 또한 곁에 누운 어둠이 싫었더이다.”

훤은 연우의 말에 감동하여 그녀의 가슴 위에 올려진 손등에 손을 얹었다. 연우의 손등을 뚫고

심장 뛰는 소리가 올라와 훤의 손바닥에 부딪혔다.

“잠든 그대 곁에서 바라만 보다가 이 손을 쓰다듬어 보고 싶은 슬픔에 문득 궁금하였소.

그대도 그러하였는지가. 그대가 곁에 있는지도 모르고 바보같이 잠만 자던 나를 보고 슬펐는지를······.”

“달빛이 대신하여 상감마마의 곁에 누워있었기에 달빛을 투기하느라, 슬플 겨를이 없었사옵니다.”

훤이 씁쓸한 미소로 연우의 손을 꽉 쥐며 말했다.

“그대는 이런 식으로 나를 꾸짖는구려. 그대를 알아보지 못하고 월이라 이름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아니옵니다. 칠거지악에 속하는 소녀의 죄를 아뢰는 것이옵니다.”

“그 칠거지악의 죄가 되는 것은 아내의 몸이 되어서야 성립되는 것이니, 그대는 이미 나의

아내란 말이오?”

“세자저하의 봉서를 받은 이후부터 이미 그러하였사옵니다. 단지 마마께옵서만 모르셨을 뿐이옵니다.”

“아니오. 알고 있었소. 단 한 번도 그대가 나의 정비가 아니라 생각한 적이 없었소.”

“잊으시고선, 그리하여 월을 곁에 두시고선······.”

“그대가 그리 말하니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더 잘 깨닫게 되었소. 어찌 한 여인에게

두 번씩이나 반한단 말이오. 허참.”

훤의 한쪽 입매가 살짝 놀라가 짓궂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웃음을 머금은 눈매는 조금 전의

슬픔을 완전히 털어내지 못했다. 이때 급히 뛰어온 듯한 사령의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상감마마, 어명하신 것을 대령하였사옵니다.”

연우는 의아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눈으로 무슨 일인지를 물었지만 훤은 아무 답 없이

일어나 건너 방으로 건너가 방문을 닫고 모습을 감추었다. 왕이 사라진 방으로 궁녀 세 명이

보자기를 소중히 가지고 들어왔다. 궁녀의 손아래에 조심스럽게 펼쳐진 그 안에는 연노랑

색동저고리와 다홍색치마가 곱게 접혀 들어있었다. 옛날의 연우가 사대부가의 여식이란 신분에

있을 때 입었던 옷이었다. 연우가 어리둥절할 사이도 없이 궁녀의 손이 재빨리 연우를 머리를 빗겼다.

그리고 한 맺힌 하얀 소복을 벗겨내고 색색이 고운 옷을 입혔다. 하얀색 옷의 흔적이 남은 것은

연노란 저고리 아래로 다홍색 치마를 가로지르며 떨어져 내린 눈물고름뿐이었다. 그나마도

하얀 눈물고름 아래엔 어명에 의해 새겨진 봉황이 수놓아져 있었다. 연우는 훤의 의중이

무엇인지 헤아리지도 못한 채 궁녀들의 안내를 받아 강녕전의 뒤편으로 흔적을 숨기며 나갔다.

그곳엔 달빛에 조차 모습을 숨기며 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우는 훤을 발견하자 월대로

내려서려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왕의 옷을 벗고, 온양에서 처음 만났던 그 모습 그대로

연우를 향해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왕의 뒤에 있는 운도 처음 만났던 모습 그대로

버티고 서있었다. 다소곳하게 멈춰선 연우를 본 훤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하얀 소복을 벗은 여인은 완전한 연우가 되어 있었다. 처음 만났던 월이 아니었다.

연우는 훤에게로 다가가기 위해 월대에 발을 내리려고 했다. 낡은 짚신조차 없었기에 그냥

버선발을 떼었지만, 훤이 먼저 달려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몸을 숙였다. 주위에 있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깜짝 놀란 연우가 얼른 몸을 숙이려 했지만,

자신의 버선발을 살며시 움켜잡은 그의 손길에 동작을 멈추고 숨도 멈추었다.

“월의 낡은 짚신이 내 가슴에 시리었소. 그리고 그 낡은 짚신이 연우낭자의 것임을 알았을 땐,

가슴의 시림은 곱절로 더하여졌소.”

훤은 등 뒤에 감춰두었던 비단혜를 연우의 발 아래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시린 발을

녹이려는 듯, 자신의 시린 가슴을 녹이려는 듯 소중히 감싸 쥔 손을 놓으며 비단혜를 발에

신겨주었다.

“한 뺨, 한 뺨 소녀의 시린 가슴이 시나브로 덜어진다 하였더니, 그것이 상감마마께로

건너갔었더이까. 송구하고, 또 송구하여이다.”

훤이 일어서 연우의 손을 잡았다. 비단혜마저 갖춰 신은 연우는 훤의 손에 이끌려 월대로 내려섰다.

그의 커다란 흑립이 연우의 얼굴까지 가릴 만큼 가까이 잡아당겼다.

“내어주시오. 그대의 시렸던 마음 모두 내게로 내어주시오. 내가 내 죄를 사하는 것은 그것뿐이오.”

“마마, 하온데 지금 어디로 가시려 하옵니까?”

훤은 어두움에 표정을 숨기며 연우의 어깨를 잡았다. 어둠에 기댄 그의 표정이 당장이라도

눈물을 떨구어 낼 듯 안쓰러웠다. 연우는 알 것 같았다. 지금 어디로 가려하는지를. 그리고

왜 이렇게 그의 마음이 시린지를. 지나간 그녀의 시린 가슴이 건너갔기 때문이 아니었다.

앞으로 다가올 시린 감정들을 그가 먼저 맞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행여나 연우가 또 다시 다칠까봐

두려워 어찌할 바 모르고 먼저 마음이 아파버렸던 것이다. 연우는 훤이 자신을 대신해

더 큰 소리로 울어버릴 것만 같아 위로하듯 살며시 그의 옷고름을 잡았다.

“상감마마께옵서 곁에 있는 한, 소녀의 가슴이 시리진 않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어디든 데리고 가 주시옵소서.”

둘은 다정히 손을 잡고, 서로의 마음에 의지하며 운을 스쳐지나 월대를 내려갔다. 조용히 마음을

감추고 있던 운의 눈으로 미처 사라지지 않은 월이 들어왔다. 연우의 등 뒤에 가녀리게

매달린 월의 흔적, 붉은색 낡은 댕기였다. 운은 얼른 눈길을 거둬 급하게 복면을 쓰고 왕과

연우를 따라 내려갔다. 월대 아래에는 검은색의 작은 가마가 준비되어 있었다. 밤 미행을 위한 것이었다.

먼저 훤이 흑립을 손으로 잡으며 작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연우도 뒤따라 들어갔다.

워낙에 좁은 내부였기에 훤의 품 안에 연우가 꽉 안겨야만 했지만, 그들에게 있어선 좁은 것이 아니었다.

좁은 공간을 핑계 삼아 훤이 너무도 힘껏 연우를 안았기 때문이었다.

“가마가 부질없이 크오.”

둘이 자세를 완전히 갖춰 앉자, 어두운 담벼락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가마꾼들이 나타나

가마를 들었다. 그들은 모두 검은색 복장에 복면을 쓰고 완전 무장을 한 무사들이었다.

운이 앞서 가벼운 몸을 하늘로 띄웠다. 그리고 담을 타고 훌쩍 뛰어, 건물의 지붕으로

날아올랐다. 이미 짜여 진 궐내 군사들의 행동반경을 비집고 운이 손짓하는 대로 가마를

든 무사들도 재빠른 발걸음으로 소리 하나 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왕과 연우를 태운

가마는 여유 있게 경복궁을 빠져나가, 한양 일대를 순찰하는 순라군(巡邏軍, 도둑이나 화재

따위를 경계하기 위해 밤에 사람의 통행을 금하고 순찰을 돌던 군졸)의 눈을 따돌리며 북촌을 향했다.

#39

염은 그 어떤 소리도 듣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지도 못하는 사이 방으로 들어와

방문에 기댄 채 그 자리에 주저앉은 그에겐 시간이 지나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해가 지고 달이 떠 올라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꼼짝 않고 앉아 자신의

감정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밤이 깊어진 시간, 방문 밖에서 누군가가 지치지 않고 오랫동안

조용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염의 귀에는 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신처럼 앉아

있던 염에게 바깥의 목소리는 어느새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염의 등 뒤로 커다란 갓을 쓴

사내의 그림자가 흐릿한 검은 빛으로 방문에 그려졌다.

“나의 스승! 제자를 버리려 하오? 제자의 죄를 꾸짖고 훈계를 함이 스승의 마땅한 도리가 아니오.

이 제자, 스승께 벌을 청하러 왔소. 부디, 허 문학!”

힘들게 염의 귀로 들어간 목소리는 왕의 것이었다. 염은 의식이 없다던 왕의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지지가 않았다. 노심초사 안후를 궁금해 하던 상대가 자신을 부르는데도

첩첩이 쌓이는 마음의 두려움이 이를 막았다.

“허 문학! 그대가 나를 저버리는 것은 스승이 제자를 저버리는 것이오. 그대에게 버림받은

왕이 어찌 백성의 어버이가 될 수 있겠소? 백성을 위한다면, 그대의 얼굴을 보여주시오.

그대의 목소리를 들려주시오.”

왕의 간곡한 애원에 염의 입이 가까스로 열렸다.

“소신은 문학이 아니옵니다. 의빈도 그 무엇도 아니옵니다.”

“나의 스승임에는 변함이 없소.”

“청컨대 오늘은 용안을 뵈옵기엔 소인의 덕이 부족하옵니다. 흐트러진 충심으로 어찌 뵈옵겠습니까.

훗날 단정히 하여 국궁(鞠躬)하겠사옵니다.”

훤의 목소리가 한동안 단절되었다. 흐트러진 충심이란 염의 말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안심도 되었다. 충격으로 부서진 의식 가운데에서도 염은 여전히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부드러운 듯 강한 그의 내면이 새삼 감사했다.

“이렇게 오기 어려운 길이었소. 문전박대를 하고자 함이오?”

“상왕마마께옵서 우리 연우의 죽음을 덮은 것이 사실이옵니까?”

갑자기 던져진 질문에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망설이던 훤이 겨우 말했다.

“그렇소. 허나 변명할 기회를 주오.”

떨리는 훤의 목소리 뒤로 더 떨리는 염의 말이 이어졌다.

“상감마마의 액받이무녀로 있는 것도 사실이옵니까?”

훤의 입술은 더 이상 움직여지지 않았다. 오직 가늘게 떨리는 것을 진정하고자 이로 짓누른 짓만

할 수 있었다. 왕의 답을 기다리다 지쳤는지 염이 한 글자, 한 글자 피로 써내려가듯 말했다.

“우리 연우가 소신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던 것이옵니까? 소신이 그 가엾은 아이를 그리

만들어버린 것이옵니까?”

“어찌 그대 때문이겠소? 과인의 죄요. 군주의 덕이 부족하여 이 지경이 된 것이오.”

염과 똑같은 마음으로 자책하는 왕의 비탄이 그에게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염의 등 뒤에 있던

그림자 옆에 차분한 여인의 그림자가 가까이 보태어져 자책하는 그림자를 위로했다.

하지만 염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살아있으면서도 이 오라비에게 오지 않은 그 아이를 원망하였더니, 그 아이의 발걸음을

막아놓은 것이 나였었다니······. 나 죽어도 그 아이를 볼 수 없을 것이옵니다.”

한탄을 담아 토해 낸 염의 말소리에 고아한 연우의 목소리가 섞이며 어울려졌다.

“진정 저를 아니 보실 것입니까, 오라버니?”

염의 정신이 놀라움에 번득 깨어났다. 순간 그의 눈으로 방바닥에 자신의 그림자와, 멀리서

만들어진 두 사람의 그림자가 뒤엉켜 있는 것이 들어왔다. 여리게 서 있는 여인은 분명 연우였다.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차마 문을 열고 나가지 못하고 열려던 문고리를

힘껏 잡았다. 그리고 목 놓아 불러보지도 못했던 연우의 이름을 이로 가둬 삼켰다. 문을 열어

보고 싶은 마음이 북 받혀 오면 올수록 염은 자신의 존재를 질책하느라 가슴을 움켜잡고

스스로의 심장에 철퇴를 가했다.

“오라버니······. 저 연우입니다. 오라버니의 글 읽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던

연우입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를 부르는 말은 똑같지만, 옛날에는 까르르 거리는 웃음소리와도 같았던 연우의

목소리가 이젠 슬픔에 길들여진 목소리로 변해있었기에 염의 심장은 더욱더 끊어질듯 아파왔다.

저 슬픈 목소리를 만들어 놓은 것도 모두 자신의 존재 때문이었다.

“욱······, 욱······, 연우야······.”

울음을 삼키며 연우를 부르는 염의 소리는 방문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오라버니, 보아주세요. 이 연우가 얼마나 컸는지를. 그리고 살아있어서 고맙다고 해주세요.

오라버니가 보고픈 마음에 의지해서 살아온 제가 빈 마음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나 살아 남아

다행이었다 여길 수 있도록.”

연우의 간곡한 청에도 불구하고 염의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그의 울음이 차분한 목소리를

타고 건너갔다.

“내가 널 죽였구나. 널 죽인 대가로 폐부지친(肺腑之親, 왕실의 가까운 친족)이 되어

비단옷으로 치장하고, 웅어(雄魚, 비싸고 맛있는 음식)로 입을 호강하며 이 오라비가 살아왔구나.”

“살아주시길 바랬습니다! 그리 살아주시길 빌었습니다. 저의 간절한 바램이었습니다.

······보고 싶어요, 오라버니!”

차츰 높아지는 염의 울음소리가 연우에게로 그리고 왕에게로 가서 내려앉았다. 차마 문도

열지 못하고 울 수밖에 없는 스승의 마음으로 인해 훤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하지만 연우는

울 수가 없었다. 울어선 안 되었다. 그러기엔 하늘의 달이 너무 큰 걸음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정히 치마 끝을 들고 염의 방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훤이 손수 신겨준 비단혜를 섬돌 위에

벗어두고 대청으로 올라가서, 염이 쥐고 있는 방문 앞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그리고 오라비의

괴로움을 걷어내는 손길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열리는 문 사이로 서로 닮은 오누이의

눈이 만났다. 눈물로 얼룩진 오라비의 얼굴은 그 옛날 보다 훨씬 아름다워져 있었고,

작은 손을 떨구고 아버지의 품에서 잠들었던 누이는 세월을 뛰어넘어 여인이 되어 있었다.

염의 목구멍에서 피가 끓는 소리가 나왔다.

“이리 살아있는 것을······. 이리 살아있는 것을······.”

연우가 염의 손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을 먼저 낚아채듯 움켜잡은 것은

염이었다. 살아있는 누이의 체온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서로가 느낀 것은 싸늘한

현실이었다. 살아있기에 헤어져 있던 세월 동안의 누이의 괴로웠던 삶이 피폐해진

염의 가슴에 차갑게 와 닿았다.

“나 때문에 못 왔느냐? 내가 있어 집에 돌아오지 못하였느냐?”

“언제나 매일 매일 집에 돌아왔었습니다. 단지, 왔던 것은 넋뿐이라 발자국을 남기지

못하였을 뿐이에요.”

“나 때문에 네가······,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연우는 입가에 미소를 보이며 오라비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빗물이 오라버니의 얼굴에만 내리는 건가요? 이리 많은 눈물을 쏟아내시니,

제가 흘릴 눈물이 없잖아요. 제가 흘릴 눈물도 조금 남겨주세요.”

염은 눈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 연우를 보기위해 애써 눈물을 삼켰지만, 눈물은 그쳐지지 않았고,

울음소리는 멈춰지질 않았다.

“오라버니께서 이리 스스로를 탓하신다면, 전 살아있는 것을 후회할 수밖에 없어요.

칭찬해주세요, 오라버니. 잘 살아있다고······.”

목구멍을 넘어선 눈물 때문에 염은 말은 하지 못하고 고개만 힘껏 끄덕여보였다.

하지만 한두 번의 끄덕임만으로는 연우가 살아있는 고마움을 다 전할 후 없었기에

계속해서, 계속해서 끄덕여보였다. 훤은 더 이상 가여운 오누이를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몸을 돌려 매화나무 끝에 잡힌 달을 올려다보았다. 달을 보기도 부끄러웠다. 그래서 고개를

숙여 매화나무 그림자를 보았지만, 그 끝에 달은 없었다. 훤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몰랐구나. 달은 세상 모든 것들의 그림자는 남기게 하여도, 스스로의 그림자는 남기지 않는다는 것을······.”

염은 눈물을 그치고 연우의 어깨너머로 왕의 등을 보았다. 슬픔에 지친 사내의 등이었고,

고뇌하는 제왕의 등이었다.

“상감마마, 소신······.”

“이제 내가 보이오?”

여전히 등을 보이며 서있는 왕에게로 염은 몸을 숙여 말했다.

“소신의 아픔만이 큰 줄로만 알고, 상감마마의 아픔은 아니 보았사옵니다.”

“나의 아픔 또한 어디 연우낭자의 아픔에 비할 손가? 달이 남겨 준 내 그림자를 보오.

모든 이의 죄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질 않소?”

염은 고개를 들어 천천히 연우를 살펴보았다. 달빛 아래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눈빛도, 손끝도 슬픔을 접은 채 추위조차 쫓고 있는 듯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분명 살아 있었다.

“고맙다. 살아있어 주어서······. 이토록이나 어여쁘게 자라주어서······.

단지 지금 내가 애석한 것은 이렇게 자라는 동안의 너를 보아주지 못한 것이야.”

“저도 고맙습니다. 이렇게 살아주셔서······.”

염은 자리에서 일어나 뜰에 내려섰다. 그리고 왕의 옆으로 다가가 자신의 그림자가 잘 보이도록 섰다.

훤은 염의 그림자를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어 매화나무 끝을 올려다보았다.

“곧······, 도화랑(桃花浪, 복사꽃 필 무렵 눈이 녹아서 불어난 물결. 즉, 봄)이 일 것이오.

옛날, 세자빈 간택 때의 봄날로 되돌려 놓을 것이니.”

“시간은 되돌릴 수 없사옵니다. 다시 오는 봄을 맞을 뿐이지요. 흉터만이 가득한······.”

“이미 도화랑은 일고 있소. 막을 수 없이.”

“그 도화랑이 일면 긴 겨울을 이끌었던 동장군은 어찌되는 것이옵니까?”

“어찌하면 좋겠소?”

염은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리고 싸늘한 미소로 왕에게 말했다.

“상감마마! 소신의 그림자도 보아주시옵소서. 이 천신, 예전에는 의빈으로서,

이제는 짙은 그림자를 가진 자로서 입을 열지 못하옵니다.”

두려워했던 말이 염의 입에서 단호하게 나오자, 연우의 두 손은 저절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훤이 연우를 대신해 슬픈 목소리를 높였다.

“죄를 지은 것은 그대가 아니오! 가장 큰 상처는 그대가 받았소.”

염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를 응시하며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역사 속의 죽어간 죄인들 중에 본인만의 죄로 죽은 자가 얼마나 되겠사옵니까? 동장군이

물러가지 않으면 도화랑은 일지 못할 것이옵니다. 세자빈을 시해한 자를 벌하시는데,

열외로 두려는 자가 있어선 아니 될 것이옵니다.”

“난 그대를 벌할 수 없소! 그대를 벌한다면 나 또한 같은 벌을 받아야 하오!”

“상감마마! 부디 사람을 보시지 마시고, 죄만 보시옵소서. 소신을 보시지 마시고,

소신의 죄를 보시옵소서. 소신은 세자빈을 시해한 여인의······지아비이옵니다.”

“난 세자빈을 시해한 여인의 오라비요! 죄의 경중을 논한다면 나의 죄가 더 무거울 것이오!”

“상감마마의 죄를 물을 수 있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지만, 소신의 죄를 물을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많사옵니다.”

훤은 자신의 입술을 씹었다. 이것이 외척들이 의도했던 마지막 음모임을 알 수 있었지만,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앞면은 의빈의 얼굴로 입을 봉하고, 돌아선 뒷면은 죄인의

얼굴로 입을 봉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다른 방종한 자가 아닌, 오직 염의 인격이기에

가능한 음모였다. 오랜 시간이 흐를 동안, 떨어지는 연우의 눈물과 바람결에 흔들리는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제외하고는 어느 것도 움직임을 가지지 않았다. 훤은 큰 숨을 삼키며

눈 끝으로 매화나무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그 어느 집 보다 우아하게 자란 매화나무에게 말했다.

“옥을 쪼아 옷을 만들고, 얼음을 마셔 정신을 길렀다. 해마다 서리와 눈을 맞기에 봄날의

영화로움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영매(詠梅, 매화를 읊음)-정도전> 이 시는 너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매일을 너에게 옥처럼 고결한 인품과 얼음처럼 차가운 신념을 가르친 네 주인을 말하는 것이다.

네가 이리 아름다운 것은 그의 행동을 보고 그의 정신을 보아 저절로 닮은 것일 테지. 네가 부럽구나.

······운아!”

나지막하게 깔리는 훤의 말을 바람이 치고 올라가 지붕 위, 처마 끝에 곧게 서있던 운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에 부대끼며 사라졌다. 그리고 왕의 부름과 동시에 운의 몸은 처마 끝에서 사라져,

땅에 우뚝 솟아났다.

“돌아가자. 허 문학이 나에게 자신의 죄를 묻는다는 것은 여전히 나의 신하란 뜻이 아니겠느냐?

오늘의 잠행은 분에 넘치는 결과를 가져가는구나.”

담벼락 아래의 어둠에 숨어있던 가마와 가마꾼들이 운의 손짓에 뜰로 나왔다. 훤은 가마꾼들을

보다가 몸과 얼굴을 완전히 돌려 염과 마주섰다. 그리고 염의 그림자가 아닌, 염의 눈동자를

보며 왕의 위엄으로 말했다.

“난 왕이다! 분명 내 손으로 누이를 벌해야 하고, 스승을 벌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결코

할 수 없는 것은 그대의 씨를 종의 신분에 두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슬픔이자, 곧 조선의

슬픔일 것이니.”

훤은 연우가 일어나 비단혜를 신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로 다가가 다정히 손을 내밀어 잡았다.

그 다정한 모습에 염의 한쪽 가슴이 녹아지는 듯했다. 훤은 미처 눈물을 다 닦지 못한 연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짓궂은 미소로 말했다.

“그대 오라비는 어찌 그대와 똑 같이 융통성이란 것이 없소? 하긴, 그대 오라비를 벌하는

것이 무에 그리 새롭겠소. 지금도 귀양살이와 다를 것 없는 삶이니.”

연우의 손이 다급하게 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눈물 맺힌 깊은 눈동자를 왕에게 애원하며 매달렸다.

차라리 자신을 벌하고 오라버니를 놓아달라는 말을 눈동자로 하고 있었다. 염이 스스로를

책망하는 것과 같이 연우도 자신을 책망하고 있는 눈동자였다. 훤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제발,······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마시오. 나란 놈도 다른 것은 잃어도 그대는 잃고

싶지 않은 한낱 소인배에 지나지 않소.”

훤은 행여나 연우를 놓칠 새라, 재빨리 끌어안고는 가마에 올라탔다. 왕과 연우가 모습을

감추기가 무섭게 가마꾼들이 가마를 들어올렸다. 염은 당황하여 가마를 향해갔다.

하지만 염이 다가오기도 전에 가마꾼들의 빠른 걸음이 그를 따돌리며 사라졌다. 아직 연우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아있는 숨결도 아직 다 세어보지 못했기에 눈물 흘리느라

낭비한 시간이 원망스러웠다.

“이리 급히 가다니. 네가 어찌 생겼는지 보지도 못하였는데······. 작은 무어라도 쥐어줄 걸.”

흐느끼는 염의 말을 들었는지, 담장 위에 서서 염을 보고 있던 운이 가볍게 날아올라 매화나무 끝에

갓 꽃망울을 맺은 가지를 꺾어, 등 뒤 허리끈에 꽂고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듯 사라졌다.

#40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누이가 꿈만 같아서 염은 허망한 눈동자만을 어둠 속에 두었다.

그런 염의 눈에선 마치 죄인처럼 몰래 집으로 와서 자신을 낳아준 어미도 못보고 가는 누이가

가여워 내리던 눈물조차 말라버리고 말았다. 염은 차가운 추위 속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뗀 걸음은 사랑채와 안채를 오가는 뒷길의 쪽문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곳에 간 걸음이 순간 우뚝 멈춰졌다. 누군가가 쪽문에 비스듬하게

기댄 채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젠 유심히 살펴보지 않아도 설임을 알 수 있었다.

“주인 따라 온 것이냐?”

“아닙니다. 주인께 온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염의 표정을 살피며 설이 다시 말했다.

“사람 마음이 어찌 한낱 문서 아래에 놓일 수 있겠습니까? 쇤네의 마음 속 주인은 오직 단하나,

도련님이십니다. 처음 이 집으로 팔려왔을 때부터 줄곧 그러하였지요. 쇤네가 읽지도 못하는

글자가 적혀있는 종이 쪼가리 따위가 건네졌다 하여 제 마음까지 이곳에서 팔려갔던 것은 아닙니다.”

염은 설의 말과 마음이 무의미하다는 듯 아니, 세상 모든 것들이 무의미 하다는 듯

허한 미소를 들어 하늘로 뿌렸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말이냐? 네 마음속의 주인이 나라 한들, 난 네 마음을 단 한 번도

소유한 적이 없으니······.”

염의 목구멍에서 뜨거운 입김이 한숨과 함께 토해져 나왔다. 그래서 설은 자신의 사랑이 아픈지,

그의 사랑이 아파서 자신의 마음도 아픈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염의 눈길이 천천히

돌려져 쪽문을 넘어 안채를 향했다.

“내 존재가 죄구나. 내 마음은 더 큰 죄로구나.”

“그래서 벌을 자청하시는 것입니까?”

“자청하는 것이 아니다. 응당 받아야 하는 벌이니 상감마마의 성심을 평안히 하여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아울러 가장 잔인한 복수이기도 하지요. 공주자가껜 도련님 스스로 벌을 받은 것 보다 더한

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벌을 받는 것이 가장 큰 복수라······. 슬프구나.”

“도련님······.”

설이 염의 애달픈 입김을 위로하려 발걸음을 떼자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멈춰 세웠다.

“더 이상 내게로 오지 말고 가거라. 그리고 나를 사내로 볼 것이라면 이제 이곳에 오지마라.”

설의 걸음이 뒤돌아섰다. 그리고 슬프게 돌아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정성을 다해 염에게 말했다.

“도련님. 스스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 몫만큼 연우아가씨의 눈에서 눈물을

뽑아내실 것입니다. 쇤네, 비록 아무 것도 못하고 아가씨 옆에 있기만 하였지만, 그 동안의

세월을 보아왔습니다. 무덤 속에서 살아나 공포에 질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아기씨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왔던 말이 ‘오라버니’였습니다. 제일 먼저 찾았고, 가장 많이 불렀던 말이었습니다.

왜 아가씨가 이곳에 돌아오지 못했는지, 누구를 위해서였는지 헤아려주십시오. 아가씨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그 누구보다 가장 행복해지셔야 합니다. 그것만이 그동안의 죽어있던 아가씨의

삶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염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것을 알기에 그의 마음이 더 아픈 것이었다. 그를 애타게

불렀을 것이기에, 그런 누이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기에, 작은 누이가 오라비를 위해 어머니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을 알기에······. 망설이고 있던 설의 슬픈 흔적이 뒷길에서 사라졌다.

염은 홀로 서서 쪽문을 보았다. 한참을 보고 있던 그의 입술이 자조적인 미소와 더불어 움직였다.

“어찌하면 행복해지는지 이젠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구나.”

염이 큰 목소리로 행랑채를 향해 말했다.

“여봐라! 누구 깨어 있느냐?”

염의 소리에 놀란 청지기가 눈을 비비며 냉큼 뛰어나왔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습이었다.

“주인어른! 이 시간에, 이리 추운데 바깥에서 무얼 하십니까요?”

“내가 널 깨웠구나.”

“아, 아닙니다요. 마당에서 자꾸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잠결이 어렴풋하게 깨어나

있었습니다요. 바람소리인가 했는데, 아니었습니까?”

“잠이 깼으면 못과 길고 단단한 나무를 가져오너라. 망치도.”

청지기는 어리둥절했지만 염의 모습이 너무도 슬퍼 보여 그 어떤 질문도 하지 못한 채 창고로

가서 주인이 시킨 것을 한 아름 가져왔다. 염은 청지기가 가져다 놓은 것을 한참동안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힘겹게 그의 입이 떨어졌다.

“쪽문을 첩박도록(첩박다:사람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대문을 닫고 나무를 가로 걸치어 못을 박는 것) 해라.”

“네에?”

청지기가 당황하여 염과 쪽문을 번갈아 봤다. 쪽문은 일반 문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청지기도 잘 알고 있는 것이기에 어쩔 줄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무얼 하느냐? 어서.”

“아니, 저기······, 저, 주인어른······.”

“부디, 나에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네가 하지 않겠다면 내가 할 것이다.”

어쩔 수가 없었다. 청지기는 어렵사리 나무를 들어 쪽문에 가로 걸쳤다. 그리고 세상 무엇보다

무거운 망치로 못을 박았다. 밤공기를 가르며 못 박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러 퍼졌다.

그 소리는 몇 배의 고통으로 염의 가슴에 박혀들었다. 청지기가 박는 못은 바로 염의 가슴에

들어와 박히는 녹슨 못이 되었다. 그리고 이 소리는 안채의 민화 방에도 들어갔다.

울다 지쳐 까무러쳤던 민화가 그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눈물로 퉁퉁 부운 민상궁이

민화를 불렀다.

“자가, 정신이 드옵니까?”

“이 소리가 무엇이냐? 무슨 소리냐?”

여종이 재빨리 일어나 소리 나는 곳으로 갔다가 새파랗게 질려서 돌아왔다. 그녀의 표정에서

민화는 어렴풋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설마, 설마······.”

“엉! 어찌 합니까? 지금 쪽문을 첩박고 있사옵니다. 엉엉!”

“누, 누가? 서방님? 서방님이?”

민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민상궁이 울면서 민화를 가로막았다.

“공주자가, 고정하시옵소서. 이러다가 태중 아기시께 일 생기옵니다.”

“놔라! 서방님이 이 가슴에 못을 박으시는데, 어찌 고정할 수 있단 말이냐? 나를 버리시려

하시는데!”

민화는 기어이 민상궁을 밀치고 방을 뛰쳐나갔다. 차가운 땅을 맨발로 밟으며 달려가는 민화 뒤로

민상궁과 여종도 따라 뛰었다. 쪽문에 도달한 민화는 힘껏 쪽문을 밀었다. 하지만 단단하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못을 박던 손이 민화가 미는 힘을 느끼고 동작을 멈췄다. 그 사이

나무 틈 사이로 초조하게 건너를 훔쳐보다가 등을 보이며 서있는 염을 발견하고, 눈물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민화가 말했다.

“청지기냐? 못질을 멈춰라! 기어이 못을 박으려거든 내 가슴에 직접 박아라!”

“멈추지 마라!”

조용한 듯 감정 없는 염의 목소리가 못 박는 소리보다 더 요란하게 민화의 귀로 들어왔다.

“서, 서방님······.”

“아이고, 나도 미치것네.”

못을 박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안 박을 수도 없는 청지기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서 안절부절 했다.

그리고 민화의 뒤에선 울며 비는 민상궁의 소리가 들렸다.

“제가 자결하여 용서를 빌겠사옵니다. 그러니 제발 거두어주시옵소서.”

민화의 울음소리가 큰 소리를 내며 염의 가슴으로 박혀들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첩박는 소리보다

더 고통스럽게 염의 가슴을 파헤쳤다. 더 이상 고통스러울 것이 없게 되자, 염의 입에서

가까스로 마지막 말이 나왔다.

“못을······단단히 박아라.”

민화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예전 이곳에서 단풍잎에 입 맞추던 염이 웃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 그의 입술이 닿았던 그녀의 입술도 웃고 있었다. 그 붉었던 단풍잎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눈에서 나무 틈 사이의 염의 등도 사라지고 있었다.

검은 가마가 소리도 없이 강녕전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오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훤과 연우가 내렸다. 훤은 달빛 아래에 선 그녀의 모습이 애처로워 이름을 불러보았다.

“연우낭자.”

그녀의 입술이 아름다운 경련을 일으키며 움직였다.

“그 어떤 것이어도 상감마마의 뜻에 따르는 것이 백성된 도리인 줄 알고 있기에 소녀, 이제껏

단 한 번도 상감마마를 원망하여 본 적이 없었사옵니다. 하오나, 오늘밤 오라버니께 정녕

그리 할 수밖에 없었사옵니까?”

“이제껏 그대가 내게 한 말 중에 가장 고마운 말이오. 그리 나를 원망하여 주시오.

대신 이 이후부터 그대가 그대를 원망하였다간 내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하오면 정녕 오라버니를······?”

연우의 물음을 외면하며 훤은 강녕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들어가는 왕의 뒷모습도 애처로웠다.

훤이 들어가고 없는 곳에 비 오듯 퍼부어지는 달빛과, 어둠과 함께 흐르다 멈춘 구름만이 남았다.

운은 복면을 벗은 뒤, 자신의 등 뒤에 꽂힌 매화 가지를 연우 앞에 내밀었다. 그것으로나마

어지러이 흔들리는 달빛을 위로하고 싶었다. 연우의 손이 운의 손에 닿으면서 매화 가지를

받아들었다. 운은 그녀의 손이 닿았던 작은 면적이 몸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만 같아,

그 마음을 숨기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단정한 손끝으로 마치 오라비의 눈물을 감싸듯

매화를 감싼 연우의 눈에서 눈물 덩어리가 맺혔다.

“오라버니······.”

“꺾어진 가지에도 매화는 피어납니다. 그리고 가지가 떨어져 나간 매화나무는 다음 해

그 가지에서 더 화려한 매화를 피워 올립니다. 뜯기고 잘려나간 가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훗날 화려한 꽃은 더 많이 필 것이고 그 향기는 더 넓은 세상에 퍼질 것입니다.”

목소리는 더 없이 차가우나, 마음은 따뜻한 운의 위로에 연우의 맺혔던 눈물 덩어리가 길게

늘어져 아래로 떨어졌다. 그 눈물을 감추려 그에게서 등을 돌려 섰다. 돌아선 연우의 허리에는

월의 댕기가 드리워져 운의 눈에 아릿하게 잡혔다. 운의 손이 댕기를 향했다.

하지만 차마 붉은 그것에 닿지 못하고 땋은 머리를 따라 손끝을 올려 그녀의 뒷목덜미에

맴돌다, 맴돌다 결국 주먹만 힘껏 쥐었다.

“소녀가 어리석게도 몰랐습니다. 더 푸른 하늘 위를 떠가는 맑은 구름도 마음이 있었음을······.”

운의 손이 움찔했다. 순간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의 댕기와 목덜미에 올라앉지 못하고 헤매던 운의 마음이 달빛의 장난으로

인해 땅에 그림자로 선명히 그려지고 있었고, 그것을 연우가 보고 있었던 것이다.

운은 달을 올려 보았다. 그리고 이마는 일그러졌지만 목소리는 변함없는 태도로 말했다.

“구름 속으로 흘러 든 것은 달이었습니다. 이제 달은 가고 없으니, 구름 속에 있어야 할 것도 없습니다.

애당초 구름 속에 있었어야 하는 것은 비겠지만, 이 구름은 비를 가진 것은 아니었기에······.”

연우는 운을 향해 돌아 서서 달을 올려보는 그를 올려보았다. 그의 강한 이마와 눈빛을 이렇듯

가까이서 똑바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참으로 강하신 분입니다. 연모의 정 아래에서 휘어지고 꺾이는 이가 그리도 많건만······.

원하신다면 원망이라도 받겠습니다.”

운은 연우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자신의 사랑에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달을 향해

싱긋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단지 지금 제가 원망스러운 것이 있다면, 처음 운우(雲雨, 구름과 비. 남녀 간의 짙은 정사를

비유한 것으로 주로 한시에서 관용적으로 쓰였던 단어)를 읊은 자, 그자가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말 속에 그의 미소가 녹아있었다. 그동안의 숨죽인 감정들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 무엇보다도 그를 미소 속에 있게 했다.

#41

법궁(경복궁)지도가 은밀히 양명군의 처소로 흘러들어왔다. 지도! 그 중 궁궐내의 지도란 것은

기밀 중의 기밀에 속하는 것으로 관상감에서만 특별히 관리되는 대상이었다. 그런 것이 양명군의

눈앞에 펼쳐졌다. 지도를 보며 차가운 미소로 양명군이 말했다.

“역시 관상감에도 우리 쪽 첩자가 있었군. 하긴, 관상감과 성숙청이 연관되지 않은 역모 사건이

역사상 어디 있었는가. 왕의 목숨조차 가벼이 들었다 내리는 자들!”

양명군의 차가운 미소를 파평부원군과 그 외의 일파들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런 그들을

향해 양명군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왕권을 잡은 이후에도 이들이 지금의 금상의 목숨을 쥐락펴락 하듯 나의 목숨 또한

그리 할 것인가?”

방안 가득 침묵만 차올랐다. 양명군은 어차피 그들에게서 답을 듣기 위해 물은 것이 아니라는 듯

상체를 구부정하게 숙여 방바닥에 펼쳐진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금이야 그리하더라도 훗날 내가 등극한 뒤엔 관상감이나 성숙청에서 새로운 첩자를

발굴하는 것이 나을 것이야. 나 모르게······.”

이 말은 그가 왕권을 탈취하자마자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쥔 관상감의 첩자들부터 죽이겠다는

엄포였다. 파평부원군은 경계를 하다가도 이렇듯 왕권을 잡은 이후까지 염두에 둔 그를

대할 때마다 비로소 조금씩 안심이 되고 믿음이 갔다.

“광화문의 위용이 너무나 높아 넘기가 쉽지 않을 것이야.”

양명군의 일그러진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파평부원군의 눈도 양명군에게 저절로

돌아가 박혔다.

“어디 넘지 못할 것이 광화문뿐이랴. 근정전을 넘어 강녕전으로 가는 향오문 또한 넘지 못할 터.

허니 뒷구멍이 제일 일세. 그렇게 엄금엉금 조악하게 강녕전에 들어가면 또 무얼 하나.

금상의 침상을 찾아 헤매다 시간 다 갈 것인데. 법궁도를 빼낸 자가 어침소까지 미리 알 수 있는가?”

“그것까지는······.”

말꼬리를 흐리는 자에게 양명군의 눈동자가 고정되었다. 섬뜩할 만큼의 냉기를 토해내는 눈동자였다.

“그런 준비도 없이 무슨 일을 도모하겠는가! 어침소를 미리 파악할 수 없다면 먼저 움직일 순

없을 것이다!”

“어침소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매일 달라지는데다가, 그것을 아는 자는 관상감의

세 교수와 운검뿐입니다.”

“그렇다면 거사도 있을 수 없다. 금상이 걸어 나오지 않는 한에는!”

마지막 흘리듯 내뱉은 양명군의 말 끝에 파평부원군의 눈빛이 반갑게 변했다. 양명군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기에 한동안 망설이다가 그의 입이 말을 풀어냈다.

“금상이 걸어 나오지 않는 한에는 이라 하셨사옵니까?”

“그렇소. 허나 의식 없이 누워있는 금상이 어찌 걸어 나오겠소?”

“있습니다! 궐내에 조심스럽게 떠도는 소문으로는 조만간 큰 굿이 있을 거라 하였사옵니다.

대비전에서 성숙청에 일러 금상의 병을 치유하고자 한다는. 그날, 금상의 옥체가 근정전의

기단 위에 놓여 질 것이옵니다.”

양명군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흘렀다. 그리고 파평부원군을 보며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금상을 위한 큰 굿이라······. 광화문과 근정문이 일시에 활짝 열릴 것이오!

하지만 문이 열리면 열릴수록 경계는 더 삼엄해 지는 법!”

옆에 있는 다른 자가 말을 받았다.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기은제(왕의 장수·무병을 기원하는 굿)가 거행된다는 날은 이번

보름달이 뜨는 밤이라 하였사옵니다. 즉, 5일 정도만이 남았단 뜻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숙청과 궁녀들의 움직임만이 활발할 뿐 궐내, 궐 밖의 군사의 움직임은 전혀 없사옵니다.”

기쁘게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서도 양명군 만큼은 신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좌중을 압도하는

그의 분위기 때문에 순식간에 다른 이들의 분위기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대비전에서 주관하고 있으니까 그럴 수밖에. 왕의 의식이 있었다면 기은제 자체가 거행되지

못했을 것이고, 깨어있다 하면 궐의 경비부터 챙겼을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마라. 금상을

대신해서 운검의 의식은 뚜렷하게 깨어있다는 것을!”

“그에겐 군사통솔권이 없으니 손쓸 수 없을 것이옵니다. 단지 의식 없는 금상과 더불어

검받이가 될 수밖에······.”

“구름이 그물에 걸리는 것을 보았는가? 그를 허투루 보지 말라!”

“허투루 볼 리가 있겠사옵니까?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인데요. 소인의 말은 그렇기에 양명군께옵서

그를 검받이에 지나지 않게 만들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그를 넘어 가야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시신을 넘어 가야하옵니다.”

양명군의 표정이 씁쓸한 미소를 띠며 슬프게 변했다. 그래서 모두들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다문 채 양명군의 눈치만 보았다.

“그렇겠지. 운검의 눈동자가 찢겨 나가고, 팔이 잘려 나가고, 다리가 잘려 나가도 그의 심장이

멈추지 않는 한에는 수백 명의 군사라 한들 지나가지 못할 것이니······. 그의 심장은

내가 잠재워 줄 것이다. 그의 아름다운 육신이 찢겨 나가기 전에, 벗된 자의 마지막 의리로!”

양명군은 옆에 있던 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칼날을 칼집에서 반쯤 빼내어 눈길로 훑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의아해 하는 이들의 눈빛을 더 빨리 훑었다. 양명군 혼자 운검을 상대한다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겠다는 의미였기에, 그가 진정 역모를 이루려는지 의심하는 눈빛이었다.

그들의 의심에 빙그레 미소를 보이며 양명군이 다시 말했다.

“난 그의 검을 안다! 그리고 결코 내 검이 그의 몸을 뚫지 못한다는 것도 안다. 허니 내 옆에서

나를 엄호해줄 이들을 먼저 선발한 뒤에 궐내에 침입할 군대를 편성하도록 하라.”

양명군은 검을 완전히 꺼내 법궁도 위에 세웠다. 그리고 정확히 근정전 위치에 검을 꽂았다.

검 날 만큼이나 그의 눈동자도 날카로웠다.

“이곳에 금상의 옥체가 놓이는 날, 나는 열려진 광화문과 근정문을 당당히 지날 것이다!

이 길이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이다!”

방안에 모인 모든 이들의 머리가 지도 위에 모여 맞댄 채 세부적인 작전을 오랜 시간 동안

의논했다. 하지만 의논이란 명분하에 이끌어가는 것은 양명군이었고, 그 외는 그의 진두지휘아래에

고개를 끄덕이는 역할만 할 뿐이었다.

파평부원군은 긴 의논 끝에 양명군의 방에서 나왔다. 모두가 비밀리에 빠져나간 그곳에서 그는

손끝으로 양명군의 감시를 위해 심어둔 무사 셋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의 귀를 가까이 하여

귓속말을 했다.

“거사의 날, 양명군과 함께 너희들과 다른 두 명, 도합 다섯 명이 선발대에 선다. 너희들은

양명군을 호위함과 동시에, 그가 헛으로 라도 움직일 시엔 일시에 그를 베어라!”

“네? 그라니요? 양명군 말씀입니까?”

“알듯 모를 듯 그 속을 짐작할 수가 없어. 조심은 하고 볼 일이다. 양명군이 우리의 뜻과

다르다 느낄 때는 내 즉시 신호를 보낼 터이니 너희들이 그의 가장 가까이에 붙어 있다가 그를 죽여라.”

무사 세 명의 표정이 하나 같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그들의 표정으로 인해 파평부원군의

표정도 불쾌하게 변했다. 그의 말이 매섭게 나왔다.

“그 사이에 그에게 매료되어 버렸느냐? 망각하지 마라. 너희는 양명군의 사람이 아니라,

윤씨 가문 사람이란 것을!”

파평부원군은 자신의 말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을 남겨두고 걸어 나갔다. 하지만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양명군의 사랑채를 물끄러미 보던 그의 입에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림이

나왔다.

“양명군! 역시 위험해도 같이 갈수밖에 없을 정도로 대단한 사내다. 그 어떤 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이는 힘이 무서울 정도니. 상왕 자신은 부족하여도 아들 둘은 잘 두었어.

하지만, 한 대에서 국왕의 자질을 가진 자는 하나여야만 하는 법! 국왕의 자질을 둘 다 타고

난 것은 국왕 자질이 단 하나도 없는 것보다 더 혼란한 것이다. 상왕은 그것을 알고 있었어.”

양명군의 집에서 나와 숨겨 세워둔 가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서도 알 수 없는 불안함이

파평부원군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마당을 이리저리 서성이던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측근 한 명을 불렀다.

“사병들 중에 자객 셋을 양명군 몰래 미리 빼두도록 해라.”

“하지만 한명의 인원이라도 모아두어야 하는 상황에 세 명을 어디에 쓰시려고 하십니까?”

“거사의 날에 우리가 움직이는 시간보다 약간 앞 서, 풍천위의 목숨부터 거두어야겠다.

그의 입을 아무리 봉합해두었어도 여전히 그의 존재가 불안하다. 양명군은 그를 떨칠 수가 없어!

그리고 민화공주! 금상의 약점임과 동시에 우리의 과거 죄업을 증명할 약점이기도 하다.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해 의빈 내외를 제거해야 되겠어.”

파평부원군은 조용히 뒷짐을 지고 땅을 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그림자

따위는 아니었다. 오직 자신의 권력을 이어가는 것에만 정신이 쏠려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양명군은 대단한 사내임과 동시에 위험한 사내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왕권을 탈취한 이후,

그의 움직임이 미리 걱정되는 것이었다. 그 또한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명분으로 외척들의

목줄을 쥐어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명분을 찾기 위해 그와는 연관이

없었던 과거의 죄를 들춰낼 것이다. 그 증거가 되는 민화공주, 그리고 외척을 밀어내고

자리를 메우게 될 사림의 구심점이 될 풍천위는 미리 제거해 두어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파평부원군은 양명군을 완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쥘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지금의

왕의 팔다리를 미리 제거했던 것처럼, 양명군의 팔다리 또한 미리 제거해 두어야만 자신의

권세는 지켜질 것이 분명하고, 팔다리가 제거된 지금의 왕보다 양명군이 훨씬 쉬운 상대였다.

생각에 빠진 파평부원군의 귀로 말이 흘러들어갔다.

“과거와 이어진 인물이라 하면 이미 우리와 다른 뜻을 가진 왕대비마마도 계시지 않사옵니까?”

파평부원군의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세상을 손에 쥘 인간의 여유 있는 미소였다.

“그 여자의 옆에는 이미 나의 명령만 기다리는 자가 있지 않느냐. 거사의 날, 왕대비는 독이 든

맛난 음식을 손수 자신의 입에 넣게 될 것이다. 양명군! 왕권을 잡게 된다 해도 자신의 뜻은

펼칠 수 없을 것이다. 풍천위의 누이도 그의 품엔 없을 것이야!”

성숙청의 구석진 방에 앉아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바느질을 하고 있는 장씨 앞에 설이

선머슴 마냥 털썩 주저앉았다. 장씨는 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는 계속해서 바느질을 하며 말했다.

“입이 대여섯 발은 나와 가지고선, 쯧쯧. 웬일로 여기 있는 게야? 또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고.”

“어째 불안합니다.”

“네 년같이 독한 년한테도 내릴 귀신이 있다던? 뭔 불안 타령이야?”

“이제껏 보았던 굿 준비와는 달라서요. 궁녀들이나, 무녀들이 모두가 하나같이 길쌈만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길쌈한 천은 검은색이고. 대체 어떤 굿을 준비하기에······.”

장씨는 바느질 하던 손을 멈추고 주먹으로 허리와 무릎을 통통 때렸다.

“조만간 큰 비가 내릴 것이야. 비가 와야지. 그래야 봄이 오지. 에구, 뼈마디 쑤셔.”

설이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런 예언쯤이야 신경통 있는 늙은이라면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여간 땡무당이라니깐.

그런 말 말고는 없습니까?”

장씨는 다시 바느질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끝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설은 장씨를 쳐다보며 그녀의 말을 눈으로 재촉했다. 장씨의 입이 웅얼거리듯 열렸다.

“설아! 기은제가 있는 날, 넌 아무데도 가지 마라. 여기 이곳에만 있거라. 북촌엔 부디 가지마라.”

설의 눈썹사이가 심하게 구겨졌다가 미세하게 경련이 일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침묵을 깨고 입가에 미소를 애써 담으며 말했다.

“무녀님, 하나만 여쭤보겠습니다. 이제껏 살면서 단 한 번도 궁금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

지금 문득 궁금하네요. 저를 낳아 준 어미는 지금 살아 계실까요?”

그녀의 목소리가 슬펐다. 장씨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받았다.

“땡무당이라믄서?”

“땡무당은 거짓말 잘하잖아요. 웃으면서 잘 살아있다고, 저를 보고파한다고, 그 정도 거짓말은

해주실 수 있잖습니까?”

장씨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바느질도 멈추지 않았다. 설은 포기한 듯 빙그레 웃으며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나를 낳아준 어미도 나에게 이름을 주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 이름이 종년의 신분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예쁜 이름이어서 주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을 뿐이겠지요.

분명 예쁜 이름이었을 겁니다. 설처럼······.”

“지지리도 말 안 듣는 년. 발걸음이 더디 가면 정도 더디 가니, 그리도 발걸음을 끊어라

하였건만, 부득부득 정을 이어놓았지? 그래도 북촌에는 제발 가지마라.”

“저······가야만 될 것 같습니다. 안 가면 제가 죽을 것 같아서······.”

“가지마라. 왜 불꽃이 뜨거운 걸 몰라?”

“불꽃이 뜨거운 걸 어찌 몰랐겠습니까? 단지 제가 녹아질까 두려워 가까이 갈 수 조차 없는

눈송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몰랐을 뿐입니다.”

장씨는 바느질 하던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설을 보았다. 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장씨와 눈이 마주치자 소리 내어 밝게 웃었다. 언제나 퉁명스러웠던 그녀의 표정이 아니었다.

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저, 제 주인께 돌아가겠습니다.”

“주인을 제 멋대로 정하는 종년도 있다던? 미친 년.”

“하하하! 그럴 수 있는 제 종년 팔자도 괜찮은 겁니다.”

설이 소리 내어 웃으며 방문 밖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비워진 그녀의 자리에선 여전히 그녀의

웃음소리가 머물러 있었다. 장씨는 바느질을 끝내고 이로 마지막 실을 끊어낸 뒤, 다 지어진

옷을 매만졌다. 그리고 옷을 들어 자신의 팔 길이에 맞춰보았다. 그녀의 몸에 딱 맞는 수의(壽衣)였다.

“더런 년. 지 평생 저리도 환하게, 저리도 큰 소리로 웃는 게 처음이지. 더런 년.

웃고 가지나 말지, 더런 년.”

#42

아직 완전한 보름달로 채워지지 못한 달이 하늘에 있었다. 내일이면 완전한 보름달이 될

그 달을 희망의 마음과 두려움의 마음이 뒤엉킨 채 보고 있는 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훤은 그 많은 마음들에 짓눌려 무거운 머리를 앉아있는 연우의 허벅지 위에 올리고 길게 누웠다.

“별들이 너무도 빛나고 있어 오히려 더 무섭소.”

“먹을 머금은 하늘에 소녀가 뿌린 눈물일 뿐이옵니다.”

“달빛이 땅을 밟는 소리가 시끄러워 견딜 수가 없소.”

“소녀가 시끄러운 소리를 막아드리겠나이다.”

연우는 손바닥으로 훤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내일을 기다리다 조급해진 훤의 마음도 가렸다.

연우는 손바닥에 닿은 그의 속눈썹의 움직임을 느꼈다. 가늘게 떨고 있는 그 움직임은

그녀의 마음도 떨리게 만들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왕이 가여워서였다. 연우는 서서히

훤의 눈을 가렸던 손바닥을 거두었다. 그리고 거두어진 그 자리엔 그녀의 입술이 대신 내려 앉았다.

훤의 속눈썹이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떨리며 연우의 입술로 전해져 왔다.

잠시 후, 그녀의 입술이 멀어지자 훤은 아쉬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기어코 그대가 나를 미치게 할 생각인 것이오?”

“시끄러운 소리가 막아졌사옵니까?”

눈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연우의 미소가 달빛보다 눈부셨다. 그 미소에 훤도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렇게 된 셈이오. 사내의 피가 들끓는 소리에 묻혔으니······. 내 이제껏 더하여져서

아름다운 것이 꽃들인 줄로만 알았소. 그런데 아니었구려. 나의 눈에 더하여진 그대의 입술이

더 아름답고, 그대의 얼굴에 더하여진 그대의 미소가 더 아름답소.”

“아니옵니다. 더하여져서 아름다운 것은 소녀의 미소에 더하여진 상감마마의 미소이옵니다.

그러니 부디 소녀의 미소에서 상감마마의 미소를 감하지 마시오소서.”

“미소만? 아니오. 나의 입술에 더하여진 그대의 입술이 가장 아름답소.”

훤은 연우의 입술을 기다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기다리는 입술이 짓궂은 모양을 하며 한쪽

끝으로 슬쩍 말려 올라갔다. 연우의 입술은 그의 말려 올라간 입술의 끝에 닿았다. 하지만

닿은 그 느낌이 너무도 부드러워 달빛만이 닿은 것 같았다. 그리고 훤의 피를 들끓게 하고는

그녀의 입술은 멀어졌다. 훤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말했다.

“그리 거두어 가는 것이오? 괜찮소. 나 내일을 넘기면 그대에게서 입술만이 아니라 그 이상을

받을 것이니. 이젠 달빛도 시끄럽지 않고 내일도 두렵지 않소. 그대가 나의 중전이 될 사실

아래에 다른 그 무엇이 두렵겠소.”

훤의 손이 연우의 손을 더듬어 꼭 쥐었다. 손끝이 아릴만큼 힘껏 쥐었는데도 부드럽고 따뜻했다.

시간이 흘렀다. 달이 흐르고, 구름도 따라 흐르고, 해가 흐르고, 또한 구름도 따라 흐르고,

붉어진 하늘을 검은 빛으로 밀치며 또 다시 달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많은

구름이 달을 에워싸고 따라 흐르고 있어 보름달의 윤곽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편전에서 정무를

마친 대신들이 내삼청의 군사들의 지시로 일찌감치 퇴청을 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들

속에서도 역모에 가담한 자들의 분주한 걸음이 있었고, 비상한 기운을 느끼고 한탄하는 자들도 있었고,

아무 것도 모르고 성숙청의 기은제를 반대하는 자들도 있었고, 뼈 속 깊숙한 곳까지 유학자인

몸으로도 오직 단 하나 왕의 강령만을 기원하여 기은제를 찬성하는 자도 있었다.

장씨는 정성을 다해 머리를 빗어 붉은색 나무 비녀로 쪽을 졌다. 오랜만에 거울에서 보는 자신의

모습은 검은 머리보다 흰 머리가 훨씬 많았다. 보내버린 세월이 아쉬운 듯 거울 속의 자신에게

미소한번 보낸 뒤, 도무녀로서 하얀 소복을 입고는 방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나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자신의 방안 구석에 곱게 접힌 채 놓여 있는 수의를 보았다.

이내 고개를 돌려 방을 나갔다. 방문 밖에는 수종무녀들이 채비를 마치고 도무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의 모습이 나타나자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장씨는 차가운 땅의 기운을 맨발로 밟았다.

눈으로 수종무녀들을 한 번씩 어루만지니, 멀리서 잔실이가 울며 달려와 장씨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잔실은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음에 자신의 입술만 꽉 깨물고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장씨의 손이 가볍게 잔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잔실아, 기억해라. 왕과 백성을 잇고, 백성과 하늘을 잇고, 하늘과 왕을 이었던 것이 우리

성숙청이었음을. 내 비록 한 때의 어리석음으로 하늘을 저버리긴 했으나 성숙청이 왕실을

버리지는 않았다. 앞으로도 역사를 쓰는 자들이 유학자들이기에 우리는 역사 속에 악인으로만

기록되겠지만······그 어떤 수모 속에서도 끝까지 왕실과 함께 해야 한다. 언젠간 사라질

성숙청의 운명이라 하더라도 마지막까지······마지막까지······.”

장씨는 몸을 돌려 성숙청을 나섰다. 그 뒤를 수종무녀들이 기러기 떼가 긴 길 가듯 따랐다.

차가운 바람이 장씨의 옷고름을 날리고 옷자락을 날려도 그녀는 묵묵하게 차가운 땅을 맨발로

밟으며 근정전으로 나아갔다. 성숙청 바깥의 먼발치에서 혜각도사가 그들의 행렬을 보고 있었다.

장씨의 눈길이 잠시 혜각도사에게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이윽고 바람에 실어 전해오는 그의

소리가 들렸다.

‘그리 가는 게요? 미안하오.’

바람에 장씨의 소리도 섞었다.

‘이리 가도록 나를 불러들인 건 혜각도사였소. 어차피 다 갉아 먹어 길게 남아 있지도 않은

수명이었소. 내 손으로 더럽혔던 하늘늑대별을 마지막 남은 내 명을 바쳐 닦아내는 것뿐이오.

엉켜있던 왕과 왕비의 인연의 끈을 풀어 온전한 합을 비는 것이 성숙청 도무녀로서 더 없는

영광인 것을······. 혜각도사! 마지막까지 두 분의 끈을 놓치지 않고 이어주어 감사하오.

그대가 아니었다면 난 내 죄 값을 치룰 기회도 얻지 못하였을 것이오.’

혜각도사는 멀어져가는 도무녀와 수종무녀들의 행렬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염은 바깥 기척에 정신이 쏠려 있었다. 예감이란 것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한 그였지만

오늘밤은 달랐다. 멀쩡했던 왕의 기은제를 한답시고 왕실에서 친히 가마를 보내 모친을 모셔

가는 것도 이상했고, 궁에서 나온 비자가 여전히 왕의 의식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이상했다.

연우를 둘러싸고 모종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음을 느꼈기에 염의 신경도 날카로워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 속에 민화와 자신도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 까지는

알지 못했다. 순간 창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검을 지닌 사내의 그림자인 듯했다.

“누구냐?”

염의 경직된 물음에 그림자가 공손하게 답했다.

“쇤네, 설입니다.”

염은 긴장된 마음을 놓고 목소리는 더 이상 다가오는 정을 막으려는 듯 최대한 쌀쌀하게 말했다.

“내가 오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도련님을 사내로 볼 것이라면 오지 말라 하시었을 뿐입니다. 지금 쇤네는 그런

마음을 버리고 온 것입니다.”

한순간에 버릴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임을 염도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문득 그림자가 사내 복장을 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허리에 검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알아차렸다.

“웬 검이냐?”

설은 대답이 없었다.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네가 검을 익혔구나. 그래서 줄곧 나를 따라다니는 흔적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구나.

왜 하필 검을 잡았느냐?”

“글을 읽을 수는 없었기에 그리 하였습니다.”

염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설의 마음속 대답도 듣지 못했다.

‘쇤네가 잡은 것은 검이 아니었습니다. 도련님의 기억과 도련님의 몸짓을 잡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염이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인 일로 검을 가지고 이곳에 온 것이냐? 그리고 너의 옷차림은 또 무엇이냐?”

설은 단 한 번도 검을 지니지 않고 이곳에 온 적이 없었다. 언제나 치마아래에 숨겨놓았기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것을 염이 알 리가 없었다.

“그냥······먼 길을 떠나기 전에 도련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인사입니다.”

마지막이라는 인사 때문에 염은 천천히 일어서 바깥으로 나갔다. 이 또한 마지막 먼 길을 떠나는

자에 대한 인간적 예의였다. 설은 대청에 나와 선 염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염다웠다.

자신이 사랑한 것이 아깝지 않을 만큼, 오히려 사랑하게 만들어 준 그의 인간됨이 감사할 만큼

행복해서 더 없이 밝은 미소를 지었다. 염은 설의 미소가 낯설어 의아해하며 말했다.

“먼 길이라니? 길 떠나기엔 그리 좋은 날씨가 아닌 듯 한데······.”

비록 남녀 간의 애정이 깃든 염의 염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설은 행복했다. 그래서 더욱더

환하게 웃었다. 염은 설을 따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디 좋은 곳으로 가나보구나. 아마도 너의 이리 밝은 미소는 처음인 듯 하니.”

처음 인 것은 환한 미소만이 아니었다. 염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도 처음이었고,

스스럼없이 가까이 다가가 선 것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아름다운 뺨에 손을

대어본 것도 처음이었다. 염은 설의 손이 닿자 눈에 슬픔을 담으며 말을 흘렸다.

“가엾게도······. 젊은 여인의 손이 이리도 거칠다니.”

설의 손이 멈칫했다. 그 순간 염의 고운 손이 그녀의 추한 손을 가볍게 감싸 잡았다.

“우리 연우의 손을 잡았을 때 예전과 변함없이 여전히 고와서 마음이 덜 아팠었다. 그 아이의

손이 그리도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너의 손이 거칠어졌기 때문이었음을 내 이제야

알 것 같구나.”

설은 웃는 눈에 눈물 한줄기를 흘러 보내며 손을 거둬왔다. 태어나 지금까지 줄곧 원망만 했던

천주제신이 지금은 더 없이 감사했다. 그녀를 천하디 천하게 점지한 것도 천주제신이었지만,

염이란 존재를 이 세상에 보내준 것도 천주제신이었기에. 아니었다면 더 없이 천하게만 살아간

자신이 불쌍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만약 그가 없는 세상이었다면 아무리 귀하게 태어났어도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이젠 도련님의 고운 손에 닿았던 쇤네의 천한 손조차 고와진 듯 합니다.”

“난 네게 미안하기만 하구나. 애석하게도 사내의 마음 또한 하나뿐이라·······.

하나 있던 마음이 부서져 없어졌기에, 더 이상 남은 마음도 없어서.”

설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게 올 것이 없다는 그의 마음 보다, 남아 있는 마음이 없다는 그의

말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뒷걸음질을 하며 천천히 염의 눈에서 멀어졌다가, 이내 사라졌다.

염은 천천히 마당에 내려서서 구름만 가득한 하늘을 올려보았다. 마치 자신의 마음과도 같고,

현재의 상황과도 같았다. 염의 눈은 하늘에서 안채 쪽으로 천천히 돌려졌다. 그의 모습을

지붕에 올라가 몸을 감추고 있던 설이 안타깝게 지켜보았다. 순간 설의 눈이 번쩍 뜨였다.

멀리서 복면 쓴 수상한 사내들이 몸을 숨기며 염의 집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설은 순식간에 염의 등 뒤로 내려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염이 자신이 쓰러지는 것도 알아차릴

시간 없이 조용히 자리에서 쓰러졌다. 염을 기절시켜 품에 안고서도 설은 당황하여 잠시 고민했다.

소리죽인 발걸음은 다가오는데,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그의 모습은 쉽게 마음을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설의 문제는 염 하나만이 아니었다. 만약에 오고 있는 수상한 사내들이

염뿐만이 아니라 민화공주까지 노리고 오는 것이라면 염만 숨길 수는 없는 것이었다.

민화가 죽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염이 슬플 것이기에······.

설은 우선 사내들이 두 패로 나뉘어져 염과 민화에게 각각 흩어지는 것부터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힘겹게 염을 어깨에 걸치고 안채로 갔다. 안채에 불이 켜져 있었다. 충격으로 몸져

누워있는 민화를 민상궁이 열심히 간호를 하고 있는 듯 했다.

“안에······누가 좀······.”

민상궁이 마당 쪽 문을 열며 말했다.

“누구냐?”

이윽고 민상궁이 정신을 잃은 염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서 달려 나왔다.

“이 무슨 일이냐? 대감께 무슨 일이?”

“말씀을 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우선 공주자가와 주인어른을 모시고 멀리 달아났다가.”

설의 말을 민상궁이 자르고 들어갔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주자가께옵서도 운신키 어려우신데······.”

설의 이마가 어두워졌다. 바로 뒤에 까지 가까워진 자객들의 발자국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설은 자신의 긴 한숨이 미처 다 내뱉어지기도 전에 굳어진 입술로 꼭 다물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민화가 있는 방으로 민상궁의 도움을 받아 들어갔다. 민화는 앓아누워 있다가

염을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서방님!”

설은 힘들게 지고 온 염을 고스란히 민화의 품속에 안겨주었다. 그리고 민화가 그를 끌어

안는 것을 잠자코 내려다보았다. 왜 염이 쓰러져 있는지,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도 상관 하지 않고

오직 염의 뺨에 자신의 뺨을 부비는 것에 정신이 팔린 공주를 바라보았다. 설은 가까워진 발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민상궁에게 말했다.

“부탁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바깥에 무슨 소리가 들리더라도 나오면 안 됩니다.”

설의 목소리에 민화도 염에게서 정신을 놓았다. 그리고 큰 눈을 굴리며 설을 보았다.

“넌 누구냐?”

떨어지지 않는 힘든 입이었지만, 마음이 바빴기에 설은 얼른 말했다.

“종입니다.”

“처음 보는 얼굴인듯 한데······?”

설은 민화의 말에 답하지 않고 민상궁을 보며 말했다.

“또 다른 부탁이 있습니다. 만약에 저에게 어떠한 일이 생기게 된다면,······주인어른께서

깨어나시기 전에 치워지십시오. 그리고 저를 본적이 없다고 하여주십시오.”

설은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재빨리 방을 나갔다. 하지만 이미 안채 마당에는

사랑채에 염이 없는 것을 확인한 자객들이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설은 마당에 내려섰다.

그녀의 느닷없는 등장에 자객들의 걸음이 멈칫했다. 그 사이 설은 칼집에서 검을 뽑은 뒤,

멀리로 칼집을 던졌다.

“나의 검은 더 이상 집이 필요 없다! 다시는 돌아가 꽂히지 못할 것이니.”

자객들은 설이 그저 남장을 한 여인임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검을 고쳐 잡은 그녀의 기에

압도당해 섣불리 다가가지는 못했다. 차가운 바람이 휘몰려 다니는 마당 가운데에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를 탐색했다.

근정전 앞의 큰 마당에 장씨는 숨도 쉬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거대한 마당 가운데 선

그녀의 몸은 너무도 작아 보였다. 수종무녀들이 선 채로 있는 장씨의 목을 두른 긴 하얀 천을

아래로 드리웠다. 그리고 바닥에 주름 한 점 없이 길게, 길게 쭈욱 펼쳐나갔다. 정성어린 손길을

끝내고 수종무녀들은 멀리로 물러났다. 장씨의 눈에 멀리 근정전을 병풍처럼 하고 기단 위에

앉은 왕이 들어왔다. 몸을 숙인 채 호랑이 가죽을 어깨부터 몸 전체에 덮고 있는 왕이

까마득한 거리에 있었다. 그의 옆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기단 위엔 왕만 있었다.

심지어 운검조차 보이지 않았다. 기단 옆의 굿상 주위에는 두 손 가득 딸의 혼을 기원하여

맞잡아 비는 신씨부인의 염원이 있었고, 아들의 완쾌만을 비는 대비의 염원이 있었다.

그리고 멀리 정업원의 불당에선 눈물로 엮어 만든 염줄을 잡은 희빈박씨의 염원이 있었다.

그녀의 기도에는 상감도, 상왕도 없었다. 오직 아들 양명군의 행복을 비는 마음만이 있었다.

또 다른 먼 곳에는 박씨부인이 서안 앞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도

아들 운의 안전만이 있었다. 이 모든 이들의 마음을 아우르듯 도무녀의 손가락은 천천히,

긴 천을 잡아 자신의 가슴께로 잡아당겼다. 그와 동시에 멀리 앉은 화쟁이들은 그녀의 몸짓에

숨을 고르며 일제히 악기를 고쳐 잡았다.

교태전의 궁녀들은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녔다. 기은제를 위해 근정정에 나가야 하는 중전윤씨가

당의를 벗어둔 채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사라진 중전윤씨는 하얀 소복만을 입고 홀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동아줄이 쥐어져 있었다. 북쪽을 향해 걸어만 가던

그녀는 한적한 곳에 멈춰 섰다. 그리고 튼튼한 나뭇가지를 골라 동아줄을 묶으며 중얼거렸다.

“중전의 당의를 벗고 이 하얀 소복을 입으니 이리도 편안한 것을······. 애초 이것이

나의 옷이었음을 알았음에도 당의를 벗지 못했던 것은 나의 잘못이고, 상감마마를 치러 오는

아버지를 말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상감마마께 아버지를 고하지도 못하는 것 또한 나의 잘못이니,

아버지를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버지! 당신 딸의 목을 죄는 동아줄은, 바로 당신의

손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유언도 없이 중전윤씨가 아닌, 윤보경이란 여인으로 조용히 목을 매달았다.

양명군의 사가와 파평부원군의 사가, 그리고 각각의 주요 집결지에 사병들이 모여들었다.

양명군은 갑옷을 갖춰 입고, 상투에 검은 천을 둘러 묶은 뒤, 뒤로 길게 드리웠다.

그리고 품속에 넣어둔 서책을 꺼내 한 번 더 확인했다. 처음에는 빈 책이었던 그곳엔 이 일에

가담한 외척의 이름들과 금상을 배반하고 권력을 쥐겠다 맹세한 이들의 이름과 수결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양명군은 훗날 공신록이라 적겠다고 했던 그 공책을 품속에 넣고 소중히 품었다.

마지막으로 검을 힘껏 쥔 뒤, 양명군은 자신의 방을 나섰다.

세상의 움직임을 담은 장씨의 두 눈이 게슴츠레하게 떠졌다. 그리고 서서히 많아지는

말 발굽소리와 가까워지는 거친 숨소리를 던져내듯 긴 천을 오른 손으로 던져 올렸다.

그러자 해금 한 줄이 조용한 공기를 찢으며 길게 피를 토해냈다. 해금소리에 찢어진 공기는

장씨가 던져 올린 긴 천을 하늘로 솟구쳐 오르게 하여 너울너울 춤추게 했다. 그리고 긴 천 끝을

장씨가 다시 잡아당겨 팔을 크게 휘저으니, 구름에 가려진 달을 대신하는 듯 커다란 달 형상을

만들어내고 이내 스러져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각종 악기가 동시에 근정전

일대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43

설은 두려웠다. 그 두려움은 자신의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염을 지키지 못하고

먼저 죽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검을 잡은 손끝이 떨렸고, 그와 같이 검의

끝도 떨렸다.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설의 검이 먼저 움직였다. 설의 공격에 자객들도 같이 움직였다.

장씨의 몸도 움직였다. 그녀의 몸이 빙그르 도니, 따라 휘어 도는 천의 물결에 어두워졌던

별이 어둠을 걷어내고, 장씨의 주름진 손으로 긴 천을 펴니, 세상의 시름도 따라 피어졌다.

각각의 장소에 집결해 있던 반란군도 일제히 경복궁으로 움직였다. 제일 앞에 선 양명군의

말발굽에 땅이 패지고, 바람이 그들의 사이로 휘어들었다.

설의 검이 자객 한명의 검과 부딪혔다. 그리고 빙그르 돌아 다른 자객들의 검도 차례로 받아쳤다.

이내 그녀의 검이 한 자객의 어깨를 베었다. 그 어깨에서 품어 나오는 피가 설의 얼굴에 튀었다.

그녀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머금어졌다. 만약에 염을 그렇게 기절시키고 숨기지 않았다면,

지금 이 더러운 피가 그의 순결한 얼굴에 닿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기 때문이었다.

다른 자객의 검이 설의 팔을 스쳤다. 그리고 그곳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그녀의 얼굴에 또

다시 미소가 스며 나왔다. 염의 팔을 대신하여 피를 흘릴 수 있는 자신의 팔이 있음을 감사했다.

피를 보면서도 미소 짓는 그녀 때문에 자객들의 발걸음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등에 소름까지 돋았다.

“미, 미친년!”

소리를 내어지른 자객의 목에 설의 검이 들어갔다. 그리고 한순간에 그 목을 찌르고 자리로 돌아왔다.

설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깔렸다.

“조용히 해라. 의빈께오서 깨어나신다.”

목을 찔린 자객이 검을 떨어뜨리며 쓰러져 죽었다. 남은 두 명도 일순 긴장했다.

하지만 주춤 거린 것도 잠시, 온 힘을 다한 그들의 검이 설을 향해 사정도 없이 파고들었고,

검 둘을 하나의 검으로 막아야 하는 설의 몸은 여기저기 찢겨나가 피를 흩뿌렸다.

장씨의 하얀 긴 천이 장씨가 도는 주위를 따라 돌다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설의 붉은 핏줄기도 그녀를 따라 돌다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떨어져 내린 피가 땅에 남긴

흔적 때문에 설의 마음이 아팠다. 쉽게 없어지지 않는 핏자국, 그것을 혹시라도 염이 보게

되지는 않을까, 그래서 작은 미물에게조차 가여운 마음을 가지는 그가 자신의 핏자국임을 알고

마음 한 귀퉁이라도 아파지면 어쩌나, 그가 자책을 하며 괴롭게 되면 어쩌나, 그리고 혹시라도

훗날 자신을 기억하는 아주 찰나의 순간에 아픔을 떠올리면 어쩌나, 그래서 평생 미소로만

살았음 하는 그가 단 일각이라도 미소를 버리면 어쩌나, 지금으로도 충분히 미소를 버리고 사는 그가······.

하지만 이내 설의 아픈 마음을 밀치며 편안한 마음이 찾아들었다. 곧 비가 올 거라던 장씨도무녀의 그 말.

아마도 그 비가 핏자국을 씻어가 줄 것이리란 생각에 설의 입가에는 다시 미소가 잡혔다.

미소 때문이었는지 설의 눈동자에 정신을 잃은 염을 안고 멀리로 달아나는 장면이 부질없이

떠올랐다. 그러지 못하고 공주의 품에 염을 돌려준 것은 그의 사랑을 위해서였다.

그만을 위하여 민화공주를 버리고 간다한들, 깨어난 그는 또 하나의 미소를 버리고 살아야 함을 알기에,

그와 함께 그가 사랑하는 여인까지 지키고 싶었다. 그것이 그를 온전히 지키는 길이었다.

설의 눈동자에 염의 모습이 사라지고, 민화의 방으로 발걸음을 떼는 자객이 들어왔다.

그 자객을 향해 그녀의 걸음도 급히 움직였다. 설의 검이 자객의 가슴을 찌른 그 순간,

다른 자객의 검이 설의 복부를 뚫었다. 그녀의 눈이 자신의 몸을 관통한 검을 향했다.

하지만 눈에 들어온 것은 염의 미소였다. 설의 입술이 조그맣게 움직였다.

“함께 한 건 아무 것도 없는데······.”

그와 함께 나눈 미소도 없었고, 그와 함께 만든 추억도 없었다. 오직 숨어서 훔쳐본 것 이외엔

그 어떤 이야기도 없었다.

“바보같이 왜 내 마음을 말해버린 것일까······. 그분 마음 아프게······.”

자객의 가슴에서 검을 뺀 설의 눈동자가 이번에는 자신을 찌른 자객을 향했다.

그리고 그를 향해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차라리 심장을 뚫지 그랬느냐? 그랬다면 너의 검을 타고 뛰는 내 심장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마지막까지 그분을 생각하며 뛰었던 내 심장 소리를 네놈에게나마 들려줄 수 있었을 텐데.”

가슴을 찔린 자객이 결국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자객은 싱긋이 웃는 설의

표정에 오히려 새파랗게 질려 그녀의 몸에서 검을 빼냈다. 빼낸 검과 함께 그녀의 피도 터져 나왔다.

설의 몸이 휘청했다. 하지만 검을 다잡고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렇다고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피까지 멈춰 세운 것은 아니었다.

“다행이다. 아직 나의 숨이 멈추지 않아서. 그렇기에 아직은 그분을 지킬 수가 있어서.”

설은 복부에서 피가 쏟아지는데도 자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설의 의지에 의해 오히려

자객이 밀려났다. 또다시 검의 날이 설의 어깨에서부터 가슴까지 긋고 지나갔다. 거기서도

시뻘건 피가 터져 나왔다. 설의 눈동자는 검은자 보다 흰자가 더 많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다리는 후들거리긴 했으나 쓰러지지 않았고, 그녀의 검도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까스로 기어 나왔다.

“나를 넘어가진 못한다. 나의 숨이 멈출지언정, 나 죽어도······나를 넘어가게 하지 않겠다!”

설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이윽고 그녀의 목구멍을 막을 정도로 피가 몰려 올라왔다.

설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리고 힘들게 올라오는 핏덩어리를 되삼켰다. 땅에 떨어진 핏자국을

최대한 적게 남기려는 마음에서였다. 혹시라도 핏자국을 발견하게 될 염의 마음이 덜 아프도록······.

설의 검은 여전히 자객을 향해 달렸다. 자객은 두려움에 소름이 돋았다. 한순간 검을 잡았던

자객의 팔이 잘려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복부도 잘려나갔다. 마지막 힘을 실은 설의 동작이 멈췄다.

검 날이 부딪치던 소리가 멈추고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과 더불어 적막했다. 자객이 피를 쏟으며

자리에 쓰러지고 나서도 설은 검을 잡은 그대로 있었다. 혹시라도 쓰러져 있는 자들 중에 숨이

붙은 이가 일어설지도 몰라 자신의 몸에서 흐르는 피를 돌볼 수가 없었다. 설의 귀에 염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들어왔다.

“난 네게 미안하기만 하구나.······.”

그녀는 그때 답하지 못했던 말을 마음으로 답했다.

‘도련님, 미안하다 마십시오. 쇤네는 도련님으로 인해 사람이 되었고, 여인이 되었고,

그리고 설이 되었습니다. 비록 성도 없이 이름만 있지만, 성과 함께 있는 그 어떤 이름이

쇤네의 이름보다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설의 다리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잡았던 검도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무너지듯

차가운 땅바닥에 앉았다. 고개가 서서히 숙여진 그녀의 귀에 다시금 먼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염의 다정한 말이 들어왔다.

“여인은 검을 쥐면 그 운명이 슬퍼진다 하였다. 그러니 장난으로라도 검을 쥐지는 말아라.”

그때는 미처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이마에 닿았던 염의 손이 뜨거워서, 그리고 ‘여인’이란

그의 말에 가슴이 뛰어서 다른 말은 듣지 못했던 것이다. 설의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답했다.

‘비록 짧았던 삶이었지만,······쇤네는 검을 쥔 지금이 가장 행복합니다.’

설의 눈이 감겨졌다. 그리고 염이 있는 방을 등지고 앉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둔

그녀의 얼굴엔 미소만 남아 있었다. 하늘을 향한 장씨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장씨의 눈에서 눈물도 흘러나왔다.

민화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더욱더 염을 끌어안았다. 민상궁도 적막한 바깥

기운에 조금 전의 여인이 숨을 거둔 것을 알았다. 처음 본 여인이었지만, 그 마음이 가여워

눈물이 나왔다.

“너는 왜 눈물을 흘리느냐?”

“그러면 공주자가께옵선 어이하여 눈물을 흘리시옵니까?”

“모르겠다. 서방님을 보던 저 여인의 눈동자가 나와 닮아서일까. 자신의 시신을 서방님이

보기 전에 치워달라던 마음이 눈부셔서일까. 아니면 서방님을 내 곁에 묶어두려고만 했던

내 사랑이 초라하고 또 초라해서일까······. 모르겠구나, 정말.”

장씨의 눈물을 닦아 주려는 듯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천천히 허공을

만지는 그녀의 손가락에 꼬여있던 운명의 실이 풀어졌다. 그리고 긴 천과 하나가 된 그녀의

춤이 근정전 마당 한가운데를 어루만졌다. 평소 욕설이 섞인 그녀의 말투와는 달리 우아하고

절도 있는 성숙청 도무녀의 춤이었다. 하늘을 향해 임금과 나라와 가엾은 백성을 굽어 살펴 달라

조르는 도무녀만의 언어였다. 광화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근정문을 넘어 장씨의 긴 천을 날렸다.

그녀의 손끝에 매달린 하얀 천이 바람에 너울거리며 땅과 수평을 이루어 왕이 앉은 곳을

향해 뻗었다. 그 천을 허리에 감고 빙그르 돌았다. 한 바퀴 돌아 멈춘 장씨의 손은 공기에

녹아 꿈틀대고 있는 악귀를 당겨 자신의 몸에 가두고, 다시금 돌아 천을 입과 코에 감고 원귀의

한을 잡아 가슴에 넣었다. 그렇게 세상을 달래고 스스로의 명을 버렸다. 천의 끝까지 허리와

얼굴에 감은 그녀의 발끝은 멈추지 않고 근정전 마당을 돌아다녔다. 장씨가 디뎠던 발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 그곳엔 빗물 하나가 떨어져 남았고, 또 다른 곳으로 발을 옮기면,

그 곳엔 또 다른 빗물이 떨어져 그녀의 디딘 발자국을 대신했다.

마지막으로 긴 음악의 소용돌이가 몰아치자, 그녀의 팔이 하늘로 뻗어졌다.

‘조선을 살피시는 하늘이여, 죄 많은 이 몸의 남은 명을 제물로 바치오니 부디 만백성이

조선의 백성임을 감읍하게 하여 주시옵고, 금상의 백성으로 살다가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게

되기를 비나이다.’

장씨의 팔이 조용히 떨어져 내렸다. 그와 함께 굵어진 빗줄기도 쏟아져 내렸다.

그녀의 눈이 하늘을 향했다. 그리고 떨어지는 비를 얼굴에 맞았다. 그래서 그녀의 얼굴을

가득 타고 떨어지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씨의 눈이 먼저 가고 있는

설을 향해 농담을 걸었다.

‘비인가 여겼더니, 눈이었구나. 불꽃을 가슴에 품고 가니 비처럼 내리지.’

허리에 감겨있던 천이 스르르 풀려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녀의 입과 코를 감고

있던 천은 빗물을 머금고 더욱 그녀의 얼굴에 밀착한 채로 떨어지지 않았다. 숨구멍까지

막은 빗물로 인해 장씨의 숨도 서서히 멎어갔다. 하늘은 그렇게 장씨의 수명을 거두어 가는 대신에

장씨의 죄를 씻어가고, 설의 피를 씻어갔다. 그리고 조선의 겨울을 씻어갔다.

양명군과 반란군이 광화문 앞에 도달했다. 그러자 궐내의 동정을 살피고 달려온 자가 그들의

말발굽 소리를 멈춰 세워 기은제가 거행되고 있는 동태를 상세하게 보고 했다.

잠시 멈췄던 말발굽소리가 빨라졌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반란군의 걸음도 빨라졌다.

눈앞에 활짝 열려진 근정문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있는

근정전 마당이 보였다. 이때 양명군의 말이 갑자기 속력을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덩달아 옆에서 보좌하는 다섯 명의 선발대도 속력을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바로 뒤에 있던

군사들과 서서히 거리가 벌어졌다. 달려 들어온 근정전 마당에는 단 한명의 사람도 없었다.

오직 기단 위에 고비로 몸을 덮고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왕만 있었다. 뒤따라 들어오던

파평부원군의 머리에 이상한 느낌이 스쳐지나갔다. 아무도 없이 비를 맞고 앉아 있는 왕이라니,

그의 등골에 빗물과 함께 오싹함이 타고 내렸다. 조금 전에 보고 받은 성숙청의 무녀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양명군이 타고 달리는 말의 속도였다.

하지만 파평부원군의 머릿속이 정리되기도 전에 기단 위에 앉아 있던 왕이 고비를 벗어 던지며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훤이 고비 아래에 입고 있던 옷은 황금빛의 어갑(御甲, 임금의 갑옷)이었다.

당황한 파평부원군이 말을 멈춰 세우며 소리쳤다.

“멈춰라!”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양명군의 등만 보고 달려가는 군사들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양명군의 등은 선발대의 무사들과 더불어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순간 파평부원군과 반란군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왕과 양명군의 중간을 가로막을 듯,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는 캄캄하기만 하던

행각(行閣) 안의 양옆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달려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검은색 철제 갑옷으로 무장한 말 위에 용문투구를 쓰고 검은 갑옷을 입고 있는

이들은 분명 운검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놀란 이유는 운검이 한 명이 아니라 모두 다섯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양옆에서 선발대를 향해 달려오자, 양명군과 무사들의 말고삐는 더욱 박차를

가하며 왕을 향해 돌진했다. 운검들이 가로막으려는 찰나의 틈으로 양명군이 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선발대도 양명군을 따라 통과했다. 하지만 그들을 제외한 다른 반란군들은 운검들이

가로막은 선을 넘어가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운검들의 사이에는 검은 군복을 입은 군사들이

무기를 들고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기단에 서 있던 왕의 팔이 서서히 들려졌다.

그런데 그 손에는 커다란 어궁(御弓)이 들려져 있었다. 훤은 등에 메고 있던 동개에서 화살을 빼내

어궁에 장착하고 길게 활시위를 당겼다. 그와 동시에 양명군도 검을 빼내 든 채로 왕을 향해 달려왔다.

팽팽하게 당겨진 훤의 활시위가 그의 손끝에서 놓아졌다. 왕의 화살은 빗속을 뚫고 양명군의

바로 왼쪽에서 달려오는 선발대 무사의 목을 관통했다. 그들이 놀랄 사이도 없이 양명군의

검이 비를 가르며 옆을 향했다. 순간 양명군의 오른쪽에서 달리던 무사의 목이 그의 검에 잘려

땅에 떨어졌다. 또 다른 왕의 화살이 무사의 목을 다시금 정확히 관통했다. 그리고 양명군의 검도

선발대의 또 다른 무사를 베었고,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미처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던 그들은

왕이 서 있는 기단에 도달하기도 전에 차례로 시체가 되어 땅에 떨어졌다. 놀란 파평부원군은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돌아선 그의 눈엔 거대한 근정문이 반란군을 모조리 몰아넣고는

닫히고 있는 것이 보였다.

#44

파평부원군은 급하게 왕이 선 기단을 향해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옆의 다섯 명의 선발대

무사를 비명 한번 내어지를 틈도 없이 전부 처치한 양명군이 왕의 기단 앞에 말을 멈춰 세우는

것을 보았다. 이젠 상황이 확실히 드러났는데도 파평부원군의 머릿속은 여전히 뒤엉켜있었다.

그의 눈에 또 다시 위용 있게 서 있는 운검들이 보였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들 중에 진짜

운검인 운은 없었다. 운을 찾기 위해 열심히 눈을 굴리던 그 순간, 그의 머릿속은 또 한 번

풍랑을 만난 듯 휘청거렸다. 눈앞에 있는 운검들은 분명 상왕의 호위무사였던 전 운검대장과

운검들이었다.

‘저, 저들이 어떻게······? 분명 변방에 흩어져 있어야 할 자들이?’

따각 따각 따각······.

천천히 움직이는 말발굽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가까이 움직이는 조급한 말발굽소리와 빗소리는

들리지 않고 멀리서 들리는 평온한 그 소리가 공포스러울 정도로 유난히 크게 들렸다.

파평부원군은 놀란 눈을 소리 나는 곳으로 돌렸다. 시커먼 구름과도 같은 것이 앞을 가로막은

운검들과 군사들 뒤로 천천히 근정전 마당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검은 철갑으로

무장한 흑마, 그리고 검은 철갑옷, 상투를 틀지 않고 길에 풀어 내린 머리카락, 이마를 둘러

뒤로 맨 붉은 띠, 그리고 등에 맨 운검! 진짜 운검 김제운이었다. 마치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지

투구조차 쓰지 않은 모습이었다. 반란군들의 목구멍을 타고 침이 흘러들어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그리고 그가 지나가는 대로 반란군들이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마치 그를 중심으로

큰 물결이 물러났다 다시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에게 온 신경을 쓰느라 그들은 둘러진

행각에서 어둠이 떨어져 내리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어둠을 가장한 검은 천들이 행각에서

떨어져 내리자, 그 뒤에 무장하고 숨어있던 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운의 흑마는 이런 시선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양명군의 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양명군의 눈과 운의 눈이 만났다.

운의 눈동자가 비 사이를 질러 미소를 보냈다. 비록 무표정했지만 그의 안도의 미소를 느낀

양명군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나에게 검을 겨눌 수 있느냐는 물음에 자네의 답이 없어 어찌나 무섭던지.

분명 자네가 나의 목을 벨 것임을 아는데, 내 바보가 아니고서야 어찌 자네의 심장에 나의

피를 묻히고 갈수 있겠는가?”

어쩌면 가슴 한 구석에선 훤의 자리를 탐내는 마음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왕의 자리와

맞바꾸기에는 운과 염, 그리고 동생이 너무나 소중했다. 부왕으로부터 상처받았던 어린 시절

그에게 그들이 전부였기에, 그들에게 자신의 목을 베게 할 슬픔을 주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미소를 가르며 멀리서 파평부원군이 화가 나서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죽여야 할 자는 왕이 아니라 배신자, 양명군이다!”

운이 양명군에게 말했다.

“어서 기단 위에 올라 상감마마께 명부를 넘기십시오.”

그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있었다.

“아닐세, 아직은.”

양명군은 싱긋이 웃으며 말을 돌려 반란군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누구더러 배신자라 하는가! 단 한 번도 너희 모리배와 뜻을 같이 한 적이 없으니 배신자란

오명은 어불성설! 그래도 나를 죽이고 싶다면 와라!”

반란군들이 무기를 고쳐 잡고 각자 전투태세를 갖췄다. 이와 동시에 왕의 손이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그 순간 대각(大角, 공명 악기의 한 가지. 나발. 전장에서는 교전을 준비하라는 명령 신호로 사용)

소리가 마치 근정전 안에서 나오듯, 하늘에서 내려오듯 울려 퍼졌다. 이때였다.

갑자기 반란군 뒤의 근정문 지붕과 양옆의 행각 위 기와가 살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순간 검은 천을 벗어던지며 수많은 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 손에는

각각 활이 들려져 있었다. 또 한 번의 대각 소리가 울려 퍼지자, 일제히 화살을 장착한 뒤

반란군들을 향해 겨누었다. 내삼청의 군사들은 아니었지만, 절도 있는 움직임과 능숙한 자세가

훈련받은 군사들임을 알 수 있었다. 파평부원군의 입에서 한탄이 저절로 나왔다.

“아뿔싸! 비군(秘軍)이 있었을 줄이야.”

그의 눈이 운검대장을 향했다. 이윽고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왕과 운,

그리고 전운검대장과 운검들 사이에는 박씨부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의 군사력을 키우기란

막대한 자금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흐름을 알 수 없는 내탕금과 기밀서찰들은 은밀한 내방,

박씨부인을 중심으로 흘렀던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왕이 보위에 오르자마자 준비해 오고

있었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아마도 세자빈시해사건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어도 이러한 날이

왔을 것이고, 이날이 오지 않아도 왕은 이 상황을 만들었을 것이리라. 파평부원군은 왜 양명군이

그리 뛰어난 자질과 맺힌 한을 가지고도 왕권을 욕심내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영민한 양명군, 그는 자신보다 훤이 더 뛰어난 왕임을 알고 있었기에 절대 이기지 못할 것이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욕심을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왕을 향해

파평부원군의 고개가 숙여졌다. 긴 대각 소리와 북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이것은 전장에서의

공격신호임을 국구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파평부원군을 가운데 두고 호위하는 무사들이

방패를 들었다. 무수히 많은 화살이 비와 함께 쏟아졌다. 그 비에 맞은 반란군들은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미쳐 날뛰는 말소리,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뒤엉킨 아비규환 속에서도

절망에 물든 파평부원군의 귀엔 오직 빗소리만이 들렸다. 반란군의 가운데를 중심으로 쏟아지는

화살을 피해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단단하게 닫힌 채 열리지 않는 근정문에 미친 듯이

매달리다 화살에 박혀죽는 이들도 있었고, 양옆 행각으로 달려가 창과 검에 찔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왕이 있는 기단을 향해 물밀듯이 밀려 전 운검들의 검과 기마부대의 언월도에 목이

달아나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이 모두가 변방에 흩어진 전 운검들이 어명에 의해 오랜 시간 동안

길러낸 그들의 군사였다. 하지만 이들의 방어벽이 순간 무너졌다. 뛰어난 검술을 가진 반란군

때문이 아니었다. 화살과 언월도를 피해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것에 의해 전 운검들 사이의

방어벽이 뚫린 것이었다. 그들을 향해 파평부원군이 소리쳤다.

“양명군을 죽여라! 그가 지닌 명부를 빼앗아라!”

이에 대해 양명군도 소리쳤다.

“좋다! 와라! 명부는 내 품에 있으니 나를 죽일 수 있다면 가져가라!”

양명군은 말고삐를 치며 그들을 향해 나아갔다. 깜짝 놀란 운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양명군! 멈추십시오!”

하지만 양명군은 운을 향해 애달픈 미소를 던진 뒤, 검을 날개 삼아 달려가 무너진 방어벽을

넘어오는 그들을 막았다. 운은 양명군의 표정에 당황하여 따라 가고 싶었지만, 왕에게서

멀어질 수 없는 운검의 직책 때문에 놀란 눈빛을 왕에게로 향했다. 운의 눈빛을 알아챈 왕의 팔이

다시 들려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각(小角) 소리와 징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공격을 멈추라는 신호였다.

쏟아지던 화살이 동시에 멈췄다. 그리고 화살부대는 일제히 활시위에 화살을 장착하고 근정전

마당을 겨냥한 채 자세를 멈추었다. 훤의 손가락이 파평부원군을 향했다.

“나의 검으로 저자의 입을 봉하라!”

나지막하게 흘러나온 말이었지만, 그 어떤 호령보다 큰소리로 운의 마음에 들어갔다.

운의 오른팔은 왕의 것이 되어 등에 있는 운검을 길게 빼냈다. 조선 땅에 나는 철 중에

가장 뛰어난 것으로 만든 운검! 운검을 만든 철로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선 안 되는 것이 국법!

그렇기에 운검보다 강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운은 자신의 것인 왼팔로

별운검을 빼냈다. 두려움조차 없는 흑마가 파평부원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방어벽이 운에게 길을 내어주었다. 파평부원군을 향해 달려가는 길에 있던 반란군들은

운이 스쳐지나가자, 어느새 팔이 떨어져 나가고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파평부원군을 호위하고 있는 무사들 틈으로 들어갔다. 그들도 재빨리 파평부원군을 에워싸고

있던 것을 풀고 운을 에워쌌다. 왼손엔 방패를 들고, 오른손엔 검을 든 다섯 명의 무사였다.

운의 오른쪽 운검이 비호와도 같이 비를 자르며, 한 무사의 방패를 잘랐다.

바로 눈앞에 운의 검을 느낀 그 무사의 입에서 겁에 질린 소리가 나왔다.

“아, 아무리 운검이라 하더라도 어, 어떻게 이런 일이······.”

하지만 그는 길게 말할 수 없었다. 운이 다른 무사의 검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자신의 가슴팍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빗물을 머금은 운의 긴 머리카락이

묵직한 원선을 그리며 날리는 것이 마치 천상의 것을 보는 듯 아득해졌다. 그리고 그것이 이승에서 본

마지막 장면이 되었다. 운의 검은 다른 이들에게도 시간과 틈을 주지 않았다. 그의 양검은

때로는 방패가 되었다가, 때로는 그들의 목에 파고드는 날카로운 검도 되었다. 그리고 고삐를

잡지 않은 그의 흑마는 마치 그의 몸을 일부인 듯 그의 검과 같은 방향으로 정확하게 움직였다.

양 손에 잡은 운검과 별운검, 전 방향의 공격과 수비를 해내는 그의 탄력 있는 허리,

아무 것도 담겨 있지 않아 그 내용을 읽을 수 없는 눈동자. 무사들을 죽음의 공포로 밀어 넣고 있는

이 모든 것이 바로 소문으로만 들었던 운검의 마상쌍검술(馬上雙劍術)이었다.

네 개의 검이 동시에 운에게 뻗어졌다. 흑마가 몸을 돌렸다. 운의 몸도 같이 돌았다.

순식간에 운의 두 개의 검이 네 개의 검 모두를 받아쳤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운의 등 뒤에 있는 무사 하나가 방패를 떨어뜨리며, 자신의 복부를 감싸 쥐었다.

고개를 아래로 내려 보니, 자신의 허리가 반 이상 잘린 것이 보였다. 그는 언제 어느 틈에

운의 검이 자신의 몸에 닿았는지도 모른 채 말에서 떨어져 내리며 숨을 거두었다.

남은 세 명의 무사는 겁에 질렸다. 그들이 겁에 질려서 인지, 아니면 운의 흑마의 강렬함에 밀린

그들의 말이 뒷걸음질을 한 것인지 서서히 거리가 생기고 있었다. 더 이상 거리가 생기는 것을

운은 방치하지 않았다. 그들의 검을 피하며 불식간에 파고드는 그의 검에 남아 있던 세 명의

무사들도 하나씩 주검이 되어 바닥에 뒹굴었다. 파평부원군의 눈도 공포에 질렸다.

이제 자신의 주위에 남아 있는 자들이 아무도 없었다. 오직 운의 옆모습만이 있었다.

운은 서서히 별운검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운검을 옆으로 펼친 채 긴 머리를 날리며 달려왔다.

눈 깜박할 사이에 파평부원군의 옆을 스쳐 지났다. 멀리서 말을 멈춰선 운의 주위로 한순간

빗소리만 요란했다. 파평부원군은 자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멀쩡했다. 다음으로 목을 더듬어 보았다. 그런데 그의

손바닥에 붉은 피가 묻어나왔다. 그의 처참한 비명이 근정전 일대를 뒤흔들었다.

운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파평부원군의 목이 잘려 피를 뿌리며 말에서 떨어지는 것도 그의

등이 보았다. 운의 눈은 양명군을 향해 있었다. 무사들과 파평부원군이 운의 손에 죽는 것을 본

남은 반란군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무기를 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는 공포에 미쳐 날뛰는

자들도 있었다. 그렇게 미친 자들 중, 하나의 창이 양명군의 배를 관통하는 것이 보였다.

아니,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양명군이 검을 스스로 놓아버리는 것이 보였다.

“양명군!”

왕의 비명소리와 운의 흑마가 동시에 양명군을 향해 달려갔다. 이윽고 그의 몸이 말에서

떨어지려는 찰나, 운이 그를 잡았다. 양명군의 말을 이끌며 방어벽 바깥으로 나온 운은

그를 조심스럽게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한 뒤 비를 피해 멀리 근정전 옆에 있는 행각 쪽으로 갔다.

훤도 이미 왕이 내려와선 안 되는 기단 계단을 정신없이 내려오고 있었다.

입술을 깨문 운의 말이 양명군에게로 스며들었다.

“왜······, 왜······.”

“이야, 내 자네 품에 이리 기대어도 보고, 참으로 좋으이. 하하······. 생각했던 것 보다 아프군.”

“양명군.”

“요즘은 방탕한 한량인 척 하는 것도 지겹고 재미가 없어져서 말일세. 애석한 것이 있다면,

그동안 우리 염을 못 본 것이랄까······?”

“어째서!”

“나의 검이 미약했을 뿐이야.······단지······그뿐이야.”

안전한 행각 아래에 도달한 운은 먼저 말에서 내려 양명군을 땅으로 내려 눕혔다.

하지만 이미 많은 피를 흘리고 난 뒤였다. 훤도 양명군이 있는 곳에 닿았다.

얼굴에 빗물 범벅인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양명군의 눈에는 동생의 눈물자국만 보였다.

“양명군, 괜찮으시오?”

양명군은 힘없는 손으로 품에서 명부를 꺼내며 말했다.

“상감마마,······어명하신 반역자들의 명단이옵니다.”

“알았소! 알았으니 움직이지 마시오. 곧 의원이 올 것이오.”

하지만 애타는 훤의 마음을 외면하며 양명군의 몸이 움찔거리다가 입으로 피를 흘러 보냈다.

훤의 눈동자가 더욱 커졌다.

“아니 되오! 정신을 놓지 마시오! 양명군!”

양명군이 싱긋이 웃으며 훤을 보았다. 수많은 질투와 시기를 한 상대였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의 형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고, 신하가 아니었던 적도 없었다. 단지 주위의 사람들이

그렇게 놓아주지 않았다. 아무리 방탕한 한량인 척 한들, 앞으로도 그러한 위협을 왕에게

줄 존재였다. 그런 스스로를 이제는 거두고 싶었다. 왕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편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어머니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겁에 질려 정업원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어머니, 불안한 세상 기운을 느끼고 또 다시 겁에 질려 머리카락을

자르고 비구니가 되어버린 어머니, 자신의 존재로 인해 한시도 마음 편할 날 없었던 어머니,

지금도 왕의 강령을 빈다며 불당에 앉아 속으로는 아들의 행복만을 빌고 있을 어머니를 알기에

이제는 이 모든 속박에서 풀어주고 싶었다. 양명군은 풀린 동공으로 먼 허공을 보았다.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어린 날의 첫사랑과 가질 수 없었던 아버지의 정이 풀린 동공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비명과도 같은 동생의 울부짖음이 가슴으로 들어왔다.

“양명군! 내가 내린 명령은 명부뿐이었소! 내 그대에게 죽어라 명한 적 없소! 눈을 뜨시오!

어명이오! 감히 어명을 어기려 하는 것이오! 눈을 뜨시오! 형님!”

왕이 오랜만에 형님이라고 불러주는 것이 반가워 양명군은 조용히 미소를 보이며 눈을 감았다.

‘아바마마, 당신 아들의 형으로서 이리 가옵니다. 허니, 이제 소자도 아바마마의 아들이

될 수 있겠지요?’

훤의 비명이 행각을 돌아 전 근정전에 울렸다. 운은 빗속에 나가 섰다. 그리고 하늘을 보았다.

그렇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빗물로 가렸다. 그들의 슬픔을 뒤로 한 채 근정전 마당은 전 운검과

운검부대들에 의해 완전히 평정되어 있었다.

#45

연우는 근정전 안에 앉아 세 겹으로 둘러싼 궁녀들의 가운데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또 다시 내관들이 세 겹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혹시라도 모를 위험을 대비한 훤의 배려였다.

그녀는 그곳에 앉아 바깥에서 들리는 모든 비명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훤이 내어지르던

양명군’이란 소리도 들었다.

무언가 불길한 일이 벌어졌음을 느꼈지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바깥에서

그 어떤 소리가 들리더라도, 그것이 왕이 죽는 소리일지언정, 절대 움직이지 말라는 어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근정전 옆의 행각에서 훤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그의 슬픔이

근정전 안의 공기와 더불어 연우까지 뒤흔들었다. 그녀의 몸이 자리에서 저절로 일어났다.

“아니 되옵니다!”

상선내관의 외침에 연우는 안절부절 하며 울먹였다.

“하오나, 상감마마의 슬픔을 어찌 앉아서 듣고만 있을 수가 있습니까?”

“어명이시옵니다. 소인들은 따를 것이옵니다. 그러니 연우아가씨께옵서도 그리 하여 주십시오.”

“들리는 슬픔에 귀를 닫고 마음도 닫아야 하옵니까? 양명군께옵서, 양명군께옵서!”

연우는 자리에 다시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 쥐고 눈물을 터뜨렸다. 월이 아닌, 어릴 때의 연우를

사랑했던 양명군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슬픔은 눈물이 되어 떨어졌다.

삼간택을 앞둔 바로 전날, 어린 연우는 두렵고도 설레는 감정을 달랠 길이 없어 조용히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별당의 마당은 좁았기에 그녀의 왔다 갔다 하는 감정도 보폭과 같이 짧게 움직였다.

재간택에서 돌아오던 길에 윤씨처녀가 탔던 육인교와 이를 호위해갔던 차지내궁들을 본 이후로

내내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뜻은 몰랐지만, 아버지의 한숨과 어머니의

눈물로 인해 어렴풋하게 그 의미를 눈치 채고 있었다.

어두운 그녀의 마음과 닮은 어두운 밤하늘을 보고 있을 때였다.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담을

뛰어넘어 오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깜짝 놀란 그녀였지만, 이내 양명군임을 알 수 있었다.

연우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근래에는 그가 담을 넘어오는 장난을 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옷차림이 다른 날과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갓도 쓰지 않고 도포조차 입지 않은 일반

서인의 옷차림이었다. 게다가 이때까지 월장하던 장난도 어두워진 이후로는 하지 않는 예의는

갖춘 사람이었는데 의외였다.

“연우낭자, 나요. 양명군이오. 놀라게 하였소?”

“양명군이시라면 이미 여러 번 소녀를 놀라게 한 분이시지요. 하온데 이 시간에 또 장난이시옵니까?

의관은 또 왜 그러시고요?”

양명군이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섰다. 그런데 그의 등 뒤에는 봇짐까지 메여져 있었다.

놀란 연우의 눈길이 양명군의 얼굴에 닿았다.

“소식 들었소. 그대가 삼간택에 올라갔다는. 그리고 이미 세자빈으로는 윤씨처녀가 내정되어

있다고도 들었소.”

“어쩔 수 없지요, 하늘의 뜻이 그러한데.”

“그건 하늘의 뜻이 아니오!”

연우의 눈매가 슬픔과 미소를 같이 떠올렸다. 양명군은 입술을 씹으며 어떤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런 후, 그의 입이 결심한 듯 힘겹게 열렸다.

“난 그대가 세자빈으로 간택된다면 포기하려고 하였소. 하지만 이제 그대에게 남은 것은

잘 되어도 양제(良?, 종2품으로 왕세자의 소실 중 가장 높은 품계)요. 아니면 영영 출가를

금지당한 채 홀로 여생을 살아야 하오. 난 그대를 나의 어머니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소.”

연우는 고개를 숙였다. 부모님의 괴로움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기에 어찌 할 바를 몰라서였다.

괜히 촘촘히 박힌 돌들이 담장을 이루고 있는 것을 눈으로 훑었다. 그 눈길을 따라 양명군의

눈길도 같이 훑었다. 그러다 두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연우의 입이 소리 없이 슬픔과

미소를 같이 떠올렸다. 양명군은 급해진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어 그녀의 양 팔을 허락도 없이

덥석 잡았다.

“나와 같이 도망해주오.”

“네? 무슨 말씀이온지······?”

“왕자군의 자리도 양명군이란 봉작도 버리겠소. 어차피 소리만이 요란할 뿐 불필요한

신분일 뿐이니, 그대와 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자, 잠깐! 팔을 놓아주시옵소서. 소녀는.”

“내 말을 들어주시오! 나는 오늘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대를 보쌈하기 위해 온 것이오.

이대로는 모두가 불행해질 것이오.”

“소녀의 마음이 이미 세자저하께 가 있어도 좋사옵니까?”

연우의 팔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풀렸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가 의문을 떨치지 못한 채

떨리고 있었다.

“세자저하를 그대도 알고 있는 것이오?”

“비록 직접 뵈온 적은 없사오나, 직접 뵈온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마음을 내어드렸사옵니다.”

“만나지도 않고 어떻게······?”

“만나서 나누는 정만이 전부라 하더이까? 세자저하께옵서 꿈길로 찾아오시었고, 소녀 또한

꿈길로 가 뵈었으니 그렇게 서로 나누었던 정만 해도 만 리 길은 더 갈 것이옵니다. 그렇기에

소녀는 세자저하를 믿고 있사옵니다. 소녀가 세자빈이 될 수 없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 하더라도,

세자저하의 여인이 되는 것은 그분의 뜻임을. 허니 양제면 어떠하고, 소훈(昭訓, 종5품으로

왕세자의 소실 중 가장 낮은 품계)이면 어떠하오리까.”

양명군은 망연자실하여 그녀의 팔을 놓았다. 하지만 디디고선 자리에서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연우가 두어 발 물러나 섰다. 그의 눈동자가 눈물이 스며들었는지 반짝이며 일렁거렸다.

“만나지 않고 나눈 정이 만 리 길이라면, 그대를 보며 기른 나의 마음은 몇 리 길이 될 것 같소?”

연우의 손끝이 당황한 듯 입술에 닿았다가, 옷고름 매듭에 닿았다가, 치마를 잡았다.

“어찌하오리까?”

“어찌 할 것이오?”

“그러하면 양명군의 뜻은 어떠하옵니까? 이미 품은 마음인데, 소녀에게 정절을 버리게

하고 싶으신 것이오니까?”

양명군의 걸음이 뒤로 두어 발 물러났다. 부드럽고 정중한 그녀의 말이었지만, 너무도 힘이 있었다.

그녀의 물음에 대해 그가 답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연우가 하늘을 보며 평온한

음색으로 말했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소녀의 마음에도 하나의 태양만이 있사옵니다.

오늘 소녀는 밤하늘의 별만을 보았을 뿐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았나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말도 듣지 못하였사옵니다.”

양명군은 담장 위로 뛰어 올랐다. 하지만 이렇게 오기까지 쉬운 결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쉽게 돌아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동안 연우에게 닿지 못하는 마음을 달래다가 말했다.

“연우낭자! 내가 그대에게 같이 도망하자 조른 것은 듣지 않았다 하여도 좋소. 하지만

이것 하나는 꿈속에서라도 들었다 하여주시오. 조선의 태양이 아니라 그대 마음속의 태양이고

싶었던 나, 양명군의 마음을!”

차츰 빗소리가 멎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조선에 덮여있던 어둠도 해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있었다. 근정전 문이 열렸다. 비에 젖은 해가 곧장 연우의 품으로 달려오자 둘러싸고 있던

궁녀들과 내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틈을 내어주었다. 훤은 그녀의 품에 안겨 가엾게도 소리

내어 울었다. 그가 머금은 물기에 그녀도 젖어갔고, 그의 눈물을 따라 그녀의 눈물도 같이 흘렀다.

어둠이 물러가는 것을 느낀 염이 눈을 떴다. 하지만 방안 광경이 사랑방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화들짝 놀라 일어나니 뒷목덜미가 뻐근했다. 순간 어젯밤 갑자기 정신을 잃은 것이 떠올랐다.

염은 이미 깨어나는 순간부터 민화가 바로 곁에 앉아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곳으로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그는 민화가 아닌 멀리 앉은 민상궁을 향해 말했다.

“민상궁! 왜 나의 몸이 이곳에 뉘어져 있는가!”

민화는 바로 옆에 앉은 자신의 존재를 무시하는 그로 인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를 보았다.

민상궁은 공주의 눈치를 살피며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저기, 쓰러져 계신 것을 행랑아범이 모시고······.”

“내가 쓰러진 곳이 사랑채였거늘, 어찌 이곳까지 데리고 왔단 말인가? 내 내당과의 인연을

끊은 줄 모른다 할 참인가!”

민상궁은 더 이상 핑계를 찾지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염도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음이 급해진 민화가 그의 다리를 잡았다.

“소첩이 보이지 않사와요? 이제 눈빛도 섞지 않고, 말도 섞지 않을 것이어요? 소첩이 어찌

하면 용서하여 주실 것이어요? 서방님이 하라시면 무엇이든 다 할 것이어요. 그리하여

서방님의 노여움이 조금이라도 풀어진다면······.”

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공주의 죄가 씻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면, 제가 손수 씻겨주었을 것이고, 용서될 수 있는

것이라면, 제가 용서를 구하려 하였을 것입니다. 사람은 애초에 선하게 태어나니, 세상 아래에

용서 못할 죄도 없습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천륜을 저버린 죄만큼은 용서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까지 용서된다면, 세상은 더 이상 사람이 살수 없는 곳이 될 것입니다. 적어도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은 남겨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신분의 고하(高下)나,

나이의 대소(大少)를 가릴 수 없습니다. 만약에 세상이 용서한다 하더라도 저만큼은 최소한의

것을 지키겠습니다. 공주께서 저의 무엇을 사랑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이라 할 수 있는

마음이라면 저의 최소한을 지킬 수 있도록 하여주십시오.”

다른 사람은 다 용서해도 염은 민화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고, 염의 최소한을 지키기 위해선

그녀는 죄를 용서받아선 안 된다는 의미였다. 이제 더 이상 내려갈 절망도 없지만,

민화는 희망 없는 애원을 했다.

“서방님은요? 소첩을 사랑하시는 서방님의 마음은 어찌하시고?”

“사랑의 가치가 천륜의 가치보다 우위에 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사로운 감정은 그 뒤에 묻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민화의 방을 나갔다. 그녀의 눈에선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차라리 그의

목소리가 차가웠다면, 그리고 화를 냈다면 눈물을 흘릴 여유라도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잔인할 만큼 그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염이 닫은 방문에 고통스럽게 스스로의 가슴을

움켜쥐는 그의 그림자가 보였다. 민화를 용서하지 않는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자신의 고통이었다.

민화도 염을 따라 가슴을 고통스럽게 움켜쥐었다. 그의 고통이 민화에겐 가장 큰 형벌이었다.

마당에 내려선 염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하인들의 행동이 하나같이 부산했다. 흥건했던

핏자국도 이미 빗물에 씻겨 나가고, 또 그 위에 다른 흙을 덮었기에 그의 눈에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 다른 때와 분명 다른 것 같았다. 언뜻 내당으로 들어오려던 청지기가 염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몸을 숨기려 하였다.

“왜 숨는가? 이리 나오너라.”

청지기가 머뭇거리며 염의 앞으로 왔다.

“기침하셨습니까요, 주인어른?”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가? 내당 마당이 어찌 이리도 어수선 한가?”

“비가 많이 내려서······.”

설의 유언을 받들어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치라는 공주의 명령 때문에 청지기는 진땀을 빼고 있었다.

하지만 순간, 이 일에서 모면할 이야기 거리가 떠올랐다.

“아! 그것보다 주인어른, 지금 한양 일대가 난리가 났습니다요. 밤새 경복궁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을 못 잤는데, 아무래도 무슨 전쟁 비스무리 한 거라도 났는지······.”

“뭣이? 입궐하신 어머니는 어디 계시느냐?”

“지금까지 아니 오셨습니다요.”

염의 몸이 충격으로 휘청했다.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곧 입궐할 것이다. 준비하거라.”

“안됩니다요. 이제 막 시끄러운 소리가 그쳤다고 하는데, 가셨다가 의빈대감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시면······.”

“어허! 지금 내 몸이 무에 그리 중요한가! 이런 상황에 자고 있었던 불충과 불효를 힐책해도

모자를 판에. 어서 준비하라!”

염의 발걸음이 급하게 안채를 벗어났다. 머릿속에는 경복궁에 있는 이들을 걱정하느라,

다른 것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의 뒤를 청지기도 따라 나갔다.

신씨부인과 대비한씨, 그리고 그 이외의 많은 사람들이 굿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삼청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대비전에 숨어 있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공포스러운 소리가 멎자 대비한씨의

걱정은 더욱 심해져 자리에 앉지 못하고 방안을 안절부절 하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 소란 속에도

신씨부인은 조용히 앉아서 오직 죽은 딸, 연우만 생각하고 있었다. 비가 완전히 그치고 날이

밝아지자, 대비한씨는 결국 방안을 나섰다. 신씨부인도 어쩔 수 없이 대비를 따라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비전 마당을 벗어나지 못하게 내삼청 군사들이 길을 막았다.

“네 놈들이 감히 나의 길을 막는 것이냐? 비켜라! 그렇지 않을 시엔 경을 칠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협박에도 그들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한참을 옥신각신 하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상감마마, 납시오!”

대비는 얼굴에 환한 미소로 안심을 표현했다. 그리고 왕의 모습이 보이자, 모든 이가 허리를

숙이고 땅을 행했지만, 그녀는 얼른 아들에게로 달려갔다. 왕의 옆에는 운검이 있었고,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그 뒤를 내관과 궁녀가 길게 늘어섰다.

“주상, 무슨 일입니까? 무엇보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훤은 아직 어갑을 입고 있었다. 혼란한 상황이었기에 옷을 갈아입을 정신이 없었다. 대비에게는

옆에 다소곳하게 서 있는 여인은 보이지 않고 아들의 부운 눈만 보였다. 훤은 걱정 어린 대비의

눈을 외면하며 연우를 앞으로 떠밀었다.

“어서 가보시오. 가서, 어머니라고 불러보시오.”

연우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허리를 숙이고 땅만 보고 있는 수많은 여인들 중에

어머니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많이 야위고, 흰머리가 듬성듬성 자라있고, 보이는

옆얼굴의 눈가에 굵은 주름이 잡혀있었지만, 꿈에도 잊어보지 못한 어머니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다가가 멈춰 서서 어머니라고 부르려고 하는데 목에서 박혀 올라오지를 않았다. 말을 대신해서

눈에서 눈물만이 흘러내렸다.

신씨부인은 누군가가 다가온 것을 보았다. 하지만 왕의 앞에 허리를 들 수 없었기에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여인의 다홍색 치마였다.

앞에 멈춰선 채 움직이지 않는 다홍색치마가 의아해서 그녀의 눈길은 치마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연노랑 저고리가 눈에 들어왔다. 저고리를 보자 연우가 더욱 생각났다.

미혼인 처자들이 자주 입는 연노랑저고리와 다홍색 치마. 그렇기에 연우도 살아생전 즐겨 입던

옷이었다. 연우가 죽고 난 뒤, 신씨부인은 이런 옷을 입은 여아만 있으면 모두가 연우인 것만

같아서 실성한 듯 따라가곤 했다. 이번도 그렇게 생각했다. 저고리 보다 위로 눈길을 들어 본

여인의 얼굴이 눈에 다 들어오지도 못할 만큼 아름다운 것이, 마치 하늘의 선녀가 장대같이

내리던 비에 휩쓸려 실수로 내려온 것만 같아 연우로 착각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이 아닌 여인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다시 허리를 숙였다.

“어······머니.”

귀가 잘못된 줄로만 알았다. 기와를 타고 떨어진 물 덩어리가 땅의 여기저기 고인 물구덩이에

떨어지는 소리로만 들렸다.

“어머니.”

이상했다. 물소리가 아니었다. 다시 들린 소리는 분명 눈물소리였다. 신씨부인의 눈길이 조금

전보다 더 더디게 위로 올라갔다. 힘겹게 올라간 눈길은 한동안 멍하게 연우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연우는 그녀의 눈과 마주치자 눈물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흘러내려 더 이상 어머니를

부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손으로 일그러지는 입술을 막았다. 신씨부인은 넋이 나간 채로

떨리는 손을 뻗어 연우의 가린 손을 떼어냈다. 자세하게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오랫동안

딸의 얼굴을 살피던 그녀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비가 흥건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귀신으로라도 보고 싶다 했더니······. 헛것이 보이는가.”

연우도 어머니를 따라 땅에 주저앉아 도리질을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어머니. 저 살아있는 연우예요. 귀신이 아니에요.”

연우는 어머니의 주름진 손을 꼬옥 잡았다. 그리고 그 손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봐요. 따뜻하잖아요. 살아 있잖아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앞으로 부르지 못할 연우를 끊임없이 불렀던 아버지의 마음과 똑같이, 그동안 불러보지 못했던 것을

한꺼번에 다 불러보고 싶었는지 어머니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신씨부인의 귀에는 메아리로만 들렸다. 죽은 딸이, 그것도 땅에 묻은 지 수년이 흐른 지금

살아나 있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초점 잃은 눈동자를 하고서 손만 무의식적으로

연우의 얼굴과 팔을 쓰다듬었다.

“연우? 우리 연우냐? 정말 내 착한 딸, 연우냐? 그래, 이 눈. 이 코. 이 입술. 아까운 내 딸.

널 땅에 묻고 내 마음도 이미 너와 같이 땅에 묻었는데······.”

뒤늦게야 신씨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한번 터져 나온 눈물은 멈출 수 없을

만큼 쏟아졌다. 죄인으로 죽은 딸이었기에 이름조차 입에 담을 수 없었던 그동안의 설움과 맞물려,

그녀의 울음소리는 통곡소리보다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양명군의 사가에 희빈박씨의 가마가 도착했다. 가마에서 내리는 그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었다.

상궁이 그녀를 부축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사랑방에는 양명군의 시신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눕혀져 있었다. 희빈박씨가 들어가 시신 옆에 앉자, 시신을 지키고 있던 하인이 양명군의

얼굴을 덮고 있던 헝겊을 조심스럽게 들어냈다. 그 얼굴을 본 그녀는 일그러진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누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였느냐? 저 미소가 안 보이느냐? 살아있구먼, 살아있구먼.”

희빈박씨는 아들의 얼굴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싸늘했다.

“양명군, 이 추운 날 비오는 밤에 또 저잣거리에 나가 바보놀음 하였습니까? 이리 차가우니

사람들이 양명군이 죽었다고 내게 말하러 오지요. 장난은 그만 하고 일어나 보세요.”

하지만 죽은 시신이 일어 날 리가 없었다.

“이러면 안 됩니다. 이 어미가 겁나잖아요. 제 손 떨리는 게 안보이십니까? 이 이상 장난 하면

저도 화를 낼 겁니다. 양명군!”

그녀의 손이 양명군의 시신을 흔들었다. 얼굴만이 아니라 온몸이 싸늘했다. 아들의 죽음이

손을 타고 가슴으로 넘어왔다. 그래서 더욱 심하게 시신을 흔들었다. 그러자 주위사람들이

그녀를 만류하며 멀리 떨어지게 했다. 비록 어미였지만, 그녀는 아들보다 품계가 아래이기에

왕자의 시신을 함부로 해선 안 되었다. 가까이 오려는 그녀와 이를 말리는 사람들 사이에

몸싸움이 일어났다. 그녀의 옷섶은 뜯겨지고 입술은 이에 짓눌려 피가 났다.

결국 힘에 부친 그녀는 아들과 떨어진 곳에 쓰러지듯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아들이지만

살아있을 때 이름 한번 불러보지 못했다. 아들 앞에 공대만 해야 했고, 고개를 숙여야 했다.

살아있을 때도 한번 안아보지 못했는데, 지금 시신으로라도 안을 수가 없었다.

“이리 가려고, 그때 이 어미한테 왔었습니까? 나란 것도 어미라고 마지막이라도 보려고······?

그것도 모르고 난 한심한 말만 하고, 한심한 짓만 하고······.”

희빈박씨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왕의 후궁이 된 이후로

처음으로 목 놓아 울었다. 아들에게 미안했다. 자신이 낳아준 것이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차마 미안하다는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46

박씨부인은 대문을 보며 하염없이 서성거렸다. 운의 안부가 걱정되어 미칠 것 같은데도,

아녀자의 몸이기에 경복궁으로 들어가 동정을 살필 수 없는 것이 더 괴로웠다.

소식을 알아보러 다녀온 하인이 양명군의 죽음을 전했지만, 운에 대해선 그 어떤 것도

알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손바닥의 지문이 닳을 정도로 두 손 모아 아들의 안전을

빌며 대문 앞의 땅을 발자국으로 다졌다. 그렇게 자신의 불안도 달랬다. 또 다른 하인이

왕의 군사들이 반란 관련자들을 잡아들이고 있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박씨는 운이 무사하리라

믿으면서도, 그의 머리털 하나라도 상처입지는 않았는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입에 아무 것도 대지 않고 꼬박 바깥에서 서성거린

그녀의 다리는 서서히 거동하기 힘들어져 갔고, 그녀의 손은 꽁꽁 얼어갔다. 그래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저녁 무렵, 대문 밖에 나가 있던 하인이 소리치며 들어왔다.

“주인마님! 도련님이 이리로 오고 계십니다!”

“뭐라? 무사하더냐?”

하지만 하인의 답을 미처 듣기도 전에 갑옷을 입은 운이 말을 탄 채로 급하게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말에서 훌쩍 뛰어 내리는 아들은 건강한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작게라도

다친 곳은 없는지 살피느라 박씨의 눈동자는 바쁘게 움직였다. 운이 다가와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그녀는 멀쩡한 모습을 보여준 고마운 마음을 숨기고 엄하게 말했다.

“무슨 급한 용무이기에 이런 시급한 상황에서 상감마마의 옆을 비웠단 말이냐? 네 직책의

중대함을 잊었느냐?”

운의 입술이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다가 싸늘하게 열렸다.

“상감마마께옵서 소인에게 허통(許通, 서얼의 신분에서 벗어나 아비의 신분을 따르는 것)을

윤허하시었습니다. 하여 마님께 허락을 구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아직 이번 사건이 진행 중에 있었지만, 훤은 무엇보다 먼저 운검의 공에 대한 상부터 내렸다.

운의 신분은 운뿐만이 아니라 훤에게도 한이었기 때문이었다. 허통이 내려지자, 운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달음으로 달려왔다. 그의 말을 들은 박씨의 가슴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 어떤 허락······?”

“하찮은 소인이지만, 어머니라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부디.”

박씨의 눈에 서서히 물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기쁨을 넘어 원망마저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나쁜 놈. 천하에 또 없을 불효막심한 놈. 내 언제 너에게 어머니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느냐?

네가 나에게 아들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느냐?”

운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이제야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 죄였고, 이렇게 허락이란 것을 구하려

한 것도 죄였다. 오래전부터 이미 그녀는 어머니였기에 지금의 그는 불효자였다.

“소자, 마음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어머니.”

박씨는 떨리는 손으로 운의 양 팔을 잡았다. 그리고 눈에 차오르던 물기를 기어이 주름진 볼로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물줄기를 따라 운의 한도 같이 흘러내렸다.

“다, 다시 한 번 말해보아라. 바깥이 시끄러워서 잘 들리지가 않는구나. 방금 뭐라고?”

“어머니······.”

박씨의 주먹이 운의 가슴을 사정도 없이 때렸다. 그의 철갑옷에 얼어있던 주먹이 아팠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때리며 소리쳤다.

“나쁜 놈! 괘심한 놈! 남들은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을 이제야 하다니. 그까짓 어명이 무어라고!

너와 나의 사이에 어찌 어명 따위가 먼저 선단 말이냐? 부모자식 간의 정이란 것이 그 정도 밖에

안 되더냐?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이리도 불효막심한 놈이라니. 이 나쁜 놈아!”

언제나 강인했던 그녀의 입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입술은 눈물과 미소를 동시에

머금고 있었다. 아주 짧은 운의 미소도 보였다. 그리고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도 보였다.

너무 순식간에 스쳐지나간 그의 표정이었지만 박씨는 그것을 보았다. 이윽고 운은 다시 흑마에 올랐다.

“잠시 달려온 것입니다. 일이 마무리되면 정식으로 절을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급히 서둘러 가버렸다. 그의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니 박씨의 마음은 더욱 벅차올랐다.

급박한 지금 상황에 왕의 곁을 비워가며 이렇게 달려올 운이 아니란 것을 알기에, 어머니를

불러보고 싶었던 그의 억눌렸던 마음의 크기가 느껴졌다. 박씨는 기쁨에 북받쳐 젖은 마당임을

깨닫지 못하고 경복궁을 향해 네 번의 큰절을 연거푸 올린 뒤, 엎드려 소리쳤다.

“상감마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마마께옵서 소신의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겠다고 하시어도

기꺼이 바칠 것이옵니다.”

운은 뛰다시피 걸어서 왕의 곁으로 돌아갔다. 원래 운이 있던 자리를 대신하여 아주 잠시 동안

전 운검들이 있었다. 훤은 천추전에서 어갑을 벗고 곤룡포 차림으로 만기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혈육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조차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친람을 하지 않은 폐해도

폐해였지만, 반란세력을 정리하는 일도 밀려있었고, 무엇보다 내일 조정에 나가 이번의 반란사건과

예전의 세자빈시해사건까지 들춰내기 위해서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를 판이었다. 운이 왕의

앞에서 몸을 숙여 인사했다.

“상감마마, 복귀하였사옵니다.”

“그래, 다녀왔구나.”

운의 모습을 보자 비로소 안심한 훤은 다시 산더미 같은 문건들에 머리를 박았다. 전운검대장이

운에게 다가와 옆에 서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에게는 할 말 없느냐?”

“네, 없습니다.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정3품으로 지방무관. 현재 전운검대장의 관직)어른.”

순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운의 복부를 향해 그의 매서운 주먹이 날아왔다. 하지만 그것을 막아내는

운의 손이 더 재빨랐다. 드센 주먹을 힘껏 감싸 잡은 운이 전운검대장의 귀에만 들리도록 말했다.

“제 몸에 주먹이나 검을 닿고저 하신다면 더 많은 연습을 하셔야겠습니다, 외숙부님.”

마치 협박처럼 들릴 정도로 차가운 말투였지만, 전운검대장의 입가에 싱긋이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듣고 싶었던 말인 ‘외숙부’를 정확히 말해주는 운이 고마웠다.

“애교라고는 없는 놈.”

운은 그의 감격스레 중얼거리는 말을 뒤로하며 왕의 옆, 운검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역모사건은 양명군이 건네준 명부에 이름과 함께 새겨진 수결이 발뺌을 할 수 없는 증거로

남았기에 별다른 문초 없이 관련자들을 처벌할 수가 있었다. 외척들의 절반 이상이 관련자로

연류 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관상감에서는 교수들 아래의 훈도들이 공모를 한 것이

드러나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지만, 성숙청은 전의도무녀(전직도무녀)가 연류 되어 있었기에

그나마 관상감보다는 충격이 덜했다. 하지만 조정 전체를 이중 삼중의 충격과 혼란으로 몰고

간 것은 이번의 역모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예전의 세자빈시살사건이었다. 조정이 혼란에 빠진

첫 번째 이유는 왕족들의 연류란 점이고, 두 번째는 죽은 세자빈허씨가 살아있는 것, 세 번째는

세월을 그때로 되돌려 목숨을 끊은 중전윤씨를 폐서인시키는 정도에서 머무르지 않고 아예

처녀귀로 규정하고, 죽었던 세자빈허씨를 첫 중전으로 두려는 왕의 완강한 결단이었다.

그 사건의 주모자였던 왕대비윤씨가 독살 당했다는 소식이 날아왔기에 자연히 화살은

민화공주에게로만 집중되었다. 그 당시로 사건을 되돌리면 무품계인 공주가 일품계인 세자빈을

시살한 것이기에 죄를 벌하기에는 애매한 문제도 대두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는 막강한

자세로 딸을 보호하며 버티고 선 대비한씨의 고집이 있었다. 그래서 사건의 종결은 더욱더

난항을 겪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왕대비와 양명군의 국상을 위해 왕의 집무가 7일 동안

휴무에 들어간 것이다. 그동안 조정은 나름대로의 심사숙고에 들어갈 수 있었고, 훤은 형제와

조모를 잃은 슬픔을 다스릴 수가 있었다.

국상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정은 또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국상 뒤에 찾아온 가장 큰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후사도 없는 왕의 혼례 문제가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원래 국상이 있고

나서는 1년이 지나기 전에는 아무리 왕이라 해도 혼례를 올려서는 안 되는 것이 법도였다.

하지만 후사가 없는 왕의 가례는 이러한 법도에서 제외되었다. 열 일을 재껴두더라도 왕의

가례부터 준비해야 하는 것이 조정의 최우선 과제였지만, 이 또한 과거의 일이 정리되기 전에는

불가한 것이었다. 이렇게 꼬일대로 꼬인 문제들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조정에 성균관 유생들이

더욱 일을 보태고 있었다. 경복궁 밖의 흥례문 앞에는 그들이 몰려와 권당을 하고 있었다.

왕족이라 하더라도 죄를 지은 자들은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을 위해서였다. 관련된 왕족만

처리할 수 있다면, 훤도 이렇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염이라는 죄 없는

인재도 같이 걸려있었다. 수많은 상소들 속에 훤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가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마음의 결정은 다 내리고 있다는 뜻이었고, 그 결론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도 되었다. 그래서인지 성균관 유생들이 권당을 한다는 말을 전해들은

훤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슬쩍 비쳤다.

권당을 위해 난삼(?衫, 옥색의에 청색연을 두른 세종부터 선조까지의 유생들의 예복.

훗날 앵삼(鶯衫)으로 변천)을 입고 줄 맞춰 앉은 유생들의 표정은 모두 비장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이제까지 두려워 목을 사리게 했던 외척들이 쓸려 나간 뒤라 그들의 목에는 더욱 힘이 가해졌다.

그런데 침묵하고 있느라 조용한 그들 끝에서부터 술렁거리는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옥색의

물결 속에 새하얀 도포를 입고 흑립을 쓴 염이 단정한 걸음으로 흥례문 앞으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 공개석상에 모습을 잘 보이지 않는 그이기에 소문으로만 그를 만난 유생들도 있었지만,

아름다운 모습과 우아한 몸짓만으로도 그가 누군지 눈치 채지 못하는 이가 없었다. 유생들의

동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염은 그들의 눈빛에 눈을 돌리지 않고 바로 흥례문 앞에서 네 번의

절을 올린 뒤, 무릎을 꿇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무릎 앞에 봉서를 내어놓았다.

염의 출연은 천추전에서 조계를 하고 있는 왕과 대신들에게 보고가 올라갔다.

“상감마마께 아뢰옵니다. 흥례문 앞에서 성록대부 풍천위가 수차(袖箚, 임금을 뵙고 직접

바치던 상소)를 청한다 하옵니다.”

“드디어 왔구나.”

빙긋 웃으며 중얼거리는 훤의 소리는 오직 운만 들었다. 대신들 사이에서도 술렁이는 물결이

일어났다. 의빈이 된 이후부터 그의 행동은 의빈의 규범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었고, 그것이

모든 이들로 하여금 안타깝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목소리를 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지금 처지는 부인인 민화공주와 누이인 세자빈허씨의 가운데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의견이 궁금하기까지 했다. 그 청렴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

어떤 해답을 줄 것이란 기대도 하였다. 이들의 술렁이는 분위기를 딛고 왕이 말했다.

“가서 물어라. 풍천위가 올리는 수차가 무엇인지!”

사령은 즉시 달려 나갔다. 그리고 한참 만에 머뭇거리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차마 말도 올리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그에게로 왕의 질책이 내려졌다.

“어떤 수차이기에 그리도 망설인단 말이냐! 무어라 하더냐?”

“그것이······.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자탄장(自彈章, 자신의 죄를 탄핵하는 글)이라 하옵니다.”

대신들 사이에 조금 전 보다 훨씬 술렁이는 물결이 일어났다. 그중 대사헌이 몸을 깊숙이

숙이며 외쳤다.

“상감마마! 대사헌 아뢰옵니다. 풍천위의 수차를 거두어들이시면 아니 되옵니다! 풍천위는

누이의 죽음으로 한번 죽었던 분입니다. 그리고 누이를 죽인 공주와 부부의 연을 맺은 것으로

두 번 죽었고, 이제 세 번째의 죽음을 청하는 것이옵니다. 어찌 이 같은 억울함이 또 있겠사옵니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훤은 오랫동안 생각에 빠졌다가 입을 열었다.

“풍천위에게 가서 전하라. 자탄장은 나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것이니 그만 돌아가라 일러라.”

사령이 흥례문으로 달려가니 그곳에는 의금부 도사가 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숙이고

뜻을 거두어 달라 간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뒤에 있던 성균관 유생들도 자신들이 이곳에 뭐 하러

왔는지도 망각한 채 일제히 몸을 숙이고 도사와 같이 염에게 간청하고 있었다.

“풍천위대감. 이번만큼은 제발 휘어지십시오. 지금의 가장 괴로운 분은 상감마마와

풍천위대감이 아니시옵니까? 소인은 세자빈시살사건을 조사한 장본인이기에 전말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렇기에 더 이상 풍천위대감의 희생을 보고 있을 수가 없사옵니다. 대감께 죄가 있다 한다면

세상 어느 누구인들 죄가 없겠습니까? 자탄장이라니,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물러나 주십시오!”

하지만 입을 꾹 다문 염의 태도는 변함없이 정갈하기만 했다. 그리고 왕의 말을 전해들은

뒤에도 그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해가 지고, 달이 뜨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추위도 기승을 부렸다. 그의 몸이 걱정된 유생 한명이 일어나 자신의 난삼을 벗어

염의 어깨에 덮여주며 말했다.

“물러나 주십시오. 저희도 물러나겠습니다.”

이 한 사람을 시발점으로 하여 유생 한명씩 차례로 일어나 염의 어깨에 자신들의 난삼을

벗어 덮어주며 물러나 달라는 간청을 했다. 하지만 염의 눈동자는 여전히 흥례문만을 응시한 채

그들의 간청을 듣지 않았다. 어느새 염의 어깨에는 수많은 옥색의 난삼이 덮였고, 주위에도

가득 쌓였다. 그래서 죄인의 옷으로 입고 온 새하얀 그의 옷은 선비의 색인 옥색으로 덮여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염의 고집은 밤을 샜다. 그리고 훤의 고뇌도 밤을 새워 천추전에 있었다.

새벽이 되자, 조강을 하기 위한 대신들의 입궐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따로 결의 한 것이 없었는데도, 변함없는 태도로 앉아 있는 염에게 모두가 절을 올리고 난 뒤

흥례문을 넘어섰다. 그리고 그에게 절을 한 어느 누구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남의 죄를

논하기에 앞서 자신의 죄부터 보는 그의 앞에서는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었기에. 옛날 외척들의

득세에 목소리를 낮추느라 세자빈허씨의 죽음에 석연찮은 부분이 있는 것이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죽음을 덮고 처녀귀로 규정한 것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들이기에. 그리고 스스로의

죄를 잊고 청렴한 척 살아왔기에.

“풍천위의 강직함을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가서 자탄장을 받아오너라!”

천추전에서 밤을 꼬박 지새운 왕의 첫마디였다. 대신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아니 되옵니다, 상감마마!”

“이대로 두었다간 그의 몸이 상할까 걱정이오. 그러잖아도 친구인 양명군을 잃고 슬퍼하느라

이미 몸이 상했을 터인데.”

무거운 걸음으로 나간 사령은 염의 봉서를 가져다 비단 천에 표구한 뒤 두루마리에 엮어 왕의

앞에 바쳤다. 천천히 두루마리를 풀어 내용을 읽던 훤의 눈동자에 기쁜듯한 눈물이 맺혔다.

“풍천위! 금고를 당했던 그간의 시간 동안도 게을리 하지 않고 학문을 닦았구나. 자신을 탄핵하는

글을 이리도 논리정연하게 단정히 쓸 수 있는 이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며, 이토록이나

미려한 필체 또한 어느 누가 흉내 낼 수 있단 말인가. 어이하여 풍천위는 나에게 이러한 수차를

바친 자를 징계토록 하는 시련을 준단 말인가.”

왕의 한탄만큼이나 염의 글을 돌려 읽은 대신들의 마음도 찹찹했다. 훤은 빈 종이를 펼쳐

힘 있게 글을 써내려갔다. 최대한 간결하게 쓴 뒤 건넨 글은 즉시 사령이 표구를 하는 곳으로

가져갔고, 그곳에서 두루마리로 엮어 의금부판사의 손으로 건너갔다. 의금부판사는 뒤에 선전관과

사람들을 거느리고 흥례문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이 당도하자 일제히 긴장하여 술렁거렸다.

오직 염만이 움직이지 않았다. 의금부판사가 소리쳤다.

“성록대부 풍천위는 어명을 받으시오!”

염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주위로 어깨에 덮여있던 난삼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염은 그동안 얼어붙은 다리에 휘청거렸지만, 이내 단정히 하여 힘겹게 네 번의 절을 올리고

자리에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의금부판사가 왕의 전교를 펼쳐들고 읽었다.

“성록대부 풍천위는 들어라! 예전의 세자빈시살사건에서 저주주술의 죄를 지은 민화공주와

부부의 인연을 맺은 죄를 묻노라. 이에 그대의 의빈 봉작을 파하고, 작위에 준하여 내려졌던

모든 재산을 압수한다. 그러하니 품계는 민화공주와 국혼을 올리기 바로 전의 정5품으로

삭감하고 용관(冗官, 직책 없이 품계만 있는 벼슬)으로 대기토록 하라!”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결코 벌이 아니었다. 염은 깜짝 놀라 땅에 엎드리며 울부짖었다.

“받잡을 수 없사옵니다. 벌을 내려주시옵소서! 천신을 징계하여 주시옵소서, 상감마마!”

소리치는 염의 뒤로 성균관의 유생들도 소리쳤다.

“충분하옵니다! 어명을 받잡아주십시오!”

염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목이 쉴 정도로 벌을 내려달라 소리쳤다. 그렇게 울부짖는 염의 앞에

조정의 대신들이 나와서 일제히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그중 영의정이 대표로 말했다.

“소인들의 청입니다. 부디 물러나 주십시오. 대감께서 어명을 받잡지 아니한다면, 소인들도

상감마마께 자탄장을 아니 올릴 이들이 없습니다. 그리하면 지금의 상감마마의 곁에 누가 남아있겠습니까?

민화공주와의 부부 인연을 끊는 것으로 이만 물러나 주십시오. 상감마마를 윗잡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대신들도 버티고 엎드려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염도 그들의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염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의 눈에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그의 새하얀 옷은

죄인의 옷이 아니라 순백의 청렴의 옷으로 비춰졌다. 그는 오던 길과 같이 가는 길도 가마를

옆에 세우고 걸어서 돌아갔다. 그의 뒤로 그동안 그를 흠모했던 수많은 선비들이 따라갔다.

근정전의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훤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지. 풍천위는 왕의 말은 듣지 않아도 백성의 말은 듣는 인물이지.······민화공주!

눈이 있으면 보고, 귀가 있으면 듣고, 마음이 있으면 느껴라. 네 편협한 치마폭에 홀로 품으려

했던 사내가 얼마나 큰 인물인지를. 네 죄까지 감싸 안는 그의 깊은 마음을. 부디, 그의 뒤를

따라가는 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들어다오.”

염의 봉작 삭탈이라는 왕의 어명이 있고 난 이후, 그 어떤 누구도 민화공주의 탄핵을 입에

담는 자들이 없었다. 그녀의 더러운 죄를 염의 깨끗한 성정이 충분히 가려주었기 때문이었다.

#47

훤이 지정해준 별궁(신부의 집이 아닌 큰 규모의 왕족의 집을 임대하여 별궁이라 함)에서

가례일을 기다리며, 궁중의 법도와 혼례의 순서를 익히고 있는 연우에게로 대궐로부터

사자(使者)가 도착했다. 그리고 대문 밖에 화려한 의장과 악대가 서고, 각종 예물들과

속백함, 말 4필은 안으로 들어왔다. 미리 와서 납채(納采)를 기다리던 신씨는 그 행렬을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래 납채는 왕실 가례의 첫 번째 단계로 정사와 부사가 대궐 정전에서

왕으로부터 교명문(敎名文, 왕비로 결정된 것을 알리는 명령문)과 기러기를 받아 국구의 집안에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속백함(束帛函, 검붉은 비단 5필, 분홍색 비단 4필이 든 비단 예물함)과

말4필은 납징(納徵, 왕실 가례의 두 번째 단계로 혼인의 정표인 예물을 보내는 의식)에 필요했다.

어안이 벙벙한 신씨에게로 사자가 와서 말했다.

“상감마마께옵서 이전 세자빈간택 시에 이미 납채는 치뤘으니 납징부터 거행하라 어명 하시었습니다.”

납채는 치르고 연우가 죽었으니 그 동안의 괴로웠던 모든 세월을 도려내고, 납채가 끝난 시점과

납징이 시작되는 지금 시점을 잇고 싶은 훤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옛날의 납채가 효력을 발휘하는

지금의 순간으로 인해, 한때 중전의 신분으로 있었던 윤씨는 원래의 자신의 운명이었던 영원한

처녀귀로 돌아갔다. 그렇게 훤은 한 때 뒤바뀌었던, 그리고 영원히 뒤바뀔 뻔 했던 두 여인의

운명을 원위치로 되돌려 놓고 있었다.

신씨는 속백함과 예물들을 받쳐 든 상궁들과 연우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다소곳하게 그림처럼

앉아있는 연우에게 절을 올린 그들은 품속에서 서찰을 꺼냈다.

“상감마마께옵서 보내신 봉서이옵니다.”

봉서는 높게 받혀져 연우의 손으로 건너갔다. 그림과도 같아서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던

그녀의 얼굴에 반가운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다른 것에 시선도 두지 않고는 재빨리 봉서를

열어 펼쳤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내일을 기다리고, 또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내일을 기다리오.

그대와 함께 할 날은 머지않은 미래의 한곳에 박혀 있는데, 하룻밤 자고 일어난 오늘은

어이하여 그 미래에서 더욱 멀어져 있는지 알 수가 없소.>

비록 훨씬 수려해지긴 했지만, 옛날과 다름없이 기교 하나 없는 힘차고 정직한 필체였다.

그리고 변함없이 연우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내용이었다. 길지 않은 글을 오랫동안 되풀이하여

예전의 감정들과 함께 음미를 하고 있는데, 예물함을 열어 보던 신씨와 상궁들이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입니까?”

“저, 그것이······.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적의와 함께 머리에 쓸 가체를 장식할

예물들 중에 빠진 것이 있사옵니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예물 중에 빠진 것이

있다니, 이보다 더 불길한 일은 없었기에 말을 올리는 상궁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하지만 연우는 차분하게 미소를 보내며 우아하게 팔을 앞으로 뻗었다. 예물함을 달라는 표현이었다.

그녀 앞에 펼쳐진 예물함 속에는 휘황찬란한 각종 머리장식품들이 있었다. 그중 눈에 들어오는

외로운 봉잠 하나, 그것은 쌍봉잠 중에서 훤이 이제껏 가지고 있던 한 짝이었다.

한 짝의 봉잠만으로도 다른 비녀에 비할 수 없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왕비의 가례 봉잠.

“가장 긴 봉잠은 원래 하나가 아니라, 두 개가 하나이온데, 어찌 이런 일이······.”

“이것 때문이라면 마음 놓으세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의 구석에 둔 보자기를 가져왔다. 그리고 천천히 풀어 옷가지들 사이에 둔

하얀 천을 꺼내 그 속에서 훤이 정표로 준 봉잠을 내어 놓았다. 예물함에 홀로 있는 봉잠과

똑같은 그것을 본 상궁들은 물론 신씨까지 놀라서 연우를 보았다. 그녀는 그들의 말없는 물음에

답해주는 대신 훤의 봉잠 옆에 자신의 봉잠을 나란히 두었다. 같이 있어 더 아름다워진 쌍봉잠,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그것들은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상궁은 비단 속에 기름종이로 밀폐한 것을

신씨에게로 건넸다.

“원래가 악귀를 쫓는다는 영릉향을 마셔야 하온데, 상감마마께옵서 예비중전마마의 향기 하나라도

다치게 하지 마라시며, 난초 분말을 하사 하셨사옵니다.”

“원, 세상에 이리 많은 난초 분말을 언제 다 쓴다고. 조선팔도에 있는 것을 다 거둬들이셨소?”

신씨의 목소리엔 알 수 없는 떨떠름함이 담겨있었다. 연우는 그녀에게 예물함을 건네고 서안을

당겨 앉아 붓을 들었다. 훤에게 보내는 답장을 쓰기 위해 잡은 붓끝이 오래전의 기억에 물들어 떨렸다.

하지만 한번 종이에 닿은 붓은 날아가듯 유려히 움직였다.

<일 년 안에 주어진 달이 같고, 한 달 안에 주어진 날이 같고, 한 날에 주어진 시간이 같다는

옛 성현들의 말이 이제야 다 거짓임을 알겠사옵니다. 님(임금을 뜻하는 옛말임과 동시에

사랑하는 임)과 보냈던 한 날과 님을 기다리는 이 한 날은 분명 같은 한 날인데, 지금의 한 날은

님과 함께 있던 몇 날을 이어붙인 듯 소녀에게도 참으로 길기만 하옵니다.>

연우의 봉서는 상궁의 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연우의 집안에서 보내는 답서는 사자가 받혀 들고

화려한 의장과 악대들과 같이 대궐로 돌아갔다. 그들이 가고 난 이후, 방안에 연우와 신씨만 남았다.

신씨도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다. 궁궐에서 보내준 상궁들과 차지들만 남고 별궁은 철통같은

호위에 들어가야 했다. 그녀는 장옷을 팔에 걸치고 일어나다 말고 다시 자리에 앉아 한숨과

함께 또 다시 눈물을 보였다. 연우가 위로하기 위해 다정하게 불러보았다.

“어머니.”

“내가 일 년을 바랬더냐, 십 년을 바랬더냐? 내 새끼 얼굴 한 번 더 보고 보내겠다는데,

참으로 인정머리라곤 없는 임금이야. 그 구중궁궐에 들어가면 언제 다시 볼 수 있다고.”

신씨는 푸념하다 말고 앞에 앉은 이가 자신의 딸이 아니라, 중전이란 것을 깨달았다.

“아! 송구하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여식인지라, 품에 조금만 더 끼고 있고픈 욕심에 감히

상감마마를······.”

“어머니, 이렇게 있을 때는 딸로 대해주세요. 어머니와 같이 상감마마를 원망해 드릴게요.”

“그랬다간 예법에 대해서 염의 일장연설을 들어야 하옵니다.”

연우의 입술이 선한 미소와 안타까움을 그리며 움직였다.

“오라버니는 어찌하고 있습니까?”

신씨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염은 어느 때와 다름없이 생활하고 있었다. 일어나야 할

시간에 일어나고, 책 읽고, 자야할 시간에 자고, 스승의 예를 갖추고 오는 선비들마다 대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도 예전과 달라진 것 하나 없었다. 그래서 신씨의 마음은 더욱 속상했다.

연우의 죽음 뒤에 며느리인 민화가 있다는 것도 그녀는 믿겨지지 않았다. 민화는 여타의

공주들과는 달랐다. 염을 따라 사치 한적 없었고, 시댁 어른들 앞에 공손하고 정성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원래 공주가 혼인한 집은 더 큰 칸수의 대저택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지아비와 시부의 뜻과 함께 하여, 금상의 누이가 살기엔 턱없이 좁은 지금의 집에

계속 살아준 여인이었다. 그래서 신씨는 오만불손한 공주를 모신 다른 부마집안이 겪는 고통

같은 것은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런 공주가 자신의 딸을 죽였다니, 너무나 충격적이라

믿고 싶지 않았기에 원망도 미처 못 하고 있었다. 왕의 벌은 염에게만 내려졌고, 아직 민화는

그 어떤 언급도 없이 내당의 방에 그대로 기거하고 있었다. 아무리 죄인이라고 해도 임신을

한 여인을 내쫓는 것 또한 법도가 아니기에 왕실에서 어떠한 조치를 해주기 전에는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다른 이들의 탄핵도 모두 거두어져 그녀의 존재 자체가 소외되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라면, 염과 민화가 서로를 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씨를 가진 여인을

그리 냉대를 해야 하는 아들의 마음 때문에 신씨의 속도 같이 타들어갔다. 손자를 가지고 있기에

미워하는 것도 조상에 죄송했다. 그래서 그녀의 입에선 한숨만 나올 뿐 연우의 물음에 대한

답은 나오지 못했다.

여식을 하루라도 더 보고 있고픈 신씨의 마음과는 달리 다음날 고기(告期, 혼인 날짜를 별궁에

통보하는 의식)가 거행되었고, 관상감에서 기일이라 정한 그 날짜는 너무도 짧아 신씨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마음 급한 왕과, 후사가 없는 왕의 곁을 잠시라도 비워두면 종묘사직이

걱정된다는 신하들, 그리고 많지 않은 기일을 택해야 하는 관상감의 계산 속에는 그녀의 마음은

조금도 고려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며칠 지나지 않아, 궐의 모든 상궁과 궁녀들이

별궁으로 와서 하는 책비(冊妃,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가 거행되었다. 왕이 파견한 상궁들이

주관하는데, 적의를 입은 연우를 본 그들은 모두가 그 기품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도 왕비의 당당함이 더욱 빛을 발하여, 조용하고 차분한 여인에게서 나오는 그러한

기품을 의아하게까지 느꼈다. 무릎 꿇은 연우에게 차례로 책문(冊文, 왕비를 책봉하는 문서),

보수(寶綬, 왕비의 도장인 금보), 명복(命服, 왕비의 옷)이 내려졌다. 그리고 자리에 일어선

그녀에게로 모든 상궁과 궁녀들이 대궐의 안주인에 대한 예를 갖추어 네 번의 절을 올렸다.

이로써 연우는 조선의 왕비가 되었고, 왕비는 정식으로 상궁과 내시가 모셔야 하기에 신씨는

더 이상 딸의 곁으로 올 수조차 없게 되고 말았다. 그 옛날, 세자빈이 아닌 처녀귀로만

규정해야 한다는 조정의 중론도 책빈(冊嬪, 세자빈을 책봉하는 의식)을 치르지 않고 죽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명사봉영(命使奉迎, 왕이 사신을 보내 별궁에서 대궐로 왕비를 맞이해 오는 의식.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왕이 직접 왕비를 맞이하러 가기도 함)의 날에는 그 어떤 날보다 부산했다.

이날은 왕실의 종친과 문무백관뿐만이 아니라 국구를 대신한 염도 별궁으로 왔다. 그의 아름다운

모습이 별궁에 나타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린 듯 그의 곁에 몰려들어 순식간에 인파에

둘러싸였다.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아름다움을 탐하고픈 이들 사이에 가벼운 몸싸움도 일어났다.

이러한 소란 속에서도 염은 흐트러지지 않은 미소로 예의를 갖춰 일일이 응대했고, 그의 미소에

사내들조차 설레는 미묘한 마음을 느꼈고, 민화공주의 죄가 이해가 되기까지 했다. 훤도 직접

맞이하러 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움직여야 하고, 그런 만큼 국고 또한

낭비가 된다는 연우의 서찰로 인해 욕심을 접어야 했다. 모두가 기다리는 동안 별궁 안에선

궁궐로 들여보내는 딸에게 하는 마지막 당부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연우는 붉은 적의를 입고

머리 위에 갖은 비녀와 떨잠, 쌍단봉잠, 마리삭 금댕기로 장식을 하고, 좌우 양옆에는 헤어져

있던 쌍봉잠이 자리를 잡았다. 그녀에게 염이 유교예법에 정해진 대로 말했다.

“조심하고 공경하여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명령을 어기지 마소서.”

연우는 격식을 갖춘 것이 생활인 오라버니를 보고 마음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예법에

정해진 말이 아니었어도 그는 똑같이 말했을 것 같았다. 염의 옆에 선 신씨도 정해진 말을 했다.

“힘쓰고 공경하여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명령을 어기지 마소서.”

단정한 염의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눈물을 삼키느라 힘겨웠다. 이윽고 연우가 연(輦, 가마)에

오르자 사면을 내려 그녀의 모습을 감추게 했다. 신씨는 입술을 깨물고 쓰다듬을 수 없는 딸을

대신해 연을 쓰다듬었다. 보다 못한 염은 그녀를 부축하여 연우에게서 멀어지게 하여 속삭였다.

“어머니, 세상의 모든 눈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시면 중전마마의 심정은 어떠하겠습니까?”

어두운 가마 속에 앉은 연우도 옆의 덮개를 열어 어머니의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었지만,

덮개를 들썩임과 동시에 옆에 서 있던 상궁이 조용히 아뢰었다.

“중전마마! 심중은 헤아리오나, 닫으시옵소서. 그리고 절대로 안수(眼水, 왕비의 눈물)를

비추어선 아니 되옵니다.”

연우와 신씨가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도 없이 악대의 피리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리고 화려한

의장을 선두로 하여 갖은 악기가 왕비의 입궐을 축하하며 앞섰고, 그동안 왕비에게 내려졌던

교명문, 책문, 보수, 명복을 실은 가마가 각각 줄을 지어 뒤를 따랐다. 그리고 가마들 중,

연우가 탄 가장 화려한 연이 마지막 가마행렬을 이었다. 문무백관은 그 뒤를 따라 말을 타거나 걸었다.

그 가운데 염도 슬픈 눈매를 숨기고 말을 타고 있었다. 행렬의 양 옆으로 상궁과 내관이 한 겹으로

호위하고, 가장 끝 양 옆은 군사들이 호위했다. 왕비의 가례행렬을 보기 위해 모여든 인파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가짜 왕비가 진짜 왕비를 죽이고 중전이 되었는데, 죽었다가

살아난 진짜 왕비가 죽어가는 왕을 되살려 가짜를 몰아내고 결국 궁궐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소문은 세상 무엇보다 빠른 말로 일파만파로 퍼졌기에, 그 기적의 왕비를 보고 싶은 마음에

며칠을 달려온 이들도 있었다. 백성을 괴롭히던 파평부원군 일파를 몰아내준 고마운 은인,

그들의 진짜 왕비를 향해 모두가 기꺼이 땅에 몸을 엎드렸다.

경복궁에 왕비의 행렬이 도착했다. 가마 안의 연우도 멈춰선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한동안 바깥이 어수선 하더니 이내 앞의 가리개가 위로 올려졌다. 환한 바깥이 드러났지만

그녀의 눈은 화강암 판석이 깔린 바닥만이 어지러이 보였다. 혹시라도 저 바닥에 발을 올린 순간

화강암 판석들이 갈기갈기 부서져 떨어져 내리지는 않을까 두려워 큰 숨을 삼켰다. 그때 앞에

하얀 손이 보였다.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고 연우의 손이 얹어지기를 기다리는 그 손의 주인은

분명 훤이었다. 손 하나 만으로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리고 자신이 발을 내디딜 그 곳에 환한

빛이 깔렸다. 연우는 하얀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리고 따뜻하게 꼭 쥐는 훤의 손에

의지해 가마 밖으로 나가 그와 마주섰다. 검은색 구장복을 입고, 면류관을 쓴 그는 연우를

안고픈 마음을 애써 다스리며 그녀의 눈동자 속에 미소를 심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그녀의

눈동자에 스며들어 물기로 변했다. 연우는 눈물을 비추어선 안 된다는 상궁의 말을 떠올려

얼른 입술을 앙다물었다. 훤이 그녀의 마음을 배려한 듯 따뜻하게 말했다.

“내일이란 것도 있었고, 오늘이란 것도 왔소. 매일 오는 오늘이 이리도 신기한 줄 미처 알지 못했소.”

“세상의 신기한 것 중에 상감마마의 미소에 미치는 것이 있다 하더이까?”

“있소, 더 신기한 것이.”

훤은 복잡한 표정으로 두 팔을 뻗어 연우의 가체 양 옆에 꽂혀 있는 쌍봉잠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쌍봉잠에게 하는 말인지 그녀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하나가 되었구려. 두 개가 하나인 것을 알지 못한 채 영원히 홀로 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훤과 연우는 활짝 열린 근정전으로 나란히 나아갔다. 문무백관들은 어도 양 옆 품계석 뒤에

줄을 지어 서서 몸을 숙였고, 둘은 그들 가운데를 지나갔다. 훤이 밟고 지나간 자리에 서찰을

보내놓고 가슴이 설레어 잠 못 이루던 어린 훤이 멈춰 섰다. 그리고 연우가 밟고 지나간 자리에

세자의 서찰을 받고 얼굴을 붉히던 어린 연우가 멈춰 섰다. 훤이 조금 더 지나간 자리에 죽통을

들여다보며 싹을 기다리던 어린 훤이 멈춰 섰고, 그 옆에 연우가 지나간 자리엔 화단을 보며

싹을 기다리던 어린 연우가 멈춰 섰다. 또 다시 세자빈으로 간택된 연우를 상상하며 밤하늘의

달을 보던 어린 훤이 멈춰 섰고, 그 옆에 나란히 세자의 모습을 상상하며 밤하늘의 달을 보던

어린 연우가 멈춰 섰다. 조금 더 지나간 자리에는 죽은 세자빈을 부르며 울부짖는 훤이 있었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한양 땅을 떠나며 울부짖는 연우가 있었다. 더 지나간 자리에는 죽은 연우를

그리워하여 북녘하늘을 바라보는 왕이 있었고, 그 옆에는 님이 그리워 경복궁이 있는 북쪽하늘을

바라보는 무녀가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많은 발걸음을 하고 지나간 자리에 온양에서의 비오는 날,

누구냐고 묻는 왕과, 누구라고 답할 수 없는 월이 만났다. 몸은 만났으나, 마음은 만나지 못했던

그날의 모습들을 지나 또 다시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들이 지나가는 발아래에 솟아올랐다.

비록 오랜 세월 몸은 떨어져 있었으나, 둘은 같은 날 설레고, 같은 날 싹을 기다리고,

같은 날 서로를 상상하고, 같은 날 울고, 같은 날 그리워하며 같은 곳을 보았고, 같은 날 만났다.

둘은 근정전 기단 위로 올라가 마주보았다. 그러자 올라오던 길에 남겨진 수많은 발자국들이

훤의 마음속으로 병풍처럼 첩첩이 접혀 들어갔고, 연우가 남긴 수많은 발자국들도 그녀의

마음속에 병풍처럼 첩첩이 접혀 들어갔다. 훤은 왼손엔 규를 잡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연우도 왼손엔 규를 잡고 오른손을 내밀어 그의 손과 그의 과거를 마주잡았다. 훤도 그녀의

손과 그녀의 과거를 힘껏 잡았다. 그들의 눈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똑같이 시선을 돌려 멀리

광화문을 지나 경북궁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한양 땅과 더 먼 조선 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 아래에는 문무백관과 백성들이 왕과 왕비를 향해 국궁례(鞠躬禮)를 올리는 물결이 일어났다.

동뢰(同牢, 첫날밤을 치르는 의식)를 위해 강녕전의 걸음은 소리죽여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원래는 왕과 왕비의 합방은 교태전에서만 가능하지만 동뢰만큼은 강녕전에서 치른다.

술과 음식을 차린 상을 두고 수줍게 등지고 있는 훤과 연우 옆으로 상궁들이 앉아 있었다.

그런 그들이 훤은 귀찮고 영 못마땅했다. 이곳 강녕전의 동쪽 온돌 큰방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연우는 가체와 적의를 벗고 당의 차림으로 왔고, 훤도 면류관과 구장복을 벗고 곤룡포를 입고

들어왔기에 그다지 손가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수발을 든답시고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 상궁들이

못마땅할 수밖에. 하지만 그들은 훤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천히 하나의 박을 쪼개어

만든 잔에 술을 부으려고 하고 있었다. 결국 그의 급한 성격이 드러났다.

“모두 물러나라!”

제조상궁이 당황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아뢰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아직은 아니 되옵니다. 입태시가 되려면.”

“어허! 물러나라 하였다. 잠시 중전과 이야기라도 나누려고 하는 것이니라.”

말을 자르며 역정을 내는 왕을 차마 거역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그들은 물러나기 전에 왕의

곤룡포를 벗기기 위해 다가왔다. 이를 눈치 챈 훤이 냉큼 말했다.

“됐다. 내 중전의 시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중전의 시중은 내가 들 것이니 어서 나가기나 하라!”

“그리 하오시면 술잔이라도······.”

“그 또한 알고 있다. 세 번씩 나눠 마시면 되는 것 아니냐.”

상궁들은 왕의 부릅뜬 눈을 차마 거역하지 못하고 머리맡에 도끼가 그려진 병풍을 쳐 놓고

방문들을 닫고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났다고 해도 멀리 간 것은 아니었다. 바로 큰방에 둘러진

작은 방들에 각각 앉아, 술을 적신 솜으로 귀를 막고 자리를 지켰다. 훤은 상궁들이 사라지자마자

연우의 등을 끌어안았다.

“저들이 조금만 더 미적거렸다면 그대가 첫날밤 생과부가 될뻔 하였소.”

연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훤은 그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궁금하오. 급히 저들을 몰아내는 나를 보며 등 돌리고 앉아 어떤 표정으로 있었소?”

“마음으로 웃고 있었사옵니다.”

“내가 경박하여 우습게 보였소?”

“아니옵니다. 어쩜 신첩의 마음과 그리도 똑같을까 신기해하느라 웃었사옵니다.”

“그렇다면 돌아서 나를 보시오.”

“돌아 보고픈데 막으신 분은 상감마마시옵니다.”

안고 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품에서 놓았다. 떨어진 그녀의 뒷모습에선

틀어 올려진 머리에 꽂힌 용잠이 보였다. 그곳엔 이젠 더 이상 붉은색 낡은 댕기는 없었다.

훤은 쪽진 머리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하나의 박을 쪼개 만든 두 개의 잔에 술을 부었다.

한 잔은 연우에게 주고 한 잔은 그가 들었다. 입술에 잔을 가져다 대니 술 향이 코로 들어왔다.

난향, 아니 울금향이었다. 훤의 눈썹 사이가 촉촉하게 일그러졌다.

“나란 놈은······어찌 이리도 어리석은지.”

울금초로 향을 낸 술은 신랑신부의 첫날밤에 악귀를 쫓는 술이었다. 그러니 온양에서 처음 만날 날

월이 바쳤던 술은 초례를 위한 것이었다. 연우는 이미 옛일이라는 듯 미소로 그의 일그러진

표정을 다독이며 술을 마셨다. 훤도 겨우 미소를 되찾아 술을 마셨다. 작은 양의 술을 세 잔

연거푸 마시고 나니 연우의 볼과 입술에 붉은 기가 올라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훤의 입술이

그녀의 붉은 입술에 조심스럽게 닿았고, 혀끝의 난향에 닿았다. 연우의 비녀를 뽑아 땋은 머리를

내려뜨린 뒤 가볍게 닿았던 입술은 서서히 멀어졌다. 그리고 연우의 옷고름도 서서히 그의

손에 당겨져 풀어졌다. 훤은 그녀의 입술 대신 옷고름 끝에 입을 맞췄다. 이내 입술은 옷고름을

따라 올라가 목덜미에 닿았다. 그의 두 손은 자유로이 움직이며 당의를 벗겨내고 치마와 겹겹이

둘러진 속치마들을 걷어냈다. 그래서 그 안의 하얀 비단적삼만 남았다. 속살이 비치는 모습을

잠시 보고 있던 훤은 그녀의 팔을 당겨 손목의 맥박을 삼켰다. 살아있기에 뛰는 맥박이 술보다

더 취기를 오르게 했다. 또한 연우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가늘게 떨리는 숨소리가 그의 몸을

더욱 달아오르게 했다. 결국 훤은 곤룡포를 급하게 벗어 던지고 붉은 비단 이불 아래에 그녀를

끌어다 눕혔다. 그리고 저고리와 바지도 벗어 던졌다. 갑자기 서두르는 그의 몸에 그녀는

잠시 당황했지만 차분하게 말했다.

“어복을 고이 접겠나이다. 잠시 물러나 주시옵소서.”

“에? 무, 무슨······?”

“어복이 함부로 나뒹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이는 신첩이 예를 저버리는 것이옵니다.”

연우는 자리에는 일어나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옷가지들을 정성을 다해 접었다. 그 모습을

어리둥절하게 보고 있던 훤은 기가 막혔지만, 마음과 같이 몸도 급했기에 툴툴거리며 같이

옷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껏 옷을 접어 본 적이 없는 왕이었기에 그의 손에 접혀진

옷들은 모두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다시금 그녀의 손이 갔다. 연우는 툴툴거리는

그의 모습을 힐끗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훤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중전이 나를 놀리고 있는 것 같소. 내 몸이 지금 어떤 지경인지 모른다 하진 못할 것이니.”

연우는 다 접은 옷가지들을 머리맡에 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신첩의 몸 또한 상감마마와 그닥 다르지 않사옵니다. 하오나 예는 예인지라.”

“꿀맛을 모르는 벌도 꽃 속의 꿀을 찾아가고, 꽃향을 모르는 나비도 꽃가루를 취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이러한 벌과 나비의 본능을 꽃이 어찌 알겠소?”

성을 가르치지 않아도 성욕을 느끼는 본능을 가지는 것이 사내의 몸이고, 여자는 그런 본능을

모르니 현재 그의 달아오른 몸을 다 헤아리진 못할 것이란 뜻이었다. 연우는 다소곳하게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 청순한 목소리로 말했다.

“봄철의 꽃과 풀은 비가 오지 않아도 피고, 뜰 앞의 노란 국화는 서리를 기다리지 않고도

피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온데, 하물며 자연과 하나인 여인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사옵니까?”

나이가 들어 몸이 성숙하면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성욕이란 것이,

사내의 몸과 여인의 몸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그녀의 당돌한 말에

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니 그보다 더 이전에 첫 서찰을 받았을 때부터

그녀는 만만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연우의 말을 음미하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고,

몸도 더운 열기에 휩싸여 달아올랐다.

“비 없이 핀 봄철의 꽃과 풀을 한창일 때 취하고, 서리 없이 핀 뜰 앞의 노란 국화도 한창일 때

취하는 사내도 자연과 더불어 단단히 여물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오.”

‘단단히 여물었음’이란 말에 연우의 두 볼이 붉어졌다. 이내 곧 훤의 품 안에 안겨

붉은 비단 이불 아래에 들어간 그녀의 볼은 더욱 붉어졌다. 그의 손이 적삼 치마 아래에 들어와

여러 곳을 더듬거리다가 속곳을 벗겨냈다. 그리고 자신의 속곳바지를 벗어 내린 뒤 연우의

무릎 사이로 들어가면서 몸 위로도 올라갔다.

“우뚝 솟은 산일수록 쉽게 낮아지지도 않는 법이니, 그대의 몸이 힘겹더라도 나를 미웁다 마시오.”

훤의 장난어린 너스레에 연우는 고운 미소로 응수했다.

“깊게 패인 계곡일수록 더 많은 물이 흐르는 법이니, 그 물 맛에 취하지나 마옵소서.”

붉은 비단 이불이 큰 물결을 치며 한번 출렁 움직이자, 붉은 비단 천에 금실로 수놓아진

황금용이 있는 힘껏 꿈틀거렸다. 그 순간 연우의 큰 눈이 놀라 더욱 크게 떠졌고, 짙은 속눈썹과

턱은 경련이 일듯 파르르 떨렸다.

“그것 보시오.···으···그대의 몸이···힘겨울 거라 하지 않았소.”

“뜨, 뜨거워서······.”

붉은 비단 이불이 또 한차례 큰 물결을 일으켰다.

“아······.”

힘겹게 삼키는 신음소리를 훤의 입술이 빨아들였다. 그렇게 그녀의 신음소리와 더불어 자신의

신음소리도 같이 삼켰다. 그리고 붉은 물결은 갈수록 빈번해져갔다. 가쁜 숨을 쉬기 위해

입술을 놓았다.

“뜨겁다니?······해가 뜨거운 줄 정녕 몰랐소?”

“아아······, 이토록이나 뜨거운 줄을 몰랐사옵니다.”

“나 또한 몰랐소.···겉이 차가워 안도 그럴 것이라 여겼건만,···달 속이 이리 뜨거울 줄이야.”

더 이상 두 사람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훤의 허리가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짐과 동시에 붉은

비단 물결도 더욱 거세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뚝 솟은 산일수록 쉽게 낮아지지 않는다는

훤의 말이 결코 너스레가 아니었음이 드러났고, 깊은 계곡의 물맛에 취하지나 말라던 연우의

응수대로 훤은 흠뻑 취하고 말았다. 그 취기로 말미암아 강녕전 마당에서 울러 퍼지는 입태시를

재촉하는 북소리도 듣지 못했다.

어느덧 모든 의식이 끝나고 세상의 시간도 끝난 것만 같은 적막함이 찾아왔다.

하지만 훤은 여전히 연우의 난향에 취해 있었다. 소중하게 서로를 끌어안고 누워 속삭였다.

“내일 아침이면 그대의 난향이 내 몸으로 다 옮겨와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마마의 국화향은 신첩의 몸에 옮겨와 있을 것이옵니다.”

“두렵소.”

“무엇이 두렵사옵니까?”

“아침마다 그대의 품에서 나를 떼어내려는 계인(북으로 아침을 깨우는 사람)의 목을 베라

명하는 폭군이 되지는 않을까······.”

“마마께옵서 폭군이 되시면 신첩은 기꺼이 요부가 될 것이고, 성군이 되시면 또한 기꺼이

현부가 될 것이옵니다.”

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참동안 큰소리로 웃고 난 그가 연우의 몸 위로 다시 슬그머니

올라가며 말했다.

“중전은 현부가 될 것이오. 내가 그리 되게 하리다.”

“기꺼이······.”

그의 말에 대한 답인지, 아니면 몸짓에 대한 답인지 알 수 없는 오묘한 말과 표정이었다.

훤은 그녀의 몸 안을 찾아들며 감정이 차올라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오.”

“네.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해 주시오소서.”

연우는 팔을 둘러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에도 감정이 차올랐다. 큰방 주위의

작은 방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상궁들은 애가 탔다. 가례절차상 내일의 왕비수백관하(王妃受百官賀)와

전하회백관(殿下會百官), 그리고 왕비수내외명부조회(王妃受內外命婦朝會)라는 빽빽한 일정이

남아있었기에, 왕비의 몸을 생각해서라도 그만 조용히 잤으면 했다. 하지만 솜을 막은 귀로

간간히 들려오는 소리와 움직임이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아 괜히 왕이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상궁들의 마음은 모두 하나가 되어 어서 잠들기를 밤새 기원했다.

#완결

조용히 시간이 흐를 동안 사람들의 머리에 민화는 잊혀져갔고, 그리고 배는 불러만 갔다.

어느덧 그 시간들은 염의 집 대문 앞에 숯과 한지를 끼워 엮은 금줄과 함께 가로 걸렸다.

민화의 목숨이 위태로울 상황까지 갔던 힘겹던 해산이 끝나고 사내아이를 낳았지만,

그녀는 아이를 안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미리 왕비가 내의원의 수의와 의원들을 내려주지

않았다면 금줄이 걸리기도 전에 그녀의 숨은 사라졌을 것이다. 민화가 정신을 차리고 제일

먼저 물은 것은 아기였다. 비록 염과 조정으로부터 내쳐지긴 했지만 그의 씨였고,

어쩌면 그녀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건강하고 또한 사내였으면 했다. 그래서 염과 꼭 닮은 건강한 사내아기란 답에 그녀는 비로소

안심의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해서라도 한번 안아 보고픈 마음에 주위의 도움을 받아 겨우

품에 안아보았다.

열 달을 뱃속에서 노심초사하며 키운 아들이었다. 그리고 목숨 줄을 내어놓고 어렵게 낳은

자식이었다. 열 달을 품은 것과, 그리고 어렵게 낳은 것을 빼고도, 품에 있는 아이는 가슴이

아파서 숨이 막힐 만큼 소중하고 아릿했다. 그 소중함이 그녀의 숨을 움켜쥐었다. 심장도 움켜쥐었다.

그리고 아이를 안기 전에 흘린 눈물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담은 눈물을 쏟아져 나오게 했다.

“이 아이는 내 자식이 아니어야 하는데······. 죄인의 자식이 되어선 안 되는데······.”

그녀가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마음, 갓 태어난 아이의 마음이 되어본 것이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스스로 마음먹어서도 아닌, 자연스럽게 든 마음이었다.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민화의 몸이 회복되어간 시간이기도 했지만, 이름을 받지 못한

아이와 정을 나누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주어진 유예기간은 끝이 났다.

“죄인 민화공주는 나와서 어명을 받으시오!”

의금부판사의 목소리가 염의 사랑채를 흔들고 들어와, 민화가 있는 안채까지 흔들었다.

그녀는 체념한 듯 아기를 안고 눈물과 함께 말했다.

“그냥 넘어갈 상감마마가 아니심을 알기에 오랫동안 기다렸다. 아가! 이젠 너도 죄인의 품이

아닌 아비의 품으로 가겠구나. 그분이 네게 성을 주고 이름도 주실 거야.”

하지만 말과는 달리 품에 안은 아기를 쉽게 내어놓을 수가 없었다. 방글방글 웃던 아기는 어미의

슬픔에 동화된 것인지 울먹거리다가 작은 주먹을 움켜쥐고 예쁜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울음을

뿜어내는 입술도 작았고, 그 안에 치아가 없는 잇몸과 혀도 자그마했다.

“네 이가 자라는 것도 못 보겠구나. 앞니만 두 개 난 귀여운 모습도 못 보겠구나.

정확하지 않는 발음으로 엄마를 부르는 소리도 못 듣겠지······.”

바깥에서 어서 나오라는 소리가 요란했다.

“민상궁! 아기가 우니 마지막으로 젖은 물리고 나가겠다고 전해다오. 마지막으로······.”

젖을 물리니 아쉽게도 예쁜 울음소리가 그쳤다. 그리고 새까만 눈망울에 눈물 덩어리를 매달고

어느새 방글거리며 젖을 빨기 시작했다. 한 달된 아기 같지 않게 숱 많은 검은색 머리카락에

새하얀 얼굴이 딱 염의 축소판이었다.

“서방님의 어린 모습은 내 접하지 못하였는데, 보지 못했던 서방님의 아기 모습을 너를

통해 보는구나. 고맙다.”

배불리 먹고 난 아기는 젖을 그대로 입에 문 채로 잠이 들었다. 민화는 유모에게 아기를 건넨 후

하얀 소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다시 아기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마당에는 신씨가 안절부절 하며

서서 울고 있었다. 민화는 그녀의 품에 아기를 안겼다. 그리고 딸을 죽이려 했던 자신을 위해

울어주는 신씨에게 며느리로서 마지막 큰 절을 올리고 일어났다.

그녀의 발은 중문으로 향하다 말고 길을 돌려 쪽문이 있는 뒷길로 향했다. 그곳엔 여전히 굳게

닫혀 진 쪽문이 있었고, 붉게 물든 단풍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무도 다니지 않게 된 길엔

다른 낙엽들과 같이 단풍잎도 떨어져 애초부터 사람이 다니지 않았던 것처럼 길을 숨기고 있었다.

때마침 떨어지던 단풍잎 하나가 민화의 하얀 어깨에 떨어졌다. 손가락 두 개로 집은 붉은 것을

옛날의 그때처럼 입에 맞춰보았다.

“서방님, 붉은 단풍잎이 꼭 불꽃같아서 설레어요.”

민화는 손에 든 붉은 단풍잎을 옷 속의 품에 넣고 의금부판사가 기다리는 사랑채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멍석이 깔려 있었다. 그녀는 염이 있는 사랑방 문을 쳐다보며 그곳에

무릎 꿇고 앉았다. 의금부판사는 두루마리를 펼쳐들고 큰소리로 읽었다.

“죄인 민화공주는 들어라! 8년 전 세자빈시살사건 때, 개인의 욕심을 위해 사사로이 생명을

앗는 주술을 직접 행한 죄를 묻노라! 이에 너의 직첩을 회수하고, 노비형을 선고한다!

단, 왕족임을 감안하여 태형은 면제하노라!”

“아기는? 태어난 아이는 어찌하라 하시었느냐?”

“원래가 허 염의 씨니, 이 가문의 자식이라 하시었습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자신이 노비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보다 아이의 안전에 마음 놓는 민화였다. 그리고 안심하자마자,

찾아오는 슬픔은 염과의 헤어짐에 따른 것이었다. 이미 오래전 부부간의 인연은 끊어졌지만

한 울타리 안에는 있었는데, 이제는 그나마도 아니게 되었다. 민상궁도 소복을 입고 민화를

따라 가기 위해 나왔다. 의금부 관원들이 어서 나가자고 재촉하자 민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염이 있을 사랑방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 하지만 숙여진 몸은 그대로 멈춰 앉아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느라 일어서지 못했다.

사랑방에 앉아있는 염도 민화와 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흐느껴 우는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입을 막은 주먹을 이로 깨물었다. 차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대문을 빠져나가 듯

멀어져 갔다. 염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버선발로

마당을 달려 대문으로 갔다. 그의 눈에 이미 모든 일행이 나가고 닫히고 있는 대문이 보였다.

그 앞에 멈춰선 염은 팔을 뻗어 대문을 짚고 서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땅에는 떨어진

그의 눈물자국이 선명히 새겨졌다.

“염아.”

염은 신씨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품에는 강보에 쌓인 아기가

세상의 떠들썩함과는 상관없이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안아보렴. 신기할 정도로 널 많이 닮았단다. 순하고, 예쁜 것이 마치 네가 다시 태어난 것만 같아.

아마도 태중에 있을 때 공주께오서 너만 닮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어서 일게야.”

아기를 안아 든 염의 손길은 서툴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아기는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고 잘도 잤다.

“자면서도 내가 네 아비인 줄을 아는 것이냐? 정말······순하구나. 반갑다, 의야.”

허 의. 태어나던 날 지어놓지만 전하지 못한 이름이었다. 의는 좋은 꿈을 꾸는 것인지,

아니면 아비의 말에 답을 하는 것인지 입에 살짝 웃음을 머금었다. 하인이 염의 신발을 가져다

발아래에 놓았다. 신을 바로 신은 그의 발길은 조용히 쪽문이 난 뒷길로 향했다. 여전히 첩박힌

상태의 쪽문이 있었고, 문 너머에 붉은 단풍이 보였다.

“공주, 붉은 단풍잎이 마치 꽃과도 같아서 슬픕니다. 죄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한 제 마음은

변하지 않겠지만, 공주를 사랑하는 마음 또한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염은 조심스럽게 아기를 품에 꼬옥 안고 민화가 보고 싶은 마음을 숨겼다.

긴 길을 걸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양 땅을 벗어난 민화는 이렇게 오랫동안 걸어본 것도

처음이었다. 지쳐 다리가 꺾여도 호송하는 의금부관원들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노을이 지는

저녁 무렵이 되니 발에 물집이 짓물러져 이젠 더 이상 걸을 수조차 없었다. 결국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의금부판사도 더 이상 걷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잠시 동안 쉬겠다며

시간을 주었다. 민상궁은 자신이 지친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민화부터 평평한 돌에 앉혔다.

민화는 잠시 쉬는 동안에도 염과 아기와 헤어진 슬픔으로 인한 가슴이 걷기 힘든 다리보다

더 아파서 눈물을 흘렸다. 지친 그녀들 앞으로 제일 앞서가던 의금부판사가 다가와 품에서

봉서 하나를 꺼내 건넸다.

“상감마마께오서 내리신 봉서이옵니다.”

민화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서 봉투를 열고 읽었다. 글이 엄한 오라비의 목소리로 들렸다.

<민화공주 보아라. 지금 네가 걸어가고 있는 길은 14살의 어린 여인이 부모와 오라비,

그리고 정혼자를 두고 죽은 자가 되어, 천한 신분이 되어 울며 갔던 길이다. 혹여 너의 아기를

두고 가는 슬픔을 느끼느냐? 한 달간의 정으로 인해 느끼는 슬픔의 양이 얼마이냐?

너로 인해 14년간의 정을 쌓은 자식을 잃은 너의 시부와 시모, 그리고 지아비의 슬픔은

지금 네가 느끼는 슬픔보다 얼마나 더 컸을지 헤아려 보아라. 너의 죄로 인해, 그리고

죄를 벌하느라 내리는 벌로 인해, 너는 네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두 번 죽였음을 잊지 말아라.

아무리 힘들어도 네 삶을 포기하지도 말아라. 그렇게 된다면 넌 네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세 번 죽이게 될 것이다. 죄를 씻고자 한다면 부디 삶으로 용서를 구하라.>

민화는 자식을 잃은 시부와 시모의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 누이를 잃은 염의 마음도 되었다가,

자식의 죄를 가려주기 위해 대의를 버렸던 부왕의 마음도 되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훤의 마음이 되었다가 모든 것을 잃은 연우의 마음이 되었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선 더 많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정전 앞에는 대비한씨가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이번 왕의 처사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었다.

민화는 그녀의 딸이었고, 왕의 누이였다. 그런데 공주를 관비로 보낸 것은 대비뿐만이 아니라

조정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대신들의 요구였으면 대비가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반대였다. 이미 사건 종결이 나고 모두 잊어가고 있는 것을 왕이 들춰내서 대신들이

반대하는 것을 설득하여 벌까지 내렸다. 결코 공주라 하여 죄를 눈 감아 준 것이 아니라

피해자를 최소화하기 위해 출산할 때까지 벌을 연기한 것이란 왕의 말은 그 어떤 것보다

대신들의 마음을 두렵게 만들었다.

훤은 대비가 바깥에서 울며 소리치는 것을 무시하고 언제나 다름없이 정사를 돌보았다.

석강을 끝내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사정전을 나갔다. 앞에 앉아 있는 대비 쪽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나친 훤은 빠른 걸음으로 강녕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왕의 뒤를 향해 대비가 울부짖었다.

“주상! 세상의 도의가 이런 것이옵니까? 누이에게 허물이 있다하면 제일 먼저 그 허물을 덮어주고

가려주어야 하는 것이 핏줄의 도리가 아니옵니까?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주상!”

강녕전의 마당에 선 훤은 그제야 애써 힘주고 있던 어깨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고

북쪽의 하늘을 보며 옆의 운에게 말했다.

“운아, 이로써 난 불효자가 되었구나. 아바마마께오서 할마마마와 민화공주를 용서하고

지켜 달라 하시었는데, 그것이 안 되면 아바마마를 용서치 말라 하시었는데······.

난 결국 아바마마를 벌한 것이다. 하지만 알아주시겠지. 민화를 벌한 것은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

왕으로서 한 일이란 것을. 그 부탁은 미래의 왕이 아닌 아들에게 한 부탁이었을 것이니.”

훤은 운을 쳐다보았다. 무표정한 건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쁜 놈.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그럴 것이다 라던가 뭐, 달리 할 말은 없는 것이냐?”

“상왕마마께오서 윤언하시었을 때 소신, 그 자리에 없었사옵니다. 허니, 그 뜻 또한 판단해선

아니 되는 것으로 아옵니다.”

훤은 그를 붙잡고 뭘 말하겠느냐는 표정으로 웃었다. 하지만 그가 사심이 들어가지 않는 시선으로

곁에 있어주는 것이 든든했다.

“옆에 있는 신하는 말이 없어 외롭게 하고, 북촌에 있는 신하는 벼슬만 내리면 모조리

고사하여 외롭게 하는구나.”

훤은 강녕전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날과 다름없이 그 뒤를 돌아 교태전으로 들어갔다.

그곳 마당에는 연우가 노심초사하며 그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도 공주의 소식을 들었지만

왕의 정사에 간여하지 않는 성품 때문에 홀로 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훤은 연우의 걱정 어린

눈빛을 보자 이제껏 참고 있던 감정들이 올라와 얼른 고개를 돌리고 교태전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때였다면 그녀를 품에 안는 것을 먼저 했겠지만, 오늘 만큼은 얼른 단둘만 있는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상석에 앉은 훤은 목소리에 힘을 주고 애써 왕의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동안 미뤘던 일을 처리하였소. 이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기에 중전께선 그 어떤

말도 삼가시오.”

연우는 왕의 옆에 앉아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쓰다듬듯 누르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삼가할 말이 없사옵니다. 오직 상감마마의 아픈 가슴만이 염려되옵니다.”

“나는······. 나는······.”

연우의 표정과 손길이 그의 가슴을 어루만지자 훤은 굵은 눈물을 쏟아냈다. 바깥에서 싸움이

붙어 덩치 큰 놈, 작은 놈 가리지 않고 모조리 패고 들어온 꼬마가, 엄마가 다정하게 다친

곳을 쓰다듬으면 갑자기 눈물콧물 다 쏟아내며 울음을 터트리는 것처럼, 훤도 그녀의 위로에

왕으로서의 긴장감을 풀고 감정을 가진 나약한 한 인간이 되었다.

“내가 잘 한 것이라 하여주시오. 당연히 그리 하여야 한다 말해주시오. 아바마마께 죄송해도

그리 하여야만 한다고······.”

연우는 그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를 따라 같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공적이 뚜렷하면 아무리 탐탁지 않고 미천한 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상을 주고, 과실이

뚜렷하면 근친이나 총애하는 신하라 할지라도 반드시 벌주면, 소원한 자들은 열심히 일할 것이고,

측근자는 오만해질 수 없을 것이라 하였사옵니다<한비자中>. 상감마마께오서 행하시는

그 어떤 일도 옳지 않을 수가 없사옵니다. 단지 신첩이 이렇게 눈물을 보이는 것은 누이를

벌한 한 사내의 마음과 하나인 아내이기 때문이옵니다.”

그녀의 말에 훤은 인간으로서, 그리고 왕으로서 위로를 받았다. 그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끌어 당겨

입술을 겹쳤다. 그리고 안은 채로 말했다.

“어이하여 이 시간까지 석수라가 들어오지 않는 것이오?”

“그것이······. 소주방에 일러 석수라는 강녕전으로 들라 하였사옵니다.”

왕이 왕비와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제껏 교태전에서 주로 식사를 해왔다.

그런데 갑자기 강녕전으로 가야 한다니 이상했다. 연우는 그의 궁금함을 덜어주었다.

“대비마마께옵서 아무 것도 드시지 않고 저리 계시온데, 어찌 며느리가 되어 먹을 것을

가까이 할 수 있겠사옵니까? 신첩은 대비마마와 함께 할 것이니, 상감마마께옵선 강녕전에서 드시옵소서.”

평소 공주가 저렇게 된 것이 중전 때문이라며 며느리를 좋게 보지 않는 대비였지만, 연우는

시모를 정성으로 받들었다. 대비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아들이 지나치게 며느리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의 일이 터졌으니 앞으로 연우가 더 힘들 것 같아 훤은

미리 마음이 쓰였다.

“나 또한 어마마마와 함께 할 것이니, 석수라를 치우라 하시오.”

“하오나.”

“또한 그대와도 함께 할 것이오. 그대와 함께하지 않는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오.”

훤은 소리를 높여 바깥에 말했다.

“강녕전에 들 석수라는 필요 없으니 치워라 일러라!”

그리고 연우를 안은 팔을 풀지 않고 미소로 말했다.

“난 또 장방(長房, 왕비소속의 서리실)의 금고가 비어 굶는 것이라 생각했소.”

연우가 깜짝 놀라 훤을 보았다. 금고가 비어있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모를 것이라 생각했소? 하늘 아래에 이 내가 모르는 것이 뭐가 있겠소. 모른다면 좋은

왕이라 할 수 없을 것이오.”

“그, 그것이······. 어찌 아시었사옵니까?”

“암행을 보낸 이가 올린 장계에 한양 외곽에 배고프고 아픈 백성들을 도와주는 곳이 있어

알아보았더니, 혜민서 관리들이었다고 쓰여 있었소. 수상히 여겨 그 자금의 출처를 조사했더니

장방에서 흘러나온 돈이라 하였소. 마침 내수사에 일러 내탕금을 풀려고 했는데 내가 할 일이

없어져서 기분 나빴더랬소. 혹여 왕비도 암행어사를 파견하는 것이오? 어찌 한양 외곽의 일을 알고 있소?”

“궁을 드나드는 무수리들이 하는 이야기를 얼핏 들어, 알아보았을 뿐이옵니다.

상감마마께 의논코저 하였으나, 만기에 누를 끼칠까 하여······.”

“이번이 처음이 아님도 알고 있소. 왕인 나의 눈을 피해 갈수 있을 것이라 여겼소?”

훤은 손을 더듬어 연우의 치마를 올리고 속치마를 잡아당겨 보이게 했다.

“왕비의 속치마에 기운 흔적이 있음은 교태전 상궁과 나만이 알 수 있을 것이오.”

연우는 들킨 것이 부끄러워 치마를 당겨 속치마를 덮었다. 그리고 속치마보다 더 아래를

더듬는 그의 손길을 막았다.

“내가 그대를 현부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나를 성군이 되게 하는구려.”

“상감마마, 눈길과 손길이 어성과 어울리지 않사옵니다.”

훤이 본격적으로 속곳을 벗기려 하자마자, 바깥에서 아뢰는 소리가 들렸다.

“상감마마, 중전마마. 내의원에서 어의가 들었사옵니다.”

말소리와 동시에 훤의 몸이 뒤로 벌렁 넘어갔다. 굉장히 기분 잡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내 곧 내의원이란 말에 정신이 들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바깥에 소리쳤다.

“내의원이라니? 누가 아픈 것이냐?”

상궁이 조심스럽게 들어와 말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중전마마께오서 조금 전 마당에서 어지럼증을 느끼시는 것 같사와

급히 어의를 청했사옵니다.”

“어지럼증이라니!”

불호령과도 같은 훤의 고함소리에 상궁은 더욱 몸을 움츠렸다. 연우가 당황하여 그의 팔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

“아니옵니다. 아주 잠시 신첩이 치맛자락을 잘못 밟았사온데 김상궁이 과하게 생각한 것 같사옵니다.”

훤은 그녀의 말은 듣지 않고 김상궁에게 고함을 질렀다.

“어서 어의를 들게 하지 않고 무엇 하는 것이냐!”

김상궁이 방과 방 사이의 발을 내리고 어의와 의원들을 들게 했다. 그들은 왕의 모습을 보자

놀라서 벌벌 떨며 네 번의 절을 올렸다.

“절은 그만하고 어서 진맥부터 하라! 중전이 어지럼증을 느낄 때까지 대체 내의원이란 곳에서

무얼 한 것이냐? 이따위로 하고 녹봉을 챙겨 먹었단 말이냐!”

“소, 송구하옵니다.”

연우는 훤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의 손을 잡고 토닥여주었다. 하지만 그는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모두 처결을 되었다지만, 예전의 저주주술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연우가

아픈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의 손을 힘껏 쥐었다.

의녀와 상궁이 들어와 중전의 팔목에 하얀 명주실을 묶었다. 그리고 길게 실을 빼내 발 너머의

어의한테로 건넸다. 하지만 여전히 왕은 중전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상감마마!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중전마마와 떨어지지 않으시오면 옳은 진맥을 할 수가 없사옵니다.

잠시만이라도 부디······.”

훤은 우물쭈물 거리며 연우와 떨어졌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녀를 안고 있었다. 어의가

명주실의 끝을 팽팽하게 당겨 잡고 오랫동안 맥을 살폈다. 그런데 실을 잡은 손이 서서히 떨리면서

그가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발이 가리고 있었기에 훤은 그가 땀을 흘리는 것을 볼 수 없었지만,

주위 사람들의 당황한 분위기로 말미암아 눈치 채고 말았다.

“중전의 몸이 어떠한가? 어찌하여 맥을 이리도 오래 짚는단 말이냐!”

“상감마마, 어성을 낮추어 주시오소서. 신첩의 몸이 너무도 건강하여 맥으로 어떤 병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당황한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만약에 맥이 이상하다면 그것은 마마의

뇌위(雷威)에 놀라 심장이 뛰었기 때문일 것이옵니다.”

아무리 연우가 환하게 웃으며 말해도 훤의 불안은 가라앉지 않았다. 명주실이 어의의 손을

벗어나 다른 수의의 손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의 손에 한참 있던 실은 또 다른 의원의 손에 건너갔다.

그리고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리다가 일제히 몸을 바닥에 엎드리며 소리쳤다.

“상감마마! 감축, 또 감축 드리옵니다.”

중전의 몸이 안 좋은데 감축이라니, 왕은 진노가 하늘에 닿으려고 하자마자, 이성과 마주쳐

정신을 차렸다. 이내 들려오는 그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중전마마께오서 회임하신 것이 확실하옵니다. 종묘사직에 이 같은 기쁨이 또 어디 있겠사옵니까.

실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훤은 오랫동안 멍하게 있다가 품에 연우를 포근하게 안는 것으로 넘쳐나는 행복을 표현했다.

그리고 둘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훤은 앞의 수많은 상소들 중에 몇 개를 들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한없이 어리게만

보이는 원자이기에 어서 강학청(講學廳, 원자의 3~4살부터 7~8살까지의 교육기관)을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그다지 달갑지 않아서였다. 아직 세 살 밖에 안 된 아들을 마음껏 뛰놀게

해주고픈 아비의 마음이기도 했다. 말 없는 왕의 분위기를 살피며 대신이 입을 열었다.

“상감마마. 신, 홍문관부제학 아뢰옵니다. <안씨가훈>에 이르기를 자식은 어릴 때부터 가르치라고

하였사옵니다. 원자께서는 비록 세 살에 불과하나 벌써 천자문을 읽고 쓰니, 이는 하늘이

우리나라에 복을 주려 하는 것이 분명하옵니다. 어서 강학청을 설치하여야 하옵니다.”

“그저 글을 읽고 쓸 뿐 그 뜻까지는 모르고 있다. 중전께서 워낙에 책을 가까이 하기에 따라서

흉내 내는 놀이를 한 것뿐인데 이리 호들갑 떨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아직은 장난치느라

바쁜 원자가 아닌가. 그러니 현재의 원자에게는 보양청으로도 충분하니, 일 년 뒤에 설치해도 늦지 않다.”

왕의 떨떠름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대신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얼마 전에 왕비가 두 번째

회임을 하였기에 그녀의 힘을 덜어주기 위해서도 물러나선 안 되었다.

“신, 사간원대사간 아뢰옵니다. 국왕의 세자에게 가르침이 신중해야 하는 이유는 위로는

조종의 왕업을 이어받고, 아래로는 신민의 안위가 달려 있는데다가, 국가의 흥폐와 존망이

언제나 그에게 달려있기 때문이옵니다. 그러하니 신들도 어찌 신중하게 생각지 않았겠사옵니까?

지금 원자가 비록 어리기는 하지만, 옛 사람이 일찍 교육시키던 방법에 비하면 이미 늦었사옵니다.”

훤은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 개구쟁이처럼 뛰어 다니던 원자가 중전 옆에서 보고 들은 것을

장난삼아 대신들 앞에서 자랑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세 살 밖에 안 된 아이가 천자문을 읽고

쓰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겠지만, 위치가 원자였기에 신하들이 들떠서 빨리 본격적인 교육을

시켜야 한다며 입을 모으게 된 것이다. 원자가 영민하기는 많이 영민했다. 그리고 장난치는데

있어서는 과거의 훤을 능가했다. 훤도 아들이 기특하고 자랑스러웠지만,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더 뛰어놀게 하고 싶었다.

이윽고 그의 머리에 얼마 전 교태전에 놀러왔던 염의 아들, 의가 떠올랐다. 원자보다 한 살밖에

많지 않았지만, 점잖고 예쁘게 생긴 것만 아비를 닮은 것이 아니라, 소학의 문장을 척척 대며

말하는 투가 여간 똑똑한 것이 아니었다. 연우가 팔을 뻗어 안으려고 하자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예를 지켜야 한다며, 작은 두 손을 모으고 네 번의 절을 앙증맞게 올리는 것을 보고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원자는 훤을 많이 닮아 천방지축인 편이었다.

“허 염의 아들이 제법 똑똑하지 않소?”

깊은 생각에 빠진 왕의 말에 대신들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도 의가 신동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천성이라기보다는 염에 의해 만들어진 신동이었다. 의는 젖을 먹을 때만 유모의 품에 가고

그 외에는 모두 염이 키웠다. 그 젖먹이를 품에 안고 글을 읽었으니 의가 보고 듣는 것은

염의 글 읽는 소리 외에는 없었고, 그의 행동과 말투까지 그대로 닮을 수밖에 없었다.

훤이 번쩍 떠오른 생각으로 인해 기분 좋게 말했다.

“허 염의 아들을 우리 원자의 배동(陪童, 놀이동무)으로 선발하면 어떻겠는가? 강학청보다

훨씬 교육에 도움이 될 것이야.”

같이 놀 수 있는 친구는 훤이 어릴 때부터 너무도 부러워하던 것이었다. 그래서 아들에게는

그런 어린 시절을 주고 싶었다. 지금 원자에게 있어서 친구라고는 바빠서 눈 마주칠 시간도

없는 운밖에 없었다. 그것도 목마 태워 달라 조르고 졸라 한번정도 그의 어깨에 올라가는 것이

놀이의 전부였다. 어린 아이가 무서워하기 딱 좋은 그가 왜 좋은지 알 수는 없지만, 운은 원자에게도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에 반해 저번처럼 대비가 보고 싶다고 청해서 어쩌다 한번 의가 궐에

들어왔다가 가면 원자는 다음 날 까지 의를 다시 데리고 오라고 울며 지냈다. 그리고 의와

함께 있으면 곧잘 점잖은 척 하기도 했다. 분명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대신들도 왕의 생각이 옳다고 여겨 더 이상 강학청을 몰아붙이지 않고, 대신 내년에는 반드시

설치할 것을 약속받고 물러났다. 그리고 그들의 머릿속에 왕과 마찬가지로 강학청 원자의

스승으로 허 염보다 적격인 인물은 떠올리지 못했다. 단지 그가 벼슬을 고사하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대신들이 물러나자, 훤은 강제로 떠밀어 명나라 사신으로 보낸 염과 그 일행이 돌아온다는

보고는 없었는지를 승지를 불러 물었다. 명나라와 조선 간의 수학경시대회가 있어 두 달의

시간이면 충분하였을 텐데, 이미 돌아와야 할 시간에서 보름을 넘기고 있었기에 걱정되었다.

벼슬을 고사만 하던 그도 명나라를 꺾을 인물이 달리 없었기에 마지못해 대회에 참석하러 간 길이었다.

더군다나 명 황제가 조선에서 은광을 찾으라는 분부에 대해 거절을 하러 간 길이기도 했다.

은본위제였던 명나라는 많은 은을 필요로 했기에 옛날부터 금과 은 조공에 대한 압박이 심했다.

그런데 세종이 조선 땅에는 금과 음이 나지 않으며, 현재 있는 것들은 외국에서 건너온 것이란

거짓 문서를 보냈고, 그것으로 인해 금은 조공은 면제를 받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그들은

수시로 은광을 개발하란 압박을 넣어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수학경시대회를 빌미로 그 압박을

무마시키기 위해 사신을 보낸 것이었다. 승지는 걱정하는 왕에게 다행히 선발대로 오는 일행 중

몇 명이 오늘 도착 할 것이라고 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이들 중 한 명만이 우선

성격 급한 왕 앞에 엎드리게 되었다.

“잘 다녀왔느냐? 어찌 이리도 늦은 것이냐?”

“그것이······,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명나라 황제께오서 허 염을 붙잡고 좀 더 있다 가라

청하는 바람에······. 그나마도 뿌리치고 온 것이옵니다.”

훤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염을 조정에 끌어내기 위해 사신으로 보냈다가 그것을 빌미로 벼슬자리를

안기려는 술책이었는데, 의도하지 않았던 황제의 눈에 띄게 한 것이 불안했다.

“아무래도 수학경시대회에서 명을 꺾었나 보구나.”

“네, 상감마마께도 보여드리고 싶을 정도로 멋졌사옵니다. 허 염 홀로 그 많은 명의 학자들

콧대를 꺾는데······. 구고현법(피타고라스의 정리) 문제까지 나왔다 하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로 인해 훤은 자신의 불안이 구체화됨을 느꼈다. 그래서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래서 황제가 그를 눈 여겨 보았단 말이지?”

그는 왕이 미리 보고를 받은 것처럼 말하는 것에 당황하여 더듬거리며 말했다.

“네? 아, 그렇사옵니다. 아니, 그것보다도······. 대회가 있은 날 저녁에, 황제가 명나라의

자존심이 상한다며 사신으로 간 저희들과 시문대결을 하자 청하여서······.”

“뭐라? 그래서 허 염이 또 나갔단 말이냐?”

“신들 중, 그보다 시문에 능한 자가 어디 있겠사옵니까? 그래서 신들이 부탁해서 허 염도

마지못해······. 황제께서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 쪽 세 명과 명나라 시인 세 명과 그렇게

대결 하였사옵니다. 우리 쪽 세 명이라고 해보았자, 허 염 혼자나 마찬가지였지만.

하지만 황제께서 허 염의 시를 더 높게 평하여 이겼사옵니다. 그러니 노여움을 푸시오소서.”

훤이 심각한 표정으로 아무 말이 없자, 그는 위로한답시고 다시 말했다.

“허 염의 시를 들으시며 황제께서 ‘눈과 귀와 마음이 같이 감동하였다’며 극찬을 하였사옵.”

“닥쳐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두 모른단 말이냐! 눈치 없는 것들 같으니. 더 듣지 않아도
은광문제는 무조건 우리 쪽 말을 믿어주었겠군.”

“어, 어찌 아시었사옵니까? 상감마마의 성명은 과히.”

“그만 되었다. 물러가라.”

왜 왕이 화가 났는지 미처 헤아리지도 못한 그는 울먹거리며 물러났고, 승지는 왕의 눈치를

살피며 궁금한 듯 물었다.

“하온데 눈과 귀와 마음이 감동하였다는 건 무슨 뜻이옵니까? 마음은 시에 감동했다는 것 같은데······.”

“그의 아름다운 외모와 음성, 그리고 인품이 모두 마음에 든다는 뜻이다! 아아, 어쩌자고

허 염은 황제까지 홀리고 다니는지. 명에서 은광이 아니라, 그를 내놔라 하겠구나. 이런 일엔

양명군 이상의 적격이 없는데, 그가 없으니······.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구나.”

왕이 머리를 짚으며 서안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명에선 조선 땅에 나는 것들은 다 자기네 것인 줄로만 안다. 심지어 사람까지. 그러니 염과 같은

인재는 반드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조선 땅에 두느니, 차라리 능력을 썩히더라도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고 볼 것이니. 도저히 고민되어 못 있겠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잠시 나갔다 오겠노라.”

승지들은 시간을 짐작해 보았다. 과연 왕이 슬슬 중전을 보고 싶어 할 시간이었다. 조계가

끝나고 윤대가 시작되기 전에 언제나 중전 얼굴 보러 뛰어갔다가 오는 왕을 그들도 모르고

있진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하루에 몇 번씩 일하던 중에 왕이 잠시 빠져 나가면 대부분 중전에게

가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모른 척 해줄 뿐이었다.

오늘은 그나마 사신으로 간 선발대의 윤대는 미리 받았으니 오래 참은 셈이었다. 정식 윤대가

끝나면 또 다시 왕은 부리나케 뛰어 주수라를 핑계로 중전에게 달려 갈 것이다. 승지들이

짐작한대로 훤은 뛰어서 교태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에서 일어나는 연우를 힘껏 끌어안았다.

“사신으로 다녀온 자의 보고를 받느라 오지도 못하고, 중전이 보고 싶어 숨넘어가는 줄 알았소.”

“오라버니도 무사히 돌아왔다 하옵니까?”

“아직 도착은 못했지만, 무사한건 확실하오. 아참! 의를 우리 원자의 배동으로 두면 어떨까

하는데 중전의 생각은 어떻소?”

연우는 그의 품에서 조금 떨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허리를 감은 훤의 팔은 그대로였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원자는 미래의 세자가 되옵니다. 하니, 다양한 가문의 다양한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되옵니다. 한데 저의 오라버니와 의도 외척이옵니다.

그러니 멀리하는 것도 좋지 않겠사옵니까?”

단정한 연우의 말 끝에 훤은 입술을 포개고 말과 혀를 번갈아 굴렸다.

“내가 원자의 배동으로 의를 생각한 것은 파를 나눈다던가, 학문을 익히게 한다거나 하는

목적이 아니오. 사람을 사귀고 예의를 배우게 하려는데 첫 이유가 있소. 한데, 우리 원자 또래 중에

의와 같이 예의 있고 의젓한 아이가 어디 있겠소? 제멋대로의 떼 부리는 또래들과 어울리게 한다면

도리어 그 아이들을 따라 버릇없어질 것이고, 그것은 미래 조선의 누가 될 것이 분명하오.”

연우도 훤을 따라 말과 혀를 번갈아 굴렸다.

“상감마마의 뜻이 정히 그러하다면, 신첩 또한 마음을 다해 따르겠나이다. 대신 신첩의 청이

하나 있사옵니다.”

“중전의 청이라면 하나밖에 더 있겠소? 민화공주의 복권.”

“삼년 넘는 세월이 흘렀사옵니다. 신첩이 알아본 바로는 옆에 있던 민상궁 마저 세상을 떴다 하더이다.

의를 배동으로 두고 싶으시다면, 의에게 어미를 돌려주시오소서.”

훤은 재빨리 연우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확고부동한 태도로 말했다.

“의는 공주가 키우지 않았기에 지금 그리도 뛰어난 신동으로 큰 것이오!”

“아무리 의젓하고 예의 있는 아이라고는 하나, 어미를 보고 싶어 하는 그 마음까지 의젓하겠사옵니까?

민화공주께선 이미 몸으로 마음으로 죄를 뉘우쳤다 사료되옵니다. 벌이라는 것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겠사옵니까? 단지 죄에 대한 처벌만으로 벌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만을 취하는

것이옵니다. 하지만 죄인으로 하여금 벌로서 죄를 내려놓고 다시 죄를 짓지 않게 한다면

모든 것을 취하는 것이옵니다. 용서는 왕 만이 할 수 있사옵니다. 지금 민화공주는 용서에

필요한 벌을 충분히 이행하였사옵니다.”

훤이 미처 답하기도 전에 바깥에서 윤대를 해야 한다는 상선내관의 재촉이 들어왔다.

그래서 연우더러 추우니 나오지 말라고 하고, 다리를 툴툴거리며 방 밖으로 나갔다.

엉덩이 한번 자리에 붙여보지 못하고 가는 셈이었다. 섬돌 위의 신을 신으려다 발고 훤은

몸을 돌려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연우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기도 전에 허리를 숙이고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쥔 뒤,

눈과 코, 뺨, 이마, 턱에 입술 도장을 찍고, 마지막으로 입술과 혀에 긴 도장을 남기고 뛰어 나갔다.

훤은 행여나 익선관이 벗겨질세라 한손으로 내리 누르고 사정전까지 최선을 다해 뛰었다.

그 덕분에 운과 내관들도 따라 뛰어야 했다. 그리고 상선내관은 허구헌날 이런 뜀박질을

하기엔 자신이 늙은 것을 왕이 알아주었으면 하고 빌었다.

며칠 후, 염의 일행이 한양에 도착했다. 가을에 떠났는데 벌써 겨울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염은 허한 눈동자로 빙그레 미소를 보였다. 아무래도 하늘이 눈을 뿌릴 기세였다. 그는 왕에게

먼저 가야하는 법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천추전에 들었지만, 마음은 두 달 넘게 홀로 둔

아들에게 가 있었다. 비록 조모인 신씨가 지극 정성으로 의를 돌본 걸 알고 있지만 염은 뼛속이

아플 만큼 보고 싶었다. 왕은 그의 속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허 염! 수학과 시문을 동시에 휩쓸고 왔다는 건 이미 들었소. 그리고 은광 문제도 넘어갔다고?”

“다행하게도 그러하옵니다, 상감마마.”

“그리고······황제가 그대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였다던데, 맞소?”

염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해 하며 말했다.

“조선의 사신이라 다른 나라의 사신들에 비해 후대한 것 같사옵니다.”

“혹여 황제가 그대에게만 살짝 명나라의 관직을 주겠다고 하지 않았소?”

염은 깜짝 놀랐다. 황제가 염에게만 은밀히 말한 것이기에 일행 중 이 일에 대해 아는 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내, 훤의 추측임을 깨달았다.

“네. 하오나 황제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거절하고 돌아왔사옵니다.”

“왜? 조선의 관직보다 더 많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인데?”

“소신이 부귀영화나 공명을 바래었사옵니까? 소신, 조선의 죄인은 될지언정 명나라의 관리는

되고 싶지 않사옵니다.”

“조선의 죄인보다 조선의 관리가 더 좋지 않소?”

염은 입을 다물었다. 이제 더 이상 관직을 거절하는 것도 왕에 대한 불충에 이를 지경이었고,

이번의 사신 건은 더욱 그의 입장을 난처하게 했다.

“얼마 전 내가 중전에게 물었소. ‘백성에게 있어서 어찌하면 좋은 임금이 될 수 있겠소?’라고.

헌데 우리 중전이 이리 답하였소. ‘<육도삼략>에 이롭게 하고 해롭게 하지 말며, 이루게 하고

실패하지 않게 하며, 살게 하고 죽게 하지 말며, 주어야 하고 빼앗지 말아야 하며, 즐겁게

하고 괴롭게 하지 말며, 기쁘게 하고 노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적혀있사옵니다’라고.

아아······, 참으로 멋진 중전이지 않소?”

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인지 까맣게 잊고 연우를 생각하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을 하던 연우가 발가락의 핏줄까지 곤두설 만큼 예뻐서 참지 못하고 강녕전에서 일을

벌이고 말았던 기억도 떠올랐다. 순간 천추전 안의 분위기가 팔불출 왕 때문에 싸늘해 진 것을 깨달았다.

“아참! 내 지금 중전에 대해 말하려던 것이 아니었지? 어흠! 내 그 말을 듣고 허 염이란 백성에게

있어서 난 최악의 임금이구나 하고 생각했소. 아무튼, 이번 일에 대한 상벌은 백관수의

(百官收議, 전체 관료를 대상으로 의견을 물어 여론수렴 하는 것)하여 결정할 것이오.

그리고! 혹여 명나라의 첩자가 그대를 보쌈 해 갈지 모르니 검술을 더 연마해 두시오.

하긴, 은근히 그대의 검술도 뛰어나지?”

“소신 비록 검을 잡긴 하오나, 여지껏 풀 한포기 제대로 베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미약하기에

감히 검술이라 칭하기도 민망할 지경이옵니다.”

염이 왕의 농담이라 생각하고 웃으며 한 말에, 훤은 도리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또 겸손이오? 예전, 부원군의 난이 있던 날, 그대의 사택에 잠입한 검객 세 명을 처리했다 들었는데.

관아에 들어온 시신에 대한 기록이 분명 검상으로 적혀있어, 내가 심장을 쓸어내렸던 기억이 있소.”

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머릿속은 그때의 기억으로 달려갔다. 수많은 기억 들 중,

바로 전날의 설의 모습이 가장 뚜렷이 머리에 그려졌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그의 표정을 보고

훤은 의아했지만, 그 검객들은 누군가가 염을 지키기 위해 죽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누군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란 추측도 했다. 염은 왕에게

절을 올린 뒤, 휘청거리는 마음을 안고 일어났다. 물러나는 그를 향해 훤이 말했다.

“교태전에 들렀다 가시오. 그곳에서 그대 아들이 간식을 먹고 있다고 하니.”

염이 완전히 물러나자, 훤은 다른 사신들과 마주했다. 도화서의 화원과 관상감의 지리학훈도였다.

그들은 천추전 바닥에 지도그림을 펼쳤고, 그 위에 수 십장의 그림을 겹쳐가며 차례로 펼쳐보였다.

명나라로 가는 길마다 상세하게 지형을 살펴 기록하고, 지도로 만들라는 왕의 밀지대로 한 것이었다.

훤은 그것들을 꼼꼼하게 점검하면서 명나라에 대한 여러 가지를 물었다.

교태전에 들어서니, 막 마당으로 연우와 원자, 의가 나오고 있었다. 그중 의가 제일 먼저

부친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그런데 바쁜 마음과 달리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차갑게 언 바닥에

아플 정도로 넘어지고 말았다. 궁녀들이 더 놀라서 의에게 다가가 일으키려고 하자, 염은 그들의

행동을 멈추라며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뒷짐 지고 기다렸다. 의는 벌떡 일어나

고사리 같은 손의 흙을 탈탈 털고, 옷도 마저 털었다. 그리고 복건을 고쳐 쓰고 옷매무새를

정돈한 뒤 염에게 달려가 작은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혀 짧은 소리로 점잖게 말했다.

“아버지, 다녀오셨습니까? 소자, 보고 싶었습니다. 많이많이.”

염은 그의 눈높이에 맞춰 자리에 앉아 환하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우리 의가 가장 좋아하는 것, 그리고 이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의는 까르르 웃으며 염의 목에 매달려 입에 뽀뽀를 했다. 그러자 원자도 그에게 달려가 목에

매달렸다. 염은 깊숙하게 허리를 구부리며 원자와 중전에게 인사를 한 뒤 일어섰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는 와중에도 염은 설의 일로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중전마마, 예전 일 중에 궁금한 것이 있사옵니다.”

“갑자기 무엇이 궁금하세요?”

“혹시 설······이란 아이를 기억하시옵니까?”

연우의 얼굴이 슬픈 모양을 그리며 땅을 향했다. 염도 그녀의 표정을 따라 슬픈 모양을 그렸다.

연우가 눈동자에 눈물을 맺어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도 그 아이의 죽음을 알게 되셨군요. 저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민화공주께서

좋은 곳에 묻어준 것을 뒤늦게야 알고, 제가 성숙청에 일러 진오기굿을 해주었어요.

그것밖에는 해줄 것이 없었습니다. 가엾게도 오라버니를······.”

“제가 어리석게도 좋은 곳으로 가느냐고 물었사옵니다. 웃기에 그런 줄로만 알고······.”

염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고 바랬다. 어쩌다 눈이 와 그녀가

떠오르면 좋은 곳에서 씩씩하게 잘 살고 있을 것만 같아서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었다.

그런데 이제는 눈만 오면 그녀가 떠오를 것이고, 그녀가 떠오르면 좋은 곳으로 가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에 답하던 그녀의 환한 미소가 같이 떠올라, 미소가 아닌 슬픔만 짓게 될 것 같았다.

염은 의를 데리고 경복궁을 나갔다. 그리고 남여(정3품의 승지와 각 관청의 참의 이상이 타던 포장이나
덮개가 없는 작은 가마)에 의만 태우고 그는 걸어서 북촌을 향했다. 하지만

출발하자마자 아까부터 우중충하던 하늘에서 뿌리는 눈을 만났다. 이제 더 이상 기분 좋게

미소 지을 수 없는 눈이었다.

“아버지, 눈입니다. 와! 예쁘다.”

“그래, 예쁘게도 내리는 눈이구나. 의야, 이 아버지가 언제나 당부하던 말을 기억하느냐?”

의는 남여에 앉은 채로 정확하지는 않은 발음이지만 또박또박 공손하게 대답했다.

“위험하고 높은 곳에 오르지 마라. 또 깊은 늪이나 산골에 가지 마라. 몸을 다쳐 부모가

걱정할까 해서이다.<소학中>입니다.”

“왜 그 말을 당부하는지 아느냐?”

“네! 소자가 다치면 아버지가 훨씬 더 많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기특하구나. 그리고 네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무엇이냐?”

“아무리 작은 악이라도 악한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선한 일은 작다고 해서 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조열(照烈, 유비현덕)이 그 아들을 훈계하여 한 말. 소학中>입니다.”

“아버지가 너의 옆을 비운 동안 네가 행한 악한 일과, 선한 일을 말해다오.”

의는 큰 눈을 꿈뻑거리다가 숨을 들이켠 뒤, 그동안의 일들을 최대한 조리 있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이좋은 부자는 끊어짐 없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염은 언뜻

누군가가 그의 집 모퉁이 뒤로 숨는 것이 보였다. 어스름이 깔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여자 같았다.

점점 내리는 양이 많아진 눈 때문이었는지 설이란 생각도 스쳤다.

그래서 그는 의와 가마꾼들을 집 안으로 들여보내고 홀로 모퉁이 쪽으로 숨어서 다가갔다.

죽은 여인이 살아온 것은 아닐 테지만, 만약에 귀신이라면 따스한 말이라도 건네주고 싶었다.

염은 모퉁이를 돌아 마주친 여인을 보고 그만 자리에서 언 채로 굳어졌다. 민화였다.

초라한 행색으로 낡은 보자기를 끌어안고는 추위에 오돌 오돌 떨고 있는 작은 형체는 자세하게

살펴보지 않아도 심장이 먼저 알아보는 민화였다. 그 어떤 말도 못하고 멍하게 서 있는 염에게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갈 곳이 없어서······. 가고 싶은 곳이 여기뿐이어서······.”

여전히 입을 다물고 서 있는 그에게 다시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상감마마께오서 용서하시어 관비에서 풀어주셨사와요. 그래서······.”

말없이, 표정 없이 서 있는 그가 두려웠다. 하지만 그런 작은 감정들이 묻힐 만큼 그가 보고픈

감정은 더 컸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의 얼굴은 안보였다. 눈에 가득 차고 넘쳐 내리는 눈물이 그의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민화의 발걸음이 멈췄다. 자세하게 보이진 않아도 무표정하게 있는 그가 가엾고 안 되어 보여

더 이상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돌아지지 않는 걸음을 애써 떼며 염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를 등 뒤에 두고 멀어져

가는 민화의 눈에선 주체 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발길에

모든 것을 맡기고 걷다가 결국 더 이상 염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견딜 수가 없어 자리에 멈춰 섰다.

하지만 돌아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포근하게 끌어안았다.

세상의 모든 추위와 죄악을 좇아내 주는 그, 민화와 같이 눈물을 흘려주는 염이었다.

“저 지금 더럽고······냄새가 나는데······. 손도 다 갈라지고 못생겨졌는데······.”

“깨끗하고 하얀 눈이 모든 것을 덮어줄 것입니다.”

민화의 귀에는 그의 울음소리가 목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그리고 민화를 등 뒤에서 안고 있는

염에게로 마치 그의 행복을 기원하듯 그들에게로만 눈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같은 눈이 내리는

경복궁에선 감쪽같이 사라진 왕을 찾는 내관과 관상감 관리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교태전으로 들어갔을 거라 짐작은 하지만, 양의문에 세워둔 감시병들은

왕이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관상감에서 오늘은 중전이 회임 중인데다가 눈까지 오니, 특히 더 강녕전에 있어 달라 부탁드렸건만,

잠시 적설량을 예측하러 한눈 판 사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들은 합궁일을 무시한 왕의

빈번한 교태전 출입으로 인해 낭패를 보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낭패는 이미 태어난 원자와

현재 태중에 있는 아기씨의 입태시를 알 수가 없어, 사주를 정확하게 분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강녕전과 교태전 사이의 담 중간쯤에서 보초병이 왕의 흔적을 찾았다며 작은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우르르 몰려간 그 곳엔 담 지붕의 눈이 그 부분만 떨어져나가고 없었다. 그리고 높은 담 너머로

발을 돋워 보니, 하얀 눈 위에 성큼성큼 띄어져 찍혀 있는 왕의 발자국이 교태전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저기 둘러보았지만, 분명 어디에선가 왕을 지키며 긴 머리카락을

날리고 있을 운의 모습은 그들 눈으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사람들의 귀가 한곳으로 모아졌다.

멀리 교태전에서 가야금 선율이 들려오고 있었다. 왕이 중전을 위해 친히 뜯는 조선 제일의

가야금 선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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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September 2011 Topic Proposal The topic that I am using from the Affluenza book is Stuff Wars at the Airport on page 35. The angle that I am approaching this topic is from an airport employee stance. I worked at an international airport in several different capacities and think it provides a unique perspective. My guiding questions will be the basic such as: * What is the topic? * Why has this topic been chosen? * What is the focus of the topic? * How is the perspective and understanding conveyed to the reader? The concerns for this topic are the type of information that can be found other than personal experiences but believe that resources can be found in several areas on the internet, online databases, and library. Deciding on how specific is another concern, but believe that staying within the confines of the stuff wars specifically at the airport will keep the topic within the boundaries of the project. It is difficult to determine the time frame it will take to research the topic. It will take approximately two weeks to come up with an appropriate thesis and outline for the project. It could take two weeks to focus the topic on specific questions to ask but as soon as that is complete, it is easy to make a list of factual and interpretive questions for the reader to understand the research. After all has been completed, the research has a good foundation and is ready to start. To complete the essay will take one week to compile, rewrite, and finish...

Words: 474 - Pag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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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ts of Goods Sold

...of the inventory. When everything is said and done it equals out to the cost of the goods that have been sold. Cost of goods sold is the accumulated total of all the costs used to create a product or service in this case it is which has been sold. All of these costs fall into a general sub category of direct labor as well as the materials, and overhead stock. The cost of goods sold is considered to be a part of the labor and payroll taxes. Beginning Inventory |+ |Purchases |- |Ending Inventory |= |Cost of Goods Sold | |$600 |+ |$1500 |- |$400 |= |$1700 | |$800 |+ |$2400 |- |$600 |= |$2600 | |There is also a first in and first out method that helps with keeping track of the inventory. So when things come in the stuff that is older should move forward and the new stuff should go in back. I believe that when it comes down to it the way we handle the sales of the products then the company should not have a problem with keeping track of the funds coming in and going out. Below I have added the example of how it should work. I have done two different...

Words: 272 - Pag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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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rm 531 Week 2 Individual Reflection Journal

...living situation and her background. When he was done talking with the client, we started the paperwork. I started asking the questions on the forms, my supervisor would step in to explain something or ask more questions. After the initial paperwork was filled out we had to go over forms that the client had to sign. Although I was able to remember some of the stuff on the forms, I was unable to remember everything on them, so my supervisor stepped in to better explain the forms. In the end the intake took around an hour to complete. After the intake, my supervisor stated that I did okay, just that I need to work on being able to explain LINK services and what the paperwork states, as well as being more comfortable exploring with questions. During the intake, I felt pressure to be able to explain things properly, which is partially the cause of forgetting things. I also felt that I wasn’t really given that much opportunity to explore some of the questions because my supervisor took over. It was almost as if I was thinking too much into it and was too worried about during the intake properly that mind spaced on some of the stuff that I was supposed to go over. As far as the NASW Code of Ethics, there are a few values or principles that were evident in the situation. The first one deals with competence, although it is important to be knowledgeable and apply past experience into practice, it can be hard sometimes. Since I am still in the learning process, I need to accept that not everything...

Words: 737 - Pag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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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oxone Prescriptions

...Make sure to bring down laptop, laptop charger, wireless mouse, cell phone and flash drive – copy over all the stuff from the “Kevin’s Stuff” folder on Doug’s computer to the flash drive. ***Call Dr. Reddy back first thing in the morning if I haven’t heard by then (336-662-8185) 1. Rizwan Ali: Advanced Psychiatric Services 2727 Electric Road, Suite 103 Roanoke, VA 24018 540-772-1974 Have to go for first appointment to be assessed then go back for a second appointment to be inducted into the program. Insurance will most likely pay for first (assessment) appointment, but the suboxone is on a cash only basis. $500 for first month and price will come down each subsequent month. Includes group sessions. a. First appointment (assessment) – Monday, Feb. 6 @ 1pm b. Second (suboxone induction) – Wednesday, Feb. 8 between 4-6pm Someone is supposed to call back after 11am tomorrow, Wednesday, Feb. 1, to let me know if I’m a good candidate and to confirm appointments. * ***If I haven’t heard anything by first thing in morning (9AM), call Dr. Reddy’s office to determine if she can change the existing appointment (tomorrow, Wednesday, Feb. 1 @ 5pm) from a regular appointment to a suboxone appointment. * **Someone is supposed to call back after 11am tomorrow (Wednesday) to verify appointments from Dr. Rizwan Ali’s office (540-772-1974) * *In morning, call the rest of the physicians I haven’t gotten in touch with, including the physicians listed...

Words: 340 - Pag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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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dom to Comment

...against the group happened when I was in college. I worked at clothing store at the local mall. One of the requirements for working there was that you had to wear the clothes that were sold there or clothes similar to them. After working there for a month or so I stumbled upon a few of the girls taking clothes off the shelf and putting them in the back room. I was then told that sometimes the girls there would “borrow the clothes and wear them to work in that day and then put them back on the shelf for customers to buy. I did speak up and tell them I thought it was wrong. They then informed me that even the manager of the store did it. That she would even get merchandise and take it home and keep the tags there and pay for some of the stuff a little bit along. I was in shock. I proceeded by calling the home office and calling the district manager and reporting the issue. A few weeks later the district manager came in the store. I was then fired. All the girls told the district manager that I was causing arguments within the group and I was a trouble maker. I did find out later that the home office did their own investigation in the store and all of the girls even the manager ended up getting fired. Even though I was fired from the job, I felt good about doing the right thing. I could have easily conform to the group for the sake of my job but due to my ethical beliefs I could not do...

Words: 353 - Pag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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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uff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the stuff is in here ...

Words: 1500 - Pages: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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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ry of Stuff Review

...“The Story of Stuff” is a short video created by The Story of Stuff project in 2007. In the video, writers Annie Leonard and Jonah Sachs describe the process of turning natural resources into consumer goods, then into waste. The writers describe a seemingly linear five-step process: extraction, production, distribution, consumption, and disposal. Leonard and Sachs describe a carefully-scripted culture of unsustainable consumption and waste. The extraction phase of “The Story of Stuff” refers to the removal of natural resources such as timber, natural gas, coal, oil, and water. The writers emphasize the unsustainability of this phase, especially in the United States. The video states that the United States holds 5% of the world’s population but uses 30% of the world’s natural resources and creates over 30% of the world’s waste. This is a staggering statistic. Four percent of the United States’ forests remain. FOUR PERCENT. How much longer will it be before trees are things read about in storybooks (digitally printed of course, as there are no more natural resources to harvest.) The production phase is described as the addition of toxic chemicals to natural resources in order to produce the “stuff” we want. Please note the use of the word “want,” not “need.” The authors note that over 100,000 synthetic chemicals are commercially available today and are regularly used in production. Of those 100,000 synthetic chemicals, very few have been tested in a significant way to measure...

Words: 1034 - Pages: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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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ry of Stuff: a Review

...The Story of Stuff: A Review The Story of Stuff is a 20-minute film aimed at raising awareness on the dangers of excessive human consumption. Presented by Annie Leonard – an activist for consumerism and environmental sustainability (Story Of Stuff Project, 2013) – this video provides a simple yet well researched explanation on the ‘behind-the-scenes’ management of the life-cycle of common items consumed daily in the United States. From mining and manufacturing to distribution, consumption and waste, this presentation takes viewers on a journey to explore many missing fragments that are hardly ever reported in the system (Leonard, 2009). Watched by over 12 million people worldwide, and translated into over 15 languages (Roosevelt, 2010), Leonard has received both applauds and criticisms for her unapologetic condemnation of humans (especially Americans) – for their excessive consumption and wasteful habits – and her rather conspicuous allegation of the devious relationship between the government and private corporations. One significant issue that Leonard (2009) presented in the video was that, due to human activity, natural resources around the world are rapidly diminishing. Natural resources such as minerals and trees are constantly mined and felled to satisfy men’s insatiable appetite for more goods. The presentation revealed that in the last decade, one-third of the world’s resource base has depleted. Furthermore, it is said that only four percent...

Words: 854 - Pages: 4